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지역 교회에 와 보라!

박이레 2023. 12. 23. 04:45

< 지역교회에 와 보라! > 강성찬 형제님

요한복음1장 45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45-51).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23절입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3-25).

제가 이 두 군데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제 언뜻 봐서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 같은 두 부분인데요. 제가 이 두 부분에서 발견한 비슷한 점은 이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는 요한복음에서 읽었던 말씀은 이제 나다나엘이 주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주 예수님을 만날 때에 나다나엘이 경험하게 되는 이제 첫 번째는 주님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생각을 알고 계시다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읽었던 부분과 유사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지역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 교회에 아직 믿지 않은 자들이, 또는 무식한 자들이, 그 지역 모임의 집회 가운데 나왔을 때에 그들이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가 그들의 마음이 책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나다나엘이 주님께로 나오게 될 때에 그 나다나엘의 마음을 주님께서 드러내신 것처럼 이 믿지 않은 자들이 이제 교회에 나올 때에 그들의 마음의 생각이 이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두 번째로 나다나엘이 이제 그러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는 주님께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높이고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지옥 모임에 나온 이 믿지 않은 자들이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경험하였을 때 이제 그들도 그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경배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유사점을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이 지역 모임이 주님과 같은 그런 역할을 이 땅 가운데서 지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주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고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육체로 이 땅 가운데 계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이 지역교회에서 그리고 지역교회에서 주님께서 이제 인격적으로 이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리고 마치 주님이 이 땅 가운데 계셨을 때 하신 일을 지역교회 안에서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 실제로 그 주님을 육체로 경험한 사람들이 참 자신의 마음에 책망을 받고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고 주님께 경배를 드렸던 것처럼, 이제 주님이 이 땅 가운데 지금 안 계시지만 지역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 주님을 경험하고 자신의 마음이 드러남을 경험하고 그리고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이 지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제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번 시간에 자세하게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이제 요한복음 1장으로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빌립이 먼저 주 예수님을 만나고 그것을 자기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소개를 해 줍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분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분이다.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글이다. 그를 우리가 만났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거기 이제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 주님은 베들렘에서 태어나셨지만 이제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었습니다. 우리로 치자면 서울에서 먼 시골 동네, 이제 그런 촌입니다. 그런 곳에서 자라신 그런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우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렇게 멸시를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것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고 그리고 또한 모임에 대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교회를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대형교회를 가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큰 건물, 화려한 외관을 보고 참 거기에 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제 종종 이제 서울에서 이제 큰 교회를 이제 보게 될 때가 있는데요. 정말 이제 멋있게 만들어진 교회를 볼 때마다 정말 그 안에 뭔가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그거에 비해 저희 마포교회는 예전에 심지어 지하에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밖에서 보이지도 않습니다. 저희 어머니한테 마포교회를 한번 가자고 했더니 지하에 냄새 나는 곳에 왜 가냐고 그러시더라고요. 저희 어머니는 지금 서울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다니고 계십니다. 건물이 가장 큰, 참 안타까운 일이죠. 하지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을 수 없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항상 사람들은 그럴 듯해 보이는 이제 겉모습, 이제 외향을 항상 이제 추구합니다. 이 세상에 유명한 사람들을 굉장히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이름이 있는 여러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들, 빌게이츠라든지 워렌 버핏이라든지, 이제 그런 사람들은 한 번 만나는데 굉장히 많은 돈을 내면 한 번 만나서 이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내가지고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한 번 만나면 뭔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에 제 아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기 반에 어떤 친구가 유명한 아이돌 가수를 한번 만나려고 돈을 엄청 썼다고 합니다. 그 가수의 앨범을 사면 그 앨범에 그 가수를 만날 수 있는 티켓이 적은 확률로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그 확률을 계산해 보니까, 300만 원어치 그 앨범을 사면은 한 번 만날 수 있는 티켓을 확률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아이인가 봐요. 300만 원을 들여서 그 앨범을 샀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리고 실제로 자기 계산대로 그 티켓이 안에 한 장이 나왔고 만났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것도 직접 만나는 건 아니고 인터넷으로 한번 이렇게 만나는 이제 그런 거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그걸 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제가 이제 두 번째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정말 거기에 이제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나다나엘이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고 이제 핀잔을 줬을 때, 이제 빌립은 뭐라고 말하냐면 "와 보라!"라고 합니다. 와 보라, 빌립은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허름해 보이지만은 예수님께 한번 나와서 본다면 너는 반하지 않고는 배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차이점입니다. 