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7월 일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교회진리 >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개역한글)
디모데전서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내용은 하나님의 지역모임 입니다. 하나님의 지역모임에서 어떻게 행동할지가 주된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받는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 있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딤전1:3, 개역한글)
디모데전서의 주제가 지역모임에서의 행동입니다.그 주제를 1장부터 설명합니다.
첫번째, 다른교훈을 가르치지 말라 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정확하게 가르쳐져야 합니다. 다른교훈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은 이미 바른교훈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딤전1:10, 개역한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님이 내려 오시고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교회의 시작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사도들이 가르칩니다. 주님은 교회가 시작되기전에 열두사도를 불러 미리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시작되자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다시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가르친것을 다른 충성된 자에게 가르치라 그가 다른사람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을 배우고 후대에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이어져야 합니다.
곧 주님께서 오실때까지 진리가 이어지는 기능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른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교회가 에베소 교회이기 때문에 사도행전 19장으로 가시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보겠습니다.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19:1-7,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을 합니다. 1차 전도여행은 주로 갈라디아 지역을 다닙니다. 그후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집니다. 갈라디아는 도시 이름이 아니라 넓은 지역명 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 같은 도 명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는 이고니안 루스드라 비시디아 안디옥 등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래서 한 지역교회에 서신이 아니라 여러 지역교회의 순회 서신입니다.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유럽으로 복음이 넘어갑니다. 그 지역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 아테네 고린도 등입니다.
3차 전도여행의 코스는 물론 1-2차 지역을 둘러 돌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에베소 교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3년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가장 짧게 있었던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눈 그곳에 3주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이 고린도입니다. 그는 거기서 1년 6개월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가장 오래 말씀을 전했던 곳은 에베소 입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제국은 네개입니다. 그 중 로마는 유럽과 애굽과 아시아를 점령 합니다.
로마는 자기들이 점령한 아시아 지역을 아시아라고 이름 붙었습니다. 진짜 아시아에 있는 우리로 치면 이 지역은 터키지역입니다. 그리고 그 아시아 지역의 수도가 에베소 입니다.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이 아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유럽으로 가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에서 아시아에서 전도를 하자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운 사람이 에바브라입니다. 그가 골로세 교회를 세웁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밖으로 나가지 않지만 그 전체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 주변의 아시아의 일곱교회가 그때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사도바울 후에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이 거기 머물고 아볼로고가 그 부부를 통해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다시 옵니다.
그리고 함께 동역한 사람이 디모데 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사람 두기고를 사도바울이 에베소로 보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사도 요한이 오랫동안 에베소에서 일하다가 밧모섬으로 유배됩 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전한것은 교리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움직일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온 제자, 그리스도인, 성도는 믿는자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교회가 형성된 에베소에 와서 믿는자라고 하는 열두명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도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청주중부 이성희 형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적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데 정말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서만 찾아볼수 있는 특징들이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그 분명한 차이가 드러났지만 요즘에는 구원받았다고 하고서 구원받지 않은것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본 그들은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께서 그안에 들어오면 그가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 감탄하게 됩니다.
성령을 모시고 성령을 따라 살게 되면 그사람이 영적인 말을 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은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성령이라는 단어도 알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침례요한이 성령이라는 말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마3:11, 개역한글)
"나는 그분께서 성령으로 침례를 주신다는 예고편이다" 라고 침례요한이 이미 말했습니다.
그리고 침례요한은 분명히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님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성령을 듣지 못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물론 영광스러우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고난을 받기전과는 다른 영광을 이제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새롭게 도덕적으로 획득한 영광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1. 첫번째로 주님께서 이땅에 계시지 않다는것이고 2. 두번째로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른다는것은 오순절에 교회가 시작되었다는것을 모르고 성령께서 오셨다는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제 침례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구원받고 침례를 받지 않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당연히 침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에베소의 그들은 침례요한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성경에서 침례를 두번받은 사례가 유일하게 나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사도바울은 그들이 회개의 침례를 받은것을 압니다.그들은 회개한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에서 확정된 복음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회개와 주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회개만 하고 믿음이 없는분이 없고 믿기만 하고 회개한 분이 없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람이 무슨 죄인인가 생각하는 사람은 죄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고, 하나님이 계신것을 알고도 이론적으로만 알고 마치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를 성경이 말하는 견해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면,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신것을 하나님의 평가가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부르고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갈때 사람들에게는 죄의식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파분들이 새벽에 모여 언행심사간에 행한 죄를 생각해 내면서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회개는 두가지 입니다.
