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다윗의 생애

< 다윗의 생애 06_사울을 또 살려줌, 블레셋으로 들어감 >

박이레 2021. 7. 19. 20:43

2017년 12월 14일 목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3 광야 앞 하길라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황무지로 들어옴을 깨닫고

4 이에 탐정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줄 알고

5 일어나 사울의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대장관 아브넬의 유하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10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삼상26:1-12, 개역한글)

 

어제 저희들은 나발이 다윗을 향해 능욕하고 멸시한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받았을 때 다윗이 격노하고 사백인과 같이 칼을 빼들고 달려갔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 전 장인 사무엘상 24장 엔게디 굴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하나님의 기름 부음받은자를 건드릴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 속에서 사울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25장에서 다윗은 칼을 들고 나발을 죽이러 갔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을 만나서 아비가일의 말을 통해서 그는 자기자신의 시야가 가리워져 있었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그의 믿음의 행보에서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후에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는 길을 예방해 주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위대한 사역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아비가일의 믿음과 아비가일이 보았던 비전은 다윗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무엘이 끼쳤던 선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무엘이 주님께로 갔고, 더이상 사무엘과 같은 선한 영향력을 받을수 없던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놀라운 도움을 다윗은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26장에 보면 십사람들이 다시 사울에게 와서 보고 하는것을 봅니다.

지난번 23장에서 십사람들이 사울에게 일부러 찾아와서 이곳에 와서 다윗을 체포하라고 보고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제 여기 두번째로 십사람들이 사울에게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행방을 사울에게 알려주면서 십사람들은 그 마음에 가지고 있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사울왕이 반드시 다윗을 체포하고 그를 확실히 죽여야 한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미 다윗을 고발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다윗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보좌에 올라간다면 십사람들의 생각에는 다윗이 자기들에게 반드시 보복할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저희들이 사무엘상, 하를 보면 다윗이 십사람들에게 보복했다는 구절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사람들은 다윗이 보복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걸어가는 사람의 행보와 그렇지 않는 사람의 걸음을 볼때 우리는 확연히 다른 것을 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십사람들의 일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기위해 삼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또다시 내려옵니다. 그리고 하겔라산 밑에 진을 쳤습니다.

사울이 그곳에 진쳤을때, 다윗이 사울이 진친것의 모양을 잘 살피려고 정탐꾼을 보냅니다.

 

다윗은 왜 정탐꾼을 보냈을까요?

보통 군대를 향해서 정탐꾼을 보낼때는 그들의 위치와 전략을 파악하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보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정탐꾼은 사울의 군대의 모든것을 파악해서 그들을 격파하기 위해서 간것일까요?

 

우리는 24장에서 엔게디 굴에서 사울이 가까이 왔고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은것을 봅니다. 그의 믿음은 사울을 죽일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는 것은 사울의 삼천의 군대를 격파하려는 목적이 아닌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다윗은 전에 계속해서 도망다녔습니다. 사울을 두려워하고 사울이 추격하는 군대로 인해서 죽음과 자신은 지척이라는 공포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추격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날 정탐꾼을 보내서 사울의 군대를 살펴본 이유를 그 다음절에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들을 격파하기 위해서 가는것이 아닙니다.

사울을 죽이고 그들을 격파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다윗이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사울을 죽일 의도가 없다는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탐꾼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사울을 중심으로 모든 군대가 원형으로 쭉 둘러 누운것을 알게 됩니다.

 

나중에 다윗이 그곳에 찾아가서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원형으로 누워 자고 있는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그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전에 우리가 본 다윗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이 오면 항상 도망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울의 군대가 진치고 있는곳에 자기의 정탐을 보내 정탐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사람을 데리고 그 장소로 찾아 나갑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담력으로 사울과 군대가 있는곳으로 나아갑니다.

 

다윗이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기회입니다. 다윗과 특별히 함께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울의 곁에는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있었습니다. 아브넬은 대단히 유능한 장수 입니다. 사울의 오른팔입니다. 그와같은 사람이 있는 곳에 접근한다고 하는것은 결코 쉽지않고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때, 한사람을 다윗은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냥 자기의 사람 중 하나를 보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다윗은 친히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옆에 한 사람을 대동합니다.

그 사람은 헷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입니다. 아비새는 요압의 아우이자 다윗의 누이였던 스루야의 아들입니다.