세상에서는 와 보라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언제든지 한번 와 봐."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많은 연예인들의 화려한 모습을 겉으로는 보고 있지만, 또 많은 뉴스들이 그 연예인들이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지, 이제 겉으로 꾸며진 모습은 그렇게 멋있게 만들지만 이제 실제로는 얼마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듣게 됩니다. 많은 스트레스 가운데서 여러 가지 정신적인 문제도 토로를 하고요. 그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언제든지 와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까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명하다는 그런 빌게이츠나 워렌버핏, 이런 사람들도 그래 언제든지 한번 와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도 언제든지 준비되지는 않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겉과는 다른 그런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실제로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잊지 않은, 이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돈을 들인 그 학생도 정말 그가 만났을 때, 실제로 만났을 때, 그의 본모습을 봤을 때 얼마나 만족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언제든지 와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 모임도 와 봐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에, 이 지역교회의 정상적인 상태가 그런 것입니다. "와 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우리 모임에 한번 와 봐." 말할 수 있는지가 지금 그 모임의 그 상태를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이, 모든 모임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렇게 될 수 있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 모임에 언제든지 와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이 교회의 성도 수를 늘리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쉽게, 또 그런 의도로 우리 교회에 와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행전에 보면, 이 지역교회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영혼을 이제 더하셨다라고 돼 있습니다. 이 교회에 영혼을 더하시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더하십니다. 분명히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교회에 와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의도로서 와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늘리기 위해서, 그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역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와보라고 하는 것은 여기만이 이 세상에서와는 다른 실망시키지 않을, 그 구하는 영혼을 실망시키지 않을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와 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나다나엘을 생각해 보면 나다나엘은 그 와보라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빌립이 자신 있게 한번 와 봐라고 했을 때 기대감에 갔을 것입니다. 우리 모임이 또한 그러한 장소가 된다는 것에 참으로 저는 이 지역 모임이 얼마나 놀라운 장소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그 가슴을 뛰게 만들 수 있는, "한번 와봐. 여기 너가 찾고 있는 게 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 장소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곳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빌립은 그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일을 우리가 만났다." 그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 말씀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그 선지서를 통해서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바로 이 자리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모임을 소개할 때에 말씀으로 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와보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 교회에 가면, 재미있는 게 있어." "이 교회에 가면은 맛있는 것을 많이 줘." 대전 중고 모임이 맛있는 것을 많이 주기도 합니다마는 하지만 그걸로 우리가 사람을 와보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와보라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한 것처럼 말씀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관건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 지역 모임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가 기록한 그 주님을 제시하면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바로 이곳이다. 여기가 주님께서 계시는 곳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와 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잠깐 이제 이런 말씀으로 증명한 것에 대해서 이 사도행전 말씀을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7장입니다. 2절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이제 사도바울이 빌립이 그런 것처럼 이제 말씀을 들어서 주님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말씀을 들어서 주님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이제 세 가지 측면을 여기서 함께 말을 하고 있어서 그 구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2-3).

빌립이 그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다, 그리스도라고 성경을 가지고 증명을 한 것처럼 이제 바울도 여기서 성경을 가지고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명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제 이 성경을 가지고 첫 번째로 이제 강론하였다라고 2절에 되어 있고, 3절에 뜻을 풀었다라고 되어 있고, 그리고 또 3절 중반부에 증명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을 가지고 이 사도가 그런 것처럼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이제 "강론하다"는 것은 이제 토론하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성경 읽기 시간에 이제 서로 질문하고 답변을 하는 것처럼 이제 그런 것을 이제 토론 이 강론이라는 단어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여러 번 성경을 가지고 토론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질문했을 때에 그것을 그 질문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논리적으로 이제 답변을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필요한 것은 질문자의 질문에 맞는 답변을 하는 그런 논리력, 그런 일관되게 그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이제 그런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성경을 연구를 하고 또 성경을 전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가운데에 이제 이런 측면을 여러분께서 이제 생각하시면서 이제 이러한 면을 개발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제 강론하다고 했을 때는 그 질문자의 질문의 내용을 잘 듣고 그거에 맞춰가지고 그 논리에 맞게 답변하는 것, 이제 그런 능력, 이런 능력이 우리가 이제 성령님을 의지해서 개발해 나가야 되는 이제 그런 능력입니다. 사도는 이제 그렇게 성경을 가지고 이제 강론을 하였습니다.
