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8일 화요일
강사 : 조재훈 형제님
< 복음말씀_기억하라 >
오늘 이 시간에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번의 기억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억하라' '생각하소서' '기억하라' 세 부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증거코자 합니다.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6:19-31, 개역한글)
이 말씀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 입니다. 또한 지난주에 기드온 형제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기억하고자 하는것은 아브라함의 말입니다. <기억하라> <이것을 기억하라>
인생이 죽기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은 부자 입니다.
그 사람은 매우 큰 부자였습니다. 좋은 옷과 좋은 잔치를 매일 하였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나사로는 가난하고 병들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도 죽고 한 부자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기 모양이 나르고 삶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지만 우리가 공통적으로 맞부딧치게 되는것은 죽음인 것입니다.
여기있는 모든 분들이 반드시 죽음이라는 것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무의식의 상태에 들어갈 것이라고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죽으면 다시 또 다른 삶을 살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 앞을 버티칼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버티칼 뒤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줄을 조금만 당기면 우리는 밖의 풍경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실제로 살았던 나사로와 한 부자의 이 실례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의 커튼을 잠깐 열어 주셔서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사람은 두 장소로 가게 됩니다. 한 장소는 고통받는 곳이고 한 장소는 위로받는 곳입니다.
이 고통받는 곳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한다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불꽃은 얼마나 뜨거운 불꽃 입니까?
우리는 죽음후에 사람이 의식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부자는 눈을 들어서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영적인 의식은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는 삶을 살았을때에 이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죽음 이후에는 더욱 더 의식이 또렸해지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장소는 기억하는 장소 입니다.
25절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16:25, 개역한글)
부자가 고통받는 곳에서 기억해야 할것은 그가 살았을때에 좋은 것들을 받았다는 사실 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건강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재물들과 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그가 고통받는 곳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가 '받았다는 사실' 입니다.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받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실로 적신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입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것들입니다.
그가 갖고 있는 몸, 그가 갖고 있는 건강함, 옷과 모든 재물들,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7장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자비하셔서 그에게 생명을 주시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있을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앉아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것도 실로 하나님을 힘 입어서 우리는 앉아있고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있는 모든 분들이 이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살았을대에 하나남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받았구나."
그러나 그가 받은것은 물질 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받은 좋은 것 중에는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그의 대문앞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로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는 기억해야 합니다.
나사로의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도움이시다>
그것을 들을때 그는 이와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스스로 돕는 자이다. 나는 나의 부가 나의 도움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이고 수고하고 살고 있습니다.
돈이 도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 하셔서 이 부자에게 대문 앞에서 매일 증거하는 것을 허락 하셨습니다.
이 없어질 돈이 아니라, 죽으면 사라질 이 물질이 아니라 진정한 도움을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그 좋은 것들을 매일 누렸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가장 좋은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 그것은 바로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회당에 매주마다 참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특권들을 누렸습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이 도움이신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었고 그 도움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충분히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 하였던 것입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음부의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유대인들이 혹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를 걸러 주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이므로 그는 하늘나라로 갈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게 된 사실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저 멀리 있고 그는 이제 큰 구렁이 가로막고 있는 이 고통받는 곳에서 홀로 있는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이라고 해서 하늘나라에 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 중에 믿는자가 있다고 해서 하늘나라 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받은 자, 하나님을 나의 도움으로 삼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은 자만이 구원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그의 생애에 주님을 믿었고 구원 받아서 하늘나라로 갔던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 죽음의 커튼을 잠깐 열어 두시고 나사로와 큰 부자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주셨겠습니까?
큰 부자가 기억하는 것은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억한다고 해서 그가 거기서 나올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거기서 깨닫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받는 곳에서 그는 나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음부 가운데 불꽃 가운데서 고민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심판대 앞에 다시 설 것이고 그는 이제 불못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왜 오늘날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주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 이것을 기억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이기를 기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증거하심을 충분히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 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라도 이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보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구약 성경뿐만이 아니라 신약 성경이 분명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신 예수님의 분명하신 십자가 사역이 우리에게 글로써 남겨져 있고 오늘날 복음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좋은것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와같은 사실을 깨닫고 계십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보내셨을 때에 섭리 가운데 나사로를 그의 대문 앞에 두셨을 때에 그는 무시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는데, 누가 먼저 죽었습니까?
