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7일 화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다윗의 생애02_골리앗과의 싸움 >
다윗의 생애에서 어린아이라도 잘 아는,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인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이 사무엘상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저희들이 계속 추적해 나가고 있습니다.
말씀은 엘라 골짜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먼저 보겠습니다.
1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2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3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4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6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7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8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9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삼상17:1-11, 개역한글)
읽은 말씀에 주님께서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청년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기이한 방법을 통해서 그를 사울의 궁에 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울이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신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울을 다윗이 그 궁에 가서 수금을 탐으로 인해서 도와주었습니다.
오늘은 다윗이 새로운 장소로 가게 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 입니다. 성령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17장 제일 첫번째 서론의 말씀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서로 엘라 골짜기에서 대치하고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한편은 '소고'에 다른 한편은 '아세가' 사이에 진쳤다고 말씀합니다.
저희들이 지도에 보면 여기 소고가 있고 아세가 사이에 엘라 골짜기가 있습니다.
원래 다윗은 베들레헴 사람이고 베들레헴에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악신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울을 돕기위해서 초청을 받아서 기브아에 있는 궁으로 그가 방문하고 또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기간중에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골리앗은 신장이 3미터가 되는 거대한 장수입니다. 그가 입은 갑옷의 크기나 무게는 말로 할수 없이 엄청납니다. 그가 40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도전하고 외친 말은 군대와 군대가 접전하는 것이 아니고 일기토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자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습니다. 군대들이 모여서 싸우는 흔한 고대전쟁 뿐만 아니라 여리고 성의 전쟁도 있습니다. 특히 여리고성의 전쟁은 성경에 나오는 독특한 전쟁입니다.
활도, 창도, 칼도 쓰지 않고 성을 도는 것으로 그 성은 함락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놀랍습니다. 이제 17장에 나오는 이 전쟁은 골리앗과 이스라엘에서 나오게 될 두사람이 대결하게 될 전쟁입니다.
골리앗은 매일같이 조석으로 나와서 위협 합니다. 이스라엘은 공포속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에서 사울이 왕이 되게 될때 백성이 원하는 바는 '우리들도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우릴 대신해서 앞장서서 싸워줄 눈에 보이는 인간의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단한 불신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셨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성경을 통해 잘 살펴보게 될때,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으로서 어떻게 다스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셨는지 그들은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왕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보다 조금 빨리 그들의 왕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왕을 세운 이후에 사울은 꽤 오랫동안 왕이 되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같이 느끼는 것은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고 외적이 침입했을때 대단히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17장에 와서는 골리앗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대결할 사람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때에는 사울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 목적이 그것이었고 백성들의 소원도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원하는 바를 주장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될때, 우리의 육적인 소원은 만족이 됩니다. 또 그것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는 정 반대로 되게 됩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반복해서 확신할수 있습니다. 또한 불신은 언제나 그러한 결과를 비극 가운데 초래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삼상17:8, 개역한글)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사울의 신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 사울의 신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을 섬기게 될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고 불리는가요?
우리는 사람에게 속한 사람인가요? 사람을 섬기는 사람인가요?
이스라엘은 고고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이 보게될때, 사울의 신복으로 추락했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영적인 현주소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내 생애의 목표라는 것을 내가 알고 사람들이 알도록 한다는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간증입니다.
만일 내가 사람의 종이라고 한다면, 만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비극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하락은 여기까지 추락해 있습니다. 간증의 하락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실은 전쟁터 입니다. 전쟁은 승패만이 있습니다. 곧,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거나 지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싸움에서 패배하면 우리는 반드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했을 때, 남자는 조국의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싸움에 끌려가서 죽었습니다. 여자는 끌려가서 성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이유는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 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생활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패배하게 될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고통과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적인 후계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안겨줄것인가 하는 것들은 너무나 두려운 현실입니다.
골리앗의 말은 맞습니다.
"우리가 이기면 우리가 주인이 되고 너희는 노예가 될것이다."
