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에 나온 지역교회 > 대전 중구 / 기드온 쿠 형제님
제가 올 때마다 여기 있는 시계 적혀 있는 숫자가 더 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 실질적으로 이 오후 시간이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제 단순하게 말씀 교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5절부터 20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5-20).
참 이상하게도 '교회'라는 단어가 맨 처음 언급된 곳이 신약 성경에서 마태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이 이 특별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 교회라는 단어가 바로 이 마태복음에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교제를 통해서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를 한번 교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 교회라는 단어가 맨 처음 나온 장은 실제로 16장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대로 이것이 가톨릭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16장에 주님께서 교회를 말씀하신 이 교회는 주님의 몸인 그 교회를 말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때때로 그것을 이제 '우주적인 교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18장에 다시 한 번 교회라는 단어가 언급이 되는데 그것은 우주적인 교회가 아니라 분명히 '지역교회'를 뜻하는 단어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교회 말하고"라는 표현을 봤을 때 교회가 어떠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건물에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로는 이것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모르겠지만, 영어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단지 건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레이시아의는 우리 모임에서는 성도들이 15년, 20년간 함께 모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성도님들이 간혹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교회 건물을 그렇게 교회라고 말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종종 성경책을 교회에다 놔두고 집으로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말씀하시는 것이 "아, 내 성경책을 교회에 두고 왔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이렇게 답변하곤 합니다. "그게 아니고 교회당에 성경책을 두고 왔다."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성경책을 교회에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떤 주머니에 넣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분명히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교회에 말하고"라고 하셨을 때는 그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이 기본적인 원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8장 20절이 아주 기본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이 말씀이 교회당 건물에 많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선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지역 교회에 대한 정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바는 왜 지역교회가 아주 귀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지역교회가 특별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바로 그 구절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 모임이 특별한 곳입니까?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주님께서 이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이 바로 이 모임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임을 참석하는 것이 단지 그 가운데서 나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뭐, 문제는 없습니다마는 어떤 사람들은 그냥 모임에 자기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뭐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임에 참여하는 그 동기가 돼야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다른 어떤 동기보다 우선하는 동기가 돼야 됩니다. 만약에 이 가운데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냥 단지 사교적인 모임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교적인 모임과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것이 이것을 특별한 장소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제와 그 전날에 진해 모임에서 이러한 것을 교제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여러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에 어떤 경우에는 아주 특별한 유명한 사람들이 있는 그런 세상의 모임도 있습니다. 어떤 정부의 주요 인사들, 그들이 모이는 곳이 있고 국회의원들이 모이는 그런 모임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그런 중요한 모임들이 있습니다. 또 UN에서 세계 대표들이 모여서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임도 있습니다. 참으로 그러한 모임에서 결정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그런 영향을 미치는 그런 중요한 모임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 지역 모임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 연합, 그 중요한 회의를 하는데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주님이 계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모이는 그 모임에서도 거기에 주님 계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 모든 그런 중요한 모임들을 다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모임에 주님이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이 땅에 주님께서 지역 모임에만 임재해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모임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땅의 어떤 다른 모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지역 모임만이 주님께서 임재하신 유일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때때로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모이는 건물도 아주 그렇게 훌륭하고 좋은 건물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화려한 건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주 금으로 둘러싸인 그런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돌들로 치장된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례의 절기에 수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바로 그런 장소였습니다. 참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보이고 있는 그 화려함과 영광은 볼 만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현재 이 시대에 주님께서 그것을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습 물론 그것은 미래에 다시 그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 금과 은으로 둘러싸인 성전에 대해서 제쳐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습니다. 성전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땅에 많은 곳곳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바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그곳에 주님이 임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복음이 세계 각처에서 그 지역 모임을 통해서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그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각처로 아시아, 소아시아,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지역 모임이 형성이 됩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실제적인 이유를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제 로마 제국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때도 하나님의 임재가 단지 예루살렘에만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받은 사람들이, 수천의 수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먼 거리를 이동해서 예루살렘으로 와야 된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날 아침에 우리는 이미 그분의 임재를 누렸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 예루살렘에 갔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달 안에 곧 그 여행 비용으로 다 파산하고 말 것입니다. 