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4일 토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다윗의 생애04_도망다님 >
1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삼상22:1-5, 개역한글)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34:1-11, 개역한글)
읽은 말씀을 주님께서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는 21장에서 다윗이 놉에서 가드로 도주한 모양을 보았습니다. 그는 가드에 가서 미친척 했습니다. 저희들이 조금 전 읽었던 시편34편은 제목 그대로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 하다가 쫓겨난 이후에 지은 시 입니다.
그 시에 <이 곤고한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34:6, 개역한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선포하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을 그가 여러차례 기록합니다.
그 후 가드로부터 그가 아둘람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삼상22:1, 개역한글)
가드에서 아둘람까지는 약 20km가 되지 않습니다. 그곳으로 오는데 다윗의 영혼은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요?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은사람으로 또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가드에 가서 미친척을 했습니다. 그럴때에 그가 주님앞에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그가 아둘람으로 돌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그의 마음속에 참담함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왔을때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다윗이 아둘람으로 왔을때 새로운 시간이 시작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홀로 사방을 도주했습니다. 그러나 22장에 와서 그에게 사백명 가량이 모이게 됩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의 학정 속에서 나라는 붕괴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찾아나오는 사람이 왜 있을까요?
다윗에게는 끌어당기는 매력, 힘이 있었습니다. 제일먼저 그에게 찾아나온 사람은 다윗의 가족입니다. 그리고 환란당한 모든사람, 빚진사람, 이들은 사울의 학정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끌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원통한 사람, 불공평으로 인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였습니다.
사울이 국가를 잘못 관리한 잘못된 근본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이와같은 부작용과 문제가 반드시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도 만사가 잘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착각입니다.
그 착각을 마귀는 슬며시 우리 마음속에 넣어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계획대로 하나님과 관계없이 걸어가게 될때 문제가 생깁니다.
사울은 그와 같은것을 스스로 경험하고 있고 또한 많은 국민들이 그것을 느낍니다. 그럴때에 사백명이 아둘람에 모였습니다. 다윗은 이제 거기서 모압으로 옮겨갑니다.
아둘람에서 그의 가족들이, 특히 부모님들이 오래 있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증조모는 룻입니다. 그녀는 모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러한 관계로 인해서 그가 모압을 도피처로 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갓이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영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첫째로 사무엘입니다. 그 다음이 여기에 나타난 갓이라는 선지자입니다. 나중에 사무엘하에 가면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그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장에 가보면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찾아왔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물을때에 제사장을 통해 묻습니다. 제사장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하나님앞에 선 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표해서 사람들 앞에 선자입니다.
갓이라는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표해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에 있지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21장에서 나온 가드는 유다 땅이 아니라 블레셋 땅입니다. 다윗은 그리로 도피했다가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 다음 이제 모압에 있는데 선지자 갓이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 합니다. 다윗은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가요. 아니면 가볍게 여기는 가요. 이것은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심오한 진리로써 우리의 성패가 여기 달려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삼상22:6, 개역한글)
이 소식을 사울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둘람 굴에 다윗과 함께 사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기브아, 사울의 본고장을 보겠습니다.
거기의 에셀나무 아래서 그는 자기 사람들과 국가회의를 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울은 그의 신하들 앞에서 대단히 격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불만이 있습니다. 그의 말속에는 백성들이 모두가 자기를 향해 대적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공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살해하려고 하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삼상22:8, 개역한글)
국가회의에서 그는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그의 발언을 가만히 보면, 이것은 사실을 근거로 하기보다는 감정을 근거로 한 과장된 말이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가 회의에서 호소 했을때 에돔사람 도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가 놉에 있었을 때 다윗이 와서 어떻게 했는지를 고발합니다.
다윗이 놉에 와서 떡도 얻어가고 칼도 얻어갔다고 다 말합니다. 그로 인해서 사울은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다 소환해서 심문합니다.
11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12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13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삼상22:11-13, 개역한글)
이 당시 소환하고 심문하는 것은 증인이나 무언가를 근거로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생각하는대로 그에게 죄를 올려놓는 것입니다. 이미 다윗과 공모했다는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에게 죄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히멜렉이 변명합니다.
