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10. 신부를 향한 예루살렘 여자들과 왕의 칭송, 신부의 고백, 첫사랑을 새롭게 함,7장 1-13절 >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 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아 7:1-13).
주님께서 봉독한 말씀에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들은 5장에서 신부가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해서 신랑을 기뻐하며 신랑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6장에서는 그것에 화당하는 신랑의 신부를 향한 칭송, 찬사, 이런 것들로 이어지는 것을 보지요.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신부는 자기 자신의 누추함, 원래 근본이 갈릴리 출신이었던 자기 자신을 보면서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이제 또한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을 향해서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겠다. 라고 할때, 나한테서 무엇을 볼 것이 있느냐? 라고 하는 겸양의 언어를 저희들이 보고 있습니다. 사실 6장 마지막 13-14절 말씀은 7장으로 이어집니다.
7장에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 여인들이 이제는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서 지금까지 신랑이 보여준 사랑, 그 사랑이 너무나 귀하다. 포도주보다 더 낫다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신랑과 신부의 사랑의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달팽이 계단과도 같이 계속해서 이제 계단을 올라가게 될때,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요. 이와 같은 것은 아가서에서 계속해서 저희들이 발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의 대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의 깊이가 점점 깊어진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신부가 경험했던 장애물도 있었습니다. 고민도 있었습니다. 마음 속에 마음 고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과하면서, 극복하면서, 신랑과 신부 사이에 이 관계는 특별히 신부 쪽에서 점점 더 깊어지는 사랑을 저희들이 보며,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운 그 모습에 감탄하는 그런 모습도 어제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이제 놀라운 것은 신랑과 신부 사이의 이와 같은 사랑의 교제, 사랑의 찬사를 주고받는 이와 같은 사랑의 깊이가 더해가는 모습을 볼 뿐만 아니라 이제 7장에 와서는 예루살렘 여인들이 신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신랑과 신부 사이의 사랑의 깊이가 깊어갈때에 이 주변에 있는 예루살렘 여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간증이죠. 간증의 가장 기본은 저희를 구원해주신,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사랑의 표현, 그리고 그 표현은 사랑하는 분과의 깊은 관계로부터 나오는데, 이와 같은 관계, 이와 같은 표현을 주변사람들은 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활동과 섬김을 통해서 간증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 이전에,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는가,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즐기는가, 그분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에 대해서 어떻게 매력을 느끼고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주님의 매혹으로 인해서 우리가 흡인되어서 주님과 교제하는 이와 같은 즐거움을 우리가 누릴까? 거기서부터 모든 다른 주님을 향한 헌신과 봉사와 또한 사역도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것을 보고 이제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찬사를 드립니다. 사실상 신부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저희들이 본 것처럼 어디로부터 연연한 것입니까? 신랑으로부터 온 것이죠. 따라서 신부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볼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사랑하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환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간증이죠. 그래서 오늘 저희들은 특별히 7장 1-5절 사이에 예루살렘 여인들이 열가지 항목에서 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이것은 신부가 지금까지 보여준 신랑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사랑의 깊이, 이것을 통해서 아름다운 간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라고 하는 점을 저희들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강력한 그와 같은 간증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아 7:1).
제일 첫번째 예루살렘 여인들이 이 신부를 향해서 "귀한 자의 딸아"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요, 우리가 6장 마지막 부분, 13절에서요. 이 신부에 관해서 처음으로 술람미 여인,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 술람미 여인이라고 하는 말은, 첫째로 수넴 사람이다, 수넴 여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지명을 따라서 어떤 사람을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캐나다 사람을 캐니디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지명을 따라 부른 이름, 데모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술람미 여인, 수넴 여인이라고 한다면 아비삭, 다윗을 말년에 섬겼던 아비삭, 수넴 여인입니다. 그 다음에 엘리사 시대 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고 또 자기 담 위에 방을 짓고 거기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 이런 것을 마련했던 귀한 여인, 그 여인도 수넴 여인입니다. 이 술람미 여인이라고 하는 말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여성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게 될때,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그렇게 칭함을 받았죠.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모이면 그리스도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나타낸 좋은 간증이었는데요.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술람미 여인, 그는 솔로몬에게 속했습니다. 바로 이 여인이 7장에 들어와서는 어떻게 불립니까? "귀한 자의 딸"이라 불립니다. 왕자의 딸이라는 이런 말인데요. 귀족입니다. 귀족을 흔히 레이디라 부르죠. 이 여인은 레이디입니다. 누구로부터 이런 말을 받았습니까? 예루살렘 여인들로부터 이런 말씀을 받았는데, '귀한 자의 딸'이라고 할때요,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귀한 자, 그 지체가 높다는 말이죠.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 오늘날 많이 회자하고 있는 단어가 있는데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족으로서, 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된다는 말이죠. 귀족이라면 그것을 자랑하고 그 특권만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 저희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은 귀족입니다. 저희들은 왕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그분께서 저희들을 구원하셨어요. 저희들은 위로부터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희들의 신분은 대단히 높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이 높은 신분, 그리고 그 신분 안에 담겨있는 특권, 이 고고한 특권을 어떻게 사용하고 이 세상에 살아야 될까? 그것은 첫째, 저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영혼들의 복지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람들로 살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되지요. 저희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이 진리가 사람들을 살리고 사람들을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는데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 심령 속에 유익을 끼치고 살아야 되겠지요.
