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5일 일요일 (수양회 4)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히브리서 11장 04_ 이삭 야곱 >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히11:20-22).
이 부분은 전부 창세기 구약으로 가셔서 구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27:1-4).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창27:23-27).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9).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창27:34).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창27:37).
야곱의 경우는 창세기 47장으로 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창47:29-31).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것이 될 것이요"(창48:5).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창48:13-14).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48:18-19).
요셉의 경우는 창세기 50장으로 가겠습니다.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50:24-25).
어제 아브라함을 다뤘고요. 그다음 이삭 야곱 요셉, 이 세사람의 믿음을 성령께서 히브리서에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어디에 집중을 하냐면 그들이 죽을때에 했던 행동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믿음으로 죽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았는데 죽을때만 믿음으로 죽을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던 이 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특별히 그들이 죽을때에 했던 행동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삭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삭의 경우는 아까 제가 읽어드린대로 이삭이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을때가 된 줄로 생각하고 그가 에서에게 사냥해서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오면 내가 그것을 먹고 내가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삭의 경우는 죽을때 어떤 문제점을 드러내냐면, 첫째로 그가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냥 물리적인 눈이 어두워지는 정도가 아니고 분별력을 상실합니다. 우선 첫째로, 이삭은 그런데 이때 죽지 않습니다. 그 후로도 20년을 더 삽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죽을것으로 착각 합니다. 나중에 보면 이삭이 죽을때에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와서 장사 지냅니다. 에서가 내 복을 가로챘다 하고 죽이려고 하니까,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고 돌아오기까지 20년이 걸립니다. 라헬을 얻는데 7년, 레아를 얻는데 7년, 자기 가정을 일으키는데 6년, 20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20년째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도 아버지가 아직 안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이삭이 죽고 두사람이 장례를 지냅니다. 그러니 20년을 이삭은 더 삽니다. 그런데 죽을것으로 생각 합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사도바울은 자기가 죽을때를 압니다. 디모데후서에서 "이제 내가 떠날 기약이 가까왔다" 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내게 오라" 라고 합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 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예감 합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감옥에 체포되어 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는 분위기가 굉장히 밝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서의 내용이 이거지요. "항상 기뻐하라" 감옥에 갇혀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기가 풀려날것을 확신 합니다.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자기가 사형을 받지 않을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영적인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맏긴 일들이 있습니다. 이 일을 다 이루기 전까지 그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자기가 죽을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네로 황제가 집권해서 집권해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외적인 관계 때문이 아니고 자기 할일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을때를 압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베드로후서에 보면 "이제 내가 떠날때가 되었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다시 기억하도록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후서 입니다. 베드로도 자기가 죽을때를 압니다.
그런데 이삭은 자기가 죽을때를 모릅니다. 자기를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 이루어졌는가, 덜 됬는가를 모릅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죽을때에 영적으로 흐려 집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게 행동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상속자로 삼았냐면, 야곱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을 했는데 역시 자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생깁니다. 그런데 쌍둥이 입니다. 이 아이들이 뱃속에서부터 싸우니까 이삭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아이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뱃속에 두 민족이 있다." 그러면서 "큰자가 작은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쌍둥이기에 몇초 차이지만 에서가 장남이고 야곱이 동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섬길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누구를 축복해야 합니까? 야곱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흐려지니까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축복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축복 합니다. 이것이 육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냥 두고보시지 않지요. 리브가를 사용해서 다시 야곱에게 축복이 가게 합니다. 그 장면입니다.
