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9일 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창세기3_롯의 구출 >
1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2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과 싸우니라
(창14:1-2, 개역한글)
12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22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창14:12-24, 개역한글)
창세기 14장은 13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줄을 다신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저희는 롯과 아브라함이 헤어진 장면을 볼수 있었습니다.
이제 14장에서 그 선택의 결과를 말합니다. 롯은 포로가 되고 아브라함은 롯을 구출해 냅니다.
13장에서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가 14장의 첫번째 의미 입니다.
롯은 소돔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무감각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포로가 되고 맙니다.
이제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승전국과 전쟁할 담대한 용기를 갖습니다.
두번째, 저희들이 받을 교훈은 죄에 빠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형제를 구하는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저희 모임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저희 모임안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받고 있는 형제가 있다면 그것이 커다란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하더라도 구하러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교훈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세계 최초로 전쟁이 나오고 왕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국제적인 전쟁입니다.
바벨론의 국가들과 가나안 땅의 국가들의 전쟁입니다. 바벨론 국가들 밑에서 12년간 순종하며 살았던 가나안 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바벨론에서 애굽으로 가는 무역로를 차지하고자 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롯에게 영향을 미치고 아브라함에게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겉으로 보면 몇개의 나라간의 전쟁이 있었고 소돔이 이 전쟁에 참여하고 소돔에 살고 있던 롯도 포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전쟁이 일어나서 그런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롯에게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소돔을 가지 말았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헤어지지 말았어야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롯에게 영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전쟁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여러가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 있는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1-5, 개역한글)
여기보면 그 당시에 끔직한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빌라도라고 하는 그 당시 로마 총독이 일으킨 재앙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사람들의 피를 그 제물에 섞는일이 나왔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한가지만 보겠습니다.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의도치 않았지만 정치 권력에 의해서 부당하게 죽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연재해 입니다. 실로암의 높은 건축물이 갑자기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18명이 죽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인 사건이건 자연적인 사건이 일어 납니다.
저희들도 최근에 일본에서 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들도 일어나고 정치적으로 어떤 사건들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첫번째로 잘못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특별한 죄인은 아닙니다.
그사람들이 재수가 없거나 아니면 더한 죄인이라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사용해서 특별한 죄인들을 징계하신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고를 갑자기 당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일본에 지진이 나면 일본이 우상숭배를 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그런일이 생겼다라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어떻게 해석하셨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이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재앙을 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우리는 위험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같은 재앙은 사실 작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경고하시는 것은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재앙이라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몸을 죽이지만,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채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으로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것과는 비교할수 없는 재앙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회적인 재앙이 있을수 있고 아니면 개인적인 사고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러한 사고가 일어난 것은 어쩌다가 운이 없어서, 혹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닌 일반적인 하나님의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롯의 경우는 자기가 원치 않았는데도 소돔국가가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왕들이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소돔성의 사람들과 마찮가지로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롯이 14장에서 어떻게 소돔성에 오게 되었는지 그 영적인 선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순서가 단계적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13:11, 개역한글)
롯이 처음부터 소돔을 택한것이 아닙니다. 요단을 택했습니다.
그가 요단을 선택한 것은 거기에 풀들이 있고 거기에 물들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축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물과 풀이 많은곳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13:12, 개역한글)
<그 장막을 '옮겨'>
우리나라 성경으로는 '옮겨'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것은 영어성경으로는 '그 장막으로 소돔을 향하여 쳤더라' 입니다.
롯은 이제 장막을 소돔쪽을 향해 칩니다.
처음부터 소돔성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요단을 선택하고 거기에 장막을 칩니다.
두번째는 소돔쪽을 향하고 소돔을 향하여 장막을 칩니다.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창14:12, 개역한글)
이제 롯은 소돔에 거합니다.
성도들이 죄에 빠지거나 세상에 빠지는것은 단번에 하지 않습니다.
