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일 목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창세기4_하나님의 약속 >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1-6, 개역한글)
창세기 15장에서는 두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하십니다. 그 구조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방패요 상급이다>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질문 합니다. 여기 최초로 아브라함의 질문이 나옵니다.
"하나님 저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엘리에셀이 저의 상속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답변하십니다. '안된다.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상속자다.'
하나님이 이삭이 태어나야 할것을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후손이 별처럼 될것이다;
이 말씀을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이 구조를 살피고자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고 아브라함은 질문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삶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과 나의 삶의 경험이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래서 질문하면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설명하시는 것이 그 내용입닌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개역한글)
<두려워 말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두려워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이 두려워 했을까요, 우리는 14장 사건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는 국제적인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의 승전국, 4개의 연합국을 아브라함은 치고 롯을 구출해 왔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 연합군이 자기를 공격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 하나 상급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은 소돔왕의 제안을 거절 했습니다.
소돔왕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에 있는 모든제물을 가지라고 제안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세상이 주는것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 주는것으로 살겠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실제로 아브라함의 삶에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재물을 받았어야 하는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어려움은 없었을텐데 라는 후회 비슷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지켜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방패라는 것은 그 당시의 대표적인 방어무기 입니다.
그리고 상급은, '내가 너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자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저희들의 생애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항상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두려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두려움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보호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찮가지 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에 근거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여러가지 부족함과 두려움이 생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것으로 안전장치를 삼지 않고 하나님이 내 안전장치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무엇이 두려움이 될까요?
첫째로 그는 갈대야에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데 갈 바를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떠나기로 하였지만 가는곳이 어디인지, 가는곳은 좋은가 라는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 항상 있습니다.
저희들도 마찮가지 입니다. 저희들도 세상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아첨하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잘 살려고 치사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지만 막상 우리의 믿음의 삶이 안전하거나 평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위험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늘 어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가나안 땅에 오니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게 주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창12:6-7, 개역한글)
'세겜' '모레'라는 지역을 지도를 통해서 보면 이 지역은 가나안 땅의 한 중심지 입니다.
거기를 아브라함이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 땅을 주실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땅에는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습니다. 이미 다른사람들이 그 땅의 주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하신 것입니다.
이에대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빈 땅, 황무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이라고 주신다면 주인삼아 살면 될텐데 가나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삽니다. 그는 계속 장막을 치며 움직입니다. 그는 대신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봅니다. 그의 믿음이 거기까지 갑니다.
하여간,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과 삶의 요소를 불안하게 하는 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 더 보시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왔을때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그가 또 두려워 합니다.
애굽왕 바로가 자기 아내 사라를 취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합니다. 그 두려움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하는 잘못으로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할수밖에 없는 스타일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나쁜점이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불안과 초조가 생길때에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하는 방법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듦으로, 두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함으로 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내야 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개역한글)
하나님이 방패시고 상급이시라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드려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를 보호할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존재가 있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방패이십니다.
성도님들이 여러번 기도 가운데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고아의 특징은 자기 힘으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려면 우리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 두신 목적을 우리가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지,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를 이땅에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때 아무도 아브라함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때까지 아브라함은 안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건들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25-33, 개역한글)
여기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존재를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첫번째가 공중의 새 입니다.공중의 새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먹을것과 관련됩니다.
두번째는 입을 것과 관련된 것이 들에 핀 백합, 꽃 입니다. 곧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꽃, 들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보호하십니다.
이것을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새 이상으로, 들의 백합화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돌보심으로 33절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였을 때 내 인생에서는, 오늘 나의 삶에서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고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 방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것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 상급이라고 하는 것을 보시겠습니다.
상급이라는것은 여름 수양회 때 말씀 드렸습니다만, 상은 첫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보호받는 인생을 살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즐거움과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는것은 하나님을 아는것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즐거운것이 많이 있습니다. tv를 보는 것도 즐겁고 우리의 취미 생활도 즐겁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 하는것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은 하나님에 있고 교회에 있고 영적인 것에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이 땅에 즐거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말 즐거움은 영적인 것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깨달을때 즐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세밀하게 돌보시는가를 알았을때의 만족, 이런것들이 우리를 채워져야 합니다.
왜 이런것들이 우리를 채워져야 하냐면, 우리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갈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할수 있는 능력을 지금 이 땅에서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보고 말씀과 기도 속에서 만족을 느껴야 합니다.
