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계시록 2장 22-25절(요약)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계2:22-25, 개역한글)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일곱교회를 주님께서 특별히 선택해서 편지를 보낸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아에는 이 일곱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가 더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일곱교회를 택하신 것은 다른 시대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특별히 전하시는 메세지가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여기 기록된 내용들을 그때 당시에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들로 해석합니다. 또한 이 기록된 내용이 미래적으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교회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말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두아디라는 네번째로 언급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순서적으로 가운데에 위치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기록된 내용도 제일 많습니다. 또한 미래적으로 상징하는 기간을 살펴볼 때에 흔히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그 시간입니다. 서기 600년부터 주님오시기까지 그 기간을 망라하는 교회들을 담고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가장 긴 시간을 포함하는 특징을 두아디라 교회가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아디라 교회는 단지 역사 가운데서 사라진 교회가 아니라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에서 떨어져 버린 교회이며, 서머나 교회는 많은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버가모와 두아디라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둘다 타협했습니다. 차이점은 버가모는 세상에서 지원을 받는 면에서 타협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는 세상의 지원을 받는것을 넘어서서 세상이 교회 안에서 힘을 얻어 득세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 이세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역사상에서 이세벨은 아합왕의 아내인데 그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권력이 이세벨에게 있었습니다. 그 권력 가운데서 이세벨은 세상 종교를 이스라엘에 가지고 들어옵니다. 이처럼 이세벨은 교회 가운데 세상의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들어오고 그것이 중심인 교리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 이미 18-22절까지 살피었습니다. 이 편지의 구조를 살펴보면 7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주님께서 편지를 보내시는 것,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두번째는 주님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말씀하실때에 그 지역교회의 모습을 보고 그 지역교회에 필요한 부분을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세가지를 강조하시는데, 두아디라가 거짓 교사의 미혹에 속아있다는 것을 볼때에 불꽃같이 모든것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눈을 말씀합니다. 또한 거짓 교사가 악한 세력으로 신실한 성도들을 공격할때에 주석과 같이 단단한 발을 가지고 거짓세력을 막고 대적들을 누르실수 있는 강한 발을 말하빈다. 세번째가 하나님의 아들을 말합니다. 거짓 교사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격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암흑시대에 카톨릭이 성경적인 교회라고 주장하고 말할때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교리에 대해서 공격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번째로 나오는 것이 칭찬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많고 또 더욱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번째로, 20절에서 책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칭찬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분명한 책망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책망은 커져보이는 외형과는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미혹되서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는 경고, 격려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볼 부분입니다. 22-25절까지가 있습니다. 22-23절은 주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경고를 먼저 말씀하시고 24-25절에는 거짓 교사를 추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격려가 있씁니다. 26-28절까지 상주시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29절에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촉구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교회는 어떤 것이 빠져있고 어떤 교회는 어떤것만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먼저 22-23절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형제님들께서 참여하셔서 교제를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전의석 형제님 : 궁금했던 부분을 몇가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1). 22절에 "큰환란 가운데 던지고" 이것이 앞으로 올 환란인지, 이때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2). 23절에 "모든 교회가"가 두아디라 교회를 지칭하는 성도들인지, 아니면 모든지역교회인지 말씀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3) (놓쳤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답변 :
1). 큰 환란에 대해서 원문에는 정관사가 없는 큰 환란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7년 대환란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 환란'이라고 정관사를 지칭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미래에 일어날 심판이 아니라 지금 이 행악을 하고 있는 자들이 곧 받게 되는 환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환란을 통해서 주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는 환란인 것입니다.
2). 그래서 이 징계를 통해서 모든 교회가 주님께서 참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변의 지역교회들은 이세벨의 악행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어려움을, 환난을 겪을때에 심판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가 나올때 항상 3+4로 나눠집니다. 두아디라 전의 교회까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까지 3으로 나눠지고, 두아디라부터 4개의 교회로 나눠집니다. 이 4개의 교회는 남은 자들이, 주님의 다시오심이 특별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네개의 교회는 어느 한 시점부터 주님이 다시오심까지를 포함하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두아디라에 남아있어"(24절) 이 표현이 남은자들이라는 성경의 표현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배도하고 잘못된 길로 가지만 주님께 신실하게 남아있는 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이후의 교회들부터는 이 남은 자들을 암시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불충성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소수의 몇명만이 신실한 자들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세 교회는 귀 있는자와 듣는 자가 같은 사람처럼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은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지 않는, 분리되는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따로 나눠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뒤의 네개의 교회는 이기는 자들이 어떠한 상급을 받는지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돌이키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서는 이기는자와 귀있는 자의 순서가 바뀌어져 있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볼찌어다 내가 그를"(22절) 당시 두아디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던 거짓 여선지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어서 이세벨을 침상에 던지고,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언급합니다. 이들은 이세벨의 동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또한 보게 됩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잠시라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23절에서 "그의 자녀"가 나옵니다. 이렇게 22-23절까지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이 거짓교리는 세대를 거쳐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냄을 봅니다. 거짓교리들은 모임 안에서 전염되고 전파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항상 저희들이 경계해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접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걸러냄 없이 들어온다면 모임에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분명히 경고의 말씀을 주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한 침상을 생각할때에 침상은 간음하는 장소입니다. 그 간음하는 장소에 그를 던지는데 죽을때까지 던져 놓으십니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데 그렇게 죽이시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다루실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이세벨, 그와 더불어 간음한 자들, 그의 자녀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교리는 그 세력을 급격히 부풀립니다.
