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이 표현한 예수님 > 대전 중구 / 기드온 쿠 형제님
다시 한 번 여러분께서 이 저녁 집회에 참석하여 주시고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특별히 이 기회를 빌어 여러분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환대에 그리고 또 친절에 감사를 드립니다. 단지 이제 한 명의 강사가 왔을 뿐인데 참 많은 모임의 성도님들이 참 바쁘게 섬기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고 또한 그것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해 주신 여러 성도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립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18).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이제 다루고자 합니다. 또한 여러 다른 책 중에서 이 요한복음은 특별히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굉장히 놀라운 책입니다. 참으로 이 요한복음 1장에 이 짧은 부분이 수세기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한 이 내용이 종종 잘못 오해된 것도 사실입니다.
여호와 증인 사람들은 1장 1절과 2절 말씀을 오역해서 사용합니다. 그 영어적인 표현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조금 아는 게 더 위험하다.' 그냥 조금 알면서 그걸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행동인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이 1장 1절과 2절 말씀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종종 이제 길거리에서 어떤 남자분들이, 여자분들이 그리고 그룹을 지어가지고 이제 우산을 두고 이렇게 모여서 행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서류가방, 또는 왕진가방 같은 가방을 들고 이렇게 다닙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집을 방문해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만약에 여러분이 요한복음 1장에 이 말씀에 이 진리에 굳게 서 있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대화에서 머리가 복잡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비록 1장 1절과 2절의 말씀에 대해서 많은 시간 함께 보지는 않을 거지만, 제가 이제 작은 이 이야기를, 짧은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한 부부가 사는 집에 여호와의 증인이 이제 초인종을 누르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누군지를 보았는데 이제 그들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우리 집에 방문한 것이었는데요. 이제 그들은 "내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봤고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여호와의 증인들을 여러분의 집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길 바랍니다. 그냥 여러분이 해야 될 것은 "지금 바빠요." 하고 거절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이 커플은 아주 훌륭한 신사처럼 보였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그들에게 혹시 내가 복음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의 거실에 와서 함께 앉아서 그리고 그들에게 커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성경을 펴지 않고, 제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그들에게 15분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15분간 저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것이 끝난 다음에 "제가 당신에게 몇 가지 질문해도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이제 성경을 가지고 와서, 그들은 그것을 보고 우선 먼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것을 다 전체 이야기를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제가 30분 동안 그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물어보기를 "당신은 목사입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목사가 아닙니다. 우리 목사가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지역의 코타카모닝의 집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한번 그 집회에 와서 복음 말씀 한번 들어보십시오."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이야기가 이렇게 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들은 "제가 저희의 더 높은 스승을 모시고 와도 됩니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언제 모시고 올까요?" 그들은 아마도 내일 정도 모시고 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괜찮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다음 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들이 집회에, 복음 집회에 나오기를 저는 바랐습니다. 참으로 그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회의적이지만 그걸 바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제 1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1장 1절과 2절에 대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이제 작은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1장 1절과 2절은 '결코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라고 해주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4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세계 복음서는 우리가 '공관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 시노틱이라는 것은 이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제 '같이 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공관'이 이제 공이 이제 공동으로 하는 '공'자죠 '관'자가 이제 관계 같은 거 할 때 이제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공관복음서라는 것은 이제 '하나의 눈으로 바라본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것들이 이제 그게 이제 동일하게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요한복음에서는 이제 공관복음에 나타나지 않은 독특한 것들이 여기에 특별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제 그러한 점에서 굉장히 특별한 책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공관복음에 비교해서 더욱 많은 우리 주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는 다락방 강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3장부터 17장까지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굉장히 귀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가나의 혼인 잔치가 여기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나사로의 부활이 특별히 여기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러한 사건들이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공관복음에는 없는지 의아해합니다.
