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기드온 쿠 형제님

에스더 1 : 사실적인 측면

박이레 2023. 12. 28. 15:15

< 에스더 1 : 사실적인 측면 > 기드온 쿠 형제님

이 오후 시간에 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집회를 할 수 있게 돼서 저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함께 에스더서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말씀을 교제하기에 앞서서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한국분들이 제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을 제가 그 소리를 듣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레이시아에서나 또한 이제 서양 나라를 방문하면 그분들이 제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냐면 '기디언'이라고 발음합니다. 그것이 이제 영국 영어권 사람들이 발음하는 발음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에게 '기드온'이라고 발음합니다. 아마도 한국어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히브리어 원어가 그렇게 발음이 됩니다. 팬더믹이 있기 전에 제가 그리스도인 다른 성도님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69명이 함께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제가 출입국 신고할 때 맨 앞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출입국 관리하는 여자분이 제 여권을 보고 제 이름을 '기드온'이라고 발음해서 히브리는 그렇게 발음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긴 거는 중국 사람처럼 생겼는데, 왜 히브리어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그 여인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세관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세관에서 다시 한 번 제 여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는 또 저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제 만난 분들은 저에게 한국 사람 같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제가 영국 사람 같다고 말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가 유대인 같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서 왔든지, 우리가 한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가지고 말레이시아에서 전합니다. 또 다른 나라에 방문해서도 동일한 성경으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믿는 이 동일한 진리를 참으로 제한 없이 이렇게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은 얼마나 놀라운 책입니까?

에스더서 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에 2:22-23).

3장을 보겠습니다. 5절부터 7절입니다.

"하만이 모르드개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하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고한고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하다 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아하수에로왕 십 이년 정월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십이월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에 3:5-7).

12절, 13절입니다.

"정월 십 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도 방백과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도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부쳐 왕의 각 도에 보내니 십이월 곧 아달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 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에 3:12-13).

그리고 4장 1절과 2절입니다.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를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에 4:1-2).

4장 1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대로 다 행하니라"(에 4:13-17).

5장 1절과 2절입니다.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에 5:1-2).

6장 1절, 2절입니다.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에 6:1-2).

7장 6절부터 8절입니다.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화를 내리기로 결심한줄 앎이더라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의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가로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에 7:6-8).

9장 4절과 5절입니다.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하매 이 사람 모르드개의 명성이 각 도에 퍼지더라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고"(에 9:4-5).