이것이 예루살렘 여인들이 이 여인을 바라보면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귀한 자의 딸' 제일첫번째 이 신부로부터, 이 귀한 자의 딸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예루살렘 여인들의 눈에 보인 아름다움,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발입니다. 그런데 맨발이 아니고요. 그것은 신을 신은 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때요, 또는 신부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때에,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때에, 눈으로부터 시작해서요. 그런데 신부가 신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때 어디로부터 시작했습니까? 머리로부터 시작했어요. 머리털, 그 다음에 눈, 뺨으로부터해서 점점점 내려갑니다. 그런데 오늘 저희들이 7장 말씀에서 보게 될때, 예루살렘 여인들의 눈에 비친 신부의 아름다움, 그것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가? 발로부터 시작됩니다. 발로부터 시작되어서요. 점점점 올라가서, 나중에는 머리와 머리털까지 올라갑니다. 이것이 신랑이 신부를 보는 각도와 사람들이 신부를 보는 각도가 다르다. 신랑이 신부를 볼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사람들이 신부를 볼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발이었어요. 신을 신은 발이었어요. 그렇다면 신을 안 신은 발, 그것을 맨발이라고 우리가 말하죠. 맨발은 성경에서 무엇을 말합니까? 맨발은 수치를 말합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보게 될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에게 포로되어 끌려갈때, 그들은 발가벗겨져서 끌려갑니다. 그리고 맨발로 끌려갑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주하게 될때, 그와 같은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나라가 보좌가 위태하고, 그것도 자기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 너무 슬퍼서, 그것은 다윗에게 수치입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걸어갔어요? 울면서 맨발로 걸어갔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또 한가지 생각해 보게 될때,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올때, 그들은 맨발로 갈 수가 없었어요. 여행하게 될때 그들은 신을 신어야 됐어요. 우리는 성경에서 이 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때 무엇을 말합니까? 발의 아름다움, 그것은요. 우리가 로마서 말씀에 보면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메세지를 전하는 사람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것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만, 복음을 증거하는 그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할때,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따라서 신을 신은 발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산을 넘는, 복음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발이다. 이 여인들이, 이 여인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은 발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통해서요, 주님을 알게되고 거기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제일 첫번째 아름다움을 거기서 만나볼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신을 신은 발입니다. 주님께서는요, 우리의 눈을 바라보세요. 이 두가지는 대단히 중요하죠. 우리의 눈이 주님을 향해 있을때, 그 아름다운 눈, 주님이 보실때 그윽하고 또 주님만 바라보고있는 아름다운 눈, 그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감탄합니다. 그 눈을 가진 사람은 신을 신고 복음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그 다음에 "네 넓적다리" 두번째는 넓적다리입니다. 이 넓적다리라는 말은요, 이것을 더 정확한 말로 번역한다면 그것은 고관절입니다. 넓적다리의 가장 윗 끝의 관절, 그것은 골반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 몸의 해부학적으로 가장 강력한, 가장 힘이 센 관절은, 수많은 관절이 있습니다만, 가장 힘이 센 관절은 고관절입니다. 이 고관절을 옛날에 고문하게 될때, 능지처참, 아주 강한 악한 범죄자들을 처형하게 될때, 말에다가 사지를 묶어서 잡아 당겨서 고관절을 빼는 거죠. 이건 참 고통스러운 경험이겠죠. 이 고관절이 아름답다. 신을 신은 발이 아름답고요, 그 다음에는 다리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고관절이 아름답다. 그것은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이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 보석과 같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요. 고관절을 생각하게 될때, 성경에서는 즉각 야곱을 생각하게 됩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오게 될때, 에서를 만나기 직전에 그는 얼마나 많은 고민 가운데 있었습니까? 자기 가족들을 다 앞서 보내고, 또 종들을 먼저 보내서, 사신처럼 보내서, 그들에게 예물도 보내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마지막, 그는 강을 건너기 전에 이제 밤에 하나님을 만나죠. 하나님의 사람이 내려와서 그와 씨름하죠. 그날 밤에 그는 그 하나님의 사람과 천사와도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가 나를 가게하라고 할때 그는 계속해서 붇들었죠. 얼마나 쎘습니까? 얼마나 강했어요? 그래서 그 천사는 그를 쳤습니다. 고관절이 빠졌습니다. 고관절이 부러진 것이 아니라 고관절이 탈골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에서를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계획들, 이 계획들은 그의 생각이었죠. 한국에 와서 최근에 들은 말은 JQ, 잔머리의 지수다, 그런 말을 들었어요. JQ가 정말 높은 사람이었어요. 많은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공격하면 이런 방법으로, 저렇게 공격하면 참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참 탁월한 사람인데요. 그 모든 것은 다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어요. 고관절이 빠짐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 신부가 고관절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이 만든 보석과 같다, 구슬꿰미와 같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이 여인을 붇들고 인도하시는 것을 말하죠. 더이상 육을 의지하고 자기 생각대로 걸어가는 그런 모양은 아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게 될때, 육신적으로 생각하고요.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고 육신적인 생각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게 될때, 그것은 얼마나 보기 흉한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요. 이 여인이 성령의 인도 가운데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아가서 전체를 통해서요. 여러가지 우리의 눈으로 볼수 있는 대상물을 놓고 우리 마음 속에 심상을 넣어주면서 지금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 보석, 그리고 고관절, 이 이야기를 보게 될때, 이 신부는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서,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심지어는 예루살렘 여인들이 그 아름다움으로 칭송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참 우리의 관심거립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 속에 두고요. 우리의 삶이,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살수 있도록, 그것은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가 간증을 드러낼 수 있는 길입니다.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아 7:2).
또 한가지, 배꼽은 섞은 포도주와 같다. 여기서 배꼽이라는 말은요, 이건 뭘 말하는가? 여성의 옷 중에서요. 버디스라는 옷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으로부터 시작해서 허리까지 쫙 달라붙는 옷이예요. 다시 말해서 버디스가 커버할수 있는 몸, 그것은 몸통입니다. 목에서부터 몸까지요. 이 전체의 부분을 지금 배꼽이라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 부분을 어디에 비유하고 있습니까?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둥근 잔이라 비유하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담긴 둥근 잔이다. 포도주가 가득히 찼어요.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포도주는 항상 기쁨을 말하고 있죠. 갈릴리 가나 잔치에서 기쁨이 사라졌어요.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그러나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이 위기를 모면할수 있었던, 피할 수 있었던 놀라운 키는 주님께서 거기 계셨고 주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죠. 그래서요, 전보다 평균 결혼식때 사용하는 포도주보다 훨씬 나은 포도주, 그것 때문에 연회장은 놀랐죠. 보통 처음에는 좋은 것, 이제 조금씩 취하다보면 점점 나쁜 것을 공급하는, 그것이 결혼식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는데 이 잔치에서는 어떻게 지금 이런 좋은 포도주가 나올 수 있는가? 주님이 계시면 좋은 포도주가 나옵니다. 주님이 계시면 우리 생활은 기쁨 속에 살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위기를 당하지만, 때로 우리는 결혼 생활에서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어려움에서 기쁨을 상실하는듯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주님이 계시면 거기에서 참된 기쁘을 누립니다. 어떤 기쁨입니까? 일반적인 결혼식보다 훨씬 나은 포도주,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느낄수 없는 진정한 기쁨을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고 그것은 항상 우리 가운데 임할 수 있는 위기로부터 우리가 탈피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배꼽이라고 하는, 몸통이랄고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요. 예루살렘 여인들이 감탄한 것은 이 여인은 기쁨 가운데 사는 여인이다, 그 말입니다. 가득한 포도주, 그 잔, 이 잔은 사실 몸통과 비슷합니다. 그 안에 뭘로 채워져 있어요? 포도주로 꽉 채워져 있어요. 반이 아니고요. 위에까지, 아구까지 완전히 꽉 찼어요. 그것은 주님이 주는 진정한 희락, 그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좋은 간증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서요. 여러가지 세상에 살면서 위기가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여전히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우리가 누릴때에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우리가 기쁠때에 그것을 주님에게 돌려드릴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살면서 우리가 기쁜 삶을 살고 우리 가정이 기쁨과 희락 속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이 때때로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쁨을 계속해서 보존하고 나가는가?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임 안에 참된 기쁨, 주님이 주시는 기쁨,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고 가는가? 이것은 개인적인, 가정적인, 모임의 간증이다, 그 말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즐기시죠. 우리 주님께서는요, 세상에서 배척을 받으신 분입니다. 세상은요, 주님으로부터 받은게 없어서 주님께 돌려드릴게 없어요. 그래서 주님을 배척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그래서요,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때 항상 배척을 받고 세상으로부터 받을 것이 없어요. 세상은 사실 줄 것이 없어요. 왜? 주님을 배척하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게 없어 주님께 드릴것이 없어요. 그래서 배척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때, 어디로 가셨습니까?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그 집 사람들은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은 어떻습니까? 모임은 주님께 받은 것이 있어서 주님께 드리는, 다양한 것으로, 예배로부터 시작해서요. 우리는 다양한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그런 모임인가? 우리는 그런 가정인가? 그런 개인인가? 우리는 이것을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허리입니다. 허리라는 말은 배라는 말입니다. 이 배라는 말은 언제나 그것은 내적인 감정, 심장이라고 말하고 내장이라고도 말하고 그랬지요. 여기서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과 같다. 추수때가 되면요, 이스라엘에서 밀단들을 모아 놓지요. 이 밀단들을, 거기서 이삭이 떨어지거나 바람이 불면 이삭이 떨어지거나, 또는 새들이 와서 먹지 못하도록 그 주변을 에워쌉니다. 특별히 추수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 기쁨의 증표로, 백합으로 둘러쌉니다. 추수라고 하는 자체가 기쁨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일년의 기쁜 때, 그것은 추수 때죠. 우리는 이 기쁨을 주님께 드리는 일에 있어서, 주님께서 이 기쁨을 즐거워 하시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주님께 우리는 기쁨을 드리는가? 이 밀단이 잘 보호가 되도록 경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밀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추수의 기쁨을 그것을 감사로 표현하는 이와같은 시기지요. 거기에 백합으로 에워쌌습니다. 백합은 순결한 거죠. 영광을 말하죠. 이것들로 둘러싸여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수확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즐겁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주님께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밀단을 보게 될때, 그 밀단은 추수때로서 기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항상 기쁨을 드리는 일에 이렇게 백합으로 에워싸서 보호하듯, 우리는 그와같은 일에 항상 깨어서 경호하고 있는가? 경계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항상 마음에 두어야 되겠지요. 밀단과 기쁨,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포도주죠. 밀단과 포도주, 그것은 떡과 잔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떡과 잔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죠.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는 항상 마음에 두어야 되겠다는 겁니다. 신부는 그런 일에 있어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아 7:3).
