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의 응답 > 2022년 10월 22일 토요일 / 히긴스 형제님
질문 1. 성경에 보면 주님에 대해서 이름이 여러가지로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빌 1:1), '주 예수 그리스도'(빌 1:2), '예수 그리스도'(빌 1:8,11), '그리스도'(빌 1:10,13,14)로만 언급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이러한 이름의 차이가 무엇인지요?
대답 : 이것은 아주 좋은 질문이고 이것의 차이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제가 한가지 주의를 또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의 서신서에서 언급한 데를 볼때에 여러분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의 원문을 찾아보면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 원문에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울과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아는것도 중요합니다. 주로 "그리스도 예수" 이 순서로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알게 되었고 그리고나서 이 땅 가운데서 그분이 행하신 일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주 "그리스도 예수"라고 언급니다. 베드로는 반대로 그분이 지상에 있을때부터 알았으며 그리고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언급니다.
서신서에서 아주 드물게 "예수"라고만 언급된 부분이 있습니다. 여덟번 또는 아홉번에 거쳐서 히브리서에서 "예수"라고 언급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대제사장"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서 경험하신 모든 것들이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서 합당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라고만 언급된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의미가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께서 장래에 가지게 되실 영광을 언급할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주님의 그 이름에 전체적으로 나와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과 존귀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을 드렸는데요. 여기에 또 질문할 것이 있다면 나중에 개인적으로 와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2. 성경에서 히브리서 10장 10절 같은 경우에 우리가 "믿는 자들이 거룩하여 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베드로전서 1장 16절 같은 경우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성도들이 거룩해져야 될 것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두가지 차이, 이미 거룩하게 된 부분, 또 룩해 져야되는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질문이 있었고요.
또 관련해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의에 대해서 살게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또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대답 : 영어성경에서 다른 두가지 다른 표현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원어 단어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 '거룩함', 그리고 '성화', 그리고 거룩함(홀리너스), 이 단어들이 영어로는 다른 표현을 하고 있지만 원어로는 한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같은 원어 단어입니다.
이 성화에 관련해서 우리는 세가지 면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것은 첫번째로 우리의 신분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믿을때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와 또한 죄가있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편지할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라고 편지합니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신분입니다. 그리고 다른 예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여년 전에 저의 할아버지가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오셨습니다. 하루는 그분이 어떤 재판정 앞에 설 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해야 됐습니다. 이제 선서를 하고 그리고 그렇게 선서를 한 다음에 그는 귀화되서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에 의해 이제 할아버지가 미국 시민권자라고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분이 누릴 수 있는 그분의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에서 온전히 거룩하게 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성경은 우리가 거룩함을 특징으로 하는 삶을 살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이것은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 음란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므로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거룩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을때에 신분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이루어가야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리는 신분적인 위치이며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야 되는 진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뭐라고 기록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친히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하려 함이라" 그리고 이 외에도 많은 성경 구절이 우리가 계속해서 더 성화되어가고 거룩케 되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3장 후반부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소망의 전망을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 거룩함에 흠이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거룩함이라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분적인 진리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나의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가야되는 실제제적인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늘에 이르렀을때 우리는 온전하게 또한 영원하게 이룰 그 거룩함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한번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성화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하면 '따로 떼어놓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함을 위해서 따로 구별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7장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간에 결혼한 상황을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분명하게 이제 어떤 한 커플이 믿기 전에 결혼했는데 그 중에 한명이 결혼한 다음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이 믿지 않은 다른 한편이 믿는 자로 인해서 거룩하여 지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그것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따로 구별된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위치 가운데 놓여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질문 3. 우리가 서양모임을 방문하거나 또한 서양에서 어떤 손님들이 왔을때에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요. 아직 구원받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 인데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인데도 불구하고 너울을 쓰고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 왜 서양에서는 그렇게 하는지, 어떤 성경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대답 : 우선 첫번째로 말씀드리는 것은 구원받지 않은 어린 딸에게 너울 쓰게 하거나 쓰지 않게 하는것은 여러분의 개인적인 분별이라고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어떻게 하든지 틀린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모임안에 있는 자매들에게 있어서 너울을 쓴다는 것이 특별한 영적인 이해를 가지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어린 자녀들에게 그냥 교육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영적인 것들은 우리가 단순히 어떤 습관을 가진다고 되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너울을 특별히 언제 써야하는지도 이것과 함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너울에 대해서 쭉 언급한 다음에 마지막에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변론하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러한 규례가 없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교회를 위한 성경적인 실행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여덟번 또는 아홉번에 거쳐서 사도는 "너희가 모일때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에서 다시한번 "너희가 모일때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너울이라는 것은 지역모임이 모일때에 반드시 착용해야 되는 그러한 사항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다르게 자매님들이 가정에서 그 너울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그 자매님들이 누릴 수 있는 개인적인 선택의 특권입니다. 제가 살고있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곳에 '메노나이트' 또는 '아미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여성들이 이 머리 가리는 것을 항상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교회가 모일때에" 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자들이 항상 너울을 쓰고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면 고린도전서 11장은 또한 남자들은 항상 머리에 모자를 써서는 안된다고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의 너울에 관해서 가정에서 또한 남편과 함께 집에서 너울을 쓰는것은 자매님들이 개인적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질문 4. 성경에 잠언 13장 24절 같은 경우에는 자녀를 징계하라고, 특별히 훈육할때에 매를 사용하는것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 성경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 매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요.
