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정형모 형제님(요약)

< 디모데전서 강해 5 >

박이레 2022. 7. 9. 21:09

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디모데전서 강해 5 >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4:1-16, 개역한글)

 

주님께서 읽은 말씀에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들은 모임안에서 공인들에 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디모데전서를 통해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일하고 있는 지역교회,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살것인가를 마음에 두고 이 서신을 썼습니다.

 

이를 위해서 모임의 분위기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또한 모임의 인도자들은 모임의 간증을 드러내는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저번 시간에 사도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라고 감탄했습니다.
경건은 지역모임의 간증을 사방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으며, 이세상에 탄생하셨고, 이세상에 주님의 위대한 경건을 보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순종하셨습니까.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마땅한 보좌에 앉혀드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경건은 지역교회의 합당한 자세입니다.

 

이제 오늘 4장에 들어와서 이와같은 교회의 간증을 해치려고 하는 교리가 있을것이라고 사도는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4:1, 개역한글)

 

사도는 떠나가지만 밖에서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양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자신을 쫒게 할것을 미리 이야기 했습니다.

 

배도하는 영의 근원은 미혹의 영과 귀신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양심에 화인맞아서 하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을 섬기게 될때에 그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는 그 양심이 통제되어야 합니다.
양심으로 잘 분별되고 깨끗한 마음, 거짓없는 믿음으로 이야기 해야 합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4:2, 개역한글)

 

< 양심에 화인맞은자, 귀신들린자 >

 

그들의 가르침은 1. 혼인을 금합니다. 2. 식물을 폐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고안하시고 가르치시고 지으신 모든것을 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인간이 범죄하기전에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은 크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1. 결혼 2. 인간 정부   3. 교회입니다.
결혼을 금한다는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아덴에 가서 많은 철학자들과 많이 변론하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철학자들의 두가지 큰 두가지 파는 금욕주의와 쾌락주의 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여러 파가 있습니다. 바리세파, 사두개파, 수는 많지 않지만 에센에파도 있습니다.

 

에센에파가 주장하는 주장에는 금욕주의와 독신주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와같은 예언을 하기전에 이 인류에는 이와같은 사상들이 파고들어와 있었습니다.

 

주후 2세기에 와서 영지교가 등장합니다. 영지교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지교의 중요한 가르침은 '물질은 악하다' 입니다. 이 강력한 영지교는 이단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후 4세기에 들어와서 수도원 제도가 확립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것들은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쓰게 될때에 이미 예언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와같은 굴레속에서 허덕여 왔습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혼인을 금하는 것을 그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식물을 폐한다는 것을 보아도 마찮가지입니다.
유대교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정한식물과 부정한 식물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러나 음식 자체가 정하고 부정하고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것은 선하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정한것과 부정한것을 가르치신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그림자로써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와서 주님을 믿은 후에도 구약시대의 음식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양심이 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화합할 것인지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4:3, 개역한글)

 

모든 음식은 악하거나, 부정한것이 아닙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왜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나요?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만물을 지으시게 될때 가장 마지막에 지으신 것은 사람이며, 사람중에 여자를 마지막에 지으셨습니다.

 

모든 식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에 지으신, 제정하신것이 결혼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것들을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제정하셨지만 동성연애가 있는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현재에는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미국의 주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이와같은 일에 대해서 사도는 '배도의 가르침'임을 이야기 합니다.

 

왜 혼인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고 식물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것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으시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약에서 말씀하신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4:4, 개역한글)

 

결혼은 단순히 인류의 행복만을 위해서 만드신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피값으로 사신 교회에 관해서 말씀하고자 하신 뜻이 있었다는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마귀가 대적할만한 제목이 아닙니다.
결혼은 구속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대적한다는 것은 인류를 속박 가운데 넣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후일에 나타날 귀신의 가르침은 배도의 가르침이며, 에베소 교회의 간증을 저해하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4:5, 개역한글)

 

장차 나타나게 될 배도의 역사, 거짓 가르침을 경고로 들으면서 6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본을 보일것인가에 대해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4:6, 개역한글)

 

사도는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으로'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가 디모데에게 가르친 가르침입니다.
디모데는 이와같은 일, 형제들을 깨우치는 일을 사도로부터 부탁 받았습니다.