다음은 두 유방입니다. 두 유방은 암사슴 쌍태 새끼와 같다. 이 유방에 관해서는 여러번 나왔어요. 이 유방은, 가슴은 애정과 양육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여러차례 생각해 보았지요. 애정의 자리입니다. 그 다음에 자식들을, 새끼를 기르는 그런 양육의, 보양의 자리다. 이 가슴은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가슴은 대칭을 말합니다. 그래서 거기엔 조화와 균형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이 유방은 연합을 말합니다. 그것은 또한 자식들을 기르는, 새끼들을 기르고 먹여서 기르는, 그것은 보양의 자리라고 했는데요. 그것은 성숙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숙의 자리입니다. 성숙과 그리고 애정으로 연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랑과 신부의 애정관계를 잘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가 자식을 기르기 위해서는 부모로서, 부부관의 관계가 즐겁고 행복해야 됩니다. 그래야 자식들을 잘 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정, 그리고 양육, 둘 중에, 애정이 선행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애정, 그것은 자식들을 잘 보양할 수 있는 그런 유일한 길입니다. 이 두가지는 뗄레야 뗄수가 없죠. 그래서 이 두 유방, 가슴이라고 하는 것은 애정과 양육의 자리다. 그 두가지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 자리는 위로가 되는 자리고요. 거기에는 보양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전능자라고 할때, '엘샤다이'라고 말합니다. '엘'은 하나님이죠. '샤다이'라는 말은 힘이라는 말입니다. '힘의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분입니다. 못할 것이 없는 우리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샤다이'가 아니고요, '샤드'라고 할때, 그것은 유방입니다. 그래서 사실 전능자라는 말의 뜻은 그것은 하나님께서요, 막강하신 분이시다라는 말인데요. 어떻게 막강한가? 우리에게 공급하심으로 유방과 같이, 공급하심으로 우리를 세우고 우리를 기르시는데 전능하신 분이다, 라는데서 유래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애정, 그리고 보양, 이 두가지를 통해서요. 이 신부는요, 이 두가지 면에서 예루살렘 여인들이 잘 관찰하면서, 저 참 아름답다고 표현한 거죠.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서 암사슴의 쌍태 새끼와 같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그렇게 표현을 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전능자로서 우리를 보양하고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공급하시듯, 이 여인이 신랑과의 애정, 그리고 그것은 무엇으로 이어집니까? 양육으로 이어진다. 그것을 예루살렘 여인들은 보면서 그것은 절묘한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매력적인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의 사랑, 특히 부부관계의 사랑에 대해서 대단히 관심을 갖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이어지는 보양에 관해서 가정 교육에 관해서, 자녀 양육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지 못하게 될때, 세상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세상은 애정에 관한 무슨 테크닉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자녀 교육에 관한 무슨 세미나를 말하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고요, 이 예루살렘 여인들이 이 여인을 통해서 보고있는 그 유방의 아름다움, 그것은요. 칭송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두가 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으로부터 이 모든 것은, 애정과 보양은 다 오는 것이다. 이 여인은요, 왜 이와같은 아름다움에 대해서 찬사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왜냐하면 그의 사랑하는 신랑과 깊은 교제 가운데 지금까지 계속 왔기 때문에 이와같은 칭찬을 받고있다. 이와같은 것은 테크닉이 아닙니다. 이와같은 세미나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와같은 것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되는 것입니다.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아 7:4).