이 땅이 주는 어떤 즐거움보다 비교할수 없는 즐거움이 여기 있다, 성경과 기도에 있다는것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의 여러가지 불안한 것을 안정감 있게 해낼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다 어려움이 생기면 세상으로 가버리기도 합니다. 왜 그러하냐면 주님 안에서 모임 안에서 그 생활이 가장 즐겁다는 것을 확보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것을 저희들이 주님앞에서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창15:2-3,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내가 상이고 방패라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브라함은 '아 그러시군요'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브라함이 질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왜 저에게는 애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하나님께 여러가지를 받아도 후손이 없으니 엘리에셀에게 넘기는 것이 어떨까요?"
2,3절에 있는 아브라함의 발언은 믿음의 발언이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 저희들이 적용해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말씀하신것이 우리 생애에 신속히 이루어지면 이런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내가 방패다> 라는 것이 우리 생애에 신속하게 이루어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빨리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창세기 12장을 보면 그가 75세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살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이 10년 후 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온지 10년 후입니다. 10년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도 없었지만 가나안에 온 이후 10년 동안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와같은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타협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겠다는 약속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후서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니 무슨 말인가? 하늘을 보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화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대답합니다.
주님은 하루가 천년같으신 분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길다해도 주님의 시간은 아닙니다. 이것이 베드로후서의 설명입니다.
두번째로, 아브라함의 경우에 주님께서 분명히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였는데 10년간 자식이 생기지 않자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10년동안 주님께서 자식을 안주시니, 꼭 자식이 있어야 합니까? 여기 입양한 자식과 같은 엘리에셀이 있습니다.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축소시킵니다. 이것을 약간 변형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이며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성품과 인격적으로 변화될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나서는 주님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주님의 선택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구원받은지 꽤 되었는데 여전히 성격이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오래참지 못하고 성품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회의 합니다.
"나는 하늘나라 가서야 변화되고 이 땅에서는 이 성격을 고치지 못할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꼭 인격이 달라져야 하는가? 일을 열심히 하면 되지" 라고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재 확인 하기 시작합니다.
<안된다 아들은 네 몸에서 나야 한다>
우리에게 적용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표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격이 아니라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에이 그건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나 하는 것이고 나는 천국 가는 것으로 족하고 이땅에서 주님 욕을 먹지 않게 하는 것으로 괜찮다" 라고 목표를 낮추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할 때 주신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감당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믿음을 분명하게 확정시키기 위해서 하늘의 별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별을 세 보아라."
지금 저희들은 우주나 천체를 관찰하기도 하고, 이 우주가 얼마나 넓고 많은 별이 있는지를 압니다.
별들의 숫자는 셀수 없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기간동안 사람들은 별을 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안으로만 확인하니 보이는 별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별을 보여주신 이유는 이것입니다.
항상 믿음은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눈에 보이는 별을 다 만들었다. 내가 별을 만든 하나님이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네가 보기에는 까마득하게 멀리있고 아주 높아 보인다 할찌라도 다 내가 만든것이다. 내가 창조주이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 내가 너의 몸에서 자식 하나를 만들지 못하겠느냐 그리고 그 자식을 통해서 수많은 자손, 별의 숫자만큼, 별을 만드신 하나님이 후손을 만들지 못하겠느냐?'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는지 알지는 못해도 별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본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8:3-4, 개역한글)
이것이 밤하늘의 별을보고 다윗이 쓴 시입니다.
그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고 자연의 위대함, 광대함 앞에 놀랍니다.
그 달과 별을 볼때,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느낍니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작고 별 볼일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기이하게도 인간입니다.
자연에게 하나님이 신경을 쓰시는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그 놀라운 지혜를 알리시며 우리와 복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증거해 줍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감사로 이 시편을 마감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고 그는 이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있고, 그 능력을 나에게 쓸것이며 그러므로 그 말씀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들을 보고 점성술을 표현해 내거나 별들의 움직임이 사람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자연을 이해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 10년간의 세월로 믿음이 약화되거나 변형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7절부터 또 한번 반복됩니다.
이번에는 아마 그 다음날 밤이 아닌가 싶습니다.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창15:7-21, 개역한글)
그다음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이 어떤존재인지를 아브라함에게 알리십니다.
