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4일 토요일 (수양회 2)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히브리서 11장 02_노아 아브라함 사라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7-16).
여기서 다루어지는 인물은 7절에서는 노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8-10절까지는 아브라함을 다루고 11-12절부터는 사라 입니다. 13-16절까지는 다시한번 앞의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다시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선 한사람씩, 노아부터 보겠습니다. 그는 방주를 지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창6:13-16).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7:1).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2:5).
히브리서, 창세기, 베드로후서 이 세군데를 종합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가 어떤 인물을 놓고 그에게 믿음은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가, 그의 삶 속에서믿음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말씀 하니다. 아벨도 그렇고 에녹도 전부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그들이 동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믿음의 형태는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벨은 양을 죽이는 제사로 나타났고 에녹의 경우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노아의 경우는 방주를 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동일한 믿음인데 그 믿음이 각 사람의 생애에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 환경에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공통점은 믿음은 항상 첫번째로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 꼭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그가, 믿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구나를 알고 마음에 담아두고 사는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히브리서는, 반드시 믿음은 행동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삶에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살게 됩니다. 세번째, 그렇게 살았을때 그에게 하나님이 내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주어집니다. 이 세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의 삶을 세상과 달리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형태로 살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고 이 길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무슨소리를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다 라는 확신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쭉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노아의 경우는 잘 아시는대로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노아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노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홍수가 있고 했으니까 받아들일수 있지'. 할수 있지만 노아의 입장에서는, 노아가 살던 당시에는 하나님의 심판은 없었습니다. 한번도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때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 이렇게 말하면 못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옥이 어디있느냐, 천국이 어디 있느냐?" 믿기가 힘들지요. 노아도 똑같습니다. 아담부터 노아의 시대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가 없었습니다. 그다음, 두번째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비도 한방울도 내리지 않은때 입니다. 비도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전부 이슬로 이 지구에 수분이 충분히 공급되던 때였습니다. 비라는 것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도 보지 못했는데 홍수로 온 지구가 잠기는 심판을 한다, 이것을 노아가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어떻게하면 받아들일수 있죠? ..자기생각, 자기 경험, 자기 기준을 내려놔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이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자는 나중에 어떤 죄목으로 심판을 받느냐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었다는 죄목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에이- 그럴리라, 그렬려고, 그렇게 하시면 이상하지"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말씀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그러실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러신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내가 홍수로 심판한다고 하였을때, 노아 입장에서는 심판이라는 개념도 없고 홍수라는 개념은 더더욱 없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할수 없는 하나님이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입니다. 그분은 말씀을 이루실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해놓고 약속을 못지킬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능력이 안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요. 원하시는 것을 하실수 있는 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한번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의 그 말씀의 내용이 내 생각에는 이상해보여도 그하나님은 그렇게 하실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받아들인것 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두번째 명령입니다. "방주를 지어라" 방주가 이 교실정도 되는 크기라면 방주를 짓지요. 그런데 이 방주의 사이즈가 축구장 열개쯤 되는 크기 입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또 방주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배가 아닙니다. 이것은 물위를 떠다니는 배가 아니고 이것은 상자 입니다. 창을 만들었을 뿐이지 네모난 상자 입니다. 이것은 어디를 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홍수가 났을때에 둥둥 떠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목적지가 있어서 가고 그런것이 아닙니다. 네모난 상자를 하나 만들어서 그 안에 모든 생명체들을, 암수 한쌍식 다 넣는 것입니다. 정한 짐승은 일곱쌍입니다. 모든 짐승들을 나 넣어야 하니까 그래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상자를 지어야 합니다. 이것을 짓는데 120년이 걸립니다. 이것을 순종합니다. 그런데 이 상자를 산에 짓습니다.