또 한가지 볼수 있습니다. 목은 상아 망대 같다. 우리는 목이라고 할때, 전에도 보았지요. 목은 의지의 장소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어떨때 아름다운가? 우리는 신랑이 신부의 목에 관해서 찬사를 올린 것을 우리가 보았죠. 목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고집, 우리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서 행하는 거죠. 그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에는 "다윗의 망대"라고 이야기 했는데요. 예루살렘 여인들이 이 여인의, 신부의 목을 보게 될때는 "상아 망대"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상아, 지난번에 우리는 상아를 봤어요. 상아는, 많은 보석의 종류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아주 희귀한 생명체로부터 얻게되는 보석이 상아임을 알지요. 상아는 코끼리가 죽어야 됩니다. 죽지 않고는 그 상아를 뺄 수가 없어요. 살아있는 코끼리에서 우리가 상아를 계속해서 즐길수가 있겠어요? 상아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고통을 말합니다. 죽음의 고통을 말합니다. 이 여인이 목이 상아 망대라고 이야기 할때, 그것은 뭘 말할까? 신부의 의지는요. 주님의 죽음에 관한 깊은 이해,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은 죽음 때문에 그분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깊은 사랑, 그것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의 의지는요. 항상 주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거기서 자기를 얼만큼 사랑했는가라고 하는 그 사랑 때문에요. 그의 의지는 언제나 그분의 뜻과 일치하는 겁니다. 순종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와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아 망대라고 하는 것은 신부 자신의 은헤로운 몸가짐을 말합니다. 또 고상한 품격을 말합니다. 또 그녀가 처신하게 될때 위엄있는 모습, 그 모든 것은 사랑하는 분의 깊은 사랑, 어디서부터 나온 사랑입니까? 심지어는 죽음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 그것을 항상 마음 속에 두고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요.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할수 있습니까? 그분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 사랑은 말로 할수 없는 깊은 사랑입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우리가 느끼게 될때, 우리는 내 주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인데도 내 주장을 하는거죠.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참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간증에 저해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상아 망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눈입니다.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헤스본은 모압의 수도죠. 여기는요, 모세가 여기를 정복하기 전에 아모리왕 시온이 있었던 곳입니다. 여기는 요단강이 사해로 들어오는 이 접점, 거기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도시지요. 거기에 성경에 딱 한번밖에 나오지 않는 '바드랍빔 문'이라고 하는 문이 있는데, 그 문 앞에 못이 있습니다. 이 독특한 구조 때문에 예루살렘 여인들이, 특별히 팔레스타인 땅 안의 요단 이쪽에 있는 구조물들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저쪽 요단 동편에 있는 이방 땅의, 사실은 이것을 갓이 얻었지요. 옛날엔 이방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그런 땅이었는데요. 그곳에 있었던 독특한 장소, 문이 있고요. 그 앞에 못이 있습니다. 이 못을 이야기하게 될때, 이 못은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못입니다. 그 못은요, 문 앞에 있기 때문에 저쪽에서 보면 문이 물에 비치겠죠. 술람미 여인, 예루살렘 여인들이 보게 될때 그녀의 아름다움, 그것은 이 문 앞의 못과 같다. 그것은 맑습니다. 그것은 고요합니다. 평화롭다. 그리고 비췬다는 겁니다. 이 여인의 눈에 누가 비치고 있는가? 주님이, 신랑이 비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여인은 마치 못과 같아서 우리가 못을 바라보면 우리 얼굴이 비취죠. 주님의 모습이 이 여인의 눈에 비치고 있다. 우리는 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이미, 신랑께서는 눈이 아름답다. 제일 첫번째, 아름다운 미의 매력 포인트 넘버 원은 그것은 눈이었습니다. 그 눈에 누가 비치고 있는가? 주님이 비치고 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우리의 모습이 비치죠. 못에, 교요한 못, 막 출렁이는 못에는 우리의 모습이 잘 비치지 않습니다. 출렁이는 못에 우리의 모습을 바라 볼때에 어떻습니까? 우리의 얼굴이 다 일그러지고 파괴되고 깨집니다. 그러나 고요한 못에 우리의 얼굴을 못 앞에서 바라볼때에 그대로 비취죠. 거울처럼 비칩니다. 주님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그 눈, 그리고 그분을, 그분만을 마음 속에 두고 있고 그 눈에 비춰있는 그 모습대로 이 여인은 그분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런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이 여인의 눈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이것이요, 예루살렘 여인이 보는 관점에서의 이 여인의 눈이었습니다. 주님이 보실때, 이 눈은 주님만 보시는 눈이었어요. 그래서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예루살렘 여인들이 보게 될때 이 눈은 제 삼자가 봅니다. 신랑이 신부의 눈을 이야기 할때는 그것은 당사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랑의 대상의 눈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지만, 예루살렘 여인이 신랑과 신부를 놓고 이야기 할때, 제 삼자로서 이야기 합니다. 신랑의 모습이 그 눈에 비치고 있는 그 눈, 그것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대로 비치고 있다. 그 모습이 부서져서 비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비치고 있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게 될때, 우리 눈을 가지고 영력을 가지고, 영적인 시야, 시력을 가지고 주님을 보게 될때, 주님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님의 모습을요, 우리의 눈 안에, 망막속에, 스크린속에 그대로 받아 들이는가? 이거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주님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일그러진다면, 상이 깨진다면, 우리에게는 대단히 슬픈 결과가 올겁니다. 이 여인의 아름다움은요, 주님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눈입니다.
그 다음에 코가 있습니다.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와 같다. 코가 높다는 말입니다. 코가 높아서 망대와 같은 코다. 그게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다메섹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메섹, 그것은 아람사람, 시이라 사람입니다. 이들은 호전적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공격해 올까, 그런 점에 대해서는 파수하고 경계하는 그런 망대입니다. 망대는 언제나 그런 것이죠. 특히 시리아 사람, 그 사람은 악한 사람들이었어요. 그것은 성경에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서 항상 깨어있다. 그런데 코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오감 중에요, 우리에게 오감이 있죠. 시각, 청각, 미각, 미각, 촉각, 그리고 후각이 있습니다. 시각, 청각은요.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습니까? 파장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시각이라고 하는 것은 광파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청각이라고 하는 귀는 음파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 다음에 촉각이라고 하는것은 무엇을 통해서 깨닫습니까? 그것은 접촉함을 통해서 깨닫지요. 압력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우리 피부의 어떤 것이 와서 압력을 가합니다. 그것의 표면의 질에 따라서 우리는 눈을 감고도 이것은 대강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을 분별할수 있죠. 그런데 후각과 미각은 무엇입니까? 후각과 미각은 분자, 입자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미각이라고 하는 것은 입자가 물에 섞여 있을때 깨닫습니다. 혀를 통해서요. 그러나 후각이라고 하는 것은 입자가 공기를 통해서 우리의 코 안에 들어왔을때, 코 안의 점막에서 그것이 살짝 녹습니다. 그래서 깨닫습니다. 인간의 코 안에 230만개의 후각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얼만큼 냄새를 잘 맡을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제한이 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냄새를 잘 맡는 것은 개인데, 블랙하운드라고 하는 불독 스타일의 개입니다. 그 개는요, 사람의 후각 세포보다 백배나 더 많습니다. 2억 3천만개의 후각세포가 있어서 그들은 벌써, 그래서 그런 개들을 사용하죠. 그런 개들을 끌고 다시면서 냄새를 맡게해서 인간은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후각은 대단히 독특한, 특별한 감각입니다. 그것은요, 공기속에 날아다니는 것들, 입자를 통해서, 그것을 냄새를 통해서 우리가 분별해 내는 것인데요. 여기 특별히 코, 이 코는 납작한 코가 아닙니다. 제사장이 될 때요. 불완전한 코를 가진 사람은 절대로 제사장이 될수 없었어요. 이 코는 냄새를 맡고 분별하는 겁니다. 어떤 냄새입니까? 원수가 접근해 오는 것에 대해서 미리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코입니다. 특별히요, 여기 레바논의 망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레바논에 무슨 망대가 있을까? 레바논 산은 두가지가 있지요. 레바논 산맥과 항 레바논 산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요, 여기에 망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산맥 위에 있는것이 아니고 레바논, 그리고 항레바논 산맥 사이에, 거기에 있는 구조물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망대는요, 다메섹은, 시리아는 이쪽에 있어요. 항레바논 산맥보다 더 동쪽에 있습니다. 이 망대가 이 두 산맥 사이에 있다면 이 망대에서는 절대로 시리아 사람이 오는 것을 볼수 없어요. 그들의 산을 넘어서 오는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분별력입니다. 이 여인이요, 이와같은 탁월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분별력도 여러가지가 있죠. 시각을 통한 분별력, 청각을 통한 분별력, 미각을 통한 분별, 여러가지 촉각의 분별력도 있지만, 이 후각의 분별력, 이것을 가지고 있다. 참 분별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분별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많은 잘못된 결정을 내립니다. 만일 우리가 바른 분별력이 있었다면 우리는 바른 결정을 했을텐데, 라는 후회를 하지요. 그래서요, 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 여인들이 감탄하는 것은, 그것은 후각, 분별력이다. 보이지 않는데도 냄새로 아는 겁니다. 우리가 보고만 아는 것이 아니고요. 보지 않는데도 알수 있다. 참 이거 놀라운거죠.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순종할때, 우리는 분별력을 기를 수가 있습니다.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아 7:5).