 

누가 같이 가겠느냐는 말에 아비새가 자기가 가겠다고 합니다.

아히멜렉은 상당히 위험한 장소에 가기를 꺼려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비새가 선택 됩니다.

아비새와 다윗이 함께 갑니다. 사울은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아브넬이 자고 사울의 머리맡에는 창이 꽂혀있고 그옆에 물병이 있었습니다. 그 군대는 사울을 중심으로 뺑 둘러 전부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기이한 것을 봅니다. 이 군대는 다윗 한사람을 좇는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는 지금 육백명의 군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용사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격파했고 그는 그 이외에도 여러차례 블레셋과 싸워서 진적이 없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그가 패배한적이 없습니다.

그는 무적의 위대한 용사입니다. 비록 사울은 삼천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는 입장에 있지만 이와같은 상황에서 정상적이라면, 아브넬은 그 군대를 보초를 세워놔야 했습니다. 이것은 상식이고 기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현장에 가보았을때 모두가 자고 있었습니다.

보초 한사람도 살피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사울과 그 군대는 너무나 큰 자신감에 취해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전쟁에서 자신감이 대단히 중요하긴 합니다. 그것은 사기를 말해 줍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전쟁에서 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기가 충만하고 잘 준비되어 있고 그 전쟁을 위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모든 마음을 두고 전쟁에 임한다고 하는것과 그저 단순히 자신감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것입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자신감을 가지게 될때, 필연적으로 패하게 될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수많은 요인이 작용합니다. 엄격한 경계태세에 돌입하지 않는다면 전쟁에 임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기초,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그 모든사람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비새가 이야기 합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삼상26:8, 개역한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모두가 자고 있는 모양을 보았을 때, 아비새는 오늘이 그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사무엘상 24장과 매우 흡사합니다. 24장에서는 다윗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제거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면서 일반화 시키면서 "바로 오늘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날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의 말을 거절했습니다.

 

이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비새가 보았을때, 모든사람이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상황이고 환경입니다.

이 환경을 토대로 해서 그가 생각할 때, 이 환경처럼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초도 없고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비새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단 한번이면 됩니다.

그는 기술적으로 창을 쓸줄아는 용사입니다. 그리고 상대는 자기를 대항하고 있지 않고 모두 자고 있습니다. 조용히 들어가서 그냥 찌르기만 하면 됩니다. 두번 찌를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다윗은 이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자를 해하는것은 범죄라는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다윗의 말과 아비새의 말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비새는 군사로서, 용감한 군인으로서 상황을 파악하게 될때, 기술적으로 그를 죽일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고통받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하는 말을 합니다. 환경을 토대로 내리는 결론입니다.

 

다윗은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그것과 상반해서 다윗의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한 결론을 내립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삼상26:9, 개역한글)

 

두사람이 결론에 도달했는데, 한사람은 보이는것, 환경을 토대로 한 결론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한 결론입니다. 군사적인 입장으로 볼때,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볼때에 그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만사를 행하게 될때, 우리는 무엇을 토대로 해서 결론을 내립니까?

우리는 상황을 토대로해서 결론을 내립니까?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바로 그것이다."라고 합니까? 우리의 지혜를 가지고 상황을 잘 따져서 결론을 내립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맞는가, 아닌가를 검토합니까?

 

다윗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했습니다.

그는 조금도 융통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절대로 융통성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은 영역이 있습니다. 거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부분에서는 우리가 왈가왈부할수 있는 여백이 없습니다.

다윗은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여백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는 융통성을 발휘할수 있는 여백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삼상26:10, 개역한글)

 

다윗은 이제 분명하게 사울의 미래에 대해서 세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쫓겨 다녔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몇살에 무찔렀을까요?

성경은 이에대해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학자들은 열여덜살쯤 되었을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윗이 서른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되기까지 12년을 어려움을 겪고 산으로 들로, 굴로 수풀로 방황하고 유리한 것입니다.

 

참으로 오랜 기간동안 그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렇게 긴 기간동안 그는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전에 시편에서 본것처럼, 주의 병에 관해서 이야기 했고 그의 눈물을 그 병에 담으셨고 그것에 대해서 주님의 책에 기록해 놓으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항상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하길라 산가에 진치고 있는 사울의 군대에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비새가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라고 이야기 할때, 다윗은 그 대답과 함께 사울의 미래를 추가해서 이야기 합니다.

