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11. 여행에서 돌아오는 신랑과 신부 >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오늘 아가서 8장 말씀에서 저희들이 마지막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장에서 주님께서 주시고 있는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 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그가 성벽일찐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찐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아 8:1-14).
봉독한 말씀 주님께서 복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저희들이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희들이 술람미 여인이 자기의 사랑하는 신랑을 향해 우리가 함께 들로가자. 또 동네에서 유하자. 처음에 솔로몬이 자기를 찾아왔을때, 만났던 사랑에 대해서 기억하고 갈릴리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 가서 석류도, 또 포도움이 돋았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그런 의도로 솔로몬에게 제안한 것을 우리가 보지요.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술람미 여인이 처음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만났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지금까지 신랑과의 대화와 또 그 임재를 즐기고 사랑을 쌓아온 모든 경험들, 그것을 더욱 더 새롭게 하고 그 사랑을 더욱 더 깊이하는 그와같은 목적이 있었다. 하는것을 저희들이 어제 보았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갈릴리 지방에 있습니다. 그런데 8장 1절에 와서요. 이 여인이 마음속에 갈릴리 지방에서 신랑을 사랑하는 사랑이 대단히 뜨겁습니다. 갈릴리 동네에서 여전히 신랑을 사랑하며 여행 중에 있을때에 그녀의 마음속에 조심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점을 우리가 보게 되지요. 대단히 친숙한 환경입니다. 자기가 어릴때 자라던 곳입니다. 거기에 어느곳에 골짜기가 있고 어느곳에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까지 알 정도로 친숙한 환경이죠. 자기 사랑하는 자를 향한 뜨거운 사랑, 그 사랑을 지금 갈릴리에 가서 나누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 사랑하는 자를 향해서 자기가 공개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술람미 여인은 조심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보지요.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아 8:1).
이 여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와의 사랑표현에 관해서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랑표현에 관해서 마음속에 주의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잠언 말씀을 보면 지혜와 어리석음, 이 두가지를 가지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에 관해서는 현숙한 여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에 관해서는 방탕한 여인에 관해서 말씀하고 그 두가지를 잘 대조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여인, 이방 여인, 그 여인의 태도는 어떤가? 잠언 7장 13절 말씀에 음녀의 태도,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계집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잠 7:13).
여기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태도죠. 이사야에서 있는 말씀도 한가지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예루살렘 여인들에 관해서 이사야가 폭로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사 3:16).
이 당시에, 이사야 시대에 시온의 딸들이 어떤 처신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요, 뭔가 제안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은 음탕합니다. 또 그들은 느린 목을 하고 있고 정을 통하는 눈으로 그리고 걸어가는 모습은 대단히 점잖을 빼고있다. 이런 모든 모습들은 이제 성경에서 저희들에게 그들의 육적인 태도, 그리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 이 태도에 대해서 이제 성경은 저희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서에 있는 말씀을 보면요. 하나님의 교회 안의 성도들의 태도는 어떤가, 라고 하는 점을 저희들이 잠깐 보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딤전 2:9).
"이와같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앞에서 분노와 다툼없이 형제들은 거룩한 손을 들어서 기도하라. 그런데 그와같은 매너로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매님들의 태도, 그것은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라는 말씀입니다. 염치라고 하는것은 보기 흉한 것에 대한, 도덕적으로 보기흉한 모습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 그것입니다. 또한 겸양의 자세입니다. 수줍어하는 것입니다. 얼굴을 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잠언에서 방탕한 여인의 모습을 볼 때에 부끄러움이 없다. 한마디로 염치가 없다는 말이죠. 또 정절도 없다. 정절이라는 말은 건전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건전한 분별인데, 그것은 육적인 욕정이나 욕심을 절제하는, 그래서 사실 정절이라고 할때,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한 마음으로 항상 대하고 있는 그런 자세를 말하죠.
이제 이 술람미 여인은 어떤 점에 대해서 마음의 염려를 하고 있는가? 갈릴리 여행 중에요, 거기 동네도 있습니다. 거기 사람들이 살고있죠. 거기에 마을 사람들도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겠죠. 거기를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하게 될때, 자기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뜨거운 사랑, 그것을 표현하게 될때, 그 표현을 어떻게 가장 적절히 할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합법적으로 자기 사랑하는 사람과 입맞출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그것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와같은 자세가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점을 마음속에 두고있다. 따라서 신부가 여기서 준수하고 있는 덕있는 성품과 고도의 도덕적 기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요, 사도바울께서 저희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보십시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세웁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
모든것이 가하다. 그러나 모든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처신에 대해서 대단히 조심해야 된다고 하는 거죠. 왜냐하면 덕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자세를 지금 저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절제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는 그런 자세. 그래서 이 여인은 겸양이 있습니다. 염치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적절히 사용하면서 뜨거운 사랑을 어떻게 적절히 표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덕울 세울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점을 마음에 두고 있는 영적인 여성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기서 볼 수 있죠. 이와같은 자세는 오늘 저희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모든것이 다 가하지만 모든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것이 다 할 수 있지만, 합법적으로요. 양심의 가책도 되지 않아도 그러나 다른 이들의 유익과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우리가 어떻게 적절히 처신하고 적절히 절제해야 될까? 라고 하는 점을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신령한 자세인가, 라고하는 점을 우리가 보고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인의 사랑이 신령한 사랑이다, 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아 8:2).