<내가 너를 갈대아에서 가나안으로 데려왔다. 가나안에 데려온 이유는 가나안이 너와 네 자손이 차지 할 땅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아까처럼 말씀하실때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한것이 아니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그 말씀을 확신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은 어마어마한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역사상 차지해본적이 없는 땅입니다.
보면 <애굽강에서> 곧 나일강에서 유브라데스강까지 그 사이 지역은 전부 아브라함의 후손의 땅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솔로몬 시대에서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진행되기 전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유목민입니다. 그는 장막을 치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자기 후손이 그 넓은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방금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국가간의 경쟁은 심합니다. 국가가 생겼다가도 망해버립니다.
정복당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국가의 부침을 경험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한 가족뿐인 아브라함에게 이 어마어마한 땅을 한 국가를 이루어서 거기서 살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것을 확신할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언덕이 있고 강이 흐르고 어마어마한 넓이의 땅입니다. 그곳을 우리 자손이 차지한다니, 그리고 그 나라를 다른 나라가 공격하지도 못하고 국가가 멸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잘 상상이 안갑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확신을 주십니다.
확신 주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내가 인류 역사의 주인이다."
아까는 "내가 창조주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몸에서 당연히 자식을 내어줄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며 주님의 뜻대로 끌고 가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도 좋습니다.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나는 아모리 족속에게도 관심이 있다. 나는 아모리 족속의 하나님이다. 나는 지금 너를 사랑하듯 아모리 족속을 사랑한다. 그러나 지금 아모리 족속이 죄를 범하고 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400년간 기다릴 것이다. 한 족속의 운명을 내가 결정한다"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애굽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민족도 통치한다. 너의 후손이 그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할 것이다. 그리고 애굽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교만하여 져서 이스라엘을 징취할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애굽을 오랬동안 기다려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 그 교만이 극에 달하면 내가 애굽을 징계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 열재앙을 내리셔서 애굽이 거의 망해버립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합니다. 그리고 출애굽 할때에 애굽에서 큰 재물을 끌고 나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을 짖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을 너희에게 준다고 하는것은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통치가 필요합니다.
단순하게 이브라함의 후손이 수가 많아져서 이 땅을 차지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민족들을 그냥 확 쫓아내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민족들을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회개하길 기다리시고... 그런데 그 죄와 교만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의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볼수없는 수준까지 오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이런 많은 민족들과 여러 지역들을 통치하는 하나님 이십니다.
인류역사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주실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땅은 언제 실제로 일어나냐면 천년왕국때에 일어납니다.
그렇게 저희들이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문자적으로 실현됩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고 문자적으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와같은 설명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 약속 가운데 두가지를 저희가 보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에는 고통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430년의 세월이 있어야 합니다.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곧, 하나님의 약속은 고통이 있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통은, 이 약속을 의지하며 갈때 우리가 항상 하나님만 붙들도록,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실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붙들도록 고통이 들어갑니다.
그 다음, 시간이 걸리는 것은 항상 빨리 얻으면 금방 잊어먹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야 잊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임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게 될때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역사를 주관하심을 나타낼때에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는 다 알수 없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15:12, 개역한글)
여기서 <캄캄함>은 다 알수없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다 파악할수 없고 위대한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생들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다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작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섰을때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 입니다.
그는 이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제물을 가지고 하실때 두가지가 나타납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15:17, 개역한글)
이스라엘의 경우는 구름기둥으로 나타납니다. 그다음 횃불, 불기둥입니다.
구름기둥은 어둡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이해보다 더 크신 하나님입니다.
불 기둥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뜻하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두가지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을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여기 계신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로 치면 만찬입니다.
떡과 잔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것을 물질로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 약속가운데 나타납니다.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에게 이와같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 시대의 이 장소에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이유는, 갈대아에서 불러낸 이유는 가나안을 업을 삼기 위해서 입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죄 용서가 다가 아닙니다.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가 은혜로 구원받았은 즉 무엇을 할까요?"
그리고 그 답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평안과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의 교훈입니다.
말씀을 마쳐보겠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는 아브라함은 공적인 삶을 삽니다. 소돔왕이 나오고 네개의 국가가 나오고 아브라함은 활동적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둘만 나옵니다.
다시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활동을 하는데는 바쁩니다.