혹, 행동이 한번에 나왔을찌라도 그 마음속에 이미 그와같은 현상들과 징조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과정이 있을때 그 과정 중에서 막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소돔에서 거했다는 것은 롯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너를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이것을 롯이 기억해야 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다.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와같은 약속을 주시고 계십니다. 롯이 정말로 축복을 얻고자 한다면 아브라함과 같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롯이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떠나고 아브라함과 상관없이 살면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지 못할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이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롯이 소돔을 가게 된 중요한 원인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돔에 재앙을 일으키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의 선택이 잘못되 있다. 다시 돌아오라. 다시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라. 은혜와 축복속에 머무르라"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볼때 롯이 요단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자기 직업을 위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경제적인 이유를 위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열심이 양들을 기르고 소돔성에 들어가 양들을 팔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순간에 적의 손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가 이제까지 추구한 모든것이 순식간에 허사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포로라는 것은, 그 당시 전쟁의 잔인함을 생각해 볼때, 전쟁 포로는 죽은 목숨입니다.
그의 재산은 완전히 적군의 것이며 그의 아내와 딸들은 누군가의 하사품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는 망하는 것입니다. 끔찍한 결과 입니다. 이 커다란 재앙 앞에 섰을때 롯은 생각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특별히 어떠한 행동을 지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의 방향 삶의 목표를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브라함이 다 구출해 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재산과 사람들을 해방해서 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앞에 소돔왕이 마중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재안합니다. "소돔의 모든 재산은 아브라함 당신 가지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은 나에게 주십시오."
이것은 아브라함의 권리 입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쫓아가서 모든것을 되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 제안을 들었을때 롯은 놀라야 합니다.
롯은 자기 가정의 재산 정도를 가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재산은 적들의 손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소돔 성 전체의 재산이 전부 아브라함에게 제안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원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으리라 입니다. 그런데 자기목숨을 버리는자는 얻으리라 입니다.
자기 재산을 추가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간 아브라함은 한 성을의 재물을 얻을수 있는 제안을 받았고 자기 재산을 추구한 롯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롯은 이 제안을 들었을때 놀라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깨닳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소돔왕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롯은 이 결과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결국이 어떤것인지, 그 영광스러운 것이 어떤지 배워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은 아브라함에게 한마디도 감사의 말이 없습니다.
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적혀 있지않습니다.
그리고 롯은 소돔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롯은 영적인 교훈을 자기의 삶에서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감각해져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부분이 조금 약할수 있기 때문에 강조하겠습니다.
사람의 선택은 중요합니다.
롯이 어느쪽이 선택하는가는 중요합니다. 물과 풀이 부족하여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할찌라도 함께 있을것인가, 이 문제를 하나님께 풀어달라고 기도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가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고 소돔을 향하고 그리고 소돔안으로 들어가는가 하는 선택을 할수 있었습니다.
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7-8, 개역한글)
무엇을 심겠습니까? 심는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를 걷습니다. 이것은 썩어질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심는자는 세상의 것을 걷습니다. 이것은 지나가 버릴것이고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위하여 투자하는 자는 영적인 것을 거둘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한것을 심으면서 영적인 결과를 원해서는 안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영적인 사람이 될수 없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는 사람이 될수 없습니다.
무엇이 심느냐에 따라 그에 걸맞는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것이 없이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이 원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리는 심는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원리를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저희들이 롯의 경우에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원리를 보겠습니다.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창14:13-15, 개역한글)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듣고 롯을 구하려고 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롯을 구하지 않아도 될 변명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롯이 자기 스스로 소돔에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아브라함은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해 망해간다 할찌라도 아브라함에게는 롯을 구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외냐하면 조카이기 때문입니다.
롯의 잘못으로 온 결과이지만 아브라함은 롯을 두고볼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두번째, 아브라함은 롯을 잘 알았기 때문에 금방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데 내가 왜 도와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징계하셔도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한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내가 그를 도울수 없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사람은 318명 뿐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를 318명 가지고 이길수 없습니다. 겨우 그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이길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수 있냐면 나중에 멜기세댁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20, 개역한글)
이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전쟁을 말할때 - 이것은 세상의 전쟁과는 다릅니다-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할때 사람의 숫자에 달리지 않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십시오.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소년이 키가 크고 완전무장을 하고 어릴적부터 군인이 되기 위해 훈련받은 사람과 싸워서 이길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물맷돌 한개로 그를 이깁 니다. 이것을 통해서 계속 말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전쟁은 사람의 숫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개인적인 삶에서나 지역모임에 적용해야 합니다.
