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아가서

아가서 01. 술람미 여인의 등장, 1장 1-8절

박이레 2022. 2. 17. 18:36

< 아가서 01. 술람미 여인의 등장, 1장 1-8절 >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솔로몬의 아가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아 1:1-8).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읽은 말씀에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책은 비교적 짧은 책입니다만 이 책속에서 주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영감을 통해 기록하신 말씀으로 저희들에게 많은 것을 말씀해 주고 있고 오늘 저희들이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주님의 거룩함과 또한 위대한 사랑과 또한 저희들을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속에서 저희들에게 계속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저희들이 느끼고 또 이 말씀 안에서 저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칭찬, 주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서 발견하는 매력, 이런 것들은 저희들에게 많은 도전이 되고 또 저희들에게 권면이 되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제일 첫번째, "솔로몬의 아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물론 솔로몬이지만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구약을 우리가 보면 다섯권, 열두권, 그리고 다섯권, 열두권, 이렇게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 모세오경, 그리고 여호수아서로부터 시작해서 에스더까지는 열두권의 역사, 그리고 다섯권 대선지서, 그리고 열두권의 소선지서, 그렇게 하면 다섯, 열둘, 다섯, 열둘, 그 중간에 또 다섯권이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 저희들이 시가서, 문학서라고 말하죠. 거기에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그리고 아가서, 이렇게 다섯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5,12, 5, 5,12, 이렇게 흔히들 말하고들 있죠.  
우리가 솔로몬이 쓴 이 노래를 생각하게 될때, 이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입니다. 솔로몬 왕이 탁월한 왕이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지혜, 그 위대한 지혜를 통해서 그는 많은 글을 썼습니다. 열왕기상에 보면 그가 남긴 노래가 일천다섯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고, 잠언을 삼천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에 일천 다섯의 노래 중에, 아가서가 남아 있습니다. 그 많은 노래들 중에 아가서는 탁월한 노래죠. 그가 남긴 삼천의 지혜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잠언을 통해서 그가 남긴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를 우리는 가지고 있고 저희들의 삶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지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욥기서를 보게 될때,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 속에 슬픔이 가득한 것을, 슬픔에 압도되는 책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편을 통해서는 그 마음의 감사가 가득한 그런 책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잠언을 통해서는 경건 안에서 교훈을 받는 그런 마음,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면, 전도서를 통해서는 탄식하고 있는 마음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가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아가서는 기쁨과 희락으로 가득한 마음, 그것은 참으로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 아니겠어요? 욥기를 통해서는 고난을 당하게 될때, 우리에게 어떠한 지혜가 필요할까?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을 통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감사가 넘치게 될때, 어떻게 노래할까? 노래하는 지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잠언은 우리가 일상생활, 사회생활을 하게 될때, 어떠한 지혜가 매일과 같이 필요할까? 라는 점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탐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지혜를 말씀하고 있다면, 아가서는 사랑을 구하는 사람, 구해자에게 필요한 지혜를 말씀해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 바로 앞에, 전도서가 있죠. 물론 이것은 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 솔로몬이 썼습니다. 전도서와 아가서, 대단히 대조적인 책이죠. 전도서는 해 아래서 되어지는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아가서는 물론 해 위에서 되어지는 일들 입니다. 전도서는 그것은 자연적인 것에 관한 책이라면 아가서는 영적인 책입니다. 전도서는 방황하고 정착하지 못한 그런 요동하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계속 탐구하고, 탐구하고, 그 모든 탐구 속에서도 지식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없는, 해 아래서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면 아가서는 사랑가운데서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 안에서는 죄나 용서와 같은 말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가 아니겠어요? 성경에서 죄의 문제와 용서에 관한 문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이 말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 문제는 다 해결이 되어 있는 문제다. 죄 용서함 받았습니다. 죄가 다 처리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나타난 이 말씀은, 사랑하는 주님과 어떠한 교제 가운데, 어떠한 사랑을 즐기고 있느냐? 사랑을 어떻게 깊이 느끼고 있느냐? 사랑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라는 사랑 속에서 통증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자라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가서를 보게 될때, 아가서는 마치 달팽이같은 계단과 같아서 위에서 보면 항상 뱅글뱅글 도는 겁니다. 달팽이 계단을 위해서 바라볼때, 그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은 항상 뱅뱅 도는 거죠. 그러나 옆에서 보게 될때, 그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은 점점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개인에서나 가정 안에서나 교회에서 또 그보다 더 크게, 사랑의 문제, 이것은 대단히 심각합니다. 사랑은 대단히 인기있는 주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요한계시록 2-3장에 나타난 일곱교회, 일곱교회의 제일 첫번째 교회는 에베소 교회죠. 에베소 교회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너희에게 문제가 있다. 그것은 첫사랑을 버렸다. 이것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것을 다시 회복하지 아니하면, 대단히 엄숙한 말씀을 하셨지요. 대단히 심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적당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 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문제를 해결 안하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곱교회, 계시록 2-3장에서 마지막 교회는 어떻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 이 교회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다. 미적지근하다. 이것 마찬가지로 사랑으로부터 이탈한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사도바울께서 말씀하실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이 세대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고" 이 사랑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랑을 사랑들은 추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원하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죠. 돈을 사랑하죠. 쾌락을 사랑하죠. 그래서 모든 비극과 슬픔과 어려움들은 깃들여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대단히 중요한 이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에 있는 말씀을 우리가 보게 될때,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극적인 드라마틱한 그런 사랑으로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요, 비유적인 접근으로 생각하고요. 