제가 이렇게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한은 특별히 마태, 마가, 누가가 갖지 못한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권이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니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간 이후로 요한은 마리아를 이제 모시게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의 남은 여생간 요한의 집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한 그에게 있어서 특권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한이 이제 식사를 나누면서 그 대화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는 이제 커피가 없었겠죠. 그리고 그 다과를 나누면서 마리아는 요한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 어느 날 이제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하셨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마리아를 한 25년에서 30년간 돌보셨습니다. 그래서 단지 마리아만 알 수 있는, 다른 누구도 모르는, 그러한 것들이 주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마리아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마리아에게 굉장히 친밀한, 그런 개인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2장에 그와 같은 사건으로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리아가 어떤 말을 했는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마리아만 줄 수 있는 그런 정보를 요한에게 준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리고 그때 들었던 주님의 말씀들을 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가까운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나사로가 부활한 그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의 이야기가 한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요한을 통해서 참 부모를 돌보는 것이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그와 같은 놀라운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이 그와 같은 의무를 다할 때에 이제 그의 상급으로 이제 마리아가 알고 있는 주님에 대해서 특별한 것을 그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그 헬라어 단어들이 굉장히 일관되게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헬라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주로 추천하는 것이 요한복음을 헬라어로 읽기를 많이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계속 일관되게 그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필체와 그의 단어를 계속 반복해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1장 1절과 2절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약간 별도로 이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사용되어서 기록되었고, 그리고 몇 부분은 특별히 아람어로 기록된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은 히브리어를 선택하셔서 기록하시고 신약은 헬라어를 선택해서 기록하셨을까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또 성령께서 특별히 그것을 그 언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시적인 언어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많은 부분이 노래로 지어져 있습니다. 또한 예언서도 시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그렇게 다채로운 색깔을, 색상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치 그림처럼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구약 성경을 기록하실 때에 그 시적인 언어, 그림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기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약 성경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교리를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교리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또한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교리가 정확하지 않다면 우리의 기독교 생활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교리에 대해서 기록하실 때는 그림적인 언어가 아니라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헬라어는 히브리어와 달리 이제 시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물론 이제 시에 사용되는 언어이기도 하지만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 그림적인 언어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확한 언어에는 세 가지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법에서 법정에서 사용할 때 필요한 언어입니다. 이것은 변호사들이, 판사들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작은 단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단어가 관사가 있고, 어떤 단어는 정관사면, 큰 차이를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헬라어는 그와 같은 정확한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서 이 교리를 기록하실 때는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어떤 계획 없이 그냥 우연히 이렇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 최선인지 아셨고 또한 신약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시적인 언어를 사용하시고 또한 정확한 언어를 맞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1장 1절과 2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고 또한 그 이후에 다른 구절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이용이 됩니다. 제가 통역하는 형제님에게 확인한 바로는 한국어에서 이 '정관사'가 때로는 분명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영어에서는 'the Chair'라고 이제 '정관사'를 붙여서 이야기를 합니다. 또는 그것과 다르게 '관사'로 '한 책상', 이렇게 그냥 일반적인 책상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헬라어는 이 작은 차이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1장 1절에 "태초의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러 이단들이, 그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렇게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해서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젊은 성도님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그런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오해하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제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알고 그것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 잘못된 것이 어떤 다른 지역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그러한 잘못된 사상들이 우리가 쉽게 집 안의 컴퓨터를 통해서도 접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은 아주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하지만 인터넷에서 우리가 읽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어떤 것을 읽고 자신의 믿음을 버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그들은 모임의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향에 인터넷이 악영향을 끼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오해에 맞서서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러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모두 잘못된 이야기들을 사람들은 하곤 하였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사실상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것을 그들은 공격하고 말하기 위해서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곤 하였습니다. 단지 그냥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속한 말레이시아 나라는 이슬람 국가입니다. 그 이슬람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그냥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만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게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냥 예수인 척하는 다른 사람이 죽었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많은 잘못된 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잘못된 사상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이제 우리가 이 성경을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수년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어려운 점을 만날 때에 그것으로 인해 포기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 성경에 더욱 파고들어서, 수고해서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것은 분명히 필요한 그러한 것들입니다.
