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느헤미야

느헤미야 10. 다시 교정, 느헤미야의 본

박이레 2021. 12. 4. 22:45

< 느헤미야 10. 다시 교정, 느헤미야의 본 > 2013년 /정형모 형제님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 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느 13:4-9).

저희들은 어제 느헤미야 안에 담긴 여러가지 사건들 중에 이제 대단히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순간을 말씀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성벽이 완성이 되었고요. 또 느헤미야 마음 속에 그 안의 거민들이 어떠한 상태로 이주해 거할 것인가? 그래서 그 성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놀라운 성으로 변할 것인가, 하는 구상이 이루어 진 것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백성들은 예배했고 또 봉헌식을 통해서 그들은 즐거워 했고 또 그들의 기쁜 소리가 먼 곳까지 들렸다. 이 사건은 느헤미야 시대부터 지난 백년간의 역사, 이것은 포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한 때죠. 제 1차 귀환, 그리고 2차의 에스라가 훤씬 후에 귀환하지요. 또 엘마 후에 느헤미야가 귀환해서요. 지난 백년동안 비록 포호 생활에서 귀환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는 아직도 대단히 말로 할수 없는 어려움 속에, 무너진 성이나, 주변의 반대나, 또 그들이 꿈꾸고 있었던 것들은 결코 이룰 수 없다고 하는 절망감 속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변화시킨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땅에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가 행한 놀라운 일, 그것은 백성들에게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비전을 심어준 사람입니다. 사람들 마음 속에 영감을 불어 넣어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며 백성들이 일어나서 실제 일했고, 그들은 협력했고 수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고, 성은 세워졌고, 그 후에 말씀을 통해서, 또 자백하는 기도를 통해서, 헌신하는 마음 통해서, 그들이 예루살렘 성에 이주하고 또 그 주변의 각 마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인구가 잘 분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봉헌식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질서도 어제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었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신 것도 저희들이 보았지요. 오늘 저희들이 이제 봉헌식에서 그들이 기뻐했던 놀라운 결과는 영적 지도자들을 이제 그들이 확고히 지원 했고요. 그들이 전에 언약한 말씀대로 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또한 13장에 들어와서 그들 가운데 섞인 무리를 몰수히 분리해 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들이죠.
그런데 저희들이 오늘 보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 13장, 마지막 부분에서요. 느헤미야가 이제 그의 12년의 총독 생활을 마치고 잠시 페르시아로 돌아갑니다. 아닥사스다 20년서부터 32년까지 그는 왕의 명을 받들어서 예루살렘에 총독의 자격으로 왔지요. 술관원이었던 그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서 총독의 자격으로 와서 이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잠깐 페르시아에 돌아갔다가 다시 오게 되는데, 얼마동안 그가 부재 중이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만, 정확한 것은 그의 부재 중에 슬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어제 저희들이 생각해 본 것처럼, 놀라운 회복, 12장에 있었던 위대한 회복과 함께, 봉헌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던 놀라운 기쁨,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전에, 적어도 지난 100년 동안, 그리고 포로시대까지 하면 200년동안 그들 가운데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이 이루어 졌습니다. 놀라운 간증입니다. 이방사람들이 이 백성들이 성벽을 짓고 또 영적인 백성들이 되어서 즐거워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죠. 그런데 느헤미야의 부재 가운데 이제 슬픈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슬픈 현실을 보게 될때,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이와 같은 현실을 슬프지만 원치 않지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13장 말씀을 우리에게 추가해서 말씀해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12장까지 끝났으면 아주 깔끔하게 끝났을텐데, 그러나 느헤미야의 역사는 그가 페르시아로  돌아가는 그때까지 해서 끝난게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느헤미야의 그의 생애가 끝난다고 해서, 그의 사역도 끝나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놀라운 부흥이 있고 난 후에 슬픈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현실로 보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현실로 보기 때문에  느헤미야서 13장 말씀은 저희 모두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또 지혜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현실을 잘 분석하고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비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오늘날 후대에 명확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느헤미야 부재 기간 중에 어떤 슬픈 일들이 일어났는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가? 또 일에 대해서 느헤미야는 그가 돌아왔을때, 그것을 방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단호히 대처했는가, 라고 하는 점도 저희들 모두에게 이제 교훈도, 또한 격려도, 또한 경고가 되는 말씀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제일 첫번째 있었던 일은 엘리아십에 관한 일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입니다. 이 사람은요, 이 엘리아십은 여러분들께서 느헤미야서 3장 말씀에서 처음 발견 했지요. 3장에 열개의 성문이 건설되게 될 때요, 제일 첫번째 양문을 건설하게 될때, 제사장 그룹들이 이 일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때 소개된 사람이 바로 엘리아십입니다. 3장 1절 말씀에 "그때 대제사장 엘리아십"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었지만 이 일에 다른 이들과 함께 수고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죠. 또한 귀한 공이었습니다. 대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수작업으로, 노동으로 하는 이 일에 그가 동참했다고 하는 것은 귀한 본이죠. 그런데 저희들이 느헤미야서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은 사람이 마지막 장에 가서 그는 원수와 내통하고 또 원수의 가문과 연혼하는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의 전에 심각한 해를 끼쳤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또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에서 놀랍고 기이한 일들도 보게 되고요. 또 슬프고 애통하는 그런 역사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엘리야십, 13장 4절에서요. 엘리아십을 대제사장이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를요, 그냥 제사장 엘리아십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게 될때, 성령님께서는요. 이 사람을 대제사장의 영예에 두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 그를 제사장 엘리아십이라고 소개하는데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원수와, 우리는 도비야가 어떤 사람인지 느헤미야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죠. 이 사람과, 다른 사람도 아닌 대제사장이 어떻게 연락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시작할 사람이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고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셨습니다. 그가 나실인으로 서약한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있어서 세 사람, 세 여인과, 그가 이제 가까이 한 사건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다 그가 격파해야 될 블레셋 사람들이었죠. 삼손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그에게 원수가 누구냐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그는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삼손은 물론 머리로서는 블레셋이 원수라고 하는 것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삼손에게 있어서, 그가 블레셋 사람, 특히 블레셋 여인과 가까이 하고 또한 그는 그의 마음을 서로 나누고, 그 결과는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수치와 또 한 그에게 가장 홀 마크와 같았던 능력과 힘, 이런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는 눈을 뽑힘을 당했습니다. 그는 무력해 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그는 결코 할수 없는 무력한 사람이 되고 말았지요.