 

"사울의 미래는 세가지 중의 하나다"

 

첫째, <여호와꼐서 그를 치시리니> 입니다.

사실 세가지라기보다는 한가지 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십니다. 어떻게 치십니까?

하나는 스스로 죽을날이 이르던지, 아니면 전쟁에 들어가서 망할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내린 결론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자기가 군사력을 가지고 사울을 격파할 옵션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다루실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다뤄 주셔야 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군사력으로 사울을 이길수 있겠습니까?

대행권세를 향해서 어떻게 자기가 대항하겠습니까? 그것은 할수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대행권세 앞에서 순종하는 사람은 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대행권세를 향해서 내가 이렇다 저렇다고 이야기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행권세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악한일을 했을때도 그것은 슬픈일이고 눈물을 흘릴만한 일이고 괴로운 일이고 불편한 일이고 고난속에 걸어가야할 일이지만 그것마저도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사에 모든 일들을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나요?

 

대행권세를 생각할때, 다윗은 항상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대행권세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행권세가 잘못하게 될때 이것은 내가 대행권세를 향해서 물을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물을 문제라는것을 다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권세를 향해서 우리가 가질 중요한 원칙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빗겨 나간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크게 실수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서 정부가 가지는 권세가 있습니다. 위정자들이 가지고 있는 대행권세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장이 가지고 있는 대행권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안에서 장로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대행권세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와같은 것에서 생각이 분명했고, 대행권세는 하나님이 하실것을 믿었습니다. 그가 악행을 한다는 것을 다윗도 잘 분별하고 있었습니다. 그 악행 때문에 다윗은 지금까지 고통을 받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악행에 대해서 다윗이 심판할 입장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아비새에게 이야기 하기를 사울에 관한 이 문제는 여호와께서 해결하실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그는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삼상26:11, 개역한글)

 

사울에게 가긴 가되 그를 죽이지 말고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오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창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상징입니다. 왕을 상징하는 구조물은 보좌가 있고 홀이 있습니다. 그리고 창이 있습니다.

창은 왕권을 잘 말해주고 왕의 나라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물병, 이 물병은 단순한 물병이 아니라 왕에게 속한 물병입니다.

군사가 다 물병을 가지고 있지만 왕이 가지고 있는 물병과 군사가 가지고 있는 물병은 전혀 다른것입니다. 이 물병에는 많은 장식이 세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눈에 보아도 이 물병이 왕에게 속한 물병임을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이 창과 물병을 왕의 것이었습니다.

죽이는 대신, 건들이는 대신 이 두가지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는 왕의 옷자락을 베어가지고 왔습니다. 왕을 건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옷자락을 베었을때 다윗은 마음속에 걸렸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왕 자신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옷을 베었다는것은 왕권에 대한 위엄을 건들였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워 한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부드러운 마음, 깨끗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 깨끗한 양심, 거짓없는 믿음,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길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우리는 마음속에 항상 두고 살아야 합니다.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삼상26:12, 개역한글)

 

그 진영안에 들어가서 이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올 때, 아무도 다윗과 아비새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삼천명이나 되는 군사가 거기 있었는데 단 한사람도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군사적으로도 보초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도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삼천명 모두가 다 아비새가 들어갔다 나오는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성경은 이에대해 이와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성경 말씀안에 참으로 기이한 잠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다 잠재운 것입니다.

사울과 아브넬을 포함해서 삼천명의 모든 군대에게 이 영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깨어날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원하시는대로 주무르십니다. 보의 물과같이 하나님은 원하시는대로 역사하십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어느날 잠이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날 잠이오지 않았을까요?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보통 왕들은 코미디언을 부른다든지 광대를 불러 오락이나 엔터테이먼트를 불러 자기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 왕은 이상하게 역사책을 가지고 와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제일 지루한 책이 역사책이 아닙니까?

 

왜 하필 아하수에로 왕은 그런책을 가지고와서 읽을라고 했을까요?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르드개가 왕을 암살하려고 하는일에 대해서 목격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로인해서 왕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공적에 대해서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역사책에는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는 하만이 악한일을 막 행하려고 할 때입니다. 