1장 1절에서는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즉시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장 1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이 "태초에"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 1장 1장에서 또한 동일하게 "태초에"라고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에서는 "태초부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책들이 시작으로, 시초의, 시작에, 이런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시작이 똑같은 시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와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서로 약간 다른 강조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천지를 창조하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창조가 시작된 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물론 이후에 몇 구절에서 그 창조의 시점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 강조점은 '말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어떻게 표현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원문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그 태초라는 시점을 가서 본다면, 그것은 이제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천지를 창조하는 그 시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적용해 볼 수 있지만, 일단 요한은 그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여러분과 저의 그 이해와 상상에 요한은 맡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창세기 1장 1절의 이전의 어떤 한 시점을 태초라고 볼 수 있지 또한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여러분이 그 '태초에'라는 시점을, 창조의 시점이든, 아니면 그 이전의 시점이든, 그 영혼 전에 어떤 순간에 자기의 시선을 갖다 두든 간에, 그리고 바로 그 시점을 한 점으로 딱 찍어서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얼마나 과거로,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한 멀리 과거로 돌아가서 그 한 시점을 "태초에"라고 보게 될 때에, 그 어느 시점이든지 거기에 바로 이 말씀이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각으로 얼마나 멀리 그 시점에 가서 그 지점을 쳐다보든지 간에 거기에 말씀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말씀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그분에게 있어서는 시작되는 시점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태초를 어느 시점에 갖다 놓든지 간에 거기에 그분이 계시고 그 말씀이 존재해 계시는 것입니다. (통역하시는 형제님이 첨언)영어로 약간 도취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상 우리 한국어처럼 순서를 말씀을, "말씀이 계시니라" 이 순서로 바꾸어 말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분에게 있어서는 시작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분이 말씀이라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견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두 뒤의 구절을 읽어볼 때에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요한은 창조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해내셨습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무엇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우리가 뭘 만들 때에 이제 처음 필요한 재료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김치를 만들 때에 어떤 야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식초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양념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냥 말로 "김치!"라고 했을 때 김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이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분이 초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기 야채를 놔두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다른 재료들을 놔두었어습니다. 그리고 여기 소금과 고추장 여러 가지 재료들을 놔뒀습니다. 저희 그리고 그 재료들을 쭉 일렬로 정렬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김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갑자기 딱 섞여가지고 김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초능력이 있습니까? 물론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요. 만약에 누가 그런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그것 이상의 능력입니다.
여기에 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표현하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엑스니힐로'라는 라틴어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 원재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그런 원재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생긴 것입니다. 이 온 우주를 무에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XL힐로'라는 라틴어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요한복음에서도 그 창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삼위의 하나님 중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서 그 창조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이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그런 단위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학교에서 원자라고 배웁니다. 우리는 전자를 또한 배웁니다. 그리고 또 양성자를 배웁니다. 이제 과학은 점점 발전해서 그런 것들을 발견해냅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것을 소립자로 나눠서 더 작은 미립자들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에 이 온 우주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무엇입니까? 이 온 우주를 이루는 가장 작은 요소가 무엇입니까? 과학자들이 가장 작은 단위를 이렇게 찾아내고 있는데요.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찾아낸 것이 아직 또 그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그 단위를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찾아낼 수 있다면, 그 모든 미립자 중에 가장 작은, 우주를 이루는 기본 요소가 말씀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말씀'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우리는 1절 2절에서 벌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원문에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정관사' '그'라는 것이 사용될 때 어떤 특별한, '특정한 것을 지정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인격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한복음을 계속 읽어가 보면 바로 이 그 말씀이 두 번째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리고 여기에 그 헬라어에 정확성이 사용이 됩니다. 이것을 잘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꽤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쉽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원어에는 "'이' 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the'라는 정관사가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을 한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됐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리고 '그 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그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이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말씀을 잘못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정관사 없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1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에서 하나님 앞에 두 번째 나오는 하나님 앞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그 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리고 마지막은 "그 말씀이 '정관사 없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끝납니다.
