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9일 금요일 / 한봉래 형제님
< 10. 성령님이 장로를 세우심 >
오늘 이 시간에 장로가 모임 가운데 어떻게 세워지는가 주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여기 보시면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았다" 라고 말씀되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너희"가 누구인가 하는것은 17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 장로들 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대화하는 도중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표현을 했냐면 28절에서 "성령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너희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감독자로 삼으셨다. "성령께서 너희를 에베소 교회의 장로로 삼으셨다" 라고 이해할수 있겠지요. 한 구절 더 보시겠습니다. "저들 가운데" 저들은 성도들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있고 그 성도들 가운데서 너희들을 장로로 세우셨다. 이 구절을 근거로 저희들이 믿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장로를 세운다. 이것이 뭐하고 대조되는 표현이냐면 사람이 세우지 않는다 입니다. 사람이 세우는 것과 하나님이 세우시는 장로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장로를 세우십니다. 그럼 어떻게 세우시느냐 하는거죠, 하여간 저희들의 첫번째 개념은 '사람이 세우지 않는다' 입니다.
제가 잠깐 부끄러운 간증을 하면 제가 처음에 모임에 들어갔을때, 1995년도 쯤에 제가 서울에 있는 강서모임에 더해졌습니다. 그때 강서모임으로 모여진지 2년째 되던해에 제가 주님의 은혜로 모임에 더해지게 됬습니다. 그때 저희들이, 형제들이, 결혼한 형제들이 한 열가정 됬습니다. 그때, 그 모임을 최초로 세우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분이 홍동식 형제님이셨어요. 그런데 형제님이 참 겸손하셨습니다. 본인을 통해서 모임이 세워졌을찌라도 형제님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주장하시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겸손하시고, 그래서 구도자들이 온다든지, 혹은 외부에서 어떤 형제님들이 온다던지 하면 교회를 대표해서 누가 나가서 마중도 하고 인사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홍 형제님은 그와같은 일을 자신이 하면 마치 자기가 대표자인것처럼, 자꾸 성도님들에게도 오해를 주고 그분에게도 오해를 줄까봐 안하셨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안하고 아무나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가서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참 견손했고 그래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참 형제님이 겸손하시다. 하나님이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주님만이 나타나기를 원하시는구나' 그래서 일년후에 형제들이 모여서 그때, 그런 관습이 있었어요. 1년 계획을 하는데, 연말에 열가정 되는 형제님들이 모여서 내년도에 무슨 집회를 하고 무엇을 하고 그런것을 의논하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형제님들이 모여서 "홍동식 형제님을 장로로 세웁시다." 그렇게 결의를 했습니다. 형제님들이 다 모여서 "당연하고 좋습니다." 라고 형제님을 장로로 세우기로 했고, 그 일이 있은후에 홍동식 형제님이 수요일날 장로로 일하도록 해주신 것에 대해서 받아 들이고.. 그때, 자기가 약간 염려가 되는게, 그때 홍동식 형제님이 결혼해서 애가 둘이 있었나 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딛1:5-6).
6절에 장로들의 자격이 나옵니다.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니라" 형제님이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장로직을 수락하지만 아직 자녀들이 초등학교도 안 다니고 있을때거든요. 아직 어리지요. 보통 그때 한국모임에서는 그 정도 나이때에 구원받았다고 해서 믿고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형제님 마음에 개인적으로 걸리는 것은 믿는 자녀를 둔 자가 장로의 조건인데 하여간 자기가 이 면에서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한채, 장로의 일을 하게 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은혜로 그와같은 일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는 저희들이 몰라서 그렇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성경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로는 성도들이 뽑지 않습니다. 장로는 하나님이 뽑으셔야 합니다. 성도들이 장로를 선출하면 어떤일이 벌어지느냐?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민주주의 입니다. 우리나라는 국민들이 투표해서 대통령을 선출합니다. 국회의원도 선출합니다. 그래서 헌법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았으니까, 국민들이 대통령을 폐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요즘에 국회의원 열받아서 '국민 소환제', 국민 소환제, 임기가 5년이라 해도 도저히 마음에 안든다 하면, 그러면 도중이라도 소환이라도 다시한번 그를 파면시킬수 있는 제도를 만들자. 이것이 국민소환제라고 하는 제도 입니다. 오죽하면, 그런 제도를 만들면 안되지만 5년간 위임을 해줬는데, 잘못 뽑은거죠. 그래서 후회하는거죠. 그래서 5년간은 그냥 둬야 하는데 도저히 못견디겠다 하는거죠. 다시 말하면 성도들이 장로를 뽑으면 성도들이 장로를 폐할수 있습니다. 권력이 성도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장로는 사람이 뽑으면 안됩니다. 사람이 그를 세워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누가 더 높으냐면 세운 사람들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뽑으면 성도들이 장로보다 위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장로는 하나님이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로는 하나님께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부분이 저희들이 제일먼저 배워야되는 원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강서모임에 그 후로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생깁니다. 말씀대로 안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좋아보이거든요. 어떤 형제님들은 홍동식 형제님을 존경하고 그 형제님의 행실과 성품을 보고 장로로서 하나님이 상용하신다고 믿고 그렇게 한 것이죠.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나중에..그것은 나중에 개인적으로 교제 하겠습니다.
