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히브리서

< 히브리서 11장 03_아브라함, 욥 >

박이레 2021. 7. 21. 00:19

2019년 5월 4일 토요일 (수양회 3)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히브리서 11장 03_아브라함, 욥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3-19).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생각할때 어떤 측면을 히브리서가 다루고 있냐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들 생애에 그 말씀이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이비,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이 세가지 입니다. 하나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번째는 그 많은 민족들이 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약속은 너의 후손으로 인하여 세상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하는 새 약속입니다. 곧,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하십니다. 두번째, 그 이스라엘이 살수 있는 땅입니다. 지금 중동에 있는 팔레스타인 땅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만민이 구원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자식 이삭을 낳지요. 그 다음,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까지 봅니다. 기껏해야 자손 세명을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하늘의 별같은, 바다의 모래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약속의 초기단계만 본 것입니다. 그리고 땅도, 유프라데스까지 이르는 어마어마한 땅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아브라함은 그 땅을 나그네로 삽니다. 그 땅에서 아브라함이 소유한 것은 사라가 죽었을때 사라의 묘지로 막벨라 동굴을 삽니다. 그것 하나 뿐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도 소유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죽을때까지 땅 한평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너의 후손으로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만민에게 복을 주실수 있는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예수님게서논쟁을 하다가 아브라함이 나옵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나에게 이렇게 할수 없다. 아브라함은 나를 보고 믿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50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것을 기대하다가 보고 기뻐하였으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후손으로 이세상에 올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자로 느낍니다. 자기의 생애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오시겠구나. 그리고 이 주님을 통해서 세상 만민이 복을 얻겠구나 하는 이것을 영적으로 이해 합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요. 그러나 그가 영적으로 훗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어떤 축복을 주실것을 그가 봅니다. 예를들면 아벨이 양을 드릴때에 그 양은 사실 우리 주님입니다. 마찬가지지요. 노아가 방주를 지을때 이 방주는 사실 주님입니다. 그래서 사실 전부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촛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 합니다. 노아도 이 방주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진정한 구원의 방주, 주님을 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민족과 땅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자기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생애에 문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으로 삽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죽을때도 그 믿음을 놓치지 않고 믿음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약속이 다 성취되지 않습니다. 일부는 성취되고 일부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의 특징은 멀리서 보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기" 그래서 보통 이 믿음을 보통 '만원경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먼 훗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심지어는 몇천년 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볼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믿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자기 새대, 자기 당대가 아니고, 훗날 천년후에 이뤄질 것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특징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13).

"환영하며"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겠다. 후손들이 어떻게 이땅으로 돌아올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400년을 지낼 것이다. 그리고 400년 후에 너의 후손들이 다시 이땅에 돌아올것이다"라고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머리서 봅니다. 출애굽을 봅니다. 야곱의 열두아들이 요셉의 도움으로 애굽에 내려가고 민족으로 커갑니다. 그리고 이제 출애굽해서 이 가나안 땅에 여호수아의 인도아래 그 당시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하고 땅을 배분받고.. 이것을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이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이 여호수아 시대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것을 멀리서 바라 봅니다. 자기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그렇게 성취하신다. 틀림없이 내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신다. 이렇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주님을 통해서 세상 만민이 축복을 얻을 것이다, 교회시대까지 보는 것입니다.