이제 이 사랑하는 그 신랑과 여행하면서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너를 이끌어" 우리가 아가서 1장 말씀을 보면요. 아가서 제일 처음에 "너는 나를 인도하라" 신랑이 신부를 인도하죠. 그런데 이 8장에 와서보면 신랑을 인도한다. 신랑을 어디로 안내해 드렸습니까?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의 목적은 그 안에 들어가서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우리가 이 여인을 가만히 살펴볼때 어떤 종류의 여인인가? 이 여인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여인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가르침 받기를 좋아한다. 신약에서 이와같은 여성을 우리가 발견하죠. 마리아,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라고 하는것은 참 복된 겁니다.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겁니까? 그 사람은 자기는 다 아는 사람입니다. 사실상 그는 다 알기 때문에요,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가르침 받을 수 없습니다. 가르침 받기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것은 착각일 뿐이죠. 그것은 교만입니다. 가르침을 받지 않는 자세,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자세, 이것은 우리 개인에게 커다란 재난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정이 그런 가정이라면 우리 가정은 재난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알만한 것,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 자기를 계속해서 개선해 나가고자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좋은 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또 좋은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자기를 개선하고 증진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어린아이로부터도 배웁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심지어는 자신의 과거의 실패로도 배웁니다. 또 다른 사람의 실패, 오류로부터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이와같은 사람은 인간의 역사속에 있는 수많은 위대한 위협들로부터, 또는 위대한 실패로부터도 재난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말이죠.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요, 우리가 이와같은 자세를 취하게 될때 우리는 엄청난 분량을 주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을때, 마리아는 참 좋은것을 택한 여성이었죠. 우리가 이와같은 자세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 끊임없이, 우리 생애 속에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앞에 가서 주님의 말씀에서 얻고자 하는 마음, "주님 말씀하십시요. 종이 듣겠나이다." 그 말씀을 이해하고 묵상하고 또한 더 깊은 것을 깨닫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그래서 더 많은것을 또 얻고, 이와같은 자세는 저희 모두에게 특별히 이와같이 악한 시대에 더욱더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이 이제 사랑하는 분과 어머니 집에 들어갔을때, 교훈을 받았으리라. 교훈에 관한 것에 대해서 갈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네게서" 라고 할때, 이 "네게가" 누군가. '네게'가 신랑일수도 있고요. 어머니일수도 있다. 갈릴리에 살다가 이제 예루살렘 궁전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대단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그리고 대단히 바쁜, 궁전 안에서의 사회에서 이 여인은 생활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 속에는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를 향해서, 남편을 향해서, 사랑하는 신랑을 향해서요, 어떻게 자신이 처신할까? 우리는 1절 말씀에서요. 다른 사람들, 사랑을 표현할때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어떻게 처신할까, 라고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죠. 바로 이 여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는 술람미 여인으로서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할까, 라고 하는 것을 궁금해 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있다, 라고하는 점을 우리가 발견합니다. 그래서 뭔가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솔로몬으로부터 뭔가 배우기를 원한다. 이렇게 볼수도 있고요. 자기 어머니로부터도 뭔가를 배우고자 원한다. 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만한 많은 것들이 있는데 궁전 안에서 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갈릴리에 가서 이제 그와같은 점에 대해서 좀더 긴밀한 교제 가운데서 더욱더 배우고자하는 그런 마음, 그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뭘 배웠겠어요?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딛 2:4-5).
여기에 이제 열륜이 많은 형제님은 어떻게 해야될까? 또 노자매님들은 어떻게 해야될까?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여기 우리 개혁성경 표현으로는 '늙은여자'라고 말씀하고 있죠. 모임 안에서 또 믿음 안에서 오래된 자매님들, 어떻게해야 될까? 젊은 여자들, 젊은 자매님들을 교훈하되 어떻게 교훈합니까?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고 교훈한다. 어머니 집에 들어가서 이 술람미 여인이 배우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주제가 아닐까요?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또 근신하고 순전하고 집안일을 하고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런것을 가르치라고 사도바울은 권면하고 있죠. 남편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또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정말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교육할까, 어떻게 양육할까, 이런 점에 대해서요. 이 여인은 많이 배우기를 지금 원하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와같은 점에서 그는 더욱더 자기 자신을 개선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가서를 통해서요. 술람미 여인과 신랑 사이에 얼만큼 깊은 사랑으로 진전하고 있었는가를 보고있죠. 이와같은 사랑이 점점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많이 배우고자 하고 더 많이 실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개선하고요. 사랑을 더욱더 깊이하고 우리는 이만큼이면 됐다고 할때 그것은 이미 실패입니다. 우리는 점점 개선하고 점점 발전하고 영적으로 더욱 깊어지고, 사랑이 더욱더 깊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부족에 대해서 더욱더 느끼고 있는 우리 자신, 그래서 더욱더 배우고자 하고, 더욱더 실천하고자 할때, 우리는 개선과 발전이 있죠. 이 여인이 그와같은 창조적이고도 발전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교훈을 받았으리라, 이렇게 그런 마음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5장 말씀에 보면 "남편이들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아내들이여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이와같은 진리를 이 여인은 배우고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랑,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주신 사랑, 그 사랑때문에 이 여인이 여기까지 왔지요. 그렇다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될까,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이 여인은 신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 동일한 영을 통해서요. 배우고자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배웠을때, 이렇게 뭔가를 더욱더 알고 또 터득하게 되고 또 많은 것을 습득하게 될때, 이 여인이 취했던 자세는 뭡니까? 사례하는 자세입니다. 감사하는 자세입니다. 여기보면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우리의 감사의 표현이 있습니다. 잠언 31장에 현숙한 여인에 관한 말씀을 쭉 읽어보면 마지막 부분에 가서 "자녀들이 일어나 사례하고"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들을 인도해 준 것에 대해서, 자기들을 가르쳐준 것에 대해서, 자기들을 양육시켜 주신 것에 대해서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이런 표현을 저희들이 보죠. 여기 이 여인이요, 지금 교훈을 받게 될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런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합니까? "향기로운 술, 포도주,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포도주 기쁨이죠. 석류는 우리가 여러번 보았습니다. 생명력입니다. 생명력과 기쁨, 이 두가지는 항상 함께하죠. 이와같은 것으로 감사합니다. 감사의 표현은요, 그것은 기쁨 가운데 나오죠. 우리가 뭔가를 배우게 될때 기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용량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될때 우리는 주님께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그 감사와 찬양은요, 우리의 기쁨을 동반합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생명력이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될때 우리의 배움은,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모든 가르침은요.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건조한 이론적이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논리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요.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쓰러졌던 사람을 벌떡 일어나도록, 그리고 주저앉아서 움직일 수 없이 실의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움직이고 섬기도록 만드는 겁니다. 그분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이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요, 그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감사의 표현은 기쁨과 생명력 가운데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예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 예배는 기쁨 가운데 생명력을 느끼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하죠.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아 8:3).