또 다른 사람들은요, 이 말씀을 생각할때 뭐 삼각관계, 길게 얘기하고 싶은 가치도 없는 그런 이야기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만났는데, 원래 목자가 있었는데, 그 술람미 여인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이 그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서, 만일 그와 같은 가설이 사실이라면 솔로몬은 대단히 악한 사람이죠. 아가서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가서에 나타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물론 그것은 솔로몬이 썼습니다.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 담겨있는 완전하고 정확하고 또한 순결하고 거룩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말씀입니다. 아가서를 우리가 살펴보게 될때 그것을 육적인 생각으로 생각하게 될때,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고 해를 당하게 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또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대 랍비들은 아가서를 읽게 될때, 30세 이상 된 사람이 읽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말씀을 읽게 될때, 대단히 노골적인 것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만일 육적인 생각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실제 이 세상에 흔히 순환되고 있는 수많은 그런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대단히 우리에게 해로운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령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와 그의 충성된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대화, 그의 사랑을 얘기한다면,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의 대화, 이것을 우링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총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의 사랑, 그리스도께서 지역교회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사랑과 사랑의 대화,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개개인,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고 개개인 성도가 그리스도를 향해서 사랑을 표현하는 이와 같은 대화와 관계, 그와 같은 사랑의 깊이, 이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경험하고 이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을 저희들이 발견하면서, 이 사랑이 식어지고 그래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개인 생활에서 우리의 마음이 미지근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마음 속에 열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임 안에서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와 같은 사랑이,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이제는 기계적이 되고, 이제는 부담스럽고, 이와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아가서 말씀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신선한 교훈과 주님이 우리를 격려하시는 말씀을 우리는 새롭게 영안을 뜨고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는 이런 시간이 됬으면,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다. 솔로몬의 노래다. 라고 말씀하고 있고요. 여기 말씀에 보면 "솔로몬의 아가라" 이렇게 말씀했지요. 솔로몬의 노래인데, 우리말에 '아가'라고 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노래이죠. 그래서 노래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극치의, 가장 탁월한 그런 노래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감상적인 노래가 아닙니다. 이것은 드라마틱한 노래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 속에 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해야 됩니다. 아가서는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다 그리스도로 충만합니다. 어떤 표현에 있어서는 대단히 희미한, 그러나 그 희미함 속에서 나타나는 대단히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또 어느 부분에 가서는 그리스도가 그렇게 자세하게, 그렇게 끝없이, 마치 광산의 보화를 깊이 파내듯, 그 많은 것들을  파내는 자세한 묘사가 있어요. 그것이 희미한 묘사이든, 그것이 대단히 직접적이고 자세한 묘사이든 간에,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가서는 그리스도로 가득하다는 이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로 가득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 믿는 사람을 가장 사랑합니다. 사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을 사모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를 정도의 사랑입니까? 그것은 가당치 않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희생해서 저희들을 구원했어요. 저희들에게 사랑을 청혼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을 구원하시고 저희들을 사랑하시고 저희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고 그 교제를 받기를 주님이 원하신다.
여기보면 신랑이 신부를 사랑합니다. 신랑의 아름다움이 많습니다.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 신랑의 아름다움이 이 신부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 시부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 신랑이 감탄합니다. 이것은 참 저희들에게 대단히 커다란 감동을 주는 그와 같은 부분입니다. 아가서를 읽게 될때, 우리가 신령한 눈을 가지고 이 말씀을 바라보게 될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신다. 우리와 같은 사람을요? 우리와 같이 죄악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고,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사단과 같이 동조하던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던 사람들이었는데, 저희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구원하시고, 저희들을 변화시키시고, 저희들의 모양을 아름다운 것들로 만드시는 그와 같은 분께서요. 저희들 속에서 아름다운 매력을 발견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이 모든 말씀을 읽게 될 때요, 저희들의 마음은 주님 앞에서 뜨거워 질수 밖에 없습니다. 저희들이 주님을 섬기게 될때, 기계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의무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신선해지고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감동을 받고, 우리의 마음이 의지적으로 자발적으로, 주님을 향해서 뜨거운 열정 속에서 주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기계적인 것이거나, 율법적인 것이거나, 억지로 되는 그런 것이 아니죠. 자원하는 것이죠. 이 자원이라고 하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에 매료가 될때,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미에 우리의 마음이 감동이 되게 될때,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너무나 즐거워서 그분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열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이 붇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첫사랑, 이 첫사랑이죠. 우리 주님을 처음 믿었을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은요,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같은 사람을 주님이 사랑하셨다니, 라고 하는 생각에 너무나 감동이 되서 우리는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와 같은 감동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갔습니까?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덤덤해지고 영적인 권태기에 빠집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은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아가서를 읽게 될 때에, 아가서 안에 담겨 있는 신령한 신랑과 신부의 대화와, 그 대화 속에 담겨있는 그 사랑의 아름다움, 그것들이 그 마음을 매료시는 것. 그런 것들을 우리가 발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의 마음이 주님 앞에, 주님이 저희들에게 주신 사랑, 그것을 저희들도 주님 앞에 표현하는, 그 표현이 예배로 표현이 되고요. 봉사로 표현이 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교제 안에 풍성해지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그리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가라"(아 1:1).