그 다음에 이 여인의 아름다움, 또 있습니다. 갈멜산에 비유하고 있는 머리입니다. 우리 신랑의 머리를 지난 시간에 생각했지요. 신랑의 머리에는 많은 생각이 있다. 보배로운 생각이 있다.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많은 계획, 이 엄청난 생각들, 사실은요. 이 신부의 머리, 신부는요. 항상 그분을 통해서 배우죠. 하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이 여인은 생각하고 있고 그분과 교제하게 될때 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갈멜산이라고 할때요. 이 머리의 아름다움을 갈멜산에 비유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갈멜산은 탁월하고 아름다운 산이다. 구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적으로요. 갈멜산 하면 엘리야가 그 산에 올라가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격돌했죠.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승리의 증거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온 겁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어요. 많은 수백명의 바알의 선지자가 불을 보고도 엘리야를 향해서 공격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어요. 이 신부의 생각은요, 신부의 머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아는 머리입니다. 그것은요, 신랑과 깊은 교제를 하게 될때, 그 교제를 통해서 이 여인은 항상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신랑에 대해서 찬사를 하게 될때, 이 신부는 항상 신랑이 자신을 향해서 화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신부의 머리의 아름다움은 신랑께서 항상 교제해 주고 있다. 항상 화답하고 있다. 항상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익숙한 여인입니다. 그 머리에는 그것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관계.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때, 주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는 것,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 이것은 놀라운 강점이요, 매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앞에 말씀드린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말씀드리면 그분께서는 화답합니다. 이와같은 아름다움을, 이와같은 특권을, 이와같은 매력을,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요, 그와같은 매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거나, 또 그럼으로 인해서 기도하지 않거나, 이와같은 삶은 얼마나 많은 매력도 상실하고 우리가 받을수 있는 기쁨도 축복도 상실합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머리털이 있습니다. 드리운 머리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여기 보세요. 이 머리털은요, 드리운 머리털인데 자주색깔입니다. 자주빛입니다. 자주빛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색이죠. 왕의 색깔인데, 이 왕의 색의 머리털이다. 이것은 자주빛으로 머리 염색하라는 그 말입니까? 아닙니다. 계속해서 여기서 보고있는 심상은 우리가 눈으로 볼수 있는 그와같은 그림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라고 지금껏 계속해서 강조해 왔지요. 이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빛이다. 이것은 왕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머리털이라고 하는 것은 헌신이죠. 이 여인의 헌신은 왕족의 헌신입니다. 왕을 위한 헌신입니다. 왕의 위엄을 가지고 있는 헌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서요, 주님께 헌신을 드립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신은요, 위엄이 있는 헌신입니다. 그것은 왕의 위엄 가운데 기상과 왕의 기개가 있는 그런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그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헌신을 드렸기 때문에,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여버렸어요. 어제 저희들은 왕이요, 신랑이 신부가 자기를 쳐다보는, 그 쳐다보는것 때문에요. 그 신부를 향해서 더이상 쳐다보지 말라. 보는게 싫어서요? 물론 아니죠.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에,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라고 하는 것을 어제 저희들이 봤어요. 그것은 참 우리와 같은 사람이 주님만 바라볼때에, 주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주님께서 그런 은혜로운 말씀을 하신다면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요, 이 여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게 될때, 그 위대한 헌신은 왕의 헌신이다. 왕만을 위한 헌신이다. 왕의 위엄을 가진 헌신이다. 그것 때문에요, 왕이요. 신랑이 거기에 그냥 매여버렸어요. 거기에 매혹되었다. 거기에 체포되고 말았어요.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게 될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부터 나온 헌신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우리 주님 앞에 헌신하게 될때, 이와같은 자부심, 이와같은 마음속의 기쁨, 이와같은 기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속에 느끼는 심오한 은혜, 우리는 이것을 주님앞에 표하고 가야 되겠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예루살렘 여인들의 찬사가 끝났어요.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 여인들이 이와같은 얘기를 하니까, 그 다음에는 신랑이 여기에 가담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에 대해서 또 칭찬을 합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 여인들의 이야기로 부족해서요, 이것은 뭘 말합니까?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너무나 기뻐하고 있다. 이거 참 저희들이 부러운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이와같은 삶을 살고, 가까운 교제를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애정과 모든 헌신을 주님앞에 드리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 마음이 넘친다. 감당할 수가 없다. 우리를 향해서 찬사를 보낸다. 그것을 우리가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겁니다. 세상이 우리를 다 부인하고 거절한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 온세상을 지으시고, 온 세상의 역사를 주관해 이끌어가고 있고 우리 앞에 영광의 위대한 날이 기다리고 있는, 그래서 그분은 언제까지나 배척받는 왕이 아니고 그분께서는 영광 가운데 임하실, 위대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분께서, 그 주인공 되시는, 그 주제되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고 있다. 나에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은요,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제 왕으로부터, 신랑으로부터 또 찬사를 받습니다. 예루살렘 여인의 찬사에 이어서 신랑의 찬사가 이어진다. 우리는 여기서도 계속해서 달팽이 계단을 우리가 보게 되죠. 이제는 신랑 신부의 대화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여인이 이제 칭송을 하는 일에 가담하고 또 왕이 여기에 가담한다. 이 신부가 왕과의 관계가 있고요. 그 다음에 예루살렘 여인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 칭송, 이것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아 7: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여기 신랑의 감탄이 있고요. 예루살렘 여인의 감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인의 감탄은요, 객관적인 감탄이라면, 이 신랑의 감탄은요. 어느 면에서는 주관적인 감탄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예루살렘 여인은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게 될때, 그냥 외부의 사람이예요. 그의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감탄하는 것은요, 그것은 객관적으로 알고 감탄하는 것도 있지만 마음속에 주관적인 감탄이, 왜냐하면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감탄하기 때문에 다른 겁니다. 그래서 신랑의 감탄은 더욱 더 강렬한 것입니다. 이 신랑의 감탄을 우리가 보게 될때, 제일 첫번째, 항상 호칭이 나오죠.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요, 너는 너무나 신선하고 또 흠이 없고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과 나의 눈을 즐겁게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아름다운가, 너는 왜 그렇게 화창한가? 이 화창한가라는 말은 너의 그 모습이 내 마음에 동의가 되고 또 나로 내 마음으로 내 마음이 즐길만 하고 그 다음에 나에게 기쁨을 주고있다. 이게 화창하다는 말의 뜻입니다. 쾌락하다. "나를 쾌락하게 하는구나" 나에게 행복을 주고 나에게 만족을 주는 너의 모습이다, 그런 말이죠. 우리가 이런 주님의 칭찬을 듣고 싶지 않습니까? 이 칭찬을 듣기 위해서는요, 다른 길이 없어요. 아가서를 통해서 지금까지, 이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분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왔는가? 그것을 생각하면 여기에서 답이 그대로 나오죠. 이런 칭찬의 이야기를, 호칭을 들으면서요.