그리고 그 우산을 든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헬라어를 알고 있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일입니다. 그때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버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에게도 "당신 헬라어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저희 아버지는 많이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아버지가 "당신들은 알고 있나요?" 그들은 "예, 헬라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가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영어로 'and'가 헬라어어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뭘 말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영어의 기본적인 단어, '그리고'에 해당하는 'and'도 모르면서 어떻게 헬라를 안다라고 말합니까? 그들은 그냥 헬라어를 아는 척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에 여기에 '정관사 없는 하나님'으로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은 그 하나님은 종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기 정관사 있는 그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그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지만, 그런데 그 말씀은 이제 어떤 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그냥 예수님께서 작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여러 하나님 중에 하나인, 유일한 하나님이 아닌 그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라면, 정관사가 있어서 '그 하나님'이라고 명명이 돼야 될 텐데 여기에 그 정관사가 빠졌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장하기를 '아버지 하나님은 이제 높으신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작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그분 자신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1절과 2절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까? 요한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태초에 그 말씀이 계셨고" 그리고 "그 말씀이", "아들 하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특별히 '정관사' 'the'를 이용해서 그 아들과 아버지 하나님 두 분을 정확하게 지칭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이라고 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지칭하였습니다. 만약에 요한이 이 1절의 마지막 부분도 그 말씀이 '그 하나님'이라고 'the'을 써서 말했다면 우리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해버리면, 요한은 아버지 하나님인 그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같은 존재라고 말해버리는 꼴이 돼버립니다. 아주 우리에게 혼란스러운 것을 말하는 셈이 됩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그 하나님은 아버지라고만 언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그 말씀이 그 하나님이라고 말해버리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못 오해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존재라고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존재는 아니고, 하지만 그 말씀이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관사 없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제 이해하셨길 바랍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참으로 이 삼위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를 정확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수세기에 걸쳐서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위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삼위의 하나님은 모두 서로 구별되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어린 나이였을 때 아직 잘 배우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저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분에게 어떻게 삼위일체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잘 가르칠 수 있어야 됩니다. 때때로 아이들이 여러분보다 더 똑똑한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또한 인터넷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터넷을 보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친구들이 인터넷을 보고 또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이제 친구들에게 말해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은 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분은 저에게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수증기, 물, 얼음." 저는 그것을 듣고 "오! 그거 괜찮은 설명인데?"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틀린 설명입니다. 만약에 그와 같은 비유를 설명해서 삼일일체를 말하게 된다면, 이 아버지 하나님이 어떨 때는 아들 하나님도 되시고 또 그분이 성령 하나님도 되시고 이렇게 계속 때때로 상태가 바뀐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이고 또 다른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설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나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이렇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외치신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것은 두 구별된 인격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앞에 설명한 분이 맞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리를 어떻게 만들어서 위에서 들리게끔 했단 말입니까? 삼위일체는 수증기와 물과 얼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참, 이 자연에서 그 삼위일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비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성경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 개의 인격입니다. 하지만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행하는 모든 것을 일체된 일치 가운데서, 그분의 행함이 모두 하나 된 가운데서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 구별된 인격인 것입니다. 만약에 요한이 그 말씀이 그 하나님이라고 그 구절을 맞쳤다면 그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돼버립니다. 하지만 요한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혼란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말씀은 '관사 없는' 곧 하나님이시라"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도 그와 같이 일관성 있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가 태초에"라고 된 다음에 그다음에 어떻게 써야 될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관사 없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아니면은 관사에 있는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돼야 되겠습니까? 영어 성경에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에 정관사가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에는 정확하게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 "그가" 이것은 그 앞에 그 말씀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태초에 정관사 있는 "그 하나님과 계셨고"라고가 원문에 정확하게 기록된 바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제 잠에 빠지지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주 잘 깨어서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좀 어려운 문제이긴 합니다.
그리고 또한 특별히 이 말씀을 가르쳐야 되는 형제님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또 우리 모두가 정확하게 알아야 되는 그러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이제 무엇을 하십니까?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다시 한 번 3절을 읽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여기에 이제 "지은 바 되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말로 하자면 '되었다' 특별히 '지은 바'가 더 들어가 있는데요. 이제 '되었다'의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이제 '지은 바'라는 게 들어가 있긴 하지만. 