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02. 왕과 술람미 여인의 교제, 1장 9절-2장 7절 >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아 1:9-17).
먼저 여기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읽은 말씀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희들은 이 술람미 여인이 왕의 침궁에서 교제하고 또 발견했던 사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부분에서는 왕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대단히 친밀한 서로간의 대화, 교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신랑이 신부에 관한, 여인에 관한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아 1:9).
솔로몬은 그의 번영하던 왕국, 그가 통치하던 시절에 말을 많이 애굽으로부터, 또 다른 지역으로부터 사들였습니다. 말도 병거도, 그래서 병거성까지 했었고 많은 병거, 또 많은 기마병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 애굽의 말이라고 하면 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죠. 여기 특별히 그것을 가리켜서 '준마'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 달리는, 특별하고 우량한 말이다라는 뜻이죠. 이 말들, 그리고 이 병거의 가격은 대단히 비쌉니다. 열왕기상 말씀에 보면 말들 한마리에 150 은의 세겔이고 병거 하나에 600세겔이다. 그래서 말 네마리가 병거 하나와 맞먹는 그런 가격이었습니다. 이 비싼 말과 병거를 솔로몬은 많이 들여왔는데, 물론 그 사실 자체는 역사를 살펴보게 될때, 이것은 솔로몬의 타락과 또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어가는 그런 계기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고 여기서 우리는 아가서 안에 나타난 많은 말씀, 또 묘사 가운데 우리는 그것을 심상이라 말하죠. 많은 그림들이 있습니다. 이 그림들, 이 단어가 말씀하고 있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우리 마음 속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상을 찍어본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바로의 병거의 준마"라고 하게 될때, 애굽에서 들여온 이 말의 탁월함, 이 점을 가지고 여인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은 열정적입니다. 탁월한 말입니다. 주인에게 충성합니다. 또 값이 이미 말씀드린 대로 대단히 비쌉니다. 또 용감한 말입니다. 우아합니다. 에너지가 넘칩니다. 또 대단히 빨리 달립니다. 그 모습은 멋지고 또 위풍당당합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또 그 말은 갖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 이것이 애굽에서 들어온 말, 그 말에 관한 심상이다, 그 말입니다. 그와 같은 점에서 신랑은 신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탁월하다. 그렇게 믿을만하다. 그렇게 위풍당당하다. 여성이지만요, 용감합니다. 또 그런 점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값이 비슷하다라고 하는 말은,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보시게 될때, 그렇게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을 물론 이해할 수 있는데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비싼 값을 치루셨습니까? 온 생애를 바치셨고, 생명을 바치셔서 우리를 샀죠. 이 모든 면에 있어서 이제 신랑은 이렇게 신부를 묘사하고 있죠.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아 1:9-10).
"네 두뺨은 땋은 머리털로"라고 되어 있는데요. 흠정역에서는 "보석의 줄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두뺨, 그리고 목을 이야기 합니다.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이것을 흠정역에서는 "금사슬"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두뺨, 앞으로도 이 뺨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만, 이것 역시 심상입니다. 이 뺨이라고 할때, 그것은 얼굴 부분에 있죠.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죠. 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한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얼굴이죠. 그 얼굴에서도 가장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뺨입니다. 그래서 이 네 두뺨은 보석줄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의 얼굴, 그것은 당연히 중요한데요. 그 얼굴, 어떤 안색을 하고 있는가? 어떤 얼굴 표정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지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석줄이라. 우리가 성경에서 금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은, 구속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그 다음에 보석,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죠. 이 여인의 모습을 지금 묘사하게 될때, 그 여인의 얼굴을 보면, 그리고 얼굴에서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은 뺨이라고 말씀했는데, 그것은 성령님의 통제하에 있다. 우리가 만일 육적인 통제하에 있다면 얼굴 표정이 상당히 몰골이 비루하거나, 아니면 호전적이거나 아니면 그 얼굴 모습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때로는 마귀적입니다. 때로는 대단히 육적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통제하에 있는 표정,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게 될때, 글자 그대로 얼굴 표정을, 어떤 얼굴 표정을 주님께서는 원하실까?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될때, 우리의 표정 자체가 성령의 열매와 함께 가겠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얼굴, 그리고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 이런 표정을 우리가 갖지 않겠습니까? 또 충성과 온유함, 그리고 절제된 그런 모습, 이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원하시고 그것을 보실때,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라고 하는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 다음에 "네 목은 금사슬로 아름답다" 우리가 구약에서 요셉이 오랜 고난 끝에 감옥에 들어가서 또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감옥 안에서 꿈을 해석하고 어느날 해석해서 술관원이 복직 됐지만 2년 동안 까맣게 잊었어요. 2년 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해야 될 때가 왔을때에 그 술관원은 기억했지요. 요셉이 이제 왕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꿈을 해석했어요. 이 바로가 요셉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금사슬을 목에 걸어주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니엘도 그와 같이 영예를 받게 될때, 금사슬을 목에 걸어줬어요. 목에 금사슬을 걸어준다는 말은 그에게 영예를 준다. 영광을 준다. 그의 위치를 높인다는 말이죠. 우리는 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기 술람미 여인은 침궁에서 자기는 검다. 게달의 장막처럼 검다. 그것을 의식했죠. 그러나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다. 우리의 본성, 또 우리가 구원받고도 우리 속에 있는 옛사람, 육, 이것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우리의 과거는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였고 하나님 앞에서 설수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우리 구원받고 나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칭찬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신랑이 신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놀라운 자비와 긍휼을 따라서 저희들에게 전폭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은 금사슬로 아름답다" 라고 할때, 하나님께서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고 우리를 높이신 이런 모습을 보고요. 그리고 그분께서 또 그 아름다움을 감탄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로부터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주셨을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 1:11).
여기에 금사슬과 은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금, 하나님의 영광이죠. 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구속. 이 두가지를 여기 병행하고 있습니다. 금사슬에 은을 박았다. 그것을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베드로후서의 말씀을 보면 1장에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 그것을 우리가 구원받았을때,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과 함께 찬란히 빛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값, 그것은 금이나 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값주고 사셨다. 이렇게 비싼 것으로 우리를 사셔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신랑이 보시기에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이제 9-11절 말씀, 세절에서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면서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요, 그 다음에 12절 말씀에서요. 신부가 말씀합니다. 이것은 대화입니다. 한 편에서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한편에서 말씀하게 될때 그것에 화답해서 답변합니다. 화답합니다. 그것을 받아서 또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대화죠. 이것은 쌍방에서의 언어의 조화입니다. 마음의 화합하는 것입니다. 서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신랑과 신분의 대화를 저희들이 보게 될때, 이 대화, 우리는 이것을 보게 될때, 물론 그리스도와 우리 성도들 사이의 대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또한 기도를 통해서 그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요. 예수님을 의지했어요. 그분을 주제로 해서요. 또한 그분에게 간구합니다. 중보합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주님께 올려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음성을 그분에게 들립니다. 이것은 대화죠. 이와 같은 것은 이미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는데, 오늘 저희들이 상고할 부분에서는 이와 같은 대화가 계속 지속됩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아 1:12).