우선 이삭에 대해서 한가지 말씀드리면, 이삭은 보통 이렇게 평합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의 평범한 아들입니다. 그 다음 또 하나, 야곱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험가 입니다. 그는 위대한 아들의 평범한 아버지 입니다. 그는 끼인 세대 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있고 그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삭은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의 본이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위대하지 않습니다. 야곱처럼 모험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삭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삭의 삶의 특징은 수동적입니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가 수동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수동적인 사람인 사건 세가지가 그의 생애를 보면 나타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때에 모리아 산에서 바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지요.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바치라" 번제로 드리라 했으니, 죽이고 그 다음에 태우는 것입니다. 재만 남도록, 이 제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랬을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갑니다. 여태까지는 종들과 같이 왔는데 산 밑에서 올라갈때는 종들을 놔두고 "내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오겠다" 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갑니다. 이삭이 주님을 나타내지요. 이삭이 나무를 지고 갑니다. 그리고 위험한 도구, 칼과 불은-죽이고 태워야 하니- 아브라함이 가져 갑니다.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하여간 이것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가시는 모습 입니다. 그래가지고 꼭대기에 왔을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습니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고 단을 쌓고 단 위에 놓습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가 나를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것을 알아챕니다. 그런데 이때 나이에 대해서 약간씩 이론이 다릅니다. 이때, 이삭은 하여튼간에 청년입니다. 10대 말에서 20대 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나이가 늙었습니다. 이삭은 반항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를 힘으로 치면 그가 아버지를 이길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조용히 반항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의 수동성의 첫번째 입니다. 죽음이라 할찌라도 그가 조용히 당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그가 가진 특집니다.
두번째 수동성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종을 보냅니다. 밧단아람, 자기 고향으로 보냅니다. 가나안 여자가 아닌 반드시 친척중에 한명을 골라와야 한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살고 떠나올때 아브라함의 믿음과 선택을 보고 영향을 받은 친척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골라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 가서 리브가를 만나고 데리고 옵니다. 그때 리브가를 만나서 이삭이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출발할때 "나도 같이 갑시다. 내가 같이 살 사람인데, 나도 가서 보고 내 의견을 말해야지요" 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아브라함의 종이 골라 옵니다. 리브가가 왔을때 그를 보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니 아니니 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를 아내로 삼고 사랑합니다. 성경에서 결혼할때,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결혼을 중매합니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삭 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선택 합니다. 야곱과 이삭은 굉장히 반대 입니다. 야곱은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자기 이익을 자기가 챙깁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구 가정에 문제가 없냐면 이삭 가정에 더 문제가 없습니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삽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내 문제에 있어서도 수동적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고르지 않고 아버지의 종이 골라오는 사람을 받아들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세번째, 아버지가 죽고 그는 똑같은 시험에 걸리는데요.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왔을때에 기근이 듭니다. 그랬을때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 갑니다. 그리고 내려 가면서 거짓말을 합니다. 사라를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이 아버지가 죽고나서 이삭이 내려왔을때 그 가나안 땅에 또 기근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삭도 내려가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실수를 반복하려고 합니다. 내려가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려가지 않고 그랄이라고 하는 동네에 거합니다. 거기서 이삭도 또 거짓말을 합니다. 리브가를 또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거짓말에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 다음 기근이 해결되고 나았을때, 거기 살던 곳에서 아브라함이 판 우물이 있습니다. 이삭은 그때 처음으로 뭘 시도해 보냐면 사람들은 다 목축업을 합니다. 양하고 소, 염소를 키웁니다. 그래서 풀이 있는 곳으로 주로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삭이 여기서 농사를 시도 합니다. 풀 있는데를 자꾸 찾아가지 않고 풀을 길러봅니다.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100배나 소출을 많게 합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거부가 됩니다. 그가 성공한 것입니다. 그가 목축업만 아니라 농사로도 성공합니다. 농사는 거주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때 아브라함이 판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을 그랄 사람들이 다 메꿔버리고 "당신은 너무 거부가 되었으니 우리를 떠나가라" 합니다. 그럴때에 이삭이 수동적으로 반응 합니다. 떠나갑니다. 그리고 조금 넓은 곳으로 가서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거기까지 와서 "여기도 우리 것이다" 합니다. 이삭은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가 거부고 종들도 많고 한번 반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또 물러 갑니다. 이제 세번째 입니다. 이제 더이상 그들이 쫓아오지 않는 그런 지역에서 우물을 팝니다. 그곳을 르호봇이라고 하는 곳이죠. 거기서 세번째로 우물을 팝니다. 팠을때에 물이 나오고 그리고 그날밤 그는 여기가 아니고 브엘세바로 올라가 버립니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안 것이죠. 하나님께서 계속 자기를 물러나게 하셨는데 이것이 그랄 사람들이 자기에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움직이셨다는 것을 영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여기 거하지 말고 브엘세바에서 거하라는 뜻이라고 분별하고 브엘세바로 갑니다. 브엘세바가 어디냐 하면,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산 곳이 브엘세바 입니다. 이삭이 그곳에 정착 합니다.
