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복음 말씀

< 복음말씀_므비보셋 > 조재훈bro

박이레 2021. 7. 21. 00:32

2017년 11월 25일 토요일

 

강사 : 조재훈 형제님

 

< 복음말씀_므비보셋 >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선물, 영원한 생명에 관한 기쁜소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쁜소식을 들려주시고자 하심이니 귀 귀울이시기 바랍니다. 잠깐만 나의 생각과 나의 주관을 내려 놓으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집중하고 들어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기록하신 말씀 입니다. 이것은 변치 않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복음 말씀을 증거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11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삼상19:9-11, 개역한글)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삼상20:11, 개역한글)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찌어다 하니라

17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삼상20:15-17, 개역한글)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삼하1:4, 개역한글)

 

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삼하1:11-12, 개역한글)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삼하4:4, 개역한글)

 

1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2 사울의 종 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3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4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5 다윗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7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8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삼하9:1-8, 개역한글)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삼하9:13, 개역한글)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들은 잘 아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잠시 이 말씀의 배경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첫번째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폐위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다윗에 대해서 시기 했습니다. 마음에 질투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마음에 가득해서 아무 잘못이 없는 다윗을 끝내 죽이고자 했습니다.

단창을 잡아서 자기를 위해서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힘껏 던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단창을 피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도망하는 다윗을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고자 합니다.

다윗은 아무런 잘못을 행한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에는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여 이제 그 미움이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번진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도망하고 있을때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길보아 산이라는 곳에서 넘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이 올랐고 모든것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소식이 들릴때에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사무엘하 4장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4장 말씀을 보면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릴때에 므비보셋은 5살이었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도 어린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섯살인 므비보셋이 그 유모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 유모는 급히 도망갔다고 말씀 합니다.

왜 도망갔을까요?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블레셋의 칼이 므비보셋의 할아버지를 죽였고 그의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이제 그들을 향해서 달려올 것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패했고 블레셋이 남아있는 자손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올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모는 다섯살 아이를 안고 급히 도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급히 도망하였기에 이 다섯살 아이가 떨어졌습니다.

 

그 떨어진 아이는 너무나 심각하게 떨어져서 두 발이 다 절뚝이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 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이가 다섯살인데 두발이 다 절뚝이가 되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늘 들려드릴 말씀은 이 므비보셋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므비보셋은 본래 왕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고, 절뚝발이가 되어 멀리 도망합니다.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9장 말씀을 보면 그가 있던곳은 로드발이라고 기록 합니다.

잠시 로드발이 어디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가 지중해 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갈릴리 호수가 있고 여기 사해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를 연결하는 것이 요단강이 되겠습니다. 여기가 바로 본래 므비보셋이 살던 곳입니다.

가나안 땅, 중심 입니다. 로드발은 이 요단강을 건너서 저쪽 길르앗 끝편에 있습니다.

 

유모는 므비보셋을 데리고 이 먼곳까지 간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숨지 않고 가능한 한 멀리까지 도망 갔습니다. '어디까지 가면 안전할까'를 생각해서 아이를 데리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대적이 나를 찾지 못할만한 곳, 죽음이 나에게 손대지 못할만한 곳 저 황량한 곳 로드발까지 갑니다.

로드발의 이름의 뜻은 목초가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옛날의 지명은 그 지역의 특성을 따라 지었습니다.

이 로드발은 목초가 없기에 양이나 소를 기를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고 인기가 없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므비보셋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내가 가장 안전한 곳은 저 가나안을 떠나서 요단을 건너 황량한 곳 사람이 찾지 않는 곳, 그곳에 숨어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드발에서 어린 때부터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으로 기록해 놓으셨습니까?

왜 한 절둑발이의 인생을 중요한 성경 말씀에, 변치않는 말씀에 기록으로 남겨 놓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이 므비보셋이 하나님을 떠나있는 모든 인생의 모습이기 때문 입니다.

모든 사람의 모습이, 모든 인생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므비보셋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거울처럼 내 모습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길보아 산에서 넘어져서 죽었습니다. 그 자신도 떨어져서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사람도 떨어진 존재입니다.

 

어디서 떨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되 영광과 존귀로 창조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을 잘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조부모님은 잘 기억하십니까? 증조부님은 어떠하십니까?