사실 원어에는 '되었다'라는 단어만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이 '지은 바', 이 'made'라는 영어 단어보다 'become'이라는 '되었다'라는 단어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되었다'라는 단어를 여기서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김치'라는 그런 비유를 여러분이 단지 웃기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김치'라는 특별히 비유를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이 그것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것도 원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창조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고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자 그들이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에게 어떤 대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라고 돼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분들이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굉장한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근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주의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이 우리로 게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냥 단지 몇 번 클릭만 해가지고 성경을 쉽게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이러한 이제 전자 성경이 없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제 '스트롱 사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스트롱 사전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스트롱 사전이 지금은 아주 작은 스마트폰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스트롱 사전이 원래는 얼마나 큰지를 제 집에 오면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스트롱 사전을 꼭 두 손으로 들어야지만 겨우 옮길 수 있는 정도의 큰 사전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성경을 연구할 때에 그것을 펼쳐놓으면 제 아내가 그 사전 건너편에 있는 제 얼굴을 볼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콘코더 사전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제 얼굴을 다 가릴 정도입니다. 요즘에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예전에 연구할 때는 사실 이 팔 근육도 함께 자랐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주 간단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이렇게 책장을 넘겨가면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 우리가 인내하면서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이 전자사전에만 의존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성경을 연구할 때 성경을 책장을 넘겨가면서 연구를 할 때, 우리는 다른 것을, 뭔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전자 스트롱 사전을 이용한다면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이 단어에 대해서 스트롱 사전을 통해서 어디에 이것이 또한 사용됐는지를 살펴보길 바랍니다. 제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이제 "되었으니" 'become'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가서 이 숙제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한다면 기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요한복음의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창조되는 그 사건에 대해서 '되었다', '된다'라는 이 단어를 사용해서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해서 자신의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복음을 설명합니다. 10절입니다.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여기서 또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서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해서 뭘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 대답하기 전에 약간 다른 것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보다도 더 많은 곳에서 주님께서 어떤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 주님께서 자연에 관해서 역사하는 그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로 다음 2장에서 우리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그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된다', '되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가지고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라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또 '죽음 후에서 생명이 되는' 주님의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주님의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경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어둠은 빛이 됩니다. 이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시야를 얻게 된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어 있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을 때 나사로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한 가지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시키는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그 원자력 힘을, 다 그 에너지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 큰 능력으로도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물을 아이스크림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건 별거 아닌데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물을 수증기로 바꾸는 것도 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물을 완전히 물과는 다른 것으로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손도 대지 않고도, 왜냐하면 다른 하인들이 물을 부어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물을 부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명령하셨을 뿐입니다.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있어서 '무엇이 되다'라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이 '되다'라는 것은 이와 같이 어떤 한 것에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는,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이와 같은 놀라운 창조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이제 단지 처음 시작 단계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처음 이정표일 뿐이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창조를 그 마음에 두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다음 단계인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창조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영적인 창조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이것을 잘 그 가치를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진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예정과 우리가 아버지에 대한 예정을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 아버지께 속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이것은 그냥 다른 종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이제 다음 단어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14절에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지어졌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되었다'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되었다'라는 것이 첫 번째로 창조를 말씀을 하였고, 그리고 '되었다'라는 단어를 통해서 '영적인 창조'를 또한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동일한 단어 '되어'를 사용해서 아들이 육신이 되어, 그 성육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모든 창조물을 되게 하신 이께서 그분 자신이 창조물처럼 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되면서 그분은 그 창조물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되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항상 큰 변화를 말씀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도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그 아버지와 아들께서, 그 영원한 긴 순간 가운데서 기다려온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은 그 모든 영원한 순간 가운데서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순간입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또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에 이제' 거하시매'라는 것이 이제 '장막을 치다'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의 장소는 지성소라고, 가장 거룩한 장소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세키나 구름, 그 영광의 구름으로 거하셨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에스겔서에서는 그 이스라엘의 불순종 가운데서 하나님의 그 영광의 구름이 그 동문을 지나서 감람산을 지나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성전에는 더 이상 영광의 구름 세키나가 없습니다. 그건 단지 이제 건축물이 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에 나와 있는 것에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 영광의 구름이 이스라엘을 떠났지만, 이제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 영광이 한 사람으로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각각 단계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 거하시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세키나 영광의 구름으로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 복음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에는 이제 삼위의 하나님 중에 어떤 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까?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이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 계속 그렇게 해오셨습니다. 다른 종류의 그런 임재가 이 땅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에게 보혜사를 보내겠다.