첫번째, 믿음의 특징은 멀리서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애를 뛰어 넘은 먼 미래까지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믿는다고 했을때 이와같은 믿음, 우리 당대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세대, 혹은 휴거된 이후의 영원한 나라까지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환영하며" 그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했다는 뜻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생애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기뻐한 예를들면, 시편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의 천날보다 아버지 집에서의 하루를 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천날이면 삼년이 넘는 날입니다. 단, 이 세상에서 3년을 사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하루 사는 것입니다. 그가 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루 살겠습니다". 이것이 환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하지요. 그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가 재판을 받는데 그가 사형을 당할수도 있고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내 입장에서는 사형받아서 주님께 가는 것이 훨씬 낫다" 둘 중에 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사형당해서 주님앞에 가는것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대한 성호, 기쁨,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의 죽으심을 앞둔것을 잘 알고 값진 향유를 깨서 붓습니다. 가룟유다가 보기에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수 있는 돈입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 합니다. 그러데 주님께서 이 베다니 마리아를 옹호해 주십니다. "그를 괴롭히지 말라 그가 내게 좋은일을 했느니라.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 곁에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같이 잇지 못한다. 이는 내 장사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 아무도 주님의 죽으심을 보지 못할때에,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의 십자가를 봅니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곧 있으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은 이 베다니 마리아의 죄도 포함해서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바라보고 베다니 마리아는 향유를 깨는 것입니다. 전부 멀리서 보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는, 기쁨으로 소망으로 담아두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멀리서 봅니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정말로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죽을때까지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먼 후세대에 이루어질 약속까지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왜 내 세대에는 이루어지지 않는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는것이 아니고 먼 세대에 이루실 주님의 약속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삶을 세상에서 증거 합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살곳이 아닙니다. 여기서 여기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이와같은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 입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공주의 아들의 신분을 거절 합니다. 누릴수 있는 현실적인 축복을 전부 거절합니다. 왕자의 신분을 거절하고 그가 종된 이스라엘과 같이 삽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였습니까? 종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된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섭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다음 14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것을 나타냄이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성장하기 시작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처음 시작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시작 합니다. 하나님이 .갈대아우르를 떠나라 라고 하셨을때 그의 믿음이 시작합니다. 그의 믿음의 시작의 아름다움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던데 있습니다. 목적지를 말 안해 주셔도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말씀에 떠납니다. 이렇게 했던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겪으면서 가나안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땅의 한평도 갖지 못합니다. 그러면 생각하는 것이죠. "아니,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왜 주시지 않는가?" 그리고 그 마음이 실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주셔야지요." 혹은,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이 어떻게 자라나냐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땅이 가나안으로 비유되는 하늘나라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그는 영적인 것으로 바꿔 갑니다. 그는 점점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것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 이구나 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보통 배수의 진을 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싸울때에 이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군사들이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 배수의 진을 칩니다. 뒤에 강을 두고 후퇴하면 죽습니다. 못 물러나도록 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를 정복할때에 이렇게 합니다. 타고온 배를 불태워 버립니다. 스페인에 못돌아 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살 길은 이 남미를 정복하는 것 뿐이다. 하고 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돌아갈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믿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가라고 하십니다. 많은사람들이 떠나갑니다. "이 말은 어렵도다" 하면서 떠났습니다. 누가 남았냐면 열두제자가 남았습니다. 열두제자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사람들은 다 떠나도 너희들은 가지 않겠지? 너희들은 남겠지?" 주님께서는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이 말이 어려우냐? 그래서 더이상 같이 다니고 싶지 않다면 떠나도 좋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의 말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주님 말고는 영원한 생명이 없으니, 주님 외에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주님을 떠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믿음의 결단들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가려고 합니다. 출애굽 시켜서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애굽의 고기가마 곁에서 죽었으면 나았을 것을.." 그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성을 뒤돌아 봄으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안 합니다. 돌아갈 기회를 줍니다.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번 믿음으로 선택한 길을 되돌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가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세상하고 비교해 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과 광야를 비교합니다. 어디가 더 나은가요? 광야가 더 낫습니다. 애굽에서는 종이었습니다. 이제 자유인입니다. 그리고 곧 가나안 땅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것을 왜 바꾸겠습니까? 바꾼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이삭을 위해서 아내를 구할때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제가 가서 적합한 여자를 얻었는데 오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결혼이 중요하니 이삭을 데리고 갈대아 쪽으로 돌아갈까요?" 라고 했을때 아브라함은 차라리 결혼하지 않을지언정 못돌아 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선택입니다.