그때부터는 잘 기억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위로 올라가다 보면 우리의 첫번째 조상이 나올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예수님의 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눅3:23-24, 개역한글)

 

이렇게해서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37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눅3:37-38, 개역한글)

 

저는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아버지께서 족보를 보여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한자라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아버지께서는 이것이 우리 집안의 족보라고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정도 위치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자를 잘 몰라서 아쉽게도 저는 가장 맨위에 있는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사람은 저의 조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조상은 어디서 왔겠습니까? 저는 '조'씨 인데요, 그 '조'씨는 어디서 왔겠습니까?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위에 부모님이 있는 것입니다. 계속 위로 올라가게 되면 어디서 만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십계명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 합니다.

그러나 그 위는 어떠합니까? 아담의 이상은 하나님이라고 말씀 합니다. 아다은 사람의 첫번째 조상입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할찐대,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어제 읽은대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인 이십니다.

 

첫사람 아담도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영광과 존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창조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진 위치에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기준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고집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주장대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이 명하신 그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개역한글)

 

여기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한사람은 바로 우리가 읽은 아담입니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이 범죄하였습니다. 그 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람이 범죄한 그 죄값은 죽음입니다. 그가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거역하기 때문에 그는 죽어야만 합니다.

아담은 930세에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 말씀을 읽으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이제 아담의 후손으로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자리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태어날때 아담의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죄된 본성이 우리안에 있는채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람은 날때부터 죄인이고 본질적으로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은 그가 그의 의지를 반하여서 죄를 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그는 본질상 죄인일 뿐만아니라 실제적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 드렸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서 그 죄를 평가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때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우리를 평가 하십니다.

그때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기준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고 실제적으로도 죄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생인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죽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것처럼, 그 자신도 유모의 품에서 떨어져 절뚝발이가 된 것처럼 우리도 죄인으로 태어나서 절뚝거리면서 죄를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죽었던 것처럼 이것의 결과도 분명 합니다.

 

<이와같이 모든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개역한글)

 

모든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망은 육체적은 죽음으로 끝나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해 두셨습니다.

 

<한번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이제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만날 날을 결정할수 없을 것입니다. 죽되 한번 죽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우리가 이 땅에서 다시 살 것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죽은 다음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사는것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가 한번 죽는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이와같은 육체를 가진 죄인으로서의 삶은 한번만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한번 죽음을 겪고 난 후에는 그는 또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후에는 <심판> 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은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것은 다시 한번의 삶이 아닙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신 분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음 생에는 좀더 나은 삶을"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은 그와같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번째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것은 둘째사망 불못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20:13-15, 개역한글)

 

모든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모든사람은 첫번째 육체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것을 아무도 피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진시황제도 불노초를 구했지만 구하려고 돌아다녔지만 그의 생애는 육십이 되지 못해서 끝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육체적인 죽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둘째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각자가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자는 불못에 던지울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죄인이 맞닥뜨리게 될 순서입니다.

므비보셋이 그와같은 자였고 우리가 그와같은 자입니다. 그가 죽기를 두려워하여 그는 멀리멀리 피해 로드발이라는 곳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정체를 숨긴 채 꽁꽁 숨어서 살고 있었습니다.

왜 숨어산다고 생각하냐면 다윗이 그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울의 자손이라는 것을 숨기며 살았습니다. 저 로드발에 살면서 그는 자신을 최대한 감추고 조용히 살았습니다.

이와같은 모습도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2:15, 개역한글)

 

여기 모든 자들이 죽기를 무서워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어떤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대답하고 어떤사람은 모든사람이 죽는다고 하면서 가볍게 넘깁니다. 그러나 그사람의 마음도 죽음이 두려울 것입니다.

여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이라고 성경은 기록 합니다.

 

사람들은, 죄인들은 죽기를 두려워하기에 일생동안 종노릇 합니다. 사단의 종노릇을 합니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서 종노릇을 시킵니다.

종교적인 사람에게는 종교의 열심을 내게 합니다.

 

제가 저기에 동그라미를 많이 쳤습니다.(칠판)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저 동그라미의 이름은 '견고한 진' 입니다.

사람은 죽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찌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마다 자기의 모든 생각과 사상가운데 견고한 진을 쌓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견고한 진을 쌓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종교에 열심을 내게 합니다.

종교에 열심을 내면 그가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게 될 것이라고 사단은 속삭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따르면 세상의 많은 종교는 사실 한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말하는 바는 다 다를찌라도 죄를 대하는 방법은 같기 때문 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자기의 죄 문제를 처리할때 자기 스스로 그것을 처리하고자 합니다.

종교마다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것은 내가 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면, 천국이나 극락에 갈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 열심히 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면, 열심히 묵상을 하면 열심히 고행을 하면, 열심히 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열심히 해서 어떤 경지에 이르면 나는 좋은 곳에 갈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갈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이름은 다르지만 그 기본 바탕은 같습니다.