왕이 상에 앉았다. 이 상은 왕의 상입니다. 이제 왕이 두번 나왔어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그 왕이 있었고요. 여기 이제 두번째, 왕의 상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왕의 상, 우리는 솔로몬의 상에 관해서 엄청난 풍부한 음식이 거기에 진열이 되어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열왕기상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엄청난 양의 가는 가루와 굵은 가루와 또한 많은 종류의 고기들, 그것이 진열이 되어 있습니다. 풍부합니다. 그것의 상을 왔을때에 스바여왕은 그것을 보고 정신이 현황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 왕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풍성한 상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께서 저희들에게 공급하시는 풍성함,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그 상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풍부함 속에 무엇이 있을까? 주님의 상에요, 주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긍휼이 넘칩니다. 그 상에는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또 거기에는 화평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주님의 신실함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오게 될때, 주님으로부터 받는 엄청난 분량의 풍성함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느끼고 삽니다. 전에 저희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먹을 것을 찾지 못하며 굶주리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내게 오면 절대로 목마르지도 또 배고프지도 않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라고 말씀했죠. 나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내가 주는 이 생수를 마실때 목마르지 않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요, 이렇게 풍성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상 위에 배설된 음식의 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누리고, 받고, 즐기고 산다는 거죠. 여기 그래서 왕의 상에 앉았을때, 이 상은 음식이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 왕의 임재가 있습니다. 왜? 왕이 거기 앉아 계시거든요. 거기에 이 술람미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왕의 임재라고 하는 것은 이 상이 그 상이 그렇게 풍성하도록 해주는 근원입니다. 왕이 없으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죠. 왕의 임재는 그렇게 중요하고 그 왕께서는 그렇게 풍성합니다. 풍성하게 공급하신다. 우리가 이와 같은 공급을 받게 될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거죠. 예배입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풍성함을 우리가 먹고, 그 주님을 다시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찬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읽게 될때, "왕의 상에 앉았을때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다" 이런 말씀으로 이어지죠. 술람미 여인이 왕의 상에 앉았어요. 그 풍성함을 봅니다. 왕의 임재, 그 아름다운 분의 임재를 그녀는 느낍니다. 거기에서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도 기름이" 나도 기름이라고 할 적에 영어는 'spikenard' 라고 합니다. 그 앞에 스파이크라고 하는 말은 순수하다는 뜻, 또는 액체다, 라는 뜻입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값비싼 나드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스파이크 나드입니다. 그것은 옥합이라고 하는 그릇 안에 담겨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밀봉된 그릇이죠. 그래서 그것을 한번 깰 때, 거기에서 안에 담겨있는 순수한 액체 향이 나옵니다. 그것은 엄청난 향기를 발하죠. 한번 깨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엄청난 값을 지불하는 거죠. 이 위대한 값을 통해서 아름다운 향기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예수님에게 예배로 드려졌어요. 유다는 물론 그것을 왜 그렇게 아깝게 쓰냐, 라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예배를 드리게 될때 전혀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드리게 될때, 가장 값비싼 것으로, 가장 최고로 주님 앞에 드리는 거죠. 그것이 예배입니다. 여기에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합니다. 요한복음은 21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 중에 다락방에서 다섯장에 거쳐서 주님의 다락방 사역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그리고 서신서에, 우리 주님의 만찬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만찬에 관한 기록이 없어요. 대신 베다니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우리 주님께 옥합을 깨뜨려서 드린 예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 공관 복음과 또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 말씀한 이 모든 주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는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을 쓰게 될때, 그것은 상당히 1세기 거의 말이죠. 이미 주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는 다 성도들 간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미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요. 그러나 사도요한은 베다니에서 있었던 예배, 그 옥합을 드렸던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는 충분한 거죠. 그래서 우리는 아가서 1장 12절 말씀과 요한복음 12장 말씀에 나온 이 이야기는 참 서로 비슷한 이야기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왕의 상에서 풍성한 것을 보고 경험하였을때, 우리는 그것을 공급받게 될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주님 앞에 드리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향기를 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값비싼 것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한 100% 액기스입니다. 그것을, 그 향을 드린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아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이 신랑을 표현하게 될때, 보게 될때, "나의 사랑하는 자"라 이렇게 표현하죠.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두 가슴 사이의 있는 몰약 향낭이다, 이 말입니다. 첫째, 몰약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몰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말씀해주고 있는 그런 향품이죠. 그것은 몰약나무, 거기를 찔러서 거기에 상처를 내서 거기서 나오는 수지를 가지고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몰약이라고 할때, 몰약은 세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가지 안에 담겨있는 몰약, 두번째, 몰약나무를 찔러서 거기서 나오는 수지를 이제 말려서 만든 건조 몰약이 있습니다. 그 다음 세번째, 그 몰약을 얻었을때, 그것을 액체로 만드는 액체 몰약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 몰약이 있는데요. 그것은 어떤 것이든지 몰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몰약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맛은 쓰지만 그 향기는 너무나 향기롭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 향기를 우리에게 너무나 잘 예로부터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몰약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너무나 값비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43장 말씀을 보면 베냐민을 애굽에 보내서 이제는 애굽에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절대로 곡식을 팔지 않겠다고 요셉이 이야기 했지요. 야곱은 그것 때문에 막 울고불고 하죠. "너희들이 왜 이런 일을 만들어서 나를 이렇게 어렵게 하느냐?" 울었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가면서 더 이상이 버틸수가 없다. 이제는 보내야 한다, 라고 할때 야곱은 포기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내면서 곡식을 사와야 하는데, 그때 마음 속에 두려워서 향품과 여러가지 좋은 것들을 아들편에 보내서 어려움이 없도록, 그런 소원 가운데 그렇게 하죠. 예물 가운데 몰약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몰약은 값비싼 것입니다. 야곱이 그 아들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서 예물을 보내게 될때 값비싼 것을 보내지 않았어요? 애굽의 총독 앞에 호의를 얻기 위해서 지금 예물을 보내는데 싼 것을 보내지 않았어요. 