첫번째로 저희들이 "솔로몬의 아가". 아가서 전체는 그리스도로 가득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 아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1-8장 마지막절까지 "내 위의 사랑의 깃발이라." 깃발이 펄럭입니다. 이 아가서 말씀에서 깃발이 펄럭인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가서 5장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분은 희고도 붉어 만인 위에 뛰어난다" 그 '만인 위에 뛰어난다'라는 말은 다른말로 하면 '깃발이 펄럭인다.'라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은 내 위의 기로구나. 펄럭이는 깃발입니다. 눈에 띄이는 깃발입니다. 탁월하신 분입니다. 으뜸되는 분입니다. 변화산상에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셨을때, 제자들이 여기에 초막을 짓자고 할때 하나님께서 다 가렸지요. 그리고 다 없어졌어요. 그리고 너희들은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그분은 으뜸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탁월하신 분입니다. 그분만 우리의 시야에, 우리의 영적인 마음 속에, 우리의 보좌에 앉으셔야 되는 분입니다. 그분을 우리는 뜨겁게 사랑하고 이 시대에,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 이와 같은 세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즐거움을 내적으로 느끼고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봉사하고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위해서 살아감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실까? 주님의 이름의 간증이 어떻게 드러날까? 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주님의 사랑에 관해서 오늘 저희들이 말씀 속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이 시대에 이 솔로몬 시대, 여기의 배경은 유대죠. 일반적으로 동방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고 우리 문화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에 공중에서 입맞추고, 이것은 대단히 쑥스럽고 부끄럽고, 담대하지 못하고, 그런 문화도 있겠죠. 그것을 문화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어째든 여기에서는 입맞춘다고 하는 것은요. 이것은 가장 친밀한 교제의 표현입니다. 두 사람과 함께 입맞출수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이 여인은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가 결혼하게 될때, 이루어질 그것, 사실은 이와 같은 동방의 문화에서, 또 유대인들의 결혼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남녀가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결혼날 서로 얼굴을 봤다. 뭐 이런 이야기는 흔하죠. 이와 같은 문화입니다. 거기에서 공개적으로 입맞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내 사랑하는 그분이 나에게 입맞춰 주기를 원한다. 그분의 사랑이 확실히 표현되고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라는 소원, 기대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될때, 우리 마음 속에도 술람미 여인처럼 이와 같은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 말씀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머리로서, 지식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뼈에 사무치도록, 그분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다. 그 사랑을 나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과거에 물론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을 현재 진행으로 내가 지금 확인하고 싶다. 나는 그것을 소원한다. 그와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게 될 때요. 우리는 얼만큼 일을 하느냐? 얼만큼 복음을 전도하느냐? 얼만큼 성도를 섬기느냐? 많은 영역에서의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큰가라고 하는 것을 내 마음 속에 저리도록 느끼고 있고 그것을 나는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싶은가? 그래서 여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포도주라고 한다면, 성경에서 항상 세상의 기쁨을 말하고 있죠. 세상의 기쁨입니다. 요한복은 2장 말씀에 가나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결혼에서의, 이 사랑에서의 식어지는 것, 우리 인생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권태기, 여러가지 문제, 돌발적인 문제, 또 다양한 우리 안밖으로의 문제 때문에 이와 같은 위기를 맞게 되죠. 그것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말씀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때가 아니라 결혼식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 위기에서 건져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거기에 주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 가나 잔치에서의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제일 첫번째 기적을 말씀하실때,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드님이 행하신 여러 기적들 중에 제일 첫번째 기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죠. 이 사랑의 고갈, 사랑의 위기, 이와 같은데서, 주님께서 거기 계셨기 떄문에 우리를 이와 같은 위기로부터 건져 주셨다. 여러분과 제가 수많은 일들을 하고, 많은 일들을 하지만 만약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말할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은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영적으로도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그 사랑을 내 마음 속에 절절히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예배에서도 문제가 될 겁니다. 나는 봉사하는데서도 문제가 될 겁니다. 교회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데서 문제가 될 겁니다.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서 이와 같은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솔로몬, 신랑입니다. 이 책 안에서 신랑은 솔로몬입니다. 그 배우자, 나의 누이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 그 대상은 술람미 여인입니다. 솔로몬은 그 이름이 '평강'이라는 말이죠. 또 다른 이름, '여디다'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사랑하신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솔로몬이거든요. 그 사람은 평화로운 사람이죠. 그 사람이야말로 아가서를 쓰는데 적격이지 않았을까? 물론, 솔로몬은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아가서 안에서도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이런 얘기도 나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이 두가지 면에 있어서, 공적에서 그는 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실패했습니다. 이 두가지를 구분해서 우리가 생각합니다. 솔로몬이 썼습니다. 솔로몬이 이 아가서를 썼는데, 이 아가서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인간적인 면에서, 개인적인 면에서 솔로몬을 본다면 이 말씀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적인 입장에서 소로몬은 왕이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받는다면 이 말씀은 솔로몬 개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그것은 사실 솔로몬과 술람미지만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우리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죠. 솔로몬의 여성형은 술람미입니다. 술람미라고 하는 말은, 많은 경우에 학자들은 수넴여인이다. 갈릴리 지방의 수넴이죠. 수넴에 엘리사 시대에도 귀한 여인이 있죠. 거기 출신, 갈릴리 출신의 여자다. 그래서 솔로몬의 파트너는 술람미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솔로몬을 향해서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죠.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이것은 우리 주님에게 가장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죠.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 포도주는 이 세상에서의 기쁨인데요. 이 세상에서의 기쁨 말고, 포도주보다도 더 나은 그와 같은 사랑.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은 세월이 지나면 점점 값이 떨어지죠. 어떤 것들은 값이 올라가기도 하지만 또 떨어집니다. 그러나 포도주는요, 세월이 가면 갈 수록 귀해지는 것은 포도주입니다. 50년짜리, 100년짜리, 150년짜리,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나 물론 포도주는 세상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그것은 세상의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에 말씀하고 있는 그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요. 그 사랑에서 헛되고 헛된 것밖에 우리가 발견할수 없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게 될때 아가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의 차원이 아닌,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랑의 차원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깨닫고 사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로부터, 누구로부터 사랑을 배우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안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이구나, 그것을 우리가 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경험하면서 즐거워하기 시작했어요. 바로 이와 같은 것이구나. 우리는 구원받고서도 실패합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연약속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온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이야기하게 될때, 매일과 같이 이야기 할때, 주님 오늘 섬길만큼 주님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주님 앞에 헌신할만큼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밖에 이야기 할수 없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것이 언제나 주님 앞에 우리를 엎드리게 하고 우리 마음 속에 감탄과 감격 속에서 다시 한번 주님을 위해 일어나게 하고 더욱 더 사랑하게 하는 이와 같은 동기가 되고 원동력으로 에너지를 주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겠어요? 