그런데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는것은 이스라엘은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 이하에 보면 이와같은 이새가 다윗에게 심부름을 보내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심부름, 이것은 성경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형들이 잘 있는지 가서 살펴보라고 심부름을 보냅니다. 요셉은 심부름을 갔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심부름을 갔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들도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 이새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을 때에도 다윗은 들에서 양을 적당히 치지 않았습니다.
양을 치게될때, 그는 충성스럽고 책임감 있게 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유를 조금이라도 탕진하지 않도록, 양 한마리도 놓칠수 없다는 마음으로 양을 쳤습니다. 그의 충성된 마음은 부모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이라고 하는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너무나 중요한 주제 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장할 때 부모님 밑에서 권위에 대해서 느끼고 살아갑니다.
아이들이 제일 첫번째로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운다는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하나님이 대행권세로 주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원천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수 있겠습니까?
많은 아이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왜 폐위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생각이 언제나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는 순종을 배운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스린다고 하는것은 어불성설 입니다.
다윗은 심부름을 갑니다.
요셉도 심부름을 갔습니다. 심부름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대단히 놀라운 일 입니다.
요셉은 심부름을 갔다가 형들로 인해서 애굽에 팔립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사건입니다만, 그가 어릴적부터 꾸었던 꿈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따라서 나중에 총리가 됩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실까요?
이미 왕은 기존에 있는데 또 새로운 왕이 있다고 하는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나요?
이것은 사무엘 상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가 심부름을 갔을 때 어떤일에 결부가 됩니까? 엘라 골짜기의 아무도 골리앗의 대항마로 나갈수 없을 때, 소년다윗이 골리앗을 향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심부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회에서나 학교에서나 모임생활을 할때, 심부름이라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에 충성한다는 것, 작은일에 충성한다고 하는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것을 안겨주는가는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7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 이 치스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삼상17:17-18, 개역한글)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일을 받들어 다윗이 가서 살피고 있을때 그는 골리앗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의 고함소리를 듣게 됩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로 갑니다. 아침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권위자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이 한 말이 있습니다.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삼상17:26, 개역한글)
사울을 시작해서 요나단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골리앗에게 나갈수 없던 이 순간에 이 소년이 나와서 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이 이야기를 들었을때 엘리압은 괭장히 격노합니다. 그의 맏형은 다윗이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일이 많이 있습니다.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말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에서부터 나오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26절에 다윗이 한 말이 영웅심리에서 나온 말인가요?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풋내기의 무지에서 나온 말이겠습니까?
그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다윗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온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한낱 말에 그치는 것입니다. 허세일 뿐입니다. 그것을 아무도 믿을수 없고 경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분명히 얘기 했습니다.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이스라엘을 다윗은 무어라고 표현했습니까? 다윗은 믿는바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은 무력했습니다. 그 중의 어떠한 사람도, 사울도 요나단도 아브넬도 군장도 나갈수 없었습니다. 그 미약하고 연약한 군대를 다윗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했습니다.
그 군대는 연약하지만 그 군대의 주인은 <사시는 하나님>입니다. 믿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연약을 바라봅니다. 내 속에 있는 연약과 내 주변에 있는 연약과 모임의 연약과 가정에 있는 여러 연약을 바라볼때 거기서 그냥 쓰러지고 포기하고 말아야 할까요?
아니면 그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볼만한 눈이 있습니까? 다윗은 대단히 위중한 상황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삼상17:28, 개역한글)
엘리압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이 그의 앞을 지날때에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형제들이 다 아니고 말째인 다윗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였습니다.
아마 그때, 엘리압은 인간적인 자존심이 상했을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프라이드가 있습니다. 엘리압은 다윗을 향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엘리압은 다윗에게 방금 읽어드린 구절대로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압의 이러한 말을 볼때에 우리 자신을 점검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상황속에 들어가게 될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우리는 은혜롭게 극복할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시기와 분쟁을 표출할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흉악한 것입니다.
엘리압은 이렇게 말합니다.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엘리압에게 있어서 양을 치는것은 천한 것입니다. 다윗이 하는것을 최소화 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그는 여과없이 드러냈습니다.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이것은 다윗에게 네가 현실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리압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할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엘라 골짜기에서 있었기에 다윗이 사울에게 소개 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삼상17:32, 개역한글)
다윗은 왕을 만났습니다. 이미 전에도 만난 왕입니다. 그는 왕 앞에서 수금을 탔습니다.