물론, 에스더가 위대한 일을 했고 모르드개도 위대한 일을 함으로 인해서 그의 동족이 죽지않게 하는 역사를 행했지만 이 모든 일들배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을 보호하시는 역사속에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왕의 마음을 인도하심으로 행하셨습니다.

 

첫째, 그가 잠이오지 않게 하셨습니다.

둘째, 그가 역사서를 가져오라고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못하실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반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좌에 분명히 앉히시기 위해서 기름부으셨고 훈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가 죽는데 들어가거나 왕이 될수 없도록 망신창이가 되거나 실패하거나 다른길로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지키셨습니다.

 

물론 그가 실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넘어지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보좌에 오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일구이언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말씀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의 말씀은 절대로 변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안전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나, 어떤 약속에 있어서나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게 될때, 반드시 주님을 믿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한시간동안 가장 강조하고 강조하고 싶은것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같이 보여도, 아무리 부정적이고 또한 암울한 상태같이 보여서 절대로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것 같은 상황같이 보여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우리가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절대로 파기되지 않고 추락하지 않고 그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은 말씀하신것을 반드시 지키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기름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반드시 보좌에 오르도록 계획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다윗이 편안한 가운데 보좌에 올라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보좌에 오를때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다윗을 준비하기 위해서 수많은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비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준비하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다양하고 어려운 시험을 주시고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계획이 거기에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께서 이 많은 사람들에게 잠의 영을 보내셔서 그들이 철저히 잤습니다.

그래서 아비새가 그 안에 들어갔다 나올때까지 한사람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창과 물병을 안전하게 가지고 나왔습니다.

 

다윗이 거기를 떠나 멀리 산 꼭대기에서 외칩니다. 캄캄한 밤에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가로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지 아니하느냐 아브넬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삼상26:14, 개역한글)

 

다윗은 아브넬을 향해서 외칩니다. 아브넬은 군대장관입니다. 그사람은 사울왕을 옆에서 보좌해야 할 책임자입니다.

다윗이 오래전에 사울왕 앞에 불려 갔을때, 그는 왕의 경호원이 되었습니다.

그도 사울왕 옆에서 왕을 보좌한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호원이 무슨일을 해야하며 어떤 책임이 있다고 하는것을 다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불렀을때, 아브넬이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왕이 주무시는데 왜 깨우느냐' 라는 말입니다. 왕이 쉬시는 중인데 왜 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괴롭히느냐는 뜻입니다.

 

그때, 다윗이 아브넬에게 말합니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중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중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삼상26:15, 개역한글)

 

아브넬의 가장 큰 책임은 왕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울왕 옆에 수많은 간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왕에게 수많은 거짓을 계속해서 주입했습니다.

왕이 시기심에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다윗을 악한사람으로 그들은 매도 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른말로 한다면 다윗은 거짓 고소 속에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물론, 그가 산과 들로 다니면서 육체적으로 당한 많은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가 아니라 육백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 처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위해서 음식을 조달해야 했고 그들의 앉고 서는것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울왕을 자기가 죽이려고 한다는 거짓 고소 내용입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 때, 때때로 우리가 거짓 고소를 당합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어떤 사람은 퍼뜨립니다.

그와같은 이야기를 함으로서 나의 명예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것으로 명예가 추락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로 믿을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수 있을까요.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거짓고소 했습니다. 그녀가 거짓고소할때,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유명한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 글들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적잖게 자살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같은 문제에 당면하게 될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 해결은 주님께로 돌아가는데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답이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충분한 답이 되십니다.

 

다윗이 이러한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사울왕을 그가 죽이려고 한다는 거짓 고소속에 살아왔습니다.

자기가 만일 죽인다고 한다면 왕을 가장 보호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아브넬입니다. 그래서 경비병을 세우고, 보초를 세우고 깨어서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넬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같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떠나가 있을때 궁중안에서는 항상 뭐라고 다들 말합니까?

"다윗이야 말로 왕을 죽이려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어느때보다도 더욱 더 깨어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못하도록 경계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윗은 여기서 입증하고 있습니다.