이 세가지 사건에서 알수 있는 것이 이삭은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모리아 산에서 기꺼이 죽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행하시는대로 그것을 아들로서 받아들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결혼에 있어서도 그는 수동적입니다. 그는 외부사람들과의 갈등에 있어서도 수동적입니다. 이와같은 수동적인 것은 좋은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를 일으키냐면, 그 가정에서 이삭과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을 낳고 기르고 하는 가정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삭이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이 두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아들이 다릅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어머니가 야곱을 좋아하는 이유는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고 늘 집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니까, 에서가 밖에 나가서 사냥하고 남성적이고 리더쉽이 있고 그래서 좋아한 것입니다. 이 두사람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좋아하는 아들이 다르고 서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달랐을때 이 가정은 문제 가운데 들어갑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부부가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 좋은 당신은 왜 저것이 좋으냐? 어떤것이 옳으냐?" 혹은 "우리 두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하고 이해를 조정해 가야 합니다. 남자가 인도력을 가지고 이 부분을 해결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하고 각각 나눠집니다. 그래서 가정이 나누어 집니다. 이것이 수동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입니다.
요즘에 그런것이 문제가 되지요. 예전엔 거실에 테레비가 있어서 다 모였는데 이제는 각각 핸드폰을 다 들고 각 방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부부간에도 생각이 다르고 그렇습니다. 이것이 현대판 가정들입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 가정이 제대로 서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냐면 이삭의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실때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습니다. 남자가 있고 아내가 돕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되어서 한몸이 되고 자녀를 길러내고 가정이 필요한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안하니까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이 되냐면 이삭의 문제점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지면 육신적인 분별력을 가직 행동 합니다. 그가 축복할때에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주는 것이죠. 그런데 별미를 먹고 마음껏 축복 하겠다 합니다. 별미 먹는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맛있는것 먹고 기분이 좋아서 영적인 축복을 하는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에서인척 하고 오는데도 분별력이 없습니다. "목소리는 야곱 같은데 겉에 손을 만져보니 에서 같구나" 하면서 전부 분별력이 육신적인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가 야곱인지 에서인지를 그를 만져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에서는 어떤 스타일이고 야곱은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것을 부모로서 감각을 아버지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수동적입니다. 이것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을 일으키지 않고 편안하게 잘 흘러가도록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동성이 지나치면 문제를 가져오고 그것이 영적인 분별력을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축복할때 에서를 축복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이 이삭의 축복을 믿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는것이 뭐냐는 것이죠. 히브리서는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야곱과 에서에게 믿음으로 축복했다" 합니다. 이삭은 분별을 잘못해서 에서인줄 알고 축복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축복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이삭은 자기가 축복한게 에서인줄 알고 실컷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에서가 사냥한 것을 잡아가지고 와서 "아버지 축복해 주세요" 하면서 에서가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야곱이 리브가와 함께 자기를 속였구나 한 것을 압니다. 그러니 이 가정이 완전히 무너진 가정이지요. 어머니와 아들하고 짜고 속여버렸으니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래서 믿음은 언제 사용될수 있느냐면 우리가 영적으로 실패 했을때 믿음을 발휘할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베드로 입니다. 그는 주님을 세번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큰 죄악입니다. 그가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천사 앞에서 그를 부인 하리라" 그래서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심각한 문제 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심각한 실패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나중에 보면 요한복음 21장에 주님께서 세번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세번 부인했는데 세번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네 양을 치라" 베드로를 공식적으로 초대교회의 인도자로 변함없이 일을 맏기십니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수동적인 사람들이 영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랬을때 이삭이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압니다. 그때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떱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가 영적으로 떱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합니다. 에서가 와서 웁니다.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속아서 한 축복이니 나에게 똑같이 축복해주십시요." 라고 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에 나온 것입니다.