대답 : 이 성경에서 특별히 잠언 13장 24절에서 막대기를 사용하여 아이를 훈육하는 것을 질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잠언에서 이 막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용한다면 아이를 단순히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은 막대기를 사용해서 책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막대기를 그 문자적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때에 "내가 막대기로 너희에게 나아가랴 아니면 사랑으로 나아가랴"라고 상징적으로 막대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막대기는 권위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그 막대기로 다루시는 주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3장 24절에서 우리말로 초달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것은 그 가정에서 권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표현입니다.
그 권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여러가지 다른 요소들을 고려할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사회 가운데서 권위가 사용됩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아이를 매로 때리는 것은 유아학대로 기소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같은 미국 사회에서 여러분이 아이를 매로 때린다면 당국이 찾아와서 아이들을 따로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 대해서 "너 부모님에게 매를 맞은적이 있니?" 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권위를 징계를 사용할때에 지혜롭게 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권위를 사용하는데 고려해야 될 두가지 것은 그 아이의 나이입니다. 특별히 이 아이를 매로 때린다는 것은 그가 아주 어렸을때에 그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아지만 10대 아이들에게 매로 때린다는것은 그것은 적절한 징계가 되지않고 오히려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이 징계는 그것은 그 사회에서 범죄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징계를 할때 고려해야 된는 것은 어떤 특별한 잘못에 대해서 지적해야 되는 것이지 그가 실수한 것을 매로 다스려서는 안됩니다. 아이가 아침 식사자리에서 우유를 실수로 엎지렀을때, 여러분은 그것이 그의 실수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이 아침에 화를 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이 고의적으로 우유를 엎지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는 징계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징계라는 것은 그 죄를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는 그 아이의 나이를 고려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제 육체적으로 징계하는 것, 매를 때리는 것은 아이가 아주 어렸을때 적절할 수 있습니다. 단지 15개월 된 아이가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은 그에게 차가 오는것의 위험성을 설명해 준다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차에 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그래서 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등에 육체적으로 고통을 주었을때 그는 그와같은 행동이 가져다주는 결국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로부터 더 성장한다면 여러분은 다른 종류의 징계를 사용해야 됩니다. 제가 한국의 부모님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미국인으로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미국에서는 어느 시간동안 어느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집안에서 어떤 일을 맡겨서 그 일을 하는것을 또한 징계의 한 일로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어려울때가 아마도 10대의 때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10대가 되었을때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될지 우리가 할수 있는게 별로 없어 보입니다. 10대를 징계하는 것은, 이제 여러분이 할수 있는 것은 그들의 휴대폰을 뺏거나, 잠시 그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운전을 한다면 잠시 운전을 못하게 차키를 뺏어놓는 것입니다. 이제 저녁 시간에 밖에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잠시 제한해 놓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징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여러분을 두려워하게 만드는게 목적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때는 여러분이 그것을 잘 의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양심을 잘 바라고 있어야 됩니다. 그들이 그 양심 가운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러분이 구원받고나서 얼마되지 않았을때는 그 결과를 두려워서 나쁜 행동을 안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고나서 더욱 주님을 알아가게 되었을때는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님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을 양육할때도 그와같은 목적으로 해야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이 옳다는 확신 가운데 그리고 부모를 사랑하는 가운데 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많은 것들을 말할 것이 있지만 이정도로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질문 5. 우리가 때때로 청년들을 위한 집회, 또한 학생들을 위한 복음 캠프,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적인 것인가요? 그리고 만약 이런 것들을 허용을 한다면 다른 여러가지 집회들도 할수 있지 않습니까? 예를들면 자매집회, 격로집회, 또는 신혼부부를 위한 세미나는 어떻습니까?
