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가지 평강 : 지역모임 안의 평강이 있는 이유 > 강성찬 형제님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부터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살전 5:1-28).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복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평안"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제 3절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가 있고요. 그리고 이제 13절에 "너희끼리 화목하라" 우리 말로는 이제 '화목하라'라고 돼 있는데, 이제 앞에 나온 이 '평안하다'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 그 평안을 기본으로 하는 단어입니다. "너희끼리 평안하라" 이런 말씀입니다. 또한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다시 한 번 평강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5장에 이 평안, 이 평강이 세 번 언급이 되는데요.
이 첫 번째 나온 평안은 '거짓된 평안'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거짓된 평안, 하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가운데 있었던 그런 평안을 말하는 것이 첫 번째 언급된 평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13절에 나온 "너희끼리 화목하라" 여기서의 평안은 지역 모임 안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이 세상은 거짓된 평안을 이제 말하고 그 가운데서 속아서 있지만, 실제 지역 모임 안에서는 이제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로 23절에 이제 "평강의 하나님" 여기서는 그 평강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세 가지 평강에 대해서 이번 시간에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제 첫 번째에 나온 '거짓된 평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날'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마는 4장 후반부에는 우리 주님께서 공중에 임하셔서 믿는 자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실 그 그리스도의 날, 그리고 성도들이 공중으로 들려올림을 받는 휴거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늘로 들려 올라간 후에 이 땅에는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거절한 자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이 이 5장 초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주의 날'입니다. 여기서 그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을 이 세상은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 심판이 있을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이 세상은 그 심판이 없을 거라고 말하고, 그래서 여기에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말하고 있는 이 거짓된 평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눈으로 보기에는 그 심판의 징조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주의 날, 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바로 그 직전에 거짓된 평화가 있을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주 유능한 정치 지도자가 이때 나타나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분쟁들 그 갈등들을 해결하는 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이제 조약을 맺어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제 진짜 문제가 없다. 이제 이 땅에 전쟁이 없다. 이제 그럴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에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가장 평안한 때이고 이 세상은 계속적으로 번영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이 심판이 도적처럼 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적은 자신이 언제 올 것을 예고하고 그 집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금이야말로 가장 평화로운 때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에 그때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마치 그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하는 고통이 갑작스럽게 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그렇게 임할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이 하나님의 심판은 여러분이 예상치 못한 때에 올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3절에 기록된 것처럼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의 두 번째 특징은 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순간에 이 땅에 남아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대피소에 들어가서 피할 수 있는 그런 심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심판이 부어지는 그 땅에 남아있다면, 여러분은 그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두 가지 특징입니다. 갑자기 임하고 그리고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다른 한 무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형제들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이고, 그들은 이 주의 날이 임하기 전에 먼저 하늘로 들려 올리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심판이 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빛의 아들이고 낮의 아들입니다. 심판을 받는 자들은 밤에 속하고 어둠에 속하였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먼저 믿은 자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그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리고 또한 그들은 그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은 그들은 "빛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지 않고 분명한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2절에 기록된 것처럼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룰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심판이 이를 것을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리고 정작 그들이 그 심판을 당할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그리고 그들은 그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심판이 임하지 않는데 깨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심판이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판에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 두려운 심판이 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제 잊어버리고 그냥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깨어 있을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주의 날이 이 땅에 임할 것이므로 더 깨어 있을 것을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심판 앞에서 깨어 있어야 되는 것은 그 심판을 우리가 당할 것이므로 그래서 두려워서 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믿는 자들은 그 노하심에서 건지심을 입을 것입니다. 9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우리는 그 주의 날 그 노하심에 이르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우리가 깨어 있을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0절에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다음에 바로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그 심판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는 이렇게 흘러가야 됩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마음 놓고 살아도 되겠네, 라고 그 사고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그 심판을 우리가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구나, 이 방향으로 흘러가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여기 그 목적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그 영원한 그 날들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의 날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 심판을 면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어떠한 고난을 받으셨는가,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셨는가, 그분은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말로 서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라라고 사도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지역교회 가운데서 해야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이 땅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계속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 번째로 해야 되는 말은 그 심판을 우리가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로 인해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로 우리는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8절에서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심판을 받지 않는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므로 여기 보면 우리가 빛의 아들이고 낮의 아들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존재 자체가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아들이라는 말은 그 아버지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사람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제 무엇무엇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제 사도요한에 대해서 이제 '우뢰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제 우뢰와 같은 그런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제 우뢰의 아들이라고 주님께서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우리가 빛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 빛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알고 그 진리대로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는 표현이 빛의 아들입니다. 