 

네 행한 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삼상26:16, 개역한글)

 

지금 아브넬이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할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와같은 기회를 주신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거짓고소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것을 입증해 줄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깊은 잠의 영을 보내셔서 그들로 모두 잠에 빠져버리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만일 사실이 아닌것으로 인해서 고통 당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 말고도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16 네 행한 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17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다윗이 가로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18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19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삼상26:16-19, 개역한글)

 

사울은 이렇게 말하면 항상 감정속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이때 다윗이 한 말이 있습니다. "이제 왕께서는 내 마을 들으십시오."

이것은 마치 주도권을 쥐고 최종결론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말합니다.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삼상26:19, 개역한글)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두가지 가능성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왕을 격동시켜서 다윗을 죽이려 하게 하는이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제물을 받고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사람이라면 그는 여호와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단히 강한 말입니다.

 

사람이 왕을 격동시켜서 다윗을 죽이라 하고 쫓아내라 한다면 다윗은 어디로 가야 겠습니까? 외국을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외국으로 간다고 하는 말은 그가 우상을 섬기는 곳으로 갈수밖에 없게끔 내 쫓아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맞는 것인가요?

 

룻기에 보면 엘리멜렉의 가정이 흉년 때문에 모압으로 갑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 합니다. 룻과 오르바입니다. 그러나 엘리멜렉과 말론, 기룐이 다 죽고 난후에 어느날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두 자부를 향해서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은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

 

두 자부는 마구 웁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돌아갑니다. 그러나 룻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룻은 이렇게 아야기 합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나오미는 무슨일을 합니까?

자부가 자기 아들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모압의 신을 섬기는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들을 그곳으로 가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실수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제 쓰디 쓴 마음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와같은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여기에 연출되고 있습니다.

다윗을 끝까지 추격하고 쫓아내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외국으로 가게 됩니다.

사무엘상 27장에 오면 다윗이 어디로 갑니까? 가드에 갑니다. 외국으로 도망가버립니다. 이와같은 기로에 다윗이 서 있었다 하는 것을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암시를 받을수 있습니다.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삼상26:20, 개역한글)

 

벼룩이라고 하는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벼룩 한마리를 잡기 위해서 삼천명을 이끌고 와서 수색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입니다. 이러한 무가치한 일을 왜 하는지 다윗을 묻습니다.

이제 사울이 대답합니다. 이 사울의 말은 다윗과 한 마지막 대화입니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삼상26:21, 개역한글)

 

<내가 범죄하였도다>

 

다윗은 적어도 10년 이상을 추격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든 일 가운데 "나는 악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몇번이나 다윗이 이야기 했습니까?

이제 드디어 마지막에 가서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다"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사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요요같아서 변합니다. 그러나 그가 공개적으로 그가 한말은 "내가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10년간의 모든 결산은 사울의 입으로부터 나온것이 사실입니다.

 

사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항상 일구이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때 다윗은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다윗은 이때 사울과 개인적으로 거래를 하거나 이 일에 대해서 뭔가 응답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향해서 대단히 단호합니다.

 

다윗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삼상26:22, 개역한글)

 

다윗은 소년을 보내어 창을 가져가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물병은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다윗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3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24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삼상26:23-24, 개역한글)

 

다윗이 한 말은 사울의 이 모든 악행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을 향해 엄한 말씀을 합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잠24:21, 개역한글)

 

우리나라 성경에는 '반역자'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만, 이 '반역자'라는 말은 그 마음이 조석으로 바뀌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 마음이 계속 요요같이 변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마음이 바뀌어 나중에 쫓아가 죽이려고 한적이 몇번입니까?

 

다윗은 이제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입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야기 하지만 사울이라는 사람은 그앞에 완전히 없는 것입니다.

그와 관계 맺을수 없고 그를 신뢰할수 없기에 이 모든것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가 하나님앞에서 하는 말을 사울이 반드시 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행권세도 하나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대행권세(사울)를 가서 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든 대의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 말을 들었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엄하고 엄중한 일입니다. 대행권세가 실패하게 될때 그와같이 당하게 되는 결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세를 주시고 대행권세를 허락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헌신해야 할것인가, 또한 대행권세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유익을 끼쳐야 할것에 대해서 대행권세를 가진 사람은 마음속에 공부하고 실천하고 성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삼상26:25, 개역한글)

 

사울은 세가지를 말합니다.

1. 복이있고

2. 큰일을 행하고

3. 승리를 얻는 것 입니다.