한 달에 4번씩 예루살렘에 간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년에 48번 왔다 갔다 해야 됩니다. 예루살렘의 이스라엘의 비자를, 영주권을 받아야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게도 더 이상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전에, 바로 이 장소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에 계시는 것입니다. 마포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더블린에도 계십니다. 어디든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바로 그곳에 계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그 모든 은혜가 이방인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라고 아신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구절에 대해서 조금씩 더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은 이 20절에 맨 앞에는 "왜냐하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여러 구절이 이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영어로 하면 'for'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 앞에 있는 구절과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접속사입니다. 이 구절 앞에 어떤 내용이 있었습니까? 여기에 어떤 문제들을 이 앞에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형제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그런 문제입니다.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참 우리로서는 익숙하게 경험하는 그런 상황 아닙니까? 참으로 첫 번째 지역 모임이 형성되기도 전에 참 사람들의 모임 가운데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주님은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측 가능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본성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이 지역 모임에 세워지는 배경이, 처음 자체가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시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단지 그 문제뿐만 아니라 여기에 또한 징계까지도 말씀하십니다. 그 죄를 범한 사람이 그 말을 교정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교회에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말도 듣지 않으면 그를 세리와 같이 여기는, 징계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또 다른 배경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9절에 보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을 또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구하게 됩니까? 기도하는 시간에 아뢰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20절의 말씀의 배경이 단지 징계일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도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18장 20절이 이렇게 중요한 구절인데 이것이 만찬이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만찬이 가장 중요한 집회인데 이 구절에 그런 내용이 있어야 되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주님의 만찬도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지금 배경으로, 이 구절의 배경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기도 집회입니다.
제가 이제 한국 상황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을 하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이 만찬은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평일 집회는 어떻습니까? 그런 분들은 참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배경에서 알다시피 모임의 그 힘은 기도집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형제님들이 흔히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님들이 주일에 몇 명 나옵니까라고 묻지 마십시오. 그 모임의 건강 상태를 정말로 알고자 한다면 그 기도 집회로 모이는 그것이 화요일이든, 목요일이든, 그날 몇 분의 성도님들이 모이시는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기도 집회가 지역 모임의 건강 상태를 나타내주는 지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중요한 구절의 배경이 기도 집회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이 단어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이 말씀은 징계와 연관이 돼 있으며, 그리고 이 단어는 기도집회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20절에 "왜냐하면" 다음에 "두 세 사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2천 명, 또는 3천 명을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200명, 300명이라고 말씀하셨어도 되게 어려웠을 것입니다. 20명, 30명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역시 어려운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유대인들에게 좀 특별한 그런 숫자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한 2천 명, 3천 명이 모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모인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여호와의 절기 가운데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게 됩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절기 때마다 많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유대인들은 놀라게 됩니다. "단지 두세 사람?' 아니, 어떤 집회이길래 겨우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거야?" 하지만 그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체입니다. 단지 예루살렘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예루살렘에 모이는 그 정도의 숫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보는 지역 모임이 모인 본을 보게 될 때에 거기에 수천 명이 모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아주 대형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수만 명의 500명, 1천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지역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이 복음의 증거가 세상에 각처, 먼 곳까지 퍼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한 천 명이 모이는 집회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중에 절반 정도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 결과는 더 놀라운 것입니다. 만약에 천 명, 2천 명이나 되는 모임이 있다면, 그리고 계속 오랜 시간 동안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그냥 천명 2천 명의 게을러진 성도들이 나올 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 하나님의 지혜가 이 두 세 사람의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아주 큰 교회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에 많은 작은 모임을 원하신 것입니다. 이 여러 지역에, 작지만 여러 모임들이 세워진다면 많은 지역의 복음이 그만큼 더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핍박이 온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갑자기 아주 큰 모임이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잠시 후 핍박이 그곳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핍박이 일어나서 이제 성도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 성도들이 핍박으로 말미암아 흩어졌을 때 복음도 동일하게 전파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이 핍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핍박으로 인해 흩어질 때 복음도 똑같이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 세 사람이"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구절에 나와 있는 문법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두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특별히 원어에는 이것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어에 '두 세 사람이 모였던 곳에'라고 되어 있지 않고, "두 세 사람이 모이고 있는 곳"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 시제로 말한다면 이제 과거에 있었던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형 시제를 사용할 때는 두 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은 시간과 관계없이 항상 참된 것을 말할 때 현재형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로 예를 들겠습니다. '해가 뜬다.' 