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4일 토요일 (수양회1)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히브리서 11장 01_아벨과 에녹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1-6).
히브리서 11장이 소위 믿음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뭐냐 라는 건데요. 저희들도 믿는자고 또 저희들의 삶을 믿음으로 항상 살아갑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어떤식으로 행동하는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것이 히브리서 11장의 주제입니다. 믿음의 정의는 다른곳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것입니다. 믿음이 뭔가 하는것은 로마서를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어야지" 해도 안믿어지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믿습니다." 합니다. 이것은 안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안믿어지는데 믿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시작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내가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보겠습니다. 믿음이란, 믿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쪽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말 할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반응하는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떤분의 구원간증을 들어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소위 20세기, 21세기 과학문명의 시대를 삽니다. 지금은 달나라를 가고 과학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괭장한 정도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과학책에서 알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뭐냐면, 비중이 1-2 이상은 물위에 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것들을 물위에 놓으면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이신데(역사적인 인물이신데), 물 위를 걸었다고 써 있습니다. 말이 안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물 위를 걸을수 있습니까?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다." 사실은 아닌데 생각하든지, 이것은 과학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것들이 자연법칙,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연법칙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구원간증을 할때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만일 이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이 분이 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물을 만드신 분이 물 위를 걷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오면서 성경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라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저희들도 그런식입니다.
저희들도 성경이 말도 안되는데, 예를들면 예수님께서 이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 피가 내 죄를 용서하고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용서한다는 것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상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때에,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것이 있는데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그것을 믿으려고 받아들이면 안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수 없는 분이라면-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단 하나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하실수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뭐든지 하실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 말의 내용이 내 상식이나 내 가치관과 충돌된다 할찌라도 "내 가치관이나 상식이 맞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라고 하는것이 믿음이라고 한다. 이것이 믿음에 관한 정의 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0장 17절의 내용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누구 말을 들어야 하냐면, 예수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에 그리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때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거짓말이 아닙니다. 두번째로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불가능해 보여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보면 이와같이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맞지 않아도 , 내가 생각할때에 그것이 현실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여도 그것을 믿으면 그 사람은 두가지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라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소망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있을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믿ㅇ는자를 영원한 천국에 데려가겠다." 그곳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저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아마 죽음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여도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헤어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가장 슬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건 가족이 죽거나 그러면 가장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이 말씀이 현실적으로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고 진리의 말씀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믿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지않고 내가 보기에 불가능하지 하나님에게 불가능하겠는가, 하고 받아들이면 내 속에서 그 바라는 것들이 확신이 됩니다. 실상이라고 하는것은 내가 그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수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천국이 어디 있는가? 가 보았는가? 가보지 않고 어떻게 알수 있는가? 죽어봐야 아는거지 지금 어떻게 확신하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그 생각이 상식적이고 맞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가졌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 다음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처소가 준비되면 내가 다시와서 너희를 내 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을 실제로 확신하게 됩니다.
로맛 10장에서는 믿음을 정의 했고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그 믿음이 해주는 일들을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 사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바랄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것이 어디 있는가 하고 그런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없는 곳, 슬픔이 없는 곳, 갈등이 없는 곳, 의로운 곳, 평안한 곳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된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바랄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신하는 결과를 갖게 됩니다.
두번째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는 자는 죄가 용서되었다" 어떤 사람이 죄가 용서되었는지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어떤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안심하여 가라. 네 죄가 용서 받았느니라." 그러면 어떤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는지를 볼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있고 안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영적인 것이고 볼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죄가 용서되지 않았는지 볼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물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죄가 용서 되었음을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절대로 책임을 묻지 않을것을 확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소망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믿으면, 믿는사람은 이 두가지를 확신하고 증거를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해 주는 일입니다.
