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정형모 형제님(요약)

< 디모데전서 강해 2 >

박이레 2022. 7. 9. 21:07

2015년 10월 25일 일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디모데전서 강해 2 >

 

이어지는 집회에 여러지역에서 나오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9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1:1-20, 개역한글)

 

주님께서 이 말씀에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어제 저희는 디모데전서가 쓰여지게 될때의 여러가지 상황과 배경에 대해서 살피었습니다.
디모데전서를 보게 될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에베소 교회의 집합적인 간증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쓴것을 볼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을 생각할때 이 시대의 지역교회를 우리주님께서 피로 사시고 성도들을 이땅에 성도들을 두시고 세우신것에 어떠한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계신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게서 사랑하신것을 나도 사랑하는것, 주님께서 기대하고 계신것에 나도 같은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전1:1,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구 하나님'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  이분들의 명령을 따라 사도바울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사도가 된 위대한 부르심을 생각할때 1.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신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구세주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인류를 생각하시고 구원하시는 계획을 세우셨고 아들을 이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사 고난을 당하시고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자리에 있을수 없습니다.

 

< 우리의 소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

 

성경은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평화되신 예수님, 화평되신 예수님.

 

골로새서 3장에서는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1장에서는 그분께서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주님께서는 과거에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다 완성하시고 우리의 화평이 되셨습니다.
현재 우리 주님은께서는 생명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미래에는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사도바울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권위가 아닙니다.

 

이제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 큰 염려를 가지고 디모데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온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16장에서 디모데를 만난것을 어제 알았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주님을 믿고 섬기고 그 주변의 모임에서 칭찬받는 자였습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의 단순한 동역자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안에서 참 아들된 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따듯하고 충성된 마음과 사도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커다란 본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자에게 이와같은 아들들이 있다는것은 인도자에게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이와같은 아름다운 관계를 생각할때에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과 고집을 가지고 주님을 섬긴다면 이와같은 동역은 결코 제대로 나타날수 없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많은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훗날 후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본이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딤전1:2, 개역한글)

 

여기서 사도바울은 '긍휼'을 추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은혜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가운데서 주님의 은혜를 잘 느끼지 못할때는 우리는 잘 살아간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많은경우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단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연장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이 사실을 마음속에 깊이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매순간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생명적인 유기적인 관계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긍휼, 긍휼이라는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가지 실패의 가능성과 필요가 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은혜라는것은 원래 받을수 없는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과  모든권세는 우리에게 합당치 않은 것인데 받았습니다.
긍휼은 마땅히 받아야할 영벌과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을 받지 않은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기댈때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수 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불완전한 평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비견될수 없습니다.

 

사도바울 대신에 에베소에서 디모데가 해야할 일을 위해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와 평과과 긍휼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3-11절까지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1:3-4, 개역한글)

 

사도는 이제 디모데에게 경계하게 합니다. 경계한다는것은 군사용어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격하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가진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위대한 집합적인 간증이라는것은 하나님께서 모임을 바라볼때에 소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주후 57년에 3차전도여행 끝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고별강론을 한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강론중에 사도바울은 "내가 떠나면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 양들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자기를 쫓게 하는 이들이 일어나서 양들을 해칠것이다"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전파되고 가르쳐진다는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것은 이 말씀이 가르쳐 질때도, 가르쳐지지 않을때도 더욱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없이 지역교회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드러낼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흉악한 이리가 교회에 들어와서 양들을 해칠것이라고 했습니다.
양들을 해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을 해치는 것입니다. 말씀을 흐트러트리면 지역교회가 빛날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어떤 사람들에 관해서는 1장에서 적어도 세번 나옵니다.(3절, 6절 19절)
이들은 바로 후매네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당시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일에 사도바울은 대단한 경계령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모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미해지는것만으로도 우리는 경계령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얻고 흥황하는 것을 우리는 소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시키고 다른이야기가 전파되는것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는 이 일에 대해서 대단히 중대하게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는 유대교안에 있는 거짓교사들이 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자기의 생각을 주입하고 무언가 스토리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말그대로 여기에 나온대로'신화'이며' 끝없는 족보' 입니다.

 

마태복음은 22장을 보면 많은사람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무언가 많은 변론을 합니다.

 

'형제가 일곱 있었는데 맡형이 결혼해서 아내와 살다 죽었다 7번째까지 그러하다가 그 여인도 죽었다 부활때에 그 여인의 남편은누가 되겠는가?'

 

이러한 이야기를 그들은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이야기를 가져왔고, 실편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런이야기로 변론한 것입니다.

 

< 신화와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니라 >

 

이와같은 일이 이미 교회안에 들어와 있다면 이것을 저지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얻고 건전하게 바꾼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너에게 있을지어다' 이것은 그저 상투적인 인사가 아닙니다.