대답 : 저는 이 질문을 할 수 있으면 내일 집회가 끝날때까지 미루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질문에 답하면 보통 사람들의 지지를 많이 못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언급된 모임이 하는 집회를 보고 있습니다. 만찬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집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집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읽기 집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징계집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로모임만 전체 모임 성도들이 모이지 않는 유일한 집회입니다. 또한 여기 선교보고집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집회들은 모두 모든 성도들이 모이는 집회입니다.
그래서 이 자매들도 다른 성도들과 같이 모이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에서 자매들이, 자매가 다른 자매에게 가르치는 그런 내용은 집에서 하는 것이고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디모데가 청년으로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다른 젊은 자매에게 가르치기 어려운 그런 가정과 관련된 내용들을 나이든 자매가 젊은 자매에게 가르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나이든 자매님이 젊은 자매님에게 가정에 대해서 그것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어떤 자매가 공식적인 집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집회는 사도바울이 생각한 집회가 아닙니다. 거의 디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집회는, 그런 모임은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으로, 사적인 교제 가운데 나누는 그런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한 자매님이 제게 이렇게 도전적인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성경에서 다른 역할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는 각자 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이 또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 했을때 아내와 쇼핑을 나간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쇼핑이라는 것은 단지 5분만에 다 끝내버리는 그러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성에 있어서 쇼핑이라는 것은 어떤 좋은 경험입니다. 그것은 한시간이 넘게 걸릴수도 있습니다. 그가 첫번째 간 상점에서 아주 아름다운 드레스가 있다고 할지라도, 아주 좋아합니다. "마음에 드는것을 샀으니 이제 집으로 갑시다."합니다. "나는 여기 쇼핑하러 온것이지 단지 물건을 사러 온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는 다시는 아내와 함께 쇼핑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 같은 단어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질문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님이 어떻게 자매님이 필요한 것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공급할 수 있습니까?" 물론 어떤 부분은 인정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좋은 대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남편이 아내를 양육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아내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채워줘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지식을 또한 모임으로 가져와서 모임에서도 그것을 가르치며 자매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가 독신이라고 해서 그가 자매에게 그러한 말씀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을 조심해서 해야됩니다. 그래서 장로 모임을 제외하고 모든 집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다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청년들을 위한 집회, 또는 신혼부부들을 위한 집회 이런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가지 관점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중에 주된 대상이 청년들로 집회를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 역시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젊은 신혼부부들을 위한 그런 집회를 계획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도들을 그 집회로 초청해서 함께 듣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든 성도님들도 오늘날에 이제 청년들이 결혼에 대해서 어떤 압박감을 가지고 있는지 함께 배우고 공감하게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특정 연령대를 대상으로 집회를 계획한다 할지라도 모든 성도들이 그 말씀 가운데서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임을 나눠서 집회를 누구만 참석해야 한다면 그것은 모임을 나누는 그런 위험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성도님들도 이 시대의 젊은 성도들의 그 고민을 알아야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때에 겪었던 그 어려움들을 또 지금 이 시대에 학교 다시는 학생들의 어려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학교 다닐대에 공룡들과 싸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농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와같이 거대한 여러분의 성경적인 지식을 손상시키는 어려움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모든 집회들은 항상 인도자들의 통제아래 있어야 됩니다. 만약 어떤 자매집회가 있는데 자매들만 모여서 한다면 형제들이 그 가운데서 무슨 이야기가 가르쳐지는지 알수 없습니다. 모임의 인도자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공급받고 있는것을 분명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듣기를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으면 그것에 대해서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질문 6. 다니엘서 9장 25절에 보면 다니엘의 70이레를 69와 하나로 나누고 또한 일곱이레와 62이레로 나눕니다. 특별히 일곱이레와 62이레로 나눈 의미가 무엇인가요?
