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3일 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창세기5_문화 인도력>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16:1-6, 개역한글)
창세기 16장에서는 아주 비극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하갈을 취해 자녀를 낳을것을 권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대로 행했습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하갈이 낳은 아들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마엘이 현재의 아랍민족입니다.
그리고 훗날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는데 그 아들이 이삭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삭의 후손이 이스라엘입니다. 지금도 중동지역에서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비극적인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장이 창세기 16장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입니다. 물론 본인들은 몰랐습니다.
어떻게해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를 보고 그와같은 일들이 저희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한가지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 가운데 가정과 교회는 아담이 범죄하기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계획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범죄전에 배필을 주시고 결혼을 통해서 한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범죄후에 생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계획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생각하시고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세상 사는 날동안 영적인 유익을 누리기 위해서 만든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죄에 의해 물들었거나 죄로 말미암아 생각해 낸 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렇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을 살면서 하늘을 맛볼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입니다.
곧 가정과 교회입니다. 교회에 오면 하늘나라에서 100% 누릴수 있는 평안이 교회에 있습니다. 또 하나가 가정입니다.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은 은혜와 축복과 기쁨을 맛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의도했던 대로 이루어질때, 교회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계획을 우리가 순종하게 될때 교회와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어려움을 당할찌라도 집에 들어나가거 교회에 나가서 다시 싸울 힘을 얻는 곳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6장을 보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가정이 파괴됩니다. 원인은 두가지 입니다.
첫번째로 사라가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문화입니다. 항상 그 당시의 세상이 가진 문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화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인데도 불구하고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저희들도 조선시대가 멀지 않습니다. 2-3세대만 올라가면 가정에서 자녀가 없다거나, 아들이 없다면 그것은 칠거지악이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는 여자가 결혼하면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자식이 없습니다.
지금 저희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당시 사회를 사라에게는 굉장한 부담입니다. 왜 이렇게 했느냐고 비난하기에는 이 일은 그 당시에 엄청난 부담입니다.
결혼을 1-2년 한것이 아니고 20년이 되었는데, 나이는 들어가고 더이상 자녀를 낳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없다는것은 굉장한 중압감으로 오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라의 시대에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없을 경우에는 여자의 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자식을 낳으면 주인것으로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그 당시 사회의 문화의 압박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그 당시 사회의 관습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가정이 파괴됩니다.
가정은 말씀의 원리대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관습이 들어옵니다.
이것이 가정에 문제가 되는 첫번째 입니다.
두번째는 아브라함이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인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부일처제를 말합니다.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일부일처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들이 불순종 한것입니다. 그것은 잘 한것이 아닙니다.
사별을 제외하고서는 성경은 재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입니다. 그런데 그당시 문화에 의하면 그 원칙을 깨고 여자를 하나 더 두어서 아이를 낳을수 있다 했습니다. 그것에 굴복했습니다.
하나는 문화가 들어옵니다. 이것은 남편이 인도력을 발휘하지 않는것과 결합됩니다.
남편이 수동적입니다. 그냥 아내가 하자는대로 따라갑니다.
문화와 남편의 수동성이 문제를 야기 합니다.
성경은 가정의 머리가 남자라고 말합니다. 남자가 인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남자가 머리라고 하는것은 방향을 정하는것입니다.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라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사라가 머리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가정에 자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라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으로 풉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인도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이 두가지가 비극을 낳는 원입니다.
저희들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의 가정에 대한 문화적 압력은 이혼이 가능한 것입니다.
TV에 보면 이혼한 부부가 많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부부라도 서로 맞지 않으면 헤어지는것이 맞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아무리 싸워도 헤어지면 안됩니다.
이혼하면 꼴보기 싫은사람을 보지 않으니 좋고, 더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되니 좋아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혼으로 더 큰 고통 속으로 들어갑니다.
아무리 문제가 있어서 헤어질수 없습니다.
구원이 영원하듯이 한번 결혼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은 항상 음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요즘시대에 각종 미디어에서 이혼이 가능함을 이야기 할때 우리는 분명히 성경을 근거로 차단해 가야 합니다.