2장 6절에 이와같은 말씀이 전에 있었습니다. "왼손으로는 베개하고" 받쳐주는 것입니다. "오른손으로는 안았으리라" 포옹하는, 왼손으로는 지주해주고 오른손으로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사랑이 옛날에는요, "왼손으로는 내 머리를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았다."라고 말씀했는데, 여기 8장에서는요. "왼손으로 머리를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았으리라" 이것은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전에는 그 사랑하는 자가 자기를 그렇게 해주는 것에 대해서 그 기쁨으로, 또 특권으로 누리고 그저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전에 이 여인이 그분이 내게 속했고 나는 그분에게 속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말했죠. 우리는 어제 7장 10절에 와서보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고 그는 나를 사모한다" 이제 여기까지 성장해 왔습니다. 전에는요, 그분이 나를 왼팔로 베개하주고 오른팔로 포옹해주는 것은 그것은 나의 특권이고 기쁨이고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경험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와서 이 여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언어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똑같은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랑의 성숙이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요, 저희들은 사랑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알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서 무슨 예쁜것이 있거나 무슨 장점이 있거나 그래서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저희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대해서 즐기고 그 사랑을 이해해가고 그 사랑을 경험해가고 하면서 점점자라갑니다. 그렇게 자라가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주는 것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주면서 즐거워하는 것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점점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인은요, 처음에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나 기뻐하고 즐거워 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그 시대의 그 단계에서 대단히 그 여인에게 적절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그 여인의 사랑이 더욱 더 깊어지면서요. 나는 주님을 향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자일까? 라는 생각을 하고있다. 그래서요, 자기 자신이요. 주님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해 주시겠지. 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요, 이제는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그렇게 해 주셨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아 8:4).
여기 2장 7절이나, 3장 5절에 이미 이 비슷한 말씀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소원을 얘기를 하지요. 그 다음에 이제 초기 부탁이 아니고요. 이제는 사랑하는 분과의 오랜 세월 동안에 교제하면서, 이제 그분에 대해서, 그분과의 교제의 소중함, 그리고 그 교제가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 이것은 여전합니다. 이것은 날이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집니다. 사실상 이 여인은 궁중에서 바쁜 생활 속에서의, 거기서 탈피하고 이제 갈릴리 지방에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온 이유도 그들의 두 사람의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더 깊게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긴밀한 교제를 원해서요. 주변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마음이 살란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더욱더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갈릴리에 왔었죠. 지금 여기서요, 이제 이 여인은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욱 더 그것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이제 이 두사람은요, 여행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여행하고 있는가? 다시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려고 하고 있죠. 그래서 이들이 들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거친 들에게 오는이가 누구냐? 이것은 이미 우리가 3장에서도 봤는데요. 이 구절에서는 조금 다른 말씀의 부언으로 더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 오는 여자가 누구인고..."(아 8:5).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아마 갈릴리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이 광야를 지나게 될때, 이 두사람이 광야를 지나는 모습을 보고요.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이 광야가 어디일까? 그것은 어떤 광야도 좋겠습니다만, 어떤 분들은 이것은 수넴과 이스르엘 초원 사이에 있는 거친 들이 아닌가, 어쨋든 거친 들을 지나고 있을때 이제 아무도 없죠. 거기에 두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8장 5절 말씀에서 한가지 더 부언하고 있는 것은요,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거친들이라고 하는 것, 사랑하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이 사랑, 그 사랑은요. 궁중에서도 자랍니다. 갈릴리 지방에서도 자랍니다. 더욱더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그 사랑을 깊이하려고 노력하죠. 그런데 거친 들을 오게 될때에 그들의 사랑은 어떨까? 여기보면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여행을 하고 있다. 특히 거친 들을 여행하고 있다. 이 표현은 참 아름답습니다. 거친들이라고 하는것은 우리가 전에도 봤듯이 거기에는 경작할 수가 없는 곳이죠. 거기에는 음식이 없습니다. 거기에는요, 고독한 곳입니다. 정막한 곳입니다. 사람들이 붐비고 또한 사회생활이 이루어지고 농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이런곳이 아닙니다. 그곳은요, 시험의 장소입니다. 시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또한 위험스러운 곳이기도 합니다. 많은 해를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장소입니다. 춥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거기에는 우리를 해롭게하는 여러가지 짐승이 있을수도 있고 또 먹을 것도 없기 때문에, 고독하기 때문에, 시련과 또한 시험거리가 있는 곳입니다. 바로 이런 곳을 통과하게 될때,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궁전에서의 사랑, 갈릴리 지방에서의 골짜기와 꽃이 있고 움이 트고, 이런곳에서의 사랑 말고, 거친들을 통과하게 될때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 여전히 사랑할까? 시련과 여러가지 어려움이 오는데도 여전히 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할까, 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요, 이 거친 들을 어떻게 통과하고 있습니까? 특히 이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의지하고 온다. 그 사람의 가슴에 기대서 온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요, 3절 말씀에 "왼손으로는 배게하고 오른손으로는 포옹하고" 이런 말씀을 보았지요. 여기 지주가 있습니다. 붙들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받쳐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머니 집안에서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이제 거친들을 통과하게 될때도 마찬가지로 여기의 이 여인은 신랑을 의지하고 온다. 기대서 온다. 이것은 움직이는 상태에서 기대서 오는 겁니다. 가만히 누워 있을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때 기대고 있다. 어떻게 기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의지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이 여인은 언약의 약속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여행 중에요. 이 사랑하는 분의 불변의 사랑을, 변치 않는 사랑을 거기에 의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속죄 보혈 때문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인격 때문에 그분에게 기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보호해 주죠. 지주해 주죠. 공급해 주죠. 그래서 우리들은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행을 하게 될때 그분에게 이야기 하면서 오는 겁니다. 기대서 이야기 하면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고 그분에게 나도 말씀을 드리면서 오는 것입니다. 대화하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친들에서 오고있는 저 사람들이 누구냐? 거친 들에서 오고있는 여자가 누구냐? 특별히 여기서는 두 사람이 있는 "저 여자가 누구냐?"라고 사람들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의로움이죠. 거친들을 통과해 오는데요. 사람들은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의지하고 이 거친들을 저희들이 통과해 갈때, 사람들은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여자가 누군가?" 라고 사람들은 질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놀랄까? 그분을 기대고요, 말씀을 듣고 오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기대서요, 그분에게 말씀을 하고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는 것입니다. 거친 들에서요, 이 여인이 계속해서 보존되고 오고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고 거기서 쓰러지지 않고 시련과 어려움과 많은 위험과 그런 곳에서 계속해서 보존되어 오고 있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또한 탁월한 동반자와 함께 오고 있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 때문에도 놀라지만 그 동반자 때문에도 놀라는 것입니다. 거친 들에서 이 여인이 보양을 받고 보존이 되고 또한 기뻐하며 행복해 하면서 사랑을 느끼면서 오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의 가슴에 기대서요, 이야기하고 오면 주변이 거친 들이든, 거기 뭐가 없든, 거기에 음식이 없든, 거기에 시련이 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때문에요. 사람들이 저 여자가 누군가? 거친 들을 어떻게 저렇게 오고 있는가? 라는 기이함을 질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말이죠. 이것은 우리의 간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수많은 시련과 수많은 어려움들이 저희 주변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문제들은 매일과 같이 새로운 문제로 또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와같은 문제 속, 그것은 우리가 거친 들을 통과하는 것인데요. 그때 우리는 어떻게 통과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이 거친 들을 통과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거기서 낙심하고 실의에 빠지고 그 거친 들에서요, 낙망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때때로요,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쾌락에 빠지고 또한 잠깐동안 잊어버릴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 속에서 그들은 해답이 아닌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요. 그들은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친 들을요, 위대한 탁월한 동반자와 함께 그분의 가슴에 안겨서 그를 의지하고 통과해서 온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대단히 기이한 모습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의 삶에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가정이 세상을 향해서 그와같은 증거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모임이 세상을 향해서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한 책임과 특권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거친 들을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을 즐기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 사람들이 이 두사람을 보고, 특별히 이 여인을 보고 저 사람이 누군가? 라고 하는 질문을 내고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죠. 이제 5절 하반절을 보면요. 지금 계속해서 거기를 통과하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사과나무를 발견합니다.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아 8:5).