지역모임은 사람 숫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의 수가 많은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을 보내주시면 그 수가 많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교회의 기준은 아닙니다. 숫자가 많으면 좋고 강한 교회고 적으면 약한교회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을 가지고 전쟁을 합니다.
사사기서에 보면 300명을 가지고 싸웠던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숫자를 줄여서 300명으로 싸웠습니다. 그것이 기드온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사람들의 숫자를 가지고 이겼다고 생각할까봐 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300명의 사람을 데리고 간것은 자기의 힘을 믿어서 간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윗의 한 것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400명을 가지고 전쟁을 합니다.
9 이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육백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는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렀으되
10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사백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삼상30:9-10, 개역한글)
다윗이 블레셋에 있었을때 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 할때 다윗이 거기에 참여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이 전쟁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 땅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가족들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전부 포로로 끌려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롯과 똑같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에 있음으로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이 400명을 가지고 쫓아갑니다. 그리고 잃었던 사람을 다 찾아 옵니다.
이런 예들을 보면 저희들이 우리가 가진것이 작다 할찌라도, 우리의 힘은 미약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케 할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할수 있는가 입니다.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그와같은 삶을 산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하는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이 어려움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그는 아비본토 친척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그곳이 고향이며 자기에게 익숙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는 이민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외국에 이민가는 문들이 있습니다만, 이민 1세대는 매우 힘든 삶을 삽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좋은 직업도 얻기 힘듭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은 땅과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자기 아내 사라는 계속해서 아이를 갖지 못합니다.
그는 이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장 소망을 두었을 것은 롯일수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조카였기에 그가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는 후계자가 되었으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겠습니까?
롯이 좀 영적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롯을 구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전쟁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땅에서의 삶이 평안하고 안정되기만 한것이 아닙니다.
원치 않지만 이땅의 문제에 개입되어야 하고 이 땅의 재앙에 포함되고 하고싶지 않은 일이지만 해야 하는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해야하는 일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는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빠진 형제를 도우려면 그는 영적인 삶을 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알수 있냐면 13절에서 그는 '히브리'사람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뜻은 '강을 건너왔다'라는 뜻입니다. 곧 이민자라는 뜻이요, 이 당 거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땅에 살지만 그 땅과는 달리 구분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므레'는-헤브론-은 교제하는 곳이었습니다.
힘있게, 기름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서 있어야만 세상에 빠져 고통당하는 형제를 도울수 있습니다.
두번째, 318인은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한 삶을 연습하고 있어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삶에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부터 보고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형제님들이 운전을 할때 보면 먼저 기도를 했습니다.
"안전하게 가게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형식을 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떤일이 있을때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 바로 대답이 나오면 좋겠지만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고 기다려야 합니다.
저희들의 뜻과 육신적으로 결정했을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는 자세가 저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고 그의 인격이 되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그의 형제들을 도울수 있습니다.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창14:15, 개역한글)
세번째, 지혜가 필요합니다.
보통 가신을 나누는 것은 무기에 따라 나눕니다. 칼을 가진자는 근접공격을 하고 긴 창을 가진 사람은 멀리서 공격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눠야만 전쟁을 합리적으로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승리에 취해서 잔치하고 있는 밤에 공격합니다. 이와같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희들이 잠시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저희들이 갈수록 개인주의적인 삶을 삽니다. 남의 일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간섭하는것이 오히려 불편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삽니다. 물론 이것이 필요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백하게 어려움에 빠져있는 형제를 그냥 놔둘수 없습니다.
지역모임 가운데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1-2, 개역한글)
제 성경에는 이 '짐'에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혹 무거운 짐을'
무거운 짐을 서로지는 것입니다.
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갈6:3-5, 개역한글)
이 말씀만 가지고서는 무슨 말인지가 애매합니다.
이렇게 설명 드려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갈5:25, 개역한글)
<행할찌니>
행하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행하다는 것은 걷는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걷습니다. 우리는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걷는 사람입니다.
