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덕언 말씀

덕언 : 세상 왕과 다른 참되신 왕 / 한봉래bro

박이레 2023. 7. 26. 15:46

< 덕언 : 세상 왕과 다른 참되신 왕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은 마태복음 26장 36-46절까지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36-46).

주님께서 이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제 기도하시던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은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묘사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족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 왕가의 족보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여러 가지 왕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마태는 세상 왕과 예수 그리스도 왕이 어떻게 다른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에 제가 성경을 찾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 박사들이 헤롯에게 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봅니다. "우리가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헤롯이 서기관들을 불러서 성경에 유대인의 왕, 참된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나느냐 물어봅니다. 그랬더니 베들레헴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이 그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태어나 계셨습니다. 헤롯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의 왕을 만나거든 어디 계신지 나에게도 알려달라. 나도 경배하겠다." 거짓말입니다. 계시를 받고 동방 박사들은 다른 데로 돌아가버립니다.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주로 제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4개의 복음서 중에서 구약 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합니다. 마태가 유대인들을 위한 책입니다. 설명하지 않으면 이방인들은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이 많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한 사람은 이방인 동방 박사들 뿐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알면서도 경배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이제 마태복음이 놀랍게 교회에 관해서 두 번 언급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그리고 18장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그 복음서이지만 유대인들이 참된 왕을 경배하지 않았다는 것, 이방인들이 그를 경배할 거라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동방 박사들이 가버리자 헤롯이 어떻게 하죠?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조금 넉넉하게 잡은 거죠. 두 살 이하 아이를 싹 죽입니다. 이게 세상 왕입니다. 왜 죽였을까요? 자기가 계속해서 왕을 하려고, 자기의 왕에 도전하는 사람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 왕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떠시죠?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으려고 하십니다. 자신의 죽음을 놓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세상 왕과 다릅니다. 참된 왕이신 주님은 왜 죽으려고 하시죠? 우리를 왕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 되도록, 또 왕 같은 제사장이 되도록, 우리가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이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 되도록,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기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게 주님이 세상 왕과 다른 것들입니다.

