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다윗의 생애03_다윗의 유리함 >
1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2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4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삼상19:1-7, 개역한글)
저희는 어제 18장에서 다윗이 미갈과 결혼한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18장 마지막 절에 보면 엘라 골짜기에서 패배했던 블레셋이 다시 그들의 군사를 재정비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해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도 여전히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군사적으로 블레셋을 압도하고 승리하는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또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역사하고 또 그는 다윗을 죽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의 양피 200개를 가지고 올 뿐 아니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사울은 계속해서 이 모든 문제가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삼상19:1, 개역한글)
이제 사울은 공공연하게하게 선포 합니다.
전에는 은밀히 다윗을 죽이고자 노력했지만 이제는 공개적으로 죽이고자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요나단을 생각하게 될때 그는 아버지와 다윗 사이에 있습니다. 다윗과는 이제 친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입장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인간생활에서 이와같은 어려움들을 우리가 때로 경험합니다.
대단한 반목과 미움, 질투 사이에 끼어 있을때, 바로 처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요나단은 이와같은 일로 인해서 그가 죽는 순간까지 고통 가운데 빠져 듭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그가 인도자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대행권세를 바로 사용하지 않게 될때, 그것이 얼마나 자기가 인도해야 할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지요. 우리는 이러한 교훈도 보게 됩니다.
대행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사용하게 될때에는 그 특권만큼의 동일한 책임도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그 권세를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변명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용하게 될때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바른 분별과, 결단 이 모든것은 그의 몫입니다. 사울은 여기서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딸인 미갈도 20장에 보면 거짓말하게 만들고 아들인 요나단도 대단히 어려운 상황속에 빠져 들어가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이제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처신 할까요?
요나단은 왕인 부친과 이야기해서 그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보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을 만나 다윗을 대변합니다.
4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삼상19:4-5, 개역한글)
사울은 이것을 고맙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나가면 죽을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다윗은 자기를 구원한 사람이고 국가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한 구원자 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악입니까?
요나단이 이것을 지적했습니다.
신명기 율법의 말씀을 보면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라고 기록되 었습니다.
무죄한 피를 흘려서 범죄하는 자는 자기의 피를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말씀입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항상 하던 습관대로 대단히 독실한 말을 합니다.
사울의 마음은 다윗을 죽이는데 결단하고 철저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때때로 어떤 상황에 들어가게 될때 그의 마음은 대단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가 도대체 어떠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지 의심할수밖에 없는 말을 합니다.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삼상19:6, 개역한글)
그가 맹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나서 그는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는지 알수 없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찟겨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의학에서는 그것을 정신분열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를 전신분열증 환자라고 말할수 없습니다만, 그의 생각이 나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때는 독실한 말을 하면서 다윗이 절대로 죽지 않을것이라고 요나단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행동은 전혀 다른것이었습니다.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지탄받는 문제 입니다.
언행의 일치, 불일치는 그리스도인의 간증과 대단히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행이 일치하고 있나요?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검토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한 말, 약속에 대해서 나는 성실한가요? 나는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고 있나요. 내가 공언한 믿음의 신앙과 내가 걸어가는 방향과 길을 일치하고 있나요.
사울을 우리가 보게 될때 이러한 교훈을 받습니다.
요나단이 이제 다윗을 불러서 사울에게로 인도합니다.
다윗은 장인된 사울왕이 자기를 어떻게 대우할것인가에 대해 상당한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에 요나단이 그의 마음에 안심을 줍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삼상19:7, 개역한글)
19장에서 제일먼저 다윗을 지지해 준 사람이 요나단이었습니다.
두번째 다윗을 지지해 준 사람은 미갈입니다. 세번째 다윗을 지지해 준 사람이 19장 안의 사무엘입니다.
이 세사람이 다윗을 지지해 줍니다.
사울이 있는 기브아의 궁전에는 다윗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울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간신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과 술수를 부렸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윗은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여기는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그 시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 후에 그는 왕을 돕기 위해서 수금을 탔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의 병기든 사람으로서 사울의 곁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왕으로부터 대단한 질투와 시기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나단은 왕을 설득해서 그를 왕에게로 다시 인도해 드렸습니다.