창세기 14장은 잘 아는데 창세기 15장을 잘 못할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 앞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내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과 내 삶이 모순이 될때 그 모순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자식을 준다 하시고 왜 없습니까?"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다 했는데 왜 제 삶에는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그런 복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내가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것이 많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이 모순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왜 기도가 응답이 안되나요? 왜 시간이 걸리나요? 왜 고통이 약속 가운데 들어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씨름해야 합니다.
두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외적으로 활동할때가 있고 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할때가 있습니다.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눅1:18-20, 개역한글)
이 부분은 침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분향을 드리는데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침례요한의 출생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눅1:18, 개역한글)
천사는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가 태어날때까지 그를 벙어리로 만듭니다.
마리아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1:34-35, 개역한글)
마리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사가랴보다 마리아는 불가능한 말씀을 받습니다.
그랬을때 마리아의 대답은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수 있겠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천사가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가랴의 경우는 "내가 나이가 늙었는데 어찌 아이가 생기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것은 불신입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경우는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습니까?" 이것은 불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이 두개의 말이 비슷해 보입니다.
똑같은 수준의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중심이 다릅니다. 사가랴는 의심의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의심이 아니고 알고 싶어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어떻게 이런일이 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의심해서가 아니라 더 알고 싶어서 확신을 갖고 싶어서 상식과 다르기 때문에, 내 경험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설명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도 불신으로 하나님께 질문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비로소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다른곳에서, 그전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아브라함은 아무소리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최초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5장에서 의인이다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들 의심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어떻게 나에게 축복이 될것인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언제요? 하나님 앞에서 둘이서만,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겉으로의 활동도 필요하지만 이 시간을 확보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성경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 뜻을 알게하여 주십시오. 이 뜻이 영적인 확신이 되게하여 주십시오." 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향하여 갖고 계신 놀라운 계획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후손과 땅 정도지만 저희들에게는 영원이 있고 또 주님 오심이 있고 더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저희가 확신하고 그 확신에 근거해서 하루를 살려면 이 확신이 저희에게 분명하게 세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저희들이 주님앞에서 개인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이 그렇게 할때, 저희들의 생애를 통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이 모든것들을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큰 경외심으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확신이 저희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다른사람들에게 영적인 축복이 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우셔서 이 일을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창세기4_하나님의 약속 >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1-6, 개역한글)
창세기 15장에서는 두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하십니다. 그 구조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방패요 상급이다>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질문 합니다. 여기 최초로 아브라함의 질문이 나옵니다.
"하나님 저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엘리에셀이 저의 상속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답변하십니다. '안된다.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상속자다.'
하나님이 이삭이 태어나야 할것을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후손이 별처럼 될것이다;
이 말씀을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이 구조를 살피고자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고 아브라함은 질문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삶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과 나의 삶의 경험이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래서 질문하면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설명하시는 것이 그 내용입닌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개역한글)
<두려워 말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두려워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이 두려워 했을까요, 우리는 14장 사건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는 국제적인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의 승전국, 4개의 연합국을 아브라함은 치고 롯을 구출해 왔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 연합군이 자기를 공격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 하나 상급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은 소돔왕의 제안을 거절 했습니다.
소돔왕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에 있는 모든제물을 가지라고 제안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세상이 주는것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 주는것으로 살겠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실제로 아브라함의 삶에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재물을 받았어야 하는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어려움은 없었을텐데 라는 후회 비슷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지켜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방패라는 것은 그 당시의 대표적인 방어무기 입니다.
그리고 상급은, '내가 너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자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저희들의 생애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항상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두려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두려움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보호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찮가지 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에 근거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여러가지 부족함과 두려움이 생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것으로 안전장치를 삼지 않고 하나님이 내 안전장치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무엇이 두려움이 될까요?
첫째로 그는 갈대야에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데 갈 바를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떠나기로 하였지만 가는곳이 어디인지, 가는곳은 좋은가 라는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 항상 있습니다.
저희들도 마찮가지 입니다. 저희들도 세상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아첨하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잘 살려고 치사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지만 막상 우리의 믿음의 삶이 안전하거나 평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위험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늘 어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가나안 땅에 오니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게 주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창12:6-7, 개역한글)
'세겜' '모레'라는 지역을 지도를 통해서 보면 이 지역은 가나안 땅의 한 중심지 입니다.
거기를 아브라함이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 땅을 주실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땅에는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습니다. 이미 다른사람들이 그 땅의 주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하신 것입니다.