 

이 말이 마지막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는 사울은 다윗을 만날 수 없고 다윗도 사울을 만나지 않습니다.

이제 각기 갈 길로 갑니다.

 

그럼 사무엘상 27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무엘상 27장에 오면 다윗이 무슨생각을 합니까?

 

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삼상27:1-2, 개역한글)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다윗은 삼천명의 군대에게 가서 군사적을 격파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도덕적으로 승리했습니다.

10년 이상의 쫓고 쫓기는 이 게임에서 다윗은 드디어 도덕적으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언했고 사울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기가 잘못했음을 인정했고 다윗이 복을 얻고 큰일을 행하고 승리할것을 말했습니다.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27장에서는 이상하게 그는 갑자기 추락하고 맙니다.

승리의 이빨속에서 패배를 낚아챘습니다. 다윗이 그런 상황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마음이 중요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4:23, 개역한글)

 

우리 마음처럼 중요한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안보, 평화, 행복, 안전 이 모든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 있습니다. 도둑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러한 것들을 빼앗길때 우리는 불안해지고 어려움 가운데 빠지고 불신속에 빠지게 됩니다.

 

빌립보서 1장 말씀을 보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평화,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속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그는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는 가장 비참하고 가장 절망적인 우울속에 빠져버릴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능성이 있는 후보자 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빌립보서를 기쁨에 관해서 씁니다.

그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했을까요?

 

첫째, 여러가지 환경이라고 하는 테러 리스트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그냥 환경을 본다면 우리는 주님을 볼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환경을 본다면 환경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환경이라고 하는것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여러 기쁨과 평안과 안전함을 빼앗아 가면 우리는 불안해지고 불신속에 빠집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한가지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에서는 복음의 진전, 복음의 대의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한가지) 마음입니다.

 

환경으로 인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할때에 그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환경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찢기고 나뉘게 될때에 우리는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대의를 생각하고 복음을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진전을 이루고 복음이 진전을 이루게 될때 우리 마음은 단마음 가운데 여전히 기쁘고 행복과 평안이 유지될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테러리스트의 또 하나를 말씀합니다.

 

두번째, 그것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기쁨을 많이 상실해 버립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순복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땅에 오신 주님이 보여주신 그러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순복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이길수 있습니다. 여전이 우리가 평안을 누릴수 있습니다.

 

세번째, 세상에 속한 여러가지 것들입니다.

세상의 여러가지 것들 때문에 우리가 마음속이 혼란스럽고 괴로워지고 마음속에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영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네번째,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는 근심입니다.

이 근심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누군가가 근심은 '흔들의자'라고 했습니다. 흔들의자에 앉으면 하루종일 흔들리지만 1cm도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근심입니다. 대부분의 것들은 근심해도 일어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심해야 할것들,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먹혀 들어갈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것은 안정하는 마음입니다.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4-7, 개역한글)

 

우리 마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일로 인해서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찾아옵니다. 그럴때에 우리는 주님앞에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간구로 기도할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7, 개역한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우리 주님께서 지켜주십니다.

주님앞에 나가게 될때 그렇습니다.

 

다윗은 너무나 오랫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는 지쳤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대로 이 스트레스가 너무나 컸습니다.

이세상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더 많은 스트레스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추격을 당하고 거짓고소를 당하고 위험속에 빠지고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이 모든일 가운데 그는 너무나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와같은 우울증에, 깊은 근심속에 빠져도 될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기도하라>

 

주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도록 해야 합니다.

다윗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우리 주님앞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환경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우울한것이 가득히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비관론을 폈습니다.

 

우리가 불신할 때, 항상 잘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입니다.

불신하게 될때, 우리는 내 문제 대해서 내가 염려하고 내 늪속에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가드(블레셋)로 도망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울이 나를 찾다가 못찾을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블레셋으로 도망갔는데 어떻게 찾겠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오래전에 블레셋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는 비록 보좌에 오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앞에서 도덕적으로 이스라엘에 남아있으면서 모든 고난을 당하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지난번 우리는 그일라의 사람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았을때, 그는 목자였기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추격을 당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서는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들키는 그것을 희생하고서라도 그일라에 가서 그의 백성들을 구해야 한다는 왕으로서의 책임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고고한 책임이요 고고한 특권입니다. 이것을 다윗은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라 할찌라도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 포스트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포스트를 버리고 외국으로 가서 거기가 안전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대의도 없고, 하나님 앞에 책임도 이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요한것들을 다 망각해 버리고 자기 방식으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는 그와같은 것입니다.