두 번째, 마태복음 2장에 이제 헤롯이 나왔는데요. 마태복음 14장에 보시면 또 헤롯이 나옵니다. 그는 헤롯 안디바인데요. 세상에서는, 이제 이 사람은 이 헤롯은 침례 요한을 죽입니다. 한번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침례 요한을 죽이는 이유입니다. 침례 요한이 헤롯의 결혼을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자기 동생이 이제 앞에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의 아들들입니다. 아들을 4명 두었는데요. 그중에 이 헤롯은 이제 분봉 왕으로 있었고요. 자기 동생이 로마에서 그냥 개인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나는 왕이니 정치니 골치 아프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살겠다." 그래서 로마에서 돈도 있겠다. 살고 있었어요. 이제 동생이 거기 가 있으니까 이제 왔다 갔다 하다가, 이 동생이 결혼한 여자 제수시죠. 헤로디아를 보고 이렇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이게 무슨 인생이냐? 개인적으로 사는 게 무슨 인생이 의미가 있느냐? 나와 같이 왕궁에서 통치를 하자." 그래서 동생을 이혼을 시킵니다. 자기도 이혼합니다. 그리고 재혼합니다. 이것을 보고 침례 요한이 책망합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행동을 했다." 헤롯은 침례요한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된 헤로디아가 "죽입시다." 잠깐 또 설명을 드리면 왕국은, 저희들은 이제 왕국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왕국과 민주주의 국가의 차이가 뭐냐 그러면, 우리는 법에 의해서 재판받고 법에 의한 보호를 받습니다. 왕국은 아닙니다. 왕국의 특징은 왕이 백성들의 생사 여부를 결정합니다. 왕국의 특징은 왕이 백성을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게 왕입니다. 헤롯은 침례요한을 죽일 수 있습니다. 법에 의하지 않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왕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게 왕국입니다. 그런데 이 왕국에서 감히 침례 요한이 왕을 비난했습니다. 헤로디아가 침례 요한을 죽이자고 제안합니다. "당신이 왕 아니오? 당신을 비난한 이 백성을 죽이지 않으면 왕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는가? 죽입시다." 그러나 헤롯은 죽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왕보다 높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참된 왕에게서 보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못 죽이고 있었는데요. 이제 이렇게 생일날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이 다 모입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정치계, 경제계, 문화계, 유명한 인사들이 다 모입니다. 그 나라 최고 지도자들입니다. 그곳에 그 나라 최고 음식이 나오고 최고의 행사가 열립니다. 왕의 생일입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가 자기 딸에게 춤을 추게 합니다. 그랬더니 이 헤롯이 기분이 좋아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 네 소원을 말하면 내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이게 왕이 할 수 있는 말이죠. 그런데 그다음 말입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 나라의 영토의 절반을 춤 잘 추는 여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까? 이게 세상 왕들이 하고 있는 독재 정치입니다. 그랬을 때 이 헤로디아 딸이, 이게 아마 헤로디아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것 같아요. 엄마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뭘 달라고 할까요?" 헤로디아가 말합니다. "침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해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침례 요한, 그는 참된 왕이신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알고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헤로디아의 딸이 자기가 약속한 대로 침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뭘 선택하죠? 이 사람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라고 하는 인식과 하나님의 사람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나보다 높으신 하나님이 계신다. 내가 왕이지만 그러나 하늘에 참된 왕이 계신다라고 하는 인식하고, 그다음에 내 자존심하고, 여기 많은 사람들이 와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약속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런데 그가 요구합니다. 침례 요한의 머리입니다. 줘야 합니까? 뭐가 중요합니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보다 자기 자존심을 선택합니다. 자기 명예를 선택합니다.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받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명예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네가 그리스도냐?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 "다른 사람은 구원하고 너는 구원하지 못하느냐?" 이 모든 모독을 받으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고 계십니다. 이게 주님과 참된 왕의 차이입니다. 헤롯과 같은 왕과, 자기 자기 이익과 자기 자존심을 챙기는 왕과, 아버지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우리를 구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에,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 외에는 없기에, 주님은 죽으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래서 세 번이나 이렇게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왕이 아니라 이제 몇 사람 보겠습니다. 가야바가 있습니다. 27장에 보면 그 당시 유대인의 대제사장이 가야바입니다. 이게 왕보다 더 높은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합니다. 그에게 가룟 유다가 옵니다. 가룟 유다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죄한 자를 팔았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그다음에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심문을 받으시는 과정을 보고 유다가 후회합니다. 내가 잘못했다. 그리고 은 30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에게 말합니다. "내가 잘못했다." 대제사장은 어떤 사람이죠? 죄인들이 오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그 길을 가도록 권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죄 용서하는 그 길을 잘 가면 우리 죄가 사해졌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당하라.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네가 행한 일이니 네가 당해라." 이게 제사장이 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어떻게 해야 되죠? 죄인들이 찾아오면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양을 가져와라. 그리고 양을 머리에 안수해라. 이제 네 죄가 양에게 넘어갔다. 이제 네 칼로 이 양을 죽여라. 그리고 그 피를 가져와라. 내가 그 피를 단에 바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속죄제를 이렇게 드린 자는 그 죄를 용서한다. 그가 죽어야 되지만 대신 죄 없는 짐승이 피를 흘렸으므로 내가 그 죄를 용서한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죄 용서의 원리를 방법을 가르치고 그가 그대로 실행하게 하고 그리고 선언해 줘야 합니다. 네 죄는 이 양의 피로 용서되었다. 평안히 가라.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 가야바가 어떻게 합니까? "네가 당해라."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제 십자가에 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 죄를 지고 단번에 영원히 속죄하는 이 길을 가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그 당시의 제사장과 주님의 차이입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또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왕에 해당하는 사람 로마 총독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이 사람을 풀어주면 자기를 왕이라고 했는데, 로마에 반역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풀어주면 우리가 로마 황제에게 고발하겠다." 반역자를 풀어주었다고, 로마 황제를 반역했는데 풀어줬다고 고발하겠다. 이 위협앞에, 이제 이들이 유대인들이 자꾸 로마까지 가서 자꾸 이렇게 시끄럽게 굴면 자기의 총독이라고 하는 이 지위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을 가져와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깨끗하다." 유대인들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이제 유대인들은 어마어마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끔찍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빌라도는 어떻게 하죠? 자기가 손을 씻고 나는 상관없고, 나는 이 사람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럼 뭘 한 거죠? 직무유기한 것입니다. 그는 총독입니다. 그는 로마법을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가 죄가 없다고 판단했으면 풀어줘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협박해도 죄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직책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합니다. 왜요? 자기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셔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내 아버지의 뜻을 알고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을 대조합니다. 마태복음은 주님을 왕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세상 왕들과 대조합니다. 헤롯, 헤롯 안디바, 그리고 가야바, 그리고 빌라도와 대조합니다. 이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주님이 보이는 태도가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분이 우리의 왕이다. 이분이 우리 마음의 왕이다. 그래서 저희들은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와서 주님을 기억했습니다. 이분이 나의 왕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내 삶에서 이분이 왕이신가? 이제 저희들이 이제 예배드리고 나서 일주일 동안 이 세상에서 살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선택을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분은 우리의 왕이 되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이분을 왕으로 모실 충분한 가치가 있는 분이다. 이분은 왕으로 신뢰해도 좋다. 이게 마태복음입니다.
이제 우리의 실제 삶에서 이분이 왕이 돼야 합니다. 이분의 말씀이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돼야 합니다. 이분이 영광을 받으시는가가 우리가 선택하는 방향이 돼야 합니다. 이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이 자리에 모여서 다시 주님 앞에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왕이 되시기에 합당하셨고 저희의 삶에서 주님이 왕이 되셨을 때, 참으로 주님은 합당한 분이며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있었나이다. 이 같은 고백을 일주일 후에 다시 주님 앞에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 같은 모임과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