다시 사도행전으로 가겠습니다. 대전중구 모임에서도 장로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장로를 누가 뽑느냐? 하나님이 세워야 합니다. 사람이 세우면 안됩니다. 그것이 첫번째 원칙이고요. 그럼 두번째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세운다 말이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누가 장로가 되기를 원한다." 라고 말씀하시면 좋은데,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 신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 하나님은 더 이상 계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계시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사라집니다. 성경이 완성되지 전에는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했죠. 구약의 선지자 같은 경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렇게 말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사용하셔서 솔로몬 성전 앞에 세워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여기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마라" 이렇게 막 말씀하시죠. 그러나 이것은 구약 시대로 끝납니다. 히브리서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여러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 하셨죠. 꿈으로도 하시고 환상으로도 하시고 여러모양과 여러부분으로 하시다가 마지막 날 아들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하신 것이 최종적인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하고 선지자들은 이와같은 경우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신거죠. 그런데 그렇게해서 성경이 기록되고 나면 더이상 계시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보겠습니다. 그럼 우리 가운데 약속대로 하나님이 장로를 세우셔야 합니다. 복수 장로들을, 그럼 어떻게 서울 것인가? 성경을 통해 찾아가 보겠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딤전3:1).
"미쁘다 이 말이여" 성경에서 '미쁘다 이말이여' 라는 말이 다섯번 나오죠. 이 말은 언제든지 믿을수 있는 신뢰해도 좋은, 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렇지않은것이 있겠습니다만, 특별히 강조한 말씀입니다. 이 말은 믿어도 좋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 그 다음에 번역상의 문제인데요. '감독의 직분'이라고 했는데요. 제가 서양 형제님들 통역을 한 십년전에 하기 위해서 전국 모임 여기저기를 다닐때에, 이 직분, 감독이나 장로라고 하는것이 어느 직분이다. 라고 이해하고 그 근거 구절로 디모데전서 3장 1절을 들어서 어떤 한국 형제님들이 장로라고 하는것이 "어떤 직분이지 않느냐?"라고 했을때에 짐 베이커 형제님이 "감독은 직분이 아니다. 감독은 어떤 자리가 아니다. 어떤 신분도 아니고 결정권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직분이라고 우리나라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는데요. 이것이 원어와 영어를 보면 '감독의 일' 로 되어 있습니다. 감독하는 일입니다. 그냥 장로의 일 입니다. 장로라고 하는 신분, 지위가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번역을 오해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보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장로를 세우느냐? 첫번째,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장로로 세우고자 합니다. 그는 선한일을 사모 합니다. 우리 가운데 선한일을 사모하는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 선한일이 뭐죠? 어디 나오죠?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시죠?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부자 청년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보고 선하다 하든지, 만약에 예수님을 사람으로 본다면, 선생으로 본다면 그는 선하다는 말을 빼야 합니다. 둘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선하다라고 한다면 너는 나를 하나님이라 불러야 한다. 그리고 나를 선생으로 보면 '선하다'는 말을 빼라." 그렇게 하신거죠. 로마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거죠. "내 속에 선한것이 없다" 사람 속에는 선한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본적인 교리 입니다. 이런것 위에서 움직여야 하죠. 그럼 여기서 말하는 선한일이 뭐냐? 선한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를들면 저희들이 늘 복음 전할때에, 가난한 사람을 돕는것은 선한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사람 보기에요, 그것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너 천국에 가라 하지 않는 일입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아파서 있는데 병원에 데려가주고.. 이런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한일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한일은 딱 하나 입니다.교회에서 영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일입니다. 모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머리되신 지역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이 기뻐 원하시는 일을 순종하여 이루어가는 일이 선한 일입니다. 어떤형제가 구원받고 모임에 더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 모임 안에서 모임을 영적으로 섬겨야 되겠다." 인간적으로 말고 세상적으로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말씀을 근거해서 모임을 섬기고 싶다는 것을 사모 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세우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적 없습니다. 아무도 이것이 선한 것이라고 가르쳐준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선한일을 사모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이 모임에서 섬기고 싶다. 그래서 그가, 예를들면 이렇게 합니다. "나는 예배 드릴때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준비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께서 나에게 감동을 주신대로, 주님에 대해서 내가 깨닳은대로, 물론 아직 구원받은지 얼마 안됬으니까, 좀 연약할찌라도 그렇게 예배를 준비 합니다. 두번째, 그는 어떤 구도자가 오면 저분이 구원받기를 원해서 기도해 드립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 안했어도 그는 혼자 조용히, 자기가 기도한다는 소리도 안하고 혼자 조용히 집에가서 홀로 있는 시간에 오늘 우리 모임에 누가 찾아왔는데 그분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임의 또 예를 들면 어떤 모임의 성도님들 가운데 어떤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겸손하게 드러내지 아니하고 기도 합니다. 이런일을 하는 형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로 세우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제가 선한일을 사모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틀림없이 모임 생활을 충성스럽게 할 것입니다. 신실하게 할 것입니다. 예배때 빠지지 아니하고, 간혹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빠질수 있겠습니다만, 기도집회, 말씀집회, 모임의 여러가지 일들, 모임에서 어디에 심방을 간다든지 하는 이런 일들 가운데 성실하게 참여해서 그렇지만 자기가 어리고 연약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기도하고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다음 두번째로 가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1:6).