14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15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것이 없나이다
(삼상22:14-15, 개역한글)
아히멜렉은 그가 다윗과 공모한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울은 그를 죽일 자로 단정합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아히멜렉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여기보면 신하들이 아히멜렉을 죽이기를 꺼려합니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시105:15, 개역한글)
기름부은자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조금 후에 엔게디 굴에서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는것을 봅니다. 같이 있는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고자 할때 다윗은 이를 금합니다. 금한이유는 여호와께 기름부음을 받은자를 건드릴수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유입니다. 왕의 신하들, 심지어 사울의 신하들도 제사장을 죽이는 것은 감당할수 없는일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에돔사람 도엑이 나타나서 무자비하게 85인의 제사장을 죽이고 그의 가족과 가축, 소아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기에서 대학살이 일어납니다.
이 학살은 두가지 점에서 생각할수 있습니다.
하나는 후에 다윗이 이야기 한 것처럼,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도주해 왔을 때 다윗은 이 모든일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삼상22:22, 개역한글)
그가 커다란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사건을 생각할 때, 사무엘 상 초기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엘리집안을 심판하시고 엘리집안이 완전히 멸절될것을 예언하신 적이 있는것을 생각합니다.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찌라 (삼상2:31, 개역한글)
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삼상2:34-35, 개역한글)
우리는 아론에게 네 아들이 있다는것을 압니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첫 두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오래전에 여호와 앞에 잘못된 불을 사용함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불로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그 후에 아론이 떠나게 될때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됩니다. 엘르아살의 후예들이 다 제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엘르아살의 후손이 아니라 네번째 아들 이다말의 후손입니다. 다시 말해 엘르아살에서 이다말쪽으로 제사장이 옮겨간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사무엘 상 초기에 엘리가 잘못한 일,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소에서 하나님의 일을 더럽힌 일을 압니다. 그로 인해서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습니다. 엘리도 죽습니다. 이 모든일은 블레셋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나서 다윗때에 왔을때에 사울이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학살해 버립니다.
그때 칼을 들고 학살한 사람은 에돔사람입니다. 블레셋이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고 엘리를 죽게하고 실로를 무너뜨렸을뿐아니라 세월이 지난 후에 에돔사람이 엘리집안의 제사장의 후예를 완전히 전멸시킵니다. 물론, 아비아달이 남습니다. 아비아달이 남아서 한동안 다윗과 함께 가지만, 후에 가서 그도 쫓겨나고 사독 제사장이 들어오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월이 지나도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사실을 정말로 마음속에 세긴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경홀히 여길수 없습니다. 단 한점이나 한획도 한말씀도 우리가 소홀히 여길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긴다면 소홀히 여긴만큼의 댓가를 우리는 반드시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22장에서 놉의 대학살을 봅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사실입니다.
사울이 아말렉 사람들을 죽이게 될때, 좋은것들은 남겼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을 죽이게 될때, 거기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전멸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에 대한 존경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22장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1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삼상23:1-5, 개역한글)
여러분께서 지도를 보시면 알지만 그일라는 아둘람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다시말해서 블레셋 지경에서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일라는 유다지경에 속한 마을이고 성벽이 있는 도시입니다.
유다에는 성벽이 있는 도시가 있고 성벽이 없는 도시가 있습니다. 성벽이 있는 그일라는 부유한 도시입니다. 거기에는 추수할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사울은 다윗을 쫓기에 급급했습니다. 추수때가 되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유한 곳에 가서 모든것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유다사람들을 괴롭힐 때, 사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제일먼저 그곳에 가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을 저지하고 그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패막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윗을 찾아서 제거하는 일에 그는 급급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에게는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해 오고있고 그일라 사람들은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 위기에 대해서 누가 염려 했습니까?
사울이 염려했습니까? 다윗이 염려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쫓기는 상태에서 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 군사가 있었습니다. 그 군사를 가지고 나가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할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전혀 이와같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누가 목자입니까? 목자는 양들을 돌봐야 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사백명의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때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가야 할까?" 다윗의 고민은 그가 만일 그일라에 가서 백성들을 구하게 될때, 자기가 거처하는곳이 사울에게 순식간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곧 좇아 올것입니다. 다윗은 그일라에 가서 그들을 구원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생 목자입니다. 목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 목자를 멸시하는 사람들이 창세기에서 누구인가요? 애굽사람들은 목자를 멸시했습니다. 가증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양들을 돌보고 가꾸는 일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목자이고 구약의 여러 위대한 인물들은 목자입니다. 양들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일라에 가서 도와야 겠다라고 할때, 23장에서 우리가 발견할수 있는 좋은 교훈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서 그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세번이상, 네번 여호와께 묻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삼상23:2, 개역한글)
다윗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것은 아름다운 모양입니다. 그는 여러가지 일에 있어서 여호와께 항상 물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대소사를 결정할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로서 개인의 일이나 가정의 일이나 모임의 일을 주님앞에 묻습니까? 웬만한것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고 중요한것만 하나님께 묻습니까? 아니면 작은것은 주님께 묻지만 큰것은 내가 알아서 처리 합니까? 아니면 모든것을 내가 처리합니까?