노아가 아침일찍 일어나 뭔가를 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묻습니다. "뭐하세요?"산에서 상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들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왜 만드는데요?" 물었을 것이고 노아는 "곧 홍수가 올것인데 그 홍수를 피하기 위해서 짓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다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어마어마한 크기의 상자를, 모든 동물이 들어갈 크기의 상자를 짓습니다. 이것은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이것에 순종 합니다. 120년 동안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짓습니다. 저희들도 이렇게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오시면 그때 믿고 죽은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때 살아있는 성도들은 순식간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 함께 공중으로 끌어올려 우리 주님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어떻게 말할까요? 제가 대학친구에게 언제한번 그런말을 했어요. 그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진짜로 그렇게 믿는거냐? 문자적으로 그렇게 믿는다는거지?" 사람들이 듣기에는 황당한 이야기 입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 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왜요? 다른사람이 그런소리를 하면 절대 믿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성경에 있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실제로 그렇게 삽니다. 그가 120년간 방주를 짓습니다. 120년간 단 한명의 위로자나 격려자는 없습니다. 지나가면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 한명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 뿐이죠? "정신병원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백년째 짓고 있는데 하늘에 구름 한점 없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 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희들이 상상력을 동원해보는 것이죠. 노아의 아이들이 학교를 다녔다면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았다면 "네 아버지는 이상한 아버지다" "쟤랑 놀지말자" 이와같은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치루어야 하는 댓가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방주만 짓고 하나님께서 하라는대로 아무소리 안하고 조용히 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그가 의를 전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냥 하나님이 시키신 일만 순종한 것이 아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것때문에 하나님이 심판 하십니다. 죄는 아무리 작은 것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낱낱히 드러납니다"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지요.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내리라"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피할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냥 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넘어갑니다. 모르니까요.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노아가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당신 눈에는 하나님이 안보이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그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물으시 것입니다" 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안그래도 반 미쳤다고 생각되어지는데 그 사람이 또 와서 자기들을 비판하고 정죄한 거예요. 노아의 일생이 어떻겠습니까? 미친 사람이 와서 재수없는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 노아의 일생입니다. 그가 그 인생을 삽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를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했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주고 비판을 받은 사람들의 생애를 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의로운 자다." "너와 네 가족은 방주에 들어가라"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없었다면 노아는 생애를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가족 외에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족들은 인정해다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가끔보면 가족마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지만 믿지 않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롯의 경우는 롯의 아내는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셔서 가족들은 다 함께 있었습니다. 다른사람들이 뭐라해도, 자녀들은 아버지가 하는일이 옳다 했습니다. 괭장히 이상해 보이지만 말씀대로 하는 것이라고 지지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은 노아의 생애를 변화시킵니다. 다른 사람과 완전히 다른 생애를 살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의로운 자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벨은 제사를 드렸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다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 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교제 합니다. 그 다음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는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다음에 세번째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예배가 가장 중요하고 예배드린 후에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이후에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세가지 상자가 나옵니다. 노아의 방주가 한가지의 상자 입니다. 그 다음 출애굽기의 모세를 담은 상자 입니다. 바로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나일강에 던지라고 합니다. 모세가 남자 아이였기에 3개월을 숨기다가 할수없이 강에 던져야 합니다. 모세를 강에 띄우기 위해서 갈대상자를 만듭니다. 두번째가 모세가 들어간 갈대상자가 있습니다. 또하나 상자가 있습니다. 세번재가 언약궤가 입니다. 언약귀도 상자입니다. 직사각형입니다. 그리고 언약궤 안에는 여러개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 돌판이 있습니다. 이 세개의 상자가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노아의 상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보호입니다. 그리고 갈대 상자는 바로의 공격으로부터의 보호 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물에 던져서 죽게 만들려고 하는것을 보호하는 상자 입니다. 세번째 언약궤 상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 십계명으로부터의 보호 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가지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호 받습니다. 방주에 들어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두번째,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 됩니다. 이것은 지역모임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출교되는것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사단에게 내어주었다" 지역모임 안에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심판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역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사단의 공격에서부터 보호됩니다. 