2017년 7월 27일 목요일_플러싱 수양회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마지막 때 성도의 삶 >
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3:3-5, 개역한글)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0-13, 개역한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라>
저희들은 휴거를 바라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주님이 공중에 오시는날입니다. 그때 우리가 공중으로 끌어올려져서 우리가 믿음으로 뵙던 주님의 영광을 눈으로 볼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주님의 몸처럼 변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구원받은 성도들을 다시 만날것입니다. 먼저 믿음으로 하늘에 먼저간 사랑하는 가족, 친족, 형제들, 베드로, 사도요한도 볼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날을 우리가 바라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또 말합니다.
휴거 되었을때 주님앞에 서게될 그날을 바라보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1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이라고 되어 있고 10절에 보시면 <주의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과 주의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은 새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의가 영영토록 거하는 날입니다.
주의 날은 도적같이 임하는 날이며 하늘이 사라지는 날입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원소들이 허물어져 버리는 날입니다.
다른날을 또 보겠습니다. 먼저 사람의 날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를 찾아보겠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고전4:3, 개역한글)
제가 개혁한글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판단받는것을> 줄을 달아서 이렇게 번역할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날에게나> 사람의 날이 있습니다.
두번째 날을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10,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네가지 날을 말합니다. 첫번째 사람의 날이 있습니다. 사람의 시대입니다.
두번째 그리스도의 날이 있습니다. 세번째 주의 날이 있습니다. 네번째 하나님의 날이 있습니다.
사람의 날은 그 시대에는 사람이 최종적인 재판장입니다. 사람들이 판단하고 집행되는 시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휴거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시고 모든 믿는자들이 죽었건 살았건 부활해서 영광의 몸을 입고 주님앞에 서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주님께서 우리가 이땅에서 어떻게 섬겼는가를 가지고 보상하실것입니다. 하나님이 상주시는 날입니다.
이 날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날이 끝나고나면 주의 날이 시작됩니다. 주의 날은 7년 환란으로 시작됩니다.
7년 환란의 전반부는 평화로 안전하다고 하고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대환란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것입니다. 그들이 피하지 못할것입니다.
마치 산모의 고통처럼, 처음에는 고통이 약하고 그 주기가 길다가 아이가 태어날때가 되면 그 고통이 점점 심하고 그 간격이 짧아지는 것처럼 주의 날이 임할것입니다.
주의날은 천년왕국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통치하시는 날입니다. 주님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이땅을 다스리는 날이 올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 지구 하늘과 땅을 없애버리실것입니다.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만드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진화를 믿는사람들은 생명이 처음에 어떻게 생겼는가를 난처해 합니다. 그래서 단세포 동물에서 점점 고급화 되었다고 설명하는데, 최초의 단세포 생물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설명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래서 빅뱅이론이 나옵니다. 무언가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서 여러가지 물질들이 섞여서 생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이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보니 복잡해 진것입니다.
그러나 빅뱅은 창조할때 생긴것이 아니라 창조를 파괴할때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하늘과 땅을 원소를 풀어버릴것입니다.
그때 큰 소리로 이 하늘과 땅이 갑자기 폭발해 버릴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날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날은 영원토록 의가 거하는 나라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그 날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소망하느냐가 오늘 우리의 삶의 태도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는것이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잠깐 다시 베드로후서로 오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3:12, 개역한글)
하나님의 날은 의가 거하는 날입니다.
주의날은 결국에는 이 하늘과 땅이 해체되는 날입니다.
<모든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저희들이 이날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오늘 이 시대, 사람의 날을 통과해 가면서 어떠한 교훈을 받아야 하는가를 보려고 합니다.
처음에 노아의 홍수때에 물로 심판하시고 이제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두번째 심판은 불로 심판하십니다.
불로 심판하는 것의 그림자가 소돔과 고모라를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하신 것입니다.
미리 보여주는 이 불심판을 통해서 교훈을 받아보려고 합니다.
불심판의 대표적인 경우가 롯입니다. 롯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때 롯도 따라 나갑니다.
롯은 신실한 성도옆에 있어야 하는 성도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을 따라갈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브라함과 헤어지고나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그는 혼자 독립적으로 행동하면 안됩니다. 영적인 성도옆에서 선한 영향을 받아야 함께 영적인 길을 걸어갈수 있는 성도입니다.
그가 왜 아브라함과 헤어지게 되었습니까? 물질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좁은 땅에서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투지 말자 합니다. 그래서 헤어지게 됩니다.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요시아 왕도 대제사장이 살아있을때는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고난후 우상숭배로 넘어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행동하면 안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어질때, 차이가 있습니다.