대답 : 다니엘은 70이레에 대해서 예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니엘서 9장은 우리가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뼈대가 되는 기초가 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는 그 달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어떤 성격을 가질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처할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많은 시간들의 기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70이레는 이 세개의 부분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여기에 한 이레가 있고 그리고 62이레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이레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선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보자면 7년과 그 앞에 넣은 69와 하나 사이에 교회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앞에 두고있는 한 이레, 칠년은 칠년환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7년 환란에 대해서 마태복음 24-25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이 마지막 이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그 앞에 69이레가 어떻게 나눠져 있는지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62이레가 있고 그리고 일곱이레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확하게 이것이다,라고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라기의 그 연대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지 약 400년이 흐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령이 날때에부터 그 이레가 시작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62이레 후에 기름부은 자가 끊어진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그 종려주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한 영국인이 로버트 앤더스경이 쓴 이것과 관련된 책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때가 그 성경적인 달력으로 계산했을 때 정확하게 이 다니엘이 말하고 있는 날짜와 일치한다는 것을 그는 계산해 내었습니다.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63이레가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것을 예언했을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69이레에 해당하는 연수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이레는 여전히 미래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한 이레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한 이레, 7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잠시 제쳐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 이레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69이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69이레도 두부분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일곱이레와 62이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그 일곱이레, 49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중건하라는 령이 날때부터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을때를 말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제가 왜 말라기서를 얘기했냐면 그때 말라기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49년 후에 그 말라기서가 기록되었다고 정확하게 그 연대를 알수가 없기 때문에 또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에 대해서 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질문 7. 히브리서 6장에 나와있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질문하였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대답 :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때 항상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히브리서에서는 특별히 그렇게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이 히브리서에서는 일곱개의 다른 그 경고의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게 된다면 곧 신자들도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단 말인가, 라고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히브리서가 누가 썼고,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지를 아는게 중요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서'라는 것은 특별히 자기가 믿는다고 고백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백들은 세가지 그룹으로 나눠집니다. 그들의 일부는 배교하게 됩니다. 그 배교해서 그들은 다시 예전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으로, 희생제사를 또 드리는 것으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욕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다시한번 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부정한 자라고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것과 같은 행동을 그들이 다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번째 그룹은 이와같이 배교하는, 타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그룹은 충성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10장에 보면 그들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면서도 불구하고 주님을 신실하게 좇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그룹은 그들의 믿음 가운데서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친척들, 그들의 친구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계속 공격을 받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조상으로부터 온 종교를 배반하였다고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천년간의 역사를 너희들이 부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참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 준 그 종교를 네가 저버렸다고 사람들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과 그 제사장과 그들이 제사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 성소와 그 대제사장에 대해서 그들이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공격은 아마도 구약성경을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너희들이 잘 살고 번영하게 되는데 지금 너희들이 당하는 꼴을 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장수하고 많은 자손과 그리고 물질적인 많은 풍요를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믿어서 받게 되는 고난을 봐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자들은 다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믿는다고 가고있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그리고 바로 이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펜을 들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너희들이 그러한 가운데서 돌아간다면 너희들이 전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구절 한구절 계속 그 경고를 주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것이 구원을 받고 잃어버릴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6장의 말씀을 읽을때에 어떤 신자들은 혼란을 겪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비췸을 얻었습니다. 배교라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들이 하는것이 아니라 항상 비췸을 얻은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에게 비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1세기에 있었던 그 성령님의 역사를 그들은 눈으로보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님의 임재를 받지는 않았지만 성령님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그들은 눈으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이 구절을 들어서 네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다시 구원을 얻을수도 있고 또 잃어버릴수 있고 또 얻을수도 있고 또 잃어버릴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한번 비췸을 얻고 그것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않았다는 상태를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여기 나와있는 사람들은 이런것들을 모두 맛보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질문 8. 성경에 남자는 짧은머리 여자는 긴머리를 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느정도 짧고 길어야 합니까?
대답 :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남자라면 몇센티미터가 되야한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음으로 우리도 그렇게하지 않습니다.
이 남자의 짦은 머리와 여자의 긴 머리는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언급된 이유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목적은 모임 안에서 남녀의 구별이 분명하게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인트는 그 남자의 짧은 머리와 여자의 긴 머리, 구별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정도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너희 본성이 그것을 가르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에게 이제 지적으로 남편과 함께하며 그리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그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긴 머리는 그와같이 창조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위치를 순종한다는 눈에 보이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덮는 너울은 구속의 질서에서 그의 위치를 또한 말해주고 있습니다.
11장을 읽겠는데요. 여기에 여자의 머리가 얼마나 길어야 되는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은 이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고전 11:15).
어떤 학자는 이것을 번역하기를 '여자는 머리를 길러야 된다'고 동사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여자가 머리를 길게 자라도록 자기가 허용하고 있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자가 이 길이가 되야 된다고 그 센치미터를 말한다면 우리는 그 여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들은 머리가 길게 자라지 못하는 그런 머리카락를 가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것은 남자와 여자의 분명한 차이가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 포인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의 초반부를 먼저 보겠습니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고전 11:6).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가위나 면도날을 머리에 대는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것이 이 구절에 아마도 들어가 있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제가 생각하는 바는 만약 어떤 여자가 남자처럼 행동하고 싶다면 그 여자는 자신의 머리를 부끄럽게 깎아야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가 얼마나 짧아야 되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것을 남자의 양심에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양심상 본성으로 여자와 구별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머리가 있어야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질문 9.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17:26).
