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한봉래 형제님(요약)

마태복음 강해 25

박이레 2022. 7. 10. 00:55

2016년 6월 25일 토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마태복음 강해 25>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6:1-4, 개역한글)

마태복음 6장도 산상수은중의 일부입니다. 마태복음 6장은 위선의 문제 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즘 쓰는 언어로는 위선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속과 달리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선적인 사람은 성경 초반부터 나오며 끝까지 있을 것입니다.
성경 최초의 위선자는 가인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 위선적이었다는것을 우리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으로 알수 있습니다.

두번째 위선적인 인물은 압살롬입니다.

5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6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7 사년만에 압살롬이 왕께 고하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컨대 나로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삼하15:5-7, 개역한글)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거짓으로 사로잡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윗에게 나아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니 헤브론에 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헤브론에서 반역합니다. 이것이 위선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하를 가시면 요압이 그렇습니다.

26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 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삼하3:26-27, 개역한글)

다윗왕국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사울을 따르는 사람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넬이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은 의로운 사람이라 약해져가는 사울집의 아브넬을 불러 군대장관의 자리를 주고 평화를 이야기 합니다.
아브넬은 이에 응하고 돌아가지만 요압이 그를 몰래 불러 은밀히 할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서 아브넬을 죽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15:7-9, 개역한글)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나 속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통렬히 비판하십니다.
그들의 삶은 주님의 마당만을 밟는 삶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속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하나님을 경배한다"

바리세인은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표방하고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말하라"
예수님께서 말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면서 말합니다. "신성모독을 한다.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대제사장은 옷을 찢었지만 속으로는 드디어 예수님을 죽일거리를 찾아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위선입니다.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행8:9-23, 개역한글)

시몬이라는 분이 사마리아 교회의 성도로 영접됩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시몬은 구원받았다고 하여 교회에 더해졌으나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마술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의 능력가운데 있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마술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5:1-5, 개역한글)

아나니야는 밭이 있었습니다. 그 밭을 팔아 얼마를 헌금하는지는 아나니야의 마음입니다. 그것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야는 일부를 감추고 일부를 헌금한것을 전부를 헌금을 한것처럼 속였습니다. 위선입니다.
아나니야가 한것은 헌금이 아니라 바나바가 받은 칭찬을 받고 싶어한 것입니다.
이러한 위선은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4:1-2, 개역한글)

마지막때에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닌 귀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자들이 있을것입니다.
그것이 결혼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겉으로는 따르나 속으로는 따르지 않을것입니다. 위선자들인것입니다.

마태복음으로 다시 오셔서 문맥을 살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1절에서 큰서론을 말씀하십니다. 2-4절은 구제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5-15절까지는 기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16-18절까지는 금식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1절부터 18절까지는 신앙생활을 이야기 합니다. 

말씀을 오해함으로 첫번째로 믿음(구제,기도,금식) 생활이 틀렀고

19절부터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2, 개역한글)

19절부터 34절까지는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 틀려져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흐름이 이렇게 되어 갑니다.

이제 우리가 살피는 1-16절까지는 하나님을 잘못 알므로 믿음생활이 틀려있다고 하시는 부분입니다.
믿음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3가지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구제는 믿는자가 다른사람들을 향한 신앙생활이며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생활입니다.
오늘은 구제에 대해서 살피겠습니다. 

삶을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우리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구제를 합니다.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갈2:9-10, 개역한글)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인의 사도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사도바울입니다. 이들은 똑같은 하나님의 사도 입니다. 그래서 교제의 악수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부탁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어느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건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주위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성경이 얼마나 구제를 강조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 교회는 과부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7-18, 개역한글)

성도들의 경우에 형제자매들의 어려움을 보고도 돕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음생활,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요소를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주변사람들, 특히 어려운 사람을 사는 사람을 돕는것으로 나타납니다.

기도, 금식, 구제 세가지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하게 되는것입니다.
다만, 이 세가지를 할때 겉과 속이 일치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믿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갈1:22-23,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구원받았다는 소식이 그당시 여러지역모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가말리엘문하에 있었으며 율법에 열심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는 소문이 무성히 퍼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구원받아서 자기를 지지해지던 사람들에게서 어마어마한 핍박을 받고 있는 소식이 주변의 여러교회에 알려졌습니다. 이로인해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도 구원하신다라는것이 영광의 주제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구원과 간증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로 고립되거나 분리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6:2-4, 개역한글)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따로 주는 구제도 있습니다.
구제를 할때에 우리는 구제를 하고 그것을 사람에게 알리고 칭찬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칭찬받으려고 주변에 알린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노는 이래야 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봉사를 할수 있는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칭찬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를수 있습니까?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해놓고 네 자신이 잊어먹으라. 라는 것입니다.
내가 해놓고 내가 잊으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상해주십니다. 그런데 내가 해놓고 내가 기억하면 하나님께서 잊어먹으시는 것입니다.
곧, 다른사람이 모를 뿐 아니라 내 자신도 잊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원리는 이것입니다.
필요가 있는 형제를 보거든 계산하지 말고 주라는 것입니다.