이후 말씀을 보면 다시 전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도하시게 될때,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상황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관하고 계심을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훈련하시고 다윗에게 어려움을 주십니다. 우리가 통과하는 환경을, 우리는 때때로 통제할수 없습니다. 그 모든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때때로 환경은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때때로 환경은 우리를 대적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물론 사단과 같이 우리를 대적하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어려움이 우리에게 올때 우리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통과하나요?
여러가지 다양한 환경속에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때때로는 훈련하십니다.
아가서 말씀을 보면 저자는 <북풍아 불어라 남풍아 불어라>라고 합니다. 그 바람이 불어올때 향기가 흩날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우리를 제련하시고 훈련하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간증을, 아름답고 위대한 향기를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다윗은 그와같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서 싸워서 이깁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사울의 마음속에는 다윗이 문제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다윗을 드십니다. 상황속에서 다윗을 구원하시고 죽음의 전쟁터에서 그를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용맹스러운 용사로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런 부인할수 없는 상황속에서 사울이 다윗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심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것,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때, 세상은 부인할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디발은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세상은 봐야 합니다.
지역교회는 무엇입니까? 이곳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이곳에 주님께서 계시다는 것은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반드시 반역하고 자기 길을 가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같은 모습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주님앞에서 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사울은 승전하는 다윗을 볼때, 그 마음속에 또 다시 질투심이 발발하고 악신은 역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탑니다. 그때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삼상19:10, 개역한글)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있고 사울의 손에는 단창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도우려고 하지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대조적인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입니다. 그는 사울의 창에 맞아서 죽을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게 될때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하나님을 믿을수 있습니다.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삼상19:11, 개역한글)
참으로 불행하고도 불행한 사건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장인이 사위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왕이 구원자인 영웅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왕은 그를 계속해서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우고 건설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일은 파괴하는 것입니다.
파괴된것을 하나님은 다시 세우십니다.
사울의 종들이 와서 집을 포위하고 있을때 미갈이 다윗을 보호합니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미갈은 아내입니다. 자기 남편을 보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삼상19:11, 개역한글)
그래서 다윗을 창으로 달아내립니다.
사도바울도 하루는 창문에 광주리에 담겨 창밖으로 내려지지 않았습니까? 사도바울은 고리도서에서 이와같이 피했던 간증을 한적이 있습니다.
다윗도 창을 통해서 도주하도록 미갈이 손을 씁니다.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털로 엮은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삼상19:13, 개역한글)
미갈은 마치 다윗이 침대에 자고 있는것처럼 연출합니다. 그때 사용한것이 '우상'입니다.
이것은 참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미갈과 결혼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는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하면서 20년이 지났을때, 결심하고 하란을 떠납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을 좇아와서 조사하던 때에 라헬에게는 드라빔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약대의 안장밑에 감추었습니다.
야곱은 드라빔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우상이 있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미갈은 이제 다윗이 병들었다고 변명합니다.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삼상19:15, 개역한글)
사울의 마음은 더 강해지고 급해졌습니다.
사울의 부하들이 들어가서 보고 그들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미갈은 얼버부리는 변명을 합니다.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삼상19:17, 개역한글)
대적이 누구입니까? 자기 딸의 남편입니다. 딸의 남편을 죽이는 불행한 일을 사울이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것을 감행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도 사울의 마음속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영혼의 복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다윗이 양을 친다는것은 양들의 복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말하게 될때 그것은 목자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영혼의 유익을 마음에 전혀 두지 않았습니다.
미갈은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미갈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미갈이 다윗에게 도망가라고 이야기 했고 다윗은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아버지 앞에서 거짓말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얼버부리는 말입니다. 있지도 않는 변명입니다. 이런 모든 불행이 사울집에 가득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족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삼상19:18, 개역한글)
다윗이 라마로 갑니다.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입니다.