제가 어떤 모임에 가니 어떤 형제님이 질문을 하더라고요. 질문 내용이, 에서는 장자의 내용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팥죽 한그릇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때는 통곡을 하면서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이제와서는 울고 난리를 피우나요?" 좀 에서의 태도가 모순된다고 느끼시더라고요. 그런면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때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세상 안 믿는 사람들이 천국에 관심없고 이땅에서 어떻게 살것인지 관심이 있다. 하거나 죄 용서에 관심이 없을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죽을때가 되면 관심을 가질수밖에 없습니다. 노아 홍수때도 그렇지요. 노아가 그토록 방주를 지으면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말할때는 아무 관심도 없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비가오기 시작하니 그때는 관심을 갖는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문을 하나님이 닫아서 열어줄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말했던 영적인 것들이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날, 그들이 갑자기 글 앞에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에서가 축복을 마음대로 생각 했다가 정말로 아버지가 죽고 그 축복의 내용을 들으니 울면서 통곡 하는 것입니다.
이삭 입장에서는 첫번째, 자기가 별미를 가져오면 축복해 주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대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통곡하여 울면서 사정 합니다. 아버지로서 인간적으로 미안합니다. 축복 해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영적으로 흐려져서 육신적인 행동을 했을찌라도 다시 눈이 밝아져서 영적인 선택을 해가는것, 이것이 이삭이 죽을때의 믿음 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보면, 가룟유다는 다릅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를 비교해보면 가룟유다는 주님을 팔았지요. 그도 주님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기회를 줍니다. 언제 주냐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잡수시고 만찬을 제정하시던 그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마음이 고통스러우셔서 "너희 가운데 한명이 나를 팔 것이다." 주님은 끝까지 갸룟유다 네가 나를 판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가룟유다가 팔러 나갔어도 가룟유다가 왜 나갔는지 모릅니다. 배반하러 나갔거든요. 대제사장을 만나서 빌라도 군인들을 데리고 오려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나갔어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명절이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것을 해주려고 나갔나보다" 하면서 전혀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룟유다를 끝까지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중에 한명이 나를 판다." 이렇게 말씀하실때에 열두명의 제자들이 이렇게 반응을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베드로가 "딴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절대 아닙니다." 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혹시 저인가요?" 제자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압니다. 자기들이 주님을 붇들고 삼년을 따라다녔어도.. 모든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내가 주님을 배반할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혹시 저인가요?" 자기는 배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연약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묻고 대답하고 있는데, 가룟유다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저지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는 이미 주님을 배반하기로 약속해 놓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열한명의 제자들이 주님께 하는 질문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 그가 그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저지요?" 성경을 보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11명의 제자들이 주님께 물어볼때에 '주여'라는 말을 꼭 합니다. 가룟유다가 주님께 질문 합니다. "랍비여 내니이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자기 주인으로 모신적이 없습니다.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은 항상 선생님이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놀랍게 설명해 주시는 분으로만 받아 들입니다. 그 가르침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 순간 물어 봅니다. :랍비여 내니이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 말을 들었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들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말을 주님께서 가룟유다만 알아 듣게 말하십니다. 딴 사람은 모릅니다. 이때 가룟유다가 돌이켜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실패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랬던 사람의 예가 이삭입니다. 그가 실패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게 육신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때 그는 이렇게 할수 있습니다. 끝까지 자기 육대로 할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에서 너를 축복해 주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네게 줄것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야곱에게 모든 형제들의 주인이 되도록 축복했다. 너는 이제 그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가 평생을 사랑하고 아껴왔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서 사냥해 오라고 명령했던 아들입니다. 그리고 슬피울고 있는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가 더이상 육신적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으로 죽을때에 믿음으로 축복 했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보겠습니다. 