다윗은 왕 앞에 찾아가서 먼저 위로의 말을 합니다. 원래는 사울이 쓰러트려야 하는 골리앗입니다. 그러나 쓰러트리지 못할때에 사울의 마음이 얼마나 낙담이 되었을까요. 다윗은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위기속에서 어떻게 왕을 이렇게 위로할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때 세상은 믿음을 감당할수 없게 됩니다. 오직 믿음만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수 없는 것들을 감당합니다. 그런 용량을 하나님은 부여하십니다.
<낙담하지 말것이라>
이 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수 없다면 어떻게 감히 이러한 말을 할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100% 교만이고 100% 완악함 일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제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과연 영웅심리로 그냥 하는말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에게 감당할 힘이 있는것인지를 보겠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삼상17:33, 개역한글)
다윗이 멸시 받게 됩니다.
다윗은 적어도 세사람에게 멸시 받았습니다. 첫째, 엘리압에게 멸시 받았습니다. 둘째, 사울에게 멸시 받습니다. 세번째, 골리앗에게 멸시를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될때, 반드시 장애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반드시 방해하는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것을 헤쳐 나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에 돌입해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쓰러뜨리고자 합니다.
우리의 모든것을 몰락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이 힘을 언제 얻었습니까?
이것은 다윗이 엘라 골짜기에 왔을때 하나님으로부터 그때에 얻은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알수 없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은 그를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왕을 세우실때가 언제인지 알고 계셨고, 어떤 후보자가 왕이 될것인가 하는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보자를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서부터 교육시키고 계셨습니다.
그와같은 교육속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믿음을 축적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모든사람과 다윗의 차이입니다. 저는 성경말씀을 페이지마다 읽게 될때 차이를 보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불가능하다, 다 무력하다, 다 소망이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어떤 사람은 가능하다, 할수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 할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그 다른 차이라는 것은 그 속에 있지 않고 환경에 있지 않고 주변 사람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는 훈련 장소에서 매일같이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준비되고 구비되던 기간중에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간증합니다. 그가 양을 치게 될때, 곰이나 사자가 와서 양을 채가면 쫓아가서 양을 되찾아 왔습니다. 곰이나 사자의 수염을 잡고 그의 발톱과 이빨로부터 양을 보호했습니다.
그는 경험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피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든일에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위대함 때문에 그가 양들을 구했다는 이 증거들을 그는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회가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야만 할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에게 처음으로 이야기 합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삼상17:34-37, 개역한글)
그때와 지금이 똑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전에 사자의 입에서 양을 구해내는것과 엘라 골짜기에서 있는 이 일은 다를것이 없다고 다윗은 말합니다.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훈련은 실전보다 더욱 더 강한 대비를 하는것입니다. 훈련을 받은 사람은 준비된것을 통해서 설전을 통과합니다.
믿음입니다. 승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승리가 있었습니다.
무엇에 근거한 승리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나를 사자로부터, 곰으로부터 구원해주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똑같이 골리앗으로 나를 구원해 내실수 있다, 얼마든지 격파할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때 사울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사울은 참 독실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독실한 말을 할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 독실한 말 이상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현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사울의 입바른 이야기는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그의 영적인 현실에는 없는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비극입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갈수 있다고 하니 사울은 자기의 갑옷과 무기를 내어주고 그렇게 해보라고 합니다. 다윗은 익숙치 못해서 거부합니다.
만일 다윗이 사울의 갑옷을 입고 나갔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어떻게 중무장한 거인을 향해서 나갈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생각하는것이 다른것입니다.
우리가 논리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때로 믿는 성도들 마음에 불신이 역사하게 될때 우리는 내 생각을 의지하고 계산에 의지하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추진해 나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해가 일어납니다.
다윗은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독특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너무나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높은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하나의 막대기와 매끄러운 돌 5개와 물과 주머니를 가지고 나갑니다.