세번째, 언약궤는 하나님의 법 율법에서의 해방입니다. 율법이 정죄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는자에게 주어지는 세가지 보호장치 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지금 저희들이 살고 있는 시기가 알수는 없지만, 언제 주님이오셔도 이상하지 않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다고 했는데요. 마태복음이기에 이 주님이 임하시는 것은 휴거가 아닙니다. 지상재림입니다. 다시말씀 드리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있는 이 마지막 때와 관련된 가르침은 전부 교회와 상관 없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적용해보는 것입니다. 마지막때는 노아의 때와 같은데 그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세가지 입니다.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입니다.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이것이 죄는 아닙니다. 먹어야 살고 마셔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합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결혼하게 하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거 하느라 거기에 다 힘쓰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먹고' 지금도 저희들이 테레비를 잠깐만 틀면 다이어트가 주제 입니다. 먹을것이 넘쳐나서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을 먹지않고 살이 찌지 않을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는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희들까지 거의 말려들어갑니다. 그리고 맛집하는 영상이 넘쳐납니다. 그리스도인이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두번째 '마시고' 입니다. 음식점에 가보면 와인을 괭장히 싼 값에 팝니다. 동네 마트에 가면 예전에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은 한칸 전체가 와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시고' 술입니다. 중독성이 있습니다. 예전엔 안그랬는데 여자들도 마셔요. 옛날 같은 경우에는 할머니들의 경우에 담배와 술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여자들도 그렇게 먹고 마십니다. 술 없이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성적인 즐거움을 원합니다. 법무부 차관을 한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합니다. 그는 괭장히 높은 직위의 사람인데 그랬습니다. 이 세가지 즐거움이 그 사회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은 곧 심판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 그 말씀을 듣자 사람들은 "우리가 식인종인가, 이 말씀은 듣기 어렵도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먹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늘 영광을 떠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먹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앞에 그 낮아지심, 그 겸손함 앞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교만하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살고 있는가 알아야 합니다. "내 피를 마시고" 그리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하고 작은 죄라도 양심에 찔리면 그것을 자백하고 고쳐내고 싸우고 이것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개념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무엇을 의미하지요? 주님입니다. 신부는 교회 입니다.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남자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정에서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그다음 아내들은 가정에서 교회가 어떻게 주님을 순종할까 하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끼리 잘 살아야 겠다. 하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대의 모습을 주님께서 말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모습을 통해서 배울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제 두번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8-10).
8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강조되는것은 '우거 했다'는 것입니다. 우거했다는 것은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거는 임시거처 입니다. 그리고 '우'를 빼고 '거하였으며' 하면 거기에 정착했다는 뜻입니다. '우'가 들어가면 그것은 '나그네'로 '임시로'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특징을 보면 그는 장막을 치고 삽니다. 장막은 텐트입니다. 텐트는 유목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라는 뜻입니다. 나는 영원히 여기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갈곳은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세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시자, 이 말씀을 믿으면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이제 아브라함의 생애는 변합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그는 평생 나그네로 삽니다. 그는 땅 한평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이 변화된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에서 잘 아시기에 읽지않고 가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에 살고 있었습니다. 갈대아라고 하는것은 보통 학교에서 배울때는 메소포타미아 입니다. 유프라 데스강과 티그리스강 이 두개의 강이 흐르고 이 강 사이에 있는 지역입니다. 강이 범람하면 그 밑에 흙들이 밀려와서 그곳은 아주 농사짓기 좋은 땅이 됩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 합니다. 그곳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오늘로 치면 이라크 입니다. 이라크 사람들이 일으킨 문명이 갈대아 문명입니다. 거기에 우르라고 하는 중요한 도시에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식으로 치자면, 당대 세계에서 가장 문명 국가, 우리로 치면 미국이며 거기서 가장 중요한 도시 뉴욕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세군데를 떠나 갑니다. '아비, 본토 친척집' 입니다. 그가나안으로 가라고 합니다. 가나안은 어디냐면, 완전히 불모지 입니다. 아주 선진국, 문명화된 곳을 떠나서 깡촌으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갑니다. 그리고 세가지를 떠나라고 한것은, '본토'라고 하는 것은 그가 속한 나라를 가리킵니다. 메소포타미아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겠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이 세상적인 사고 가치관을 벗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인간들끼리 모여서 인간을 최정점으로 놓고 어떻게하면 인간이 편리해지는가, 어떨때에 인간이 가장 만족스러운가 하는 그것을 추구하는 문명 입니다. 휴머니즘입니다. 지금도 여러가지 새 자동차가 나옵니다. 어떻게하면 좀더 인간을 더 편리하게 만드는가를 연구 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이제 배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자율 주동 자동차가 나와서 곧 몇년안에 시행될 것입니다. 이제 자동차는 사는 개념이 아니고 타고 다니는 개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동차 운전학원은 다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도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은 손 하나 까닥 안해도 모든 것들이 다 되어지는 것이 현대 문명의 최고 목적 입니다. 인간을 높이고 인간을 가장 편리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편리한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하면 간단한 문제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불편해도, 그렇게하면 좀 더디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가려고 합니다.
