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0일 일요일 오전
강사 : 조재훈 형제님
< 복음말씀_나무위에 달린 사람 >
지난 이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심에 대해서 말씀을 보았습니다. 첫째날에는 나무 사이에 숨은 사람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찾아오셔서 그 사람을 부르시고 그 음성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마음 가운데 말씀을 통해서 들려지고 있습니다. 둘째날에는 나무위에 올라간 사람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찾아오시고 죄인 앞에까지 오시고 우러러 보시고 그를 초청하셨던 것을 보고 또 오늘에도 주 예수님께서 그와같은 일을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나무위에 달린 사람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눅23:22-25, 개역한글)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눅23:32-46, 개역한글)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24:5-8, 개역한글)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눅24:50-51, 개역한글)
주님께서 읽은 말씀을 통해서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제가 말씀 드린대로 나무에 달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실제로는 나무에 세 사람이 달려 있습니다. 갈보리 동산에 그 언덕 위에 가장 극악한 죄인이 사형을 당하는 사형대가 있었습니다. 그 해골이라 하는 곳에 세명의 사람이 십자가 나무 위에 못박혀서 달렸습니다. 이천년전에 실제로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그 위에서 나무 위에 세 사람이 달렸던 것입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운데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좌편과 우편에 행악자 둘이 못박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말씀을 통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 좌 우로 있는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람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 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이 창조하셨고 주님을 위해서 창조하셨고 또 주님이 이 세상의 중심 이십니다. 가운데 계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사이에 두고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죄 가운데서 죽고 심판 가운데 들어간 사람, 오직 이 두 부류의 사람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이에 두고 영원의 길이 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린 이 모습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 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지 않고 여전히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며 자기의 길로 가는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선택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달린 좌우편에 달린 사람은 누가복음에 행악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복음서에서는 강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평생을 악하게 살아왔던 사람 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때리고 죽였던 그런 사람 입니다. 그 당시 많은 범죄가 있을 텐데, 그 당시에 가장 흉악한 범죄를 지었던 사람을 가장 고통 가운데 사형을 받게 하는것이 십자가 였습니다. 이제 이 두편에 강도와 행악자가 못박힌 것입니다. 그 손과 발에 15cm가 넘는 대못이 통과하여 못박히는 것입니다. 손목에는 많은 뼈들이 있습니다. 그 뼈들 사이로 굵은 대못이 박힌 것입니다. 이 못이 박혀서 나무위에 사람이 달렸을때에 당기는 힘으로 인해서 그 뼈가 으스러지고 신경이 찟기고 극악한 고통이 그 사형수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발목에도 동일하게 그 못이 박혔습니다. 발목에도 많은 뼈들이 있고 신경이 있습니다. 대못이 거기를 관통해서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고통을 느낄때마다 이 고통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의 손으로 너는 악을 행하였다. 너의 손으로 행안 그 악으로 인해서 너의 손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 너의 발은 악을 행하였다. 너의 발은 죄의 길로 행하였다. 너의 발은 고통을 느끼면서 너의 죄값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의 고통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가장 자비로운 처형은 로마 시대에 참수형이었습니다. 고통을 단번에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형은 그런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을 고통받게 하여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며 죽게 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 형틀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하여,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이러한 고통을 준 군병들을 향해서 저주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 앞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저주하며 비난하며 너희들도 그런 고통을 받기를 저주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여기 이 세 십자가에 주님이 못박히시고 행악자들이 못박혔을 때 그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행악자들도 고통을 받으며 사람들을 저주하며 비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잘 보아하니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있는 분을 비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통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향해서 사람들은 희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너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아라. 너의 옷은 다 벗겨지고 너의 손발은 못박혀서 고통 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평생 네가 행한 죄의 값이다." 하고 비웃고 희롱하고 있었는데 세 사람에게 골고루 비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희롱과 비웃음이 한분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사람들이 모든 희롱과 비방을 붓고 있었습니다. 그 비방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네가 네 자신을 구원하라." 이런 비방이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너를 기뻐하신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 기름부은자 라고 말씀 하였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분이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네가 다른 사람들은 많이 구원하였다. 이제 네 자신도 그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 구원해 보라." 이렇게 비방 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왕으로서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너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심판하고 그들을 가두어라." 