그것을 본 골리앗은 자기를 모욕한다고 하며 다윗을 저주합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이 생각할때에 그의 상대는 소년이 아니라 나이가 든 어른이 무장을 하고 나와야 자기와 수준이 그나마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앞에 소년이 무기도 없이 나왔습니다. 겨우 막대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삼상17:43, 개역한글)
그의 교만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시초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가게 될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요한사도는 요한서신에서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안내 하십니다.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다윗이 전쟁에 돌입합니다.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17:43-45, 개역한글)
골리앗은 무기를 가지고 나오지만 다윗은 이름을 가지고 나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이름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 주님의 이름은, 권세가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모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에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중심으로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을 준비하면서 의지했던 것이 있습니다.
"나는 물매를 의지하고 나간다." "나는 지팡이를 의지하고 나간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생각과 세상을 믿는 사람의 차이 입니다.
세상 사람은 무기를 의지하지만 하나님을 믿는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건물을 의지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직자의 학위를 의지합니까? 눈에 보이는것들, 만질수 있는것들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불신 세계가 추구하는 가치 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합니다. 그 이름에 모든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과 선하심과 긍휼과 은혜와 자비와 거룩과 모든것이 그 이름속에 담겨있습니다.
그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존하시고 공급하실 모든 힘이 충분하십니다.
우리의 믿음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가정과 모임을 생각하게 될때,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믿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름을 의지하게 될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모든 일들을 우리는 보이는 사물을 보는 당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것과 같이 영적인 눈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갔습니다.
또 한가지 다윗이 한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전쟁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것은 간증입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저주할때 자기들의 신의 이름으로 저주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내가 내 이름을 선택해 준 장소에서 예배하고 너희들이 내 앞으로 나오라 하셨습니다. 또한 나올때에 공수로 나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연약과 불신과 믿음 없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가려집니다.
다윗은 바로 이와같은것을 통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려졌다 하는것을 견딜수 없어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가려지는 것에 대해서 견딜수 없어 하나요?
주님의 이름이 가려지는 이 일을 우리가 마음속으로 견뎌하지 못하며 매 시간 살고 있나요? 우리가 이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주변을 변화시키고 복음을 통해서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실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행하고 능력을 얻게 되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영적인 복지가 우리에게 임하게 될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여호와의 이름이 만방에 전파될 뿐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 만방에 떨쳐질것을 그는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게 될때 구원받는것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 전파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될때 영혼들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들의 구원은 부산물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순서를 거꾸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은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우리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것입니다만, 하나님이 영광받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영혼이 구원받는것과 하나님께서 영광받는것이 따로 있습니까? 다윗은 이점에 대해서 마음에 다지고 나가서 선포하고 전쟁에 돌입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들판에서 물매를 돌렸습니까?
이제 그에게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기회는 두 세번 주어지지 않습니다. 단 한번의 이 기회에 놋갑옷을 제외한 돌이 파고들수 있는 곳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한번에 골리앗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그냥 작은사람이 큰사람을 이겼다는 이야기를 멋지게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입니다.
다윗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사단의 위협속에서 공포에 빠져, 죽음을 두려워하고 일생을 매여 사는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서 이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를 사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사망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에게 의롭다하시는 의롭다하는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엄한 승리입니다. 인간의 역사에 이와같은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시간 모두가 멸망으로 다같이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대한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사단이 외치던 위대한 함성은 모두 무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무덤아 너의 힘이 어디 있는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거기서 승리하셨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의 골리앗과의 승리는 약 천년후에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거두신 대승을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말씀해 줍니다.
사사기 13장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인해 40년동안 블레셋의 속박 속에 들어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세우십니다. 그 부모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지만 어느날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 부모, 마누아의 아내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아이가 태어날것이고 그 아이가 장차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블레셋으로부터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그 전에도 물론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사울 당시의 숙적이었습니다. 동편에는 암몬, 서편에는 블레셋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단히 강력한 원수 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원래 기원은 '그레테 섬' 입니다. 그들은 섬사람입니다.