여기 열리아십을 보십시요. 그는 3장에서 위대한 본을 보이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그의 삶 마지막에 가서 13장에서는 불비스러운 일을 저희들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주님을 섬기게 될때, 주님을 계속해서 섬기는 과정 중에 우리 마음이 항상 주님에게로 이끌려져야 되겠다 라고 하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을 섬기게 될때, 그 처음 가졌던 마음을 계속해서 변치 않고, 아니, 날이 가면 갈수록 주님과 가까워지고 주님의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우리는 좀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갈 필요가 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도 주님 앞에서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이 사건을 읽게 될때, 엘리아십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겸손히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될 것입니다. 저희들의 삶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마치는 날까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저희들이 가고 있는 이 진리의 말씀의 정로에서 이탈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향한 단 마음, 충성된 마음을 결코 버릴수 없다고 하는 사실, 이 사실을 주님 앞에 일일히 다시한번 기억하면서요. 주님의 은혜를 주님 앞에 갈때까지 구해야 되리라 믿습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가서 그의 부재 중에, 이스라엘 백성 안에 들어오는 점진적인 타락,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순식간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들어옵니다. 서서히 들어옵니다. 얼마나 천천히 들어오느냐면 때대로 우리가 잘 알수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이 타락한다고 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들어옵니다. 따라서요, 우리는 이 13장 말씀에서 느헤미야의 부재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서서히 그동안 깃들여 왔던, 이 타락,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지헤를 가지고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락이 들어오게 될때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 백성들 가운데 더 이상 그들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주님 앞에서 우리 삶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놀라운 동기로, 나의 삶을 움직이고 내 마음 속을 박동시키는 이와 같은 힘이 지금도 되고 있는가? 처음 나를 구원하셨을때, 그 주님의 사랑과 감격스런 마음이 지금 내 마음 속에 있는가? 아니면 그대보다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가? 때때로 우리는 고난을 피합니다. 여로가지 어려움을 우리는 회피합니다. 그래서 쉬운 길과 편한 길을 우리는 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때,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편한 삶을 살게 될때, 오히려 편한 길을 우리가 선택해서 가게 될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히 지키고 간다면 많은 핍박이 있고 반대가 있다고 하는 것을 두려워서 우리가 우회하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협하기 시작할때 시간이 갈 수록 더욱 더 타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력을 초기에 잃을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상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또 그분을 위해서 우리가 핍박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은 우리를 타락으로 더욱 더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여러움을 당하기로 작정을 하면 우리의 주님의 은헤가 우리의 삶 가운데 더욱 더 깊이 파고듭니다. 주님을 위해서, 그의 대의를 위해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서 걸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가 매순간 가까워짐을 항상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경우에 우리는 타락할만한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요, 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오래 전에 왔다가 총독 생활을 12년간 하고 그리고 페르시아로 다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왔을때, 그는 여전했습니다. 그는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향한 대의,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위대한 뜻,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이 비전,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의 삶을 우리가 살펴보게 될때, 그에게는 끊임없는 반대가 찾아왔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 가운데 개인적으로 반대를 받고 있습니까? 우리의 범죄로 인해서 그 죄책감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가 반대를 받고있느냐 말입니다. 이와 같은 핍박을 당하게 될때, 우리의 삶은 결코 타락의 길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대의 때문에 우리가 고난과 슬픔과 눈물을 흘리게 될때, 주님의 말씀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될때, 우리의 마음 속에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자 하는 뜨거운 의지가 우리 속에 돋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것과 우리 모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 그것을 기쁨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 당시에,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냐하면 인도자가 이와 같은 모양이니, 어떻게 백성들이 그의 본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보게 될 때에 인도력의 중요함을 보게 됩니다. 인도력, 인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걸어가게 될 때에, 영력을 얻습니다. 나아가야 될 방향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교제를 그들은 즐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통제한다고 하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죠.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우리는 느헤미야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과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타락해 가는 모양을 우리가 보게 될때, 우리 마음 속에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는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 가운데 있으면서 깨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자신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제하도록 허락해 드려야 됩니다. 그것은 어제와 그제 있었던 일로 족하지 아니하고 매일 우리는 깨있어야 됩니다. 지속적인거 말입니다. 그래서요. 느헤미야 13장 말씀에서 제일 첫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전이 버려진 겁니다. 우리는요, 10장 39절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언약을 하게 될때, 언약하죠. 견고한 언약을 하나님 앞에 맺고자 할때, 그들이 10장에서 뭐라고 결심한 말씀을 하나님 앞에 올렸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전이 버려졌었거든요. 영적으로 그들이 주님 앞에 합당치 못하면 얼마가지 않아서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버려버립니다. 이들은요, 전에 하나님의 전이 버려졌던 이 역사, 돌이켜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했고, 하나님 앞에 전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요, 13장 4절 이하 말씀을 보면 대제사장이 앞장서서 하나님의 전을 버리고 있습니다. 엘리아십, 그는 대제사장이고요. 양문을 건설했고,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는 어떻게해서 이와 같은 일에 빠졌을까? 그는 양문을 건설했습니다만, 그는 이 성의 안보에 대해서 하나님의 전의 고귀함에 대해서, 대제사장이요, 그것을 모르고 있다. 백성들의 안보, 백성들의 안전, 그리고 이 백성들의 영력, 이런 것에 대해서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인듯보면 참 이상하죠. 대제사장이 어찌 그것을 모를까? 그런데요. 이 대제사장이 이제 서서히 빠져 들어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첫째, 여기 열리아십이 있죠. 성문과 성벽 건축에 있어서 놀라운 역사가 있었어요. 그런데요. 13장에 와 보면, 엘리아십이요. 도비야와 연락을 합니다. 그 다음에 엘리아십의 가정이요, 산발랏과 연혼을 합니다. 이 두가지입니다. 연락하고, 원수와 연락합니다. 그리고 원수의 가정과 연혼을 합니다. 참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어떤 힘인가 하면 위대한 힘을 발휘할수도 있고요. 신령한 힘을 발휘할수도 있고, 그것이 대단히 악한 힘을 발휘할수도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요. 여호사밧 남방의 선한 왕이죠. 그런데 그 당시 동시대의 북방 왕이 누구입니까? 가장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악한 왕 아합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어떻게 아합과 연혼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역대기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는 북방에 올라가서 아합과 만찬을 하고 즐기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는요, 그는 선한 왕인데요. 그 선한 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가면 이제 감정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는 그의 남방 왕의 왕국의 왕으로서 그의 백성들의 안전과 또한 번영을 그는 마음에 두고 책임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합과 한 자리에 앉아서 그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북방왕이나 남방왕이나 우리가 다 하나고 그 백성이나 이 백성이나 다 하나다. 하나 아닙니다. 북방왕국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보게 될때, 남방 왕국은 언제나 성령님께서 하나님께서는 거기에도 어려운 일들도, 죄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줄기가, 다윗의 등불이 이 남방왕을 통해서 꺼지지 않고 보존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간증,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 여호사밧은요, 그 당시에는 별로 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연혼하고 그리고 하나가 되고 이제 두 군대는 아람을 향해서 공격하지요. 거기에서 참패를 당합니다.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이제 수치 가운데 겨우 목숨만 보존해서 돌아오지요. 이 모든 일들은요,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비슷한 사건을을 찾아보게 될때, 언제나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속에 깊이 두어야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요, 마음 속에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만일 이 사실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엄청난 값을 우리가 지불해야 될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지불했습니다. 여기보면요, 엘리아십이 지불했을뿐 아니라 엘리아십의 인도를 받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값을 지불해야 됬다, 그말입니다. 엘리아십은요, 도비야와 연락했고 산발랏, 그의 손자가 산발랏 가정과 이제 결혼함으로 인해서 연혼 관계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느 13:4).