몰약은 비싼 겁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가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가져왔지요. 비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죽음, 그 죽음이 우리에게 끼친 위대한 영향, 그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은 값비싼 것입니다. 또 하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몰약은 향기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그분은 그렇게 고난을 받고 쓴 것을 맛보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를 즐기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장사 후에 부활입니다. 그리고 승천과 승격입니다. 보좌 우편에 높은 곳의 위엄에, 높은 곳에 앉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중재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사역하십니다. 미래도 사역하실 것입니다. 그 위대한 영광을 그분께서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분의 죽음, 쓰디 쓴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향기를 영원히 흩날리는 그런 죽음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죠. 또 몰약은 보존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입니다. 니고데모가 아리마대 요셉이 우리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이제 죽으셨을때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를 달라고 하고 장사하죠. 그때 그는 몰약과 침향 백근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우리 다른 제자들이 너무나 가난해서요. 예수님 장사할 여력도 없고 두려워서 빌라도 앞에 갈수도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제자들 중에 이와 같은 또 유력한 사람들을 데리고 있었어요. 그들은 감히 빌라도 앞에 가서, 그냥 간 것이 아니라 백근의 향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 향은 보존하는 것입니다. 시체를 보존하는 것이죠. 우리 주님은 우리를 보존합니다. 우리를 보존합니다. 몰약은 항균작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페스트가 돈다, 그럴때에 사람들은 몰약을 주머니에 담아서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보존하는 힘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할때, 세상의 물질주의라든지, 세상의 여러가지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가 보호가 되는 것입니다.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몰약은 에스더의 케이스에서 볼 때에, 많은 처녀들이 아하수에로왕에게 갈때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요, 오랜 기간을 통해서 향품을 가지고 몰약을 포함해서 많은 향품을 가지고 자기를 단장하고 난 후에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검사를 받고 난 후에야, 그리고 난 다음에 앞 아에 알현할수 있었어요. 그래서요, 이 모든 모습을 보게 될 때에 이 모든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 주님은 고귀합니다. 향기를 냅니다. 보존하는 힘이 있습니다. 또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우리 주님과 가까이 하면요. 우리는 아름다워 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몰약 향낭이라고 말하는데요. 우리 주님은요, 우리 주님은 몰약인데요. 이 술람미 여인에게 이 신랑, 솔로몬은 몰약 향낭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몰약 향낭입니다. 왜 몰약 향낭인가? 몰약과 몰약 향낭은 다르죠. 몰약 향낭이라고 하는 것은 주머니입니다. 주머니 안에 몰약을 담은 겁니다. 영어 표현에서는 '번들'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뭉치다. 꾸러미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냥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를 모은 겁니다. 그래서 담은 겁니다. 왜 몰약 향낭일까? 왜 이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생각할때, 그는 내 품속에 있는 몰약 향낭이라고 말할까?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작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분이 아닙니다. 몰약 향낭이라고 하는 것은, 건조 몰약은 이런 조각들입니다. 그 조각을 많이 모아서 향낭에 넣었어요. 그것은 많은 겁니다. 우리 주님을 살펴보게 될때, 우리 주님 안에 엄청난 많은 분량의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이름만 봐도 그 이름이 셀수 없는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속성과 또한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될때, 성경은 엄첨난 분량의 우리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그분의 다양한 이름과 그분의 다양한 속성과 그분의 다양한 사역과 이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될때, 이 몰약은요. 그냥 하나 두개가 아니고, 향낭에다가 많이 넣어야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왜? 우리 주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분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다양한 분이다. 그분은 거룩하다라고 할때, 주님의 거룩함은 다각도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는요, 복음서 말씀 안에, 신구약 말씀을 통해서요. 구약의 모형과 또한 예를 통해서, 신약의 우리 주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은혜만 해도 다각도의 은혜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케이스의 사건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은혜를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는 향낭에다가 넣는 것입니다. 몰약을 향낭에다가 담습니다. 왜 담는가? 그것이 흐트러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땅바닥에 떨어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땅바닥에 떨어지면 밟고가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 몰약 향낭은요, 이 여인은 자기 두 유방 사이에 안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 품에 몰약 향낭이라" 말씀했어요. 다시 말해서 이 술람미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그분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주머니에 담아서 그것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잃어버릴 수가 없다. 왜 몰약 향낭인가? 이 몰약 향낭 안에 담겨있는 몰약, 그것을 마귀는 훔쳐서 다른데로 갖다 버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그것을 잘 담아야 됩니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을 잘 간수해야 한다는 그 말입니다. 이 몰약 향낭을 열게 될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귀, 그것을 맡을 수 있는 코, 그 사람에게 이것을 전해 줄수 있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그분의 인격과 사역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나눌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버지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게 될때, 우리는 얼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우리는 마음에 두고 주님 앞에 말씀드리는가, 우리는 그것을 잘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세번째요, 몰약일뿐만 아니라 몰약 향낭입니다. 몰약 향낭일뿐만 아니라 그 몰약 향낭은 품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요, 이 말씀에서 몰약 향낭, 이것이 몰약을 담은 주머니인데요. 그것이 이 여인의 가슴 사이에 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주머니를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의 가슴은 또 하나의 주머니예요. 몰약 항낭을 안고 있는 주머니입니다. 따라서 이중적인 향낭입니다. 그래서 이 솔로몬을 생각할때, 그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생각할때, 그렇게 해야 되는거 아니겠어요? 우리 가슴에 품고 살아야 됩니다. 절대로 그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우리는 놓쳐서는 안됩니다.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직하고 항상 이것을 토음(?35:40)하는 몰약을 모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마음 속에 행복과 확신과 기쁨 속에서 살아야 되겠다. 밤새도록 안고 있다. 우리 주님은 지금 부재 중입니다. 부재 중에 우리는 주님을 마음 속에 안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오셔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영원토록 기억하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여기 이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안 가운데 몰약 향낭이라, 이렇게 말씀 했는데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아 1:14).