그렇게 비방하고 모욕하고 희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옆에 달린 죄인도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마태복음에서는 이 두 행악자가 함께 주님을 비방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정죄를 받아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옆에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앞에 있는 사람들처럼 비방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두 행악자는 차이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둘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이와같이 예수님을 비방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것은 주님께서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연고 없이' 라는 것은 이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삼년 반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모든 곳을 돌아다니시며 병자들을 고치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자기에게 나아오는 어린아이들을 받아 주시고 무릎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 분과 같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베푸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서 이와같이 비방하고 모욕하고 미워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모든 죄인이 하나님을 향해 갖고 있는 태도 입니다. 우리는 단지 죄인만이 아닙니다. 단지 잃어버린 자일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복된 소식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소식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비방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사람은 기쁜 소식이 들려졌을 때 바로 영접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비춰주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바로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판단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비방하는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그렇다면 이 일은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죄를 아직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신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만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여러가지 질문을 하면서 우리 주 예수님을 그 마음에 영접하기를 더디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원수와같은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이 이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때 주님께 표현되고 내밷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떠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을 때, 여러분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이것을 받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말씀이 비춰질수록 비춰질수록 오히려 마음을 더 딱딱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오히려 비난하고 탓하는 말들을 하고 계십니까? 뜨거운 태양이 비춰졌을때 녹는 얼음이 있는 반면, 더욱 더 딱딱해지는 진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 졌을때 여러분의 마음을 완고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 졌을때에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녹이기를 원하시는데 어떤 이는 스스로 마음을 더욱 더 굳게 만드는 자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인의 타락한 본성 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때에 귀 기울여 들으시고 마음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잠깐 내 생각을 내려 놓으시고 주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참으로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이 심판을 집행했던, 빌라도라는 사람이 세번에 거쳐서 "이 사람에게는 잘못한 것을 찾지 못하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였던 빌라도조차, 적이었던 이 사람 조차도 예수님에게서 어떠한 죄도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계십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 천지를 만드신 분이신데, 그 손으로 이 천지를 만드시고 그 발이 하늘을 발등상으로 하시는 분이신데, 이제 그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어찌하여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정말로 그리스도 이시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셨는데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것에 대한 질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이번의 집회가 끝났을때 여러분 마음속에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실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두 행악자 중에 한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둘다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일생을 악을 행하고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고 있는 중에도 가운데 계신 분을 욕하고 있었는데 어느순간이 되어 한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의 마음은 원래 딱딱한 사람이었습니다.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한 행악자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을까요? 그에게 복음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읽은 말씀에 복음 말씀이 적혀져 있나요?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있지만 이 강도에게 복음의 말씀 시간이 있었던가요? 예, 있습니다. 그 옆에 달리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에게 다가온 복음 이었습니다. 진실로 복음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말로써,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고 이제 이 두 행악자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그분께서 복음이 되어 주셨습니다. 달린 두 행악자가 주님을 향해서 동일한 비방으로 비방하고 있었을 때, "정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정말 네가 그리스도여거든" 의심하고 비난하고 있었을 때 그는 주님의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한분을 집중적으로 비방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억울하게 비방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순간 마음이 울컥하고 나에게 비방한 사람에 대해서 다시 비방으로 돌려주지 않습니까? 내가 이유없이 욕을 당한다면 여러분 마음에 분노가 일고 욕으로 갚아주고자 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참으로 갚아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당한만큼 갚아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더 크게 갚아주기를 원하는 사람 입니다. 원수갚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이지요. 쉽게 용서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에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가 그것을 갚아줄때가 되면 더 크게 갚아주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미움입니다. 그 많은 비방과 욕들이 주님께로 향하고 있을때 주님께서는 입술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방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이것이 본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처럼 여기시고 그 입을 잠잠히 하시고 다 받고 계셨습니다.