다윗은 마음을 위로받을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도주할것인가를 생각할때, 자기에게 기름부은 선지자 사무엘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왜 이와같은 어려움속에 빠졌을까요? 이 어려움은 다윗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는 들에서 양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무엘이 찾아와서는 다윗에게 기름부었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이 다윗임을 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눈에 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궁에도 가게 되고 엘라골짜기에 가서 골리앗을 격파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의도해서 엘라골짜기에 간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엘라 골짜기에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여인들의 노래로 사울은 다윗을 질투합니다. 질투는 음부보다 강합니다. 잔인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와같은 질투속에 들어간 사울에게서 목숨을 부지해야 합니다.
다윗은 불행, 슬픔, 괴로움, 이 모든일을 겪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나요?
이는 주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믿은 믿음 때문에,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 안에서 걸어가게 될때 겪어야만 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 핍박,반대, 불이익이 있습니다.
다윗이 이와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무엘을 찾아갔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털어놓았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다윗은 그 마음의 많은 상처가 나아졌을 것입니다.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사무엘이 다윗을 데리고 나욧으로 갑니다. 나욧은 선지자의 생도들이 모여서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장소입니다.
나욧은 목자의 거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곳으로 신하들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이제 나욧에서 어떻게 다윗을 보호하십니까?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삼상19:20, 개역한글)
두번째 사람들을 보냈을때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세번째 사람들을 보냈을때도 같은일이 일어납니다.
네번째는 사울 자신이 갑니다. 그리고 사울도 거기가서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나라 성경으로는 <벌거벗고 누워 있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나체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왕복을 벗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18장의 말씀에서 엘라골짜기에서 다윗이 대승하는것을 봅니다.
그 위대한 승리를 보았을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열납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위대한 업적과 그의 위대한 사역과 인격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게될때, 같지 않습니까?
갈보리에서 승리한 주님을 보게 될때 그 사역이 위대하지만 주님의 인격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우리는 매료 됩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폐위식을 가졌습니다.
자기의 겉옷, 황태자복, 띠, 이 모든것을 벗어서 다윗에게 내어놓았습니다.
황태자는 마땅히 사울을 이어 왕이 되어야 하지만 요나단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기름을 부었다는것을 그는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끝없이 불타오르는 시기심 속에서 다윗을 끝까지 쫓아가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일과는 너무나 반대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욧에 갔을때, 사신들도 예언했고, 사울도 예언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사울은 옷을 벗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원해서 벗은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함으로 인해서 벗은 것입니다.
오래전에 발람은 모압의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그를 고용했을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왔지만 성령께서 그의 입을 막고 축복하는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할때, 사울은 그가 원하는 일을 할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는 수많은, 다양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를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하시지만 또한 그를 보호하고 계시다는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실상 이와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 때문에 많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썼습니다.
사무엘상 19장은 요나단, 미갈, 사무엘 이 세사람이 다윗의 편에 서서 그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신다는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때때로 핍박을 당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전부로만 우리에게 허락지 않으십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지원하는 사람을 두십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뚜렷한 교훈입니다.
이제 저희들은 20장 말씀으로 가겠습니다.
20장에 가면 다윗이 라마에서 요나단에게 찾아옵니다.
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2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삼상20:1-2, 개역한글)
요나단은 나욧 사건으로 인해서(사울의 의지가 어찌되었든 성령께서 그것을 막았으므로)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것은 아닐것이다라는 위로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부정합니다. 그는 사울왕의 확실한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사망 사이는 한걸음 뿐이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삼상20:4, 개역한글)
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6 네 부친이 만일 나를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7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찌니
(삼상20:5-7, 개역한글)
요나단은 이런 숙제를 안고 왕을 만나야 합니다.
8 그런즉 원컨대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부친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뇨
9 요나단이 가로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삼상20:8-9, 개역한글)
요나단은 계속해서 다윗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려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이러한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위험할때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는 즐거울 때 같이 있는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는 위험할 때 떠나 버립니다.
요나단은 이와같은 자신이 처한 대단히 어려운 상황속에서 친척된 다윗을 위해 움직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당시 요나단의 나이를 53세로 보고 다윗의 나이를 23-24세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나이차이는 약 30년의 차이가 납니다. 요나단은 대단히 연장자 입니다. 다윗은 청년입니다.