또 두 번째로는 이제 "뜻을 풀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뜻을 풀어라는 것은 이 성경의 내용 자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성경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제 이런 내용입니다라고 풀어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떻게 푸냐면은 이제 다른 성경을 가지고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것은 이제 신령한 것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성경을 가지고 풀어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한 분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이고, 그래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관성 있게 이 성경을 풀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두 번째 "뜻을 풀어"라는 것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관성 있게 말하는 그런 기술입니다. 강론하다는 것은 질문과 일관성 있게 대답해 주는 기술입니다. 뜻을 푼다는 것은 성경에 다른 부분과 일관성 있게 설명해내는 그런 기술입니다.
그리고 이제 "증명하다"라고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증명하다라는 것은 성경을 옆에 두고 그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근거로 해서, 지금 이 내용이 맞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증명하다라는 것은 특별히 어떤 주제가 있을 때에 그 주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성경을 가지고 교제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체적으로 성경의 내용은 잘 알고 있는데, 때때로 특별히 어떤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인 어떤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말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는 구절을 금방 생각해내지 못하는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어떤 것을 제시할 때에 그것을 근거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옆에서 같이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증명하다는 것이 옆에 두고 증명하다, 특별히 '옆에 같이 두다'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그 주제는 성경에 이 부분에서 다루고 있지, 이제 이렇게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이제 그런 능력을 또한 개발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 지역 모임은 결국 이제 말씀으로,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이 지역 모임이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 곳이라는 것을 말씀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와 보라,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 모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필요한 것이 첫 번째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 것, 성경을 뜻을 푸는 것, 그리고 성경을 가지고 이제 증명하는 것, 이런 것들이 세 가지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이 대전 중구 모임이 참으로 이런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는, 빌립이 나단엘에게 말한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지역 모임이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우리가 말씀과 가지고, 말씀뿐만 아니라 또 직접 우리가 실행하는 모습을 가지고 이 지역 모임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4장 40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지역 모임 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당하게 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이 단어가 1차적으로 주는 느낌처럼 그냥 대충 하라라는 것이 아니라, 적당하다는 것은 '합당하게' 특별히 이제 이것은 이제 '제자리에 놓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있어야 될 곳에 그 물건이 놓여 있는 것이 합당하게 된 것입니다. 적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물건은 여기 있어야 되고, 저 물건은 저기 있어야 되고, 이제 공간적으로 제자리에 놓인 것이 적당한 것입니다.
"질서대로"는 이제 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질서가 잡혀 있는 것이 이것이 이제 지역 모임에서 행하는 모습이 돼야 됩니다. 지역 모임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뿐만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질서대로 행해져야 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지 않는 분들이 이 지역 모임에 들어오게 될 때에 들을 뿐만 아니라 보기도 합니다. 보고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 모임이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지가 또한 이제 굉장히 중요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제 보여지는 모습을, 앞에 제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 큰 교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외관을 화려하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놓여질 곳에 놓여 있고, 돼야 되는 시점에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역 모임 안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적당하고 질서대로 한다는 것인지를 이 성경에서 계속 보게 됩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이제 이 지역 모임을 방문하는 사람이 이 지역 모임에 처음 저 문을 열고 딱 들어왔을 때 무엇을 보게 됐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맨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제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고 있는 모습, 형제님들은 너울을 쓰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딱 세상과는 구별되는 것이죠.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게 의미가 있습니다. 이 외부인들이 처음에 지역 모임 안에 들어와서 남자와 여자가 구별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점점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는 대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원 모임 안에서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모를지라도 남자의 머리는 가려져 있지 않,고 여자의 머리는 이제 가려져 있는 데서 분명히 뭔가 남자와 여자가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게 됩니다. 그런 질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남자의 머리는 이제 그리스도고, 또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 이 질서를 그 의미를 더 알고 있습니다. 이 질서를, 영적인 질서를, 이 방문자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 지역교회를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이 아니라 또 그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은 또 뭐가 있습니까? 그분들이 이 주일에 방문을 하였다라면 우리 가운데에 떡과 잔이 놓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냥 눈으로 딱 봐도 알게 되는 것이죠.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제 그런 모습입니다. 떡과 잔이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 주님을 이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은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고 잔은 주님의 이제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떡과 잔으로 놓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피가 몸에서 이제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피가 몸에서 나와 있는 것입니다. 흘려져 있는 것이죠.