롯은 자기눈을 들어봅니다. 그리고 요단쪽을 선택합니다. 그는 가축을 기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물이 있는곳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요단들을 보고 그가 이렇게 평가합니다. <애굽과 같고 여호와의 동산과 같앗더라>
애굽과 같았다는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기근이 있을때 잠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에 있으라고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생애를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나안을 벗어나서 애굽으로 갑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 말씀 밖에 나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 할때 제일먼저 드는것이 두려움입니다.
어떻게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겠습니까?
자기에게 일어날 미래를 어떻게 알고 통제하겠습니까? 그가 그래서 아내 사라에게 누이라고 하자고 합니다. 거짓말을 합니다. 이 거짓말이 결국에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바로가 사라를 데려갑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사라가 바로의 왕궁에 가버린 저녁,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자기가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신실하셔서 사람은 신실하지 못할찌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어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바로에게 나타나셔서 사라를 돌려보내게 하고 그집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로 인하여 세상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축복의 통로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저주의 통로가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바로가 재앙을 만납니다. 그래서 사라를 돌려보냅니다. 돌려보낼때에 바로가 "내가 너의 수치를 씻어준다"하여 소와 양을 잔뜩 줍니다.
애굽은 롯에게있어서 짧은 기간안에 많은 재물을 얻은 장소입니다.
그는 요단들을 선택하고 애굽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기가면 짧은시간안에 많은 가축들을 만들어 낼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물질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내 자녀들이 거기서 어떻게 영적으로 살아야 할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롯은 그 대가를 지불합니다.
사위들이 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또 그는 요단들을 여호와의 동산과 같다고 봅니다. 이것은 그의 잘못된 선택입니다. 잘못된곳을 선택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슬펐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롯이 내 자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이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보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바라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한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것이 옳아 보여도 거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어도 아닌것이 있습니다.
롯이 소돔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매우 높은자리까지 올라간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판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집을 샀을것입니다. 그는 이 집이 불타는것을 봐야 합니다.
이 소돔이 전쟁에 휩싸이고 그가 전쟁에 포로가 되었을때 그는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를 생각해서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군을 공격해서 소돔사람들이 다 구해 옵니다.
아브라함 덕분에 롯은 삽니다. 그러나 성경에 안타깝게도 롯은 아브라함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겨서 소돔사람과 재물들을 회복시켜서 옵니다. 그때 멜기세댁이 먼저오고 소돔왕이 마중나옵니다.
소돔왕이 이렇게 제안합니다. "소돔성에 있는 모든 재물은 당신이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사람만 내게 주십시오." 이 소리를 롯이 들었을 것입니다.
롯이 소돔에서 무엇을 얻었든지 간에 소돔성의 전체의 재물은 아브라함에게 제공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거절합니다.
왜 거절합니까?
이것으로 내가 부를 얻었다라는 말을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가진 부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것이다" 라는 간증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은 그 어떤것도 소유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태도를 취하는 아브라함에게 소돔 온성의 재물이 제안되고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롯은 소돔성에서 물질을 추구하다가 다 타버립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타버리는 것을 보라>
'롯이 그렇게 수고하고 애써서 모은 모든재산이 타버리는 것을 보라' 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것들, 애써서 모은것들이 타는것입니까? 아닙니까?
주님오시는날 타버릴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타버릴것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베드로후서가 우리에게 도전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쌓고 있습니까?
두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오신다는것을 조롱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주님께로 와서 질문합니다. "부활이 있으면 복잡한 일이 생깁니다. 형제 일곱이 있었는데 첫째가 아내와 결혼해서 자식없이 죽고, 유대의 원칙을 따라 둘째가 형수와 결혼했는데 둘째도 자식없이 죽고 일곱이 다 죽었는데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두가지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첫째는 성경을 모른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
여러 조롱하는 사람들은 첫번째로 성경을 모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상한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하였을때, 아브라함이 살아있느냐, 죽어있느냐?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요,산자의 하나님이라.>
이 구절을 하나 들으셔서 죽은자의 부활을 입증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들었던 아브라함의 하나님 속에서 주님은 부활을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성경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몰랐습니다.
부활때에는 차원이 다른세상으로 바뀐다고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입니다.
제가 휴거 이야기를 하면, 안믿는 친한 친구 중의 하나가 이렇게 물어봅니다.
"너 그거 정말 믿는거냐?"