가정은 한번 결혼하면 어떤 경우라도 헤어질수 없습니다.
헤어지면 더 큰 비극을 낳습니다.
요즘 문화로는 가정이 중요하지 않고 직장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TV에 나온 여자들이 전부 직장에서 일합니다. 그래서 직장이 우선이고 가정이 두번째 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여자들에게 가정이 우선이고 두번째가 직장이라고 말합니다.
가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경우에 수동적이 되어가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가정에서 남자들이 수동적이 되어 갑니다.
남자들은 직장에 가서 돈을 벌어옵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문제를 아내에게 맡깁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문제라든지 전부를 아내에게 맡깁니다. 이것이 틀린 것입니다.
남편이 결정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이땅 가운데서 천국을 맛볼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남편이 가정의 머리로서 책임을 지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가 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 가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다시 한절 한절 사펴보겠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창16:1, 개역한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성경은 명백이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일부일처제를 말합니다.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종은 언제 생겼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을때 바로가 사라를 아내로 취하고 대신 선물로 준것 중에 여종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직접 준 선물입니다. 이 여자는 틀림없이 예뻣을 것입니다. 매력적인 여자일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씨앗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16:2, 개역한글)
이것이 그당시의 관습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해 보여도 그당시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화가 달라지면 이상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 2절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것을 내가 내 힘으로 얻어낸다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것은 내 힘으로 자녀를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으로 괴롭고 내가 그것으로 사회적으로 굉장한 압박을 받지만 내가 그것을 내 힘으로 해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딱하나 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꼐서 자녀를 안주시면, 하나님 아닌 다른곳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더욱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는데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꼐서 고난을 주시는 것은 그 고난을 내 힘으로 해결해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서 배우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라함은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아담과 하와를 생각나게 합니다. 아내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아담이 그냥 받아 먹습니다.
남자들이 수동적이고 여자들이 적극적입니다. 여기서 항상 비극이 생긴것입니다.
사라가 그런 제안을 했을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것이 옳은지 기도해 봅시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남자들이 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어떤 결정을 해야하는 책임이 들어오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 봐야 합니다.
사라에게 부담이 되는것은 사회적으로 자식이 없는 부담 이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글처럼 많을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부담가질 이유를 하나 더 보태자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자체가 부담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은 '많은 자식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를때마다, 손님이 왔을때 그의 이름을 듣고 자식이 몇명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자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라는 여러가지로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해결하는 방법도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목적이 옳다고 방법이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갈을 취하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4절부터 보시면 사라의 계획대로 상황이 진행됩니다.
하갈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방법을 쓰면 반드시 손해를 봅니다. 일시적으로는 자기 뜻이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여도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에게 손해가 됩니다.
하갈이 아이를 가기자 아이가 없는 사라를 무시합니다.
엇그제까지만 해도 그가 종이었는데 이제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5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아닙니다. 이것은 사라가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자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전가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책임지우는것은 옳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잘못했지만 책임은 남편이 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라의 말 자체는 옳은말은 아닙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창16:5, 개역한글)
하나님이 판단하시기를 원한다는 말의 뜻은, 사라 스스로 하나님은 내가 옳다고 할것입니다. 라고 한것입니다
하갈이 사라를 멸시하는 것은 아브라함 당신의 책임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말은 옳지는 않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자면 머리가 남편이기 때문에 받아야 할 말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또 틀린말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16:6, 개역한글)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이것도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수동적입니다. 가정 가운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일부일처제를 깨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내가 둘이면 반드시 경쟁 가운데 들어가고 그들 가운데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있을것입니다. 이것은 뻔한 것입니다.
이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복잡한 문제를 남편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복잡한 문제를 떠안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라에게 말합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것이 수동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최소한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남편들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그 당시 문화를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남에도 도입하는 것, 그다음 남편이 책임을 지고 결정해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 수동적이 되어버리는 것, 이 두가지가 결합되어 이 가정에 비극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희들 쪽으로 교훈을 받아보겠습니다.
역으로 저희들이 이루고 있는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두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 가정이 세상문화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를들면 거실 중앙에, 집에 가장 잘보이는 곳에 TV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TV를 보는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가장 중앙에 세상것이 있고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의 문제의 근본원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두번째, 가정 내에서 남편이 남편노릇을 하지않고 때문입니다.