그는 틀림없이 이런과정을 겪습니다. 선한일을 사모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은사를 사용해서 교회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어떤 은사든지간에, 그것이 말씀을 전하는 은사든지 혹은 말씀은 아니고 봉사를 하는 은사든지 여러가지 그가 가진 은사를 사용해서 모임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 일로 인해서 칭찬을 받거나 그 일을 인정을 받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이 자기속에 그와같은 소원을 주시고 그와같은 은사는, 기본적으로 능력입니다. 은사는 기본적으로 하고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남이 시키면 몇번 하다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은 반드시 능력을 동반 합니다. 하고싶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으니 잘 합니다. 평안을 주게 일합니다. 세번째, 결과 입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고 하나님이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가 은사를 사용해서 섬기면 열매가 드러 납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하던일이 이루어지고 덕이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번째 단계 입니다. 이것이 장로가 세워지는 두번째 단계 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살전5:12).
여기보면 문맥은 장로일을 하는 사람을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한다" 라고 하는것이 사실은 장로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용어 설명을 다시 하겠습니다. '다스리다'고 하는 번역은 틀린 번역은 아닌데요. 다스리다는 내용이 주로 원어상으로는 교파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위에서 다스린다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데요, 이것이 사실은 '앞에서서 인도하다'는 뜻입니다. '앞서서 가다.' 다 이렇게 서 있는데 앞에 가야해요. 그런데 제일먼저, 어디를 가야 할지, 이 길이 위험한 길인이 어떤지 모르고 있을때 맨 앞에 서서 길을 개척해 내는 그래서 그것을 보고 다음 사람들이 안전하고 안심하며 따라갈수 있게 가는것, 이것을 다스린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여간 이런사람들을 12절에 보면 '알고' 했는데요. 약간 번역을 다시한번 '알아주고' 입니다. 그에게 성령께서 선한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은사를 따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교회에 평안과 유익을 끼칩니다. 그러면 세번째 결과가 나타납니다. 압니다. 성도들이 알아봅니다. "아 저 형제님이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합당하게 인도하심을 받아 사시는구나." 라고 사람들이 알아보게 됩니다. 이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장로는 성령께서 세우십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모임 가운데 일어납니다. 선한 일을 사모하고 그리고 은사대로 섬기고 그랬더니 그 일이 모든사람의 눈에, 모든 성도들의 눈에, 누가 특별히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한, 특별히 그와 반대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는한, 객관적으로 보면 누구나 다 평안과 유익을 끼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두번째 입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1:7-9).
여기서는 7절에서는 이 대목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감독은 청지기로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장로 감독이라는 단어를 보겠습니다. 동의어 입니다. 똑같은 단어인데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씁니다. 첫번째 저희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장로라는 단어 입니다. 두번째가 감독이라는 단어가 "감독"이라는 단어 입니다. 세번째가 목자라는 단어입니다. 목자는 잠깐만 보고 올까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벧전5:1).
사도가 장로일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시대가 저물어 가고 사도는 이제 슬슬 사라져 갑니다. 그래서 이제 장로들이 세워져 갑니다. 전환기죠. 이 베드로는 사도이면서 장로일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지나가고 장로가 되는거죠 그런데 이 장로들에게 뭐라고 말하느냐면,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양을 치다 이것이 목자 입니다. 4절을 보면 "목자장이 나타나실때에"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4).
