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기드온 쿠 형제님

덕언 : 주님의 옷, 어머니를 부탁하심, 머리를 숙이시다

박이레 2023. 12. 14. 16:41

< 덕언 : 주님의 옷, 어머니를 부탁하심, 머리를 숙이시다 > 기드온 쿠 형제님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부터 30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23-30).

다시 한 번 우리 주님께 이 말씀을 통해서 복 주실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특별히 다른 복음서에서는 볼 수 없는 그 십자가에서에 있었던 다른 상세한 것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요한이 어떤 특정한 단어들을 반복해서 계속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러한 단어들을 살펴볼 것이고, 그러한 단어들이 어떤 특정한 개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군병들이 주님의 옷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옷은 보통 다섯 조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데 주님의 옷을 내네깃에 나눠 네 군병들에게 나눠줍니다. 그러면 한 조각이 남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속옷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한 통으로 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그 겉옷은 '기톤'이라고 헬라어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헬라어입니다. 근데 히브리어도 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토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드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옷이 나오는 장면은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28장에서 대제사장이 입은 그 겉옷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3장에서는 그 겉옷은 짐승의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리고 창세기 37장에서는 그 아들의 채색 옷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8장에서는 대제사장의 겉옷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1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겉옷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구약 성경과 성경의 이 옷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 나와 있는 그 옷은 어떠한 짐승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7장에 나와 있는 것은 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 나와 있는 것은 대제사장을 위한 옷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제비를 뽑아 나누는 옷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 겉옷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생동감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속옷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직 요한만 다른 이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는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교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로 그 바느질 자국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눠지는 지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것도 나눠지지 않은, 손상되지 않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서는 빵을 나누는 그런 묘사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뭔가 이렇게 나눠지다라는 것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베드로가 그 물고기를 잡는 장면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을 때에도 그물이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것이 뜯어지는, 부서지는 그물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특별히 그 아들에 대해서 부서지지 않는 면을 강조해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속옷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위에서부터'라는 표현도 아주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여기서 한국어 성경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위에서부터'라는 것은 앞에 나온 '거듭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것은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표현이 문자적으로 하자면 '네가 반드시 위에서부터 나야 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계속적으로 주님께서 "내가 위에서부터 왔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그 위에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에서라는 단어가 여기서 이 속옷을 묘사할 때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옷은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옷에 대해서 위에서부터 이렇게 짰다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요한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 겉옷이 제비 뽑아서 나눠질 때 아마 바닥에다 놓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 옷을 일반적인 옷이라고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비 뽑아서 이제 취하고자 하고 있지만 그 군병들은 이것을 아주 가치없는 물건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옷이 누구로부터 누구에게 속해 있었던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군병들이 제비를 뽑고 가치 없게 대하는 그 옷이, 아주 형편없는 가치로 대하고 있는 그 옷이, 그것은 바로 하늘에 속한 그런 옷이었다고 요한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옷을 묘사하는데 하늘에 속한 단어를 이용해가지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다" 그 옷은, 그분의 옷조차도 하늘에 속한 것이었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예수의 모친께서 그 옆에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어머니처럼 그 장면 가운데서 울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약간 상상을 붙여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속 옷은 어머니가 만드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옷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든 옷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은 그 어머니로 하여금 많은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아들을 위해서 자신이 만든 그 옷이 바닥에 던져지고 제비 뽑혀져서 나눠지는 것을 볼 때에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이 장면 가운데서 이렇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26절에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참으로 주님께서는 그 모친이 슬픔 가운데 있는 그 장면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라고 모친께 말씀하시고, 또 제자에게 "네 어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요한이 그 어머니를 위로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요한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통해서 그 이후로 요한이 예수의 모친을 모시고 계속 모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왜 요한복음에서만 그 가나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히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알 수 없었던 그 마리아가 경험한 일들을 요한이 개인적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요한은 그 복음서에서 언급하지 않고 있는 마리아와 다른 가족들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는 수고를 했지만 그로 인해서 많은 유익을 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0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의 그 유명한 외침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아시고"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계실 때도 그 모든 때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각 시간에, 각 때마다, 이 성경이 어떻게 응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외치시기를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에 요한에게 의해서 두 가지 흥미로운 단어가 사용됩니다.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다른 짐승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에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단어를 사용해서 "머리를 숙이시고"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바쁜 섬김의 그 공사역을 하고 계실 때에는 참으로 그분의 머리를 두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께서 그분의 머리를 두실 유일한 장소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머리를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여기서 이 '돌아가시다'라는 것도 또한 중요한 요한복음의 단어입니다.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였을 때, 그 배반하다라는 단어가 여기서는 이제 '돌아가시니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그렇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실 때에도, 빌라도가 말하기를 "대제사장들과 너희 사람들이 나를 넘긴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넘겨줄 권세가 너에게 없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주님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때까지 계속해서 주님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람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넘겨줌을 계속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이 30절에 오게 되면, 머리를 숙이시고 이번에는 주님 자신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넘겨주면서 그들이 자신이 힘이 있고 그렇게 넘겨준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은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통제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고 그분이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넘겨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넘겨드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자원하여 이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이 모든 고난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