나의 사랑하는 분은 엔게디 포도원이라. 먼저 엔게디 포도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엔게디라고 하는 곳은요, 이 사해 서쪽에 해안에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여러분께서 엔게디 사진을 찾아보면 사해 서쪽으로는 완전히 절벽입니다. 그리고 그 높은 곳 위에서는 이제 유대 산악지방이 시작되고 그 산악을 지나서 계속해서 서쪽으로 가면 예루살렘이니 베들레헴이니 나오죠. 그곳에 이 절벽 위에서부터 물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여기는 사해 골짜기이기 때문에 대단히 덥습니다. 일년내내 약 28도로 계속 유지된다 그렇게 말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종려나무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온천이 있습니다. 엔게디라는 말은, '염소새끼의 샘'이라, 이런 뜻입니다. 거기는 사실은 황량한 곳입니다. 사막입니다. 그런데 거기만 오아시스입니다. 거기에 가면 푸르른 것이 있어요. 종려나무와 또 그 옆에는 포도원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이 엔게디를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사막 속에 오아시스, 이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엔게디 포도원, 그것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분노가 가득한 세상, 거기에 우리 주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 주님만 기쁨의 근원입니다. 미워하는 세상, 거기에서요.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엔게디 포도원입니다. 엔게디 주변은 황량한 사막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그렇게 푸르름과 거기에만 그렇게 무성함이 있습니다. 열매가 있습니다. 상처받은 자가 가득한 세상에 치유케 하시는 분, 예수님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가득한데, 우리 주님 앞에 가면 성취를 이루게 하시죠. 텅빈 세상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가게 될때, 그분께서 우리를 가득하게,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엔게디 포도원, 그 바로 옆에, 여기 엔게디 포도원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고벨화는 뭘까? 몰약은 나무를 찔러서 나오는 수지, 그래서 그 나무를 짖이기고, 그리고 이 기름을 짤때, 그때 향기가 납니다. 그런데 고벨화 송이는 그 고벨화라는 꽃이 만개할때 대단히 강력한 향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래서 몰약은, 여기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씀이 두번 나오고, 전자는 몰약 향낭이다. 후자는 고벨화 송이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이 몰약과 관련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한 향기입니다. 그런데 고벨화 송이이라는 것은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한 향기입니다. 꽃이 만개하게 될때, 이것은 지금 부활을 말하거든요. 아론의 싹난 지팡이 부활입니다. 이 곷이 확짝 열리게 될때 나타나는 향기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향기가 나타났어요. 또한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향기가 나타났어요. 우리 주 예수그리도의 이렇게 아름다운 향기, 그것은 주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이 여인이 생각하고 있는, 그의 사랑하는 신랑의 아름다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다. 뿐만 아니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고벨화는 여인들이 장식하고 집에다가도 꽃을 가지고 장식하고 그랬어요. 고벨화라고 하는 말의 뜻은, 그것은 '생명의 값'이다. 또는 '속전의 값'이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께서 살아나셨어요. 이분께서 치루신 값이 얼마나 큰가? 그 죽음을 통해서 부활했습니다. 여기에 황량한 사막으로부터요. 광야로부터, 부활의 동산으로 변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고벨화 송이, 우리 주님은 죽음을 통해서, 또한 부활을 통해서, 얼마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나타냈는가? 그 아름다움은 내게도 전해졌다. 나도 그 냄새를 맡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 라고 하는거죠.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제 신랑이 말합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 1:15).
여기 신랑이요, 처음으로 그 신부를 가리켜서 비둘기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비둘기, 제일 첫번째 나오는 것은 창세기 8장에 노아 홍수가 끝나면서 새들을 내보내죠. 까마귀를 내보냈을 적에는 안돌아 와요. 물 위의 수많은 시체, 거기에 앉아서 계속 먹는 겁니다. 돌아올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비둘기를 보냈을때, 비둘기는 앉을 자리가 없어요. 그리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감람 잎사귀를 물고 오죠. 성소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비둘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침례 받으실때, 하늘 문이 열리고요.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강림하셨다. 이 두가지 케이스를 놓고 볼때, 이 비둘기와는 언제나 성령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감람 잎사귀, 그리고 성령이 상림하신 것. 이 비둘기는 집비둘기가 아니고요. 산비둘기 입니다. 저쪽에 있습니다만 가까워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비둘기, 비둘기는요. 요한복음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독수리다, 말합니다. 하늘에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어떤 새로 비유하는가? 비둘기입니다. 이 비둘기는 그 눈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저는 비둘기를 가까이서 보려고 하면 비둘기가 도망가기 때문에 잘 볼수 없어요. 그래서 사진을 통해서 보면요, 이 비둘기는 눈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 눈은 첫째로요, 동그란데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하얀 테가 있어요. 완전히 뚜렸하게 이 눈이 드러나고, 이 눈은 아주 동그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통 눈은요, 여러분 실신한 사람의 눈은 어떻습니까? 흰자가 거의 대부분이죠. 만약 눈에 흰자가 많다면 조금 이상하게 보여요. 그런데 이 비둘기는 100% 까만 눈동자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비둘기의 눈은 여러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죠. 부드러운 눈입니다. 첫째 이 눈을 가만히 보면요. 여러분 가만히 한번 보세요. 비둘기 사진 보세요.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 보세요. 그 눈은 너무나 부드럽습니다. 순진합니다. 그 다음에 단순합니다. 눈이 진실하다. 그 눈은요, 순결하고요. 그 눈은 겸손합니다. 이것 때문에, 이 눈 때문에 신랑은 매료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기대하실까? 비둘기 같은 그런 눈, 이 눈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만 본다. 목표만, 상대자만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는 그런 눈, 이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죠. 다른데 두리번거리는거 아니고 주님만 바라보는 눈, 그런 눈은요, 부드럽고 순진하고 진실하고 단순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순결하다. 그래서 신랑은 거기에 매료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신랑은 "내 사랑아" 우리 말에는 "보라"라는 말이 빠져 있어요. "보라 너는 어여쁘고 보라 너는 어여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가서를 비둘기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가서 전 장을 통해서 비둘기가 여러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신랑의 마음 속에 이 비둘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비둘기같은 그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타나야 되겠다고 라고 하는 것을 아가서가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아 1: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여기 세번째 나의 사랑하는 자, 신부가 신랑을 향해서 이야기하죠. 계속 대화입니다.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예요.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화창하다는 말은요, 쾌적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꼐서 이 땅에 오셨을때, 요단강에서, 그리고 또 변화산상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나에게 화창한 자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쾌적함을 안겨주는 자다. 우리 주님께서는요, 이 땅에 사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주님의 음식이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목표가 또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겁니다. 