주님이 목자장입니다. 그리고 각 지역모임의 장로들이 목자 입니다. 작은 목자 입니다. 목자장 밑에 있는 목자 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인도하는 분들을 어떤 용어로 부르느냐? 첫번째, 가장 익숙한 표현, 장로, 두번째 익숙한 표현 감독, 세번째 목자, 네번째 다시 디도서로 가겠습니다. 디도서 1장 7절 "청지기" 입니다. 네가지 입니다. 동일한 분들을 네가지 용어로 부릅니다. 그 단어를 쓰는것은 약간의 강조점들이 다른거죠. 우선 장로 했을때, 그분은 교회의 인도자를 장로라고 불렀을때 어떤것을 강조한 측면이 있느냐면, 성숙한 분이다. 영어로는 엘더 이니까, 늙었다는 것이니까, 믿음의 많은 경험을 해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러가지 경우에 처했을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이랬을때 어떤 결과가 나오고 이랬을때 어떤 결과가 나오고 하는 경험들을 갖고있는 분들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그 결과를 경험했던 영적인 성숙입니다. 이것은 장로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번째 감독은 뭐냐? 그분이 하는일을 가리킵니다. 장로는 영혼들을 살핍니다. 누가 병들었는지, 지금 누가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살펴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양은 돌봐줘야 한다. 어떤 양은 책망해야 한다. 어떤양은 찾아가서 위로해줘야 한다라고 장로들이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목자라고 했을때는 주로 양을 치는건데 이것은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해야하는 많은 일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말씀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양들은 먹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어떤 음식이든지 먹어야 되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수 있도록 말씀을 공급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장로의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로님들 가운데 말씀의 은사가 있는분은 자기가 공급하면 됩니다. 그런데 다 은사가 있을수 없으니까, 그리고 모든 측면을 다할수 없는 것이니까, 두번째 말씀을 공급하는 사람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초청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하는 일, 이것이 장로가 하는 목자의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네번째 입니다. 청지기. 청지기라고 하는것은 주인이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재산을 어디 먼길을 가면서 맡기는 것입니다. 관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교회 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도들입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양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드리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하냐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피흘리고 사신 교회 입니다. 이 교회를 하늘에 계신 아드님께서 장로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너희들이 관리하라. 그리고 장로들과 나중에 계산할 것입니다. 똑바로 관리 했는지, 잘못했는지, 그래서 엄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어째거나 이렇게 맡긴 사람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청지기 입니다. 그래서 다시 보겠습니다. 어떤 한 영혼이 선한일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그는 모임을 은사를 따라 충성스레 섬깁니다. 영적으로 섬깁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고 하나님이 마음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모임 가운데 유익을 끼칩니다. 여기까지가 진행되고나면, 하나님의 청지기는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그 모임의 장로들은 이같은 책임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장로로 세운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기존 장로의 의무 입니다. 한국에서 보면, 함부로 판단할수 없는데요. 어떤 형제님이 모임을 세우시고 선교를 나가십니다. 그리고 장로를 세웁니다. 이때 후계자를 세우면 안됩니다. 인간적으로 잘못하면 어떻게 세우냐 그러면, 내 말을 잘 들을 사람, 나를 잘 따라온 사람을 세웁니다. 이것은 실패한 케이스 입니다. 그렇게해서는 안됩니다. 장로는 누가 세우느냐? 성령님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 장로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그가 세워야 합니다. 그에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가 세우면 안됩니다. 사람이 세우면 안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어떤사람을 세우고 있다를 분별하고 그를 세워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사람이 교회에서 장로일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현실적으로 그 가족들이 다 구원받았고 그가 돈도 많고, 그래서 그 모임에 영향력이 제일있고, 그런사람을 장로로 세우면 안됩니다. 혼자 나오고, 가난하고, 그래도 성령이 세우시면 그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실패하면 그 교회의 장로가 제대로 서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이 장로일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세운 사람들이 장로일을 합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무너집니다. 인간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의 성패는 누가 장로냐에 달려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누가 장로일을 하느냐에 따라 그 교회의 성패가 갈립니다. 예를들어보면 한 국가에서 누가 대통령이냐에 따라서 국가가 달라집니다. 흔히 이렇게 말하지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장충 체육관을 그 당시 한국 기술로는 건축할수 없어서 필리핀이 와서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필리핀이 한국보다 선진국이었습니다. 6.25때 참전국가 입니다. 그런데 지금 필리핀은, 필리핀 여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부 파출일을 합니다. 그럼 지금 왜 이렇게 잘 살던 국가가 망해 버렸는가? 지도자들입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독재를 하고 나중에 망명갈때 보니까, 신발이 백 몇컬레고.. 지도가자 누구냐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회사도 그렇습니다. 어떤 회사가 돈을 잘 벌고 좋은 회사로 성장해 가느냐 마느냐는 사장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요즘에 그런것들도 많던데요. 야구팀, 축구팀,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래서 성적이 안나오면 감독을 갈아버립니다. 실제로 뛰는것은 선수들이죠. 선수들이 경기를 잘못해서 경기를 지고 그랬는데, 그 책임을 감독에게 묻습니다. 우리도 국가대표 월드컵에서 지면 당장 감독으 바꿔버립니다. 감독에 누구냐에 따라서 성패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그런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교회도 누가 장로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교회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장로로 넣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았으면 절대로 장로일을 시킬수 없다. 