그것은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견고한 진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참된 평안은 없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갈수 있는 분명한 확신이 들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피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저에게 그런 평안이 온 것이 아니라 저의 마음 가운데는 두려움이 더 심해졌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면 배울수록 제가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인생이라는것을 더욱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제가 죄를 지을때마다 저는 회개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이 회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제가 좀더 착하게 살면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찌라도 저는 마음 가운데 참 평안을 얻을수 없었습니다.

저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전히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견고한 진을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저와 종교가 다르고 걸어왔던 길이 다르실찌라도 종교는 이와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에 빈구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잠깐 평안이 있다가 금방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와같은 종교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까?

 

모든사람이 종교심이 있는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견고한 진으로 만듭니다. "내가보니 하나님은 없는것 같습니다. 지옥도 없고 천국도 없고 내가 보니 이렇게 사는것이 가장 좋은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생가과 주장대로 견고한 진을 쌓는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죽음도 심판도 이것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도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일생에 매여 자기 생각에 종노릇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에게 견고한 진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도 죽음이 찾아올 것이고 그가 눈을 뜰때에 내가 있는곳을 발견하는 곳은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지옥이고 불못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를 드리고자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부담을 드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여러분에게 말씀해주신 이유는 여러분이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므비보셋이 저 로드발에 살았을때에 그곳은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이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 했지만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발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발견 됩니까? 그는 다행이도 자비로운 다윗의 손에 발견 됩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되지 않고 이제 죽음의 손에서 발견 된다면 그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죄인들의 모습이 이와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을 부르시고 찾고 계십니다. 견고한 진을 쌓고 그곳에서 죽기를 무서워하고 꽁꽁 숨어있는 여러분은 지금부터 하나님께서는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발견되실것입니까? 그 은혜의 손에 의해서 잡히실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끝내 거부하고 견고한 진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죽음의 손에서 발견되기를 원하십니까?

내 생각은 참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거짓됩니다. 여러분이 붇들고 있는 견고한 진을 이제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그 생각들, 그 주장들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셔야 합니다.

므비보셋이 계속 로드발에 계속 살고 있었다면 그는 평생을 궁핍 가운데 비참한 상태로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언제, 누가 나를 좇아오지는 않을까, 블레셋 사람들이, 또는 사울의 대적이 나를 찾으러 온제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며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소식은 이것입니다. 그를 찾는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누가 찾았습니까?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삼하9:1, 개역한글)

 

므비보셋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어떠한 사람 입니까? 사울에 의해서 아무런 이유없이 고난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울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 평생을 쫓아다녔습니다. 그가 이제 사울의 자손을 찾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느냐?"

그가 왜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을 찾을까요?

그동안 억울했던것을 보복하기 위해서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을 찾으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원수의 자손에게 은총을 베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세상은 피해를 받으면 배로 갚아주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가 평생에 그를 죽음 가운데 몰아갔던 원수의 자손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그를 찾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복수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같으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 견고한진을 쌓고 하나님을 피해서 꽁꽁 숨어 있습니다.

그 모든 권면하는 말을 듣기 거부하고 내 기준에 따라서 살기를 원하고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없이 평생을 살기를 원하는 그런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죄인에게 이 세상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들을 찾고자 하십니다. 왜 찾고자 하십니까?

심판하기 위하심 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죄인을 부르시는 이유는 죄인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첫 사람 아담때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첫번째로 범죄를 하였을때 아담은 꽁꽁 나무 뒤로 숨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디있느냐?"

 

다윗도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은 오늘날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이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여러분께서 지금 이 자리에 오신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쉽지않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기 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을 주관 하시고 여러분의 발걸음을 이 가운데로 인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찾으시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음성을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들려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 자리에 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이와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냐? 너의 영혼의 위치는 어디냐? 네가 쌓은 견고한 진은 무엇이냐?

너는 나를 피해서 얼마나 멀리로 가 있느냐? 너는 계속 그 가운데서 살고자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를 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 합니다. 은혜입니다. 은총 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부르심을, 초청을 우리에게 오늘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다윗이 므비보셋을 부를 때에 조건없이 부르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의 자손을 찾을때에 그가 어떤것을 했다고 내가 그를 부르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무조건 없이 사울의 집에 남은 자손을 초청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다윗의 마음 가운데 자신의 원수의 자손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요나단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과 달랐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부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를 친구와 같이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 언약은 우리가 읽었던 언약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나의 그 인자를 끊지 않기를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을 인하여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하는 것입니다.

므비보셋 자체에는 존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절뚝발이이고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고 가난한 자 입니다.