22절을 보면 그 거지가 죽고 그리고 이 부자도 죽습니다. 먼저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때에 그는 대문 앞을 지나다가 하인에게 이렇게 물었을지 모릅니다.
"저기 있던 나사로는 오늘 왜 보이지 않느냐?"
"예, 나사로는 어제밤에 죽었습니다."
"죽었어?"
그것이 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야 했을까요?
"아, 참으로 죽음은 가까이 있구나. 죽음은 나의 대문앞에 있었고 내 고 앞에도 있을 것이구나." 그는 그것을 경고로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나도 죽을 것인데 나는 죽음앞에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는 그러한 경고를 받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죽음 후에 어느 장소로 갈 것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내가 죽는다면 나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부자는 그와같은 준비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다 넘겨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그와같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오늘 기억하시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가를 기억 하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이제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오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죽기전에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일평생 하나님 없이 살다가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심판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한 사람이 있습니다.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눅23:32-34, 개역한글)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9-43, 개역한글)
여기 갈보리 언덕위에 세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주님 가운데 못 박히시고 두 행악자가 주님 좌우 우편에 못박혔습니다. 처음에는 두 행악자가 다 주님을 비난하고 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명의 마음 가운데 빛이 비춰졌습니다. 그는 어두움 이었지만 그도 깨닫지 못하고 잇었지만 참 빛이시고 큰 빛이신 주님이 곁에 계셨을 때 그의 마음 가운데 빛이 비춰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그는 행악자 였습니다. 그는 일평생 범죄를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그 범죄가 심하여 그는 판결을 받고 악한 행악자가 판결을 받는 십자가 처형에 못박혀 있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그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합당한 정죄를 받았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당연한 보응을 받고 있다. 내가 받는 판결은 정당하다."
빛되신 주님앞에 죄인이 나왔을때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알게 됩니다. 그의 어두움이 벗겨지고 그 안에 있는 타락한 성품들이 드러나게 되었을때 그는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로마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 한 것은 죽음 이후에 그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고자 하는 모든 영혼들은 먼저 이와같은 상태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나에게 심판이 당연한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다면 그것은 절망이겠지요.
주님 앞에 나올때 자신의 참된 상태를 알 뿐만 아니라 주님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것이 죄인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주님에 대해서 이 행악자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주님 달리신 십가가의 가시 면류관 위에 패가 붙어 있는데 그 패에는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를 구원하라." "네가 하나님의 그리스도거든 너를 구원하라."
"네가 유대인의 왕이거든 너를 구원하라."
그러한 욕들과 비방을 들었을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요?
이 행악자는 이와같은 주님의 반응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비방 하느냐? 하나님 저희의 죄를 저희의 행위대로 갚아주시옵소서"
주님의 입술에서 그와같은 대답이 나올것을 기대했겠지만 옆에계신 주님께서 그 입을 열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소서. 자기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어찌하여 이분은 자기를 비방하고 못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시는가, 이분은 어떠한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인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대에 성령께서 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주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와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예,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들이 비방했을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거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리스도거든"
이렇게 비방했지만 이 사람은 그 비방을 통해서 분명히 깨닫습니다.
'내 옆에 달리신 분은 왕이시다. 내 옆에 못박혀 고통 가운데 계신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시다.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지금은 죽음의 형틀 가운데 매달려 계시지만 이분은 분명히 다시 사실 것이다. 당신의 왕국 가운데 다시 들어가실 것이다.'
그는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상태를 분명히 알 뿐만 아니라 주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 분명한 비췸을 받고 그의 영혼에 밝은빛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께서 대적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는것을 들었습니다.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이분의 마음 가운데 있는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을때 그는 나와같은 죄인도 이분앞에 나올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의 못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분이라면 주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 대답 안하셨던 이 사람이라면 나와같은 죄인이라도, 일생을 죄만 짓고 사는 죄인이라도 이 분앞에 나올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생긴 것입니다.
주님이 그와같이 자비로운 분이시고 사랑이심을 알때, 그는 주님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와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말에는 <예수여>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으로는 <주여>라고 번역 합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생각하소서, 나를 기억하소서"
이것은 괭장히 소박한 간청 같습니다. 그가 간구했던 것은 주님의 나라가 임할때에 왕께서 그 왕국 가운데 들어가실때에 주님의 마음 가운데 나를 생각해 주시기를, 그 마음 가운데 나를 위한 자리를 조금 마련해 주시기를 그는 간청 했습니다.