이것이 철칙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교회의 성패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냥 적당하게 인간관계도 좋고 은사도 있고 대인관계도 좋아서 이런 사람을 세우면 안됩니다. 성령께서 선한일을 사모하게 하고 그가 은사를 사용하여 모임을 영적으로 세우고, 반드시 이런 것들이 있을때에 디도서 1장 7절에 있는 청지기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들이 장로들이 장로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장로는 성도들이 뽑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뽑으면 안됩니다. 성도들이 인기투표처럼 누가 좋다. 어떤분이 장로같아. 그렇게 뽑으면 안됩니다. 장로는 누가 선택하느냐?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하는것을 누가 알아보느냐? 그 지역모임의 장로들이 알아봅니다. 그래서 장로는 장로들이 초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장로로 세우는 사람이 나타났다라고 했을때, 그런 사람이 있을때, 그는 이미 장로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요. 일을 하고있는 사람을 세우지, 세워서 일 시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누구를 세워가지고 그때부터 일하시오.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을 장로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한일을 사모하고 은사를 따라 섬기고 그래서 모임에 영적인 유익을 끼치고 있으면 그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를 세우는 건데, 그는 이미 장로 입니다. 누가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이미 장로 입니다. 이미 성령이 세우신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그것을 알아보고 세워주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청지기가 아직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교회를 맏긴 사람입니다. 이것이 기존 장로 입니다. 그래서 기존 장로들이 새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장로를 알아보고 그를 초청 합니다. 어떻게 초청하느냐 하면, 저희들이 마포모임에서 강성찬 형제님, 김회상 형제님, 두분을 세웠는데 이 코스를 따라 세운 것입니다. 기존 장로들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세워가신다고 하는것을 인식하고 그분에게 제안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성령님께서 형제님을 모임일에 수고하시도록 부른 것으로 분별이 됬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장로일을 함께 하시겠습니까?" 라고 제안 합니다. 그러면 에베소서 5장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그러면 그 형제님이 기도합니다. 자기는 그와같은 의도를 가지고 일한것이 아니고 자기는 단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도로서 마땅히 일했을뿐이지, 장로가 되겠다든지, 장로일을 하겠다든지, 이와같은 야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안을 해 온것입니다. 장로일을 함께 하겠는가? 그는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사람은 쓰면 안됩니다. "드디어 저를 알아 주셨군요. 이제 제 차례 입니다." 그렇게하면 안씁니다. "저는 그냥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데 인도자들이 그렇게 보신다면 그것이 주님 뜻인지 제가 개인적으로 기도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서 다시 이 제안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람이 준 것인지, 그가 개인적으로 분별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이라고 그가 확신하면 그때 그가 수락합니다. 장로들이 장로직을 제안하고 제안을 받은 사람이 장로직을 수락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어떤 형식으로 벌어지냐면요, 대통령 후보자를 만들때 그렇게 합니다. 후보자를 만들때 그 정당에서 여러가지 절차를 거쳐서 경선을 하겠지요. 당원들 투표, 국민들의 인기도 해가지고 누가 1등이 됩니다. 그러면 그 당에서 그분에게 후보자 제안을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대통령 후보자 수락 연설을 합니다. 내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지, 수락하는 거죠. 이것이 다 어디서 나온거냐면 성경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기존 장로가 제안한다. 그가 기도한 후에 그 제안을 수락한다. 그렇게함으로써 장로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단계를 다시 보겠습니다. 첫번째 입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속에 선한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다. 두번째 입니다. 그가 은사를 따라 모임을 세운다. 세번째, 기존 장로들이 이를 알아보고 제안한다. 네번째, 그가 주님 뜻으로 확신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장로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코스를 꼭 밟아야 되고요. 각 단계마다 점검을 해야 합니다.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를 보겠습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5:22-25).
디모데전서 5장 22-25절까지가 장로들을 세우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로를 세우는 과정입니다. 첫번째 원칙입니다. 20절, 성급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성급히 하게 되냐면,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 장로들이 있었는데, 그런일이 있으면 안되지만 안따깝게도 어떤 장로가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일을 하시는 분이 비어버렸습니다. 한분이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불편한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러면 얼른 한 사람을 보충하자 라고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성령께서 세우는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 그런사람이 일어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성급히 해서는 안된다 입니다. 또 이런 경우가 있을수 있는데요. 장로들을 세대별로 안배를 합니다. 나이가 많으신분, 그 다음에 중간쯤, 젊은세대도 하고 이와같이 하기 위해서 모든 각 세대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넣을수 있습니다. 이런것도 쉽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이라든지, 출신이라든지 고려하지 않고 성령께서 세우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장로들이 잘 세워져 있는곳이 신약성경에 의하면 빌립보 교회 입니다. 빌리보서 1장1절을 보면 "장로들, 감독들과, 집사들과 성도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래서 빌립보 교회가 제대로 서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립보 교회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서로 겸손할것을 이야기 하지, 어떤 교리적인 문제, 교회적인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장로들이 잘 세워진 곳이 안디옥 교회 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거기에 인도자들이 5명이 있고 그들 가운데 성령께서 두명을,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불러 1차 전도여행을 시키지요. 