이 엘리아십이 무엇을 맡았습니까? 이 대제사장이 무슨 골방을 맡을까? 맡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방입니다. 이 방은요, 많은 예물과 또한 많은 기구들, 기명들과 또한 노래하는 자와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줘야 될, 그런 많은 물품들, 포도주라든지, 곡물이라든지, 기름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가득히 담겨있는 방입니다. 이 방에 이 엘리아십이 느헤미야의 부재 중에요. 인도력의 부재, 이것 참 심각한 겁니다. 그런데요. 느헤미야가 부재 중에 있다면, 엘리아십이 인도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인도 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요. 그는 이제 연혼하고 또 원수와 연락하고 이렇게 하면서 마음이 원수 쪽으로 가버렸어요. 하나님의 백성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수에게 마음이 가버렸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마음이 더나가 버리면 그것을 무엇으로 치료하겠습니까? 이 사람은요, 원수에게 더 마음이 가버렸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더더군다나 인도자들 가운데, 인도자들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하나님의 백성의 안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원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사단의 역사에 대해서 더욱 더 가까이 한다면 그는 이제 그의 모든 지혜를 잃어버립니다.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이와 같은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의는 추락합니다. 그를 따라가는 백성들은요, 길을 잘못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책임이 이와 오도하는 인도자에게 있습니다. 엘리아십은요, 하나님의 전의 골방을요. 그 안에 있는 모든 물품들을 다 제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비야를 그 안에 들여오도록 하도록 위해서요. 도비야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여러가지 논리를 펴고, 그의 전략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엘리아십은 변했지만 도비야는 변하지 않았어요. 슬픈 것은요, 원수는 절대로 자기의 대의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뜻을 우너수는 버리지 않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뜻을 버린다 그 말입니다. 삼손의 케이스도 그렇지요. 엘리아십의 케이스도 그렇지요. 여호사밧, 아합이 남쪽을 향했습니까? 여호사밧이 북쪽을 향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저 13장 뒤에 가면 이제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유다 사람들이요, 아스돗 암몬, 모압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 결혼 했을때, 그 자식들이 유다 방언을 못합니다. 그런데 아스돗 방언을 합니다. 골방 안에 많은 하나님의 물품들이 있었습니다. 그 물품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 일하는 중요한 사람들에게 지금 지급되야 되는 핵심적인 물품입니다. 그것 없이는 레위 사람은 도망 갈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전의 역사는 그리고 예배는 중단 될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도비야와 연분관계, 그리고 그 집안과의 이와 같은 관계 때문에 이제 그는 공과 사를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대의에 대해서 그는 잊은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그를 그의 방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 방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그 방 안에 있는 하나님께 드려야 될 물건들, 다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안에 있는 물건들이 무엇입니까? 여기 5절 말씀을 보십시요. 거기에는 "원래" 라는 말씀을 보세요. 거기에는요, 갑자기 이런 물건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요. 원래, 언제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런 물건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소제물, 소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릐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의 완전함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살게 될때, 너무나 완전했다. 고운 가루, 유향, 아름다운 향기, 조금도 앞뒤가 맞지 않거나, 또한 그분의 행동에서 죄악이 있지 아니한 그런 것,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붙여 성령의 역사가 언제가 그분의 생애 가운데함께 했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아들을 통해 기뻐하셨다. 그런데 이 소제물을 다 제거해 버렸어요. 하나님의 모임 안에서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유향,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입니다. 모임 안에서요. 예수님을 제거해 버리려고 하는 그런 생각, 우리는 어떤때요, 우리의 편리를 위해서요. 이것저것 제해 버리고 적당히 주님 섬기고, 말씀시간 짧고, 간단하게, 그렇게 하고, 그런 사람들 마음 속에는 좀더 세상에 나가서 활동하는 시간을 더욱 더 많이 할애하고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종교성이 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예배당은 가고, 우리 모임의 성도들이 이와 같은 경향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정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그 말씀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참 이 시대에 답답하지 않습니까? 만일 이런 마음이 들어왔다면요. 이미 사단은 우리 속에 와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여기 소제와 유향, 그리고 기명, 기명은요.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게 될때, 그 안에 여러가지 하나님 앞에 드릴만한 것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 기명을 제거합니다.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줘야 될 십일조, 이것이 다 없어진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원천적인 것을 다 제거해 버리는, 이것은 뭡니까? 자동차를 타고가야 하는데 게솔린을 다 없애 버렸어요. 자동차, 더 이상 사용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이 성전이 안에 가장 중요한 골방,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전의 역사가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 되는, 이와 같은 물품들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것을 다 없애 버렸어요. 그리고 거기에 원수가 들어와 있습니다. 원수의 승리죠. 엘리야십과 연락하고 이렇게 할때, 도비야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세요.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는 우리의 원수는요, 마귀에게 철저히 순종하고 철저히 마귀가 지령하는 목표에 대해서 그들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뒤로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요, 마귀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나서는, 그것을 가리켜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라고 바보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 엘리아십 바보입니다. 도비야, 상당히 똑똑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대의, 자기를 지령하는 그 주인의 대의에 대해서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여기서 지혜를 얻어야 됩니다. 엘리아십은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참 숙맥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에 있는 모든 공급하는 물품들을 다 없애버리고 도비야를 그 안에 환영해 드렸다. 얼마나 작은 것 때문에, 그는 큰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인가?
기억해 보십시요. 6절에, "그때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느헤미야가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갈수밖에 없는 때죠. 느헤미야가 옛날에 원수들이 "오라, 오노 평지로 오라." 여기서 반대에 부딧쳤을때에 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이 큰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갈수가 없다." 그의 지도자로서의 분명한 결단을 그는 보여줬지요. 여기서는요, 여기서는 그는 왕의 수하에 있었던 총독이었기 때문에 그는 돌아갈수밖에 없었어요. 그가 돌아가게 될때, 그의 부재중에 일어난 슬픈 일입니다. 그가 떠나갔을때, 다른 인도자들이 이 일을 감당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엘리아십을 포함해서 많은 인도자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찾아왔던 타락의 현상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그들 가운데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시편 기자가 "내가 주님께 범죄치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다." 그 말씀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두번째요. 하나님의 전이 버림을 당한 모양을 보게 될 때요. 7절 하반절에 느헤미야가 이 엘리아십의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악한 일"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우리는 먼저요, 이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될때, 우리는 이것이 악한 일인지, 이것이 선한 일인지 분별해야 됩니다. 때로, 우리의 분별력이 약해지면요, 악한 일을 놓고서요. 선한 일이다. 그것 괜찮은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무분별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가지고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될 일을 가지고 어떤때는 꼭 그렇게 해야 되냐, 라고 어떤때는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결단을 보세요. 그는 절대로 이와 같은 것을 욥납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이 일에 대해서 방관하든지, 엘리아십이 했으니까지 할수 없다고 뒷짐을 지고 물러서 있든지, 이 일은 욥납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 일이 자행되고 있었어요. 아무도 이 일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느헤미야가 돌아왔을때야 비로소, "이 악한 일이다." 이렇게 정죄했다 그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필요한 것은요, 선한 일에 대해서는 장려하고 그것을 격려하고,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매진해야 되는 것입니다. 악한 일에 대해서는 이것은 악한 일이다, 라고 분별할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 없이는요, 우리는 우리 가정도 지킬수 없습니다. 우리 모임도 지킬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악한 일을 알았을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어요? 그의 행동은 단호했습니다. 그는요, 들어와서 그 안에 있는 도비야의 세간, 도비야의 세간은 거기 있어야 될 물건들이 아닙니다. 그 안에 있어야 될 것은 소제물, 유향, 그리고 십일조, 물품들, 이 모든 것들이 거기에 가득 차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요, 느헤미야는 그것은 다 밖으로 내 던져 버리죠. 우리는 이런 느헤미야의 행동을 볼때, 이것은 좀 과한 것이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느헤미야 마음 속에요, 도비야의 세간이 그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그는 한 순간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예배가 중단 됐습니다. 그 다음 사건을 보면 두번째 악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레위 사람들이요, 자기 고향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따라서 성전 예배는 심각하게 중단되고 있다. 이것을 보았을때, 그 세간을 다 던져 부셔도 부족하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느헤미야 마음 속에 있었던 그런 의지 였습니다. 우리는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갖다오기 전에, 12년간 1장서부터 시작해서요. 그가 예루살렘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 성 사람들의 능욕에 대해서 어떻게 견딜수 없어 했는가? 하나님의 영예가 땅에 떨어진 것에 대해서 그는 어떻게 마음 속에 느끼고 있었는가? 그 마음이 세월이 지난 후에 여전히 동일하다, 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희들은 이와 같은 마음을 사모합니다. 오늘과 같은 이 마지막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을 반짝 믿다가, 상황들이 일어나면, 우리의 마음은 다른데로 가고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심령은 이제 식어지고, 우리는 다른데 관심을 두고 이렇게 살아갑니까? 이와 같은 변절하기 쉬운 시대에, 우리는 느헤미야의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공감하는 것입니다.