여기 이 여인은요,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 라고 말씀했어요. 우리 주님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기쁨은, 사랑은 우리에게 비극이나 슬픔이나 이런 것을 안겨주는 것이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100%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희락과 즐거움과 행복과 평안을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있지만요. 우리가 하늘나라 가면은 그런 어려움들은 다 없어지겠지만 이 세상에 살게 될때, 한 문제가 사라지면 또 다른 문제가 우리에게 찾아오고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하신다고 하는 것을 다양한 각도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세상의 여러가지 것들을 다 이길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하지 못했다, 실패했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요, 이 여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 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여기 '향기름'을 말씀하고 있어요. 여기에 관유는 감람유에다가 네가지 아름다운 향을, 향기로운 향을 넣죠. 2:1:1:2 로 배합해서 넣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 섞어서 그것을 관유로 간직합니다. 그것을 제사장에게 바르거나 아니면 성소의 기구들에게 바르죠. 구별된 사람들과 구별된 기구들에게만, 해서 성별된 대상에게만 이 기름을 붓습니다. 그 기름이 부어지게 될때, 부어지는 순간서부터 향기는 사방을 향해서 흩어집니다. 형기의 아름다운 것은 흩어지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집에서 주님께 옥합을 깨뜨렸을때 그 집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하죠. 형기로 가득했습니다. 그것은요,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향기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죠. 그런데 여기 그것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향기롭고 아름답습니다. 그 냄새가 너무나 비교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많은 무역이 있었습니다. 아라비아나 인도나, 해외에 많은 해군을 보내서 무역을 해 왔습니다. 솔로몬은 사실은 페니키아왕 히람 때문에 그와 같은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페니키아왕은 지중해를 누비며 다니며 무역한 그러한 왕이었죠. 그 일대를 다 제패했습니다. 그도 배를 먼 곳에 보내서 갖가지 고가의, 그 당시에 가장 고가는 향품이었습니다. 이 향품을 사람들이 너무나 선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름다운 향기 때문입니다. 그 향기, 그것은 너무나 향기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이름을 향기라 말씀했는데요. 우리 주님이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의 이름 안에는 주님의 인격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성품, 거룩함과 또한 그분의 고상함, 온유함, 순결함, 이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 안에는 주님의 사역이 담겨 있습니다. 사역과 관련된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이름의 탁월함과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요, 우리가 그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그 이름으로 우리가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 이름으로 모입니다. 오늘 교회는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죠. 왜냐하면 그 안에 놀라운 혀익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위대한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지역교회로 모이게 될때, 주님께서 주신 약속은 그것은 너무나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교히가 모이게 될때, 지역교회의 여러가지 기능 중에 하나가 간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간증 뿐만 아니라 집합적인 간증입니다. 간증이 뭡니까? 향기입니다. 그것은 퍼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기를 타고 향이 사방에 퍼지듯, 그것은 아름다움의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탁월함이 성도들을 통해서 그들의 선행을 통해서,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퍼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그것은 쏟은 향기름 입니다. 우리가 보통 향유 옥합이라고 할때, 그 옥합은요. 밀봉되어 있는 것입니다. 용기 안에 밀봉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리아가 주님께 드리게 될때, 깼습니다. 일단 깨면, 그것을 다시 넣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모든 향기가 다 퍼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다는 아깝다고 했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아깝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너무나 합당하다고 아름다운 예배라고 보셨지요. 향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쏟은 기름이다. 그것은 깬 겁니다. 모든 희생, 모든 가치를 그것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만, 향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옥합이 고귀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놔두면 절대로 향기는 나오지 않아요. 우리 모임도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을 드리게 될때, 어디로부터 나오는 헌신입니까? 기계적인 헌신,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어떤 인간의 명예나 사람들의 어떤 프라이드나, 이런것 때문에도 우리가 일을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드려서 헌신하게 될때, 그것은 향기로 퍼지게 된다.
그래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여기 바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될 때는요. 곧바로 섭니다. 의롭습니다. 그런 사람, 우리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신분에 있어서나, 우리 상태도 의롭게 합니다. 그런 사람이요, 우리 주님의 이름, 그것은 쏟은 향기름과 같아서 처녀들이 사랑한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아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이제 침궁의 경험이 있습니다. 침궁으로 이끌어 들인다. 여기보면 갑자기 왕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사랑한다고 할때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때,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에서 값싼 사랑과 같은 이야기처럼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가게 될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의 위대한 권윗가 있습니다. 주님의 주권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평가으이 왕이십니다. 기묘자입니다. 그분은 모사입니다. 그분은 엄격한 탁월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높으신 분이 그렇게 자기를 낮추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을 조금의 필름이 없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도록 주님께서 우리가 이해하도록 사랑하셨습니다. 얼만큼 낮아지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이 두가지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위대한 신성, 하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온전하신 인간, 그래서 그분께서는 인간의 질고와 슬픔을 알고계신 분입니다. 그분이 세상을 걸어가시게 될때, 사람들의 모든 슬픔과 연약과 이 모든 것을 알고 체율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보게 될때, 그분의 장엄함과 위대함을 보게 될때, 그분은 너무나 고고한 분입니다. 이 두가지를 우리가 함께 알고 있을때, 함게 느끼게 될때,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바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케주얼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거룩하고 고매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이야기 하게 될때, 이 여인은 왕이 나를 인도한다고 했어요. 그분의 위엄과, 그분은 너무나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갈릴리에 와서 자기를 만났을때 저기는 목자, 여목자죠. 포도원에서 일하던 그런 시골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자기에게 와서 구혼을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높으신 분이요, 그러나 이 여인의 마음 속에 높으신 분이 나를 그렇게 가까이 생각하고 나를 그렇게 깊이 사랑한다고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침궁, 그것은 가장 사사로운 곳이죠. 프라이버시가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가장 친밀한 곳입니다.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아파트 왕의 궁전, 궁전 안의 아파트입니다. 가장 깊은 곳입니다. 거기로 인도해 드렸어요. 왜?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요. 주님과의 교제는요, 친밀한 교제여야 됩니다. 세상의 여러가지 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마음이 산란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영혼이 주님과 교제하게 될때 그분에게만 집중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내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여러가지 많은 환난도, 또한 세상의 수많은 산란한 것들이 내 마음을 유혹하기도 하고 많은 것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하고, 어떤때는 나를 낙심시키기도 하고, 주님과 교제를 가로막는 수많은 산란케 하는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서부터 우리가 벗어나서요, 그분과만 시간을 보내는, 말씀에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수많은 여건들이 내 마음의 상태를 흔들어 놓는 상황에서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때, 집중해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되겠다는 거죠.