 

다른교리와 신화와 족보를 이야기할때 나오게 되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할때 나올수 있는것은 변론밖에 없습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1:4, 개역한글)

 

이것은 경건한 덕세움을 있는 일보다 논쟁과 변론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경건하게 가르쳐질때에 성도들은 기쁨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것을 원치 않기 떄문에 변론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변론을 하느라 인간이 시간을 낭비하게 하게하려함입니다.
거짓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것들을 달고 주석을 달고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교 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얼마나 많은 이야기것들을 만들어 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빠질때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맙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딤전1:5, 개역한글)

 

경계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곧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으로 나는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자는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활동의 중심축입니다. 이 마음이 청결하게 될때에 우리의 영적인 결단이 바로서게 될것입니다.
또한 선한 양심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효과적으로 섬기게 합니다. 우리로 빛을보게하며 주님안에서 경주하게 만드며 승리할수 있게 합니다. 선한양심은 우리로 주님을 증거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밝아지게 합니다.

 

양심의 뜻은 밝히 알다라는 뜻입니다. 양심은 우리의 모든행동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양심을 우리는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 양심은 이것은 좋은것인지 아닌지 알고 있습니다.

 

< 거짓없는 믿음 >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선한양심은 도덕적인 것입니다. 영적인것과 도덕적인것은 함께 가야 합니다.

 

양심이 바르지 못하면 그것처럼 해악이 없습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가운데 도덕적으로 행하고 있는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다른교훈과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로 인해 많은 에베소 안의 성도들이 해악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는 디모데에게 경계했습니다. 
경계의 목적은 변론이 아닌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위 세가지로부터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딤전1:6, 개역한글)

 

벗어났다는것은 정로에서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에게는 하나님에서 시작되는 목표가 없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아예 화살을 겨냥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공적으로 선포될때의 중요성을 성도들 각 개인이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는 자세를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이와같은 자세를 가진 모임에는 사단이 틈 탈수 없습니다.

 

< 헛된말에 빠져 > 쓸데없는 말을 하면 부딧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1:7, 개역한글)

 

거짓교사들은 스스로 선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율법을 읽고 율법의 목적을 깨닫고 바로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자체는 선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횅하는 중요한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는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다른일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율법의 기능을 이야기 합니다.

 

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9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딤전1:8-9, 개역한글)

 

10절까지 죄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10계명중 4개는 하나님을 향한계명, 6개는 인간을 향한 계명입니다.
9절 거의 끝까지가 인간에 관한 규칙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불법한자, 복종치 아니하는자 경건치 아니한 자 죄인> 이와같은 사람들을 율법은 정죄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교사들은 이 율법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율법의 선생이라 하나 자기가 말하는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말하는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무의미한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무의미한 일을 하는 교사들을 중단케하고 디모데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선포되게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딤전1:11, 개역한글)

 

이 교훈, 이 바른교운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죄인인것을 알게 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정죄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기업을 얻을수 있게 합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맏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지켜야 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1:12, 개역한글)

 

12절부터 17절까지는 사도바울의 마음속에서 솟는 감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까지는 거짓교사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12절부터는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어떠한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1:13, 개역한글)

 

그는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 였다고 말합니다.
훼방하는 것은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핍박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포행자는 말로할수 없는 거만으로 학대하는 것입니다.
이는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는 이와같은 일에 참으로 철저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교회를 잔해했는가를 그는 항상 간증할때 이야기 합니다.
이는 알지 못하고 지은 죄입니다. 그런 자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해주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또한 알지 못하고 지은죄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통해 피할수 있는 도피성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깨닫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단이 말하는것에 이끌려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처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때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반응했을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나요?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구원받게 하시고 우리를 자녀로 맞아주시고 신령한 기업을 잇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1:14, 개역한글)

 

이는 참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자신을 가리켜 죄인들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또한 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셨는지 알수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셨는지 우리는 이해할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와같은것을 마음속에서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 개역한글)

 

<미쁘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미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말씀은 언제나 충성되고 신실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요 모든 사람이 반드시 듣고 받아들여야 마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될때에 이 말씀이 미쁜것임을 알게됩니다.
이 말씀을 받을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떨고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받는것은 너무나 이치에 타당한 것입니다. 이말씀을 받지 않는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는 신화와 족보와는 비교도 안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군사적인 용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전쟁중의 사령관 같이 디모데에게 명령했습니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는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아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절대 죄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우리는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갈수록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바울은 이와같은 의미에서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것을 깨닫는다면 예배를 드릴때에 더욱 깊은 예배를 드릴수 있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1:16, 개역한글)

 