 

이제 사도는 우리주님의 선한 일군에 대해서 말씀하려고 합니다.
귀신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집에 이와같은 배도의 가르침으로 공격하려 할것입니다.
경건의 비밀을 정면적으로 대적하는 귀신의 가르침은 1.혼인을 금하고 2. 식물을 폐하는 것입니다.
일군은 이것을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이 일에 대해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군은 1. 형제를 일깨웁니다.

 

믿음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종이 해야할 두가지 일은 2. 스스로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는 먼저 자신을 삼가고 양떼를 삼가라> 라고 합니다.
이 두가지는 항상 같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항상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서옫들을 일깨워야 합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이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엇을 전하는 자이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종의 특징이며 모순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4:7, 개역한글)

 

망령되고 헛된것이 신화의 특징입니다.
신화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늙은 여자의 이야기' 라고 합니다.
곧, 전 세대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입니다.

 

이 내용들은 진리같지만 사실이 아니며 과장된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또한 그 내용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말하면 할수록 끝없는 변론과 시간낭비인 것입니다.

 

망령되다는것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그안에 알맹이가 없고 우리에게 주는것이 없으며 해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버리는것을 이야기하며 취해야 할것을 이야기 합니다.

 

<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될때 언제나 두가지 종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애굽을 떠납니다.애굽을 떠나는것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것을 선택할때 항상 긍정적인것도 따라옵니다.
우리가 애굽을 떠나는것은 나쁜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하늘의 소망이 우리에게 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경건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갖춰야할 바른태도입니다.
이 경건에 이르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연습해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개역한글)

 

우리는 망령되고 헛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대신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건을 연습할때 두가지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1. 육체의 연습과 2. 경건입니다.
육체의 연습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절제하고 운동으로 육체를 단련합니다.

 

운동은 여기서 다 말로 할수없을만큼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다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생에 국한된 것입니다.

 

왜 사도는 경건을 연습하라고 말씀하시나요?
경건은 이생뿐 아니라 내생에서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대할때 우리가 가져야할 근본적인 자세는 무엇일까요?

 

경건이란 우리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할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이 경건을 연습할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혹, 하나님을 경외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일부 경외하고 일부 무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다른마음으로 하나님을 무시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철저히 경배하고, 주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떨며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할것입니다.
이와같은것이 경건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상태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전에 육체의 연습을 이야기 했습니다.
육체의 연습에는 감각이 있습니다. 감각과 시각, 촉각, 미각, 후각 다섯가지의 감각이 있습니다.
육체는 이와같은 감각만 있을뿐 아니라 신경은 근육에 명령하고 움직입니다.
이와 같은것을 육체에 있어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경건을 위해서 우리도 연습해야 합니다. 경건에도 감각이 있고 명령이 있고 움직임이 있습니다.

 

촉각을 연습할때 페이지 사이에 머리카락을 넣고 어디에 머리카락이 있는지 찾아냅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이와같은 감각을 얻는것을 우리는 연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곁에 계신것을 우리는 경외심과 경이로움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느끼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 주님께서 계심에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불경한 행동과 처신을 합니다.
이것은 경건의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대도 우리는 반대하며 우리가 말씀을 고안하고 전할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곁에 계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100%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는 느끼고 일부는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퍼센트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안핟고 느끼는것이 있기때문에 주님 말씀에 토를 달고 순종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경건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감각과 영적인 움직임이 경건과 관련해서 주님을 느끼는 구조, 운동력등은 우리에게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는것을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근육을 가지고 주님께로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주님과 만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주님과 만남으로 내 안에 자만과 교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하게 되고 온유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개닫고 우리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고치려고 합니다. 이것이 연습니다.

 

그 문제가 고집이라면 이 고집을 우리는 내가  주님과 교제하면서 내가 고집이 있다는것을 깨닫고 그렇게 행동치 않으려고 행동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섬품이 점점 주님과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의 연습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경건을 연습할때 깨닫습니까.
우리는 어떠한 때에도 기도와 말씀을 습관적으로 읽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할수밖에 없는 마음, 항상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생활속에서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서 습관으로 행동을 들이는것과는 다른것입니다.
우리가 운동이 유익한 것인지 모두가 알지만 직접 운동을 하는것과 알기만 하는 것은 다른것입니다. 이와같이 경건도 그렇습니다.