이제 제일 첫번째, 키에 관해서 말합니다. 이 키에 관한 말은 앞에서는 전혀 없었던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칭찬입니다.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아 7: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우리 주님께서요, 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될때, 너무나 아름답다. 화창하다, 쾌락하다. 이 구약의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메시아께서요, 구속받은 이스라엘을 바라볼때에 넘나 기뻐서요.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헵시바다, 너는 쁄라다." 헵시바라는 말은 '내 기쁨이 너에게 있다.' 쁄라라는 말은 '결혼한 여자다.' 이런 말이죠. 메시아께서 구속받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 그것은 메시아의 마음 속에 엄청난 기쁨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는 옅볼수 있죠. 이 키는 종려와 같다고 했어요. 물론 크다는 말이죠. 키가 크고 곧다는 말입니다. 네 키가 크다. 이것은 주님을 말합니다. 우리가 에베소 말씀에 보면요, 우리가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서, 충분한데 이르러서, 그분에게까지 자란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우리의 키, 성장하면서 키가 크죠. 이 키가 크게 되는데, 이 종려나무, 키가 크고 곧은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위엄이 있고 기품이 있고 그 다음에 기상이 있고 우아합니다. 세련된 겁니다. 그 맛에 있어서 우아하다고 하는 것은 맛과 습관과 또한 스타일에 있어서요, 정말로 세련됐다. 위엄이 있다, 멋있다, 그런 말이죠. 신랑이 칭찬할때, 키가 크고 종려나무와 같다고 할때요, 그것은 위엄과 기품, 우아함, 그리고 기상,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여인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참 멋지지 않습니까? 그냥 예쁘다, 그런 말이 아니고요. 이 여인에게 발견할 수 있는것은 어제 저희들이 봤지만 그 여인은 심지어는 두려울 정도의 기개가 있었다. 용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 여인을 보게 될때, 위엄과 기품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신랑께서 발견하신 아름다움인데요. 이 나무가 열매를 맺는데요. 열매를 맺는 것을 찾아보려고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렇게 할수 있는 것은, 이 종려는 열대 지방에서 자라지요.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자랍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습니다. 영국의 런던에 가면 대형 박물관이 있지요. 오래전에 그곳에 방문 했을때, 한국관에 들어갔을때 제일 첫번째 딱 보이는 것이, 다른 관은 작았어요. 그런데 다른 나라의 여러 전시장과는 조금 다른게, 딱 들어가는데 커다란 액자가 있고요. 거기에 한글로 적혀있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꽃과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 말씀이 거기에 딱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뿌리가 깊은 나무, 그 나무는 열매를 언제나 맺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또 너무나 뜨거워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밑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이죠. 이 여인이 바로 그렇다, 그 말입니다. 이 여인은 여러가지 다양한 환경 속에서 통과할때 여전히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가리켜서 "네 키는 종려나무와 같고 네 유방은 열매송이" 이것은 포도송이를 말합니다. "네 유방은 포도송이와 같다" 앞에서 유방에 관해서 예루살렘 여인들도 칭찬했죠. 이 여인이 애정 속에서 어떻게 양육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 예루살렘 여인들이 칭찬했는데, 신랑은 이 여인을 바라보게 될때 그 점에 대해서 기뻐하고 계시다. 우리 주님께서는요, 애정과 양육, 이 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 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아 7:8).
이 포도송이, 종려나무, 이런 모든 것들을 말씀하시고 나서요. 이제 나무 위에 올라가서 가지를 잡으려고 한다. 이것은 이 신랑께서요, 이 여인에게 더 많은 뭐가 있는가, 발견하고 싶다는 말이죠. 나무 위까지 올라가야 되겠다. 거기서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네 유방은 포도 송이 같고" 첫번째 이 여인에게 아름다운 것은 먹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요, 먹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장로들의 분한이라고 밀어붙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도 다른 성도들을 먹이는가? 구원받고 나서 한해한해 지나고나면 영적인 나의 후배들일 생겨납니다. 그 후배들에 대해서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 말씀으로, 때로는 태도로, 때로는 인사로, 때로는 전화로, 격려로, 많은 다양한 것으로 우리가 먹일 수 있습니다. 먹이는 것에 대해서 이 신랑은 깊이 관심을 가지고,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키가 큰 나무, 이 신부는 성숙한 여인입니다. 성숙한 여인에게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먹인다. 성숙하지 않으면 못먹입니다.
두번째,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우리는 이 여인이 옛날에, 2장에서 신랑은 수풀의 사과나무 같다. 자기는 그 그늘에 앉아서 거기의 많은 사과를 먹고 휴식을 하고 거기서 즐기고 그 사과는 너무나 달았다. 이것을 경험했죠.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이 여인이요, 그와같은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무엇을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이 여인의 콧김, 이 여인의 숨, 거기에는 사과 냄새가 납니다. 주님과 같은, 주님과 함께 교제를 했어요. 사과 나무 되신 그분과 깊은 교제를 해 왔어요. 그러니 그 여인의 숨에서요, 사과 냄새가 나는 겁니다.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아 7:9).
또 한가지, "네 입은" 여기서 입이라고 하는 것은요, 입이 아니고 입천장이라는 말입니다. 구개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개는 맛을 아는 곳이다, 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요, 이렇게 좀더 자세히 번역이 된다면, 정확히 흠정역에서의 번역을 인용한다면 이렇습니다. "네 입천장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한 가장 좋은 포도주 같아서 달코하게 흘러내려 자는 자들의 입술로 하여금 말하게 하느니라" 이 여인의 입천장은요, 사랑하는 자를 위한 가장 좋은 포도주와 같다. 우리 주님께서 이제 만찬을 제정하시게 될때, 유월절을 지키셨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그리고나서 주님께서 "내가 마지막에 왕국이 세워질때까지 다시는 이 포도주를 먹지 않는다. 그때 가서 포도주를 먹는다." 즉, 왕국의 기쁨을 말씀했습니다. 왕국의 포도주, 그 기쁨을 이 여인은 알고있는 여인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그 즐거움, 그것은 너무나 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좋은 포도주, 이 여인은요. 입천장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가장 좋은 포도주와 같다.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이 미래의 위대한 기쁨을 이 여인은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고 그것은 너무나 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포도주와 같은데, 그것이 달콤하게 흘러내려서요. 자는 사람들에게 입술로 말을 하게 만든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품고 있는 이 미래의 위대한 기쁨, 그것을 이 여인은 함께 즐거워하고 있고요. 그 입천장은 그것으로 인해서 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기뻐하시고 뿐만 아니라 거기서 흘러내리는 것이 다른 사람을, 우리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한다. 계속해서 이 여인의 위대한 간증이 예루살렘 여인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입술로부터 그 여인의 위대한 간증의 여러가지 모양을 말씀해주고 있는데, 종려나무 위에 올라가서 발견한 세가지 있지요. 첫째, 유방입니다. 먹이는 곳, 그 다음에 콧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숨에서도요. 숨쉰다고 할때, 말을 할때 숨을 통해서 말합니다. 또 우리는 숨쉰다고 할때,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말씀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 사람을 향해서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말하는 것, 여기의 모든 것이 주님의 아름다운 사과 냄새가 풍겨져 있다. 우리의 언어, 그것이 믿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과 또한 사람들과의 대화 모든 것 속에서 우리의 언어 속에는 사과 냄새가 배어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과 냄새가 배어 있겠어요? 우리 주님과 오랫동안 깊은 교제 가운데 있을때,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또 한가지는, 좋은 포도주, 이것은 맛입니다. 기쁨의 맛, 이것을 발견했어요. 이 높은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성숙한 여인,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라야 됩니다. 사랑 안에서도 자라야 됩니다. 이제 이 사랑에서 자란 여인의 모습을 10절에서 볼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
2장 16절에서요, 그 여인이 이렇게 말했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고 나는 그에게 속했다." 그 다음에 6장 3절 말씀에서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다." 이제 순서가 바뀌죠. 그런데요, 7장 10절 말씀에 오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 다음에는요, "그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열납된 상태는요,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시고 그분의 구속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게 될때,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그라운드 위에서 열납되게 됩니다.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분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고 난 다음에 우리가 주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그분을 향한 감사, 그분을 사랑하는 사랑의 정도,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다릅니다. 여기에는 용량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성숙과도 관련이 있지요. 주님과의 교제의 깊이와도 관련이 있죠. 이것은 변하는 겁니다. 변하게 될때 우리는 점점 자라야 되는 것이죠.