그 일을 통해서 그분은 결단 가운데 어디까지 갔습니까? 십자가의 죽음까지 갔어요. 이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꼐서는 하늘에서 보실때에 하늘 문을 여시고 "이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화창한 자다. 쾌적한 자다. 그 말입니다. 나에게 모든 기쁨을 안겨주는 자다. 그런 말이죠. 여기 이 여인은 신랑을 향해서, "너는 어여쁘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왜 사랑할까? 정말로 아가서에 나타난 사랑, 이 사랑의 대화,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신부는 신랑을 통해서 너무나 아름다운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신랑은 사실은 우리 주님을 생각하게 될때, 완전한 아름다움입니다. 완전한 미입니다. 완전한 매력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매료 될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거기에 매료가 되게 될때,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전수받습니다. 이것이 아가서의 원칙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 어떻게 전달되느냐? 우리의 아름다움은 없어요. 그분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그분에게 와서 발견했을때, 그분과 교제하게 될때, 그분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전수된다. 그리고나서 그분은 우리를 보시게 될때, 우리로부터 매력을 느낀다. 이것 참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여기 신부가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그리고나서요. 거취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집은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우리의 침상은 푸르다, 푸르다는 말은 초록이라는 말입니다. 이 초록이다라는 말은 녹음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은 신선함, 싱싱함을 말하는 겁니다. 이 침상은 쉬는 곳이죠. 거기가 신선하다. 여러분 우리 편안하게 안락하게 쉬고, 휴식을 누려야 되는 곳, 거기가 지저분하거나 거기가 신선치 못하거나,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옛날에 그렇게 살았어요. 우리는 사실 안락이 없었어요. 쉼이 없었습니다. 이 신부가 신랑을 향해서 이야기 하면서 너무나 쾌적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집, 우리가 거처하는 이 장소는 너무나 신선하고 아름답다, 라고 하는 것으로 이제 이야기를 옮깁니다. "우리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에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아 1:17).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 이것은 집을 질때 가장 중요한 프레임이죠. 이 프레임, 두가지 나무를 사용했어요. 이 둘은 다 레바논에서 온 겁니다. 이 아가서에서는 또 레바논이 어마나 자주 나옵니까? 이 성 지도에서요. 이 팔레스타인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곳은 헤르몬입니다. 여기에 두 산맥이 있습니다. 레바논 산맥과 항레바논 산맥, 이 두 산맥이 평행으로 달려갑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산들은 주로 항레바논에 위치한 산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레바논, 거기는 백향목의 본고장이죠. 거기는 전나무의 본고장이죠. 잣나무, 제가 캐나다에 있을때 로키에 들어가면 그냥 빽빽한 전나무, 잣나무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냄새가, 향기가 아주 완전히 베어 있습니다. 창조 이후에 그 나무들이 거기에 자라면서 베어있는 그 냄새, 그것이 계속해 흘러 나온다. 우리가 레바논을 생각하게 될때, 거기에는 백향목 냄새가 가득합니다. 이 백향목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기상이 있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썩지 않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고가의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아름답습니다. 잣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향기가 가득하다. 백향목은 향기로 가득한데요. 이 기상이 있고 위엄이 있고 그리고 부패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멸망당하지 않고 형기가 가득한, 그곳이 우리의 처소다, 그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의 거처, 그곳은 이런 곳이다. 푸르고요. 백향목과 잣나무, 그것으로 되어 있는 그런 집이다. 우리가 요한복음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와서 우리와 함께 거할 것이다, 라고 말씀 했어요.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그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거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여인은 신랑을 사랑하죠. 그래서 거기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거처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 2:1).
여기 계속해서 2장 1절은요, 신부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가리켜서요. 많은 경우에 골짜기 백합화를 찬송가에서 우리 주님과 관련해서 혼동이 오는데요. 여기 1절은 신부가 자기가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 백합화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사론, 어느 곳입니까? 사론은 욥바에서 가이샤라까지 걸친 약 30마일의 지중해 해안가의 평지입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다골산까지 수넴여인, 이 술람미 여인의 고향이죠. 여기 가까운 다골산, 이 근처의 평지도 이것을 사론의 평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여기서 키는 그것은 평지입니다. 산이 아니고 높은 곳이 아니고 낮은 곳, 평지입니다. 사론의 수선화, 수선화도 여러가지 꽃에 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 수선화가 무엇을 얘기할까? 크로커스라든지, 샤프론이라든지, 아니면 심지어는 무궁화, 여러가지 작은 풀입니다. 작은 식물입니다. 평지에 나는 작은 식물, 그리고 골짜기의 백합화, 골짜기는 뭐예요? 산이 아니예요. 저 깊은 곳이예요. 이것은 겸손을 말하죠. 온유를 말합니다. 이 여인이 고백한 것, 자기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 백합화다, 라고 말하게 될때, 겸손함, 이 겸손함은 매력적인 겸양입니다. 우리의 거짓 위선, 위선적인 겸손, 이런 것이 아니고요. 참된 겸손에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겸손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로부터 배우라" 주님 말씀했어요. 이 겸손은, 이것도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게 될때, 우리는 아름답게 됩니다. 매력적인 사람으로 됩니다. 사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 백합화는 순결한 거죠.
그런데 이제 2절 말씀을 보면요, 이제 신랑이 얘기합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아 2:2).
신랑이 신부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여전히 백합화를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신부 본인이 자기가 백합화라고 할때, 자기는 골짜기 백합화라 말씀했어요.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이야기하게 될 때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다. 이 가시나무, 세상을 말하죠. 가시, 인간이 타락했을때, 저주로 하나님께서 말씀했어요. 너희는 땅 파봐야, 일생 땅 파봐야, 수고하고 땀 흘리고, 그래도 나오는 것은 가시밖에 없다. 이것이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저주하신 거죠. 이 저주는 사실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저주하신 것입니다. 왜?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 저주를 하신 것이죠. 이 가시, 이것은 슬픈 현실입니다만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만, 가시와 같은 이 세상. 가시가 무엇입니까? 아비멜렉이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기드온의, 자기의 배다른 형제들 다 죽이고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도망했죠. 산에서 이야기 했어요. 아비멜렉을 향해서 너는 가시나무다. 너는 네가 네 그늘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지만 가시나무에는 그늘이 없어요. 그늘이 있다해도 그 그늘이라고 하는 것은, 그늘 밑에 가서 쉬어야 하는데 그늘, 밑에 공간이 없어요. 거기 들어가면 찔리는 겁니다. 가시에 그늘이 없어요. 이 세상은 쉼이 없습니다. 거기는 찔리는 것밖에 없어요. 그것이 저주예요. 그것이 세상이예요. 그런데 내 사랑하는 신부는 가시나무 가운데 자라고 있는 백합화다.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제 주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우리는 세상의 가시나무 가운데 살고 있는 백합화라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시나무, 저주받은 그런 식물이죠.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거기에 순결함이 있습니다. 백합화는 순결을 말하죠. 주님으로부터 받은 속성입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 2:3).