그러나 또한 주님의 심판도 전면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구 하나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하십니다. 참으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그러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에 주님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특별히 침상에 던진다고 되어 있는데요. 그 침상은 이세벨이 자신의 쾌락을 누리는 간음의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던집니다. 그 쾌락으로 그는 올무에 걸릴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더 이어서 형제님들께서 22-23절을 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침상에 던질것이요"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이는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을텐데, 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분명히 심판으로 죽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주님께서는 어떠한 죽음으로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자는 자들이 많고"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교회를 감찰하시며 심판하십니다.
24-25절에서는 남은 자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에 대해서도 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24절은 원문에 보면 "그러나"가 들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벨을 따르지만, '그러나' 다른 부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에 남아있어" 남은 충성된 자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격려를 주시는데요. 다른 어떠한 말씀으로 격려하셨는지를 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사단의 깊은 것이 나오는데요. 이것을 사단의 것을 연구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모든것을 통달하게 하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단의 깊은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게 될때에 성령께서 사단의 깊은 것을 알게 하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다수가 배교하는 가운데 주님께는 저희들에게 가벼운 짐을 허락하시고 그것은 주님이 오시기까지 가진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큰 격려가 되는것은 곧 있으면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소위 사단의 깊은 것" 이것은 사람이 이름 붙인 것입니다. '소위'라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라는 것입니다. 깊은 것은 좋은 것입니다.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단의 깊은 것입니다. 서로가 반대됩니다. 이세벨은 거짓교리를 가지고 깊은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것을 말할 때에 그것이 더 깊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도덕적인 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는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죄의식 없이 살것을 거짓 교사들은 계속 말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그것이 사단의 깊은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은 성령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이미 배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거짓교사들은 그것이 단순한 것이고 기본적인 것이라고 비웃지만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의 깊은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24절) 약간 수동적인 느낌이 드는데요. 원어적인 측면에서는 "알지 않기로"입니다. 그들은 알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단호하게 결심해서 하지 않기도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것을 계속해서 받으라고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행15:28, 개역한글)
어떤 짐을 지우지 않겠느냐면, 사도행전 15장에서 할례를 받아야지 구워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곧, 성경적이지 많은 율법적인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가 상징하는 가톨릭 교회를 볼 때에 여러가지 짐을 사람들에게 지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율법적인 것들이 많아집니다. 이것이 거짓 교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유를 주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을 종으로 삼고 쾌락으로 인도하고 많은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항상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것이 없다."
- 김대현 형제님 : 25-26절을 교제하고자 합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계2:25, 개역한글)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할 때, 구원의 역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또 26절에 "이기는 자와 내 일을 지키는 그"는 누구인지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답변 : 이기는 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입니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상태를 말씀합니다. 모든 이기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여야 합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올 때까지 굳게 잡고 있는 신실한 자들은 모든 믿는자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 이름만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 처음 받은 말씀대로 굳게 살아야 하는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5절의 사람들과 26절의 사람은 약간 차이가 있지만 이기는 자의 올바른 상태를 생각할 때는 같은 모양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 최재홍 형제님 : 25절에 굳게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세상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거짓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성도들이 남아있습니다. 굳게 잡으라는 것은 영적으로 성장하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할 뿐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열정이 지금과 비교했을때 차이가 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믿음을 지키고, 그 기쁨을 계속 가지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을 더 알고자 하는 열정으로 그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도바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2,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저희가 봐도 열심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열심이 있는 형제였지만 그 잡을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귀중한 분이심을 기억하고 현재의 내 영적인 상태에 만족해서는 안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만큼 했으니 이 모임에서, 영적으로 더 할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성도님들이 하니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자들은 구원받을때에 성령께서 그 각각의 사람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으시기에 주님 오시기까지 끝까지 충성되게 헌신해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결국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희가 완전한 자가 아니지만 계속해서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달려가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지역모임은 계속해서 죄가 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하고 살피며 죄가 들어왔을때 징계해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 김보영 형제님 : 24절의 남아있는 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북 왕국과 남 유다가 하나님 앞에서 크게 범죄하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예비하셨습니다. 이처럼 지역교회가 범죄 가운데 빠지더라도 계속해서 남아있는 자들을 남기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중세시대의 카톨릭의 상태는 영적으로 매우 침체적인 상태였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형제들과 교제하다가 갈등 가운데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교회 역사 가운데 계속적으로 신실한 자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25절에 보면 그들이 주님께 받은것을 그대로 붇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다른것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주신것만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충분한 것입니다. 이 성경외에 다른 세상의 의식, 형식들을 더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신실하게 이와 같이 주님 주신것을 굳게 붙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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