이렇게 안정된 교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복수 장로들에게 인도함을 받고 있을때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빨리 그와같이 장로들을 세우려고 할때 경솔할수 있다. 그 다음 두번째 입니다. 24절, 장로들이 장로를 세우려고 할때 조사 합니다. 장로들이 장로를 세웁니다. 장로들이 세울때에 24, 25절은 세우는 과정입니다. 어떤 형제가 주님께서 세우시는 사람이 아닐까요? 하고 24절에서는 냅니다. 어떤 사람이 장로로 가능하다라고 생각이 됬는데 이야기를 해 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 그분은 이런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밝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밝히 드러난 사람, 첫번째, "심판에 나아가고" 이것은 뭐냐면 "이분은 장로에 합당치 않습니다." 라고 딱 드러납니다. 두번째 "어떤 사람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것은 "그분은 장로로 일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라고 하고 조사를 합니다. 조사를 할때, 어떻게 조사를 하느냐면, 사실 성도님들이 한 지역에 모여서 사회생활도 하고 모임생활도 하고 그러는데요. 어떤 성도님이 사회생활을, 모임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알지요. 얼마나 잘 참석하고, 참석하셔서 어떻게 영적으로 교제하는지 잘 알지요. 그런데 그분이 예를들면 사회에서, 직장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장로들이 결정하는데, 성도들에게 물어봅니다. 직장이 같거나 인근지역에서 생활할때에 그 형제님이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물어봅니다. 그러면 금방 알수 있습니다. "아 그 형제님, 교회에서는 아주 경건하신데, 이웃사람하고는 맨날 싸우고, 직장에서 막 그렇게.." 그래서 그 뒤를 좇아 밝히 드러 납니다. 어떤분에 대해서 장로로서 세울만한가를 살펴보면 결격사유가 금방 나타납니다. 24절은 부정적인 유가 쉽게, 어떤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25절은 어떤분이 장로라고 하는것이, 장로로 자격이 있다고 하는것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어떤분은 "이분은 어떨까요?"라고 하면 그 분의 선행, 선한일을 사용하여 영적으로 섬기고 그래서 자기가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영적인 열매들이 맺혀있는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분은 합당합니다." 숨길수 없습니다. 어떤분이 행한 영적인 일들은 숨겨지지 않습니다. 어떤분이 교회에서는 잘 행동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사회, 그 직장 생활에서 문제가 있다고하는 것도 쉽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24,25절이 말하는것은 이것입니다. 어떤분을 장로로 세울 것인지는 분명하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기도하며 주님께서 세운 사람인줄을 알기 위해서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며 진행할때, 쉽게 판별할수 있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5장의 가르침 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말씀을 가지고 저희들이 분명한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와같은 분들을 세울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면요. 이것이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원칙 입니다. 성도들이 세우지 않는다. 사람이 세우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운다. 하나님이 세우는것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 디도서 1장 7절에 근거해서 장로들이 장로들을 선택한다. 그러면 문제가 뭐가 나오냐면, 맨 처음에 장로가 하나도 없었던 시절, 그래서 장로가 장로를 선택해야 하는데, 장로자체가 없었던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 이런 질문이 나올수 있는데요. 성경은 그와같은 경우는 없다고 말합니다.
"각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행14:23).
1차 전도여행을 할때 보면, "각 교회에서" 각 지역교회마다 복수의 장로들이 있어야 합니다. 한 지역모임에 복수의 장로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당장 실현할수는 없지만 저희들의 기도제목입니다. 한 지역모임에 복수의 장로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택했다"고 되어 있는데요. 누가 선택했느냐? 사도바울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누가 선택하느냐? 장로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해야 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하지 않으시니까 누구를 통해서 하시냐면 사도들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그럼 사도들이 택한다 할때 사도들이 자기 마음대로 택했습니까? 자기가 보기에 괜찮은 사람들을 택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장로로 세우는가를 분별하고 택한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택한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분을 장로로 세우고 계시는구나. 라고 하는것을, 아까 저희들이 바라본 디모데전서 3장 1절, 디모데후서 1장 6절을 근거로 그와같은 일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택했고요. 그 다음에 디도서를 잠깐 보시죠.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1:5).
여기서도 장로들을 세웁니다. 누가 세우느냐? 디도가 세웁니다. 그러면 디도는 누구냐? 디모데나 디도는 사도의 대리인입니다. 사도가 다 방문을 해야 하는데 바빠서 방문을 할수 없는 경우에 자기를 대신해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디도는 사도의 대리인 입니다. 이분들은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들이 아닙니다. 장로가 아닙니다. 디모데, 디도는 한 지역교회에서 일하는 장로가 아닙니다. 디모데는 빌립보도 갔다가 데살로니가로도 갔다가 디도는 그레데에 갔다가 고린도 갔다가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한 지역모임에서 일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그래서 장로는 누가 선택했느냐? 성령이 세우시고 사도들이 선택 했습니다. 사도들이 마음대로 선택했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잘 분별하는 사도들이 "아, 성령께서 이분을 선택하시는구나" 라고 지목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를 세운다는 단어를 보면 "이분이다."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성령께서 세우신 분이네요." 라고 한거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권한이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배제하고 그렇게 한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장로는 성도들이 선택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권한이 더 강한 것입니다. 장로는 반드시 사도들이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존 장로들이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지역모임의 형제들만 있고, 장로들이 하나도 없었다. 예를들면 강서모임같은 경우인데요. 다 형제들이고 아무도 장로일을 안했어요. 장로가 없었지요. 그런데 형제들이 모여서 어떤 한분을 장로로 선택하는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지역모임이건, 그 지역모임이 세워질때, 지금은 사도가 없습니다만, 사도의 대리인도 없습니다만, 누군가가 그 지역모임을 세우는데 기여하는 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나 사도의 대리인들을 통해서 세워져야 합니다. 