강도에게는 이 모습이 기이하였습니다. 행악자는 행악자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알아보는 법 입니다. 일평생 죄 가운데 살았던 이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는 죄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이분은 그와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분은 그 모든 비방에도 답하지 않으셨는가? 그가 악을 행하면서 살아왔지만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병든자를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자기 자신은 다른사람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었지만 이분은 필요한 자들에게 하늘의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행한 일에는 옳지않은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같은자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이분이 달려 있는가? 이제 그가 고개를 들어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죄수들은 등에 채찍질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예수님과 행악자의 등에 채찍질의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동일했지만 주님의 얼굴은 자신의 모습과 달랐습니다. 이 세 십자가 중에 면류관을 쓰고 계신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화려한 금으로 만든 면류관이 아니라 가시나무를 엮어서 만든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주님의 머리에 로마군병들이 두었을때 가시가 그 이마의 피부를 뚫고 뼈까지 닿도록 하였습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주님, 그 머리에 상처를 입고 계셨습니다. 그 얼굴은 어떠셨는지요? 대제사장들이 주님의 얼굴을 손으로 많이 쳤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멍들고 사람들이 뱉은 침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이분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과 달랐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모든사람보다 상하셨습니다. 왜 이 옳은분이 행악한 나보다도 더 얼굴이 상하셔야 하는가? 도대체 이분은 왜 여기에 달리셔야 하는가? 그도 질문하여야 했습니다. 그의 손과 발에, 등에 피가 흐르고 있지만 이분은 머리로부터 머리로부터 피가 흘러내려서 온몸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인생보다 많이 상하시고 그 얼굴이 상하신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좀 전에 예수님께서 드리셨던 기도가 다시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분께서 자기를 그토록 고통 가운데 두었던 로마 군병들과 또 앞에 있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을 위하여서 용서의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본래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들이 자기를 못박은 자들을 향해서 욕하고 저주 하였는데 이분은 도리어 그 입을 다물고 그들의 죄의 용서를 위해서 하늘 아버지께 구하고 계셨습니다. 아, 이분은 사람이시지만 사람만은 아니셨습니다. 그 분의 행하심은 옳은 것밖에 없었고 이분은 참으로 진실된 분이셨습니다. 이 강도는 옆에 달리신 분이 자기와 다른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는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이분은 죄 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진실된 분이 그 입으로 하늘 하나님께 "아버지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말씀은 참된것이 분명합니다. 진실로 내 옆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셨습니다. 그가 이것을 알았을 때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39절에 보면 그 행악자가 계속 비방하고 있었습니다. 그 달린 행악자 중에 다른 한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있을때에 이제 40절에는 마음의 변화가 일은 사람이 이와같이 그 사람을 꾸짖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사람이 어떻게 어두움을 깨달을수 있을까요? 사람이 죄 가운데 있을때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두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스스로 어두움을 깨닫기 위해서는 바깥에서 빛이 비쳐져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깨달을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죄를 깨달으려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빛을 비춰주셔야 했습니다. 여기 자기의 죄를 깨달은 이 죄인도 처음에는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지만 빛 되신 주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빛을 비춰주셨을 때 의로우신 분과는 너무나 다른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참으로 이와같이 죽기에 마땅한 자라는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사람의 법을 어김으로 사람의 심판 선언을 받고 사람이 만든 십자가 위에 달려서 죽게 되었지만 이제 그는 이것이 끝이 아닌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죽고나서 심판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뵈올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끝이라면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끝이 아닙니다.
<한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로되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죄인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앞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 온 그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그의 마음에 빛을 비춰 주심으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기에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셨나요? 사람이 이 일을 알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 자신의 이야기를 말씀드린다면 저는 아기 때부터 부모님 손을 잡고 교회당에 나왔습니다. 저는 제가 가끔씩 잘못을 하는 것을 알았지만 제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20살이 되도록 그와같이 살았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열심히 교회를 다녔고 또 교회에서 하는 여러가지 행사도 잘 참석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특별히 악한 죄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저도 제 스스로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제가 동일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생각할때에 저는 다른사람보다 낫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 했지만 하나님 보실때에는 달랐습니다. 하나님 보실때에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서 보신다면 키가 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키가 크신분이 있고 키가 작은분들이 있듯이 사람들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키가 크신분은 "난 참 키가 크다." 라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높은 빌딩에 올라가서 아래를 쳐다보신다면 사람들이 다 똑같은 크기로 보일 것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바라 볼때는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다 이와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인인가? 하는 질문을 할때에 "아니야 내가 물론 잘못을 하기는 하지만 저 죄인보다는 더 나아."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기준에는 더 나은 사람일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는 우리는 다 죄인인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말씀하신대로 우리의 죄들이 낱낱히 드러나고 하나님앞에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마음의 변화함을 얻은 행악자는 그러한 상태까지 이른 것입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느냐>