그 민족이 이동해서 애굽으로 내려왔습니다. 애굽에서 잠깐동안 살다가 그들은 팔레스타인, 가나안땅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원수들,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아람 등은 약속의 땅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약속의 땅 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스라엘)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하란으로 갔다가 그는 가나안으로 옵니다. 그리고나서 요셉을 선두로 해서 후에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갔고 거기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400년동안의 노예생활 이후에 그들은 어린양의 보혈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어린양의 보혈이 없습니다.
그들(블레셋)은 홍해를 건넌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길없는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 받은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경험해본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반석에서 솟구치는 음료를 먹어본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마른땅으로 건넌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블레셋)은 무엇을 말합니까? 기독교계를 말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종교적으로 비슷하게 보입니다. 기도도 합니다. 십일조도 냅니다. 종교적인 많은 노력도 합니다. 거룩해 보이고자 하는 소원도 있습니다. 많은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은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종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수입니다.
이스라엘을 이렇게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블레셋을 누가 제압하나요?
이제 다윗은 17장에서 처음으로 골리앗을 제압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냅니다. 슬픈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 움직임, 소원,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기독교계 말고 복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있다는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균형잡혀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많은 어려움과 무질서가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학교의 진리를 따라 모인다는 모임 자체가 기독교계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기독교계의 여러 모양들, 성직 제도 그들이 행하고 있는 여러분야가 아름답고 멋져 보이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17장 말씀은 블레셋을 격파하는 이야기 입니다.
기독교계를 격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것을 들고 읽고 기도도 하지만 생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거듭난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보와 삶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해서 그래서 안달이 나고 그것으로 인해서 소원하고 염원합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예배를 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자꾸 혼으로 드립니다. 얼마나 많은 모임의 젊은 형제자매님이 이러한 모습을 따라 갑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배를 감정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복음전파라고 하는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들을 제거하고 함부로 빼는일을 하기를 원합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 주님보다 더 위에 있는것입니다.
복음이라는것은 우리 주님앞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생의 처음,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반역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주님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다윗 앞에서 쓰러졌습니다. 이제 다윗은 블레셋을 완전히 제거 합니다. 그들의 모든 족쇠와 모든 능력을 타파하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자유케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영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너무나 명확한 답이 나옵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겼습니다. 블레셋은 패배했습니다.
다윗은 현장에 가서 골리앗이 가진 칼로 그 머리를 자르고 그 머리를 이스라엘에 가져가고 그 갑주는 자기 장막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게 될때 사울이 아브넬에게 묻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아브넬이 가로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삼상17:55, 개역한글)
사울은 다윗을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악신이 들었을때 다윗이 수금을 탔고, 얼마전에 자신의 갑옷을 입어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정말로 그가 다윗의 얼굴을 몰라서 묻는 것일까요? 사울이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골리앗을 무찌르는 사람에게 돈과 자신의 딸과, 세금도 면제해주는 특권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자기 딸을 줘야 하는데 사울은 다윗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이것은 '그가 누구냐'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누구냐' 라는 그의 족보를 묻는 것입니다. 그의 가계를 묻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다음 18장과 연계가 됩니다. 18장에 가면 전쟁에서 돌아오는 관경이 나옵니다. 그리고 18장에는 요나단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삼상18:1, 개역한글)
다윗의 승리는 해방입니다. 다윗이 승리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전체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해방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순간입니까?
거기서 사람들은 다윗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유 때문에, 목적 때문에 달리 생각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황태자입니다. 요나단이 세상이 돌아가는 그러한 마음을 가졌다면 가장 독한 시기를 가지고 경쟁의 대상으로 다윗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마음은 다윗의 마음과 열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애를 통해서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승리의 개가, 그 업적 뿐만 아니라 그 업적 때문에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첫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사역만이 아니라 그 위대한 아름다운 일을 행하신 그분의 인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음부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만일 사랑이 없다면 종교적인 모양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양은 부패할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승리는 고마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주고 띠와 활과 군복도 벗어줍니다. '겉옷을 벗어준다' 이것은 그의 폐위식입니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나중에 사울은 이 일을 놓고 대단히 격노합니다. "어찌 네가 이것을 포기할수 있느냐"
사울이 돌아오게 될때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나와서 노래합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삼상18:7, 개역한글)
개선하는 장군들이 돌아오게 될때 이 여인들이 나와서 노래합니다. 이 노래를 생각할때,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사기엔느 삼손이 지은 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과 삼손이 사사기에서 지은 시는 격이 다릅니다.