2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 앞선 시대의 믿는 자들이, 에를들면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 다윗, 마태와 같은 사람들이 "이로써" 는 믿음으로서 이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증거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이 "이들은 내 자녀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1절은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망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나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는자는 확신할수 있습니다. 자기가 확신하고 확신에 따라 살게 됩니다. 그리고 2절, 이와같은 믿음의 삶의 예가있습니다. 많은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믿는자라고 하는 인정을 하나님께 받았던 것입다. 그이후, 3절은 창조에 관한 것이니 4절부터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최초의 사람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많은 자녀를 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하는 것은 뽑아서 기록 합니다. 성경이 기록한 이유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요한복음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많은데 그것을 낱낱이 기록하면 이 세상에 그 책을 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선별적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기록의 목적은 "이것을 다 읽으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을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기록을 근거로 믿으시면 영생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성경은 다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 두명을 기록합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이 두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추방됩니다. 그리고나서 태어난 사람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뵌 적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뵙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은 이제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뵌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어느날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는 우리식으로 바꾸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갑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 땅의 소산으로 드렸습니다. 과일 채소 이런것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양의 첫새끼를 죽여서 드렸습니다. 이것을 추즉을 해보자면, 이 두사람이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드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사는 받고 한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그렇게만 기록하니 그것이 어떻게 드러났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쉽게 생각하면 이렇게 생각 할수 있습니다. 가인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서 반응이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이 드린 양의 제사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그 양을 태웠습니다. 하늘이 응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짐작할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똑같은 시간 독같은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두사람이 서로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셨는지 아닌지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미워해야 하는데 아벨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통제해야 함을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아벨은 인류 가운데 최초로 축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최초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아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살아 있을때 아벨이 먼저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최초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고 최초로 살해된 사람입니다. 자연적으로 죽은것이 아니고 살인은 당한거지요. 여기서 저희들이 배우는 것은 가인과 아벨은 왜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제사드릴것을 말해 준 것입니다. '농사도 짓고 소산도 나왔는데 하나님께 갖다드려야지'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도 양을 치다가 '양이 새끼를 낳았으니 하나님께 드려야지' 이렇게 한것이 아닙니다. 이 두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제사드려야 함을, 시간과 장소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장소에서 예물를 드린 것입니다. 언제 드렸을까에 대해서는 짐작하기 어렵고요. 어디서 드렸는가에 대해서는 제가 제안을 해보겠습니다. 꼭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만, 창세기 3장으로 가시겠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에덴동산은 나중에 노아홍수로 뒤집어지기까지 에덴동산 동편에 하나님께서는 그룹천사를 두시고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십니다. 화염검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죄인이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때가 되면 제사를 드릴려고 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딱 하나 입니다. 저희들이 지금 믿음에 대해서 보고 있는데요. 믿음은 어디서부터시작 되느냐면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시작이 됩니다. 믿음을 우리가 만들어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성경이 없으면 미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없이 믿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불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추방되고 나서 아담과 하와가 자기 평생에 잊을수 없는 일을 자녀들에게 설명 합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뱀이 찾아와서 유혹을 하는 통에 우리가 먹어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는 천사가 지키고 있어 못들어간다."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하면 나갈수 있는지를 설명 합니다. "우리들이 제일 처음에는 무화과 나무잎으로 가렸고 무화과 나무 잎으로 가리면 하나님 앞에 나갈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안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가죽 옷을 입혀주셨다" 하는 이야기를 당연히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에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려면 '가죽옷'을 입어야 한다. 나뭇잎은 안된다. 가죽옷은 어떻게 생겼냐하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죄없는 짐승이 대신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양이 대신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양이대신 죽고 그 양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옷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의로움 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고 그 예수님을 믿고 가면, 죄 없는 예수님이 내가 지은 죄를 대신 죽으셨다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다.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륵 사는것이 인생이 아니며 우리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함을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 하며 우리가 거저 생긴 생명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며 하나님께 가야 함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방법은 짐승을 잡아서,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뿌리고,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 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죄의 문제를 제가 해결할수 없습니다." 이 죄를 해결할수 있다면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았겠지요. 죄인이고 우리는 이 죄를 해결할수 없습니다. 내 죄를 위대해서 대신 죽어야 할 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양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이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해 주시고 그분이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그 피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 나갈수 있게 하셨으니 참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것이 아벨이 드린 제사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으십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죄를 해결할수 없는 것을 알고 자기로서는 해결할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대신 해결해주신 그 은혜를 받아들여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리고 가인은 하나님께서 나오는 방법을 주셨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대로 했습니다. "아니 꼭 잔인하게 짐승을 죽여야 하는가? 그런 잔인한 피냄새가 나는 방법 말고 예쁜 꽃 과일 형형색색의 소출물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것 같은 것을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안받으십니다.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베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더 나은 제사' 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안받으시는 제사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 입니다. 왜 하나님이 받으셨나요? 다음을 보면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십니다. 아벨의 예물 때문입니다. 아벨의 예물은 양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3-5).
4절, "세월이 지난후에" 이것은 '때가 차매' 로 번역할수 있습니다.