이 기도는 괭장히 짧습니다만, 모든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답해주셨습니까?
주님께서는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 늦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죽기 직전인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얘기하시지 않았습니다.
"너는 너의 죄 값을 받아야 한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것은 왕의 언어 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소서> 이 단어는 대제사장의 언어 입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이르노니> 는 왕의 언어 입니다. 왕으로서 그분은 왕의 권위를 가지시고 말씀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왕의 말씀은 얼마나 확실하신지요. 왕의 말씀은 한번 말씀 하셨을때 변괴할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왕의 말씀은 얼마나 신속하신지요. 이 강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왕은 '오늘'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이 가기전에 그가 구했던 것은 주님의 마음 한구석이었지만 주님은 이와같이 약속하십니다.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이 허락하신 것은 마음의 자리, 한번 생각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옆에 영원히 두시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지요. 사람의 간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넘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신지요.
그날이 다 가기전에 주님이 먼저 죽으시고 강도가 죽었습니다.
강도가 죽었을때에 낙원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그는 오늘부터 영원토록 주와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위해서 평생에 무슨일을 하였습니까? 그가 구원받고 난 이후에 주님을 위해서 무슨일을 더 할수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이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왜요? 이 영혼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왔기 때문입니다.
긍휼만을, 은혜만을 구하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와같은 영혼에게 주님은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게로 오는 자마다 내가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말씀대로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 나왔던 이 영혼들을 주님은 내어쫓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비방과 욕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답하지 아니하셨지만 마지막 죽어가는 이 영혼의 작은 이 간구는 주님께서는 들어주시고 신속히 은혜롭게 대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때 술맏은 관원장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복위하거든 나를 생각해 주소서,나를 기억해 주소서" 하지만 그는 복귀하고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을 잊습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잊지만 주님은 절대로 잊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기억하소서> 하면서 주님께 나오는 영혼들을 주님께서는 절대로 잊지아니하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와 다르신 점입니다. 그분은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이와같이 평생을 죄를 범하며 살던 영혼은 낙원에 그날 바로 들어가게 하실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서 피 흘려 죽어가고 계실때, 실로 주님께서는 죄를 지어서 로마의 심판을 받고 그와같이 달리신 것이 아니십니다.
주님 옆에 달려있는 그 범죄자, 행악자의 죄 짐을 담당 하시고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고 계셨던 것입니다. 고난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영혼이 낙원에 들어갔듯이 주님께서 그 갈보리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죄 짐은 그 행악자의 죄 짐뿐만 아니라 여기 앉아계신 모든 분들의 각자의 죄 짐을 담당하시고 주님 고난받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주님께서 잊지 아니하시고 내어쫓지 아니하시고 거절치 아니하시고 받아주시고 주님과 함께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4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24:1, 개역한글)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24:5-8, 개역한글)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분명히 죽으셨고 삼일만에 분명히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자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해 두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의 계획 입니다.
구약성경이 그것을 예언하였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인자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일을 다 완수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주님께서 분명히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하실수 있기 위하여 주님께서 분명히 살아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범죄한 영혼을 구원하셨다면 이제는 모든일을 마치시고 하늘 보좌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계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요.
어찌 그 주님께서 오늘, 이와같이 주님께서 하신일을 근거로 주님께 자비를 구하며 나오는 영혼을 오늘 구원하시지 못할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나의 죄와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요.
그러나 또한 이것을 기억하십시요. 주님께서 분명히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이 십자가에 옆에 달렸던 강도와 같이 "주여" 하며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붙드시길 바랍니다. 이 강도가 이 분이 주이시며, 왕이시며 그리스도이신것을 알았을때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입을 열어서 주님을 말과 마음으로 붙들었습니다. 여러분, 그와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의 주시고 그리스도 이신것을 알았다면 붙드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믿음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영혼에게 주님께서는 신속히 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왕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며 지금 이 순간 주님을 의지하여 나오는 모든 한 영혼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와같이 영혼이 나올때에 기뻐하시고 구원하시고 천국에는 기쁨의 찬양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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