마지막으로 9장 6절을 읽겠습니다.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인을 죽이고 멸하고"(에 9:6).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지난 시간에 교제를 마친 후에 집에 돌아가셔서 아마도 이 에스더서를 읽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사실 에스더서를 1장부터 10장까지 이 시간에 다 읽는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에스더서를 세 가지 방식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에스더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에스더서의 주제를 이제 높은 곳에서 전체적으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에스더서를 실제적인 면에서, 또한 다음 시간에는 에스더서를 예언적인 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시간에는 실제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먼저 각 부분에 있어서 자세하게 살펴본 다음에, 그다음에 이 실제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더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비록 이 책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이 모든 사건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섭리로 역사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보존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어떤 유대인들은 이 책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그걸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 비평가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없으므로 이것이 성경에 포함될 만한 정경인가, 그렇게 의문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에스더서에 기록된 이 사건이 다른 세상의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진짜 있었던 일인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여기에 기록하신 것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또한 의심하고 있지만, 제가 그 문제와 관련돼서 흥미로운 것을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최근의 고고학자들이 어떤 문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아하수에로 왕으로부터 보내진 그 문서였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자주 등장하는 '수산성'이라는 것은, 그때 당시에 왕이 겨울 동안에 주로 거주하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의 수도는 '바벨로니아'입니다. 그리고 그 바벨로니아에서 아주 흥미로운 문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고대 문서에는 아하수에로의 법적인 문서에서 사용하던 '마두카'라는 이름이 거기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우리가 '모르드개'를 생각나게 합니다. 학자들은 아하수에로 왕 시대에 그러한 이름이 거기에 언급된 것을 보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 문서에 기록된 마두카라는 이름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 에스토서에 나온 모르드개가 분명한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고고학자들의 그런 증거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고학자들이 이 성경이 사실인 것을 지지하는 증거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또한 동일하게 기뻐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에스더서를 이제 실질적으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에스더서는 많은 드라마적인 극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 학생들 가운데서는 이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학교에서 많이 배우곤 할 것입니다. 그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 중에 하나는 물론 로미와 줄리엣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로미와 줄리엣의 마지막의 결말이 아주 비극으로 끝나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주 불행한 일이 우연히도 겹쳐서 그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줄리엣은 단지 죽은 시늉을 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로미오는 줄리엣이 실제로 죽은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미오는 그만 자살하고 맙니다. 웬 근데 줄리엣이 이제 거짓으로 죽었던 그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에 로미오가 실제로 죽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줄리엣은 또한 자결을 하고 맙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이 극적인 요소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비극을 만들어내는 아주 불행한 일이 겹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히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들을 보기 위해서 그 셰익스피어의 희극들을 다 살펴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스더서에 더 놀라운 것들이 여기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그런 불행한 일의 연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낸 행복한 일들의 연속입니다. 이런 책을 읽을 때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것을 단지 그냥 이야기로만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것을 단지 그 셰익스피어의 희극과 같은, 비극과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은 '영감받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사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들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제비를 뽑는 것부터, 그리고 아하수에로가 잠못 들고 고민하고 있는 그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하만이 에스더 앞에서 엎드리는 것도 또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이건 우연히 이렇게 일어난 일이 아닌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건이 개별적으로 보면 그냥 우연히 그냥 일어난 사건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그 결국을 보게 될 때에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에스더의 각 장을 살펴보면서 요약적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내겠습니다.