두번째, '친척'입니다. 친척들 하면 이모도 있고 삼촌도 있습니다. 여러 친척들이 조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돌봅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내 주위에 내가 이 사람처럼 했으면 좋겠다. 이사람은 성공했네 하는 영향력입니다. 사람의 영향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사람들의 생각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앞에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낸 것입니다. 세번째, '아비'는 이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자기 꿈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꿈을 물어보면 어린아이들은 '대통령' '장군'등을 얘기 했습니다. 요즘에는 다연예인이 되려고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꿈이 있습니다. 어릴적에는 그렇지만 슬슬 자기 현실을 알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경영하려 하지마라. 내가 너를 위해서 가진 계획을 따라와라" 이것이 '아비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참 좋지요. 그런데 "떠나면 거기보다 더 좋은곳이 있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떠나라고 해놓고 어디로 갈지는 말씀해주지 않으십니다. 세상에 그런법이 어딧습니까? 저도 이사를 수없이 하니까, 그것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이사할때, 어떤 순서를 밟느냐면 우선 이사갈 집을 먼저 정하고 그 후에 집을 내놓는 것입니다. 저처럼 살림을 못하는 사람은 덜커덕 집을 내놓고 이사할 집을 구하지 못했는데 집이 나가버리는 그런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순서를 밟으면 안됩니다. 먼저 이사갈 집을 정하고 내 집을 내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어떤 형제님이 이렇게 교제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짐을 싸서 다 내놓습니다. 사람들이 다 물어봅니다. "어디로 가세요?" 대답입니다. "몰라요" 그것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실하신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 후로 아브라함은 한번도 정착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전부 텐트칩니다. 그는 갈대아우르에서 살아왔습니다. 그곳은 전부 집짓고 사는 곳이었습니다. 전부 정착하는 곳이었습니다. 가나안땅에 왔습니다. 가나안 땅에도 전부 성들이 있습니다. 소돔성, 고모라성, 세겜성 온통 성입니다. 전부 다 집을 짓고 사는데 자기 혼자 텐트치고 삽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네가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친구다"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이상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 좋은 갈대아우르를 떠나 완전히 새로운, 전혀 개발되지도 않은, 심지어는 사막이 있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나중에 가나안 땅인줄 알았지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말씀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한 말입니다. 그래서 상식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누가 그런 이상한 짓을 합니까? 아무도 그렇게 안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이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살도록 불러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히브리서에는 말하지 않았지만 저희들이 알고 있는 창세기 기록을 잠깐 보시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믿음이 무엇인가? 하였을때, 그 믿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생애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즉각 순종했는가요? 즉각 순종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납니다. 갈대아우르에 있을때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자기에게 말하신 이분이 영광스러운 분임을 압니다. 그가 그래서 즉각 순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순종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가 떠납니다. 떠나는데 누구랑 같이 떠나냐면 아버지 데라와 같이 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의 약점 입니다. 아브라함 생애 가운데 계속 약점이 되는것은 가족입니다. 그는 데라와 함께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하란에 머뭅니다. 하란은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국경지대 입니다. 그래서 여기를 벗어나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자 떠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이유는 자기에게 나아난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순종은 즉각적이지만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다음 그는 또 떠나는데 누구를 대동하나면 롯을 대동합니다. 롯은 자기 조카였습니다. 형이 먼저 죽고 형이 남겨놓은 유일한 혈육입니다. 그런데 롯도 결국은 아브라함을 떠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족을 버리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약점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시험 합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 놔라" 그는 자꾸 거짓말을 합니다. 사라를 자기의 누이라고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을 이삭이 본받아서 합니다. 이것이 가족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자기 목숨이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저희들이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버지가 같습니다. 데라가 아브라함도 낳고 사라도 낳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다릅니다. 둘은 이복간입니다. 그래서 둘이 결혼 합니다. 그런데 갈대아우르를 떠날때부터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우리는 부부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자"라고 합니다. 왜 그랬냐면 사라가 예뻣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갈대아를 떠나는 것에는 어떤 두려움과 위협이 있었냐면, 죽을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가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라때문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이 갈대아를 떠나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 목숨과 자기 가족의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떠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씀 합니다.