또한 낮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대조되는 것은 이제 밤에 속한 자들인데, 밤에 속했다는 것은 취해 있다는 것입니다.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사람들,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준비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제 밤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낮의 아들은 이제 그와 대비되는 사람들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취해 있지 않고 깨어 있으며,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들이 낮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이 그 주의 날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이 아직 구원받지 않은 분이 이 가운데 있다면, 여러분이 아직 그 빛의 아들이 아니라면, 이 주의 날을 피하는 방법은 구원받고 그 빛의 아들이 돼서 여러분 자신이 존재 자체가 바뀌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것을 대비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심판의 날을 알아서 그날을 피하면 되겠지, 이렇게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를 원한다면 여기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빛의 아들로 낮의 아들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은 뭘 하냐면 낮에 속하였으므로 근신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흉내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제 두 가지 무기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흉배이고 이제 하나는 투구입니다. 그 흉배는 "믿음과 사랑의 흉배"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비슷한 그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장비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특별히 흉배에 대해서는 "의의 흉배"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흉배라는 것은 의로움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흉배는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의로움이 보호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 복음 시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은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에 그 마음이 부상을 당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의의 흉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의의 흉배를 여기서는 특별히 "믿음과 사랑의 흉배"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칭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흉배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보열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입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그 칭의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믿음의 흉배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랑의 흉배"라고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믿음의 흉배는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의 신분을 의롭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이고, 이 사랑의 흉배라는 것은 우리의 상태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실제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행동이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우리가 의로운 행동들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라고 선언해 주시는 그 의의 흉배, 그 믿음의 흉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이제 그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해서 의로움을 행하는 "사랑의 흉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낮에 속한 우리들에게 갖춰야 될 것이 바로 이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투구를 여기서 또한 말하고 있는데요.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에 손상이 됩니다. 그리고 이 투구를 쓰는 머리는 소망이 없을 때 망가집니다. 우리의 머리는, 사람의 머리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을 하는데, 언제 이 사람의 머리가 망가지냐면 꽉 막혔을 때,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그런 구멍이 없다라고 생각할 때 그때 머리가 망가집니다. 이 세상에 많은 머리에 손상이, 소망이 없으므로 그 손상이 일어나는 것을 이제 실제적으로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 구원은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점점 더 큰 복을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고 그리고 실망하지 않는 그 소망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우리에게는 우리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의 날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의 날이 분명하게 이 땅 가운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는 우리는 이 땅 가운데 삶을 이제 깨어서 근신하면서 믿음과 사랑의 숭배를 우리 몸에 붙이고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이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이 거짓된 평화를 말하는 세상 가운데서 이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역 모임 안에서의 평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절부터는 참으로 평화는 지역 모임 안에서 누린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을 읽어보게 되면, 지역 모임 안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실제로 14절에 보면 규모 없는 자들이 나오고 마음이 약한 자들이 나오고 힘이 없는 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세상은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이제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을 하고 있지만 이제 거기가 위험한 장소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 지원 모임 안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눈에 보이는 문제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규모 없는 자들, 마음이 약한 자들, 힘이 없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데 그 가운데 화목이 평강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놀라운 점입니다.
잠깐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신약 성경에서 교회가 언제 처음 언급되어 있는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교회라는 단어가 처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곳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여기 교회라는 단어가 처음 신약 성경에서 언급된 곳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주님께서 몸인 교회, 말하자면 총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주님 자신이 세우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주님이 직접 세우시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문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모든 구원받는 자가 더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여기에는 이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라는 단어가 두 번째로 언급된 부분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7절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여기 교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가 이제 신약 성경에서 교회가 두 번째로 나온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여기 문맥이 15절부터 읽어보자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그리고 밑으로 가서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우리는 여기 이 지역교회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20절, 그 말씀을 보게 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지역교회 가운데에 그들의 수가 소수일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진 곳에 주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그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여기 이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맥을 살펴보게 될 때에 거기에 죄가 다루어지는 문맥에서 이 지역 교회가 언급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역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다루는 존재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교회는 사람들이 세우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교회 안에는 문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 문제가 합당한 방식으로 해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가 차이점입니다. 