이 문제에 했어서 우리는 심각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크고작은 일들을 놓고 주님앞에서 묻고 지혜를 구하고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 평가해 보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는가요. 주님의 인도를 이야기 하기전에 먼저 주님앞에 묻는 습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그때 주변에 있었던 사백인의 사람들이 "지금 거기 가면 어떡합니까? 그것은 굉장히 위험하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삼상23:3, 개역한글)
그럴때에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옆에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을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거 위험하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 하게 될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인도자라 할찌라도 옆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면, 자기 친구와 아내가, 남편이 뭐라고 이야기할때 내 마음이 흔들릴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흔들릴 때 우리는 변론하고 논리를 펼쳐야 하겠습니까?
다윗이 취한 태도는 다시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삼상23:4, 개역한글)
두번째 여호와께서 답변하십니다. 그 대답은 첫번째 답변과는 약간 다릅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손에 붙이리라>
다윗이 흔들릴만한 위험한 상황속에서 다윗을 견코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가지를 더 답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누가 나에게 이야기한다 해도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하리라. 위험이 있다해도 나는 갈것이다 한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게될때 반대와 이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진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반대가 있어도, 확신 속에서 추진해 나갈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 가서 블레셋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다윗을 쫓아올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삼상23:9, 개역한글)
조금 전 다윗은 자기가 친히 주님앞에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비아달이 그에게 왔을때, 우림과 둠림을 가지고 있는 에봇 볼을 가지고 제사장들은 무엇을 선택할까 하는것에대한 답변을 주었습니다. 그 규례를 따라 다윗은 제사장에게 묻습니다.
10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 오리라
(삼상23:10-11, 개역한글)
조금전에는 다윗이 직접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왔을때, 다윗은 제사장을 통해서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답변하십니다. <그가 내려 오리라> 예상대로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떨어졌다는 것과 내가 예상하는것은 다릅니다.
나는 예상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답변하실때 그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삼상23:12, 개역한글)
다시 말해서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그의 사람 육백명과 함께 그일라에서 도주합니다. 사무엘상 22장에서 다윗과 함께한 사람은 사백명이었습니다. 이제 23장에서는 육백명이 다윗과 함께 합니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계속해서 사울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이 가속화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12장 말씀을 보면 이때로부터 좀더 후에 다윗이 시글락에 가게 될때 므낫세의 천부장 일곱명이 다윗에게 투항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윗에게 투항해 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이 당시 벌어지고 있었던 이스라엘 안의 사람들이 사울의 고통스런 통치가운데 있다가 다윗에게 귀순해 오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장소를 옮겼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삼상23:16, 개역한글)
여기 요나단의 사역이 나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와 맹약하고 그를 항상 변호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다윗 사이에 끼어서 그는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황태자로서 자기는 왕이 되지않고, 다윗이 왕이됨을 인정하고 그의 옷까지 벗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사울은 격노하지 않았습니까?
자기아들 황태자가 왕이 될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윗이 왕이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윗과 맹약했다는 것 때문에 사울은 너무나 격노했습니다.
이와같은 요나단이 수풀로 찾아왔습니다. 사울은 아직 다윗을 찾지 못하는데 요나단은 다윗이 어디 있다는것을 수소문해서 찾아옵니다.
요나단은 낙심속에 빠져 있는 다윗에게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낙심속에 빠지지 않았겠습니까? 그일라사람들은 자기 형제입니다. 유다지파 사람입니다. 열두지파 모두가 자기의 동족이지만 그 열두지파중에 다윗은 유다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은 유다지파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울의 위협이 두려워서 다윗을 배반하고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생명을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쫓아올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서 그는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을 막고 그들이 손해보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감사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끼쳐진 위대한 은혜, 우리를 구원하는 그 은혜에 감사치 않는것은 가장 악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을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은 감사치 않는 그일라를 생각할때 얼마나 마음이 고통가운데 있었을까요?
저희는 어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의병에 담아서 기억하고 주의 책에 기록하고 주님께서 기억하겠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제 여기 다윗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마음속이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나는 처신해야 할까.'