이 말씀은 이런 겁니다. 거친 들을 지나가고 있는데 사과나무를 발견했어요. 거친들에 무슨 사과나무가 있어요? 거기에는 사과나무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거기 사과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의 마음속에 2장에서요, 우리는 이 여인이 내가 사랑하는 그분은 수풀속의 사과나무다. 나는 그 그늘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거기에 떨어진 수많은 실과, 그리고 거기 나무에 달려있는 수많은 실과를 내가 먹고 그 실과는 너무나 달았다. 이 여인의 마음속에 그 사랑하는 그분은 사과나무였습니다. 이 거친들을 지나면서 사과나무 아래, 거기서 어머니가 잉태하고 신고하고 고통 가운데 아이를 낳습니다. 이 낳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는, '카발'이라고 하는 말은 '출생하다' '아이를 낳다' 이런 말 외에 '서약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실은 서약했다. 서약한 장소다. 사랑을 서약한 장소다 그말입니다. 어머니가 사실 자기 딸을 이 신랑에게 건네준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서약하도록 한 겁니다. 솔로몬은 오래 전에 갈릴리에 와서 이 술람미 여인을 만났어요.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구애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이 사랑을 서약했습니다. 서약한 곳이 어딘가? 사과나무 아래였습니다. 바로 그 장소가요, 이들의 사랑의 출발지였습니다. 우리는 7장 말씀에서, 갈릴리에 가서 그들의 첫번째 사랑에 대해서 다시한번 상기하고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사랑을 더욱더 견고케 하자고 한 그런 말씀들을 저희들이 보았지요. 오늘 여기 이제 거친 들을 오고있는 도중에 사람들이 저 여인이 누군가, 라고 감탄하고 있을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그 장소, 거친 들에요. 거기에 사과나무가 있습니다. 어떤 사과나무입니까? 바로 그 사과나무는 사랑하는 그분인데요. 바로 그 아래서 사랑의 맹약을 했다. 사랑을 서로 서약했다. 사랑의 출발점, 다시 한번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친 들이요,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걸어간다면 그곳은 이 세상에 이와같이 수많은 어려움들, 또한 난관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시련들, 이런것 속에서 우리는 무얼 발견합니까? 우리의 사랑의 출발지점을 우리가 발견합니다. 우리가 사과나무를 발견한다 그말입니다. 그 사과나무는 이 여인이 프로포즈를 받고 그것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하는 분에게 사랑을 서약한 그런 장소, 사랑의 출발지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친 들에서요. 우리가 주님을 계속해서 사랑합니다. 우리가 항상 사랑하는 주님에 대해서 더욱더 깊은 사랑을 위해서 우리의 사랑의 출발 지점을 항상 마음에 두고 우리의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느끼는 그 기쁨, 그 행복을 더욱 더 깊이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지름길입니다. 비결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이외에 우리가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무슨 힘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어떤 힘으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그 다음에요, 6절 말씀을 보면요. 여기에 이 여인이 이와같은 지점을 통과하면서 사랑하는 분을 향해서 확인하고 싶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그분의 사랑은요, 철저한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요, 그것은 완벽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확인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 그것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더욱더 느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두라" 두군데를 보세요. 마음과 팔, 그것은 가슴과 어깨입니다.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를 의미합니다. 인 안에는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왕의 어인, 그것은 권위가 있죠. 그 다음에 인이라고 하는 것에는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참된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인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죠. 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상을 남깁니다. 우리가 보통 세상에서요, 외교문서라든지, 대단히 중요한 국가문서, 또는 졸업장이라든지, 면허장, 이런데 뭐가 붙어있습니까? 인이 붙어있습니다. 그것은 권위입니다. 그것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도장을 찍습니다. 인주, 도장을 인주에다 찍어서 그것을 누르면 빨갛게 도장 자국이 나죠. 그러나 이제 서양에서는요, 더러 다른 문화에서는요. 인을 만들어서, 인을 세겨서 그것을 왁스에다가 찍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찍게 될때, 도장에 있는 것에 대해서 도장의 모양이 왁스에 그대로 찍히죠. 사실은 음양, 이것의 반대로 찍혀 나오는데 사실은 그것을 어떤데는 외교문서에 거기에 붙입니다. 또는 졸업장이라든지, 중대한 문서에 그 왁스를 붙입니다. 그것은 소유권이나 권위나 아니면 사실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깊은 인의 인상을 왁스에 남겨서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보십시요.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인은 왁스에 찍힐 적에 인에 있는 모양이 그대로 왁스에 찍여 나오죠. 인상이 남는 겁니다. 우리가 이제 제사장의 의복 중에 중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흉패가 있고요. 그 다음에 어깨에 견대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모자에 금패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을 세기는 방법으로 보석에다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썼어요. 예를 들어서 흉패에는 열두지파의 이름을 보석마다 인을 세기듯이 세겼지요. 그래서 그것을 가슴에 품고 이제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어깨에는 견대가 있는데 두 호마노가 있어요. 한쪽에 여섯지파의 이름이 세겨져 있고 또 다른 쪽에 여섯지파의 이름이 세겨져 있죠. 이 제사장이 하나는 가슴에 품고, 하나는 어깨에 짊어지고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그들을 품에안고 어깨에 짊어지고 나간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이 여인은 이 사랑과 관련해서요. "너는 인같이 나를 마음에 품고" 마음 가슴에다가 이 인을 놓고요. 그것을 꼭 안아달라, 그 말이죠. 그 다음 "도장같이 팔에 두라" 가슴이라고 하는 것은 애정과 사랑의 자리죠. 팔이라고 하는것, 어깨라고 하는 것은 안보와 힘의 자립니다. 그래서요, 우리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증정해 드리고 대표해서 나가게 될때 어떻습니까? 가슴에 안고 나갑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요, 그들을 안고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안에서 그들을 지주하고 붙들어주고 그러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랑, 그것을 지금 이 여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 죽음이 뭡니까? 죽음은 한번 결정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찾아오게 될때 누구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누구를 지적하게 될때 그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는 피할 길이 없고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은 그렇게 철저하다. 그런데 사랑은요,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은요, 사랑이 우리를 향해서 지적했다면 사랑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사랑 비슷한 것이 있어요. '집착',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 집착 아닙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죠. 참된 사랑은요,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또한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다. 투기라고 하는 것, 이 투기는 두가지가 있어요. 인간의 시기, 이런 것은 죄악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질투의 하나님이라 말씀했어요. 