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골방에서, 물론 우리는 길 가다가도 주님 앞에 기도할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길 가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침궁에 있어야 됩니다. 산란케하는 많은 요인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과 우리의 의지입니다.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여기 보세요. 여기 대명사가 바껴집니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 내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그렇게 말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저기 보시면요, 여기 두사람이, 왕이 술람미 여인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왕궁 안에 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 여인들을 가리켜서 예루살렘 여자라고 말하고 있죠. 왕궁 안의 여자입니다. 사실 그 여자들은요, 세련된 여자들입니다. 술람미 여자는요, 갈릴리 촌에서 왔어요. 그래서 자기의 컴플렉스도 나중에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 이 여인들, 궁전안에 있는 여인들, 그들은 세련된, 예루살렘의 여자들입니다. 그런데요. 왕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이 여인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영향하고 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릭스도와 우리가 가까이 교제를 한다고 할때, 주변 사람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왕이 이 여인을 침궁으로 인도하게 될 때요, 다른 여인들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임으로 이야기 하자면 간증 아닙니까? 개인적인 간증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산출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게 하죠.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행동이 다른 것으로 나타나도록 하시죠. 그래서 세상은 서서히 느껴가는 것입니다. 핍박도 하고 반대도 합니다. 조롱도 합니다. 멸시도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간증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빈정거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히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왕을 따라서 침궁으로 가게 될때, 이 예루살렘 여인들, 그들은 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에 그와 같은 친밀한 관계만큼 그와 같은 관계는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특권이기도 하고 책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책임이 아니고요, 특권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하게 될때, 그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책임이 같이 동반합니까? 우리가 가까이 하게 될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본다. 사람들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주님을 우리 개인이나, 우리 가정이나, 우리 모임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죠.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여기 다시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나다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왜냐하면 친밀한 교제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녀라고 할때, 곧바로 서 있는 사람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다. 솔로몬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솔로몬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보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 여인들이요, 이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사이의 이 관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얼마나 친밀한 관계나 하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 다음에 5절 말씀을 보면요, 침궁 안에서의 경험을 말해주고 있어요. 여기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여자들을 향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술람미 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고백입니다. 그가 이렇게 얘기 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 1:5).

여기에서 제일 첫번째 술람미 여인이 침궁 안에 들어와서 교제하면서 깨달은 겁니다.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교제할때부터 깨닫게 되는 그런 주제들이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이 교제하지 못하면요.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많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하지 못하는 사람은요, 그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면요. 주님의 더 깊은 것을 알지 못하면 그 깊은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과 깊은 곳에 들어가서 교제를 했습니다. 칭궁입니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친밀한, 그리고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는 그러한 상황에서 환경 속에서 교제를 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여러분과 제가 하루를 시작하게 될때, 또한 하루를 마치게 될때, 하루를 지나는 동안에 이와 같은 시간을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의 풍파 속에서 우리가 짓눌리게 됩니다. 오늘 주님과 가까이 교제함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환히 밝혀져야 될 이와 같은 것들이 결핍된다. 비타민의 결핍에 대해서는 우리는 민감하지만 주님이 우리 마음 속에 비춰주심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 속에 갖게 되는 활력, 생명력, 이것이 없어지게 될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피폐할까? 영적으로 얼마나 피폐할까?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 아니겠어요? 이제 이 여인이 무엇을 발견했는가? 그 여인이 이렇게 말씀했어요. 술람미 여인이요. 5절에서 "내가 비록 검으나" 자기 검은 겁니다. 본겅적으로 검습니다. 우리 구원받아도 본성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옛사람이 있어요. 그것을 보게 될때, 참 어떤때는 사도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밖에 얘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아무리 오랜 세월을 지난다해도 이와 같은 본성의 검은 것들은, 물론 우리는 옛사람이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바 되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우리는 부활했다고 하는 진리를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검다고 하는 것을 부인할수 없어요. 또한 본성적으로만이 아니라요. 경험적으로도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요. 그래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요한일서 2장 말씀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 주님의 뜻은 우리가 죄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만일 범죄하면, 말씀했지요. 주님께서 이러한 장치를 하셨어요. 우리 주님의 과거의 사역은 선한 목자로서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어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도 사역하십니다. 현재, 그분은 대언자로 사역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위한 위대한 목자로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가 죄 짓기 전에 우리가 죄 짓지 않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와 같은 현재의 사역, 그 사역을 우리가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는 여전히 아직도 육의, 육체적으로 구원받아야 될 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세월이 가면 갈 수록, 우리 자신은 우리처럼 더러운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전보다 더 더러워져서가 아니라 주님과 교제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이 얼마나 체질적으로, 본성적으로, 그리고 이 세상 사는데에 여러가지 실패로 우리는 더러운 사람인가, 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깊이 느끼고 있다는 말이죠. 이 여인은요,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좀더 주님을 의지합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끝까지 간다고 자기를 몰랐습니다. 이 여인은 무얼 알았습니까? 주님과 침궁에서 깊은 교제를 하게 될때, 자기가 누군지를 알았다. 우리는 먼저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때, 우리는 내가 누군지도 압니다. 내가 누군지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었어요. 주님을 믿고 주님을 알아가면 갈 수록,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자신이 얼마나 검은가를 깨닫지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자만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나는 절대로라고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 앞에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언제나 구하고 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길이기도 하죠. 우리의 마땅한 바이기도 하죠.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여기에 페러독스가 있습니다. 검은데 아름다워요. 예루살렘의 여자들, 궁전 안의 세련된 여자들, 세상의 표지 모델이나 이런 것으로 이야기한다면 아마 술람미 여인은 그 여인들을 못따라갑니다. 얼굴 피부에서나 뭐 그들이 가꾸는 모든 세련된 외적인 모양에서나 아마  그럴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요, 놀라운 확신이 있어요. 얼굴이 검은데, 그런데 아름답다는 거예요. 왜 아름다운가? 