여기보면 아벨과 그 제물은 같이 갑니다. 뭘 드리냐가 그 사람입니다. 아벨은 양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양으로 보신 것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입니다. 이것을 안받으십니다. 땅의 것이어서 안받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지시하신것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믿음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말씀하신대로 성경대로 말씀대로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이유는 뭐냐면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다" 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예물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양을 가지고 온 아벨을 이렇게 불러주십니다. "너는 의인이다" 의인이라고 하는 뜻은 죄가 없다는 뜻이고 죄가 용서되었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서 그는 하늘나라에 하나님과 함께 있을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죽었으나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합니다. 죽은사람이 말합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10-12).
여기보면 아벨은 죽었지만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이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요. 저는 죽을 이유가 없는데 가인이 저를 미워해서 제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나를 의인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사랑을 입은자라는 이유로 가인이 저를 죽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하는 겁니다. 두번째, 11절부터 아벨은 자기를 죽인 가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를 죽인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죽을만한 이유가 없고 당신이 죄인이기에 나를 죽인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말하나요? 밭을 갈아도 땅에서 효력이 없고 땅에서 유리하고 있는 가인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벨은 가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이 죄를 반드시 용서받아야 한다. 이 죄는 잘못된 것이다" 라고 가인의 생애를 통해서 아벨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억울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세번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물 때문에 의로운 제사를 드렸다" 아벨의 피는 성경은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벨의 피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재판해 주시도록 호소하는 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피는 반대 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십자가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요. 자기가 무슨일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것이 주님 피가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린피는 말합니다. "너희들의 죄를 위해서 내가 죽었노라.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영원한 용서를 위해서 내가 죽었노라."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다 이루었다."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내가 다 받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피와 주님의 피의 차이점 입니다.
그리고 아벨에게 대해서 한가지 저희들이 적용할수 있다면 이런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이렇게 설명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벨이 드린 제사는 오늘날로 치면 예배 입니다. 로마서 12장에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릴찌니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아벨처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양을 가지고 나갑니다. 양을 드리면 그 예물을 보시고 하나님이 아벨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럼 우리가 예배때 드려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온 세상 죄인들을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 그 주님을 아버지 앞에 드릴때 아버지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시고 그 예수님을 받을분만 아니라 그 예수님을 가지고 나온 우리를 주님안에서 받으시는 것이 예배 입니다.
이제 에녹으로 가겠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에녹에 대해서 창세기를 먼저 읽겠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14-15).
에녹은 유다서에 의하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선지자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입니다.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 입니다. 아벨은 억울한 죽음을 죽었고 에녹은 죽음을 보지않고 옮기웠습니다. 그가 우리처럼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가 아벨처럼 죄 용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심판이 있다. 무서운 심판이 있다. 백보좌 심판이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동행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는 갑자기 땅에서 하늘로 죽음을 보지않고 옮기워졌습니다. 이것이 에녹입니다. 에녹의 경우에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심판' 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도 그는 하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고 하나나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았지만 특별히 므두셀라를 낳은후에 성경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기록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더라" 그렇다면 므두셀라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므두셀라의 이 이름의 뜻을 해석하면 "무드셀라가 죽으면 그것이 오리라" 라는 뜻입니다. 노아 홍수로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때에, 그 해가 므두셀라가 죽은 해 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므두셀라가 죽고나서 노아 홍수가 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자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가 죽으면 심판을 할 것이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최장수 사람입니다. 므두셀라의 나이가 제일 많습니다. 므두셀라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람의 나이 중에서 므두셀라가 제일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가능한한 늦추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오래 삽니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죽는 해에 노아 홍수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에녹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특별히 심판에 대한 메세지를 받습니다. '므두셀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유다서의 말씀을 보면 그가 사람들에게 심판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잘 아는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동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조건은 의합해야 합니다. 의합한다는 것은 그 뜻이 맞다는 것입니다. 두사람이 뭔가를 함께 하려면 목표가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두사람이 듯이 같지 않으면 어떻게 같이 길을 가겠느냐?" 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 것을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과 에녹의 뜻이 같았습니다. 또 무엇이 같았을까요? 이렇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어떤점에서 같았냐면 두사람은 죄를 미워했습니다. 죄는 좋아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킨다. 죄는 절대로 안된다 라고하는 면에서 에녹과 하나님의 뜻이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 할찌라도 하나님과 뜻이 안맞았던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전하라" 그랬더니 요나가 도망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느니웨 사람도, 그 악한 사람도 구원받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네가 가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면 심판이 오고 니느웨 성이 무너진다." 라고 전해다오 했더니 요나는 "저는 니느웨 사람들이 복음 안듣고 멸망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도망가버립니다. 그래서 뜻이 같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에녹은 동행이 되었스니다. 동행이 되었을때 하나님이 에녹에게 말한것은 "므두셀라가 죽으면 내가 심판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에녹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조금 표현이 이상하지만, 이 두분, 하나님과 에녹이 똑같은것 그것은 죄에대한 심판입니다. 에녹의 생애를 한마디로 말하락 하면 그는 죄를 미워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한번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이 연약하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데 육신이 연약하다. 어쩌느냐?"라고 변명하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살펴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전에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그 죽은 이유는 그들이 죄를 즐겨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아도 죄를 질수 있습니다. 위는 연약하고 넘어질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즐거워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을 묻습니다. 그래서 실수로, 어쩌다가 할수없이 짓는 죄와 죄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죄를 지으면서 마음속으로 즐기고 있는지, 에녹은 그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죄를 미워했습니다.