 

그가 가드에 갔을때, 그가 가드의 왕으로부터 시글락을 얻게 됩니다.

시글락은 가드로부터 상당히 남쪽에 있습니다. 원래 시글락은 유다 땅이었지만,이 당시에는 블레셋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상당히 유다와 가까운 땅입니다. 유다 변경에 있는 땅입니다.

 

이전에 한번 다윗은 가드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왕으로 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왕이 아닙니다. 왕으로 주장할수도 없습니다. 육백인과 그의 처자들을 데리고 아기스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 되었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삼상27:3, 개역한글)

 

사실 이 얘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다윗이 육백명과 함께 갔다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일부러 이 두 여인들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앞에서 아비가일과 결혼하고 곧 또 아히노암과 결혼합니다. 아내가 벌써 셋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가드로 간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께서는 이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드로 도망한것이 사울에게 알려지자 사울이 더이상 다윗을 쫓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예상한 대로입니다. 당연합니다. 블레셋으로 도망갔는데 어떻게 사울이 쫓아오겠습니까?

다윗이 아기스에게로 찾아나갔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지방 성읍 중 한 곳을 주어 나로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거하리이까 (삼상27:5, 개역한글)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다윗은 골리앗을 격파한 사람입니다. 그가 블레셋을 향해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이 할례없는자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전에 블레셋을 이야기 할때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차이가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둘다 애굽에 갔다가 약속의 땅에 다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어린양의 피를 경험한적도 없고 홍해가 갈라지는것을 경험한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는것과 반석에서 물이 솟구치는것,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한적이 없습니다.

 

요단강이 마른땅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가는 그러한 경험을 블레셋은 한적이 없습니다.

블레셋은 기독교계를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의 사람이 기독교계가 행하는 일에가서 엎드리고 그것이 대단히 위대한 일처럼 이야기하고 그것에 마치 은혜를 받는것처럼 행동하는 처사는 매우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시글락에 가서 어떠한 일을 경험하는가 라고 하는 것을 성령은 우리에게 낱낱히 이야기 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이렇게 저자세로 아기스에게 나아갔습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왕도입니다. 블레셋의 다섯 큰 도시 중 가드는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유다땅 가까운 도성입니다.

거기에 다윗은 나가서 "내가 어떻게 왕도에 있겠습니까? 나에게 조그만 시골 땅 하나만 주십시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시글락을 얻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겸손해 보입니다. 왕 앞에서 어쩌면 아첨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가 가드에 있는다는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가 비록 블레셋에 갔다해도 그는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이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양심이 그것을 부인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블레셋에 갔을때,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받아주기는 하지만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행방을 따라다니고 조사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가드에서 멀리 떠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겉모양으로는 대단히 겸손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글락으로 갑니다. 다윗이 16개월동안 시글락에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일년 사개월 입니다. 한동안은 참 평온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굴로 산으로 정착한 장소도 없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두려움속에서 그는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적어도 시글락을 얻었습니다.

 

이제 거기는 블레셋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곳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안전합니다. 사울이 쫓아오지 않습니다. 아내들도 아이들도 거기서 기를수 있습니다. 상당히 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6개월 동안 시글락에서 생활 했을때, 다윗의 마음에 이러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진작 이런데 와서 살걸, 왜 여태까지 그렇게 하고 살았을까?'

 

그러나 나중에 시글락이 불타고 자기의 육백명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는 것을 만일 다윗이 알았다면 그는 16개월동안 시글락에서 살면서 "진작 이런데 와서 살았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16개월이라고 하는 이 기간은 갔습니다.

이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가 지나게 될때, 상당히 편리한 생활을 유지하며 살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도자로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게 이와같은것을 제공해 줄수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방법이 아니고 블레셋이 주는 평화요, 편리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형제자매요,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이 진리의 말씀을 버리고 마치 종교계가 우리에게 뭔가를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가서 구걸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종교계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것이 마치 위대한 진리인 것처럼 가서 엎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당장 16개월 동안은 "왜 진작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할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에게 찾아오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얼마 후에 그들은 깨닫게 될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 먼저 기록된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받는다면 우리는 고난속에서도 진리의 말씀대로 계속 가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때, 기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40년을 참지 못해서 하나님께 왕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윗이 곧 보좌에 오릅니다. 조금 전 그는 사울을 향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삼상26:10, 개역한글)

 

곧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면전쟁이 터지고 사울은 거기에 나가서 죽게 됩니다.