이제 2장 16절에서요, 그분을 발견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서요, 그분 안에서 발견하는 기쁨, 그래서 "그분은 나에게 속했다." 내가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여기에 집중되어 있어요. 그 즐거움, 그런데요. 6장 3절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분에게 속했고 그분은 나에게 속했다." 이제 순서가 바뀌는데요.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될때, 주님은 나를 사셨습니다. 저희들은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어요. 이 요구에 대해서 얼만큼 마음에 두고 있는가? 우리가 2장 16절에서 그분을 발견한 그 기쁨, 그것 때문에요, 우리는 즐거워하죠. 그래서 그분은 내게 속했다고 기쁨 가운데 이야기합니다. 초심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주님(?)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죠. 그러나 그는 이제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기쁨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주님도 자기에게 속한 것이 먼저고 자신이 주님에게 속한 것은 나중입니다. 그때,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점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요, 6장 3절에 와서는요. 내가 그분에게 속했다고 할때, 그것이 먼저죠. 그때는 주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시기가 되었어요. 이때는요, 내가 주님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가, 라는 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성숙한 겁니다. 사랑은 이와같이 만듭니다. 주님과의 교제는요, 그분은 나에게 속했다고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이제 어느정도 교제 가운데 주님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깨닫는 것은 나는 주님에게 무엇을 해 드릴수 있을까? 주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주님에게 어떤 의미를 드릴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래서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순종과 헌신은 부담이 아닙니다. 이것은 즐거움과 기쁨 속에서 나오는 것이죠.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삼중적인 의탁을 했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 물었죠.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베드로는 그렇게 했어요. 베드로는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와같은 일을 그는 기쁨 가운데 했지요.
그런데 7장 10절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이제 말씀의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그 다음 말씀에서요, 이것은 6장 3절 말씀과 같은데요. 그 다음 말씀에서는 차이가 있죠.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이 단계에 와서는요, 좀더 성숙했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 클레임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만족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주님에게 클레임 하는 것,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요. 다만, 무엇으로 만족합니까? 그분이 나를 사모하고 있다. 이것으로 만족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성숙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다윗이 압살롬 때문에 멀리 갔다가 다시 나라가 안정되고 돌아오게 될때, 므비보셋이 다윗을 만나죠. 다윗을 만났을때, 므미보셋에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바 종이 므비보셋을 따돌리고 므비보셋의 의도에 대해서 왕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들고 그 시바의 의도는 자기가 그의 재산을 다 뺏기 위한,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한, 그리고 므비보셋을 팔아먹기 위한, 이 모든 일을 그가 했어요. 이와같은 불행한 일 속에서 왕이 돌아와서 므비보셋이 왕을 만났습니다. 왕이 이렇게 말하죠. "너에게 줬던 이 재산을 시바와 반씩 나누라." 그때 므비보셋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 다 그 사람에게 주십시요. 이제 왕께서 돌아와서 나에게는 다른 원이 없습니다." 왕이 오신 것, 왕의 임재, 므비보셋은 죽을만한 사람이죠. 사울의 손자입니다. 다윗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왕이 자기 상에 앉혀서 먹게 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왕의 은혜에 대해서 항상 그는 마음속에 왕의 임재를 항상 즐겼습니다. 자기는 두 다리를 쓸수 없는 불구자입니다. 또 왕의 원수였어요. 무슨 가치가 있어서 자기가 이와같은 자리에 앉아서 왕과 교제를 항상 즐길수 있는가, 이 은혜 때문에 항상 마음에 가득했어요. 그래서 왕과 함께 있는 것이면, 나머지는 어떤 것도 나에게는 소용이 없다. 나에게는 이미 충분하다,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여기 이 여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그것이면 나는 충분하다. 내가 그분에게 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주님이 나를 사모하신다고 하는데 내가 무얼 요구할 것이 있는가? 그러나 주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 나는 기쁨으로 해드리고 싶은 모든 의향이 있다, 그 말이죠. 여인은 아가서 마지막 부분에 와서 그의 성숙한 모습, 사랑에서의 성숙의 깊이를 여기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서는요, 첫사랑의 추억에 관해서 신부가 그 추억을 생각하면서 갈릴리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전에 왕궁으로 왔지요. 이제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신랑에게 요청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 7:11-12).