야곱은 죽을때에 이렇게 합니다. 야곱은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는데요. 야곱에게 있어서 그는 아들이 열두명이지만 자기 마음에 사랑하는 아들은 요셉입니다. 야곱은 아내가 네명이지만 그 중에 자기가 사랑했던 아내는 라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라헬을 제일먼저 데려가십니다. 레아가 자식을 여섯명을 낳고 라헬에게서 두명의 자식을 봅니다. 그리고 나버지 하녀들에게서 두명씩 낳는데요. 라헬이 낳은 두명의 아들이 요셉과 베냐민 입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입장에서 가장 사랑한 아내가 라헬이고 또 첫번째 아들이 요셉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사랑하고 그에게 채색옷을 입혀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일찍 죽이십니다.(야곱의 입장에서 그는 요셉이 죽었다고 속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입장에서 자녀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요셉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꿈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애굽에 내려와 있습니다. 그가 죽을때에 요셉을 부릅니다. 그리고 한가지 약속을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나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땅에 묻어다오" 이것이 야곱이 했던 마지막 유언 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까지 야곱은 자기의 현실적인 이익을 취해왔던 사람입니다. 형이 배고파 죽겠는데 팥죽을 줘야지요. 그때 팔아먹은 것입니다.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넘기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축복도 어떻게든지, 좋은 것이기에 받고 싶어서 속이고 그랬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죽을때에 이렇게 변화되어 있습니다. 자기 시신이 애굽에 묻히나 가나안에 묻히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자기는 죽었는데요. 자신 시신이 어디에 묻혀 있는가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영적인 것으로 관점을 바꿉니다. "내 시신을 가나안땅에 묻어다오." 내가 애굽에서 쭉 잘 살아왔을찌라도 나는 가나안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마지막에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변화 입니다. 그는 내손에 쥐고 있는것을 현실적인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약속, 명분쪽으로 그가 마음을 바꿔낸 것입니다.
그다음 야곱이 한 것을 보면요, 요셉이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가서 총리가 되어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낳은 아들이 두명 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입니다. 므낫세가 장남 입니다. 여기서 여러가지 고통을 잊게 만들었다 라고 하고 므낫세라고 하고 에브라임은 번성케 하셨다 하고 지은 것입니다. 지금현재 그들의 신분이 어떻냐면 애굽 총리의 아들입니다. 요셉이 애굽 총리이니, 애굽 총리의 두 귀족 아들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므낫세를 야곱이 "이들은 내 아들이다."라고 하고 입양을 합니다. 요셉의 아들이지만 야곱이 입양을 합니다. 그래서 열두지파 가운데 요셉 지파가 없습니다. 요셉지파가 없고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가 있습니다. 이들이 원래는 한칸 밑인데, 야곱의 손자들인데 야곱의 아들로 입양이 됩니다. 그래서 열두지파가 됩니다. 요셉 지파 대신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해보면 뭐냐 높냐 할때, 이들을 입양을 안시키면 이들은 애굽 총리의 두 아들입니다. 그런데 총리의 두 아들을 야곱은 자신의 두 아들로 바꿔냅니다. 누가 더 높습니까? 애굽의 총리의 아들이 높습니까? 아니면 잠시 살러 온 70명의 가족, 그 가족장의 아들이 높습니까? 현실적인 것을 생각하면 이 아이들을 총리의 아들로 놔둬야 합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계속해서 여러가지 특권을 누리도록 놔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는 야곱 입니다. 여기서 그가 얼마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것들을 귀중히 여기고 있는가를 볼수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변화 됬는가요? 그의 처음의 믿음 생활은 벧엘로부터 시작 합니다. 그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믿음의 절정 그가 죽을때에 어떤 시각으로부터 시각으로 선택하고 있는가 하는것을 성경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해 달라고 데려오니, 요셉은 아버지의 오른손에 장남을 축복받고 아버지 왼손에 차남을 축복받도록 데려 옵니다. 그런데 야곱이 손을 어긋맞게 합니다. 야곱의 오른손이 둘째에게 가고 야곱의 왼손이 첫째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어서 요셉이 아버지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합니다. 그때 야곱이 "나도 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둘째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므낫세 에브라임 중에서 에브라임 지파가 훗날 가장 큰 지파가 됩니다. 남쪽에서는 유다 지파가 가장 크고요, 북쪽에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가장 커집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혈통적인것, 장남이지요. 혈통이 축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태어났느냐, 자연에 속한것, 육신에 속한 것이 축복의 근원이 아니다. 축복의 근원은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을 어긋맞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죽으면서 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이제까지의 삶을 통해서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혈통적인, 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것들이 우월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면 죽음이 두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고, 요셉도 죽을때에 했던 행동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죽을때에 했던 행동들을 말씀 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고나서 무슨일이 생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 죽는데 죽고나서 어떻게 될까 알수 없습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정말로 천국 지옥이 있는지, 내가 정말로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질수 있습니다. "믿는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러니까 믿음이 무엇인가, 나는 믿었는가만 점검하면 됩니다. 