이제 10절 말씀 보세요. 두번째 사건이 있습니다. 두번째 사건은 레위 사람들의 지원, 이런 것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가 또 알아 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느 13:10-11).

다 도망가죠.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수입원이, 성전을 가동시켜야 될 사람들에게 지불할 모든 수익원, 그들에게 분배할 것들이 다 없어졌는데, 그들이 어떻게 자기 고향으로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요, 따로따로의 일이 아니고요. 첫번째, 도비야의 침입, 그리고 엘리아십의 변절, 이것은 두번째 레위 사람들의 도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쇄적인 작용입니다. 따라서요, 인도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전과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이 말씀을 통해서 절감하지요. 그래서요, 레위 사람, 노래하는 사람, 다 향리로 도망했습니다. 그래서요.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첫째, 민장을 꾸짖었습니다. 그에게는 꾸짖을 용기가 있어요. 옛날에 5장에서요. 탐심으로 인해서 자기 동족을 향해서 이자를 받고, 어렵게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느헤미야는 분노 가운데 있었죠. 그들을 향해서 책망했지요. 느헤미야는 이와 같은 일에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레위 사람들이 떠나간 일에 대해서 그는 너무나 통분했습니다. 민장을 꾸짖었고요. 그 다음에 레위 사람을 불러들입니다. 보세요, 레위 사람 다시 와야 됩니다. 레위 사람, 떠나간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그 처소에 세웠습니다. 그거 참 중요한 일이죠. 도비야의 세간을 다 없애 버리고요. 그 다음에 그 방을 비우고, 레위 사람을 다시 돌려오고, 그 다음에 성전의 일이 다시 가동이 되어, 그 다음에 그 방 안에 채워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요. 이 한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요, 이 한사람이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죠.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항상 마음 속에 두고 간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죠. 이 일에서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이 일을 감행합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느 13:12).

다시 원상복귀가 됩니다. 원상복귀, 이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모임 안에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 타락으로 인해서 인해서 손상본 부분들, 이것 다시 원상복귀해야 합니다. 거기에 부족한 것들 다시 채워져야 됩니다. 떠나간 사람들 다시 돌아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서 상실한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그 마음 속에 돌아와야 됩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해야 됩니다. 레위 사람들, 낙심 했어요. 먹을게 없어서 이제 돌아갑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갈수밖에 없었어요. 이와 같은 현실을요, 느헤미야는요, 찾아가서 이것을 다시 원상복귀한다. 우리 모임에 이와 같은 일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임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면에서 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요, 장로들의 일은, 이 일에 대해서 우리 모임에 지금 어느 부분이 부족한가? 어떤 부분이 우리가 다시 원상복귀해야 될 것인가,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정확히 정의를 내려야 됩니다. 그리고 이 일에 실천해 들어가야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원상복귀 시키는 일을 즉각 해야 됩니다. 이것이 장로의 인도입니다. 모임은 온전히, 24시간 365일 언제나 옳기 때문에 모임이 가는 것이 아니라 모임의 크고 작은 여러가지 부족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과, 인도자들이 즉각즉각 그것을 발견하고 역사하고 그것을 회복시키고 그것을 정상화 시키고, 이와 같은 노력을 하는 이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모임에 문제가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모임의 문제를 바로 잡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것을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로 고지기를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으로 버금을 삼았나니..."(느 13:13).