성도들이 세우면 안됩니다. 하여간 이것이 첫번째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제가 모임에 들어와서 교파하고 모임하고 다른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였냐면, 구원분별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하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정말 성경적인 기준에서 구원인지를 교회가 분별하고 영접한다. 이런 굉장한 차이가 있었고요. 또 모임이 갖고있는 두번째 진리가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있다. 모든 구원받은 성도가 제사장이고 하나님께 직접 예배드린다. 가운데 성직자 이런것은 없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저희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진리가 우리는 목사가 없다, 입니다. 우리는 목사제도 안되어 있습니다. 목사제도라고 하는것은 성직자 제도인데, 어떤 한 전문가가 있는 것입니다. 회사로 치면 그 교회를 끌어가는 전문 운영가가 있는 것입니다. 회사로 치면 사장, 이사들이 있는거죠. 그리고 이분들이 월급을 받습니다. 교회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고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라고하는 것을 반대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단이 없다. 파를 세우지 않는다. 이런것들이 한국모임이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진리 였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쭉 흘러가고 있었는데, 모임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복수 장로제를 시행해야 할 필요가 생기고, 그때 어떤 일들이 자꾸 벌어졌냐면 장로들을 투표로 뽑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모임에서는, 제가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때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는데요. 이렇게 정했습니다. 이 모임의 규모로 봐서 장로를 네명을 뽑는다. 숫자를 정했습니다. 그 다음에 성도들이 투표한다. 그래서 다득표 순으로, 1번부터 4번부터까지를 장로로 하자. 한표차이가 나와도 다섯번째는 장로 아니다. 그래가지고 투표를 했어요. 네명 장로 세우고 그 다음에는 장로 일 못하게 그렇게 뽑았고, 특별히 관악모임, 교파쪽에서 들어온 관악모임 계통은 완전히 투표를 기정사실화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어떻게 세워지느냐에 대해서 혼란이 있었는데요. 그 이유는 뭐냐면, 첫번째로 성도님들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몰랐고, 저희들이 매일 이야기 했거든요. 민주주의가 아니다.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했는데, 모임이 이와같은 성경적인 인도자들을 성령께서 어떻게 세우는지를 모르니까 둘 중에 하나로 갑니다. 하나는 일인목회로 갑니다. 한사람이 다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서 재정지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교파로 가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그래서 이름도 붙이지요. "목회자" 아직 목사라고까지는 안하는데요. 목사하고 비슷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날 어떤 공문을 보면 거기 써있는 이름들이 전부 형제가 한명도 없어요. 전부 어디 어디 교회의 목회자. 전부 그렇습니다. 무슨무슨 회장. 주님께서 우리를 혈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는데, 이제 형제라고 칭호하기를 부끄러운 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잘못된 길이 형제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복수 장로가 안되면, 한명이 하든지,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끼리 모여가지고 어떤 형제들을 넣을것인가는 교회마다 다르기도 하더라고요. 어떤데는 형제면 다 들어가기도 하고, 강서교회에서는 형제 중에서 결혼한 형제들만 넣어주고요. 신림동 교회의 손유호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기는 사회를 보는, 주일날, 혹은 수요일날, 사회를 들어가는 형제들만 모아서 회의를 하고, 뭐 이렇게 초기에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것들이 다 문제 입니다. 물론 참 고민스러운 것이죠. 아직 복수장로는 세워져 있지 않고, 또 그렇다고 결정은 해야 하고 그 다음에 결정을 할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주어야 하고 그런것을 유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죠. 어째거나 이런것들이 언제나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그게 저희들이 겪어왔던 여러 시행착오이고 어떤면에서는 부끄러운 이야기 입니다. 잘 몰랐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는것은 변명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무릎을 꿇고 주님앞에 기도하면 성경이 명백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안보이는 것은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거죠. 그래서 그런 면에서 영적인 인도자들이 세워져야 한다. 그 다음에 장로들과 성도들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해야하느냐? 복수 장로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런것은 여전히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론보다는 실제로 그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 형제님들이 어떻게 서로 인격적이고 서로 겸손하고 그렇지만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 중에서 몇가지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장로들이 결정을 해도 그것을 강요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4).
믿음을 주관하지 않습니다. 단지 기쁨을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로들과 성도들 사이의 관계 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결혼을 할때, 이런식으로 결혼을 해왔습니다. 누구랑 결혼할 것인지를 장로들이 결정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순종 합니다. 그래서 예를들면 제가 자꾸 이야기를 하는 박용수 형제님, 형제님이 선을 보러 갔어요. 지금의 윤선화 자매님. 막 선을 본 첫날 결혼하자고 했어요. 그 자매님은 봤으니까, 서로 구원간증도 하고, 앞으로 어떤 가정을 이루고 싶은지 이러한 소원도 이야기하고 했으니까, 주님의 평안을 주시고 정말 주님으로부터 온건지 분별을 하려고 하는데 박용수 형제는, 모임의 인도자가 소개해 줬으면 자기는 무조건 한다. 그 자매가 속된말로 못생겼건, 장애자건, 가리지 않고 나는 무조건 한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간 겁니다. 거기서는, 윤선화 자매님은 모임에서 그렇게까지 배우지 않은거죠. 그냥 보고 평안하면 해라. 그러니까 살피러 온거죠. 그런데 처음 만난날 결혼을 하자 하니까 어떻게 된 것인가? 이렇게 된 거죠. 그런데 모임마다 결혼에 대해서 여러가지 분별들을 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그냥 내가 결정할테니까 순종해라." 가르치는 모임도 있고 한쪽에서는 "보고 그냥 당사가 결정해라." 이런 형태도 있고, 여러가지 형태가 있으니가 그것이 서로 안맞아서 생긴 혼란스러운 경우 입니다. 개인차가 있습니다. 하여간 성경이 말하는 것은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고 기쁨을 돕는자가 된다라고 하는것이 사도바울이 보이고 있는 태도중에 하나 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보겠습니다.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전16:12).