이 세상에도 여러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 모인 곳에 항상 이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의 모임과 지역교회가 차이가 있는 것은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지역교회는 성경적으로 처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방법을 따라서 그 죄가 처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처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의 사람들의 모임은 그것이 처리되지 못하고 해체돼 버리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지역교회는 주님께서 분명하게 어떻게 그 문제들을 처리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고,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처리될 때에 그 모임은 계속 유지되고 오히려 주님을 간증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곳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제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시는 곳이고 문제가 없는 곳이지만, 이 지역에, 이 대전이라는, 또한 마포라는 지역에 세워진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사역자들이 그 지역교회를 또 모든 성도들과 합심하여 교회를 세우고 있으며 그리고 그 가운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합당하게 해결한다는 것을 거기에 지역 모임의 차이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 데살로니가전서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도 그 문제를 합당하게 해결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을 때에 거기에 이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은 이 세상의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는" 세상은 악으로 악을 갚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전치사를 보면 저 사람이 나한테 악을 행한 만큼 그대로 그 값을 치르게 한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세상의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무리 가운데에 악한 일이 발생한다면, 저 사람이 나한테 악을 끼친다면, 그가 한 만큼 그대로 갚아줘야지, 이제 그게 그 세상의 모임의 해결 방법입니다. 그런데 지역교회는 다른 해결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을 쫓는 것입니다. 항상 선을 쫓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악을 그냥 용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악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이제 봐준다,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선을 쫓는 것입니다. 악이 일어났을 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선을 쫓는 것, 선을 이렇게 쫓는다는 것이 이제 굉장히 적극적으로 선을 이루어낸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가운데 죄가 일어났지만, 그 죄로 인해서 이제 피해 입고 그것을 안 갚음하고 그래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죄 가운데서 오히려 마음이 낮아지고, 회개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그 회복을 경험하고, 그래서 그 모임이 더욱 견고해지고, 더욱 사랑을 경험하는, 그 선을 이루어내는 것이 이 지역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교회를 위해서 여기 보면 이제 인도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12절에 보면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이 지역교회에서 그 인도자들이 수고하고 또한 이제 다스리고 권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랬을 때에 이 지역 모임이 여러 문제들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고, 그리고 그때에 이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지만 이 지역교회가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생겨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교회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문제가 발생하지만 그 문제들을 올바르게 해결했을 때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인도자들입니다.
인도자들은 세 가지 책임을 이제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제 수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고하는 것은 땀을 흘리면서 피곤해서 지칠 때까지 일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 인도자들은 그와 같아야 됩니다. 인도자들은 많은 땀을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힘이 소진될 때까지 이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가 구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또한 다스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스린다라고 되어 있으니까, 이제 우리 말로 보면은 높은 자리에 앉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부려먹는 이제 그런 의미로 이제 생각이 되지만, 우리가 그 원어를 살펴보게 될 때에 다스린다는 말은 이제 앞에서 이끈다라는 말입니다. 이제 본을 이제 보인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리더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임의 인도자들을 이제 리더, 영어로 하면 이제 리더라고 부릅니다. 리더가 하는 역할은 이제 앞에서 이제 이끄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이끄냐면은 본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가르치는 말씀대로 살면서 그 본을 통해서 이끄는 것을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의 인도자는 이제 앞에서 본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제 권하는 것입니다. 이제 권하는 것은 말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말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그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제 영어로 하면은 이제 가이드를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제 말로 올바른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떤 것이 잘못된 길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이 가이드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자의 역할을 이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수고하는 것이고, 피곤하여 지칠 때까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일을 하냐면 본을 보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일을 하냐면, 이제 말로 어떤 것이 옳고 틀린 것인지 알려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13절에서는 그 인도자를 따르는 양들의 역할을 보게 됩니다. 그 모임이 평안하게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인도자의 역할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인도자를 따르는 양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양들의 역할도 세 가지를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 말로 쭉 읽으면 그것이 이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데요. 사도가 여기서 12절에 "너희에게 구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뭘 구하냐면 거기 이제 세 가지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마지막에, 첫 번째가 이제 "알다" 누가 그 인도자인지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 수고하는 자들을 알고, 누가 여기서 인도하고 있구나, 그것을 이제 알아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13절에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존경하냐면,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렇게 수고하고 본을 보이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그 역사를 통해서 그들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임의 인도자들에 대해서 이제 여러 가지 것들을 이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먼저 시선을 둬야 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모임을 위해서 역사하고 있는지, 그것에 우리는 시선을 둬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어야 됩니다. 어떤 인도자가 나한테 잘해주냐, 못해주냐로 귀히 여기거나 경히 여기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모임을 위해서 어떤 역사를 하고 있는지 그것을 바라봐야 됩니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하고 좋은 관계에 있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이 모임을 위해서 그들이 어떤 수고를 하고 있는지 어떤 역사를 하고 있는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도가 요구하는 것이 이제 우리끼리 화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평안한 가운데 지내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가지고, 그리고 그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사도가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포 모임이 또한 대전 중구 모임이 이러한 모임이 되길 바랍니다. 