이와같은 사이에서, 연령차에도 불구하고 친구간의 관계가 있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친과 다윗간의 대단한 어려움 사이에서도 요나단은 다윗을 위로하고 세우려고 합니다.
정말로 대단하고 진정한 친구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친구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가게될 때, 우리 주변의 성도님들이 이러한 친구일 뿐 아니라 나도 다른 성도들에게 이와같은 친구인가요?
1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부친을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보내어 네게 알게 하지 않겠느냐
13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삼상20:12-13, 개역한글)
그리고나서 요나단은 다윗과 함께 언약을 맺습니다.
14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찌어다 하니라
17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삼상20:14-17, 개역한글)
여기의 사랑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뿐만 아니라 나의 후손들, 너와 너의 후손 사이의 맹약을 요나단은 이야기 합니다.
이 맹약으로 인해서 다윗은 사무엘하 9장에서 사울의 집에서 은혜를 베풀어야 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이 옵니다. 다윗은 그에게 어떤 호위를 베풀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호위를 베풀었습니까?
우리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 아들 때문에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습니까?
여기 위대한 맹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요나단은 이미 황태자복을 벗고 다윗에게 "네가 왕이 될것이다." 라는것을 이야기 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는 그 이후에 벌어질 모든일들에 대해서 맹약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하는 위기 순간에 이와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19 너는 사흘을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20 내가 과녁을 쏘려 함 같이 살 셋을 그 곁에 쏘고
21 아이를 보내어 가서 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찌니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22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편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삼상20:19-22, 개역한글)
그리고 어떻게 그 소식을 알릴것인지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이와같은 약속을 하고 다윗은 들에가서 숨었습니다.
월삭이 되어 요나단은 식사자리에 나왔고 사울이 무슨말을 할까 주시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삼상20:26, 개역한글)
27 이튿날 곧 달의 제 이일에도 다윗의 자리가 오히려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28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29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삼상20:27-29, 개역한글)
이때 사울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나로 가게하라>
전에 딸, 미갈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로 가게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미갈의 거짓 변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똑같은 말이 나왔을때 사울은 격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문제 보다도 자기 형과 베들레헴에서 제사드리는 문제에 더 치심하고 있다는것에 사울을 더 격노케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황태자로서 왕이 되려고 하는 의사가 없다는것은 사울로써는 견딜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보좌에 앉아 있을 뿐 아니라 세습제로 자기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고, 세상의 왕권 군주제에서 있는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이미 사울을 폐위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는 짓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반역하고 배도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서 그는 자기 뜻에 맞지 않기 때문에 격노합니다. 여기의 말씀을 읽게 될때 참으로 슬프게 됩니다.
사울이 쓰는 언어는 얼마나 비루하고 저속한가요. 이것은 사실 읽기도 부끄럽습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삼상20:30, 개역한글)
참으로 저주와 같은 말입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내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내를 깎아 내리는 말을 합니다.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요나단은 자기아내의 아들이기만 한가요? 자기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얘는 누구를 닮았을까?"
좋은부분이 보일때는 자기를 닮았다고 하고 나쁜 부분이 보일때는당신을 닮았다는 말을 흔히 하지 않습니까?
여기 왕이 이런이야기를 합니다.
그가 이야기 하는 대로 요나단이 비루한 아내의 소생이라고 한다면 자기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사람이 격노하게 될때, 논리를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성을 얻는 사람보다 자기의 마음을 통제할줄 아는 사람이 더 위대한 용사라는 것을 압니다. 이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잠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을 통제할수 없습니다. 마음이 폭풍속에서 밀려가는 배와같이 어디로 갈줄을 알지 못할때, 나타나는 언어를 사울은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계속해서 우리가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하는 주제 입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을 크게 위로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을때까지 상처주기도 하고 잊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짧은 혀는 너무나 독하고 불과 같아서 모든것을 삼킵니다. 또한 길들이지 못하는 혀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사울은 악한 마음속에서 자기 아들을 격하시키고 강등시키는 말을 합니다.