여기에 보면 이 골발의 물품들을 관리하는 재무장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요, 이 물품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3절 하반절에 "이는 저희가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여기 참 놀라운 것이 있죠. 이 사람들은요,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아십, 충성스러운 사람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변절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사람에게 가담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충직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충성된 사람, 맏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라. 충직한 사람, 바로 이런 사람 필요합니다. 우리 모임에는요, 위대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그 말씀을 배반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직분은요, 이들의 직분은 무엇입니까?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요, 특히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가야 되는 것들을 잘 분배하는 일, 이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형제 자매님들, 앞에서 일하는 일꾼들에 대해서, 또 인도자들에게 대해서, 여러분들은 기도로 계속해서 지원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주님께서 계속해서 보호해 달라고 지원하고 있습니까? 때때로 인도자들이요, 그들은 위대한 일을 하는 우리 앞서가는 사람이다. 그래서요, 많은 성도들은요. 그들이 여러가지 당하는 위험이나 또 유혹이나, 또 연약이나, 때때로 고독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인도자들이 고독 가운데, 시험 가운데 쓰러진다면 그 영향력 파급하는 효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모임 안에 끼쳐지는 엄청난 손해, 그리고 명예실추, 간증의 손상,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계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요. 인도자 자신이 주님 앞에서 헌신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능력을 구하고, 이제 성실히 나가야 될 책임이 있는가 하면, 성도들이요,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정말로 지식있고 지혜있는 성도라면 그 일을 마음 속에 두고 주님께 지도해야 됩니다. 주님이시여, 우리 인도자들을 방어해 주시고 이 위대한 대의가 지속적으로 우리 가운데 펴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받고, 위대한 간증이 계속 드러나고 성도들이 말씀으로 인해서 기뻐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느 13:14).

여기 이제 아홉번째 기도가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기도의 책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죠. 그는 기도합니다.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언듯 보면 대단히 이기적인 기도 같습니다. 그런 늬앙스가 있다고 어던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런데요. 만일 그가 그런 이기적인 기도를 한 사람이라면요,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에 이 사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사람을 성경에다가 기록하겠습니까? 그의 기도를 우리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이 일을 인해서, 나를 기억해 주십시요.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는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아니고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대의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느헤미야는 마음 속에 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의 행한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요, 자기의 선한 일 때문에 지금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한 일은 물론 선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일이 무엇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 하나님의 전과 그 안에 있는 직무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임은 하나님의 전이죠. 여기 주님이 계십니다. 여기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또한 복음과 성도의 교제와 다양한 일들이 모임 안에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전,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의 전인 모임, 그리고 그 안에 되어지는 많은 직무,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이 따로 있고 내가 있는것이 아니라 그 일과 하나님의 대의와 나는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하나가 되어 있다. 그는 그와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때,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는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일이 보존되고 지속되는 것에 대해서 그는강렬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15절부터 보세요. 세번째 문제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10장 말씀에서요, 10장에서 이 안식일, 그들이 견고한 언약을 세우고요. 하나님 앞에 헌신을 드리고자 할때, 그들이 몇가지, 특별히 이 하나님의 전에 관한 문제를 말씀했어요. 성전에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려고 하는 그와 같은 노력, 그리고 항번제가 계속해서 드려지기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한데, 이 화목을 끊임없이 드리는 일, 그리고 첫번째 얻은 열매를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요. 십일조를 드려서 레위 사람과 제사장들이 게속해서 하나님 앞에 일할수 있도록 하게 하는 가장 성전 안에서 근본적인 일에 대해서 그들은 헌신했죠. 뿐만아니라요.성별, 잡혼의 문제에 관해서 그들은 결의를 했습니다. 도한 안식일, 안식일은 무엇입니까? 모든 날은 똑같은 날이 아니예요. 이 날은 하나님께 특별한 날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날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간이 가도, 강물이 계속해서 흘러서 세월이 가고, 달이 돌고, 태양이 돌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책임, 하나님을 기억하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헌신, 이것이 언제나 변치 않기를 원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식년, 6년동안 기경하고 7년째 되었을때, 놉니다. 기경하지 않습니다. 이방사람들은 받아들일수 없는 경제 원칙입니다. 이방 사람들은요, 365일 계속해서 일해서 어떻게해서든지 물품을 많이 축적해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릅니다. 바로 이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릅니다. 6년동안 일을 해도 7년째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신다, 라고 하는 마음, 그래서 7년에는 기경하지 않습니다. 7년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경하지 않을때 이방 사람들은 항상 거기 와서 기웃거립니다. 왜 이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할까? 그러나 이방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와 같은 개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요. 우리에게 충분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6년간의 모든 일을 통해서 얼마든지 7년째까지 먹이실수 있다는 간증을 언제나 이방을 향해서 베풀었다고 하는 겁니다. 안식이라고 하는것은,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기회였습니다. 간증의 기회였습니다. 믿음을 행사할수 있는 놀라운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이방사람들과 같이 불신 가운데 있을때,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들은 전에 안지켰기 때문에 여기 지키겠다고 이야기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 오래가지 않아서요. 다시 이 문제가 대두됩니다. 느헤미야 13장의 이 안식일의 문제는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날 다 나가서 일을 한다. 이런 문제가 아니었어요. 조금,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사단이요, 우리에게 찾아오게 될 때는요, 지혜로운 사단이 우리에게 여러가지 논리를 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 앞에 눈을 부릎뜨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지 못하면요. 마귀가 우리에게 찾아와서 그럴듯한 말을 할때, 우리는 슬쩍 넘어갑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있었던 일이 어떤 일이었는가? 우리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느 13:15).