그의 마음 가운데 처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 행악자는 일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나쁜 일을 많이해도 잡히지 않으면 괜찮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저질러도 그것이 바로 심판받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이제 그는 곧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뵐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와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곧 하나님을 만나 뵐 것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41절에 그는 이와같이 얘기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것은 옳지않는것이 없느니라> 그는 주님께서 의로우신 분임을 고백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마음에 깨닳음을 얻은것을 주님께 고백 합니다. 그는 이제 심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비록 지금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드님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이 진실로 만유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왕국은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으셔서 이제 다시 그분의 왕국 가운데로 들어가실 것입니다. 이 강도에게 그런 깨달음이 왔을때에 그는 주님께 입을 열였습니다. 그는 단지 주님이 의로우신 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 이시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지식을 얻은 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앞에 나아와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였습니다. "예수여", 한국어 성경에는 '예수여'라고 나와 있고 영어성경에는 앞에 '주 예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행악자였고 그의 가족들은 이 사람이 죽는것을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들의 명예가 더럽혀졌기에 이제 이사람이 죽는 것에 대해서 그 가족들과 사회는 신경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심판앞에 들어가고 있을때 자신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행한 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돌아보았을때 하나님 앞에 의로울만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지금 이시간 후에 앞으로도 그에게 남은 생애가 별로 없습니다. 그는 곧 죽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는 자신 안에서는 구원받을만한 근거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안이 아니라 내 밖에서 구세주를 찾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분은 바로 나의 옆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어서 "주 예수여" 라고 말합니다. 그의 손은 못박혀 있고 발도 못박혀 있습니다. 지금 깨달아서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두가지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남아 있었고 그의 입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셨기 때문에 그는 마음을 사용하여서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의탁 합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서 주 예수님이라고 그분께 자기자신을 의탁 합니다.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생각하소서> 자기 자신을 의탁할때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가 구할수 있는 유일한 말은 '나를 기억하소서' 라는 말이었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때에 주님의 마음 가운데 저를 위한 작은 공간을 두시기를 원합니다. 저를 생각만 해주십시요." 이렇게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구하였을때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답하십니까? 43절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이것은 왕의 말씀 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왕의 말은 변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왕이 명령 했을때 그것이 실행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선 비록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왕으로서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네게 이른다. 진실로 이른다. 너는 나의 나라가 임할때를 말했지만 나는 오늘이다.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반드시 있으리라."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알았을 뿐 아니라 주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 영혼에게 확신의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먼 훗날이 아니라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죽기전에 너는 이미 내 옆에 있다. 죽은 후에도 나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말씀을 읽어보면 주님께서 먼저 죽으십니다. 그리고 행악자가 나중에 죽는데 그가 죽고나서 그의 영혼의 눈을 떴을 때 누구를 가장 먼저 만나셨겠습니까? 낙원에서 주님께서 이 강도를 기다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그는 이미 주님옆에 있었던 것처럼 그의 눈이 감겨졌을때,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때 그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고 영원히 낙원에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득별히 이 세 십자가를 두셨을까요? 단지 이 강도만을 위해서 두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와같은 일들이 있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이와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어떻게 받게 되는 것입니까?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은혜 입니다. 은혜라는 뜻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호의를 뜻합니다. 선함을 뜻합니다. 자비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 스스로가 자격을 얻고 내 스스로가 공덕을 쌓아서 내 스스로가 죄를 지은만큼 더 많은 선을 행해서 그것을 갚아 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이미 저지른 죄악들을 씻어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원하실 때에 은혜를 인하여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강도를 옆에 두셨습니다. 이 강도는 평생동안 죄만 지으면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 삽자가에 달리기 전까지 그의 죄를 갚기 위해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한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고 변화함을 입고 주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주님을 위해서 많은것을 드린적이 없습니다. 주님을 믿기 전과 주님을 믿은 후에도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한 공덕을 쌓거나 자격을 얻은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이 두가지를 계속 오해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기 전까지 열심히 선을 행해서 자기의 죄를 갚을수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평생 죄를 지은 자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은후에 열심히 살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거라 생각 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고 율법을 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특별한 강도의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것은 참으로 은혜로 되는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임에도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쉬이 취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랬던 사람 입니다. 저는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왔고 사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쉽게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제가 그동안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다는 것을 부인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살아온 것과 다른 사람에 비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에 대해서 이것이 나의 자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때 저는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싫어하였습니다. 왜요? 제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는것처럼 보였기 때문 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는 나은데, 왜 나도 다른 사람처럼 그와같이 은혜로 구원받아야 합니까? 