"남자들 중에" 이제 신부가 이야기 하죠.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네번째 '사랑하는 자'라고 여기 나옵니다. 아까는 "여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이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에 비해서,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수풀에 수많은 평범한 나무들이 있어요. 그 가운데 우뚝 솟은 나무가 있어요. 그 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들과 다릅니다. 마치 근계 일학과 같이 다른 나무들과 전혀 비슷한 점이 없다. 이것이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은 만인 위에 뛰어난 분입니다. 으뜸된 분입니다. 그분과 필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분께서 바로 이런 칭호를 받습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사과나무 같다. 이 어떤 사과일까? 여기서 사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과가 아니고, 사과 과에 속하는 향기를 가진, 그리고 잎이 무성한,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가지고 있는 식물, 지금 이것을 말합니다.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요, 그늘을 제공합니다. 열매가 너무 답니다. 그리고 그 그늘 밑에서 쉬고 희락을 느끼는 그런 나무입니다. 그래서 그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전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셨어요. 그러나 그 인간으로 오신 그 주님은 이 세상의 어떤 인간과 비교할 수 없다.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부족하고 또한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시지만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르다. 죄인에게서 떠나계신 분이다. 그분은 죄를 진 적도 없다. 그분의 근원은 하늘로서부터, 영원하신 분이시다. 영존하신 아버지다. 평강의 왕이시다. 그분은 전혀 다른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으뜸에 관해서 이야기하죠. 골로새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으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은데,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여기 네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내가 그 그늘에 앉았다. 그 그늘, 예수님에게 갈때 피난처가 있습니다. 우리 이 세상의 수많은 어려움들, 그 앞에서 뭐라고 말했어요? "내 사랑하는 자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가시나무 가운데서 찔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많은 시련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백합화가 어디로 가야 할까? 사과나무 밑에 그늘에 가야 한다. 우리 주님 아래에는 거기에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로 가야되요. 이 세상은 가시나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시나무, 이것은 현실이예요. 그러나 가시나무가 현실이라면 사과나무의 그늘도 그 이상으로 현실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또 하나, 그 "그늘아래 앉아서" 사과나무에게 갈때는 휴식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앉을 수 있어요. 우리 주님께서 "내게로 오라 네게 와서 쉬라" 그렇게 말씀했지요. 주님 언제나 우리에게 안식을 향해서 위해서 초청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안식을 주실수 있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을때 처음으로 안식을 얻은 거지만, 구원받고 나서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나를 배우라" 그리고 "내 짐은 쉽고 내 멍에는 가볍다" 주님 말씀했지요. 거기에 안식이 있습니다. 구원받고 나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쉼이 있습니다. 세번째, "심히 기뻐하였고" 사과나무 그분에게 갈 때에, 우리에게 환희가 있습니다. 그분의 임재앞에 나가게 될때, 거기에는 언제나 기쁨과 말할수 없는 기쁨, 영광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네번째요,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우리 이 사과나무 되신 그분에게 나가게 될때, 거기에는 신선함이 있고, 보양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있어요. 그 먹을 것은 입에 단 겁니다. 성령의 열매, 그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단 것을 줍니까? 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아름다운 것들,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 앞에 가게 될때, 그분의 임재 앞에서 우리가 즐기는 것은 보양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요, 그것은 맛있는 거예요. 단 것입니다. 우리가 즐길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답니까? 꿀보다도 더 달다, 말씀했어요. 이 맛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쁨을 누리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안식을 누리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피난처 안에서 살아갈수 있다 그 말입니다.
이제 장면이 바뀝니다. 4절에 가면요.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아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우리는 지난 시간 첫번째 시간에서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인도하시니" 그때는 침궁으로 인도했죠. 우리 한번 시간대로, 지금까지요. 지금까지 이 신부가 어떻게 인도를 받았는가를 몇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일 처음에, 침궁으로부터 시작했어요. 침궁으로 인도되었죠. 그 다음에 두번째, 어제 저희들이 본 말씀에서요. 침궁에서 이 신부가 생각한게 있어요. 나는 검다. 그렇지만 아름답다. 그리고 내가 내 일을 하지 못했다. 그 다음에 세번째는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알게하라" 양떼 먹이는 곳, 그래서 자기의 염소새끼를 어떻게 인도하랴, 라는 질문을 하죠. 그래서 왕은, 이 왕은 목자왕이죠. 그래서 양떼를 몰고가서 초장에서 양떼를 먹이는 곳으로 옮겨갑니다. 침궁에서 이제 초장으로 옮겨갔어요. 그 다음에 세번째, 왕의 상에 앉았었죠. 그 다음에 네번째, 백향목과 잣나무 아래, 그 거처에 있었어요. 그 다음에, 사과나무 그늘 밑에 와 있었어요. 그리고나서 이제 2장 4절 말씀에 보면 잔치집으로 인도합니다. 낮에 점심 때에, 왕의 상에서 식사를 했다면, 오후에는 백향목 그늘에 있었고, 늦은 오후에는 사과나무 그늘아래 있었다면, 이제 저녁에 밤이 되어서 이제 연회장으로 가는 겁니다. 연회장에 가서 무엇을 경험합니까?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아 2:4).