나의 행동을 회개할 뿐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본질 자체가 죄인으므로 저는 본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겨울에 사과나무 잎이 다 떨어 아무것도 없어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죄의 횅동들을 낱낱히 열거하면서 회개할뿐 아니라 나무 자체가 바뀌져야 함을, 외부로 부터 새 생명이 들어와 말씀으로 거듭나야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후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믿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만 하고 주님의 속죄의 사실을 믿지 않았을 때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바울의 복음을 통해 믿었습니다.
반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없으면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회개만 하는분들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믿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죄를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기준을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미워만 했어도 이미 살인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모든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서야함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8가지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자들의 백보좌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자들이 서는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믿고나면 더이상 심판이 없다는 말은 백보좌의 심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기준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서지 않고 그냥 살수 있는가 하는 회개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회개와 믿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에서 교회적으로 확보된 것입니다.
저희들이 회개를 빼고 믿음을 전하면 안됩니다
회개와 믿음은 물론 함께 가는것입니다. 복음을 전할때 이 두가지 크면이 분명하게 경험되고 간증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6, 개역한글)
안수했을때 성령께서 임했습니다.
성령은 믿으면 즉각 임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넬료입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복음을 다 마치기도 전에 성령이 고넬료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에게 성령을 임했으니 내가 침례를 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침례를 주어버립니다.
나중에 이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을 때 장로들 앞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의 일을 막으리오>
고넬료의 경우로 우리는 믿음으로 즉시 성령이 임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께서 임하시고 사마리아의 경우에 안수로 성령께서 임함을 봅니다.
이런 경우를 보겠습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임하는것을 우리는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권위를 세우는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을때 다들 구원받았지만 성령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안수했을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사이가 매우 나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때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어찌 라마리아 여인인 내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사도요한은 이렇게 줄을 달았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음이라>
그러나 교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교회안에 들어오면 유대인과 이방인인 것은 상관 없게 됩니다.
저는 한국인으로써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형제가 우리 모임에 오면 주님안에서 맞이할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이 문제는 다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갔을때 사마리아에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사마리아 교회도 유대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도 사도바울의 안수를 받을때 성령이 임합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이부분을 분명히 하는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9:17, 개역한글)
아나니야는 다메섹 성도입니다.
그리고 다네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러 온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도바울에게 안수하기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아나니아가 안수했을때 성령을 받은것이 아닙니다. 그 안수는 바울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합니다.
왜 주님께서 아나니아의 안수로써 사도바울을 성령충만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이 두사람의 사이가 나쁘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사는 성도였고 바울은 그 다메섹에 사는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이것을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제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굴복하고 그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충만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안수는 권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안수를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받으면 1. 첫째로 성령이 임하십니다. 2. 둘째로 모든 구원받은 성도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다른성도를 돕고 그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 하도록 돕고 교회를 세우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은사는 여러가지 입니다만, 어떤 형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어떤 은사를 받았건, 모든 성도가 사용할수 있는 은사는 최소한 네 개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사용할수 있는 은사 첫번째는 돕는 은사 입니다. 두번째는 섬기는 은사, 세번째는 긍휼의 은사 입니다."
그 말씀에 저의 마음이 합해졌습니다.
사라진 은사에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방언은 저절로 그칩니다. 교회가 시작될때 기적적인 몇가지 은사가 나타납니다만, 이는 저절로 그칩니다. 이 기적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시대의 모든 부분에 기적이 분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적은 전환기에만 나옵니다. 예를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에만 기적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세웁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 타락하면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책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왕들에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요구할 때 또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셨을 때, 하나님의 책망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줄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게 하십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하나님의 종으로써 이스라엘과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또 기적은 구약으로 신약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집중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고 기적은 없어입니다.