이에대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빈 땅, 황무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이라고 주신다면 주인삼아 살면 될텐데 가나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삽니다. 그는 계속 장막을 치며 움직입니다. 그는 대신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봅니다. 그의 믿음이 거기까지 갑니다.
하여간,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과 삶의 요소를 불안하게 하는 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 더 보시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왔을때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그가 또 두려워 합니다.
애굽왕 바로가 자기 아내 사라를 취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합니다. 그 두려움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하는 잘못으로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할수밖에 없는 스타일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나쁜점이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불안과 초조가 생길때에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하는 방법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듦으로, 두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함으로 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내야 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개역한글)
하나님이 방패시고 상급이시라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드려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를 보호할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존재가 있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방패이십니다.
성도님들이 여러번 기도 가운데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고아의 특징은 자기 힘으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려면 우리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 두신 목적을 우리가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지,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를 이땅에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때 아무도 아브라함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때까지 아브라함은 안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건들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25-33, 개역한글)
여기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존재를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첫번째가 공중의 새 입니다.공중의 새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먹을것과 관련됩니다.
두번째는 입을 것과 관련된 것이 들에 핀 백합, 꽃 입니다. 곧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꽃, 들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보호하십니다.
이것을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새 이상으로, 들의 백합화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돌보심으로 33절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였을 때 내 인생에서는, 오늘 나의 삶에서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고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 방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것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 상급이라고 하는 것을 보시겠습니다.
상급이라는것은 여름 수양회 때 말씀 드렸습니다만, 상은 첫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보호받는 인생을 살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즐거움과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는것은 하나님을 아는것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즐거운것이 많이 있습니다. tv를 보는 것도 즐겁고 우리의 취미 생활도 즐겁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 하는것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은 하나님에 있고 교회에 있고 영적인 것에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이 땅에 즐거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말 즐거움은 영적인 것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깨달을때 즐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세밀하게 돌보시는가를 알았을때의 만족, 이런것들이 우리를 채워져야 합니다.
왜 이런것들이 우리를 채워져야 하냐면, 우리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갈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할수 있는 능력을 지금 이 땅에서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보고 말씀과 기도 속에서 만족을 느껴야 합니다.
이 땅이 주는 어떤 즐거움보다 비교할수 없는 즐거움이 여기 있다, 성경과 기도에 있다는것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의 여러가지 불안한 것을 안정감 있게 해낼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다 어려움이 생기면 세상으로 가버리기도 합니다. 왜 그러하냐면 주님 안에서 모임 안에서 그 생활이 가장 즐겁다는 것을 확보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것을 저희들이 주님앞에서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창15:2-3,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내가 상이고 방패라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브라함은 '아 그러시군요'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브라함이 질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왜 저에게는 애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하나님께 여러가지를 받아도 후손이 없으니 엘리에셀에게 넘기는 것이 어떨까요?"
2,3절에 있는 아브라함의 발언은 믿음의 발언이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 저희들이 적용해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말씀하신것이 우리 생애에 신속히 이루어지면 이런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내가 방패다> 라는 것이 우리 생애에 신속하게 이루어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빨리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창세기 12장을 보면 그가 75세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살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이 10년 후 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온지 10년 후입니다. 10년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도 없었지만 가나안에 온 이후 10년 동안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와같은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타협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겠다는 약속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후서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니 무슨 말인가? 하늘을 보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화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대답합니다.
주님은 하루가 천년같으신 분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길다해도 주님의 시간은 아닙니다. 이것이 베드로후서의 설명입니다.
두번째로, 아브라함의 경우에 주님께서 분명히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였는데 10년간 자식이 생기지 않자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10년동안 주님께서 자식을 안주시니, 꼭 자식이 있어야 합니까? 여기 입양한 자식과 같은 엘리에셀이 있습니다.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축소시킵니다. 이것을 약간 변형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이며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성품과 인격적으로 변화될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나서는 주님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주님의 선택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구원받은지 꽤 되었는데 여전히 성격이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오래참지 못하고 성품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회의 합니다.
"나는 하늘나라 가서야 변화되고 이 땅에서는 이 성격을 고치지 못할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꼭 인격이 달라져야 하는가? 일을 열심히 하면 되지" 라고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재 확인 하기 시작합니다.