세번째, 사라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18:9-15).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3:6).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이 쭉 나오는데 사라가 첫번째로 언급된 여자 입니다. 그리고 사라는 불임 입니다. 결혼을 했지만 자녀를 낳을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입증이 되냐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결혼했는데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어느쪽이 문제였는가 하였을때 사라쪽이 문제 였음이 이스마엘을 통해서 판명 됩니다. 하갈을 취하니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사라가 불임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라는 자녀를 낳을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신 말씀 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자녀를 주겠다" 심지어는 하늘의 별같은, 해변의 모래같은, 혹은 땅의 티끌같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가 보기에는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자기는 자녀를 낳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번 실수 합니다. 자기가 아이디어를 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나는 불임인데 이 약속을 어떻게 이룰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자기 능력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사용하셔서 이룰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합리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불임인데, 하갈이라고 하는 자녀를 출산할수 있을것 같은 종이 있으니 그 종을 통해서 이룹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것은 항상 반대해야 합니다. 합리적인 설명,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실텐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실텐데, 그것을 사람의 방법으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사라의 경우는 어려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후손을 주실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자식을 낳을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8장에서 사라는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것이라고 하셨을때 사라가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믿음을 회복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라는 세가지 과정을 겪습니다. 첫번재 책망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왜 믿지 않느냐? 왜 웃었느냐?" 사라가 "웃지 않았습니다" 하였을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첫번째 자신의 불신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내가 못믿고 있구나 하는것을 지적받아야 합니다. 그가 왜 못믿습니까? 그가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불임이기 때문입니다. 결혼한지 25년이 지났는데도 자식을 못낳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낳겠습니까? 그리고 나이는 이미 90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경수가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낳겠습니까? 그래서 상황을 보면 못 낳습니다. 그는 지금 상황을 가지고 합리적인 것을 가지고 이성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뭐라고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하나님이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질문하시지요. "여호와께 능치못할일이 있겠느냐?" 청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이 불임한 여성에게서 자녀를 낳게하지 못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번째는 책망하십니다. 그 다음 두번째입니다. 사라가 회복된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을 주라 하여" 사라는 돕는 배필의 대표적인 예 입니다. 남편을 '주'라고 부릅니다. 남편을 존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떤 표현으로 되어 있으냐면, 사라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믿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이 없었기에 하갈을 취한 것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해서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겠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4:19).
그는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한 현실을 압니다. 그는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판단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것은 눈을 감는것이 아닙니다. 현실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을 냉정하게 계산할줄 압니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자기가 100세나 되서, 자식을 낳는것에 관한 한 자신의 몸과 사라의 몸이 죽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4:20-22).
그리고 오히려 믿음이 견고해져서 "내가 죽은것 같은 몸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틀림없이 주실것이다" 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21절, 자기 몸이 그런줄 알고도 믿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22절, 그러므로 의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17절에 그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을 어떤분으로 알고 있는가가 핵심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하나님은 없는것을 있는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때, 빛이 있으라, 사람을 만드시고 모든것을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몸을 살려내서 자식을 낳게 못하시겠습니까? 어떤것이 어렵습니까? 없는데서 있는것을 만들어 내는것이 더 어렵습니다. 이것은 죽어도 있는것이죠. 여기서 생명을 갖게하는것은 훨씬 쉬운 문제 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나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는 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하시겠다고 하면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라의 경우에는 이렇게 합니다. 첫째로 책망을 받습니다. 두번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그냥 남편이니까, 나는 아내이니 성경에 있는대로 순종해야지 하는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믿음을 발휘하는 것을 따라 갑니다. 남편의 믿음,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그 믿음, 그 믿음을 그가 가질뿐 아니라 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간증을 합니다. "나는 내 하나님이 자식을 줄 것을 믿는다." 이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몸은 다 죽은것 같은데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사라가 아멘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주'라고 불렀다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으로 그가 후손을 낳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히11:11).
'사라 자신도' 입니다. 아브라함만 아니라 사라도 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믿음의 발휘를 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잉태하는 힘은 그녀에게 없었습니다. 그녀는 잉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잉태하는 하는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낸 것입니다. 왜요? 어떻게 해서요? 약속하신 이,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미쁘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거짓말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분은 한번 말하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하는 것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12절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죽은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생육하였느니라"(히11:12).
아브라함과 사라는 한사람입니다. 작은 사람입니다.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민족 국가가 생겨 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같은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이 발휘하는 한 믿음의 결단, 그리고 모임에서 한 작은 지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 작은 결단이 우리 생각과 달리 어마어마한 결과를 만들어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영향력을 발휘해서 다른사람에게 영향력을 주고 다른사람이 또 동일한 믿음을 발휘하게 하고 그래서 한 모임이 변화되고 그리고 그 변화된 모임이 교회사에서 복된 모임으로 기록되고 수많은 후진들에게 동일한 믿음을 발휘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작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혹은, 우리의 작은 지역모임의 작은 사소한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했던 이 결단들은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수 있는 마음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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