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또한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스라엘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 이스라엘이 가졌던 그 놀라운 성전들, 그 구름과 불기둥, 그 세키나 구름을 보면서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그들을 부러워하게 됩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볼 게 없다고 말합니다. 강사만 볼 수 있을 뿐이죠. 좋게 보일 때보다 또 나쁠 때가 또 많습니다. 그냥 의자는 또 볼 수 있죠. 구름도 없고, 불기둥도 없고, 만나도 없고, 메추라기도 없고,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금 어느 시대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함부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 그때 어떤 때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가까이 계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주님 앞에, 옆에 둘러싸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을 만지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방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거보다 어떻게 더 좋은 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각 단계마다 하나님은 점점 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점점 더 더욱 가까이 오고 계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불이나, 천둥이나, 지진, 이런 것들을 보기를 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대신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거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여기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이제 7분 남았는데요. 지금까지도 아무도 안 졸고 아주 잘 하고 계십니다. 이 시계는 아주 좋은 도구인 것 같습니다. 세계 최고입니다. 세계에서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이것이 있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는 그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 요한복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다른 앞에 세계 공관복음은 십자가를 '수치의 징표'로 제시합니다. 이제 앞에 공관복음 3개가 기록이 된 후에 요한은 그 복음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직 모르고 있는 부분을 이제 이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앞에서 십자가가 그 수치와 낮추는 것임을 다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한은 그 십자가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알려주겠다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십자가를 말합니다. "내가 들려야 하리니", "내가 들리면 많은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십자가를 요한복음은 독특하게 '들리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들리다'라는 단어는 다른 곳에서 사실상 '높임을 받다'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반드시 '인자가 높임을 받아야 하리니'라고 사실상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수치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내가 아버지를 이 땅 가운데서 영화롭게 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모든 사역을 완수하시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에서 요한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제 변화산에서 그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을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역의 시작부터 그 사역이 마치는 때까지, 그 십자가에서 들리시는 것까지, 그 모든 생애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2분이 남았는데요.
그 사이에 여러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마지막 구절로 가겠습니다. 18절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때도 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실제로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형제님들이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는 형제님들이 자주 이렇게 표현하고 기도를 합니다. 어떤 분들이 기도하기를 "아버지 품속을 떠나 이 땅에 오셨다."라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아버지의 품'을 단지 하늘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우리에게 오셨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니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국과 중국어 성경보다 영어와 또 헬라어 성경이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주는 장점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어제 말씀드린 현재형 시제로 "아버지 품 속에 있느니"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제 현재형 시제가 계속적인 변함없이 진리를 말할 때 사용되는 시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태양은 뜬다.' 항상 매일 태양이 뜨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현재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내일 어떤 것을 보지 못할지라도 역시 태양은 동일하게 그렇게 뜨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뜬다.' 현재형으로 계속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품 속에 있는" 현재형으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은 떠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그래서 육신으로 오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거니시는 어느 순간에도 그분은 아버지의 품속을 떠난 순간이 없습니다. 이 '아버지 품속'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교제'를 말해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두 개의 다른 구절에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현재형으로 나타낸 2개의 구절을 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케 됨은 이제 가난한 자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부요하신 자로서" 그것도 역시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난케 되심은" 우리는, 여러분과 저는 주님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부자이거나 가난한 거고 동시에 두 가지가 다 될 수는 없습니다. 부자가 이제 가난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의 이 구절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케 됨은" 그걸 현재형으로 계속적으로 부요하신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가난케 되셨을 때 더 이상 부요하지 않게 됐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집에 가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입니다. "하나님의 본체 형상이시나 종의 형체를 입어"라고 돼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입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나" 이것은 역시 현재형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 하나님의 본체이신 것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구절에서 이 놀라운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는 주님의 그 어떠하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됩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부요하신 자로서", "하나님의 본체시나", 이것은 오직 우리 주님께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때때로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시며, 사람으로 되셨고, 어떻게 동시에 여전히 하나님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사람이셨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이것을 잘 여러 번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제 잘 알지 못하는 분이 여러분에게 와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수증기, 물, 얼음으로 설명하는 것을 틀렸다 말씀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절반이 하나님이시고 절반만 사람이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100%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100% 사람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100% 항상 부요하신 분이었고, 그리고 그 때가 되었을 때 그분은 100%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아버지의 품속을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시편 31편을 인용하였습니다. 시편 31편에 보면 "이제 당신의 손에" 단수 '손'에 "내 영혼을 의탁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시편을 바꾸셔서 인용하셨습니다. 그 시편을 분명히 인용하셨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들에" 복수형으로 해서 "내 영혼을 의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단지 단수의 '손'만을 언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그 두 손을 모두 언급하면서 그분께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온전한 확신 가운데서 자신의 영혼을 그분께 맡겼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듣는 데 너무 지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저에게 보여주신 친절에 대해서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두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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