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 떡과 한 잔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냥 그것은 이제 형식이고, 때때로 우리가 이제 필요에 따라서 이제 다른 모습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고 쉽게 말해버리지만, 사실 그 한 장면이 나타내고 있는 의미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주님, 그리고 그 한 몸과 한 몸이 그려진 것, 그리고 그 피가 우리를 위해서 흘려진 것을 그 떡과 잔이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러한 모습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실행하고 또 너울에 대해서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제 실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이제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이제 와 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봤을 때, 그 질서와 우리 주님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것을 이제 하게 될 때에 이제 고린도전서 14장에 이 일이 이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앞에서 읽은 것처럼, 4장 24절에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온 나다나엘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이렇게 다가오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더라." 그리고 나다나엘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그전에는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너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오게 될 때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말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것이 단지 그냥 이 복음의 내용만을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동의했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예수님이 나를 알고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잘 알고 계시는구나, 심지어 나도 내가 이렇다는 것을 몰랐는데 예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의 그 특징을 한마디로 딱 집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 복음을 들으시는 분이 참 이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예수님 앞에 나올 때에 정말 예수님께서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는구나 이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는 단지 그냥 이 수십억 인류 중에 한 사람이고 그냥 너무나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그냥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고, 나는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냥 의미 없는 한 사람으로 나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올 때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은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고 나를 만나길 원했다는 것을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에, 정말 주님을 믿고 구원받을 때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 지역교회에 나오게 될 때에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 믿지 않은 자들, 이 무식한 자들은 별 생각 없이 이 지역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그 예언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그 성경을 펴고 성경으로 이제 강론하고 그것을 뜻을 풀고 성경으로 증명하는 것을 듣게 될 때에, 이 사람들은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에 대해서 그 양심을 하나님의 말씀이 책망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에 대해서 판단받는, 하나님께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계획, 이런 목적, 내 삶의 나의 계획, 이것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이 지역교회에 나오니까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난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 지역교회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 나다나엘에 대해서는 이제 주님께서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다나엘이 지금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요약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짐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그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나다나엘만은 정확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겉에서 주님께서 나다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고 이제 조금 짐작을 할 뿐이지만 나다나엘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만의 하나님과의 경험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이제 나중에 갖게 됩니다. 그가 언제 그것을 갖게 되냐면 그가 이제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때에, 이제 한 사람과 만나서 씨름하게 될 때에, 그것은 나중에 우리 주님이었고 그분에게 매달려서 씨름하게 될 때에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이제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이제 조금 이제 긴 내용이라서 많은 이제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마는 야곱이라는 이름은 그가 간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때는 그가 그 간사함을 회개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그대로 고백하고 하나님께만 의지했을 때 자기의 그런 간사한 꾀를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매달렸을 때, 그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험이 이제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도 그의 삶 가운데서 이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꾀로 살아가고자 했던 그런 사람이었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런 삶 가운데서 이제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런 가운데 나다나엘은 이 돌이키고 낮아지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이제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다나엘에게 주님께서는 이제 그런 경험이 있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간사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나다나엘의 삶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시고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한 나다나엘의 미래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을 왔는 것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미래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라는 것은 특별히 이제 이스라엘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냐면 천년 왕국에서 평화로운 가운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무화가나무 아래에 있는 모습을 성경은 이제 그려주고 있습니다. 무화가나무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천년 왕국에서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다나엘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나다나엘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바라고 있는 것이 소원이 이것이지 않느냐?"라고 정확하게 알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이것이지 않느냐?"