그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는 이삭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잘 아시지만 하나님께서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드리는데요.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1-2).

여기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명령이 나와 있습니다. 이 명령에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려가서 아브라함이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언제요?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것은 왜 이삭을 바쳐야 하는지 나와있지 않습니다. 욥기를 한번 가 보겠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1:6-12).

욥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욥의 경우도 시험을 받습니다. 동일하게 자녀들이 그 시험에 포함 됩니다. 그의 자녀들이 일시에 죽습니다. 그의 재산이 단번에 망해 버립니다. 욥의 경우는 그러한 시험을 받고, 아브라함도 대단히 심각한 시험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왜 이 시험을 받는지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욥의 경우는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사단이 하나님을 격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을 보면 하님이 통치 하시는 장소(영역)가 나옵니다. 거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왜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냐면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고 숫자가 늘어나지 않습니다. 딱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만 창조하셨습니다. 그 후의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손대지 않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나옵니다. 이것이 사람과 천사의 차이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천사들 중에서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도 그 자리에 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우리로 치면 청와대 입니다. 그곳에서 모든것이 결정 됩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통치 하시는데 이 통치가 공정 합니다. 그리고 의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통치를 공개 합니다. 천사들에게 공개하고 심지어는 사단도 들어와서 발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공정하고 의롭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사단 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물어봅니다. "어디갔다 왔느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왔습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베드로가 말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찾느니라" 그것과 이것이 똑같습니다. 사단이 뭐하지요? 사단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의롭지 않다. 하나님은 공정하게 하지 않으신다. 나는 억울하다. 누구한테는 잘해주고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느냐?" 라고 하는 생각을 늘 불어 넣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승복할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사단이라고 하는 뜻이 '송사하는 반역자' 입니다. 지금 성도님들도 한번 잘 생각해 보시지요. 하나님께서 통치를 잘하고 계실까요? 나를 사랑으로 대하고 계신가요? 그래서 내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이 사랑의 손길로 돌보고 계신가요? 이것에 대해서 불만이 생깁니다. "누구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이쁘고 잘살고 온갖 것을 갖추고 있는데 나는 그냥 믿은도 적고 세상에서도 부족한것이 많고.. 나는 왜이렇게 태어났을까?" 이런 것들은 사단이 넣어주는 생각 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말씀하십니다.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하나님의 통치가 의롭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옳고 정당하고 그 앞에 제가 승복합니다. 하는 사람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욥입니다. 그랬더니 사단이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하나님의 통치를 승복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잘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못해줘 보세요. 그래도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축복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렵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렵게 병 주고, 고난속에 넣고, 실패하게 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라는 사단의 도전을 하나님이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잘해주면 좋다고 하고 못해주면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좋다고 하는것은 하나님께서 잘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못해줘 보십시요.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나 보십시요" 이 카테고리에 많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이 도전을 받아들입니다. 내기를 합니다. "네가 욥을 죽이지만 말고 욥을 마음대로 하라" 욥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어느날 갑자기 자기의 사업체가 졸지에 망해버립니다. 이것은 누가봐도 하나님이 손대셨다고 해석되는 사건입니다. 경기가 나빠져서 혹은, 불행한 일이 생겨서 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배후에서 손대셨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사업을 망하게 한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자녀들이 식사하고 있는 그 집이 무너져서 모두 죽어버립니다.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자녀들을 죽였다고 해석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랬을때에 욥이 어떻게 행동하지요? 사단은 이렇게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분인지 나는 몰랐다. 나에게 이러실수가 있느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 왔는데 나를 이렇게 만들수 있는가?" 이 반응을 사단이 기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니다. 그는 그렇게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불행한 일이 생겨도 변함없이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라고 말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실제로 욥이 어떻게 말하지요? 자녀들이 죽었을때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들 가운데 저희가 그렇게 사랑하고 애써 키운 자녀가 사고로 죽어버렸습니다. 그때 이렇게 말할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신분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그는 이 사건이 하나님의 손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 합니다. 하나님이 죽인 것입니다. "취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자기 자녀가 죽었는데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죽였는데 내 자녀를 죽이신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이것이 욥입니다. 이쯤에서 사단이 물러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사단에게 말하십니다. "보았느냐 내가 불행하게 해도 나의 통치를 승복하는 사람을 보았느냐?" 사단은 항복하지 않고 또 한번 도전 합니다. "재산이나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소유물이고, 욥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어 보십시요. 그러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죽이지만 말고 해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욥에게 병이 생깁니다. 기왓장으로 긁는다고 하니, 병 중에서 온갖 고통스러운 병들이 다 걸립니다. 그것을 보고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세요. 세상에 이런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못믿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고선 전능하다고 하고선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의 입을 사단이 사용한것 같습니다. 보통 남자들이 아내 말을 잘 듣습니다. 아내말을 듣고 망한 남자들이 많지요. 아담,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갈을 취했습니다. 이번에도 욥의 아내가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그냥 죽으세요" 그때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우리가 하나님께 재앙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입증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도 내가 한것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에 승복하는 사람이 인류 가운데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확보하고 계시다는 것, 이것이 욥기의 주제 입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을 받되 고난받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를 욥 스스로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어서 그 이유를 알았겠지요. 그러나 시험을 받을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욥의 사건에서 왜 이와같은 고난이 있는지를 성경은 설명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삭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진 아이 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랬을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데요. 이 부분은 잠깐만 성경을 몇군데 찾아 보겠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욥이 사는곳이 '우스' 땅입니다.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창22:21).