인도자들이 합당하게 인도하고 또 모임 성도들이 또 그 인도자들을 존경하고, 사랑 가운데서 존경하고, 그래서 그럴 때에 참 모임이 이제 평안을 누리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 모임 안에 규모 없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건 항상 이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규모가 없다는 것은 이제 정해져 있는 그런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를 자꾸 어긋내는, 마치 이제 군대에서 그 걸음거리를 맞춰서 행진을 하고 있는데 자꾸 이제 다른 발걸음을 내는 사람, 그것을 이제 규모 없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행렬에서 이제 이탈한, 이제 그런 자를 이제 규모 없는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한 방향으로 질서 있게 진행하고 있는데 이제 거기에 엇박자를 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 권계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권계하다라는 것이 이제 앞에서 이제 고하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들이 어떤 것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이제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말로 이제 그들에게 가르치고 경고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모임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 모임은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또 마음이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마음이 약하다는 것은 뒤에 나와 있는 힘이 없는 자들과는 구별되는 그런 단어입니다. 힘이 없다는 것은 그들 자체가 이제 육신적으로나, 또 영적으로 연약한, 아직 성숙하지 않은 이제 그런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그런 힘이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제 지지대 역할을 해줘야 됩니다. 그것이 이제 붙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약하다는 것은 그들은 성숙한 영적으로 힘이 있는 자일 수 있지만 최근에 어려운 일을 겪어서 마음이 낙심해 있는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자라 할지라도 이제 여러 가지 어려운 일 가운데서 마음이 때로는 낙심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런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위로해 주는, 안위해주는 역할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임 가운데 이것은 인도자들만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는 일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우리가 서로 이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행렬에서 이탈한 자들에게 말씀으로 경계해주고, 그리고 낙심해 있는 자들에게 또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리고 힘이 약한 자들을 우리가 계속 붙들어주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16절부터 22절까지는 이제 7개의 짧은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이제 현재형으로 명령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면 여러 가지 군사적인 비유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앞에서 보면 6절에 이제 "깨어 있는" 이제 보초병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또한 8절에 보면 여러 무기들을 장착하고 있는 군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그 한 부대를 이끌고 있는 인도자들, 그 부대장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그 군대 행렬에서 이탈해 있는 규모 없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16절부터는 이제 군사적으로 명령하는 짧은 그 명령들을 보게 됩니다. 이제 군인들에게 명령할 때는 짧게 짧게 이렇게 명령을 하는 것이죠. 그것이 여기 이제 7가지가 이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행진에 있어서 중요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앞에 나온 이 세 가지는 특별히 우리가 주님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제 감사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와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야에서 행진할 때에 계속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에게 아론에게 원망하였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고 원망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대해서 원망할지라도 결국에는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이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태도가 아니라 항상 이제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 가운데서, 그 일 가운데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우리에게 악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악한 일 자체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악한 일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악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나한테 허락하셨는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을 때, 그 가운데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태도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신 분이고 그리고 우리도 그러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기도하라"라고 되어 있는데 기도한다는 것이 그 말 자체가 '어디 앞에 나아가라'라는 말을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하라는 말 자체가, 그래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특별히 기뻐하는 것은 항상 기뻐하는 것인데, 기도하는 것도 항상 기도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되는데,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쉬지 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끊지 말고 잠깐 휴식기를 갖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항상 주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것을 의도적으로 멈출 때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때 주님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의도적으로 그것을 멈추어버리고, 잠깐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구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그렇게 하지 말고, 쉬지 말고 계속 주님 앞에 나아가라. 이것을 명령으로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뒤에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것은 이제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이 네 가지가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 세 가지는 우리가 이제 주님께 대한 태도를 말하는 명령이었다면, 뒤에 네 가지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귀하게 대해야 됩니다. 그 예언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소중한 것으로 귀하게 대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우리 마음속에 뜨겁게 역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우리가 바로 순종하고 움직이게끔 하는 그 성령님의 역사를 우리가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바로 순종하고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속에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거웠지만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 뜨거운 불을 꺼버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뜨겁게 역사할 때 우리는 그 인도하심에 즉각적으로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성령을 소멸치 않는 것입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헤아린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검증해 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진품인지 한번 분별해 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을 우리도 성경을 상고하고, 정말 그런지 분별해야 되는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항상 취해서, 분별해서 좋은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것도 역시 이제 말씀에 대해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모양을 좋은 모양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것이라면, 틀린 말이라면, 그것이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모든 모양"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제 자연스럽게 번역을 하자면 이제 '어떤 모양이라도'라고 하면 더 좋겠습니다. 그것이 악한 것이라면, 어떠한 모양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좋은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3절에 그 모든 평강의 근원이 이제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결국에 온전한 평강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영과 혼과 몸이 흠없게 보존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이것을 이루실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에 말하고 있는 그 평강에 속지 않고, 우리 지역 모임 안에서 지역 모임 안에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것을 성경적으로 해결하고 그 가운데서 평강의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우리가 온전히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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