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모임(요약글)/전의석 형제님(요약)

바울이 디모데에게

박이레 2024. 6. 16. 12:45

< 바울이 디모데에게... > 24년 6월 16일 일요일(요약2) / 전의석 형제님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2:1-13, 개역한글)

디모데후서 2장을 교제드리기 전에 그 배경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서신은 바울이 죽기 전에 기록한 서신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두번 감옥에 갇혔는데요. 한번 풀려난 후에 두번째로 감옥에 들어가고 순교하기 직전에 이와같은 서신을 남겨주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딤후1:15, 개역한글)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딤후4:16, 개역한글)

바울은 두번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요. 또한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을 많이 떠난것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4장에서는 다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바울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또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바울을 버리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바울의 이러한 어려움을 함께 하지 않고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1장에서는 특별히 바울이 반복적으로 고백하고 있는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8, 개역한글)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1:12, 개역한글)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딤후1:16, 개역한글)

"부끄러워" 세번 1장에서 말씀합니다. 8절에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가 이렇게 된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복음으로 감옥에 들어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16절에서는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어려움에 있는 바울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을 시원케 할수 있겠습니까? 자주 찾아가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고난당함을 함께 교제하고 마음을 시원케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이와같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주 기쁘게 이 찬송을 하는데요. 이 말씀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합3:17-19, 개역한글)

주님과 함께 하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항상 행복하고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열매가 없고, 소출도 없고, 양도 소도 없어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 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큰 문제는 저희의 삶에 주님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께서 함께 배에 타셨지만 폭풍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에게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배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까? 그들 가운데 주님이 계셨습니다.
침례요한은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는 제자들을 보내서 주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주님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부인하는 실패를 겪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절에서 본격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을 바울은 합니다. 1절에서는 "내 아들아" 3절에서는 군사, 경기하는 자, 농부, 등 여러 호칭으로 말합니다.
첫번째로 나오는 호칭은 아들입니다. 이 호칭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뭔가를 해서 얻을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가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뭔가를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자녀 삼으셨기 때문에 자녀인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그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2절에서는 충성된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충성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먼저 본을 보이신 좋은 형제님들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그래서 혹, 이와같은 형제님들이 먼저 주님나라에 가시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다른 사람을 말하고 가르칠수 있다고 합니다. 저희들이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나는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주님께만 배우겠다. 또 지역교회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독립적인 지역교회 가운데 교제가 있어야 하며, 먼저되신 형제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것이 필요함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엘리사를 선택해서 가르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세대와 세대를 통해서 동일하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실 때에 직접 그들에게 주실수 있으셨으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모든것을 하실수 있으시나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가르치셔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3절에서는 군사가 나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 가족을 기쁘게 하는 군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입니다. 어떤 군사가 좋은 군사일까요? 많은 형제님들이 군대에 다녀온 일을 자주 얘기하십니다. 군대에 다녀온 일이 고되고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군사는 여러 힘든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자기 생활이 없습니다. 세상은 저희들에게 계속 얽매이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들에게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군사가 되는것에 방해임을 말씀합니다.
5절에서는 경기하는 자가 나옵니다. 경기하는 자는 면류관과 연관됩니다. 경기하는 자는 상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무슨 경기를 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대에는 달리기가 가장 으뜸의 경기였을 것입니다. 달리기를 하던 사람이 결승선 앞에서 넘어지면 그 사람은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마땅히 달려야 할때 달리지 않으면, 그래서 선두권과 멀어지면 그것을 만회하기 어렵습니다. 매순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 시간을 아껴야합니다. 그리고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길을 버리고 자기가 생각한 길로 간다면 그 사람은 탈락입니다. 그 사람에게 면류관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으로 경기해야 합니다.
6절에서는 농부가 나옵니다. 그는 수고하는 농부입니다. 수고하지 않으면 받을수 없습니다. 모든 농부가 심기어진 열매를 염두해두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염두해두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2:13, 개역한글)

제가 제 자신을 생각해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이 다양한 형태로 저희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때로는 아들로서, 군사로서, 경기하는 자로서, 또 농부로서 부르고 계십니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불러주시는 각각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것들을 소망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연락을 소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저희들에게는 미쁨이 없지만 주님은 항상 미쁘십니다. 이와같은 주님이 오실 날이 다가옴을 소망해 봅니다. 주님을 의뢰함으로 이 일을 해 나간다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정받는 일꾼에 대해서 교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