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나다나엘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 앞에 나왔을 때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게 되고 또 우리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역 모임 안에 올 때, 동일하게 지역 모임 안에 왔을 때에,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지역교회 안에서 지옥 모임의 지체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정말 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 가운데서는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추구하지만 이제 그러한 가운데서 실제로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찾아다니고 엉뚱한 것을 이루고 다닌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이 나 자신에게 있어서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한 일이었다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내가 누군지 이 지역 모임 안에 들어왔을 때 정말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지역 모임이 여러분에게 가져다 주는 복입니다. 그리고 지역 모임 안에 들어왔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 그것을 지역 모임만이 그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나다나엘이 정말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이제 지역 모임에 들어오는 분들이 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 모임의 집회들을 참석할 때에, 때때로는 이게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 회사의 일을 해야 되고 내가 공부를 해야 되는데. 지역 모임의 집회는 이제 그런 것들을 이제 방해하고 시간을 써야 되는, 나의 시간을 그쪽에도 좀 버려야 되는 이제 그런 활동들로 생각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역 모임이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역 모임에 나올 때 이 믿지 않는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뿐만 아니라 먼저 믿는 자들도 우리 마음이 어떤지를, 우리 자신이 어떤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를 이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오히려 이 지역 모임이 우리의 삶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역 모임이 우리의 삶의 어떤 한 일부분이 아니라 이 지역 모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돼야 됩니다. 우리는 자주 이 지역 모임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갈 것을 권면을 듣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의 진짜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때로 이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모임들은 개방적인 모임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쉽게 이제 교제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러면 그런 개방적인 모임과 교제를 하는 모임과의 그 경계가 뭔가, 그 차이점이 뭔가? 뭐가 결정적으로 그것을 나누고 있는 이제 구분선인가를 이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 이제 여러 가지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마는 또한 이제 우리가 이제 쉽게 말할 수 있는 너울의 실행에 대해서 떡과잔에 대한 실행에 대해서 어떤 다른 실행에 대해서 이제 여러 가지 것들을 이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모임 중심적인가? 그 모임의 방향이 모임의 중심적인가? 아니면 그 모임의 방향이 각자 제 개인적인 자신의 삶을 살고 모임은 그 개인적인 삶에 이제 꾸며주는 이제 들러리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가? 이 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만약에 이 지역 모임이 그 한 사람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지역 모임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맞춰주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편리한 대로, 그 사람이 기뻐하는 대로, 맞춰주게 됩니다. 그리고 방향을 일단 그쪽으로 잡기 시작하면 이제 다른 여러 세세한 실행들은 모두 사람에게 맞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근본적인 핵심적인 차이가 그 지역 모임이 중심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중심인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지역 모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됩니다. 주님께 합당하게 경배를 드리고 나다나엘이 그런 것처럼 정말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참 이스라엘의 임금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나다나엘에게 주님께서는 한 약속을 하십니다. 어떻게 말씀하시냐면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함으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네가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천사들이 이제 인자 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이제 천년 왕국 시대를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놀라운 시대를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이제 천년왕국 시대에 국한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이 교회 시대에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닥다리가 나오는 장면과 또한 하나님의 집, 이 지역교회에 대한 표현인 하나님의 집이 동시에 언급된 부분이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사닥다리를 본 환상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도 그 천년 왕국 시대의 놀라운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특별히 이제 하나님의 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 장소에 대해서 참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몰랐는데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역교회 안에서도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장차 미래에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서 임하실 때에 그 하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지역교회 안에서도 그 하늘의 통치가 이 하나님의 집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제 더 큰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교회가 그런 장소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제 와 보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역교회 안에서 참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참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와보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여러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지역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이 지역교회 안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역교회 안에 두시고 그것이 얼마나 존귀한 자리인지를 말씀하시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을 볼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지역교회로 모일 때마다 더 놀라운 것을 볼 것을 기대하면서 모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단지 이 눈에 보이는, 그냥 건물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계시고 그리고 주님의 임재 앞에서 참 우리 자신이 드러나고 그리고 그로 인해서 주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을 더 높이고 그리고 주님께서 하시는 더 놀라운 일들을 보는 그런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지역교회의 모습이라고 보는 가운데서 여러분께 함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에 함께 모이기를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