이것은 자기 착각 속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앞에서 "나는 검지만 내가 아름답다." 고 이야기하는 것은 착각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현실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때, 우리는 나 자신의 자기 가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기 가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깨달을때, 입니다. 이 여인은요, 솔로몬 왕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는 확인 합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만 우리 마음으로 그것을 절절히 느끼고 오늘 이 현재, 그것을 느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검지만 아름다우니" 참으로 영적으로 묘한 모순이죠.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게달,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데요. 게달의 장막, 그것은 언제나 시꺼멓습니다. 검은 장막이예요. 볼품이 없습니다. 게달의 장막 같지만, 그의 본래 모습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라면, 검은것밖에 없어요. 우리에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름답게 하셨어요. 그 은혜 가운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어요. 그래서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하죠. "게달의 장막같을지라도" 게달의 장막 같은지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으니" 솔로몬의 휘장이라는 말은, 솔로몬의 성전 안에 있는 휘장이든지, 아니면 솔로몬 궁전 안에 있는 아름다운 커튼들, 그 모든 것들은 다 아름답습니다. 한 마디로 아름답습니다. 성전 안에 있는 휘장은 우리가 옛날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주셨던 말씀과도 같이, 그 규례에서요. 휘장은 가늘게 꼬은 베실과 청색, 홍색, 자색실로 짰어요. 그리고 거기에 그룹을 수놓았어요. 그 모든 것은 너무나 공교했어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은요,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장인이었습니다. 그 실을 가지고 엮어서 나가게 될때, 그것은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은 너무나 세련되었고 너무나 섬세합니다. 너무나 균형잡혀 있고 너무나 색깔이 잘 배열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 왕되신 그분, 완전한 인간되신, 또 하늘로부터 오신 그 모든 성품을 이 휘장의 네가지 색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죠. 그것은 주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게달의 장막같이 나는 원래 그랬지만 주님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다. 라는 것은 뭐겠어요? 주님과 교제하게 될때, 나의 형상이 주님의 형상으로 바껴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정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말씀에서 그분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선택하셨고 또한 그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셨다고 말씀했어요. 예정의 목적은요,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을 보면요, 이제 주님이 오실때에, 우리 주님처럼 완전히 변하는, 몸의 구속의 날이 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의 모습은 변해가는 겁니다. 사실 변해가는 이 모습을 보게 될 때에, 주님이 아가서에서 그렇게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이 왕이 신부를 볼때, 너는 너무나 아름답다. 라고 감탄하는 거죠.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우리가 즐기고 또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 더 주님 앞에 예배드릴 주제라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검지만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이것을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얘기하고 있어요. 둘째는요, 6절에 왜 검어졌느냐 하는 이유도 6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

직접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이 여인이 포도원에 가서 일했어요. 그래서 그 뜨거운 볕에 완전히 검어졌어요. 미적인 감각에서 보게 될때, 이것 참 여성들이 가장 피하고자 하는 그런 거죠. 피부가 노화될까, 피부가 검어질까, 얼마나 우리는 썬텐을 바르고 모자를 쓰고, 얼마나 신경을 씁니까? 이 여인이 그렇게 말씀을 했어요.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해졌다. 그래도 흘겨보지 말라. 이 말씀을 읽게 될때요. 술람미 여인의 마음 속에요. 볼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 마음 속에 주눅이 들지 않았다.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주눅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디서 올까? 그것은 그분이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알고 있는 것은요, 다른 사람은 뭐라고 해도, 내가 뭐라고 해도, 솔로몬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 앞에 나가게 될때, 이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까? 주눅들지 않는 마음, 영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확신. 주님 때문에, 나 때문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이 뜨거운 태양볕처럼, 그래서 우리로 시꺼멓게 만들만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 남 모르는 나만 알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들, 역경들, 때로는 이와 같은 시험이나 시련이나 이런 것들이요. 우리를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시련을 겪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게 될때, 인간적으로 너무나 마음 속으로 위로해 줄 말도 찾을 수 없고, 너무나 어려움을 통과했기 때문에 뭐라고 얘기할수 없을 정도로 그런 다양한 것을 통과한 수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 어떤 사람은 그 역경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그 마음이 너무나 씁쓸해진, 그래서요. 항상 마음 속에 불평과 원망과 그리고 하나님도 원망하고 또 사람들을 원망하고 상황을 원망하고 여러가지 환경을 원망하고,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쓴 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똑같은 어려움을 통과했는데 그 어려움이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대단히 달콤한 그런 것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어떻게 그런 것이 될까?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에 수많은 그와 같은 예를 우리가 발견합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 주님이 주신 결말이 있습니다. 그 결말은 씁쓸한 것이 아니고요.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품의 변화,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의 탁월함, 그리고 주님 앞에서의 더욱 더 낮아지는 그와 같은 자세,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는 모습,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 그와 같은 상황,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은요, 그로 하여금 매우 달콤하고 감미롭게 만들어 주었다.
여기 이 여인은요, 이 뜨거운 태양볕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는데 나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많은 일을 했지요. 이 집 상황이 어떤 것이냐?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 술람미 여인의 아버지는 언급이 없어요. 어머니에 관해서만 언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 오라비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술람미 여인의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가했고, 이런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했어요.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지금 여기서의 상황은, 이 술람미 여인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우린 때때로 누구에 의해서 끌려가서 무슨 일을 하게 될때, 내 포도원을 지켜야 됩니다. 내 포도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터죠. 여러분과 제가 해야될 일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의 일터는 "나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꾼이요, 교회의 일꾼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일터는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우리는 다른데 신경을 쓸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말씀,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교회에 관한 일터입니다. 일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 이끌여서, 강요되어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여인은 주님의 침궁 속에 들어가서 주님과 개인의 친밀한 교제를 즐겼습니다. 그 즐긴 그와 같은 마음 속에서요. 그 여인은 이제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해야 될 일을 못했구나.' 사실 이것도 검은 것 중에 하나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나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죠. 우리는 지식적으로 확실히 알고 섬겨야 됩니다.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톨해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의 행한 모든 일과 동기와 또 우리의 행한 모든 수고와 열심과 헌신과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은 명확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섬겼는가? 아니면 사람의 생각대로 섬겼는가? 이 모든 것들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이 염언한 현실을 알고 주님 앞에서 경주하고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이 여인은요, 침궁 속에 들어가서 주님과 가까이 교제하게 될때 그것을 깨달았어요. '아, 이제 나는 내가 해야 될 일을 해야 되겠구나.' 라고 하는 것을 느꼈어요.