이 질투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법을 만드실 때에 십계명 안에 제일 첫번째,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입니다. 다른 우상을 절대 섬겨선 안되는 것이죠. 우상을 섬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우리가 섬길 수 없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진리입니다. 이와같은 질투, 거룩한 질투, 그것은 사랑안에 반드시 담겨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죠. 그래서 여기 질투는, 투기는 거룩한 투기입니다. 그것은 음부같이 잔혹하다. 음부는 죽은 사람이 가는 세계입니다. 스올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계, 저 지하세계입니다. 이 음부를 생각할때 우리는 무얼 생각합니까?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 음부와는요, 타협할 수 없어요. 음부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우리가 내어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어요. 음부는 죽음과 같이 그렇게 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과 투기는요, 그것보다도 더 강하다. 이점을 이 여인은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 이 사랑을 깨달아 경험하며 지금까지 그것을 쌓아오고 즐기고 경험하고 이렇게 오면서 깨닫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것을 그 사랑하는 분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철저히 사랑하죠. 우리는 주님을 향해서 주님의 사랑은 철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그저 배울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랑을 더욱 더 즐기고 더욱 더 경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마음이죠. 그래서 사랑과 또한 투기에 관해서, 그것은 죽음보다, 음부보다 강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얼만큼 강한가? 불같이 강해서요. 그것은 화염과 같이 강해서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꽃과 같다고 했어요. 아가서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여기 딱 한번 나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게 될때, 아가서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죠. 그 사랑은요, 얼만큼 강한가? 여호와의 불꽃같이 강하다. 그것은 이거보다 더 강한 힘은 없어요. 그 불은, 그 불을 제압할 수 있는, 끌수 있는 그런 힘이 없어요. 그것은 어떤 불입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불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가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랑은 인간의 사랑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7).
우리가 부를 가지고 사랑을 사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멸시를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될 겁니다. 절대로 가산을 가지고도 살수 없어요. 그리고 사랑을 물이나 홍수로도 끌 수가 없어요. 이 사랑의 독특함과 이 사랑의 강렬함을 우리는 여기서 보죠. 바로 이것을 이 여인은 솔로몬 때문에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경험하고 즐기고 왔어요. 그래서 이 여인은 더욱 더 그것을 경험하고 기뻐하고 그 사랑안에 살기를 원하는 거죠. 저희들의 소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들이 처음으로 우리 주님을 만났을때, 그리고 그 후에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저희들이 점점 알아가면서 저희들에게는 이 사랑이 깊어가는 과정 속에서 많은 위기가 있습니다. 많은 시험거리도 있었어요. 이 사랑이 식어질만한 많은 요소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이 사랑을 키워하고 있는가? 이와같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랑이 점점 깊어가고 있는가? 이것에 대한 질문은 바로 아가서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아름다움에서 가슴의 아름다움, 유방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얼마나 여러번 보았어요? 이제 이 술람미 여인이 자기 여동생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오빠들과 함께 염려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아 8:8).
이제 이 술람미 여인이요, 정혼을 하고 그 다음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자기 동생은 이제 오빠들이 돌봐줘야 되겠다. 이 여인의, 술람미 여인의 아버지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어요. 어머니만 계속해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측으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그와같은 집안에서 술람미 여인은 자란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배경이 어쨋든요. 이제 이 여동생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다. 이것이 양육에 관한 아름다움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어떻게 염려하고 있습니까?
"그가 성벽일찐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찐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아 8:9).
자기 여동생, 이 여동생이 장차 결혼을 하게 될텐데, 그때까지 삶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장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겁니다. 오빠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우리 여동생이 성벽일진대" 여러가지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이 여동생이 이제 장차 결혼을 해서 출가를 해 가고 자기 가정을 이루고, 그럴때까지 이 여동생은 많은 어려움도 위험도 시험도 시련도 있습니다. 유혹도 있습니다. 이 유혹에 대해서 계속해서 저항하고 자기를 보호해 오는 이와같은 여성인가? 그런 여동생인가? 그렇다면 성벽이다. 자기를 보호하고 사는 그런 동생이다. 그렇다면 칭찬해 줘야죠. 장려해 줘야죠. 그래서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여기서 은 망대라는 말은요, 망대가 여러번 나왔지만 은망대라는 말은 특별히 서양에서는 이것을 '튜렛'(?)이라고 말합니다. 튜렛이라는 말은 여기 성이 있죠. 보통 성이 있으면 성벽이 있으면 성벽 코너 모퉁이에 엎으로 이렇게 구조를요, 망대라고 하는 것은, 탑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서부터 구조물이 하늘로 높이 올라가죠. 그런데 여기 은망대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땅으로부터 올라가는게 아니고요. 이미 기존하는 성벽 옆에다가 작은 탑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튜렛이라 이렇게 말하는데요. 여기서 은망대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은 만들어 준다. 이 은망대의 장점은, 강력한 힘은요, 그냥 보통 성보다 공격해오게 될때, 이 은망대 위에 올라가서 공격하면 더욱 더 강력하게 공격을 격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튀어나왔습니다. 그래서요, 튀어 나와서 올라가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공격을 하는 겁니다. 이 여동생이 계속해서 자기의 정절을 지키고 여러가지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보존하는 삶을 살았다면 더욱더 보존해 주리라는 말이죠. 성벽이라면, 우리가 은 망대를 세워주겠다. 우리가 염치와 정절을 지키고요. 우리가 결혼의 때까지 우리의 삶을 보존하고 오늘과 같은 많은 유혹거리가 있고요. 많은 시험거리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 주변의 동료들로부터 받는 압력이 있습니다. 사회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정절을 보존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이와같은 일을 위해서요, 우리는 다각도로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혼때까지 우리의 순결을 보존하고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요. 그리고 추후에 결혼하는 상대자를 위해서 나 자신을 보존하는 일은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의 전인을 통해서요.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이 모든것은 본인에게 가정안에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성벽이면 은 망대를 세워준다.