하나는 영적인 것이고 하나는 그의 감정적인 생각, 사상, 지성적인 사고 방식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한것 뿐입니다.
여기 여인들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영적입니까? 아니면 지적이거나 육적입니까?
사실 이 노래로 인해서 다윗은 어마어마한 고통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오래전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 이스라엘은 아비규환속에 빠집니다. 철 병거 600승이 이스라엘 뒤에서 쫓아옵니다. 그들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음으로 우리를 여기로 이끌어 다 죽게 하는가?" 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 가운데 믿음을 통해서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발을 딛게 될때 바다는 갈라지고 그들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이 건넜을때, 애굽 군대도 따라 건넙니다.
여기 소위 홍해를 건넜다는 두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고 하나는 애굽 군대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물론 그 홍해를 애굽 군대도 건넙니다. 그러나 그 애굽 군대는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바와같이 불신속에서 건넜습니다. 그래서 반쯤가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애굽 군대는 홍해를 건너긴 했지만 완전히 도해하지 못하고 중단 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들이 건넌후에 다시 합쳐진 바다속에 애굽 군대가 완전히 몰살된것을 보았습니다.
이일이 있기 적어도 80년 전에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의 남아를 모두 하수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로 그 장본인이 바닷물에 빠져 멸망했습니다. 그의 군대와 함께 빠졌습니다.
그 모든것을 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미리암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여인들이 나와서 노래 합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온 성경 최초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 입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모세에게 있거나 어떤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노래 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8장에 나온 이스라엘 여인들의 노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의 주제는 사울과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앞서 일하는 장로 형제님들, 일군들을 놓고 평가한다면, 이것은 이스라엘 여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일군들은 콘테스트에 나온 경쟁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립니다. 누가 1등이고 2등이고 3등이고.. 이런것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이와같은 분위기로 이끌어 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인간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임이 사는 길이고 우리 가정이 사는 길이고 우리 개인이 사는 길입니다.
여기 여인들은 사울과 다윗에게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더 위대한가를 찬양했습니다.
물론, 여기 여인들이 마음속에 자신들이 해방되었다는 기쁨을 표현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이야기 말속에 담겨있는 영적이지 못한 부분은 커다란 비극을 이끌게 됩니다.
사울은이 노래를 들었을 때 대단히 격노했습니다.
"다윗에게 이와같은 영예를 돌린다면 그에게 남은것은 나라밖에 없지 않는가?"
그의 논리는 맞는듯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좌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는 이미 폐위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계속해서 보좌를 주장하는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불행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불행은 이스라엘의 비영적인 상태로 인해서 말할수없는 눈물의 골짜기로 들어갈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사울에게 쫓기기 시작하는 장이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10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번 피하였더라
(삼상18:10-11, 개역한글)
여기 보시면 악신이 아주 '힘있게' 내렸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이와같은 불만과 시기심과 질투가 역사할때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힘있게 역사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단창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두번이나 살인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자는 보좌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그 임무를 완수하기까지 그는 죽을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의 불행은 그가 하나님을 대적해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것이 이루어질수 없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고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생명을 건졌습니다. 사울이 이 모든 광경을 보았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이 승리했고, 자기가 던진 단창을 다윗이 두번 다 피했습니다. 이 모든것을 볼때 자기에게서 하나님은 떠났고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받는 분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때, 우리는 모든 노력을 가지고 시도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내 뜻대로 계속해서 하는 고집, 완고함,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하게될때 우리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게 됩니다. 또한 언제나 두려움이 항상 함께하게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평안함 없이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거역하며 갈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사울은 거기에 대한 좋은 본보기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좌천시킵니다. 자기 병기드는 사람으로 곁에 두었었지만 다윗을 천부장으로 멀리 보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해를 받고 어려움을 겪고 죽을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울은 모든 노력을 다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여인들이 불렀던 노래로 인한 결과 입니다.