왜냐하면 초자연을 부인하는 과학적 세계속에 갖혀사는 사람에게 성경은 말도안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압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속에서 부활을 끌어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이세상을 어떻게 바꿔버릴수 있는지 아십니까?
그 능력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던지고 있는 도전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에 대해서 하나만 더 지적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3:14, 개역한글)
베드로는 두가지를 부탁합니다. 하나는 점도없고 흠도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이해해보겠습니다. 점도없고 흠도없는것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점도없고 흠도없는것은 주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을 바라보므로 그날이 우리의 소망이므로 그 소망을 가진사람마다 이땅에서 주님을 닮는것이 그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평강 가운데> 입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7-11, 개역한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4:2-3, 개역한글)
그리스도인의 삶은 베드로에 의하면 둘로 나뉩니다.
구원받기 전과 후 입니다.
베드로는 죄를 짖는것은, 세상적으로 사는것은 구원받기 전으로 족하다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구원받기 전처럼 그렇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후의 삶은 길지 않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깝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일찍 구원받은 성도도 있고 늦게 구원받은 성도도 있습니다. 그래서 좀더 일찍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몇년이 남았든지간에 우리의 공통된 태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옛날식의 삶을 살아감으로 이시간을 쓸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시간은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는 자들만이 사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론입니다.
그 방법은 세가지입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을 향해서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성도들을 향하여는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교회를 향해서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후 우리 남은 인생을 생각할때 그 삶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숙한 시간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할 엄숙한 세월입니다. 그래서 근신해야 합니다.
저희들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은 진지합니다.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하늘과 땅을 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귀중한 것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며 얼마나 값진 시간인가요.
그래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심각하고 진지하고 무게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즐거워하고 내마음에 들면 좋게 살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진지함이 기도하는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을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가까이 두시면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조금 더 앞으로 나가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기도하라>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왜 잤을까요? 슬펐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다는것에, 3년이나 따라다녔던 주님이 가셔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이 그 마음을 가득채웠습니다.
사람의 몸이 너무 큰 슬픔속에 있을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잡니다.
그래서 그가 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그날이 주님과 있는 마지막날인것을 알았더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기도부탁했던것을 알았더라면 자지 않았을텐데라는 후회가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주님께서 내려오시면 더이상 기도할수 없습니다.
저희들에게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특권,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야하는 이 놀라운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특권을 사용하고 가야합니다.
그다음 두번째, 8-9절은 성도들과의 관계입니다.
성도들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를 덮는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부분은 오해가 있으면 안됩니다. 모든죄를 덮는것이 아닙니다. 어떤 죄는 가서 돌이키도록 지적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죄는 덮어줘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함입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습니다.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할때가 있을 것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연약한 것에 대해서 다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같은 연약을 어떻게 해결하도록 주님께서 말씀하셨는가를 알고 그것을 말씀대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내 육신적인 생각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 외롭고 배척되는 세상에서 성도들을 용납하고 쉬게 하는것은 성도들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접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접대할때 원망없이 해야 합니다. 원망있게 한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 시몬이라는 바리세인입니다.
그는 주님을 자기집에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발씻을 물도주지 않고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않았습니다.
한 죄인인 여자가 와서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대접은 그냥하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지키고 있어서 이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알아주고 격려해줄수 있는 것은 성도들 뿐이기 때문에 접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원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르다 입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접대했습니다. 귀한 일이고 잘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를 내버려 두나요?"라고 했습니다. 잘못한 것입니다.
성도들간에는 이와같은 사랑과 접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교회를 향해서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준것입니다.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준것입니다.
내가 은사를 쓰지 않으면 성도의 유익을 내가 빼앗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쪽 은사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봉사쪽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물으면 저는 크게 카테고리를 두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어떤사람이 오면 가서 말해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말을 잘 해주지 못해 행동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 카테고리를 넣으면 구도자에게 잘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것도 둘입니다. 구도자에게 말하는 분이 있고 구도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다음 성도쪽이 있습니다. 구도자보다 성도의 어려움을 알고 뭔가를 해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로써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있거나, 행동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사는 항상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해서 하는것이 아니고 다른사람이 좋다고 해야합니다.
은사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은사를 따라 교회를 섬기지 않으면 몸이서지 않고 성도의 유익이 적어집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세가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남은 생애를 진지하게 생각해 나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특징 첫번쨰는 기도합니다. 두번째, 성도에 대해서는 사랑하고 접대합니다. 사랑은 덮는것으로 나타나고 접대는 접대 후에 기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번째, 교회에 대해서는 은사를 따라 섬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운 이 때에 저희들이 이와같은 삶을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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