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언 : 주님의 권위와 겸손 > 대전중구 / 기드온 쿠 형제님
여러분과 함께하게 돼서 제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집을 떠나 있지만 마치 집에 있는 것과 같이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레이시아처럼 아주 날씨가 덥기 때문입니다. 아주 제가 익숙한 그러한 날씨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도님들과 함께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17).
10장에 17절과 18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발을 씻기시는 이 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이 장에서 특별히 실질적인 교훈을 몇 가지를 받고자 합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원문에 따르면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원문을 보게 될 때에 이제 자주 굉장히 길게 문장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1절부터 3절까지가 헬라어 성경에서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또 다시 다른 중요한 한 문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1절부터 3절까지는 여러 자세한 이야기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자기가 세상을 떠나실 때가 이룬 줄을 아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또 아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이 긴 문장은 '예수께서 아신다'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긴 문장은 또한 예수께서 '아신다'라는 말씀으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물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사실에 대해서 이제 여러 번 강조해서 언급을 합니다. 요한은 여러 번 반복해서 "예수께서 아시고", "예수께서 아시고"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요한은 바로 예수께서 다른 누가 아니라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특별히 때가 이룬 줄을 아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주님의 이 지상 사역의 마지막 때가 온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그 때를 아셨고 그리고 3절에서는 그 시간에 속한 것뿐만 아니라 영혼 사이에, 영혼 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하늘에서 영혼 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의 제한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아시고, 시간의 제한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 또한 흥미롭게 보게 되는 것은 4절이 이렇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의 그 긴 문장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사실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시는 것, 그리고 유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많이 말하였습니다. 그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주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발을 씻는 것은 아주 중요한 그런 일입니다. 그것은 그보다 다른일이 먼저 일어날 수 없는 그러한 일입니다. 또한 그다음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 일은 반드시 정확한 그때에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부터 3절까지 4절에 앞서서 우리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일어난 후에 그것을 다 아신 후에 주님께서는 정확히 그 필요한 때에 이때가 발을 씻는 때라고 아시고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것도 너무 빨리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또한 너무 늦게 어떤 일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언제 그리고 무엇을 하셨을 때는 그것은 항상 그때에 또한 적합한 일을 정확하게 하셨습니다. 그 영원의 순간 가운데서, 그뿐만 아니라 이제 시간의 제한 가운데서, 또 그 안에서도 정확한 때에 주님께서는 발을 씻기 위해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루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발 씻는 것이 십자가 사건 다음으로 주님의 겸손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겸손함에 대해서 가장 잘 나타내는 사건이며 그리고 두 번째로 그것을 나타내주는 사건이 바로 이 발을 씻는 사건인 것입니다.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일어나시고 겉옷을 벗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0장을 앞에서 읽었는데요.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것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우리 사람들은, "내가 목숨을 버린다.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여러분과 저는 언제 하늘로 갈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시간이 되면 우리는 들려 올라갈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언제 죽을지를 정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내가 다시 부활할지를 정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9장에서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주님 스스로 고개를 숙이시고 영혼을 아버지께 맡긴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뭘 말해줍니까? 제가 한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여러분이 내가 이때 죽겠다라고 결정했다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명조차도 버릴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단지 그렇게 죽기로 결정했다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이제 죽겠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이고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자 할지라도 자신의 심장이 언제 멈추게 그걸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고개를 숙였을 때 주님께서는 돌아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이 말씀하신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그분의 생명을 유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물과 피가 밖으로 나와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죽음의 성격으로, 죽음의 힘으로 그분께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 죽음의 때가 되었을 때 죽으신 것입니다. 정확한 그 때가 되자 주님께선 고개를 숙이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창조주으로서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가 있다." 주님께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물질적인 성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자신의 육체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다시 일으키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얻을 권세가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발 씻는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겉옷을 벗어서 내려놓으셨습니다. 이 겉옷을 벗어서 내려놓는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단지 그냥 옷을 벗는 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나와 있는 "내가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다."에서 '버려놓다' 그 똑같은 단어가 겉옷을 '내려놓다'에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후에 주님께서는 발을 씻기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12절에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옷을 입으시고"라는 이 단어는 또한 동일하게 요한복음 10장에 나와 있는 "다시 이 목숨을 취할 권세가 있다."에 그건 '취하다'라는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확인하게 됩니까? 주님께서는 그 옷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겉옷을 다시 입으셨습니다. 여기에 이 모든 발 씻는 일이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죽음의 그 깊은 곳으로 내려가시기를 주님께서 자원하셨습니.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그 낮은 자리까지 또한 자원에서 낮아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전혀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죽어야 될 합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보게 될 때 놀라게 됩니다. 참으로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우리 주님의 겸손함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지극히 낮은 곳으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교훈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가기를 자원하셨습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십자가의 수치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로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그 겸손함을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가 주님처럼 그런 대속의 십자가에 죽으면 죽을 수 없지만 그도 겸손하게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겉옷을 벗어 내려놓으신 것은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과 같은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도 형제들의 발을 씻기 위해서 그렇게 자원해서 낮아져야 된다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와 같이 발을 씻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데 주님께서 발을 씻으러 오실 때에 거절합니다. 여기에 헬라어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베드로가 실제 상 말한 것은 "아니오! 저를 발을 낄 수 없습니다! 영원히 안 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아주 강력하게 부정을 사용해가지고 거절한 것입니다. "아니요! 결코, 영원히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발을 씻지 않다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그렇다면 저를 다 씻겨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앞에서 제 스스로에게, 또 여러분도 이와 같은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언제 내 형제의 발을 씻긴 적이 마지막으로 있었는가?' '내 형제를 위해서 참으로 이와 같은 겸손함을 나타낸 적이 언제가 마지막으로 있었는가?'
제가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겸손하게 된다는 것은 단지 그냥 권위를 다 내려놓는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분이 이와 같이 겸손이 낮아졌을 때 주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를 떠나서 그것을 내려놓고 권위를 없애신 것이 아닙니다. 이 겸손함이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권위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계가 저에게 이제 마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번 시간에 교제를 드린 것을 통해서 여러분께서 우리 주님께서 그 겉옷을 벗으시고 다시 얻으신 이 일을 통해서 그분의 겸손함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이 주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고 또한 목숨을 다시 얻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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