여기 연대가 나오고 경계가 나오는데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대답 : 사도행전 17장에서는 헬라 철학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사도바울이 했던것과 다르게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임을 인식하고 이와같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건물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라고 말슴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람이 뭘 더해드릴 수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시간과 그 거주 지역을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 연대라는 것은 그 시간의 길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가 몇년간 세워져 있을것인지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역사 가운데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그와같이 바벨론 제국이 세워지고 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국이 세워지고 망했습니다. 애굽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제국의 그 강함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와같은 여러 나라들의 세워지고 망함을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거주의 경계가 무엇인지는 조금 더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것은 어떤 지역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얼마나 번영할지, 그래서 그 영토가 얼마나 확장될지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의미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 각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다 복음을 듣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수천년간 이 서양의 나라들이 복음을 듣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시아 국가들이 복음을 듣는데 더욱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복음의 역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처럼 이제 어디든지 사랑으로 명하사 회개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질문 10. 요한계시록 4장에 나와있는 네 생물이 무엇인가요?
대답 : 네 생물은 계시록의 여러 장면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들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들이 살고있는 네개의 거대한 나라들을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네 생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물, 살아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의 성격을 각각 담고 있다는 것은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그 행정의 성격의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자는 그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을 누가 훼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지적인 능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수리는 그 높은 존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때에 어떠한 성격으로 다스릴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와있는 이십사 장로들은 분명히 교회를 대표하는 그러한 존재들입니다.
질문 11. 주님께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대답 :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행하러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음으로" 그래서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님께 하라고 하신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죄를 위해서 모든 값을 치루셨다는 것 이상을 그래서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 모든 값을 지불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많은 의미 중에 한가지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모든 뜻을 다 행하셨고 아버지의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 모든 일이 다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참으로 주님께서는 그분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다 뒤돌아보시고 이제 모든 일이 남김없이 다 이루어져 있음을 알고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일이 다 이루었음을 아셨습니다. 그 인류에게 필요한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 남겨지지 않고 모두 다 이뤄진 것입니다. 다시 누가와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 12. 우상의 제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인데요. 특별히 제사 음식같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대답 : 아마도 제가 이 질문을 이해할때에 비록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그런 제사를 참석하게 되는 경우? (상대방이 제사 음식을 제공한다면 그 제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다루고 있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시대에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 시장에 나와서 팔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값을 주고 산 것은 우리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 이것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인데?"라고 말했을때 우리는 그것을 먹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꼭 먹어야 된다, 안먹어야 된다, 그것보다도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실족하느냐, 그런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 상황에 대해서 어떤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고려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그 말한자의 양심을 위해서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질문 13. 가스펠 홀과 채플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그리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대답 : (긴 한숨) 짧은 시간 안에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거 같습니다. 제가 서양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양에서 가스펠 홀과 채플의 차이라고 한다면 만찬을 어떻게 하느냐가 주된 차이가 되게 됩니다. 채플은 그들이 믿는다고 고백을 한다면 그들이 어느 교회에 속해 있든지간에 그들이 만찬에 참석할 수 있게 하는것이 채플입니다. 하지만 가스펠 홀은 이 만찬이라는 것이 교제의 상징이고 그래서 교제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만 그 만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스펠 홀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그로 말미암아 다른 여러 차이점들이 계속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채플에 있는 분들은 여러가지 모양을 각각 가지게 됩니다. 그분들은 채플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지금 하고있는 것과 거의 비슷한 실행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 채플이지만 아무나 다 만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미리 알고있는 분들만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채플이라고 하는데 또 어느 한 극단은 여자들이 강단말씀을 하기도 하고 너울을 쓰지도 않기도 하고 그리고 찬양대를 운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을 판단할 입장은 아닙니다. 저의 책임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고 그것을 잘 지키고 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또 채플에도 경건하고 하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가 가스펠 홀로 모인다고 해서 전혀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많은 연약과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해서 준행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외국 형제님 > 히긴스 형제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모데후서 2장 (0) | 2022.11.18 |
---|---|
디모데후서 1장 (0) | 2022.11.10 |
요한복음 21장 : 주님의 인도하심 (1) | 2022.10.28 |
요한복음 20장 : 동산의 정원사이신 주님 (0) | 2022.10.26 |
덕언 : 복 있는 사람이신 주님 (0) | 2022.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