 

귀신의 가르침과 이단의 교리를 접하는 사람들은 경건을 연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나서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겠는가 고민하고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 빚진자의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아무것도 빚지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있나요?

 

스데바나 사람들은 성도들을 섬기는데 중독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곧 경건의 연습이 잘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을 연습한다는것은 우리가 실제로 경건가운데 젖어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삶에서도 하나님을 존중하며 적합한 위치에 모셔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는 모든것보다 먼 주님의 것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염려보다 하늘의 것을 구하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것을 주님께서 더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말씀을 알고 믿기에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우선순위로 모셔드려야 합니다.

 

우선순위에 관해서 나를 먼저 우선순위로 두는것은 내 삶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주님을 감탄하고 예배하는 사람이 내 생활속에 얼마나 배여 있습니까?

 

우리는 주일아침에 곡적으로 한번만 예배 드립니까? 아니면 매 생활속에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예배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일날 공적인 예배를 하기 위해 매일매일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게서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만이 인간관계에서 바른 인간관계를 유지합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내마음이 항상 주님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을 존중하며 성도들을 위해서 기대하고 기도하며 성도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경건을 연습하면서 나오는 아름다운 결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본받습니다.
역사적으로 주님의 선진들을 보고 우리 또한 이렇게 갈수 있을까 하는 것은 경건의 연습입니다.
이와같은 마음들이 우리를 경건의 위치로 이끌어주며 이 일에 대해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계속해서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욥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불평하는가, 절대적으로 복종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서나 지혜서를 보며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를 느끼게 됩니다.
바른 분별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적용될수 있도록 수많은 연습을 하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지혜롭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잡을수 있습니다.

 

<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

 

이와같은 영의 감각력, 영적인 근육을 움직이는것을 우리는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4:7, 개역한글)

 

이와같은 경건은 우리 주변의 악한 세대에 바로 설수 있는 방법입니다.
악한교리가 우리주변으로 들어왔을때 우리가 넘어지는것은 우리가 경건을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거짓된 교리로 우리를 세뇌시키고 세상으로 하나님을 떠나 우리가 가버리도록 합니다.

 

경건의 연습은 이와같은것을 막고 매순간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경건의 연습의 출발점입니다.
경건을 연습할때 이것은 이생과 내생의 유익이 있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개역한글)

 

우리는 이세상에서도 살고 오는 세상에서도 살것입니다.
우리가 이생에서 경건을 연습하는 삶을 살면 그 경험을 가지고 내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딤전4:9, 개역한글)

 

말세에 세상에서 지역교회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간증을 드러내는 일을 받았다면 우리는 충성되이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할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딤전4:10, 개역한글)

 

왜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수고하고 지칠때까지 모든 에너지를 퍼붓는 것일까요?
이유는 우리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할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건을 연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부터 부름받아 이땅에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고 내생에서도 하나님과 같이 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게 충성하는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딤전4:11, 개역한글)

 

헛되고 망령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것을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헛된 것들에 대해서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헛된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헛된것은 에너지 낭비, 시간낭비입니다.

 

성도들이 이것들을 분별한다면, 지역교회의 영력인 에너지는 달라지며 지역교회의 간증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상태에서 모든삶에서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종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권하고 가르치는가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을 보이는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가르칠 뿐 아니라 자기가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본이라고 합니다.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딤전4:12-13, 개역한글)

 

하나님의 종은 가르치고 그말씀을 자기가 순종해야 합니다. 아니, 먼저 순종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는 비교적 나이가 어렸습니다. 로마시대에 연소함이라는 말은 군대에 들어가 보급할만한 나이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시대는 40대가 되면 군대에서 제대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의 나이를 추정하건데 약 30대의 나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엄신여김을 받을만한 나이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빨리 에베소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지 못함으로 이렇게 편지를 쓰는것입니다.

 

<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

 

어떻게 업신여기지 못할까요? 사도는 다섯가지 방법에서 본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1. 말

 

이것은 공적인 연설 분만 아니라 모든 언어생활에서 모든사람에게 본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이 말을 통해 사람을 죽일수 있고 사람을 살릴수도 있습니다.

 

말은 보이지 않는것입니다. 그것은 들리는것입니다. 이 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언어생활에서 완벽하다는것은 그 사람이 완벽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언어생활에 실패해서 주님앞에 나아가 엎드립니까.