우리는 1장에서는 '와스디 왕후'를 보게 됩니다. 아하수에로는 그가 전투에 나가기 전에 아주 큰 잔치를 열게 됩니다. 그가 많은 장군들과 여러 높은 신하들을 다 세워놓고 이제 왕후 와스디가 그 앞에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와스디는 싫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왕후가 왕에게 이렇게 거절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와스티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과연 누가 그렇게 와스디로 하여금 싫다라고 하게 만든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왔으니까 그냥 그렇게 싫다라고 한 거 아닙니까?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와스디가 그런 일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이 이후의 모든 일의 시초가 됩니다. 그렇게 와스디는 싫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은 그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서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왕은 체면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왕비가 왕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그다음 수순으로 와스디는 왕후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이 장 이후로는 왕후 와스디를 성경은 그냥 와스디라고만 기록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은 그의 모사들의 조언을 듣고 이제 그 왕후 와스디를 그 자리에서 폐위하고 그것을 법으로 만들게 됩니다. 우리가 페르시아 메데 왕국의 그 법과 관련돼서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법률이 한 번 제정되면 그것을 다시 변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왕 자신이 그것을 서명했다면 왕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서명한 그 법률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는 그 법에 자신이 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2장에 가게 되면 그 왕은 다시 그 왕후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몇 달 지난 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이제 외롭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는 와스디를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와 메대 법률은 번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 왕의 모사들이 와서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다른 왕비를 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언은 그 왕에게 어떠한 결정을 불러일으켰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이 사건에 등장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그 왕의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부의 관리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그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갈 때 함께 돌아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사실 사촌 지간입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에스더의 모든 부모가 죽고 고아처럼 되었을 때 그는 에스더를 데려다가 부모처럼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 왕이 왕비를 새로 구하고자 했을 때, 그 페르시아의 모든 땅의 처녀들이 이제 왕비가 되고자 이 줄을 서서 선택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에스더가 왕비로 선택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2장에서 에스더가 그 모든 그 왕국의 처녀보다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왕을 위해서 처녀들을 선별하는 특별한 관리가 있었습니다. 그 관리에게 에스더가 다른 모든 처녀보다 특별히 귀임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에 대해서 저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어디로 가든지 사람들은 요셉을 좋아하게 됩니다. 물론 요셉이 좋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 모든 이유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영적인 특별한 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종으로서 있다가 그는 최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며, 그가 거짓으로 고소를 당해서 지하 감옥에 들어갔지만 심지어 거기서도 감옥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감옥에서 나와서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는 그 애굽의 버금자리에 올려 총리로 삼았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실질적인 면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는 사업마다 완전히 성공할 거라고 약속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가 학업에서 올 A를 받을 거라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폭풍을 만나지 않은 그냥 부드러운 항해일 거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사실 요셉의 삶은 완전히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삶에 있어서도 시험의 연속인 삶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복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들을 복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한 일부분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받아주는 그런 행동 방식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께만 충성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보답을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시험을 받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복 주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항상 복 주시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그러한 점에서 특별한 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모르드개가 그에게 성경을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젊은 경건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제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더는 단지 자매님들만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또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에스터를 통해서 자매님들이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방 땅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 땅에 하는 모든 관습들은 이 성경의 원리와 반대되는 것들을 하는 환경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모르드개는 경건하게 그를 키웠습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우리가 속하지 않은 이 세상 가운데서 동일하게 그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신조와 그 행동 방식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반대되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고 밝히기도 두려워하는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 말씀을 통해 보다시피 유대인들은 미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마지막으로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에스더는 분명히 특별한 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달랐습니다. 다른 처녀들은 자기들에게 이것이 필요하고, 저것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 것들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스더가 단지 정해진 것만, 기본적인 것만 구한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다른 처녀들은 이제 화려한 것들,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것들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단지 정해진 것만 요구하였습니다. 그의 그 단순함 가운데서 그는 특별한 점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분명히 아하수에로도 다른 처녀들과는 다른 점을 에스더에게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지역 모임의 간증을 죽이는 가장 큰 적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세속성'입니다. 참으로 이 세속성이 많은 지역교회를 삼켜버렸습니다. 제가 특별히 자매님들에게 격려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분위기 가운데, 특별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돋보여야 된다는 그런 분위기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본받지 말도록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에스더처럼 단순하게 기본적인 것만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여러분의 간증에서 여러분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존중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남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이와 같이 에스더는 궁 안으로 들어가게 됐고 아하수에로는 즉시로 바로 이 여인이 다른 여인보다 특별하다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의 다른 점이, 그의 특별한 점이,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데 있어서 굉장히 필수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러한 다른 점, 특별한 점이 없었다면, 그는 여왕으로 택함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존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일에 있어서 모르드개를 칭찬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어떻게 에스더를 양육하였습니까? 