아들을 남편은 아내를, 아버지를 강등시킨다는 것은 자기를 추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이러한 말을 합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삼상20:31, 개역한글)
얼마전에 사울은 요나단에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그런일은 있지 않는다>
독실한 말을 하면서 그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여기보면 그는 죽어야 마땅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악신이 역사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단이 주장하고 있는 사람의 슬픈 마음입니다.
이때 사울은 전에는 다윗을 향해서 단창을 던졌는데, 이제는 자기 아들을 향해서 단창을 던집니다.
정말로 그는 실성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 다릅니다.
그의 아들을 향해서 입으로는 보좌에 올라야 한다고 하면서 그 화를 못참아 아들을 죽이려고 단창을 던집니다.
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 부친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줄 알고
34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나고 달의 제 이일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삼상20:33-34, 개역한글)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한것 때문에 요나단은 그 마음이 슬펐습니다.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게 됩니다.
35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36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나의 쏘는 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삼상20:35-36, 개역한글)
요나단은 다윗에게 '도망가라'는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41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삼상20:41-42, 개역한글)
두사람은 이제 헤어집니다.
그리고 사울의 확실한 뜻을 알았기에 다윗은 떠나 갑니다. 그러나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이제부터는 방황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56:8, 개역한글)
이것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나의 유리함>
사실상 사무엘상 21장에 오기 전에도 다윗은 라마로도 갔었고 도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떠나갑니다.
떠나가게 될때 다윗은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유리함을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유리한다면, 주님의 이름때문에 고난을 받고 핍박을 당한다면,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계수하고 계심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고난 당하는 것은 우리가 피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때문에 고난 당함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바꾸고 이렇게 논리를 펴서 피하려고 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사회 생활에서도 가정생활에서도 모임에서 방향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을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꾸 피해가려고 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계수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가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할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수하고 계신다는것을 안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 그렇게 할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수하셨습니까?
나의 눈물을 '나의 병'에 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의병에 담습니다. 내가 나의 눈물을 내병에 담는것이 아닙니다. 내 눈물이 있지만 이 눈물은 주님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눈물을 주님께서 주님의 병에 담습니다
첫째, 주의 병입니다.
주님께서는 병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병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우리 눈에 주님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없다면 아무것도 담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할 때, <내가 네 눈물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때, 눈물이 있습니다. 인간은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샘을 만드셨습니다.
의학적으로 여러가지 기능을 위해서 준비한것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이 샘은 단순히 생리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게될때 반드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남 모르게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모임을 인도하는 인도자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립니까?
때로는 불신자들이 그렇게 복음을 전해도 반응하지 않고 때로는 성도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해도 받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서 모임이 어려움을 겪고 본인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와같은 것을 생각하게 될때, 인도자들은 말할수 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이 눈물을 주님께서는 준비하신 병에 담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과연 있습니까?
그것이 내 잘못 때문에 흘리는 거룩하지 못한 눈물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주의 병이 있습니다.
둘째, 주의 책이 있습니다.
<주님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어떠한 상황속에서 어떻게 눈물을 흘렸는지,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렸는지 이 모든것을 주님께서는 상세히 책에다가 적어놓고 계십니다.
주님은 물론 책에 적지 않으셔도 다 기억하십니다. 그러나 책에 적었다고 하는것을 우리에게 아름답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주님께서는 알고 있고 그리고 상을 주실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펴서 주님께서는 상을 주실 것입니다. 나중에 눈물을 닦게 될때 그저 눈물을 닦을 뿐 아니라 그 책에 왜 눈물을 흘렸는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순간 말할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주님 때문에 당하는 불의, 거짓고소, 억울함, 누구에게도 설명할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앞에서 견고히 갈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담으셨고 책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책에만 기록해 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 인도하실것과 어떻게 상급을 주실것에 대해서 주님은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게 될때 앞으로 무엇이 있을것인가에 대해서 기대해야 합니다.
요셉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첫째가 고난이고 그 다음이 영광입니다.
사단의 원리는 먼저 영광과 기쁨과 즐거움이고 그 다음에는 모든 쓴맛입니다. 모든 비루함이고 모든 심판입니다. 모든 영원한 비극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먼저 고난이고 눈물입니다. 그리고난후에 영광입니다. 모든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상급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환희가 우리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다시한번 발견하고 우리 마음에 세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21장에 보면 다윗은 이제 놉으로 도망합니다.