그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님께서 일체 오래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래참다와 인내라는 말이 성경에 있습니다. 인내라는것은 환경을 견디는것, 오래참다는것은 사람을 견디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오래참지 못합니까?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서 비판하고 살았습니다.
우리와 같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를 주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이 구원받을때까지 피투성이의 그리스도인을  오래 참으시며 바라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오래 참으신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얻는 자들에게 본이되게 하려 하심이라> 입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오래 참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래참음의 패턴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 괴수였는지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직분을 맏기셨음을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때 <너는 많은 왕들 앞에 설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사도바울을 구원하셨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님께서 가지신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같은것을 발견하고 개발해나가는 기쁨이 모든 지체들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주일날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특권을 누리고 얇팍하게 감사만 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위대한 직분이 있습니다. 주님의 위대한 의탁을 우리는 어떻게 이루어 나가겠습니까?
각인이 이와같은 생각을 한다면 이 모임은 강한 모임이요, 위대한 모임이 될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와같은 일을 계획하며 디모데에게 이일을 위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속한 지역모임이 주님의 위대한 계획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며 각 개인이 간증을 드러내는 모임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1:17,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이제 찬양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의  성경의 순서를 말한다면 < 와! 만세의 왕, 썩지아니한 분, 보이지 아니하신분, 홀로 지혜로우신 분 >으로 말합니다. 다섯가지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만세의 왕으로 오실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측량할수 없습니다.
시간의 차원을 초월해서 영원전부터 스스로 계셨으며 영원까지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허무한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존귀한 것으로 빼곡하게 차있는 영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썩지 않습니다. 온세상은 썩어질 세상입니다만, 썩지아니하시는 분께서 우리를 석지 않게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눈으로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홀로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놀랍도록 지혜롭게 하셨나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 주님만이 홀로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이미 경계의 목적을 이야기 해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접목하여 족보를 이야기 하고있습니다. 이것은 다른것보다 더욱 사악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이야기 합니까? 
우리에게 전진하게 하고 방향감을 주는 이 말씀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말씀대로 이야기 한다면 우리 모임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12절부터 17절가지 사도바울은 솟는 감사를 이야기하고 나서 다시 경계로 돌아 옵니다.

 

부모님이 어린자녀에게 매일아침 "차조심해라" "몸조심해라" 라고 말하는것은 아들, 딸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다시한번 경계하는 것입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1:18, 개역한글)

 

< 아들 디모데 > 이는 연결고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연결고리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님의 말씀이 듣기 싫어도 그 말씀을 받고 가는것이 아들된 도리인 것처럼 디모데는 이 편지를 읽고 전열을 가다듬었을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계하게 될때에 영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계하면서 격려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루스드라에서 만나게 되었을때 2차 전도여행에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과 이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세상에서 가장 위애한 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일입니다. 이것은 가장 고귀한 일이며 영원히 청사에 남을 일이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경계하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이일을 해낼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구원받은 직후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진계획의 부르심을 바로 받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분들이.. 구원받은 후 설렁설렁하며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주님께서 '얘야 네가 그렇게 이대로 살면 안되지 않겠니?' 라고 하실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내가 주님앞에 엎드리고 주님앞에 나아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사움을 싸우며 >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연민에 빠질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벌떡 일어날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음성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포기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경주인데 우리가 어떻게 포기할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게서 나를 부르신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벌떡 일어날수 있습니다.

 

이 싸움은 대의가 선하며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한 싸움입니다.
이것은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악에대해 대적하는 싸움입니다.

 

< 악한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

 

디모데는 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에 대해서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전쟁을 해왔고 사도바울은 이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보전하는것에 전심해야 합니다.
특정한 성도가 이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때에 전열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규집회에 모이게 될때에 기도와 기대가운데 모인다면 이것은 진리의 말슴을 보전하는 기본이며, 기초입니다.
우리는 건전한 말씀으로 매일같이 보양을 받고 있습니까?

 

이 말씀이 교제되고 선포될때에 진리는 보전이 됩니다.
죄에 관한 문제가 희석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회개가 없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적으로 나를 거룩하게 해주는 말씀이 교제되고 있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며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며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말씀이 전파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에관한것과 세상의 미래와 과거와 천사와 사단에 관한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골고루 계속해서 전파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계속해서 전파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 매료되어 전파하고 있습니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1:19, 개역한글)

 

<어떤이들은> 1. 교리적으로 파선했습니다.  2. 지식적으로 파선했습니다.     3. 도덕적으로 파선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전해지는것은 양심으로 도덕적으로 우리 삶에서 잘 실천되어야 합니다. 곧 도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진리 가운데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째서 말씀을 잘아는 사람이 파선합니까? 이일을 볼때 우리는 주님안에서 두렵습니다.
그들은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파선한것입니다.

 

선한양심을 가졌을때 우리는 믿음에서 파선하지 않고 계속해서 항해하게 해줍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1:20,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이와같은 일에 분명한 조취를 취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슴에 매료되 있고, 말씀을 사랑하고 가정안에서 말씀을 보전하고, 모임안에서 말씀을 계속해서 보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