참으로 그에 대한 칭찬을 모르드개가 받을 만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부모들이 많이 받고 있는 압박은 그 아이들의 교육 문제입니다. 이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잘 하지만, 제가 말레이시아 이야기를 하자면 대학교 등록금이 굉장히 비쌉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유치원 등록금이 대학금 등록금이 될 정도로 유치원 등록금이 비싸졌습니다. 이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최고의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아주 힘들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다시 모임에까지 압박을 주고 있습니다. 그 부모들이 집회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집회에 나오지 않게 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바쁘게 사느니라고 집회에 빠지게 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또한 자녀들은 다닐 수 있는 한 최대의 많은 학원들을 다니느라고 바쁘게 됩니다. 그것이 제가 살고 있는 나라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은 물론 최선을 다해서 학교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그러한 학비를 댈 수 있다면 또한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영적인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그것을 해야 된다면 그걸 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영적인 면을 우선순위에 두도록 가르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학교도 물론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집회에 나와 영적인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디모데도 영적인 부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도 이제 영적인 양부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더욱 놀라운 큰 일을 이루어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부모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영적인 양딸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적인 아버지와 영적인 수양 딸이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3장에 가서 보게 될 때에 유대인들이 미움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사건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제 삽입적으로 모르드개가 한 일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그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모르드개는 그 사실을 듣게 되고 그것을 보고하게 됩니다. 에스더에게 알려주고 에스더는 왕에게 알려줍니다. 왕은 목숨을 건지게 되고 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그 사람들은 체포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소설을 읽을 때 이제 자주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전개입니다. 어떤 사건을 보게 되었는데 아직 그 사건이 전체적인 그림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는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드개가 왕을 생명을 구한 것을 보게 될 때에 이 사건이 여기 왜 기록되어 있지? 처음에는 궁금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전체 사건과 연결되는지는 나중에 가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하만이 이제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제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하만은 아각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말렉의 후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울은 책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는 아말렉을 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과 관련돼서 제가 일부러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때때로 나중에 이제 갑자기 말씀드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만이 이 아각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럼 모르드개는 어느 후손인지를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 것을 퀴즈로 내겠습니다. 제가 이것을 해서 여러분을 조금 당황스럽게 할지 모르겠지만 모르드개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한번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자손인 것입니다. 그 베냐민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기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 음식 이름과는 좀 다른데요. 기스는 누구입니까? 사울 왕의 아버지 아닙니까? 사울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스였습니다. 이 모르드개가 바로 그 사울 집안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한번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울과 아각 사건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각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여기 유대인들이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만약에 이 두 번째 기회가 없었다면 만약에 우리도 이 자리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또한 한 민족의 역사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그 잘못들은 때때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에게 나쁜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보고 있는 그런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한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기스의 그 아들은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 두 번째 나온 그 기스의 후손은 실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 아각을 처치하는 도구로 하나님께 의해 사용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기회를 낭비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 두 번째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자주 두 번째 기회 이상을 우리에게 주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또다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나와서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내가 몇 번이나 형제를 용서해야 됩니까?" 주님께서는 70번이나 7번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으로 그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후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희년을 70번이나 존중하게 여기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70년간 바벨론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셨습니다. 7년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희년을 존중히 여겨야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번이나 그 희년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490년간 그들은 불순종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90년간 바벨론에서 종살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그 70번만, 70년간 그 가운데서 포로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70번, 그것을 7번이나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제 자신을 돌아봐도 내가 그렇게 많이 70번이나, 7번, 내 형제를 용서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단지 두 번째 기회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여러분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길 바랍니다. 참으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그 회개할 기회를 합당하게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게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만이 이제 높이 그가 지위가 올라갔을 때 그는 유대인들을 전멸하고자 합니다. 3장에서는 그는 이제 제비를 던지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일종의 제비 뽑기입니다. 3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하수에로왕 십 이년 정월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십이월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에 3:7).