놉이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가깝습니다. 산에서 보면 시야에 보일 정도로 가까운 동네 입니다. 거기는 제사장이 거하는 곳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타락하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고 실로가 무너지고 난 이후에 사무엘 상에서는 회막과 성소에 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후 여기에 성소에 관한 문제, 제사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놉으로 도망갔습니다. 도망갔을때 그는 어떻게 합니까?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 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내 손에 주소서
(삼상21:1-3, 개역한글)
첫째, 배고픈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서 음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놉에서 얻으려고 하는것은 음식과 무기 입니다. 아히멜렉이 다윗을 만났을때 떨었습니다. 이것은 두려워서 떤 것입니다.
'왜 다윗이 혼자 있을까?'
다윗은 왕의 사위입니다. 왕의 특별 경호원입니다. 그는 용사입니다. 그는 이 나라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홀로 다닐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홀로 다닐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람은 홀로 다닐수 없습니다. 그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경호원이 항상 같이 따라 다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혼자 왔습니다. 그때 다윗이 거짓말로 설명합니다. 사울이 자기에게 비밀 임무를 맡겼기에 홀로 왔다고 지어냅니다.
21장의 두번째 단락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놉에서 가드로 도망합니다. 가드는 블레셋에 있는 도시입니다. 블레셋은 다섯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왕이 있고 방백이 있습니다. 다섯개의 도시가 연합해서 이루어진 독특한 나라 입니다. 한 왕이 있는것이 아니고 다섯의 도시와 다섯의 왕이 연랍되어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그중에 아기스가 왕인 가드로 도망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도 다윗은 또다시 이스라엘을 떠납니다만은, 그가 첫번째 떠났을때, 가드로 가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유리하게 될때 그의 연약속에서 이루어지는 슬픈 타락입니다.
그 시작은 거짓말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때때로 어떤때는 하얀 거짓말인가, 까만거짓말인가 말하기도 합니다.
어쩔수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해서 하얀거짓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서 가드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가 가드에 온것이 가드의 방백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21:11, 개역한글)
또한 다윗은 놉에서 골리앗의 칼을 얻었습니다.
블레셋으로 가는데 왜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갈까요?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 아닙니까?
그는 자기를 가려야 하고 숨겨야 할텐데 왜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갔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믿음으로부터 멋어나면 묘하게 논리적이 아니게 됩니다.
묘하게 바보가 되어 버립니다. 앞뒤가 안맞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들 가운데 믿음으로 걸어가지 않게 되는 성도를 보게 될때 반드시 이와같은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하면서 이와같은 일이 함께 할까요. 왜 이렇게 어리석게 행할까요? 그래서 권면을 하지만 불신에 빠져있는 성도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대단히 강합니다. 자기가 대단히 똑똑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으로 계속해서 가게 될때, 거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지불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불신 가운데 우리가 걸어가게 될 때, 지불하지 않고도 갈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불신 가운데 가면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나고 구멍이 뚫리고 거기에서 여러가지 일들이 비극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아니라고 부인하는것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다윗은 이제 이런길로 서서히 가고 있습니다. 유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약점을 가지게 합니다.
시편 56편 8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주의 병과 주의 책에 모든것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계심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걸어가는 방향과 고통 당하는 모든 모양을 주님께서는 주시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내가 의식하지 못한다면 이제 나는 마치 버려진 사람과 같이 생각하게 되고 내 길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것과 같은 착각속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그때, 내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올무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때문에, 믿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걸어가게 될때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는분과 같이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것과 같이 내가 생각하게 될때 나타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지금 처한 어려움 입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 걸어가게 될때,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간증하십니다.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될때 그 과정속에서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불이익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주님을 의지해서 믿음속에서 견딜수 있는가, 하는것을 주님은 테스트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테스트 하십니다.