이 술람미 여인은요, 수넴여인입니다. 수넴여인, 갈릴리 지방의 여목자입니다. 포도원지기였어요. 시골사람입니다. 왕궁에 왔을 때에, 왕궁에는 수많은 세련된 여인들이 있었어요. 거기에는 많은 위엄있는 사람들, 위치가 높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인데, 이제 연회장에 들어갔을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있는가? 이 여인은 자연적으로 위축될수밖에 없죠. 자기는 출신이 시골사람이예요. 얼굴도 검습니다.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하게 될때, 이런것 저런것으로 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거기서 그는 어떻게, 연회장에서 그는 어떻게 서 있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어떻게 처신할까? 이 모든 것을 생각할때, 얼마나 마음 속에 위축되었겠는가? 거기에서 이 여인을 보호해주고, 지원해주고,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그 여인을 세워주고 붇들어 주고, 이렇게 할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솔로몬 밖에 없습니다. 이 여인이요, 지금까지 신랑과 대화를 쭉 해왔지요. 신랑이 신부를 부게 될때, 너무나 매력적이다.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사실 신랑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인데 신랑이 아름답다고 얘기합니다. 이 신부는 신랑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 갑니다. 심지어 그 신랑의 아름다움은 그 자기 두 가슴 사이의 몰약 향낭이다라고도 이야기 했어요. 이런 여러가지 아름다운 대화, 이 대화를 생각할때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주님과 대화하게 될때,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오늘 본 대화의 내용을 가만히 한번 살펴보면, 신랑도 신부도 서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우리의 대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바로 여기서 길러지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고요. 오늘날 세상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죠. 이기적인 것이죠. 우리도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처음 구원받게 될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구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을 저 수렁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고 치장해 주시고 단장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우리 주님께서는 감탄하시고 칭찬하시고 격려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대화 속에서 사랑이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와 같은 샘플을 이제 두번째 시간에 조금 보았습니다.
이 여인이 연회장에 갔을때에 수많은 세련된 여인들 속에서, 또 수많은 위엄있는 장관들이나 내관들이나 여기에 수많은 대신들이나, 또한 술관원과 많은 종들이 있었죠. 그 모든 사람들은 다 그 나라에서 탁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엄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이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어떻게 서 있을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누가 가장 잘 알고 있는가? 솔로몬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사랑하는 그 사람이 가장 잘 알고 있어요. 이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사가 되시는 겁니다. 그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때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될 때에 술람미 여인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고 어떤 때는 기쁘다가도 나 자신을 보면 세상에서 이렇게 미천한가? 이렇게 볼것 없는 그런 사람인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낙심되어가지고 우리는 세상에서 얼굴도 못내밀고 그렇게 사는, 그렇게 자기 연민 속에 빠지는, 신데렐라가 그 잿더미, 그 아궁이에 앉아서 한탄하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추락해 버리는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 사랑이, 그 잔치집에서, 그 연회장에서, "그 사랑이" 솔로몬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내 위의 기로구나" 그분의 사랑이요, 이 여인을 정복했습니다. 그분의 친절이 이 여인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 여인은요, 이와 같이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요. 그 여인은 담대함을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뭐라고 토로했느냐면, "그 사랑이 내 위의 기로구나" 이것은 아가서에 전반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명백한 현실입니다. 전쟁에서 깃발, 그 깃발에는 장군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하고 난 다음에 전쟁해서 이긴 땅을 얻었을때, 제일 먼저 꽂는 것이 깃발입니다. 깃발이 꽃혀있는 그 땅은 이긴 사람들의 땅입니다. 우리 주님께서요. 우리를 얻으셨어요. 우리의 마음을 얻으셨습니다. 우리의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불가능한 것에서 우리를 구원했어요.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여러가지 어려움을 통과하게 될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뒤어서 지주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붇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대표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세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향해서 그분은 내 위의 깃발이로구나. 그분의 이름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분은 승리하셨어요. 땅도 얻었어요. 내 마음도 얻었어요. 그리고 나는 그분을 향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쭈그러들 필요가 없다. 나는 이제 사람들 앞에서, 세상에서, 나 자신의 연민,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내 속에서 이제 실망하고, 낙심하고, 절망 속에 빠질 이유가 없다. 이것은 믿음을 요하는 것이죠. 그분의 사랑은 내 위의 기다. 그런데요, 그 다음에 일어나는 현실을 보세요.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이 여인이 병에 걸렸어요. 어떤 병에 걸렸는가? 사랑병에 걸렸어요. 암논이 다말을 연애했습니다. 다말은 몰라요. 암논이 혼자 그 여인을 자기가 얻고 싶었어요. 그것은 집착이었어요. 그 집착으로 인해서요, 그는 뭐 꾀를 쓰고,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 온갖 계획을 세우고 해서요. 결국은 다말을 더럽혔어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말은 더럽혀지고 암논은 살해를 당하죠.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 압살롬은 반역하고 또 죽습니다. 때로 우리는 상사병이 있어요. 내가 원하는 어떤 사람, 가질 사랑, 그것을 내가 추진하려고 하는 것, 거기에 내가 몰두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사랑병은 뭡니까? 여기의 사랑병은 그런 것이 아니고요. 여기의 사랑병은 이 여인의 상황을 우리가 보았죠. 술람미 여인이 연회장에 들어갔을때 사실 침궁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지요. 나는 검은데, 이런 생각을 했지요. 물론 그는 그래도 나는 게달의 장막 같지만 그래도 솔로몬의 휘장이다. 라고 얘기했지만 그러나 자기는 검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와 같은 생각이 시시때때로 그녀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연회장에 갔을때도 또다시 그 생각이 찾아 왔겠지요. 그러나 솔로몬이 그를 도와줬어요. 그래서 그 여인은 마음이 너무나 감격해서요, 그분의 사랑은 내 위의 기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 사랑은 너무나 엄청난 사랑이었어요. 그 사랑이 너무 클때요. 질그릇과 같은 우리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병이 난다. 그 말입니다.