첫번째 케이스 보세요. 유다의 어떤 사람이요, 안식일에 일하면서 물건 만들어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와서 거기서 물건 파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에 있는 사람들이 이날 일한게 아니고요. 다른 사람들이 물품 가지고 장사하기 위해서 이제 일을 했는데, 물론 그 사람들은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입니다. 안식일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돈 벌려고 하는거죠. 우리는 이 밖에 나가면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밤새우고 일합니다. 우리가 처음에 캐나다에 갔을때, 도시 안에, 한국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 여주인은, 그 가게는 365일 가동됩니다. 그렇게 돈 벌기에 분주했습니다. 얼마 갔다가, 그 집 아내가 죽었습니다.너무 피곤해서요. 그 많이 돈 번것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은요, 이런 가치관 가운데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될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기회, 단 한번밖에 없는 우리의 기회, 인생, 이것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돌려 드려야 될까?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 장사들이 들어와서요,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와서 여기서 장사합니다. 여기 문들을 통해서 들어오죠. 그래서 안식일날 장사합니다. 그 다름에, 이스라엘 사람, 유다 사람들, 이 성안에 있는 유다 사람들 생각에는요. 우리는 일 안한다. 그들이 가져오는 거 그냥 구매만 한다. 이런 논리죠. 이것이 잘못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모소딘 겁니다. 이것은요, 옛날 엿새동안 만나를 겉고 제 칠일에는 쉬라, 이렇게 말씀하셨을때,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비슷한 사람 있었어요. 일곱째 날도 또 나가서 구했지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가져왔을대요. 다 냄새나고 썩어버렸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일곱째날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하나님 생각하는 마음 없이요. 계속해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하면, 여러분 기억하세요. 반드시 썩어버립니다. 반드시 썩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의 견해가 아니고요. 여기 이 사람들이 와서 팔때, 사는 문제가 문제가 됐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철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사람들이 장사하거나, 일을 하거나, 물품을 만들지 않았어도, 그들과 이 하나님의 정하신 안식일날 그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게될때, 이게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데서는 변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두번째, 두로 사람은 어떻습니까?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느 13:16-17).

예루살렘 성에 있는 유다 사람 중에 우리가 물건 사는 것을 가지고 왜 그러느냐? 라고 얘기한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분별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악" 이라고 그랬어요. 엘리아십이 도비야의 방을만들어서 초청해서 들이는 것, 하나님의 물품 다 제거하고, 이거 아주 악한 일이라고 한 것과 똑같이 두로 사람이 물고기 가져와서 팔때, 예루살렘 성에서 안식일날 물고기 사는 사람도 똑같은 악을 행한다라고 말한 겁니다. 그래서요, 18절 말씀을 보면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매"(느 13:18-19).

여기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이 안식일을 범한 문제를 놓고요.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이 더럽혀진 문제 옛날 예레미야 시대는 어땠습니까? 예레미야서 17장 말씀을 보십시요. 느헤미야는요, 이 사건들을 마음  속에 두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요, 자기 느낌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는 꾸짖기도 하고 분별하고 그는 일을 감행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위에 앉는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남방에서 이르러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의 희생을 가지고 여호와의 집으로 오려니와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렘 17:24-27).

이것이 오래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요, 유다 백성에게 예언한 말씀입니다. 물로느 유다 백성들은요, 이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안식일을 어겼습니다. 안식년도 어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됬습니까? 느부갓네살이 들어와서 그 말대로 안식일을 소홀히 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백성들을 향해서 약속대로 거기에 불을 놨습니다. 궁전에 불을 놓았고요. 성전은 불타 없어지고, 이 역사를 느헤미야는요, 바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느 13:18).

과거를 기억합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그래서 70년 포로되지 않았는가? 성전은 불타고 성은 소화되어 버리고, 그래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었고, 그래서 다시 이 성을 재건한 것이 아닌가? 어찌 이와 같은 악을 다시 범하는가? 역사를 통해서도 교훈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틀린 역사를 우리가 반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느헤미야는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체게적인 접근을 합니다. 성문 관리하는 겁니다. 여기 성문이 어두워갈때, 성문을 닫습니다. 또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 열지 말라. 다시 말해서 안식일에는요, 안식일이 오기 전에 벌써, 문을 닫아버려요. 이제까지의 모든 문을 여는 문제에 대해서 더욱 더 철저하게 문 단속을 하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려면 이와 같은 장삿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문을 닫을수밖에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요, 이거 참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느헤미야가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느 13:22).

성문을 지켜, 그냥 물리적으로 기계적으로 지키는거하고요. 레위 사람이 자기를 정결케 하고, 왜 정결케 합니까? 안식일을 지킨다. 이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거룩해야 합니다. 레위 사람들은요, 이 성문 지키는 거, 문지기들이 성문 지키게 될때, 이 문 지키는 거는요. 그냥 아무나 문지키는 식의 경비가 아닙니다. 이 성문을 지키게 될때, 이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준비되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느헤미야는요, 바로 이런 점에서 탁월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요, 외적인 개혁만을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닌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요, 성벽을 만들었죠. 성과 문을 만들었어요. 그에게는 아직 반도 되지 않은 일을 완성한 겁니다. 느헤미야 마음 속에, 그 안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이것이 느헤미야 마음 속에 있었던 비전이었어요. 여기 성문 관리에서도요. 그 문은 해가 지면 닫는다. 안식일에는 잠근다. 이런 체계적인 문 관리가 있었습니다만 이 관리를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내적으로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이 이 일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모임 안에서 되어지는 일은 이런 것입니다. 많은 일들이요, 어떤때는 봉사와 또 여러가지 가시적인 일들과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게 될때, 그 배후에는 반드시 신령한 것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그 일은 대단히 영적인 일입니다. 그것은요, 그냥 겉으로 나타난 어떤 외형적인 사건이나, 일이나,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깔려 있는 위대한 영적인 준비, 마음의 준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교제도 하고, 섬기기도 하고, 복음도 전하고,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권하기도 하고, 이 모든 일들은 다 영적인 일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모임에서 장로들이 문관리 하는 문제, 영접에 관한 문제, 그리고 출교에 관한 문제, 재영접에 관한 문제, 대단히 심각한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을 기계적으로 이제 이런 조항에 의해서 이 사람을 징게한다, 라고 땅땅땅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 문제를 집행하게 될때, 여기에는 엄청난 영적인 영력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모임에 이와 같은 것이 철저히 필요하다. 우리는 안식일에 관한 문제가 이제 느헤미야에 의해서 다시 점검이 되고 교정이 되게 될때, 우리가 받는 교훈은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또 한가지를 했습니다. 거기에 찾아오는 사람들, 문을 닫았어요. 안식일에 들어가서 장사해야 하는데, 두로에서 오는 사람들, 장사하는 사람들이요. 안되겠으니까, 내일 아침이면 문을 열겠지, 생각하고 밖에서 천막치고 잡니다. 느헤미야가 찾아가서요. 이렇게 경고했어요.