다윗을 테스트하는 것은 훈련을 위해서 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통치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통치할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게 될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와같은 위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사람으로서의 지혜와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체통을, 하나님 앞에서의 은혜 가운데 마음속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준비합니까? 이생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때로 우리가 생각할수 없는 여러가지 이상한 어려움을 우리 환경속에서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주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모든것을 아시고 그것을 감당할수 있도록 훈련을 잘 받아서 구비되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제 보좌에 올라갑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될때, 그는 마음속에 이런 부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릴수 없습니다."
다스린다고 하는것은 판단하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편협하지 않고 바르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계속해서 행할수 있도록 하게 하고 악은 중단하도록 하는 것이 통치자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백성들을을 어린아이인 나는 감당할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에게 무엇을 구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솔로몬은 주님께 다스릴수 있는 지혜를 구합니다.
기브온에서의 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브온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은 기브온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통치자로서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통치자라는 것은 대단히 위대하고 거대한것 같지만, 우리 각 성도들은 결혼하면 가정이라는 나라에서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아내는 돕는 배필로서 가정을 어떻게 세우고 인도할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이 모든것에 대해서 우리는 통치해야 합니다.
모임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 할때에도 여러가지 방면에서 여러가지 각도에서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그러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사회 속에서, 삶속에서 살게될때 우리가 통치할수 있도록 훈련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여러가지 고통과 고난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가 처신하는지를 매순간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와같은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포기할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고난을 받고 그 길을 정면 돌파할 것인가 하는것을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속에 둔다면 우리 삶은 바뀌게 됩니다.
고난을 당할지언정,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붙들겠다고 하는 것은 고고한 주님 앞에서의 선택입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답변을 주십니다. 그리고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약속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일에 참으로 선언하시고 이 일을 위해서 저희들을 격려하시고 수많은 말씀과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물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과 교리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이 제사장에게 가서 음식을 얻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도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사람 때문에 나중에 놉에 있는 모든 제사장들이 다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것을 압니다. "나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다윗은 일생을 후회하는 일을 놉에서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일생을 통해서 그렇게 하지 말았었어야 하는데 라는 일들이 있습니다. 다윗에게도 있습니다.
그때 거기가서 그렇게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 말입니다.
엄청난 학살이 일어납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죽이라는 명령에는 죽이지 않고 제사장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그일에 대해 다윗이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교훈을 받습니다. 그 교훈을 위해서 사무엘상은 우리에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는 여기를 떠나서 가드로 갑니다.
그가 가드로 가는것은 이스라엘을 떠나는 것입니다. 원수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삼손은 누가 원수인지 몰랐던 사람입니다. 삼손에게는 세 여자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블레셋 여자였습니다. 삼손을 통해서 하나님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시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시작만 되었을 뿐 불발되었습니다.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그의 원수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몰랐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모임안에서 우리는 모임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임이라는것은 내가 원하면 이리가고, 싫으면 다른곳으로 가고 그런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부르셨고, 모임도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자리가 귀한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나는 탈영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탈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다윗은 나중에 고백합니다. 그것이 시편 34편입니다.
그가 가드에 가서 무슨일을 경험했습니까?
블레셋 사람이 볼때 원수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제 그 앞에서 다윗은 두려워서 미친척을 합니다. 침을 흘리고 문밑에 들어가서 그적거립니다.
이것은 배우로서 아주 역할을 잘한것입니까? 그렇게 해서 그는 도망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가지고 있는 왕으로서의 모든 위엄은 어디로 가버렸나요.
우리가 믿음 안에서 걸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연약이 아니라 죄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범죄를 가지고 연약이라고 자꾸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신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입니다.
범죄를 저질렀을 때 결과가 나옵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피해 갈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결과를 피해간다고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당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모든 위엄과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정신병자와 같이 간질병자와 같이 행했습니다.
14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 오겠느냐 하니라
(삼상21:14-15, 개역한글)
이러한 간증이 어떠한 것입니까.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한다면 주님의 간증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땅에 떨어질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너무나 뼈아프게 느끼고 시편 34편을 기록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음시간에 이 일과 관련해서 시편도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다음시간은 사무엘상 22장과 23장을 보겠습니다. 여러 형제 자매님들께서 읽고 묵상하시고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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