근데요. 우리가 사랑과 관련해서요.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할때, 사랑하실때,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여기에 이야기한 것처럼 어떻게 대화를 할까, 라는 점에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정상적이라면요, 그 사랑을 우리가 마음으로 감지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마음으로 감지하게 될때, 우리는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거기에 합당하지도 않은데 주님이 이렇게 과하게 사랑해 주시니 은혜입니다. 고맙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표현하는 것이죠. 감지한 만큼, 우리가 표현하게 됩니다. 그럴적에 정상적인 사랑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보았어요. 계속해서 신랑과 신부가 대화하고 왔어요. 그것은 사랑의 대화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만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에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병적인 사랑의 대화가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이유에서든지요. 그 사랑을 감지하게 될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때가 있어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만큼이나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민감하게, 정확하게 감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겁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구원하신 이후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공급하시고 우리를 붇드시는 모든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감지하고 어떻게 답변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만큼 그것을 우리가 느끼고 감지하고 그것을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로 답변합니까? 아니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감사가 별로 없다. 다시 말해서 사랑만큼이나 우리는 반응이 그만큼 없다. 그러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것은 주님과의 대화는 점점 소원해 지겠죠. 소원해지고 주님과의 관계는 또 소원해 지겠죠. 대화가 소원해 지면서 관계도 소원해 지는 것입니다. 왜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갔을까? 왜 소돔성으로 롯은 가버렸을까? 성경에 수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케이스에서요.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때, 그 사랑을 사랑만큼이나 그만큼 우리를 마음 속에 민감하게 느끼고 그것에 대해서 많이 민감하게 느낀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주님 앞에 답변해야 됩니다. 어떻게 답변합니까? 감사로 답변하는 것입니다. 찬양과 예배로 답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화는 우리와 주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그렇게 느끼지 못할때 그 사랑은 시들해져 버리죠. 그러나 우리가 정상적이라면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로 답변하죠. 계속해서 사랑의 대화를 이어갑니다. 관계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 케이스에서는요. 술람미 여인의 케이스는 연회장에 들어갔을때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어요. 그 마음 속에 이것을 감지하게 될때요. 감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 이상을 받아버렸어요. 그래서요. 이제는 감지를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시들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이 너무나 커서예요. 예를 들어서요. 포도주를 감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포도주를 감별하는 사람들이 많은 트레이닝을 받았어요. 그래서 A,B,C,D, 많은 종류의 포도주를 놓고서 그 사람들은 이렇게 한번 맛만 보고는 어떤 종류의 포도주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이요,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포도주를 꿀떡 꿀떡 삼킵니까? 아니죠. 왜냐하면 혀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아주 미량의 최소한, 분별할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포도주를 살짝 맛보고 나서 결정합니다. 왜 그렇게 하냐면 혀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감도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그것을 여러번 한다면 쉬어야 됩니다. 여기서 마찬가지 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너무나 컸어요. 자기같은 사람을 이렇게 지원해 주다니, 자기같은 사람을 이렇게 세워주다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이런 병에 걸려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병에 들 정도로 그렇게 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하죠.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이 건포도라고 하는 것은요, 포도를 끓여서 농축한 다음에 밀가루에 섞어서 거기에 건포도를 넣고 만든 건포도 떡입니다. 우리 말에 건포도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건포도 떡입니다. 이 건포도 떡으로 첫째는 힘을 돕고, 그 다음에 사과로 시원하게 하라. 이것은 뭘 말합니까? 이 여인이 사랑하는 분의 사랑을 감지하게 될때, 그 감지할 수 있는 정확한 감도, 이것을 원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에너지가 필요한 겁니다. 이것은 시원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혀가 뭔가를 느끼게 될때, 계속해서 느끼면 원래 그 맛만큼 못느껴요. 그렇지요. 매도 계속해서 맞다보면 나중에는 아픈 줄 몰라요. 왜?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느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신선함이 필요하다, 휴식이 필요하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요, 건포도 떡으로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음이니라"
그때 이제 이 여인이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아 2:6).
여기 두 손이 있어요. 왼손으로는 내 머리 밑에다가 받쳐줘서 베개 해줬어요. 그 다음에는 오른손으로는 포옹했습니다. 두가지는 뭘 말합니까? 하나는 지주해 준 겁니다. 또 하나는 안아준 겁니다. 하나는 안보고 또 하나는 애정입니다. 여기보면 애정이 안보와 함께 가는 애정이다. 이 사랑은요, 안보를 제공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그런 겁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철저한 사랑입니다. 첫째, 베개해 줬다는 말을 볼때요. 신명기 33장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뭡니까? 막강한 전능하신 그분의 팔,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팔이 우리를 밑에서 받쳐주고 있다. 지주해 주고 있다 그말입니다. 안보를 보장해주고 있다. 그런데 오른손은 어떻습니까?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이게 애정이죠. 사랑입니다. 이 여인이 이제 사랑병에 걸렸을때, 그래서 에너지가 필요했어요., 건포도 떡이 필요했어요. 그 다음에 사과로 시원케 해달라. 그때요, 신랑이 왼손으로 지주해 주었어요. 오른손으로 포옹해 주었어요. 그래서 안보를 느끼는 애정을 주었어요. 이미 사랑이 너무 많아서 병에 걸렸잖아요. 그래서 이제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회복하면서 이 여인에게 주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 신랑이 주시는 안보와 애정,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죠.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때 마지막으로요. 오늘 마지막 구절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아 2:7).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게 될 때요. 사라으이 교제로 대화로 이어지도록 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인이 안밖으로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말씀드린대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말씀하시고 사랑을 표현해 주시는데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 이게 내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가 있어요. 외적인 문제가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사랑하시는데, 내가 그것을 못느끼도록 만드는 외적인 요인, 그것은 뭡니까? 밖으로부터 오는 겁니다.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 내 마음을 분요케 하는 것, 세상의 여러가지 일로 인해서 주님의 사랑을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이 내게 잘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이 여인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것은 대단히 시적인 표현인데요. 예루살렘 여자를 빙자하면서 지금 이와 같은 자신의 마음의 소원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왜 노루와 들사슴으로 부탁합니까? 노루, 들사슴, 이 두 짐승은 소심합니다. 대단히 민감합니다. 대단히 부드럽습니다. 그래서요, 노루와 들사슴이라는 말 자체가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될때,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말씀을 표현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게 될때, 이것은 대단히 델리케이트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섬세한 대화입니다. 따라서 이 대화는 외부로부터 산란함에 의해서 방해 받아서는 안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을 들사슴과 노루로 말씀하고 있어요. 민감하지요. 부드럽죠. 들사슴 어떻습니까? 조그만 소리가 나도 벌떡 놀라요. 그리고 도망갑니다. 우리의 사랑의 대화, 그것은 이렇게 잘 보존이 되어야 된다. 우악스럽게 다루어서는 안된다. 우리 주님과의 우리의 대화, 그것은 고요함 가운데,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액면 그대로 세심하게 그것을 우리가 즐기고 감사하고 감사를 표현하고 이렇게 대화를 이어가야 된다, 라고 하는 거죠.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요. 우리는 조용한 시간 속에서 주님과 대화하면서 이와 같은 주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들, 우리의 분에 넘치는 사랑의 이야기들, 우리를 격려하시는 말씀, 우리에게 꼭 들어야 되는 말씀을 하시는 이 위대한 사랑, 그리고 지주해 주시고 애정을 표현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매우 섬세하게, 매우 감도 있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우리는 매순간 그분에게도 합당한 찬양과 예배와 또한 감사의 말씀을 우리가 드리는가? 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저희들은 사랑의 대화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신랑과 신분의 이 대화, 그것은 그들의 아름다운 관계, 행복한 관계로 이어갑니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아가서를 추적해 가게 될 때에 이와 같은 관계가 이제 험악한 길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요인들이 또 다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이 사람들의 관계는 점점 성장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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