왕에게 드릴 선물 조차도 그는 마련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를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요나단을 인하여서 그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님을 인하여 우리를 초청하신 것과 같습니다.

죄인을 값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조건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오늘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큰 죄인을 그와같이 초청하실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하신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천년전에 하나님의 그 사랑하시는 아들이 이루신 일을 보시고 이제 저희를 값없이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5:6-10, 개역한글)

 

우리가 읽은 로마서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자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천년전에 주님께서 죽으신 사건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께서 이천년전에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죄인들이 달려야 마땅한 십자가 나무에 못박히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5장 6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약대로 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약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약속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 이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어 이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분이 역사의 중심에 이 땅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천년 전입니다. 그분은 이 땅을 실제로 밟으셨습니다. 그것이 기약대로 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죽으실때에 누구를 위해서 죽었다고 말씀 합니까? 경건치 않은자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경건치 않은 자는 누구 입니까?

모든 사람들 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과 주님이 오신 후의 모든 사람들을 경건치 않은자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 이때를 기점으로 역사가 나뉩니다. 기원전 bc 라고 해서 주님 오시기전 이라고 하고 주님이 오신 후는 ad 라고 해서 역사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7년,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약대로 오신 그때를 정점으로 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치 않은자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아담 이후로부터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죄를 인해서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신 이후로부터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넓이는 모든 사람입니다. 이 모든 사람,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을 위하여, 경건치 않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님께서 기약대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연약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8절에 우리는 죄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10절에 우리는 원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 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좀더 나은자가 되거나 경건한 사람이 되거나 의인이 되려고 하거나 할때에 주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극악한 죄인이고 경건치 않을때에, 하나님의 원수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사랑하신 아들을 그 십자가에서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많은피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죽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죄의 삯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인이시고 죄를 범치 아니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저 십자가 나무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을때에 나의 죄값, 그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나의 죄 값, 그 형벌을 주님께서 이천년전에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는 '기약대로' 받으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자리에서 내 마음이 변동치 않고 여전히 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을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위해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피흘려 죽게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개역한글)

 

세상 사람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혹시 죽을지 모릅니다.

또는 남을 위해서 유익한 자를 위해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죄인을 위하여, 원수를 위하여 그를 대신하여 죽는자는 없을진대, 하나님께서 죄인을 대신해서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은때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대신 하셨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도 므비보셋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언약입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맺어졌고 이제 므비보셋은 저 멀리 떠나서 피해 있을때에 그 언약을 근거로 이제 은총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처럼 우리도 또한 그 은혜의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토인 것을 아십니다. 우리 스스로 이 죄에서 벗어날수 없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 스스로 이 견고한 진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할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약속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음에 굳은 의지를 가지시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기약대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다른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진 않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언약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도 이 혜택을 얻으실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죄인을 초청하시고 영접하십니다.

그러나 그 근거는 죄인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들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그 십자가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죄인을 오늘날 받아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허물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죄 많은 인생일 것입니다.

많은 삶을 살아오셨을수록 더 허물 많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허물많은 것을 알고 계실때, 하나님이 부르실때에 여러분은 담대하게 나가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담대함이 생길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일을 기억하시고 나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사실에 담대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팔 벌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셨고 만족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주님을 의지하여 아버지께 나오는 자들을 환영하고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므비보셋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로드발에 있었을때에 혼자 내버려 두었다면 그는 그곳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집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여기 므비보셋이 살고 있습니까?"

"예, 당신은 누구 입니까?"

"저는 다윗왕이 보낸 사자 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이 놀랐을 것입니다.

'다윗왕이 나를 왜 찾고 있지?'

문이 열렸을때에 사자가 이렇게 얘기 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므비보셋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다윗왕이 당신을 찾고 있는데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당신에게 보복하고자 함이 아니라 당신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함입니니다."

 

"다윗왕이 죽은개와 같은 나를 왜 찾고 은총을 베풀고자 합니까?"

사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윗왕은 당신의 아버지 요나단을 인하여 당신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저와 함께 가십시요."

 

그것을 들었을 때 므비보셋은 그말을 믿습니다. 만일 그가 그말을 믿지 안았다면 그는 발버둥치며 끝까지 가고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왜 그가 갔을까요? 다윗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들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 대적이 죽었을때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드디어 나의 대적이 죽었구나!' 라고 하며그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1장을 보면 그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대적의 죽음을 슬퍼 했습니다. 성벽에 있는 사울의 시체를 몰래 가져다가 잘 장사해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다윗이 벌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을 축복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인 것을 알았기에 므비보셋은 믿고 사자를 따라서 갔습니다.