창세기 22장에 '우스'가 나옵니다. 우스는 물론 나홀의 아들인데요. 창세기 22장에서 나오는 우스는 사람 이름이고, 욥은 아마도 아브라함보다 더 전대 사람입니다. 욥기가 창세기보다 더 뒤에 있지만 이 성경이 언대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스라는 땅이 먼저 있었고, 이 우스라는 땅의 이름을 따서 사람 이름을 붇입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의 시험사건하고 욥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욥과 아브라함의 관해서 공통적인 이름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때에 하나님께서 대신 양을 주시면서 "네가 하나님을 경외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둘다 이 시험이 끝난후에 늙어 복을 누리다가 하나님 곁으로 갑니다. 그래서 둘다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러면 이제 욥기에 있었던 이유를 아브라함에게 적용해서 해석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1-12).

여기보면 '여호와의 사자'는 주님이십니다. 구약에 나타난 주님입니다. 여호와 아버지가 직접 말씀하신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디서 말하냐면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곧, 주님께서 하늘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다." 약간 애매하긴 한데요. 하나님은 시험을 해봐야 아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않는지 시험을 해보지 않아도 아십니다. 그런데 시험을 합니다. 그리고 이삭을 기꺼이 바치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시고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안다"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하늘에서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해 보겠습니다. 욥 사건이 있던 그날처럼 하늘의 하나님의 통치보좌가 있는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거기에 천사들도 있고 그리고 사단도 있습니다. 사단이 아마 똑같이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그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하면 그가 믿음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은 믿었지만 그 자식을 내 놓으라 하면 내놓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항상 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통치에 사람들이 순복하지 않는다. 혹은 사람들은 항상 이해관계로 믿는 것이다. 순전한 마음을 믿는 사람은 없다고 사단은 늘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늘 말합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고 해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순종할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일을 걸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이삭을 묶고 칼로 이삭을 죽이려고 했을때에 주님께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삭대신 양을 한마리 주어서 대신 잡게 하고 이 일을 끝냅니다.하나님은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고 하셨을까요? 약속의 자녀인데요. 왜 죽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볼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은, 하나님이 주신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이삭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자녀이지만 이삭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믿습니다. 이삭을 통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는 것은 이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삭을 주셨으니 이삭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사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삭을 빼앗으면 안그럴걸요?" 하나님은 말합니다. "이삭을 죽이라고 해도 순종할 것이다."