구제가 아닌 헌금의 기본원리에 대해서 살피겠습니다.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16:1-2, 개역한글)

교회에 드리는 헌금은 정기적으로 하는것입니다. 
구제는 필요가 있을때 비규칙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이야기 할때 마음이 어려운 것은 헌금을 하면서 이것을 악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못 오해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필요하여 헌금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치 않으신 분입니다. 교회도 돈이 필요치 않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4:10-19, 개역한글)

빌립보 교회는 유럽 최초의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이 마게도냐에 처음으로 간곳이 빌립보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갖히고 간수가 구원받고 루디아가 구원받은 곳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른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떠날때에 빌립보 교회가 사도바울에게 헌금을 주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만이 한것입니다.

원칙을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와 데살로교회의 헌금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의 헌금만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기본적으로 자비량 했습니다. 스스로 일해서 돈을 번것입니다.
그러나 그 필요를 다 채울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헌금이 들어오면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로마의 교회에 갖히게 됩니다. 그 소식을 빌립보 교회가 알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헌금을 모아 사도바울에게 보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헌금을 받고 쓴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 내게는 모든것이 풍족한지라>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이 편지는 감사편지입니다.
그러나 내가 필요가 있었는데 물질을 채워줘서 고맙습니다. 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보내주지 않아도 나는 충분합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돈이 있다고 주님의 일이 잘되는것이 아니고 돈이 없다고 주님의 일이 안되는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헌금은 잘한것입니다. 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사도바울에게 유익이 된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잘한 빌립보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이나 받는 교회를 위해서 하는것이 아닙니다. 헌금하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순환과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8, 개역한글)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돌려주십니다.
이 축복의 순환과정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9:6, 개역한글)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더 많이 드릴수 있게 하나님께서 다시 주십니다.
이 순환과정에 들어가는 첫걸음이 헌금입니다.

또한 헌금은 희생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희생하지 않으면 헌금이 아닙니다.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삼하24:24-25, 개역한글)

헌금은 남아서 드리는것이 아니라 희생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막12:41-44, 개역한글)

주님께서 이 과부의 두렙돈을 가장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십니다. 왜인가요?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답해 주셨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액수냐가 중요한것이 아니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돈이 많으면 더 드릴수 있을텐데, 돈이 없어서 조금밖에 드리지 못하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6:10, 개역한글)

우리는 작은것을 드릴수밖에 없는 상태에서도 신실하게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났을때 주님께서 큰것을 드릴수 있게 하십니다.
작을때 잘드린 사람이 커도 잘드린 것입니다.

헌금을 신실하게 하지않으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부요를 맡기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16:11, 개역한글)

불의한 재물은 돈입니다. 참된것은 무엇입니까? 영원입니다.
헌금을 신실하게 하지 않으면 영적인것을 감당치 못합니다. 작은것에 신실하지 못한사람은 영적인것을 하지 못합니다.

헌금을 얼마나 할것이냐는 각자가 알아서 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7, 개역한글)

여섯번째 원리는 헌금을 하는 원리는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바나바가 밭을 팔아 성도들의 발앞에 놓은것은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는 오순절이 있은 후 였습니다. 각지에서 온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지 못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머무르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준비해온 돈은 다 떨어지게 됩니다.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에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팔고 사도들의 발앞에 내놓은 것입니다.
필요를 봐야 합니다. 필요를 따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해 주십시오"
예루살렘에 가뭄이 든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필요를 따라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금은 율법이 아닙니다.
헌금을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거나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사랑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또한 넉넉하게, 관대하게 하는것입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8:1-2, 개역한글)

이것이 마게도냐 교회의 간증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핍박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직장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극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한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그렇게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신것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분 스스로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이 어찌되든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을 지키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헌금할뿐아니라 비정기적으로도 필요를 따라 공급해야 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3, 개역한글)

우리가 했던 모든것들은 주님앞에 나타날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주님의 칭찬을 받을것입니다.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않고 주님의 인정을 받을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부어져 사랑과 선행이 넘치는 모임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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