 

에베소에는 디모데보다 나이많은 장로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때 우리의 언어는 변화합니다) 디모데는 본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교제할때 우리의 말은 주님을 닮게 됩니다.

 

2. 행실

 

행실을 영어로는 '대화'라고 합니다. 곧, 삶의 매너요, 방식인 것입니다.
그의 사람에서 항상 보여주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점에서 디모데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3. 사랑

 

사랑받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주님의 사랑으로 주변사람들을 사랑할수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사랑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받았고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실천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얼만큼 내 마음속에서 느끼느냐에 대해서 더 많이 사랑할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정적인것이 아니라 다분히 의지적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진리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을 할때 우리의 머리는 차가워야 하며 마음은 뜨거워야 합니다. 바로 이와같은 사랑을 디모데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소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4. 믿음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것을 보는것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것은 어느날 우리에게 흘러내려오는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로부터 우리의 믿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을 디모데는 연습해 왔습니다. 믿음을 연습했고 믿음을 행사해 왔습니다.

 

믿음은 광신이나 미신같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될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습니다.

 

믿음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느끼고 주님의 뜻에 순종할때 이 믿음은 커지는 것입니다.

 

5. 정절

 

순결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깨끗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은혜 입니다.
두번째는 은사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딤전4:14, 개역한글)

 

디모데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디모데 전후서를 살피면 디모데가 은사를 받을것을 신약의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곧 디모데가 은사를 받을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는 장로들이 디모데에게 은사가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딤전4:13, 개역한글)

 

<읽는것> 
이것은 공적으로 읽는것입니다. 회당에서는 말씀을 공적으로 먼저 읽었습니다.그리고 말씀을 읽은후에 권하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와같은 것이 있습니다. 먼저 공적으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권하며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활용할때 우리는 이 은사를 고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관심과 영혼을 그것에 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에 이 은사는 찬란하고 아름답게 쓰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몰두하는것이며 착념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몰두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을 연습하는것의 하나 입니다.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운데 계속해서 은사가 발견되고 그것이 발전되고 성도들과 하나님 가운데서 유용하게 사용되는것에 몰두해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딤전4:14, 개역한글)

 

우리가 은사가 있을때 성도들을 알아차립니다. 특히 인도자들이 알아차립니다. 인도자들이 기대하고 성도들이 기대할때 은사를 사용하는 자들은 기쁨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조심없이 말며>
경히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귀하게 생각하며 다루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두번째 영적인 은사를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영적인 성장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4:15, 개역한글)

 

<너의 진보> 
진보라는 말은 군사용어입니다. 군사작전을 할때 군대는 전진해야 합니다. 후퇴한다면 그것은 패배하는 것입니다.

 

군대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보>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삶이 마치 스포츠와같다, 또한 경주와 같다, 전쟁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고 나 자신도 의식하고 성도들에게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은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장하는 이유는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2.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성숙할수록 모임안에 문제들은 점점 사라집니다.

 

때로는 성도들은 모임안에 문제가 있다는것에 불평합니다. 그러나 모임안에 문제가 있는것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성숙해야 합니다. 성숙하면 이러한 문제들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전거의 바퀴가 작으면 작은 자갈돌에도 금방 넘어집니다. 그러나 자전거의 바퀴가 크면 웬만한 돌에도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우리는 왜 성숙해야 합니까?

 

1. 하나님게 영광입니다.
2. 성도들에게 유익입니다.
3. 간증을 드러내야 합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4:16, 개역한글)

 

언제나 이 두가지를 사도는 말합니다.
잘 가르치며 이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아까는 전진하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계속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도가 지속적으로 주님 말씀에 붙어서 계속간다는것은 얼마나 큰 간증입니까?

 

간증은 순간적인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입니다.
우리 지역교회의 간증이 계속해서 보전되는일 주님을 섬기고 예베하는일 기도하는일을 보전해야 합니다.

 

< 네 자신과 듣는자를 구원하리라 >
먼저 내 자신을 구원하고 그 다음이 듣는자입니다.
형제님들, 우리가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가운데 아멘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영적인 은사, 영적진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오늘 사도는 거짓가르침, 앞으로 나타날 배도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경건을 연습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 중요한 내용은 양쪽으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가르치시고 영적으로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