원원래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자는 이 죽음을 담대하게 맞이할수 있습니다. 물론 죽는순간 자기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으로 넘어갈때, 그때 믿음이 필요 합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다시 두려움이 생길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번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다시 그가 믿음으로 말씀을 의지하여 이 길을 걸어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시는도다" 그가 이제까지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음도 믿음으로 통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하나님이 귀중히 보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수 있는것은 나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 문제는 내가 남겨두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나 없이 내 가족은 어떻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두고 떠나야 하면 마음이 어렵습니다. "나 죽는것은 괜찮은데.." 이 부분은 나중에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 입니다. 질문에 나왔던 부분인데요. 조지뮐러 형제님에 관한 것이죠.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원칙적으로는 부모를 통해 자녀를 키우십니다. 그런데 이 부모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간의 죄악된 세상에서 여러가지 나쁜일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부모가 없게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십니다. 그럼 질문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돌보는 것과, 하나님이 직접 돌보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낫겠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잘 하십니다. 내가 걱정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할것이 없습니다. 이 부분도 믿음으로 와야 합니다. 나의 죽음을 믿음으로 걷듯이 내가 남겨두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주님께 의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죽을때에 이런 걱정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죽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 지속될까? 내가 해왔던 이 하나님의 일이 멈춰지거나 약화되지 않고 변함없이 일이 지속될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네가 일어나 나와함께 가나안으로 건너가자"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아직 어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것이 여호수아에게 준 약속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릴찌라도 그들과 함께 한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모세가 이루어내지 못한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을 모세의 후계자인, 더 연약한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아니하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분이 주님일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그럴때에 죽을때의 우리의 믿음 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운명, 나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까? 하는것은 말씀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남겨두고 가야하는 내가 돌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셨던 하나님의 일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요? 그 다음 사람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믿음으로 그 길을 통과하고 내 눈으로 볼때 안타까운 가족들을 믿음으로 주님앞에 맡기고 주님이 부르셔서 이행해 왔던 주님의 일들을 다시 주님의 손에 맡기는 이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죽을때의 믿음을 이삭이 발휘했고, 참으로 감사한 것은 실패 했을때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이 빛납니다. 예를들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 합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실패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나단이 찾아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렇게 했을때에 다윗의 믿음이 빛납니다. "내가 주께 범죄했나이다." 그리고 시편 51편을 씁니다. 그들은 변명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시인하고 담배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그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시인하기 시작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승리 입니다. 이것이 어둠 속에서 밝히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믿음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껏 현실적인 이익만을 추구했던 사람이 믿음으로 돌아섭니다. "내 시신을 가나안에 묻어다오" 그리고 요셉이 그토록 사랑한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합니다. 그들의 육신적인 순서와 달리 축복함으로써 야곱의 마지막을 장식 합니다. 이때 야곱이 발휘했던 믿음들, 이 믿음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한 주님, 알게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섭리를 죽을때에 죽는 자리에서 저희들이 발휘하면서, 죽음이라고 하는 연약함, 고통스러움 속에서 우리들의 믿음이 밝게 빛나고 드러내면서 주님앞에 갈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를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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