그리고 다시 7년 대환란때에 기적은 나올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기적들이 나오지만 기적은 항상 전환기에만 나옵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적은 성경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방언은 초기에 저절로 그칩니다. 예언은 온전한것이오면 강제로 폐해집니다.
성경이 완성되면 예언은 더이상 없습니다.
예언은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는 것입니다.
방언은 믿지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곧 방언은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냈을 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외국어를 하는사람을 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를 하면서 외국말(방언)로 그들을 압제하며 책망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을 믿지않는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표지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는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때는 성령이 임한것을 하나님이 사람의 눈에 보이게 방언을 통해서 표현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조용히 오시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사도행전 2장에서 있고 사마리아에서 있고 여기에도(사도행전 19장) 있습니다.
이 방언을 통해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같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모든 지역교회가 서로 교제하도록 국제적으로 일치시키게 하십니다.
두번째 예언은 1.위로 2.권면 3.덕을 세웁니다.
고린도전서14장에 예언의 은사가 행해집니다. 오늘날로 치면 말씀입니다. 말씀은 위로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로 사는사람을 위로하는것이 말씀의 역할 입니다.
두번째가 권면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시하여 말씀의 원칙대로 살게 하는것입니다.
세번째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받아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면 교회(덕)가 세워 집니다. 이것의 예언의 세가지 하는 일입니다.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행19:8-9, 개역한글)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공식적으로 복음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회당을 떠나 두난노 서원에서 2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합니다.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19:10,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소 '왜 회개만 하고 믿음이 없는가, 왜 안수를 하는가'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가르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루 5~6시간씩 몇 시간동안 2년간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행19:11, 개역한글)
이제부터는 성경을 읽지않고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일을 하기위해 앞치마를 착용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치마를 사람들이 가져다가 병든자에게 놓으면 그것이 고쳐졌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베드로가 지나가는 도로에 병든 자를 놓아두고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을까 했습니다.
이부분은 우리가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들에게는, 자기에게 그러한 기적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 모든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에게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 능력은 사도나 바울에게 능력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게만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만 그 능력을 원하는대로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전부 한사건에 목표가 있습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지기만 하여도 병이 나을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몰래 다가가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자 그 혈루의 근원이 말랐습니다. 병이 나은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은후에 몰래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혈루병은 부정한 병이기에 사람과 접촉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예수님의 것 옷가를 만진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내몸에 손을 대었는가?"라고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이 "주여 사람들이 에워싸서 서로 미나이다"하자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몸에 능력이 나갔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들을 둘러 보십니다. 여인은 매우 난처하게 됬습니다.
결국 여인이 떨며 나와서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딸아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베드로의 그림자, 사도바울의 앞치마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옷을 만졌을때 병나은 그 사람을, 전부 가르키는 것입니다.
표적은 전부 가리키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로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을때, 우리가 알아야 하는것은 성령께서 일하시면 사단이 모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낼때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믿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제가 귀신들린 사람을 직접 본적이 없습니다만, 우리는 귀신들인 사람에게 직접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라고 할수 없습니다.
이 권한은 사도에게만 주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명해서 귀신이 나가지 않으면 주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도에게만 주신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사용하셔서 에베소 교회에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썼지만 주변 이방신들과 같이 능력이 있는 신의 이름을 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것이며 주님의 이름을 주문으로 쓴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이런일이 벌어집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라는 신전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곳이 소위관광 명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신전을 보았습니다. 이 신전은 그 고대시대의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일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웅장한 신전입니다.