하나님이 제거하신 때는 하나님게서 지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거의 다 다다랐는데 다윗은 참지 못하고 그대로 그냥 가드로 가버렸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7장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려움속에서 우리가 훈련을 받게 될 때, 마지막에 가까이 갔을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는 것입니다.

거의 다 도착해서 넘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다윗은 가드에 갈 필요도 없고 가드왕 앞에서 굴욕적으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얼마를 참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의 때까지 우리가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의 때까지 우리가 주님을 붇들고 가야 합니다. 비록 힘들다 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빛이 있습니다. 위대한 상급이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길이 우리앞에 펼쳐지는 것을, 우리가 마음속에 부작용이나 슬픔이나 비극없이 기쁨으로 그것을 받을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글락에서 16개월을 살았습니다.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

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10 아기스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로하였느냐 다윗이 가로되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니이다

(삼상27:8-10, 개역한글)

 

다윗은 그술사람과, 기르스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전부다 전멸시켰습니다.

그리고 노획물을 얻습니다. 그 노획물 중의 상당부분을 자기의 주인 아기스에게 가져가서 바칩니다.

 

그리고 아기스가 "어디를 쳤느냐"라고 질문할때 '유다를 쳤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 (삼상27:12, 개역한글)

 

아기스는 다윗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가서 아기스가 오도 되도록 거짓말을 합니다.

다윗이 가드에 갈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은것을 보았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일부다처를 일부러 거기서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기스에게 나갔을때도 다른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조공을 갔다 바치고 자기 동족을 공격했다고 이야기 함으로서 신임을 얻습니다.

 

이 모든것들은 그가 불신 가운데 들어갈때, 반드시 나오게 되는 증상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변명을 수많이 하지만 그 삶 속에서 반드시 이와같은 죄악들, 하나님 앞에서의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그들의 삶속에서 증거로 나타납니다.

 

다윗은 이 길을 걸어갔습니다. 16개월 동안 계속해서 이와같이 살았습니다.

 

우리 앞에는 딱 한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영광스럽고 위대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우리가 순종하는 길입니다. 고난이 있어도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우리가 나아가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중에 영광을 받고 그 과정이 끝나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그 과정중에 주님께서 우리의 모양을 만들어가시며 구비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쓸만한 사람으로, 더욱 더 개선된 사람으로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치할 사람으로서 우리를 훈련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24장에서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26장에서 또 다시 다윗이 이 일에서 승리하는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인 25장에서 다윗은 실패할수 있었습니다. 왕에게는 실수하지 않았지만 나발이었기 때문에 실수 할뻔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약점입니다. 시험입니다. 여기서 아비가일이 그를 구원해주었습니다. 승리했습니다.

 

승리는 대단히 위험한 순간입니다. 승리는 대단히 놀라운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승리야 말로 우리 삶속에서 대단히 경계하고 조심해야할 순간입니다.

 

갈멜에서 승리했을때, 엘리야는 곧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했을때 그는 너무나 두려워서 도망갑니다. 호렙산에 가서 "하나님 나를 데려가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너무나 깊은 우울증속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깊은 패배속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승리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때에 우리는 더욱 더 겸손해야 합니다. 더욱더 엎드리고 더욱더 주님앞에 의지하고 주님앞에 가까이 가야 합니다.

승리하는 순간이야 말로 마귀가 마음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연약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순식간에 높아지고 교만해질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리했을 때 어떻게하면 안전할 수 있을까요? 승리할 때, 우리는 여전히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면 여전히 우리는 더욱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을 누릴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도, 합법적이며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승리의 순간이야말로 마귀가 우리 가운데 침투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높이고 쓰러지도록 만듭니다.

 

다윗은 가드로 도망가고 난 이후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사무엘상 28장을 통해서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희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교훈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고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우리가 온전히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가야 할것입니다. 그것만이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저희들을 복주시고 저희 마음속에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