세번째 마지막으로요. 7절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아 1:7).

여기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 이렇게 얘기하는 그 칭호를 보세요. 이 여인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마음의 표현, 그것이 호칭에서부터 나타납니다. 내 마음에,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요, 3장에 가서도 네번 더 나타납니다. 3장 1,2,3,4절에 나오는데 거기 가서는 파수꾼에게 묻습니다.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서 파수꾼에게 묻는데, 물론 이것은 실제라기 보다는 꿈인데, 파수꾼에게 가서 물을때에, 사랑하는 분이 어디로 갔다, 사랑하는 분이 나를 떠났다. 찾을 수가 없다고 할때, 물을때, 파수꾼에게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가 어디 가셨냐?" 이렇게 묻거든요. 두가지를 1장에서는 주님에게 지금 말씀하는 겁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그분에게 "내 마음에 사랑하는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해 주십시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3장에 가서는 파수꾼에게 말합니다. 주님에게 말을 하듯,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게 될때, 그분에게 말하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든, 그것은 똑같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그 열정, 그와 같은 마음은요,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예배할때나,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주님을 선포할때나 그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나의 마음에 사랑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어요. 나를 위해서 굴욕을 당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고뇌와 고통 가운데 괴로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셨어요. 우리는 그 모든 전모를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이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 속에 깊이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이야기하게 될때 우리는 절대로 케쥬얼하게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그분을 이야기하게 될때 우리는 함부로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그분을 우리는 고린도서에서 이야기하게 될때 그분의 칭호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분을 향해서 말씀드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네 양떼 먹이는 곳과 정오에 쉬게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여기 두가지를 질문합니다. 이상하지요. 침궁에서 교제를 했는데 왜 그분은 또 어디로 가셨을까? 여러분들께서 이것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이 아가서의 말씀을 우리가 추적해 나가게 될때, 이 말씀 자체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도전해 주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 속에 가까이 있지만, 우리가 그런 말하죠.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 있으면서도 또 보고싶은 사람, 세상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우리 주님과 가까운 교제를 했어요. 그렇게 가까운 교제를 하면 할수록, 우리 주님에 관해서 더 알기를 원하는 겁니다. 찬송가에 '예수님 더 알기 원하네,' 그런 찬송이 있지요. 아는데 더 알고 싶은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데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것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그런 찬소이 있잖아요? 여기에 이 여인이 너의 양떼 먹이는 곳에 대해서 생각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교제하면요. 목자의 심정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양떼 먹이는 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침례받고 모임에 더해지고 모임 안에서 교제하게 될때,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마음 속에 성도들은 양인데, 주님의 양인데, 이 양들에 대한 복지와 영적인 유익과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더욱 더 생각하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우리는 마음 속에 목자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으로 이야기 합니까? 애굽사람들은 목자를 가장 천시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에 잘 기록되어 있죠. 세상은 목자를 천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들 다 목자였습니다. 아브라함 목자여습니다. 이삭 목자였습니다. 야곱 목자였어요. 모세 목자였어요. 다윗 목자였어요. 솔로몬? 솔로몬도 목자왕입니다. 그가 지금, 그래서 여기보면 "너의 양떼 먹이는 곳" 그곳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형제님이든 자매님이든 우리는 모임 안에서 성도들의 복지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에 두고 있습니까? 장로 아니라도, 우리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마음에 두고 살고 있습니까?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일하는 형제님들을 위해서 우리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비판하고 있습니까? 이 여인은 주님과 가까이 하면서 "너의 양떼 먹이는 곳" 그곳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정오에 쉬게 하는 곳" 쉼, 먹는 것과 쉬는 것이예요. 이 두가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이 유명한 시를 이야기하게 될때,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한다 그랬지요. 양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죠.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쉬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 여인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 여인은 만년 초신자가 아닙니다.이 여인은요, 이제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 주님이 나를 부르신 이 위대한 부름에 대해서 주님 앞에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한 점입니다. 내가 은사가 있든 은사가 있지 않든 주님이 나에게 나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든, 아니든, 모두가 이와 같은 일에 주님과 가까이 교제한다면, 침궁에 들어가서 교제한다면 그와 같은 경험을 우리가 할 것이다.