저희가 에녹을 요나와 비교해 볼수 있고요. 두번째로는 베드로와 비교해 볼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자 입니다. 주님과 동행했지요.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주님 십자가 지시는데까지 쭉 동행 합니다. 어디서 헤어지냐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입니다. 주님께서 체포되실때에 베드로는 도망갑니다. 그때 더이상 동행이 안됩니다. 이때의 한 사건을 들면 주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빌라도가 보낸 로마의 군인들이 무기를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주님은 무장하고 다니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하셨지, 주님께 무슨 칼이 있거나 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주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무장한 군대들이 옵니다. 그랬을때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칼을 빼서 잘라버립니다. 그때 주님께서 다시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가지 참으라"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하지 못한것은, 요나는 뜻이 틀렸고요. 베드로는 주님을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의도지요. 그래서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체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고, 베드로는 너무 앞서는 것입니다. 열정이 넘치는 것입니다. 동행한다고 하는것은 보폭을 같이해서 같으 방향으로 걷는 것입니다. 동행하려면 뒤쳐져서도 안되고 너무 앞으로가도 동행이 안됩니다. 너무 뒤쳐진 자는 요나, 너무 앞서 간사람은 베드로 입니다.
그리고 그 보폭을 맞춘 사람은 에녹입니다. 그는 죄를 미워하면서도 그 죄에대한 미움만으로 되느것이 아니고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함으로서 죄를 미워했던 사람입니다.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고 심판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심판이 일어나기 전에 하늘로 옮겨 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희들로 치면 주님께서 공중에 오실때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주님께서 공주에 오시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때에는 죽어있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때 죽은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몸을 입고 영광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보지 않았으니 그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다 함께 공중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이때 죽지않고 살아서 주님의 휴거를 맞이한 사람의 그림자로 볼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믿음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 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우리같은 죄인이었던 사람이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보잘것 없는 인간이 거룩하시고 위대한 하나님을 기쁘게할수 있습니다. 무엇으로요? 믿음으로 기쁘시게 할수 있습니다. 믿음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 입니다. 이것을 다시 전개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 우선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사람도 기쁘게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니 내 옆에 있는 아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정말 기쁩니다." 하며 기뻐할수 있습니다. 또 어떤 믿지 않는 가족은 내가 믿음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니 "너 그게 무슨 짓이냐? 그렇게해서 되겠냐? 상식적으로 살아라. 너무 종교적이지 않느냐?" 하고 다른사람이 기뻐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사람이 기쁘게 될것이다 입니다. 이 둘이 같이 가면 좋겠지만 이 둘이 모순이 될찌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목표를 둡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 할찌라도 그것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있다 할찌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믿는 자의 우선순위 입니다. 이것이 에녹이 했던 것입니다. 에녹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에녹의 삶에 나타난 교훈 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두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계신것"과, '계신것과'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두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불시자들도 믿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많습니다. 예를들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을 보면 사도바울도 그가 구원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실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것 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안게신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다 라고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자기를 찾는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하나님을 찾는것은 참을 가치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많은 일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이 언제 기뻐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추구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중요한 일이다. 라고 믿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에녹이 그런 사람입니다. 다 다루지 못했는데요, 하여간 아벨의 믿음, 에녹의 믿음을 통해서 앞선 사람들이 믿음이 어떤 행동들을 하게 했는가를 보았습니다. 저희들도 믿는 사람으로서 이 믿음이 저희들의 삶에서 어떤식으로드러나야 하는가 하는것을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저희들의 삶이 그렇게 나아가게 될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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