저의 의를 쉽게 포기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드린대로 사람의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은 은혜 아니고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담당하실 때 특별한 죄인의 죄만을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고 은혜로만 되기 때문에, 에베소서 2장 8절은 이와같이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모든 사람이 은혜를 근거로 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의 모습이나, 자기가 행했던 것이 근거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 사역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데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구원받는 통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선물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은혜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하나님의 선물이 다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받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 두 손으로 붇들고 있었던 자기 의와 나의 노력들을 내려놓고, 이것들은 헛것입니다. 그것들을 이제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선물을 받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강도가 알았을 뿐 아니라 주님께 자기 자신을 부탁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주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예 저도 믿어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십자가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요." 여기서가 끝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제 마음으로 주님을 나의 개인적인 구주요,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께 내 영혼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선물이 내것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요? 나중에요? 아니요 오늘이요. 요한복음 3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4-18, 개역한글)
14절에 인자가 들려야만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자는 반드시 들려야 한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삼년전에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 나무위에 들려야 한다는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이땅에 오셨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성문밖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들리신 것입니다. 왜 인자가 반드시 들려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지 않고서는 모든 죄인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굳게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영원 전부터 생각하고 계셨고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이 땅에 이미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영혼들은 잘 살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주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때 곧 어두움이 다 임하여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우리 주님을 향해서 우리 죄 값이 주님께 담당시키셨을 때 주님이 우리 죄로 인해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을 당해야 할 사람은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자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여기 좌우편에 있는 십자가, 가운데 있는 십자가는, 거기에 달려야 하는 사람은 사실은 우리 각자 였습니다. 여기 가운데 있어야 할 분은 여러분과 저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저 가운데 십자가에 우리를 대표하여 달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을 왜 십자가에서 고통받도록 놔두셨겠습니까? 3장 16절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지만 죄 많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강도가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말을 들은 이후에, 가만이 있지 않으셨습니다. 비방을 받으실 때에는 가만히 계셨던 주님께서 강도가 자기 자신을 의탁하였을 때는 입술을 열어서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러분이 마음으로 나의 주님을 영접하고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였을 때 주님을 믿으셨을때 주님께서는 가만히 두시지 않고 확신케 해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두십니다. 이것이 여러분 앞에 있는 성경의 말씀 입니다. 그 확신케 하시는 말씀은 변치않는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저를 믿는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는자는 그 순간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여기 잘 읽어보시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형입니다. 그에게는 원래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믿는 순간 심판이 현재형으로 그에게서는 없어진 것입니다. 왜요? 주님께서 이 사람을 대신해서 이미 심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이 사람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는자는 심판을 그 순간 받지 않고 심판에서 면제된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면제 되어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주를 믿음으로 나오는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확신의 말씀 입니다.
여러분, 아까 처음에 시작할때에 제가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스스로 답해 보라고 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위하셨고 먼저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위해서는 이것이 꼭 필요함을 아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죽으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있으면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공중에서 주님을 만난 믿는 자들이 먼저 주님을 뵈옵고 또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이천년전에 주님께서 오신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BC, AD,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아실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 주님이 오신 후, 역사적으로 주님이 오셨듯이, 그리고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에서 지불하시고 구원의 날에 우리를 초청하시고 부르시듯이 주님께서 분명히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 전까지는 은혜의 날입니다. 여러분, 이 복음의 말씀을 몇몇을 위해서 예비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해서 예비된 것입니다. 저 강도는 그렇게 열심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구원의 날이었고 주님을 옆에 둔 것으로 인해서 그는 주님으로 인해 변화함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임에 나와서 복음을 들은지 얼마 안되셨을찌라도 이 강도처럼 오늘 여러분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한다면 오늘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 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첫째날에는 나무뒤에 숨은 자에게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의 위치를 알고 찾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둘째날에는 나무위에 올라간 자에게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에 그의 영혼을 부르시고 그의 영혼 앞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초청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위에 달린자,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자, 이제 죽음을 앞둔 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께 영혼을 의탁했을때 주님은 확신의 말로 여러분에게 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와같은 복이 여기 있는 여러분 한분한분에게 다 임하기를 진실로 원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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