세치도 안되는 혀가 만든 모든 결과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대화속에서 우리는 위대한 일도 할수 있고 가장 비극적인 일도 이끌어낼수 있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4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삼상18:13-15, 개역한글)
여기 지혜롭게 행하였다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이 <지혜롭게 행하였다>는 말은 특히, 18장에서의 뜻은 그가 '군사적으로 지혜롭게' 행했다는 말입니다.
그가 좌천도 되고 다른 군인들 가운데 여러가지 일이 있을때에 그는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18장 마지막에 보면 블레셋이 다시 일어납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패배했던 군대들이 다시 조직되어 일어나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옵니다. 그때에도 다윗은 군사적으로 지혜롭게 행합니다.
다시말해 그들의 공략을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물리칠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8장에서 사울이 다윗을 어떻게 제거하려고 했는지를 살피겠습니다.
사울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단히 마귀적이고 정욕적이고 파괴적이고 세상적입니다.
골리앗이 도전하게 될때에 원래 사울 자신이 나가서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을 싸울수 없었고, 그 어떤 장군도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궁급한 순간에 사울이 골리앗과의 전투에 승리한 사람에게 주기로한 약속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자기 딸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약속을 그는 왕으로서 이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약속마저도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덧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다른말로 하면 그렇게 하기위해서 자기 딸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삼상18:17, 개역한글)
사울의 말은 언제나 독실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한 생각은 다윗이 전쟁에 나가서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와 사람의(세상의, 마귀의) 마음에 합한자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합한자는 독실한 말을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뚜껑을 열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가 이 싸움은 여호와의 싸움이라고 말하며 싸울수 있는 동기를 말하고 싸울수밖에 없는 의무감을 다윗에게 부여합니다.
우리는 세치 혀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나요?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나요? 아니면 하나님을 불명예 스럽게 만들고 사단을 영광스럽게 만들고 인간을 파멸로 이끄나요?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 생활과 생각과 마음에서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얼마나 구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삼상18:18, 개역한글)
다윗은 그가 왕이 되었을때도 언제나 자신이 양우리에서 양치던 목자였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은 정신, 이와같은 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많은 재물을 얻고 유익을 누리게 될때, 그때 조심하라. 너희 마음이 너도 모르게 높아짐으로 인해서 복을 발로 차는자가 되지 않게 조심하라."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것을 마음에 두고 정말로 그렇게 산다는 것은 대단히 또 다른 문제일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어도 그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은 주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출신이 목동이었음을 기억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멸망으로 갈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입은 것과, 성취한 어떤 것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기억하는 삶과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너무나 다릅니다.
자기가 세운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어떤 사람인데 왕의 사위가 되겠습니까?" 라고 이야기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대적하십니다.
교만해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슬며시 높아졌을때에, 우리는 절대로 살아갈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마음속에 두고 사나요?
마음속에 항상 이것을 기억하고 삽니까? 그래서 항상 우리가 기억할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 있도록 나 자신을 준비하고 구비하고 사나요?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이 높아졌나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오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었나요.
결국 메랍은 다른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사울은 원칙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울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르칠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에, 그 말씀은 절대로 변하기 않기 때문에, 어린아이라도 주님을 믿었을때 확실하게 구원받았다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그런것입니다. 약속은 말씀속에 있는 능력, 성실함입니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약속하고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대변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을 삶속에서 말속에서 아이들이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될때 그들에게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세상에서 방황합니까? 그들은 속은자들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공(빌공-한자)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사울은 약속을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정치적인 결혼,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갈이 다윗을 사랑합니다. 이 사실을 사울이 알게 되었을 때, 사울은 이것을 또 이용합니다. 그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삼상18:21, 개역한글)
자기딸을 다윗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된다면, 자기딸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딸이 사랑하는 남편이 올무에 빠졌다면 그 딸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에 대해서 아버지는 생각조차 않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이끌게 될때 우리는 다른 어떤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 한가지 파괴하는 그 일만을 생각합니다.
얼마전 제가 한국에 오기전에 라스베가스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이 일은 최근에 미국에서 있었던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그사람은 왜 60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이고 6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다치게 했을까요? 그사람은 돈이 없거나 특별한 원한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민족적이나 이데올로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하고나서 자살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많은것을 계획하고 투자하고 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자기를 죽이는 일을 했을까요?