<안된다 아들은 네 몸에서 나야 한다>
우리에게 적용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표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격이 아니라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에이 그건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나 하는 것이고 나는 천국 가는 것으로 족하고 이땅에서 주님 욕을 먹지 않게 하는 것으로 괜찮다" 라고 목표를 낮추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할 때 주신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감당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믿음을 분명하게 확정시키기 위해서 하늘의 별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별을 세 보아라."
지금 저희들은 우주나 천체를 관찰하기도 하고, 이 우주가 얼마나 넓고 많은 별이 있는지를 압니다.
별들의 숫자는 셀수 없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기간동안 사람들은 별을 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안으로만 확인하니 보이는 별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별을 보여주신 이유는 이것입니다.
항상 믿음은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눈에 보이는 별을 다 만들었다. 내가 별을 만든 하나님이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네가 보기에는 까마득하게 멀리있고 아주 높아 보인다 할찌라도 다 내가 만든것이다. 내가 창조주이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 내가 너의 몸에서 자식 하나를 만들지 못하겠느냐 그리고 그 자식을 통해서 수많은 자손, 별의 숫자만큼, 별을 만드신 하나님이 후손을 만들지 못하겠느냐?'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는지 알지는 못해도 별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본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8:3-4, 개역한글)
이것이 밤하늘의 별을보고 다윗이 쓴 시입니다.
그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고 자연의 위대함, 광대함 앞에 놀랍니다.
그 달과 별을 볼때,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느낍니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작고 별 볼일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기이하게도 인간입니다.
자연에게 하나님이 신경을 쓰시는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그 놀라운 지혜를 알리시며 우리와 복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증거해 줍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감사로 이 시편을 마감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고 그는 이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있고, 그 능력을 나에게 쓸것이며 그러므로 그 말씀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들을 보고 점성술을 표현해 내거나 별들의 움직임이 사람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자연을 이해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 10년간의 세월로 믿음이 약화되거나 변형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7절부터 또 한번 반복됩니다.
이번에는 아마 그 다음날 밤이 아닌가 싶습니다.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창15:7-21, 개역한글)
그다음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이 어떤존재인지를 아브라함에게 알리십니다.
<내가 너를 갈대아에서 가나안으로 데려왔다. 가나안에 데려온 이유는 가나안이 너와 네 자손이 차지 할 땅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아까처럼 말씀하실때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한것이 아니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그 말씀을 확신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은 어마어마한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역사상 차지해본적이 없는 땅입니다.
보면 <애굽강에서> 곧 나일강에서 유브라데스강까지 그 사이 지역은 전부 아브라함의 후손의 땅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솔로몬 시대에서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진행되기 전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유목민입니다. 그는 장막을 치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자기 후손이 그 넓은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방금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국가간의 경쟁은 심합니다. 국가가 생겼다가도 망해버립니다.
정복당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국가의 부침을 경험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한 가족뿐인 아브라함에게 이 어마어마한 땅을 한 국가를 이루어서 거기서 살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것을 확신할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언덕이 있고 강이 흐르고 어마어마한 넓이의 땅입니다. 그곳을 우리 자손이 차지한다니, 그리고 그 나라를 다른 나라가 공격하지도 못하고 국가가 멸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잘 상상이 안갑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확신을 주십니다.
확신 주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내가 인류 역사의 주인이다."
아까는 "내가 창조주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몸에서 당연히 자식을 내어줄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며 주님의 뜻대로 끌고 가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도 좋습니다.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나는 아모리 족속에게도 관심이 있다. 나는 아모리 족속의 하나님이다. 나는 지금 너를 사랑하듯 아모리 족속을 사랑한다. 그러나 지금 아모리 족속이 죄를 범하고 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400년간 기다릴 것이다. 한 족속의 운명을 내가 결정한다"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애굽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민족도 통치한다. 너의 후손이 그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할 것이다. 그리고 애굽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교만하여 져서 이스라엘을 징취할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애굽을 오랬동안 기다려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 그 교만이 극에 달하면 내가 애굽을 징계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 열재앙을 내리셔서 애굽이 거의 망해버립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합니다. 그리고 출애굽 할때에 애굽에서 큰 재물을 끌고 나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을 짖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을 너희에게 준다고 하는것은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통치가 필요합니다.