여기 사도바울과 아볼로 사이의 관계를 볼수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냐? 사도 입니다. 부활한 주님이 세운 사도입니다. 아볼로는 형제입니다. 물론 일꾼이죠. 말씀을 전하죠. 그는 에베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을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린도로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볼로의 은사를 보고 "나는 아볼로에게" 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바울과 아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 문제였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볼로에게 자유롭게 고린도에 가서 "나는 아볼로에게" 할찌라도 그것은 육신적인 형제들이 하는 이야기이고, 형제님은 영적이니까, 가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가르치십시요. 이것이 사도바울이 많이 권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절대로 안갑니다. 나를 높이고 나를 따르는 사람이 있는 한 나는 고린도 안갑니다. 나는 주님이 높아지지 않으면 말씀을 안 전할 것입니다." 라고 아볼로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형제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말씀을 듣고 세워지는 일입니다. 가십시요." 아볼로가 안갑니다. 이 두사람 사이에 서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존중합니다. 사도가 아볼로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하는 형제들 사이에 있었던 관계들입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21:10-14).
여기보면 아가보가 예언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예언을 합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로마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성령께서는 여기까지만 말한 것입니다. 올라가라, 가지마라를 말한것이 아니예요. 성령께서는 있을 일을 말씀해 주신것입니다. 말해주신 이유는 두가지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첫번째, 올라가지 말라는 것일수 있고, 위험이 있으니 피해라 하는 것일수 있고, 두번째는 위험을 각오하고 가라. 거기가면,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올라가면 안된다. 엄중한 체포가 기다리고 있다. 두가지를 하신 것이죠. 마음을 준비시키는 예언일 수 있습니다. 자, 그것을 듣고 12절,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권하니" 그랬는데요, 여기서 "우리가"라고 하는것 보면 누가까지 동의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쓴 것이죠. 그래서 그 가이사랴 모임의 인도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사도바울과 동행하던 누가까지 합쳐 가지고 "올라가지 마십시요."그랬더니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결박 가지고 그러느냐? 나는 죽을 생각도 있다."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14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주님의 뜻은 사도바울이 결박을 당함으로써 주님이 무엇인가를 이루실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도 성도들의 견해가 있고 사도바울의 견해가 있습니다. 아가보의 견해가 있고 그둘이 충돌합니다. 그래서 둘이 결국 의견이 맞지 않을때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옵소서." 하고 물러서는 것입니다. 이게 계속 성도들 사이에, 우리가 어떤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별했을때에도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강요될것인가 하는것은 다른 문제 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보겠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것을 전제로 깔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인도자들에게, 그러니까, 한명의 인도자는, 장로 한명은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수 장로가,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세운 복수 장로가 교회적으로 결정하면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알아줘야 하고 기도해줘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복종한다고 하는것은 내 견해와 다를 때에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혼자서 이와같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복수 장로제가 세워져 있고 그 장로들 사이에 일치가 있고 주님의 뜻으로, 그런 경우에 성도들은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여간, 이것이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경우에는 쉽지 않은데요. 성도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갖고있는 존귀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관하지 않고 도우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들과 성도들의 관계에는 분명히 인도자와, 따라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것들이 조금 미묘하고 복잡할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인도자들을 세우시고 그 인도자들을 통해서 이끌어 가시고 그리고 결국 최종 목표는 주님을 닮아가는, 또 이 땅 가운데서 주님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이 일을 해 나가시는 거죠. 저희들이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자를 세우시는가? 그리고 그 세우는 과정 가운데 어떻게 참여하고 그 다음에 세운 인도자들에게 어떻게 순종하고 그들을 알아줄 것인가? 그리고 나중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만, 그럼 장로는 뭐하는거냐? 기능이 뭐냐? 그 다음에 장로에게 교회가 재정지원을 할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예를들면 교파에서는 두배나 존경한다. 그 두배를 물질을 공급하는 것으로 해석 합니다. 그러면 그 존경이 물질로 표현될수 있는가? 라고하는 문제들을 저희들이 계속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면서 저희들 가운데 주님께서 세우시는 인도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저희들은 어떻게 그와같은 인도자들을 순종해 가면서 주니님뜻을 이룰것인가? 하는것을 저희들이 계속 기도해야 되고 또, 처음해 보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실행하는데 있어서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기로는 대전중구모임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일꾼들이 또 특별히 어린 자녀들 가운데서도, 훗날 대전중구 모임을 짊어지고 주님앞에 헌신할 영혼들이 이와같은 과정을 통해서 세워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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