지금 이것을 저희들에게 적용해보면, 질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도 주시고 천국에 있는 소망도 주시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은혜를 베푸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때에 직장이 없어지고 가족들이 헤어지고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닥칠때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주신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때문에 하나님을 변함없이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너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사람들에게 의심을 집어넣지 말고 욥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자랑하실수 있겠습니까? 욥보다 저희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압니다. 욥은 아브라함 이전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진 정보는 아브라함이 가진 정보보다 더 적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후대를 살고 있습니다. 앞에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아벨이 에녹이 노아가 어떻게 했는가를 다 압니다. 그들이 어떻게그럴수 있었는가까지 다 압니다. 우리가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만한 지식이 있는것은 그만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보다 못하거나 욥보다 부족할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욥을 보았느냐?" 하나님께서 저희를 보시며 "이 사람들을 보았느냐?" 라고 자랑하셔야 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러이러한 이름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을 보았느냐? 라고 자랑할수 있게되기를 원합니다. 그와같은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요?

그런데 이것이 욥이라든지, 아브라함이라든지 하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사건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헌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와 하나님 사이만 압니다. 그리고 이 헌신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알려지고 하나님의 칭찬으로 보상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애에 여러가지 사건 속에서 질문합니다. "이런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가 누군지를 알기 때문에 나의 통치를 인정하고 승복하겠느냐?" 라는 질문을 우리 생애에 여러번 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주님께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동의되지 않아도 성경에 하나님의 공정하시고 의로우심을 생각할때 제가 무릎을 꿇겠습니다" 했던 경험들이 있고 이것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께서 드러내실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시련은 가장 믿음이 큰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이 적으면 시련도 적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알고 그럴수록 커갑니다. 믿음이 클수록 시련이 커집니다. 시련이 적으면, 좋은것이 아니고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시련을 주시는 것은 내가 그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큰 시련 앞에서 사단이 속삭이는 소리는 듣지 않고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지요. 교회에서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는 이유는 구도자들을 보라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구도자들이 자꾸 뭐라고 해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쓸데없는데 두는 것이죠. 그들은 너울을 보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이 너울을 실제로 보고 있는 존재는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을 인하여 머리에 권세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둘찌니라" 그래서 교회는 모일때마다 천사들이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여기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천사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표현 했지요. 그래서 천사들이 보고 주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한 곳에서, 시련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복된 기회 입니다. 그때 나 중심적으로 이해관계를 따지지 아니하고 어떻게 할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가, 어떻게 할때 하나님의 의로움이 입증이 되는가, 욥처럼 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주신 분이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데려가실 권리가 있다. 그분이 주실 권한도 있고 가져갈 권한도 있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축복하셨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재앙을 주실 권리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권리,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인정해가는 이런것들이 천사들과 교회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광경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서 이삭을 죽이려고 했을때에 히브리서 11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내가 죽이고 하나님이 살리리라. 그래서 로마서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면, 첫째로 "없는것을 있는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언제 경험 했냐면 이삭을 낳을때에 경험했습니다. 죽은 몸입니다. 그러나 살려서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다음,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 두번째 입니다.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기꺼이 이삭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이고 하나님이 살려서 이삭을 통해서 후손을 남기리라' 이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삭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키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광경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언제 보게되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진정한 아들, 참된 아들, 참된 어린양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그가 보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멀리까지 갑니다. 역사의 후대까지 갑니다. 영원한 나라, 천년왕국까지 갑니다. 또 믿음은 그 시야가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것입니다. 위에것을 생각하고 땅에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이르렀던 절정입니다. 믿음의 영광은, 믿음은 처음에는 작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발휘했던 믿음의 영광스러운 수준은 멀리서 보고 환영하고 그리고 이 땅에서 자기가 나그네인것을 증거하고.. 마침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할수 있는 이 수준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도우셔서 이와같은 수준으로 저희들의 믿음이 계속 성장해 갈수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