그러나 문일진대, 문은 뭡니까? 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는 것이죠. 열을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문이라면 이것은 조심해야 됩니다. 이것은 분별이 있어야 됩니다. 언제 문을 열 것인가, 언제 문을 닫을 것인가, 라고하는 분별력이 있어야죠. 문일진대, 여기에는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죠. 어떻게 도움을 줄까?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우리는 백향목을 생각할때, 그것은 레바논에 있는 나무죠. 그것은 위엄이 있습니다. 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개가 있는, 기상이 있는 그런 나무입니다. 백향목을 생각할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분은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도덕적인 영광이 있었어요.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나서 그분은 제사장이 되셨어요. 대제사장이 되셨어요. 우리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사역 중에 과거의 사역은 선한 목자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셨어요. 구속을 완성하셨어요. 현재의 사역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언자로 기도하시죠. 주님께서는 위대한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공급하시죠. 뿐만 아니라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요, 우리가 범죄하기 전에 우리가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창세기 14장에 멜기세덱에 대해서 기억하죠.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파하고 돌아올때 왕국에 도착하죠. 그때 두 왕이 나옵니다. 하나는 소돔의 왕이고 또 하나는 살렘왕 멜기세덱이 오죠. 이 두왕은 어떤일을 했습니까? 소돔왕은 사단의 역할을 했습니다. "네가 가진 이 모든 재산을 내가 너한테 주겠다." 그때 멜기세덱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멜기세덱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의 주재시요" 라고 말하면서요. 아브라함의 소돔의 왕으로부터 시험 받아서요, 거기에 굴복할 수도 있는 이와같은 위험한 상태입니다. 시험받는 상태, 그때,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상기해 주시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마음에 믿음을 보존시켜 줬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요, "네가 나에게 실오라기 하나도 주었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서요. 그는 위대한 믿음을 선포했죠. 승리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우리가 시험에 빠지기 전에, 죄 짓기 전에 우리르 도와주는 것입니다. 대언자는 무엇입니까? 대언자는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빠져 졌을때에 그때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시죠. 우리 하나님께서는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일을 위해서요, 다 구비해 놓으셨습니다. 여기 백형목 판자라고 할때, 이 백향목 판자로 보호하는 겁니다. 성문을 또다시 둘렀어요. 보호하는 겁니다. 행여나 원수가 그 안으로 들어올까봐 그것을 보호합니다. 어떻게 보호하는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우리의 삶이 성벽이라면요. 그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문이라면 여기에는 많은 분별과 또한 믿음이 필요하다. 시험거리가 있을때에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제 이와같은 배려를 그 술람미 여인은 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아 8:10).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이 여동생은 '성벽일진대'라고 하는 것은 성벽인지 아닌지 그것은 가정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나 이 술람미 여인은 성벽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정절을 지키고 살아왔어요. 사랑하는 분과의 관계에서 그 일편단심으로 그를 사랑해 왔습니다. 그것은 여태까지 입증되었기 때문에 나는 성벽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 참, 이렇게 이야기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성벽이다." 또한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이 망대라고 하는 목에 비유가 됐지요. 망대, 그것은 우리의 의지를 말하죠. 그런데 이 망대 이외에요. 이 유방을 망대같다 했을때, 망대를 생각할때 무슨 망대를 생각합니까? 우리는 상아망대를 기억하죠. 레바논의 망대도 기억합니다. 상아망대라고 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토대로 해서 그녀의 모든 의지는 그것과 관련해서 이제 결정하고 그래서 그녀의 태도는 대단히 기상이 있고 위엄이 있고 그리고 우아하다. 그리고 레바논의 망대라고 하는것은 후각과 관련이 있었죠. 그것은 분별력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나의 유방은 망대와 같다"고 이야기 할때, 이 여성의 의지, 그것은 방어를 위해서 다윗의 망대와 같이 역사하고요. 그리고 상아망대와 같이 우아하게, 기상 가운데 행합니다. 또한 레바논망대처럼 분별력을 가지고 행하는 겁니다. 그래서요, 이와같이 행하기 때문에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자 같다" 은총을 얻은자 같다. 어떤 은총입니까? 화평을 얻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샬롬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것 평화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여성형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술람미 여자라는 말도 화평입니다. 이 솔로몬이 이 여인을 보게될때 그는 성벽입니다. 이 술람미 여인은 성벽이예요. 또한 그의 유방은 망대와 같습니다. 그것을 보는 솔로몬은 그 마음속에 기쁩니다. 그래서 은총을 끼쳐줍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기의 모든 호의를, 사랑을 듬뿍 안겨줍니다. 그것을 이 여인은 느끼고 있어요. 그것 참 행복하죠.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자 같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요. 그분을 향해서 우리의 깊은 사랑을 드리게 될때 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행복감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서 11절에서요. 여기에는 솔로몬의 포도원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아 8:11-12).