이것은 사실 이제 마귀적인, 그런 주술적인 그런 행동입니다. 이것은 이제 어둠의 마술 같은 것입니다. 그러 이제 그 제비들을 던져서 날을 정하게 됩니다. 사실 이 구절만 보고 그들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것에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제 어느 날 그 유대인들을 말살 시키기에 제일 좋은 날인가 그 날을 제비를 뽑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숫자들이 이제 조합돼가지고 한 날이 선택되게 됩니다. 여러 번 그 날을 뽑기 위해서 제비를 던졌지만 그 숫자가 이제 일렬로 딱 나와줘야 되는데 그렇게 나오지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 날이 나왔을 때 보면은 그것이 12월이었습니다. '아달월'이었습니다. 이러한 제비는 분명히 사단이 그것을 조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제비를 뽑은 날은 1월달이었습니다. 만약에 제비를 던져서 '니산월' 그 정월 첫째 달이 나왔다면 유대인들로서는 굉장히 불행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같은 달에 그들은 다 몰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제 12월이라는 그 기간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기로 결정한 이유 중의 하나는 모르드개가 그에 대하여 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론 이제 한국분들이 서로에 대해서 이렇게 경례하는 것과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학자들은 하만이 특별한 허리띠를 차고 있는데, 그 허리띠에 이 제비를 뽑는 그 제비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모르드개는 앞에서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그 앞에 절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충성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에스더는 그만의 방식으로 특별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르드개는 또한 그만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리고 그 거짓된 우상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모르드개는 또한 특별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다니엘의 새 친구들도 느부갓네살이 세운 그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로마 황제가 세운 우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그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왕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들은 왕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뜻하시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 친구들의 자기들이 살아날지 그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분명히 그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은 또한 그들이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왕에게 전하지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보증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죽음을 자원하였습니다. 물론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그런 많은 가운데에 특별히 건짐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결과가 좋을 것을 알았을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결말이 나에게 어떻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도 그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는 절하기를 거절하고 그와 같이 행동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르드개 당신은 지금 절해야 됩니다. 당신이 하만에게 절하고 그렇다면 그와 친구도 될 수 있고 우리 유대인들은 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가 배울 원리가 있습니다. 진리를 대가로 지불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희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모두 몰살당한다 할지라도 진리를 타협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모르드개는 전혀 잘못한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타협하고 맙니다. 우리의 그냥 편리를 위한 거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원리를 타협하고 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이 분명한 교리를 타협하고 말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타협의 변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궁극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권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것이 덮을 수 있는 더 높은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절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만은 유대인들을 아주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왕에게 상당한 그 값을 치르기를 기꺼이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하만이 이 일을 위해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지불한 돈이 400만 영국 파운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계산을 하자면 한 80억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될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악한 자가 부자인 경우는 아주 최악의 경우입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걸 다 그냥 자기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 그 악하고 또한 부자인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봐서는 어떻게 이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이 미움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미움받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처럼 이제 너희도 미워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제자와 종이 어떻게 그 미움과 핍박을 피하겠습니까? 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은 나를 미워하였고 세상은 또한 너희를 미워할 거라고 주님이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 저는 학교에 가면 많은 친구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저를 좋아하는데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직장에 가면 제 동료들이 아유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그들은 저를 좋아하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주위에 아주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세상이 나를 비유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저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너무나 좋아한다면 그건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지금 문제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동료와 친구들에게 여러분이 믿고 있는 바를 지금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 성경의 원리를 말한다면 여기에 분명한 분리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의 표정이 