이 여인은 왕궁에 와서 살았어요. 이제 그 사랑의 깊이는 점점점 깊어갔죠. 예루살렘 여인에게 바로 얼마 전에 칭송을 받았고, 이제 왕으로부터도 엄청난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여인은요, 이때 뭐라고 얘기했어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그는 나를 사모한다" 그러면서 이제 갈릴리로 갑시다. 왜 갈릴리로 갈까요? 이 여인은 솔로몬이 오래 전에 북쪽으로 여행하다가 이 여인이 살던 그 근처에서 이 여인을 만났어요. 바로 갈릴리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장소였습니다. 바로 그곳으로 가자고 하는 겁니다. 옛 추억, 어떤 추억입니까? 첫사랑의 추억입니다. 거기에 가서 "포도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옛날에 자기가 하던 일들이었어요. 과거의 추억입니다. 그 추억은 단순이 그냥 꽃술이 퍼졌는지, 자기는 원래 포도원지기였거든요. 그리고 자주 갈릴리 골짜기와 또 산으로, 들로, 항상 다니고, 그런 추억은 항상 머리속에 있지요.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추억이 아니라 자기가 그런 일을 할때, 어느날 솔로몬을 만났습니다. 그 만난 날을 그는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곳에서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그곳, 그것은 잊을 수가 없는 장소입니다. 첫사랑의 시작의 장소입니다. 거기에 지금 사랑의 깊이가 깊어가는데,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게 될때, 우리 마음 속에 다시 한번 새록새록 기억해야 하는 것은 처음, 주님께서 나를 향해서 찾아오셔서 나를 사랑한다고 프로포즈하던 그날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 나를 사랑하셔서 처음으로 우리가 깨닫기를, 그분께서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 앞에 우리가 처음으로 강퍅한 마음을 내려놓고, 그 마음이 녹아서 주님 앞에 엎드렸던 그날, 그분께서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단 한순간도, 저희들을 무관심하거나 저희들을 돌보시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솔로몬을 만나고 이 순간까지 그 여인은 사랑병에 걸리고 또는 거꾸로 그분의 임재를 놓칠까봐 악몽도 꾸고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었죠. 사랑을 점점 성숙하도록, 그 사랑이 점점 자라도록, 이 여인은 계속해서 사랑하는 분과 교제해 왔어요. 그런데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서 옛날 첫번째, 그날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께서 나에게 처음 오셨던 날을 기억하며 우리 마음속에 깊은 감동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주님께서 말씀했지요. "첫사랑을 회복하라" 어떻게 회복합니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기를 더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떠한 희락과 어떠한 깊은 은혜를 우리 마음 속에 느꼈고 우리의 심령이 어떻게 녹았었는지 기억하죠.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첫사랑을 생각할때에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사랑이 더욱더 깊어지도록 만드는 귀한 경험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사랑하는 분과 함께 갈릴리로 올라갔어요. 거기서 내가 내 사랑을 주겠다. 어떤 사랑입니까?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사랑이 더욱 더 강렬해지고 또한 더욱 더 의미있는 것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서요. 우리는 이와같은 것을 어디서 얻습니까? 우리는 만찬상 앞에 오게 될때, 우리는 부서지신 몸과 흘리신 보혈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성실히 사랑하셨다. 그렇게 깊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느끼고 우리는 예배를 드리게 될때 우리의 심령이 고조되게 되죠.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은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가 깊어지죠.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는요, 우리로 하여금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우리가 사랑을 받았는지, 그래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좀더 깊어지는 이 성숙된 사랑이 더욱 더 깊어지고 더욱 더 강화되고 더욱 더 뜨거워지는 그와같은 경험을 원하고 있다. 이 여인은요, 갈릴리로 갔어요. "내가 거기서 나의 사랑을 네게 주겠다" 우리는 만찬상 앞에서요, 그분의 사랑을 그렇게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 절을 보겠습니다.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아 7:13).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왜 갑자기 합환채가 나올까요? 창세기 30장에 보면 합환채가 나옵니다. 어느날 맥추때에,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얻었어요. 참 귀한 식물이죠. 합환채는 사랑 식물이라, 어떤때는 사랑 사과라, 이렇게 불립니다. 양리적으로 말하면, 이 안에는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그런 물질이 있다, 사람들은 믿죠. 또는 이것은 사랑의 상징이라고도 이야기하죠. 그래서 사람들은요, 역사를 통해서 오랜 경험을 통해서요. 이런 것을 미약으로, 최음제로 씁니다. 그래서 남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합환채, 이것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르우벤이 그것을 가지고와서 어머니에게 드렸죠. 어머니 레아가 합환채를 가지고 있는데 라헬이 왔어요. 아기를 낳지 못한 라헬이 와서 그것을 달라고, 그래서 라헬에게 그것을 줍니다. 그리고 레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합환채를 팔아서 남편을 샀다." 이렇게 말하죠. 사랑과 관련된 식물입니다. 이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있다. 이것은 갈릴리에 가서요, 이 여인이 첫번째,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그분에게 사랑을 드리고자 한다고 바로 앞에 말씀했지요.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녀가 그의 사랑하는 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첫사랑을 고백하는 것 아니고요. 첫사랑을 상기하면서 사랑을 새롭게 고백하는 겁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계속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사랑을 고백드려야 되지요.
여기 또 한가지 말씀합니다.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문 앞에요, 실과, 열매들이요, 가득히 쌓여 있습니다. 열매가 가득히 쌓여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궁전에 살던 이 여인이 갈릴리에 와서, 우리가 들로 가고 동네에 유하자고 했지요. 거기에 집이 있습니다. 그 유숙하는 집 앞에다가, 식물, 특히 열매들을 쌓아 놓습니다. 전통적으로는요, 막 결혼한 신혼 부부가 사랑의 표로써, 문 앞에다가 이런 열매, 또는 가지, 꽃, 이런 것들로 문 앞에 장식합니다. 특별히 어떤 유대 절기에서는요, 지나가는 방문객들이 자기 집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요. 환영한다는 표로 그와같이 열매를 문 앞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가 신랑을 향해서 마음이 어떻게 열려있는가? 어떤 사랑으로 신랑을 환영하고 있는가? 사랑을 말한다고 했지요. 여기에 그 사랑을 지금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가지 열매를 여기 전시하고 있어요. 묵은 열매, 그리고 새로운 열매. 이것을 생각하게 될때, 우리의 신랑되신 주님, 주님을 우리는 환영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묵은 열매를 문 앞에다가 놓습니다. 우리는 새로 얻은 열매를 놓습니다. 우리는 구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언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시편과 지혜서를 통해서 그분의 모습들을 그림자로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묵은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에 와서 복음서를 통해서요, 이제는 그림자가 아니라 그분께서 마지막 때에, 옛적에 여러가지 모양과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마지막 때에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실제로 오셨습니다. 이땅에 오셔서 걸어가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은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까지 순종하시고 십자가애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복음서의 위대한 역사, 그리고 서신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위대한 교리,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과 관련한 새 열매 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앞에 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문 앞에 이와같은 열매를 놓고 주님을 향해서 우리의 열린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주님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와 찬송을 통해서요. 우리는 주님앞에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고요. 우리의 사랑하는 마음을 기탄없이 주님앞에 표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 마지막 말씀에 이렇게 말씀했지요.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우리가 주님앞에 오게 될때, 공수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구니에 주님을 담아옵니다.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사역, 그것은 때때로 묵은 열매입니다. 때때로 새로운 열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서 주님앞에 드리고 우리는 주님앞에 우리의 사랑을 말씀드립니다. 구약의 예언을 통해서요. 구약의 모형을 통해서, 또한 지혜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실 메시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신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셨어요.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위대한 사랑을 받았어요. 첫사랑의 순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묵은 열매, 새 열매, 새 열매라고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사랑, 지금도 새롭게 우리가 느낍니다. 그런데 묵은 열매, 그것은 옛날 우리에게 처음 오셨을때,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사랑, 그것을 우리는 또한 기억합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누리고 있는 이 새로운 사랑,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현재의 사랑을 더욱 더 길러가고 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묵은 사랑과 새로운 사랑, 이 두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 마음 속에 소중히 생각하고 주님께 그 사랑을 드리게 될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7장 말씀을 통해서요, 예루살렘 여인 앞에 나타내 보인 간증, 그리고 그 간증 뿐만 아니라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말씀해 주었던 칭송,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신부의 소원,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사랑을 새롭게 하는 것, 그래서 지금의 사랑이 더욱 더 깊어지는 것, 그와같은 것 때문에 갈릴리로 갔지요. 거기서 그가 경험한 내용들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형모 형제님 > 아가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가서 11. 여행에서 돌아오는 신랑과 신부 (0) | 2022.07.01 |
---|---|
아가서 09. 신부를 향한 신랑의 칭찬과 매료됨 (0) | 2022.05.26 |
아가서 08. 신랑에 대해서 자랑하는 신부 (0) | 2022.05.13 |
아가서 07. 또 다시 꿈꾸는 신부 (0) | 2022.05.07 |
아가서 06. 계속되는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랑의 찬사 (0) | 2022.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