"내가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저희가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느 13:21).

여기 "내가 잡으리라"는 말씀을 보세요. 이 말에는요, 느헤미야 마음 속에 있는 안식일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 잔다. 자는거죠. 이 안에 들어와서 파는거 아니에요. 그러나 여기 자는 일은, 이것을 그냥 놔두면 반드시 이 안에 들어와서 장사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안식일을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요.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애초부터, 싹부터, 느헤미야는 절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때는 악이 처음에 조금 시작하게 될때, 그냥 관용으로 소홀히 넘겨버립니다. 이와 같은 일로 인해서 그 다음에는 이 악이 점점 자라서 이제 장막 속으로 들어오는 낙타와 같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헤있는 사람이라면, 작은 악이 우리 가운데 시작하려고 할때, 이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악을 처음부터 근절할수 있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느헤미야는요, 성 밖에서 자고 있어요. 아직 팔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악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가서요. "여기서 자지도 말라." 그는 열정을 가지고 금했습니다. 경고했습니다.
여기 또 한번 기도가 있습니다. 열번째 기도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느 13:22).

여기 또 "나를 위하여..기억하옵시고"라고 했지요. 이 비슷한 기도를 종합해 보게 될때요. 아까는 나를 기억해 주십시요.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관련한 나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어떻습니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데, 이 느헤미야는 무엇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요. 느헤미야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자기가 행하는 일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이 일을 감히 감행할 수 없다는 확고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요. 우리가 행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으쓱으쓱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또 우리가 자만심을 가지고, 이것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 주님의 뜻을 확고히 아는 사람들,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죠. "나를 기억해 주십시요." 어떤 나 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 일을 감당해 올수 있었던 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겁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느 13:23).

또 한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이 공격 당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모임에 여러가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많은 문제의 심각한 부분은 가정이 어려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바로 모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해도, 가정을 공격함으로 해서 모임을 무력화 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혜있는 성도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가정을 건설하지 않은, 가정을 이루려고 하는 여러 형제 자매님들, 기억하십시요. 우리가 건설하려고 하는 가정, 이 가정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귀한 가정인가? 이 가정이 하나님 앞에 바로 드려지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해서 기쁨을 얻습니다만 뿐만 아니라 모임은 가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또한 가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이 하나님 앞에 강건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모임에게 영광을 끼칩니다. 모임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또한 모임이 유익하면 모임이 신령하면, 가정에게도 유익을 끼칩니다. 이 유기적이고 생명적인 관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언제나 마음 속에 두어야 됩니다. 여기 보면 이 중대한 문제, 가정의 문제를 이제 느헤미야서에서는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느 13:23).

여기 잡혼이 다시 시작되고 있죠. 보세요. 그들이 언약에 인칠때에 어떤 아이템보다 제일 먼저 이야기했습니까? 잡혼에 관한 문제, 성별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느헤미야서, 이것은 성벽 건설에 관한 책입니다. 성벽을 건설이라고 하는 것은, 성별을 확하게 한다는 거죠. 그런데 잡혼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반대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문제를 느헤미야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데요. 유다 사람들이, 아스돗, 블레셋 사람이죠. 암몬 사람, 모압 사람, 이게 다 육적인 사람들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입니다. 블레셋, 세속적인 것을 말씀해 주고 있어요. 암몬, 모압, 육적인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 사람들과 결혼을 합니다.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느 13:24).

다니엘이 바벨론에 끌려갔을때,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귀족들의 자제들을 불러다가 교육시킵니다. 유다의 기존 귀족들을 부른것이 아니라 유다의 귀족들의 왕족의 자제들을 불러다가 그들을 철저히 바벨론식의 교육을 함으로 앞으로 오래 쓸수 있죠. 나이 많은 사람 교육시키는 것보다요. 아주 어린 사람들 교육 시키면 더 쉽고, 더 효과적이고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로 그럼 점에서 유다의 귀족들의 자제, 왕족의 자제를 불러다가 자기 궁에 두고 교육시키죠. 그렇게 했을때, 어땠습니까? 여러가지 교육을 시키는 것 중에, 갈대아 방언을 교육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에 갔을때, 아람어나, 히브리어가 아니라 갈대아 어를 그들은 공부 했어야만 합니다. 여러가지 커리큘럼 중에 한가지가 언어였습니다. 언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언어는 단순히 언어적인것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문화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 언어 속에는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해서는 언어를 뿌리 뽑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사단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 줍니다. 이방 사람들을 겉으로 보게 될때에 대단히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함으로 그들은 결혼 했어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사람들, 이스돗 암몬, 모압 여인들, 우상숭배자입니다. 우리는 모압 여인들 중에, 모압 사람들 중에 룻이라고 하는 대단히 독특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상수배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 사람들과 어떻게 가치를 공유할수 있는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따라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람들과 반려자로 일생을 같이 살수 있는가?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 앞에 정직히 생각해 보십시요. 이 일이 과연 가능하다고 볼수 있는 것인가?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많은 것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딱 한가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스돗 방언은 하는데" 아스돗 말이라고 하는것은 블레셋 방언은 하는데요. 유다 방언은 못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유다 방언하고 아스돗 방언을 못할수도 있을텐데, 확률로 보면 반반일텐데, 왜 언제나 이렇습니까? 성경에서는요. 이와 같은 케이스에서 유다 방언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게 될때, 믿는자가 믿지 않는 자를 끌어 당길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자가 믿는 사람들을 언제나 끌어 당기는 겁니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 동화 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은 당사자들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한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결코 돌이킬수 없는 자식의 문제, 다음 세대의 문제, 우리는 사사 시대를 통해서요. 사사기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세대 문제, 여호수아 있었어요. 그 다음에 여호수아의 다음 세대의 장로들의 세대입니다. 그 다음에 장로들이 이제 떠나고 난 다음에, 그 다음 세대, 3세대라고 말합니다. 사사기에서의 문제는 3세대의 문제입니다. 여호수아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사람, 그리고 이 1세대는 자기만 알 뿐만 아니라 자기 다음 세대에게 가르친 사람, 이게 1세대이빈다. 두번째 2세대, 전 세대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자기는 알지만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지 않은 사람, 2세대입니다. 그 다음 3세대, 2세대로부터 배운 적이 없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 하나님을 알다가요,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모르게 되는 이와 같은 과정, 저는요. 이 현실을 보게 될때 주님 앞에 대단히 두렵습니다. 우리 모임의 장래는 이제 3세대 문제가 우리 가운데 나타날까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3세대가 우리 가운데 출현할까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결혼 문제, 이것은 결혼 당사자의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세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그들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인도할 것인가? 엄청난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결과를 맞이 합니까? 삼손의 시대에요, 그의 아버지 마누아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났을때, 아직 아이가 앵태되기도 전입니다. 그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아이를 가르쳐야 됩니까?" 우리 다음 세대에 대해서요. 우리는 결혼한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낳은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 생각을 마음 속에 가지고 살아여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식들을 기를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주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한 것입니다. 믿음 가운데 가야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이 시대의 본분입니다. 3세대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위대한 결단입니다. 느헤미야는요, 바로 이런 점에서 대단히 이스라엘, 유다 안에 심각한 문제가 파고 들어온 것에 대해서 그는 통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 털을 뽑고..."(느 13:24-25).