이것은 이제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가 뜬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지금 해가 뜨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그 해를 보고 있든지 안 보고 있든지 상관없이 매일 아침에 해가 뜬다는 항상 참된 진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항상 참인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재형을 영속적인 진리를 말하는 시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해는 항상 매일 뜨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국 음식은 맛있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전에는 맛있었는데 지금은 별로 맛이 없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알고 있어? 한국 음식이 맛있어."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그 한국 음식이 그 성격이 변함없이 항상 맛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속적인 사실을 말하는 현재형 시제의 사용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고 있는"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만 참되었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사도시대 때 모였을 때만 사실이었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형제 운동이 일어나서 새로운 부흥이 일어났을 때만 참되었던 진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항상 어느 때나 사실인 그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사실인 그 진리를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 곳에" 그들은 뭐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함께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 '모이다'라는 것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날 오늘 아침에 이제 장 형제님이 가족과 함께 차에 태워가지고 저를 이곳에 모시고 왔습니다. 오늘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죠. 여러분들이 이제 옷을 입고 그리고 차에 타서 시동을 걸고, 요즘에는 이제 버튼으로 시동을 걸죠. 그렇게 해서 차를 타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내가 여기 왔다, 내가 여기 모였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기에 지금 왔다, 그래서 모였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피동형으로 모여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모이게 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로 나아오게 한 것입니다. 내가 발로 차에 엑셀을 밟아서 왔다고 하지만, 우리가 내 발로 걸어서 여기 왔다고 하지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장소로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장소에 모여졌던 것입니다. 여기 '그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주님께서 임재하신다고, 여기에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고도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구절 그 표현 뒤에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에서 '그들'이 강조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강조를 통해서 특별히 "두 세 사람이 모인" 그 성도들이 모인 곳을 특별한 장소라고 하나님께서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어떤 한 장소에 모이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 그 두 세 사람, 사람들이 모인 것이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어떤 한 장소에 그들은 모이게 됩니다. 이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당이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 건물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디 갈 자리가 없게 됩니다. 여기 길 맞은편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요. 그러면 이제 이 교회당 건물이 갑자기 무너져버려서 어디 모일 장소가 없으니까 한번 그냥 어쩔 수 없이 놀이터에서 의자를 두고 모이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가 이 지역교회가 되는 것입니까? 절대적으로 맞습니다. 이 건물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여기에 이제 사람들이 어떤 한 장소에 모이게 됩니다. 이와 같은 건물에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지역적인 간증을 나타내게 됩니다. 요즘에는 그 복음 사역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초청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지역에 우리의 간증을 나타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 성도들이 모이는 그 지역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웃들은 매 주일마다 성도들이 넥타이를 매고 옷을 차려 입고 모이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경배를 드리러 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에 직접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간증이 계속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앞에 자동차들이 주차해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 성도들이 여기를 출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바로 이 장소를 우리에게 간증의 장소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간증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그 장소에 있느니라"에서 그것은 이제 물리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음 것은 좀 더 이제 주의 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여기에 많은 이제 온라인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고자 하는 여러 이유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다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 이유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판데믹이 다 끝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성도들이 함께 모이게 된 것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많은 이런 장소들이 있었습니다. 그 온라인 집회를 하는 가운데 보이는 부분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지만 밑에는 그냥 잠옷을 입고 있는 상태로 모였다는 소식도 듣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뭘 말하는지 아시겠죠? 그냥 반바지를 입기도 합니다. 위에는 아주 멋지게 차려 입었지만, 밑에는 뭘 입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제 소식들이 나중에 듣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여러 위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제 다시 지역 모임으로 모이기를 원치 않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와서 만찬 예배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어떤 기도 집회는 그냥 온라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18장 20절에 그 말씀과 전혀 상반되는 실행입니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우리가 모여야 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그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모인 곳에'라는 '그 곳'이라는 물리적인 장소가 이 구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여러 유능한 성경 교사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인터넷으로 기도를 한다면, 이제 어떤 형제님이 온라인에서 기도하고 그리고 다른 접속돼 있는 성도님들이 아멘 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그 인터넷으로 연결된 그 선에 계시는 것인가?" 이렇게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실 이제 진지하게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제 논리적으로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18장 20절의 말씀에 보면은 모인 곳에 주님께서 계시다고 했는데 그러면은 이쪽과 이쪽을 연결하는 그 인터넷 선상에 주님이 계시다는 말인가요? 참으로 성경의 놀라운 점은 이것입니다. 