영적인 책임을 지고 우리 가정의 영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아내가 하자는대로 합니다.
이 두부분을 바꿔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늘 주례 설때마다 '주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가정을 이루는 이유는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입니다.
나 혼자 섬기지 않고 함께 섬기도록 돕는배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목표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목표는 우리 식구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을 통해서 영혼들이 들어와 복음을 듣고 성도들이 우리 가정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우리 가정이 교회를 섬기도록 목표를 바꿔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가정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는 여러 원칙들을 배격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문제가 들어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당연히 세상문화가 뭐가 틀렸는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이 풍성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두번째, 가정에서는 남편이 인도력을 발휘하고 아내가 순종해야 합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2-25, 개역한글)
가정은 남편과 아내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교회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역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입니다.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5, 개역한글)
이것은 남편들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이 머리의 특징입니다.
머리는 물론 방향을 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머리의 근거는 희생에 있습니다.
남편이 왜 머리이고 존경받냐면, 그가 아내를 위해서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무릎을 꿇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은혜를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신뢰를 얻어 말씀에 따른 방향제시를 합니다.
이것이 가정 내에서 남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2, 개역한글)
그리고 아내는 교회가 주님께 순종하듯이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라고 하는것은 이해가 갈때만 하는것이 아닙니다. 납득이 가지 않을때, 동의가 되지 않을때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말하면 말도안되는 소리라 할찌라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도 안되는 내용을 다시 말씀에 근거해서 따지더라도 일단 순종해야 합니다.
이와같은 그림이 가정내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가정내에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되면 우리는 가정 내에서 천국을 맛볼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가정내에 세상 문화가 들어오고 질서가 파괴되면 여러가지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저희들이 쉬운길을 택하면 잠깐동안 평안하지만 오래도록 고통을 당할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말씀에 근거하여 세우면 처음엔 좀 어렵더라도 반드시 평안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창16:7-14, 개역한글)
두번째 사건을 보겠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들어가서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주인인 사라를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아브라함도 자기를 보호해주지않고 사라는 그녀를 학대했습니다.
하갈은 임신 중임에도 도망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곳에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부모님이 계신곳으로 가려 합니다.
그러나 가봐도 그 부모님들은 가난하거나 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라에게서 도망가려 합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요즘 용어로 말하면 사막을 건너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아이를 가진 여자가 먼길을 갑니다. 그리고 간다고해서 친정에서 자기를 환영할런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친정에 부담이 될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갈의 마음은 버림받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라도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고-사라가 자기를 아브라함에게 줄 때는 신뢰받는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도 자기가 그의 아기를 가졌으니 신뢰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아브라함도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한데 "당신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한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하갈은 이제 아브라함의 아내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보호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갈이 이 길을 가게 된것은 내가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고 하는 의식이 가장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물어보십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인생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는 질문은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하시는 것은 대답을 듣고자 함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예수님의 질문은 전부 우리로 하여금 그와같은 대답을 통해서 우리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무 사이에 숨어버렸을때 하나님께서 물어보십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 아십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아담에게 자기가 왜 숨었는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자기를 인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갈이 도망갈때 하나님은 그녀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고 있는일을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 그런데 왜 그렇게 하고 있느냐, 이 일에 네 책임은 없느냐> 하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두가지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나쁜소식이고 두번째는 좋은소식입니다.
나쁜 소식은 '사라에게 돌아가라'입니다.
좋은소식은 하갈에게 축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네 아들은 종이 아니다.'
어머니들의 입장에서는 제일 적정되는것이 자식입니다. 종이 자식을 낳아봐야 종입니다. 이것이 제일 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꼐서 약속하십니다. '네 아들은 종이 아니다. 들 나귀처럼 독립적으로 살것이다'
저희들에게 또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요구하는 것은 '학대하는 여주인 사라에게 돌아가 복종하라'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부분을 저희들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2:13, 개역한글)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벧전2:18, 개역한글)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3:1, 개역한글)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5:6-7, 개역한글)
신약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제도, 질서에 순종하라 입니다. 하갈은 사라의 종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졌다 할찌라도 그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제도가 부당하건-노예제도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주인이 까다로운 사람이라 할찌라도 순종하라 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잠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희들로치면 언제 반항을 하냐면, 저희들은 순종을 배우지 못합니다. 요즘시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문제는 잘 모릅니다만, 한미FTA가지고 대모를 합니다.