그의 마음은 평안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같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창조자 아버지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복음을 거절하고 그 견고한 진에 살다가 끝내 지옥에 가는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십니다.

악인이 죽는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돌아와 사는것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도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올때 기뻐 환영하시는 것입니다.

어제 탕자의 아버지가 두 팔을 벌려 멀리서 달려와서 그 탕자를 끌어 안으셨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나아오는자를 안고 환영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이 많은 인생인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의심많은 인생인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사자를 보내서 메세지를 전했던 것처럼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서 메세지를 전해 주십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이 성경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메세지 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값없이 돌아올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이유에 대해서 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다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내어주셨나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 죽음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 목숨을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서 죽어 주신 것입니다.

이 미세지가 바로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고 평안 가운데 나오셔야 합니다.

 

제가 어떠한 한자를 썼는지 아십니까? (칠판) "信"

이것은 '믿을 신'자 입니다. 믿음은 사람'인'과 말 '언'이 구성된 한자입니다.

믿음은 한사람을 믿는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수 있는 모든길을 마련해주시기 위해서 내 죄값,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값을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나 사이에 모든 장애물을 다 치워 놓으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믿고 복음의 메세지, 이 말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개역한글)

 

죄인은 로드발처럼 사망의 위치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죽음을 맞고 둘째사망, 심판을 받을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자는 사망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 주신다고 약속 했습니다.

심판이 더 이상 그에게 찾아오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왜 이 사람이 심판을 받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 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둘째사망을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예수님의 말씀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확신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모든 말씀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절뚝발이가 걸을때에 왼쪽이 절뚝이면 왼쪽으로 절뚝하고 오른쪽발이 절뚝이면 오른쪽으로 절뚝일 것입니다.

아마 무비보셋이 그렇게 걸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올때에 여러분은 절뚝이면서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왼발에 이러한 힘을 둘수가 있습니다.

왼발을 내딜때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변치않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의심이 찾아올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분명히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셨음을 기억하십시요.

그리고 왼발을 딛이십시오.

 

그리고 오른발을 이제 디딜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수 없으신 분입니다.

여기 기록된 약속의 말씀, 이 복음의 초청의 말씀을 믿으십시요.

그리고 오른발을 내딛으십시요.

 

여러분이 마음의 감정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절뚝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왼발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 두고 오른발을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에 둔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절뚝이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왕 앞에 나아서 엎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죽은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 말을 므비보셋이 하기전에 다윗이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므비보셋이여 두려워 말라>

 

여러분이 주님을 의지해서, 주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때에 하나님도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여 두려워 말라."

주님은 여러분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이신데 여러분이 주님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때에 주님께서 어찌 모른체 하시겠습니까?

주님이 그 피를 흘리신 이유가 여러분인데 여러분이 주님을 믿었을때 주님께서 왜 모른체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게 오는자를 내가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결코 주님을 의지해서 나오는 자를 내어쫓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붇들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생각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또 주님이 하신일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것입니다.

그와같이 할때, 므비보셋과 같이 감사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왕의 상에 평생에 앉아 살게 됩니다. 그는 다윗에게 왔다가 다시 로드발로 쫓겨나가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는 평생에 왕의 상에서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신 이후에 내어쫓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속죄는 영원한 속죄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되, 그 죄만 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죄를 다 용서하시는 완벽한 속죄를 허락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온전하신 사역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은혜입니까?

 

이제 말씀을 줄이겠습니다

오늘은 므비보셋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므비보셋은 죽음을 두려워 하여 저 먼곳에서 떨어져 살았습니다. 꽁꽁 숨어 살고 있을때, 다윗이 먼저 그를 찾아 주었고 요나단을 위해서 그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그 소식에 응하여 나아왔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을 피하여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꽁꽁 숨어있는 인생 입니다.

각기마다 상황이 다르고 그 견고한 진들은 다르지만 그것은 여러분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산성이시요, 요새이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은혜로이 허락하셔서 이 자리에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값없이 이 선물을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주님을 인하여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여러분에게 값없이 영생의 선물을 주고자 하실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로드발로 돌아가시렵니까? 다시 그 죄로 얼룩진 세상 가운데, 내가 만든 집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집 가운데서 영생을 얻고 살기를 원하십니까?

어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으로 우리를 다루십니다. 이것은 모든사람을 위한 초청이나, 이제 이것을 알고 주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립니다.

여러분도, 한분도 빠짐없이 주님의 이 값없는 초청에 다 응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왔을때, 여전히 로드발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이 값없는초청에 응하신다면 여러분의 위치는 여기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옮겨갈 것입닌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