참으로 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은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의 원리에 순종한다면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몇천 년 전에 주님께서 이미 그것을 다 말씀을 해놓으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 기술이 20배나 더 발전한다 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때도 역시 타당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답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냥 오래된 옛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현재형으로 영속적인 사실을 말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을 주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이미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아직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어떻게 주님께서 어떤 의미로 하신 것입니까? 주님께서 계속 죽어 있다면, 분명히 그렇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실 항상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들 중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내 이름으로 모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어떤 의미입니까? 우선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을 먼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오해하게 됩니다. 또한 이제 찬송가도 약간 이제 오해하기에 쓰여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나에게 모인 곳'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입니다. 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에 성경이 '주님께로 모인다'고 말했다면 우리는 그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제 성경을 그 부분을 찾아봐서 잠깐 또 잠에서 깰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살후 2:1).
여기서는 주님께 모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 모입니까? 죽었 때에 그렇게 됩니다. 그것은 나중에 오는 사건입니다. 이제 주님이 오셔서 그분의 모습을 우리가 눈으로 볼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주님께로' 모일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까? 참으로 그분을 우리가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그분께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대신에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그 육체로 계시지 않을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에 주님께 육체적으로 앞에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이 모인 성도들이 그분의 이름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취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충성되게 순종하는 것이 그분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 그분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라는 말씀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부유한 부자 아빠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의 아빠가 아주 강력하고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많은 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 아들한테 "아들아, 이 종들을 시켜서 이거 하고, 저거 하고 해라." 그리고 이제 그 말을 듣고 아들은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인에게 가게 됩니다. "내 아버지가 이것, 이것, 저것을 하라고 명했다." 그 종은 "당신이 어떤 이름으로 왔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 아들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안 계시는 동안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왔다는 것은 지금 부재 중인 사람을 대신해서 왔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라고 하셨을 때는 그분이 육체적으로 계시지 않을 때를 염두에 두신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육체로 이 땅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육체로 계실 때가 있었습니다. 육체로 계시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여기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무소부재하신, 어느 곳에나 계신 분이라는 것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했던 것은 이것은 주님의 승인의 의미를 또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영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말해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8장 20절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지금 육체로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면에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리고 우리의 모임은 그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나타나는 장소가 돼야 됩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임재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지킬 때 우리는 참으로 그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면, 우리가 모임의 진리대로 실행하고 있다면, 그리고 주님의 주되심과 주님의 머리 되심이 존중을 받고 있다면,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을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그 모임의 의장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지금 앞에서 크게 소리를 치고 있는 사람이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께서 제일 높은 위치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존귀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존귀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합당하게 이곳에서 행동해야 됩니다. 저는 때때로 신자들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이 가운데 보이게 계시다면, 우리의 지금 졸린 눈은 번쩍 눈이 떠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자세가 번뜩 곧게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엎드릴 것입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안 가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이 가운데 계신 게 보인다면,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것을 매 순간 의식하고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옷을 입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앉아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서로 대하겠습니까? 아주 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가지 마지막으로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아주 눈을 크게 뜨고 보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이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처음에 읽게 될 때에 어떻게 그 임마누엘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질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천년 왕국 시대에 실제적으로 또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것을 보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서 그곳에서는 천년 왕국보다 더 놀라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 교회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나와 있습니까?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이 안 돼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마태복음과 다른 복음서를 비교할 때 다른 교회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마태복음만 "두세 사람이 내 이름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까? 왜냐하면은 마태복음은 '임마누엘의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실로 참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임마누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신약 성경의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은 그 임마누엘의 뜻을 알고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깨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청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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