바뀌게 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뭔가 문제가 있는 애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 다르게 부르는 것입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경건한 사람들이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또한 동시에 저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야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확신하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다면 참으로 그 세상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미움을 여러분은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들과 혼합해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말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세상은 나를 좋아한다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모든 역사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미움을 받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과 저도 그 같은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백성에 대해서 세상이 미워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놀라지 않길 바랍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제비는 이제 12달 후에 유대인들을 모두 멸살시키기로 뽑혀져 날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이제 법령이 온 땅에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은 놀라게 됩니다. 이제 4장에 가면 모르드개가 그 소식을 듣고 죄를 뒤집어 쓰고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당시에 그는 이제 왕의 문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는 이제 굵은 베를 입고 그 앞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에스더에게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모르드개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소식이 에스더가 듣게 되자 에스더는 사람을 보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것을 묻게 됩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그 편의 소식을 전해서 하만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멸절하기로 한 그 모든 법령이 온 땅에 내려졌다라고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로 하여금 왕에게 가서 부탁하라는 소식을 받게 됩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다시 회신을 전하게 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어떠한 사람도 왕 앞에 자신이 원한다고 나아갈 수 있지 않습니다." 또 에스더는 말하기를 "당신도 알다시피 제가 왕의 초청 없이 함부로 나아가다가는 저도 제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30일 동안이나 왕이 지금 저를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소식이 모르드개에게 다시 전해지게 됐을 때에, 그리고 모르드개는 그 에스더의 회신을 듣고 참으로 실망하고 화가 나게 됩니다. 참 이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죽게 되는 그 문제 앞에서 에스더는 이제 자신이 그 왕 앞에 서게 될 때에 자신이 죽게 되지 않을까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에스더는 그 단두대에 자신의 목을 올려놓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런 이제 영국 그런 속담이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지금 달려 있는 문제 앞에서 에스더는 그것과 관련돼서 자신의 목을 먼저 내어놓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에스더서에 기록된 것 중에 이제 작은 그런 잘못들이 있는데요. 그중에 하나를 그 장면을 에스더 이 부분에서 보게 됩니다. 참으로 에스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제가 이것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추측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에스더가 그 궁궐에서 너무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이 모든 게 다 편안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영적으로 좋은 결과를 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많은 그리스도인들 볼 때에 발견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적으로 풍요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을 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영적인 에너지는 오히려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점점 세상적으로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편리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 불편함을 당하는 것을 못 견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에게도 돌아보는 문제이고 또 여러분도 한번 돌아보기를 바라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게 될 때에 저는 제 스스로가 당황하게 되는 그러한 장면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그 사도바울의 그런 생애,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그 복음을 전한 후 밤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 밤은 그렇게 감옥에서 보낸 날이 있었고, 또한 낮은 배고픔 가운데서 보낸 그 날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어려움들이 그의 생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고 그리고 핍박을 받을 때 그럴 때입니다. 참으로 그가 다음 날을, 그 해를 볼 수 있을까 염려할 만한 그러한 생이였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들을 복음을 위해서 그는 담담하게 통과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과 비교했을 때 저의 삶은 너무나 평온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일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사소하게 불편함을 겪고 난 후에 이제 좀 쉬어야 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핍박받으면서 성경을 따른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은 주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들이 겪은 그러한 핍박을 우리가 받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평안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주님께 게을러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저에 대해서 제 말을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평안한 삶을 살아선 안 돼,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때때로 여기에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평안함 가운데 우리의 확신을 느슨하게 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30일 동안 왕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 스스로 혼자서 그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그것에 대한 모르드개가 뭐라고 말했는지를 함께 보기를 바랍니다. 4장 13절과 14절입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3-14).