여기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고하라. 여기 보세요. 우리가 지금 읽은 지금까지 알씀을 보면 제일 첫번째, "내게 입맞춰 조십시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나는 인도하라" 라는 말씀이 있어요. 세번째는 7절에 "내게 고하라" 내게 말씀해 주십시요. 라는 말입니다. 이 세가지가 오늘 저희들이 살펴보는 말씀의 흐름입니다. "입맞춰 달라" 이것은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고 싶고 고대했죠. "나를 인도하라" 그분이 나를 인도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 주님의 인도를 어떻게 느낍니까?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어떻게 느껴요? 성경 말씀에는 여기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나는 어떻게 주님의 인도를 따라갑니까? 주님과 가까이 할 때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때입니다. 주님의 뜻을 우리가 귀히 생각할때 입니다. 그러면 나는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이 나에게 주님이 어디서 양떼를 먹이시는지, 그리고 오정에 쉬게하는 곳이 어디인지,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요."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자 같이 되랴" 여기 보면요, 사랑하는 분이양떼를 먹이는 그런 장소가 있어요. 그런데 또 다른 장소가 있습니다. 그의 동무들이 사랑하는 분의 동무들이 양떼를 먹이는 그런 장소가 있어요. 우리 두가지 장소를 잘 구분해야 됩니다. 주님이 양떼를 먹이시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모여서 주님을 섬기고 양들을 돌보는가? 아니면 인간의 이름, 주님을 가까이 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합니다. 그런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앙떼를 먹이는가? 이 둘은 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동무, 솔로몬의 동무, 좋은 사람들입니다. 양떼를 먹입니다. 그러나 이 술람이 여인이 주님과 침궁에서 교제하면서 깨달은 것은 주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 그곳이 얼마나 고귀한가,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중심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은사를 중심으로 모이면, 은사가 사라지면 우리는 다 흩어져요. 우리는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모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은사도 공급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님이 공급하시는 충분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중심으로, 그분의 이름을 중심으로해서 모입니다. 이 여인은요, 그것을 지금 마음 속에 두고 질문합니다.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자 같이" 이것은 면박을 쓴 것입니다. 구약의 표현에 의하면 얼굴을 가리웠다는 말은, 그것은 과부가 남편을 잃고 그 괴로운과 수치 가운데서 역경 가운데서 자기의 얼굴을 가리우는 겁니다. 또 정결하지 못한, 순결하지 못한 여성들이요, 자기 얼굴을 가립니다. 이것은 수치를 말합니다. 다말이 자기 남편이 엘이었는데 엘이 죽고나서 오난도 가버렸죠. 유다가 또 다른 아들을 줄까 했는데 안줬어요. 그래서 마치 창녀처럼 얼굴을 가리고 길거리에서 서 있었어요. 그것을 지금 말합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겁니다.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자 같이 되랴" 내가 왜 거기가서 그렇게 하고 있으랴? 라는 말입니다. 그것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아 1:8).

"여인 중에 어여쁜자야" 주님이 이 여인에게 말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구원받고 우리가 주님 가까이 교제하게 될때, 우리는 주님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합니다. 우리 주님 말씀을 보면 "믿음에서 믿으로 화하고 능력에서 힘을 얻고 더 얻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예서 은혜에 이르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고, 이것 전부 변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하게 될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겁니다. 주님이 그것을 보게 될때요, 그것을 주님이 예정하신 거거든요.  주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예정하셨다.. 그 모습을 보게 될때 주님이 기뻐히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표현합니까? 이 여인이 주님을 부를때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주님이 이 여인을 부를때에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여인에게서 매력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것 참, 얼마나 우리가 몸둘 바를 모르는 겁니까? 얼굴이 검은 사람이었는데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담대합니다. 근거없는 가짜가 아니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되는  믿음을 통한 담대합니다. 주님과 가까이 있을때요. 참 주님의 은혜는, 주님이 우리르 보게 될때, 나는 너한테 매력을 느낀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아가서 전체를 통해서 가특히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말로 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보고도 너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러이러한 것들이, 그냥 말로 건성으로 매력적이다. 이렇게 기분맞춰 주기 위해서 그냥 아첨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발견하는, 그것 참 놀라은 은혜입니다. 그 아름다움은요, 고유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이 나에게 전수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너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거죠.
"여인 중에 어여쁜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여기 주님의 친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없다면 주님께 구하라 그러면 꾸짓지 않고 너그럽게 주시는 주님께서 주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합니다라고 할때, 주님이 주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속성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하는가? 기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요, 주님이 어떤 분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충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성품적으로, 속성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주시며 영광을 얻는 분입니다. 우리는요, 그분에게 의지하고 받음으로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존재가 교제 가운데 만나서 말씀 가운데 교제하고 기도 가운데 주님께 의탁하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게 될때, 이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나와라. 내가 주겠다." 여기에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서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신부는요, 이 신랑에게 구합니다. 그리고 줍니다. 매력 포인트도 받습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도 받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아니겠어요? 이것을 사용합시다. 모임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개인도, 가정도, 사용해야 됩니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여기 키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발견할 수 있을까? 양떼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겁니다.양떼의 발자취라고 하는 것은 지난 2천년 동안 성실하고 주의 말씀을 경외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그런 성도들, 경건한 성도들이 걸어간 믿음의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양떼 먹이는 것과 관련해서 말씀하면, 신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의 진리입니다. 양떼가 어디를 걸어가야 되요?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의 양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양으로서 교회로서, 우리는 어떻게 걸어가야 됩니까? 이 걸어가야 되는 길을 성서는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이 교회는 어떻게 지어졌으며 이 교회는 어떻게 그 안에서 운영이 되고, 어떻게 인도가 되고, 그 안에 어떤 위험이 있고, 어떤 이로움이 있고, 거기서 어떻게 역사하고, 어떤 질서가 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고, 이 모든 것은 교회의 원칙과 실행에 대해서 신약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양떼의 발자취입니다.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목자들의 장막곁에, 목자의 장막이 아니라 목자들의 장막입니다. 이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새끼를 먹일지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따라가야 될까? 사람 따라가는게 아니예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 주님을 가까이 하는 그 사람, 가까이 가야 됩니다. 목자들의 장막이 있어요. 왜 장막을 쳤는가? 그들은 거기 상주하면서요. 양들을 하루만 보는게 아니예요. 계속해서 봐야 하기 때문에 장막을 치고 있는 거예요. 거기서, 너의 염소새끼를 먹이라.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나의 염소새끼가 있습니까? 구원받고나서 5년이 되고 10년이 되도 나는 언제나 막내입니까? 나는 구원받고 나서 주님 앞에 섰을때에, 모임 안에 영접이 되고 교제하게 될때, 세월이 가면서 나의 영적인 후배들이 나타나고 내 동생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염소새끼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나는 어떤 일을 할까?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나는 마음을 쓸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되겠다. 침궁에서 이 여인은 이것을 생각했어요.
오늘 저희들이 여기서 마쳐야 되겠습니다. 이 사랑의대화의 이 관계는, 앞으로 계속됩니다. 이 사랑은요, 계속해서 순탄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아가서 말씀을 통해서요. 여러가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이 사랑은 자랍니다. 이 사랑은 성숙해 집니다. 이 사랑은요, 자기만의 행복만이 아니라 다른 영혼들의 행복까지도 포용하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것을 우리는 앞으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께서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고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축복해 주시도록 저희들이 함께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