이것이 합법적인 권력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는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반대의견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모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순종을 배우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결정해도 다수의 국회의원이 결정해도 내가 싫으면 거부합니다.
이러한 문화가운데 어린아이들이 사춘기때 부모에게 순종을 배우지 않습니다.
또한 직장에서 상사가 까다로우면 사표쓰고 나와버립니다. 순종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했을때 사이가 나쁘면 헤어져 버립니다. 이것이 지금 현재의 문화입니다.
모임에 들어와서도 마음에 들지않는것이 있으면 모임을 옮겨버립니다.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하지 못하는 주요 이유는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있으면 순종을 통해서 성장해 나갑니다.
그런데 순종을 배우지 않으면 세월이 오래되도 성도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게 됩니다. 다 회피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정금처럼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갈에게 있는 문제입니다. 그녀는 도망가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 합니다. '도망가면 안됩니다'
그리고 하갈은 도망가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고난에서 도망갈수 있을찌라도 하나님에게서는 도망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닮을때까지 우리를 연단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을 회피한다고 되는것이 아닙니다.
직장을 옮겨도 모임을 옮겨도 마찮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도 내 뜻대로 되는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갈에게 있어서 첫번째 배워야 하는것은 '도망가지 말고 순종을 배워야 하는것' 입니다.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과케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염려하지 말고 잘 맡기고 그 가운데 성실하게 말씀을 따라 가면 하나님이 상황을 해결해 주십니다.
히나님이 다른 장소로 옮겨주십니다.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주시고 그 연단을 통해서 배운바를 다른 사람과 나눌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순종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더 어렵습니다. 만일 하갈이 사라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가 애굽으로 갔다고 치면 그가 행복할까요?
애굽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아무리 까다로워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곳이 영적으로 축복된 곳입니다.
모임에서 누군가 속상하게 한다고 세상으로 가버립니다. 그런다고 세상 사람들이 잘 대해주나요? 아닙니다. 성도들이 조금 모난것이 있어도 그래도 성도들이 낫습니다.
그래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른 것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받았다고 세상으로 가는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속담처럼, 후라이팬에서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더 어렵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창16:12, 개역한글)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을 축복하시고 특별히 하갈이 걱정했던 문제를 약속해 주십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들나귀는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입니다. 아무도 그를 길들이지 못할것입니다.
그는 인생을 살것입니다. 그래서 아랍민족이 독립적입니다. 영향을 받지않고 자기 주관을 따라서 행동하는 특징을 가진 민족들이 됩니다.
그래서 하갈에게 자기아들의 미래 운명에 대해서, 걱정에 대해서 그는 독립적인 생애를 살것이며 그들의 후손은 그렇게 살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해 주십니다.
그때 13절에 보시면 하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어떻게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도망가는 자신을 돌보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뵈었는가 이것이 하갈의 고백입니다.
나같은 사람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사람들은 다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약속하시고 나를 위해서 방향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감격입니다.
지옥에 가 마땅한 나를, 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인생을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말씀해 주시고 축복하시고 약속해 주시는 그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그와같은 고통을 없애주시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설명해주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중에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고난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갈을 통해서 순종을 배웁니다.
까다로운 사람이라 할찌라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라 할찌라도 돌아가라.
그렇게 하면 고난속이라도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고 그 고난이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될것입니다.
지금은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전능한 손길안에 겸손하게 염려하지말고 맡기면 주님이 선한길로 변화시키십니다.
이 약속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가정에 있어서 주의할 사항, 그리고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여러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극복해가야 하는가, 그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는것을 배울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마찮가지입니다.
교회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요.
교회도 이세상 문화가 들어오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가지고 질서를 가지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지켜질때 주님의 향기를 드러낼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가운데 이일을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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