바알하몬에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대단히 거대한 포도원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바알하몬의 포도원, 여기는 세겜에서, 어떤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겜에서 약 24km 북쪽으로 떨어진 도다임에 있는 그런 포도원이 아닌가, 이것은 다 추측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이 바알하몬의 포도원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만 거대한 포도원입니다. 거기에 수많은 포도원지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이제 포도원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들은 열매를 얻고나서 솔로몬에게 일천을 드립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이백은을 줍니다. 그런데 이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 지기들의 섬김, 그리고 그들이 이제 얻은 것을, 소출을 해서 은 천개를 솔로몬에게 드리고 그리고 또 거기서 이백을 받는 이와같은 포도원 안에서 일어나는 수고와 상급, 이런것을 이야기하면서요. 자기와 관련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이 여인이 1장에서는 자기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했다. 자기 오빠들이 자기를 많은 일을 시켰습니다. 뜨거운 볕에서 얼굴이 검도록 그런 많은 일을 하고요. 오빠가 하라는대로 하다보니까,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가 알지요. 여기 마지막 장에서는요, 솔로몬의 포도원을 이야기하고 거기의 포도원지기의 수고와 또한 그들이 받는 상급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서 자기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속한 내 포도원" 내게속한 내 포도원이라고 하는 것은요, 이 여인이 받은 모든 유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여인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다. 여기 포도원지기들은요, 많은 일을 하고 그리고 얼마를 드리고 얼마를 받고 이렇게 하지만, 얼마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요. 얻은것의 일부를 드립니다. 그리고 또 상급은 얼마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의 포도원은요. 자기 사랑하는 분의 포도원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포도원입니다. 자기가 관리하고 관심을 갖고 그렇게 일해야될 그런 포도원입니다. 그래서요, 그는 어떻게 합니까? 일천을 드리고 이백을 받고 그런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을 전체를 다 드린다, 그 말입니다.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자기는요,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보면 "너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하게 될때요. 우리는 이제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들 중에서 얼마를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에너지를 드리고, 또한 헌신을 드리고, 재정을 드리고, 많은 부분이 있겠지만 우리가 제일먼저 해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을 드리기 전에 고린도후서 8장 말씀에서요, 다른 것을 드리기 전에 제일 먼저 무엇을 드려야 될까? 우리 자신을 드려야 된다. 우리 자신을 드리지 않고요. 우리가 얻은 것 중에 얼마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일하게 될때, 포도원이라고 하는, 거기서 일하는 소출, 그리고 그것을 드리는 것, 얼마를 받는 것, 이 모든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포도원이 운영되려면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생각하는, 솔로몬을 향해서요. 자기의 헌신, 자기의 사랑은 뭡니까?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것이죠. 사랑은 얼마를 드리는게 아니라 사랑은 전체를 다 드리는거죠. 사랑은 나의 생애를 드리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에 있어서 나 자신을 완전히 컴잇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헌신해 드리는 겁니다. 그것이 사랑이죠. 이 여인은요, 이제 아가서 거의 끝에가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고 나는 그에게 속했다" 이제 이런데서부터요. 이제는 모든것이 다 그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여기 이것과 관련해서 저희들이 한가지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솔로몬은 천을 받고 그 다음에 포도원지기에게 이백을 준다.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봉사와 또한 헌신과 이 모든것도요.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기대하시고 이런 모든 주권적인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일에 있어서요. 그 일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평가하실 날이 있습니다. 옛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어요.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심판을 받으셨어요. 우리 때문에,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에는요. 우리들,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로, 아들로 생각하시고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말씀이 있지요. 현재, 우리는 자녀로서, 아들로서,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지금 징계하십니다. 또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요. 모임을 판단하십니다.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분께서 지역교회들을 주님께서 판단하시죠. 평가하십니다. 책망하십니다. 권고하십니다. 그런데 장차 이제 우리가 그 나라에 갔을때에, 아버지의 집에 갔을때에, 거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살펴보고 그날을 기대하고 오늘날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삶을 계산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그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갈까? 우리는 이 점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할때, 심판은 두가지 말이 있는데요. 하나는 '크라이테리언'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것은 처벌을 위해서 재판소에서 선고를 내리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가 있어요. 상을 주기 위해서 그의 모든 삶을 검사하고 상급을 주는 그와같은 플랫폼이 있습니다. 그것을 '베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할때 그것은 베마입니다. 상을 주기 위해서 우리를 검토하고 검사할 그런 날이 있다. 그때에 우리는 무엇을, 어떤 평가를 받을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펴보아야 됩니다. 검사의 목적, 그것은요. 그날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이 빛가운데 다 드러나게 될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주님은 뭘 볼까? 첫째는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사이의 관계에서, 우리 성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왔는가? 라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세요. 그래서 로마서 14장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간의 관계, 우리가 장차 주님을 만날때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성도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 성도를 위해서 살았는가? 성도와의 관계를 우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진리 가운데서, 사랑 가운데서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가? 그것을 주님께서는 보실 겁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봉사하게 되는데, 우리가 섬기는데, 우리의 동기는 어디 있었는가? 우리는 겉으로 나타난 어떤 섬김만 볼수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판단하실때, 우리의 행위 저 뒤에, 우리의 봉사 배후에 있는 동기도 주님께서 판단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혜가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될까? 우리가 어떤 동기로, 어떤 순수한 동기로,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주님을 섬겨야 되죠. 아가서 전체는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 했어요. 그것은 순결한 겁니다. 순수한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두려워해야 될 겁니다. 우리는 순수한 동기로 주님을 섬겨야 되겠죠. 또 한가지, 우리가 봉사하게 될때 사용하게 되는 방법은 뭔가? 우리는 말씀을 따라서 섬기는가? 아니면 우리의 아이디어를 통해서 섬기는가? 우리의 생각을 따라서 섬기는가? 법대로 경주하지 아니하면 빨리가도 상이 없어요. 88올림픽에 캐나다 선수가 금메달을 뺏겼죠. 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뺏겼습니다. 법대로 하지 않으면요. 내 생각에서는 이리로 달려간다고 생각하고 위대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보시게 될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을 뺏길 겁니다. 그래서 사용하는 방법,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까?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재료, 금과 은과 보석인가? 아니면 나무와 풀과 짚인가? 이것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해서 이 바른 가르침 위에서 건설해야 된다고 하는거죠. 우리는 이와같은 것을 생각하면서요. 이 심판의 원칙, 잠깐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귀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가게 될때, 종들에게 각각 므나를 주죠. 다 하나의 므나를 줬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똑같은 책임을 가지고 있다.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요, 주님 앞에서 똑같은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똑같은 책임을 어떻게, 얼만큼 우리가 충성되이 이것을 이행할까? 이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모임 안에 들어와서 교제하며 섬기게 될때요. 나는 내가 편하기 때문에, 내가 즐겁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를 얻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부르심에 따라서, 책임을 따라서 내가 뭔가를 할까,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가? 우리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또 한가지, 달란트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 그것은 서로 다른사람에게, 다른 숫자의 달란트를 줍니다. 그것은 각 사람들의 역량입니다. 각 사람의 은사가 다릅니다. 그 은사가 다르지만 그 은사에 따라서 얼만큼 내가 충성했는가? 그것이 심판의 원칙입니다. 또 하나, 노동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말씀을 보면 아침 새벽부터 온 사람과 이제 저녁 오후 5시, 이것을 보통 11시라고 하죠. 제 십일시라고 말합니다. 보통 십일시라고 하는 것은 숙어로 거의 막차를 탔다는 그런 말입니다. 거의 끝나갈때쯤 와서 한 사람, 그 사람이 한데나리온 받았죠. 아침에 온 사람이 불만을 품었습니다. 저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나는 열두데나리온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는데, 가서 보니까 한데나리온 받았어요. 그는 화가 났죠. 우리는 이 비유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게 될때,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가 나를 평가한 것에 대해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로운 판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는 상급을 받을 사람인가? 아니면 상급을 잃어버릴 사람인가? 만일 우리가 자기 야망을 통해서요. 주님을 섬긴다면, 인간의 칭찬을 원해서 주님을 섬긴다면요. 또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은근히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그날에 가서는 모든것이 다 드러납니다. 우리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어떠한 평가를 받을까?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에 두어야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가장 지혜롭게 이해할 수 있다면, 무엇입니까? 아가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모든 것들은요. 자기 야망도 아니고,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한 사람들의 인기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겁니다. 므비보셋이 땅을 얼마나 얻느냐, 그것 때문에 다윗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윗 그분께서 오시는 것 때문에, 그분과 같이 앉아 있는 것 때문에, 그것이 기쁘고 그것이 즐겁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 그것은요. 우리가 주님을 이제 공중에서 만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때, 주님께서 잘 했다. 종에게 칭찬하시는 말씀을 하시게 될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요. 13-14절 말씀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너 동산에 거한자야" 이 여인은요, 갈릴리에 왔지요. 갈릴리의 여러 동산에, 호도동산에, 여러 동산에 다니면서 꽃도 보고 또 꽃술도 보고 은도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다녔어요. 동산에 거하는 여자입니다. 아니, 이 여자 자신이 동산입니다. 잠근 동산이었죠. 그 동산 안에 그 사랑하는 분이 와서 많은 것을 즐겼죠. 그 자신이 동산이고 동산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 솔로몬 자신도 지그므 이 여인과 함께 지금 있었어요.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아 8:13).