그 당시 기술로 어떻게 만들수 있었을까 하는 신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전 모형을 만들고 팔아 엄청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읗 들었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믿는사람들이 많아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로 인해 데모가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은 또, 드로아에서 새벽까지 오래도록 말씀을 전한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다가 졸던 유두고가 창문으로 떨어져 죽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죽은 유두고를 살려냅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곳에는 체포와 결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때에는 유두고를 살린 사람이 체포와 결박을 두려워 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적과 능력으로 체포와 결박에서 얼마든지 벗어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일에 기적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말릴때에 사도바울은 "걱정마십시오. 내가 기적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유두고도 살렸던 사람인데요?"라고 하지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죽을것도 각오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는데 그 기적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에베소에서 확립한 교리입니다.
다시 이전에 이야기하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는사람들이 많아짐으로 자기들의 업에 위협을 느낀 아데미 신전에서 신상을 만들던 사람들이 화가 나서 데모합니다.
일반적으로 누구든지 자기가 신성히 여기는 것이 공격을 받으면 반발하고 그것을 보호하려 합니다. 저희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아데비 신전을 보호하려는 은장색들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려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은장색들의 경우 자기들이 섬기던 아데미 신에 위협이 된다 여기자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공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는 방법이 그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닯았기에 하나님의 방법을 씁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이성적이지 않고 본능적이며 감정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교회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방언을 하고 어지럽고 시끄럽게 하면 되면 이방인들이 와서 이것을 보고 그들을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우상들을 섬기는 곳에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갑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무슨일을 당할지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다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떠나 간 후에 에베소 교회에 이리들이 들어오고 자기들을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사람이 일어날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리들을 내어 쫓고 조금이라도 잘못된 말을 하는 사람이 생기면 바로 출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스스로 본을 보이며 보호방법을 보입니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20:31-32, 개역한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호할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고급한 것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데미 신전은 그것이 얼마나 저급하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어마나 저급한지 알게 해줍니다.
이렇득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연을 숭배하면 그 사람의 격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배해야할 대상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데 어찌 저급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거 은장색들의 소란으류 아데미에서 두시간동안 대모가 일어나니 에베소 시장이 나와 이들을 진정시킵니다.
그리고 사건의 경위를 묻습니다.
"그들이 아데미 신전을 모독했는가?" "그들이 아데미 신전의 물건을 도적질 하였는가?"
그러나 어느것도 에베소 교회는 행치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상을 모독하지 않습니다.
우상이 거짓임을 전파하지만 대놓고 우상이 있는것에서 우상을 훼방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산에 오를때 돌을 쌓아놓은 미신돌탑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것을 종종 상도님들이 부수고 가는일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성경적인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집에서 모신 신상을 부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우상신전에 가서 우상신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역사를 발전시켜 옵니다.
문명이 발전되어져 오면서 인류는 점점 인도적인 규칙을 세웁니다. 예를들면 전쟁을 할때 민간인을 건드리지 않고 화학무기를 쓰지 않는 인간다운 문명이 있습니다.
막나가는 방향은 옳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믿음과 회개 회개와 믿음, 기적에 대한 해석을 말씀 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은 드로비모가 병들었을때 그를 밀레도에 두고 갑니다.
유두고를 살린 그가 그 병을 못고칩니다. 또 디모데도 자주 병이 났지만 그의 병을 못고칩니다.
"자주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좀 쓰라"고 말할 뿐입니다.
또한 빌립보에서 에바브라 디도가 사도바울을 섬기러 와서 병들었지만 못고치고 그저 기도합니다.
우리는 고난이 반드시 제거되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속에서 주님께 기도할수 있고 주님의영광을 드러낼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은 꼭 피해야 하고 없애버려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실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교리, 기적에 관한 교리, 교회가 세상의 우상들을 어떻게 대할까에 대한 원칙이 세워집니다.
유대교는 당시의 지존 종교입니다. 그럼 유대교와 이제 막 시작되 교회 중 누가 승리하겠습니까? 교회가 이깁니다.
또한 아데미 신전과 교회가 싸었을때 복음이 이깁니다.
복음과 세상권력이 싸웠을 때 복음이 이깁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사도바울이 체포되어 로마의 작은 셋집에 들어갑니다.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행28:30-31, 개역한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복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승리의 대열에, 영광스러운 대열에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저희를 도우셔서 저희들이 주님안에서 합당하게 모임을 이룰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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