함께했던 사백명의 사람들이 그일라를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앞에 물었을때, 주님께서 가라고 하였기에 갔습니다. 그럼 다윗은 사백명의 사람들 앞에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요. 육백명의 사람들이 "거기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도와줘도 남는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할때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인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게 될때, 때때로 이와같은 난처한 상황, 당황스러운 상황속에 빠질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많은 추종자들과 하나님 앞에서 이야기할수 있는 가장 위대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다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이야기 할수 있는 가장 확고한 근거의 답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도해시하고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려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말씀에 순종한것을 사람들 앞에 제시하려고 합니까? 이것이 인도력입니다.
인도력이 안고있는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다윗의 행보에서 다윗이 사용했던 리더쉽을 봅니다.
그 리더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데 있었습니다.
인도력이 인도력 답기 위해서는 인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인도력을 발휘할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맞춰주고 그들이 기뻐하는것에 항상 연연하다보면 인도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와같은 것으로는 백성들에게 결코 유익을 끼칠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런 어려움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요나단이 찾아와서 이야기 합니다.
네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삼상23:17, 개역한글)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이것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염려하던 것이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친구의 사역입니다.
23장에 와서 그일라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어떻게 받는가를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요나단이 찾아왔을때, 우리는 충성된 우정을 보게 됩니다.
충성된 우정은 친구가 낙심속에 절망가운데 자기 회의속에 빠졌을때, 때때로 인도자가 자기 회의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도 회의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와같은 우정이 필요합니다. 이와같은 우정의 참된사역, 참된격려, 참된위로가 필요합니다. 아첨이 아닙니다. 그사람의 마음에 달짝지근한 것을 주는 근거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를 세울수 있습니다.
세울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세상의 어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삼상23:19, 개역한글)
지도에 보면 십이라고 하는것은 유다사해쪽으로 남쪽에 있습니다. 여기도 유다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들은 다윗의과 같은 지파사람들입니다. 형제들입니다. 이들이 일부러 기브아에 찾아가서 사울에게 이야기 합니다.
19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대로 내려 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삼상23:19-20, 개역한글)
사울이 기브아에서 국가회의를 열었을때 "아무도 나에게 고발하는자가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고발했을때, 사울은 너무나 기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삼상23:21, 개역한글)
이것은 사울이 잘쓰는 독실한 말입니다. 그러나 겉은 독실한데 마음속은 부패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울의 언어생활의 특징입니다. 언어생활에서의 특징이라는것은 그의 마음상태를 잘 반영해 줍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다윗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윗을 추격해 옵니다.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삼상23:26, 개역한글)
사울의 군대가 좇아오고 다윗은 그의 사람들과 함께 도망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지형이 있습니다. 산 능선으로 달리게 될때, 한편으로 달리는데 평행하게 사울은 다른 능선으로 달립니다. 그러나 거리는 대단히 가깝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가다가는 반드시 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개입하시는것을 보게 됩니다.
27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로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삼상23:27-28, 개역한글)
블레셋이 침공해 왔습니다. 사울은 그것을 무시하고 다윗을 추격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보에 있는 물과 같아서 하나님께서 원하는대로 만지십니다. 모양을 하나님께서 원하는대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어떠한 태도를 취했습니까? 블레셋이 와도 상관치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을 추격하는데 모든 노력과 신경을 다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추격해서 거의 다 잡을때가 되었는데 그는 그것을 포기하고 돌아가서 블레셋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일하는 역사는 이러한 것입니다.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삼상23:14, 개역한글)
왜 사울은 다윗을 잡지 못합니까? 왜 다윗은 사울에게 체포되지 못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막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바위를 가리켜서 28절에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했습니다. 이는 분리하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다윗과 사울을 분리하는 바위입니다.
지리적으로 지형적으로 분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그들 가운데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삼상23:28, 개역한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앞두게 되었을때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불기둥이 이스라엘과 애굽군대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애굽군대가 와서 접촉할수 없도록 분리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계속해서 보존하십니다. 그의 연약에도 그의 실망과 절망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계속해서 훈련하셔서 반드시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반드시 보좌로 올라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수많은 다양한 환경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철저히 보호하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사무엘상 23장 말씀을 통해서 받는 교훈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께 묻는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는 주님께 습관적으로 묻고 주님께 우리 마음을 드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형통토록 하시는 길을 가야 할것입니다.
요나단의 사역과 충성된 우정, 또한 위기속에서 하나님이 섭리속에서 개입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이 위대한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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