이 여인의 목소리는 이제 동무들도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요.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솔로몬이 듣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2장에서 이미 "나는 너를 보고싶다. 네 모양을 나에게 보여달라. 네 얼굴을 나에게 보여달라. 네 음성을 나로 듣게하라." 그런 말씀을 우리 들었죠. 이것은 사랑하는 분이 언제나 우리를 향해서 원하는 겁니다. 동무들이 소리를 듣고싶어 합니다. 우리의 동무들이요. 세상의 여러 사람들이 우리의 소리를 듣고싶어 하는가? 주님께서 또 우리의 소리를 듣고싶어 하는가?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는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를 위해서는 잠잠해야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는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을 때로는 행동으로, 때로는 말없이,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됩니다. 그것을 동무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간증을 사람들은 보고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핍박하고 반대하고 많은 경멸의 또는 멸시의 그런 표시도 하고 언어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 속에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어 황량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앞에 드릴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반대하고 핍박해도 그들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말을 들어야 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항해하게 될때 사도바울이 타고 있었던 그 배의 모든 사람들은 사도바울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측했던 모든 일들은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주었던 모든 말씀은 희망을 주었고 소망을 주었고 2주동안 음식 한끼도 먹지 못하고 고민과 두려움과 죽음 속에서, 그들은 풍랑속에서 가던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해 주었을때, 그들은 생기가 났고요. 벌떡 일어났죠. 사도바울은 그들 가운데 참된 복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사람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요, 이 사랑하는 여인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네 동무들이 귀를 기울이니, 나도 듣게하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아 8:14).
여기 이제 마지막 절에 당도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여기 향기로운 산이라는 산이 나왔습니다. 아가서에요, 네가지 산이 있습니다. 첫째, 2장 17절에 베데르산이 있습니다. 베데르산은 격리의 산이죠. 우리 주님의 임재를 멀리 느끼게 될때, 이 여인은요. 베데르산을 넘어서 빨리 와 주십시요. 주님의 부재에 대해서 그 여인의 마음 속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산을 넘어서 빨리 와 주시기를 그렇게 소원했죠. 몰약산이 있고요. 유향의 작은 산이 있어요. 그것은 4장 6절에 있습니다. 몰약산이라고 하는 것은 갈보리산의 향기가 나는 산이죠. 유향의 작은 산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 나타난 아름다운 향기, 그것이 가득한 산이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산에 머물러야 됩니다. 우리 주님이 부재시에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임재를 거기서 느낄 수 있습니다. 세번째요, 표범산이 있습니다. 4장 8절 말씀입니다. 표범산에는요,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삼키기 위해서 두루 다니는 이런 원수들이 있죠. 그러나 주님의 임재와 함께 레바논의 산을 가게 될때 그는 안전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에 향기로운 산이 있습니다. 향기로운 산들, 시골집을 방문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솔로몬의 본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요, 솔로몬과 함께가고 있어요. 솔로몬과 함께 가고 있는 그 모든 장소는 그것은 향기로운 산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산,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장소, 그것은 산이든, 들이든, 그것이 거친 들이든, 어떤 곳이든지 그곳은 향기로운 장소입니다. 이 여인은요, 지금 주님과 함께 본향으로 가고있다. 지금 육체적으로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부재중이십니다. 주님은 떠나계세요. 주님은 다시오실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임재를 우리가 느끼고 갈때, 우리는 계속해서 이 세상이 향기로운 산입니다. 그분의 오심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소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노루, 어린 사슴, 대단히 빠르죠. 주님이 오시기를 그렇게 간절히 고대합니다. 사도바울께서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써 구원하시는 그분께서 오신다." 말씀했습니다. 계시록 22장 20절에서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가서는요, 주님의 임재로 인해서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기쁨과 희락과 즐거움과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 그리고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느끼고 그분을 찬양하고 사랑이 점점 깊어가는 것을 우리가 봤어요. 우리는 이 마지막절에서요, 주님의 오심, 그것에 대해서 간절히 소원하는 이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 어서오십시요. 그러나 주님 오실때까지 저희들 가운데 공식적으로 주님 말씀했어요.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거기 있겠다"고 말씀했어요. 주님의 임재를 주님께서는 약속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임재를,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우리는 집합적으로 모임에서 주님의 임재를 즐깁니다. 이와같은 임재를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모임 안에서 우리가 즐겨 나가게 될때 여기는 향기로운 산입니다. 주님께서 어서 오십시요. 그 마음을 우리가 안고요,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계속해서 즐기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주님께 찬양을 드리고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요.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개인적인 간증, 그리고 모임의 집합적인 간증이 계속해서 드러나도록, 그래서 세상이 향기를 맛보도록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이 계속해서 향기로운 산이 되도록, 우리는 주님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함께 아가서를 여행하게 될때, 함께해주신 여러 형제 자매님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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