그 사람도 무언가 얻기 위해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얻기 위해서 한것은 저 아래 있는 2만 2천명의 관객들이 총격이 가해지게 될때 어디로 피할지 몰라 질주하는 모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2-3시간 계속되는 것도 아닌 잠시동안 있는 일입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 한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많은 비용과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단이 하는것이 아닙니까?
사단이 우리 마음속을 이끌어가는 무모한 마음이 아닙니까? 파괴적이고 마음속의 모든 슬픔과 눈물을 바라보고자 하는 자가 사단입니다.
여기 사단이 사역하게 될때 나타나는 모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상황 속에서 다윗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같은 세상에, 사단이, 세상의 임금이 주장하고 있는 이 상황속에서 우리를 두신것은 그 안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훈련의 가장 강한 강도까지 다윗이 통과하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해 두신 것입니다.
사단의 모든 역사와 힘은 다윗을 파괴하길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강한 힘으로 그를 보호하고 계시고, 다만 훈련하셨습니다.
사울은 그 올무를 놓기 위해서 첫번째로 소문을 퍼뜨립니다.
사람이 대화를 할때, 직접적으로 분명한것을 이야기 할때가 있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 소문을 퍼뜨릴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테스트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소문이 퍼뜨려서 신하들은 왕의 뜻을 전달하고 다윗의 반응을 봅니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삼상18:25, 개역한글)
다윗은 "내가 누구관대 왕의 사위가 되겠습니까?" 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는 두번이나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의 요구대로 하려면 블레셋으로 가서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양피 100개를 베어와야 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커다란 테스트 였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와같은 테스트를 받았을때, 그는 어떤것을 느꼈습니까? 다윗에게 다른것을 공격했을때 그는 견뎠습니다.
그러나 "양피 100개면 족하다."라고 했을때 다윗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가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양피 200개를 사울에게 가져 갑니다.
이것은 젊은 사람의 프라이드 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약점이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 한점을 알고 있습니다. '이곳을 건드릴때 반드시 반응할 것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은 가장 약한 스팟입니다.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들먹일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가장 약한 부분을 들춰 쑤실때도 감당할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피조물인 사람이 얼마나 주님을 들쑤셨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대신 욕하지 않고 모든것을 하나님 앞에 맡겼습니다. 얼마나 완전하신 분입니까?
다윗은 실패 했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것을 좋게 여기므로....(삼상18:26, 개역한글)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추적해 볼때, 다윗이 미갈과 결혼해서 어떤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에게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 있습니다. 학교, 직업, 결혼, 등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에 도달하게 될때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이 결정을 내리게 될때 우리는 여전히 주님과 교신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가치와 뜻을 우리가 여전히 분별하고 있나요?
그 근거를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하고 있습니까?
경에 기록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우리를 교육하고 교훈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 다윗은 이 선택으로 인해서 결혼에 들어갑니다.
나머지는 계속해서 우리가 그의삶을 살펴가면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삼상18:28, 개역한글)
다윗을 200명의 블레셋에게 보냈는데도 다윗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그는 살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그와 계신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점점 두려워집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계속해서 악신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기적인 생각속에서 다윗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 일은 그가 죽을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와같은 일은 다윗을 계속해서 단련 시키고 그의 껍질을 계속해서 벗기고 그의 속의 아름다운것을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훈련받게 될때,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속을 우리가 통과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랑과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라고 사도바울이 얼마나 계속해서 많이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믿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일같이, 매순간 필요한 요소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보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형모 형제님 > 다윗의 생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다윗의 생애 06_사울을 또 살려줌, 블레셋으로 들어감 > (0) | 2021.07.19 |
---|---|
< 다윗의 생애 05_사울을 살려줌,아비가일 > (0) | 2021.07.19 |
< 다윗의 생애 04_도망다님 > (0) | 2021.07.19 |
< 다윗의 생애 03_다윗의 유리함 > (0) | 2021.07.19 |
< 다윗의 생애 01_사울의 패망과 다윗의 부상 > (0) | 2021.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