단순하게 이브라함의 후손이 수가 많아져서 이 땅을 차지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민족들을 그냥 확 쫓아내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민족들을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회개하길 기다리시고... 그런데 그 죄와 교만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의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볼수없는 수준까지 오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이런 많은 민족들과 여러 지역들을 통치하는 하나님 이십니다.
인류역사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주실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땅은 언제 실제로 일어나냐면 천년왕국때에 일어납니다.
그렇게 저희들이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문자적으로 실현됩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고 문자적으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와같은 설명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 약속 가운데 두가지를 저희가 보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에는 고통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430년의 세월이 있어야 합니다.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곧, 하나님의 약속은 고통이 있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통은, 이 약속을 의지하며 갈때 우리가 항상 하나님만 붙들도록,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실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붙들도록 고통이 들어갑니다.
그 다음, 시간이 걸리는 것은 항상 빨리 얻으면 금방 잊어먹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야 잊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임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게 될때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역사를 주관하심을 나타낼때에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는 다 알수 없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15:12, 개역한글)
여기서 <캄캄함>은 다 알수없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다 파악할수 없고 위대한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생들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다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작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섰을때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 입니다.
그는 이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제물을 가지고 하실때 두가지가 나타납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15:17, 개역한글)
이스라엘의 경우는 구름기둥으로 나타납니다. 그다음 횃불, 불기둥입니다.
구름기둥은 어둡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이해보다 더 크신 하나님입니다.
불 기둥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뜻하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두가지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을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여기 계신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로 치면 만찬입니다.
떡과 잔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것을 물질로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 약속가운데 나타납니다.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에게 이와같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 시대의 이 장소에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이유는, 갈대아에서 불러낸 이유는 가나안을 업을 삼기 위해서 입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죄 용서가 다가 아닙니다.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가 은혜로 구원받았은 즉 무엇을 할까요?"
그리고 그 답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평안과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의 교훈입니다.
말씀을 마쳐보겠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는 아브라함은 공적인 삶을 삽니다. 소돔왕이 나오고 네개의 국가가 나오고 아브라함은 활동적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둘만 나옵니다.
다시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활동을 하는데는 바쁩니다.
창세기 14장은 잘 아는데 창세기 15장을 잘 못할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 앞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내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과 내 삶이 모순이 될때 그 모순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자식을 준다 하시고 왜 없습니까?"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다 했는데 왜 제 삶에는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그런 복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내가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것이 많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이 모순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왜 기도가 응답이 안되나요? 왜 시간이 걸리나요? 왜 고통이 약속 가운데 들어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씨름해야 합니다.
두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외적으로 활동할때가 있고 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할때가 있습니다.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눅1:18-20, 개역한글)
이 부분은 침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분향을 드리는데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침례요한의 출생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눅1:18, 개역한글)
천사는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가 태어날때까지 그를 벙어리로 만듭니다.
마리아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1:34-35, 개역한글)
마리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사가랴보다 마리아는 불가능한 말씀을 받습니다.
그랬을때 마리아의 대답은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수 있겠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천사가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가랴의 경우는 "내가 나이가 늙었는데 어찌 아이가 생기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것은 불신입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경우는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습니까?" 이것은 불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이 두개의 말이 비슷해 보입니다.
똑같은 수준의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중심이 다릅니다. 사가랴는 의심의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의심이 아니고 알고 싶어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어떻게 이런일이 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의심해서가 아니라 더 알고 싶어서 확신을 갖고 싶어서 상식과 다르기 때문에, 내 경험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설명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도 불신으로 하나님께 질문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비로소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다른곳에서, 그전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아브라함은 아무소리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최초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5장에서 의인이다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들 의심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어떻게 나에게 축복이 될것인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언제요? 하나님 앞에서 둘이서만,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겉으로의 활동도 필요하지만 이 시간을 확보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성경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 뜻을 알게하여 주십시오. 이 뜻이 영적인 확신이 되게하여 주십시오." 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향하여 갖고 계신 놀라운 계획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후손과 땅 정도지만 저희들에게는 영원이 있고 또 주님 오심이 있고 더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저희가 확신하고 그 확신에 근거해서 하루를 살려면 이 확신이 저희에게 분명하게 세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저희들이 주님앞에서 개인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이 그렇게 할때, 저희들의 생애를 통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이 모든것들을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큰 경외심으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확신이 저희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다른사람들에게 영적인 축복이 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우셔서 이 일을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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