모르드개가 말한 것은 너만은 홀로 피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모두 몰살당할 때 너 혼자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모르드개가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일이 너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모르드개의 책망이 에스더그에게 전달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구절은 우리에게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만약에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을 것이다. 모르드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 그 한 사람이 어떻게 했냐에 지금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그 자원함과 환경에 하나님의 구원이 달려 있지 않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에 네가 가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유대인을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것이 뜻이기만 한다면 에스더가 가거나 안 가거나 상관이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만약에 네가 거절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참으로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하실 거라고 말한 것입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네가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제약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적의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이 "나에게 아직 700명의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가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에 국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네가 가지 않는다면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네가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너와 네 아비의 집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를 원치 않는다면 여러분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있는 그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네가 왕후의 위로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하나님께서 너를 이제 심판하실 것이다. 바로 이때를 위해서 너를 왕후으로 삼은 것이, 그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기회였는데 그 기회를 에스더는 자기가 할 일을 거절함으로써 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로 하여금 너의 인생을 즐겨라, 하시면서 이제 왕후로 높이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높은 자리에 앉아서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이는 것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드개가 확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왕후로 삼은 것이 바로 이 위기의 때에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 각자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두고 계십니다.
제가 볼 때는 저 시계가 틀린 것 같은데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맞춰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제 대학생 때 제가 이제 시카고에서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아주 젊은 청년이죠. 파이트씨라는 분에게서 저는 그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차 일을 하는 그러한 이제 좋은 분이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나이가 들어서 그 일을 이제 은퇴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냥 이제 기차 관련된 일을 했다고 해서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무시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젊었을 때에 이제 기찻길을 정비하는 그런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모임에서 또한 존경받는 장로로 충성스럽게 일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살아계셨을 때 종종 저를 그 집으로 초청해서 같이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이제 주일 오후에 그분은 저를 초청해서 함께 티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맞은편에 앉고 저는 여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분의 커피를 마시고 있고 저는 저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별로 이야기 없이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이 그렇게 아무 말씀도 없이 앉아 있으면 우리는 종종 이제 이게 왜 그러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조용한 시간이 몇 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기드온" 제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드온 형제님, 당신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신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은 저의 삶을 바꿔놓는 그러한 질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위한 그 삶에 대해서 방향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때때로 나이 드신 경건한 분들이 우리에게 하는 어떤 짧은 말들이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는게 되는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그 짧은 질문은 오랜 시간 동안 제 머릿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누가 이걸 알고 있느냐?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고 있느냐?"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이제 결론을 지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서 이 문자적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왕후의 위를 얻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왕후의 위를 만지게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아닌지 누가 아느냐?" 우리가 5장에 가게 될 때에 에스더는 그 궁궐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아직까지 왕이 자기를 받아줄지 모르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가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그 왕 앞에 나타나게 되었을 때 그 왕이 그의 금홀을 내밀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에 기록되기를 에스더는 그 금홀의 끝을 만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르드개는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때에 네가 그 왕국을 만지게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에스더로 하여금 그 왕국을 만지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가 그 왕에 내민 금홀을 만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압축적으로 이 이야기를 단지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것을 하지만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고 에스더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3일간 나를 위해서 밤낮 금식하며 기도해 주십시요." 그 금식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됩니까? 우리는 여기서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지, 그리고 저기서 도움을 찾고,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문자를 보내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위기의 순간을 만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 우리는 맨 처음 달려나가야 됩니다. 참으로 주님께 우리가 항상 제일 먼저 가서 이 문제를 아래에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능력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하길 바랍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밤난 3일을 기도하게 됩니다.
이때는 그 하만이 법령을 보낸 13번째 되는 날입니다. 저는 바로 다음 날 14번째 날에 모르드개와 에스더 사이에 이 대화가 있었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첫째 딸, 14번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알기 바랍니다. 그것은 유월절에 해당되는 날입니다. 바로 유월절 날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나아가서 네가 이 일을 해야 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5장에 가보면 3일째 되는 날에 그가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하수에로 왕의 금홀에 손을 대게 됩니 그리고 바로 그날 이후로 유대인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아닙니까? 그분의 부활은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말씀하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여러분과 저에게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흘째 되는 날에 구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3일 밤낮이라는 그 표현에 대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은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사흘 밤낮을 그와 같이 있어야 하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온전히 3일에 밤낮을 무덤에 있었어야 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주님께서 죽으신 날이 이 다른 날에 죽으셨고 그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계산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금요일에 죽으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일요일에 부활하셨다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은 온전히 3일 밤낮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주로 이제 여행 상품이 그렇게 '2박 3일'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대인의 유대적인 표현입니다. '밤낮 사흘'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3일을 온전히 채운 밤낮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사흘 동안이라는 것은,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모든 목적이 이루어지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에스더의 이 부분에서 그 동일한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흘 밤낮을 저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요." 하지만 에스더는 나흘째 되는 날에 왕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흘째 되는 날에 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사흘째 되는 날, 3일째 되는 날에 왕을 찾아간 것입니다. 참으로 에스더가 자기를 위해서 사흘 밤낮을 기도해달라고 해놓고 자신이 그 온전한 3일이 되지 않았는데 그때 왕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게 문자적으로 3일 밤낮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또한 다른 복음서에서 그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금요일에 죽으셨고 일요일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이 학자들이 어려워하는 사흘 밤낮의 문제를 에스더서에서 사흘 밤낮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밤낮 사흘의 의미가 온전히 3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에스서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우리는 이제 예언적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