'행하다'라는것이 무슨일을 하는것이 아니고 '행'이 한문입니다. 걷는 것입니다.
믿의 삶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동행하다가, 6장 1절에 보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혼자 걷는것이 아니고 짐을지고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짐이 너무 무거우면, 행군을 하다가 뒤의 행군장비가 너무 무거우면 넘어지게 됩니다.
범죄하다는것이 길을 가다가 쓰러저나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을 바로 잡고는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장 1절을 넘어진 사람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6장2절은 짐을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 짐을 지고는 걷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짐을 서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역모임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성도님들이 다 말씀을 따라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죄 때문에(나쁜 습관 때문에,연약함 때문에) 넘어져 버립니다.
그렇게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자기 죄 때문에 넘어진건데 뭐." 하고 놔두면 안되고 일으켜 줘야 합니다.
그리고 일으키면 그의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함께 짐을 지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입니까?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13:34-35, 개역한글)
새로운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갈6:3, 개역한글)
'이건 내가 할일이 아니야. 내가 뭐 그런것까지 하는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갈6:4, 개역한글)
<각각 자기일을 살피라>
이와같이 다른 형제의 짐을 지는일을 교회에서 각각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의 짐을 질것입니다. 이 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상을 받지 못할것입니다.
다른 형제의 짐을 지어주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하는데 우리 죄를 대신해서 지고가신 주님앞에서 칭찬과 영광을 받지 못할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6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지역모임 가운데 저희가 연약합니다만, 피차 격려해야 하는것은 어떤 형제가 죄 때문에, 연약함 때문에, 나쁜 습관 때문에 넘어지면 우리가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고 그 짐을 져 줄수 있어야 합니다.
짐을 져 준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해 주고 그 형제에게 계속 검사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형제가 나쁜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른되신 형제님께서 그의 삶에 오늘은 어떻게 살았는지 혹은 일주일을 어떻게 살았는지 전화해줘, 혹은 메일을 보내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역모임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다시 창세기 14장으로 가시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승리한 후에 두사람이 찾아옵니다.
하나는 소돔왕이고 하나는 멜기세댁입니다. 사실 승리한 후가 가장 어렵습니다.
오히려 연약할때의 시험보다 승리한 후의 교만의 시험이 더 어렵습니다.
승리했을때 17절에 소돔왕이 나오고 18절에 멜기세댁이라는 살렘왕이 나옵니다.
그런데 순서로 보면 소돔왕이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소돔왕이 이야기 하기전에 멜기세댁이 가운데 낍니다.
아브라함을 겸손케 하기 위해서 입니다.
20절에 보면 그는 이 승리가 하나님께서 주신것을 분명히 합니다.
승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그래서 소돔왕이 말할때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창14:22, 개역한글)
그는 멜기세댁이 제시한 하나님의 이름을 댑니다.
그리고 물건은 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광을 취할수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도 믿음의 사람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만 영광을 얻으셔야 합니다. 그 일을 멜기세댁이 해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잘 살았을때가 위험합니다.
그것이 마치 내 믿음이 좋은 것처럼,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은 왜 그리 믿음이 없느냐고 비난하지 않고 나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넘어진 형제들을 도와야 합니다.
창세기 14장은 연약한 형제를 돕기 입니다.
돕지 않아도 될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도와줬지만 롯은 결국 소돔성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우리가 잘 도와줬지만 그렇다 할찌라도 돕는다는 것이 창세기 14장에 나온 아브라함의 행동입니다.
이와같은 섬김이 저희들의 지역모임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이 롯을 돕기위해서 그에게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용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이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그는 힘을 내어서 전쟁에 개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인 것을 알고 그 승리로 인해서 어떤것도, 실 한오리기 조차도 그가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돌리며 또 그는 겸손할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담대함과 겸손이 둘다, 저희에게 필요합니다.
또하나 알아야 하는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평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듯이 항상 문제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가지 복잡한 일이 삶에서 생길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요,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문제를 해결해 내는 것이 우리 인생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여러가지 삶을 통해서 주시는 것을,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한 안목이 저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우셔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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