우리는 아까 도비야의 세간을 밖으로 내던진 일, 그것 참 무식한 처사가 아닌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판합니까? 도비야의 세간은 느헤미야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도비야의 세간을, 그 사람은 상당히 좋은 사람이다. 저희들이 6장에서 보았지요. 6장에서 이 도비야와 문제가 있어요. 성벽이 준공되고나자마자, 도비야와 연락한 사람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유다 사람들이 느헤미야게 찾아와서 도비야는 좋은 사람입니다. 자꾸 세뇌를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도비야에게 넘어가 버렸어요. 도비야에게 세뇌당해 버렸어요. 이와 같은 일, 이와 같은 현실을 보세요. 느헤미야는요, 이방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이 연혼함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 사람들은요, 이게 뭐 어려운 문제인가, 이게 뭐 심각한 문제인가? 느헤미야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유다 사람들의 자제가 유다 방언을 못한다. 다시 말해서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수 있는 언어를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법이 뭔지를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심각한 겁니다. 이거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 사람이 정말로 심각한 거죠. 느헤미야는 바로 이런 문제에서 너무나 심각해서 그는 총독으로서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런 열정을 가지고요. 그는 총독의 입장에서요, 두어사람을 때렸습니다. 그는 머리털을 뽑았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사무치는, 이스라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이스라엘 미래가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죠. 느헤미야는 오래 전에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 성문이 소화되고 또한 성벽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 금식하고 기도했지요. 그런데요, 이제는 어떻습니까? 성벽은 완성되었어요. 그런데 백성들의 영적인 성벽, 백성들의 영적인 성문은 다 무너지고 소화되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찌 그가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있었겠어요?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 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느 13:25).

에스라서를 보면, 에스라 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어서 에스라는 이 결혼한 사람들 막 이혼을 시켰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 일을 해결했는지, 더이상 기록은 하지 않고요. 성경 말씀에서 더이상 딸을 주지 말고, 아들과 이방의 딸과 결혼시키지 말라, 이런 말씀만 여기 기록되어 있는데요. 느헤미야의 이 문제에 대해서 결단은 확고 했습니다. 25절에 보면요. 솔로몬의 옛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느헤미야는요, 다시 역사를 상기시키죠. 옛날 솔로몬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나님께 어떠한 호의를 받은 사람이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년에 여러 이방 여인들을 얻었을때, 나타난 결과는 무엇인가? 솔로몬은 비참하게 그의 말로를 봤습니다. 그 모든 지혜, 스바 여왕이 전해 왔던 그 감탄, 예루살렘 궁과 성전과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와, 또한 시종드는 사람들의 그 질서와, 이 모든 것을 보고 그렇게 놀라고 감탄했던 그 과거는 다 사라져 버렸어요. 이방 여인들이요. 솔로몬 마음을 앗아 갔습니다. 모압의 신, 암몬의 신, 여러 신들에게 솔로몬의 마음이 빼았겨 버렸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입니까? 그것이 끝이 아니었어요. 다음 세대가 문제였습니다. 보세요. 가정의 문제는, 다음 세대와 이어집니다. 여기 보세요. 솔로몬은 어떻게 됐어요? 솔로몬 세대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요.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랐고 그의 마음은 교만했고, 그는 교만한 가운데 그의 나라를 통치하게 될때, 나라는 쪼개졌어요. 이 모든 비극을 느헤미야는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 읽어야 됩니까? 여러가지 많은 이유가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상당한 분량, 그것은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 속에 담긴 위대한 공적, 그리고 아름다운 일들, 우리는 그것을 더욱 더 추구해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와 또한 그들의 쓰러진 일들, 우리는 그것을 보고 경계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절대로 답습하지 말아야 됩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왜 우리가 이와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가? 왜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라 솔로몬의 우준을 우리는 다시 답습해야 되는가? 라고 개탄해 한거죠.

28절 말씀을 보십시요. 대제사장 엘리아십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더 소개가 됩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느 13:28).

성령께서는요, 이 사건을 아까 기록했어요. 아까는 엘리아십과 도비야, 이 관계,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계속 내통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13장 초에서 말했지요. 13장 마지막에 가면서 엘리아십에 대해서 성령님은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성경 말씀을 읽게 될때요, 다윗의 사건에서도 성령님께서는 다윗이 행한 일에 대해서 괘씸한 일을 생각할때, 성령님께서는요. 다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 괘씸한 일을 언급하고 갑니다. 하나님은요, 우리의 일들에 대해서 은혜를 베풉니다. 우리에게 많은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 가운데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괘씸하게 생각하게 할 만한 일을 하게 될때 성령님께서는 그것을 유감없이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읽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시고 계시는가에 대해서 말씀에서 발견합니다. 엘리아십의 행동, 그것은 그가 더욱 더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괘씸하게 생각했다. 우리의 특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더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특권을 사용하게 될때,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우리가 이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엘리아십은 많은 특권과 많은 그의 영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을 그는 오용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그는 남용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다시한번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불쾌하심을 여기서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될때, 주님이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신다면 얼마나 우리가 두렵겠습니까? 우리가 살때,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을 우리가 살게 될때, 우리는 주님 앞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에 힘서야 되겠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야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 이제 느헤미야 13장 28절에요,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느 13:28).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느헤미야의 결단을 보게 됩니다. 엘리아십이 어떤 사람입니까? 대제사장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페르시아의 총독일수는 있지만 유대교 안에서는 그는 평민에 불과합니다. 그가 어떻게 대제사장을 쫓아냅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그의 용기입니다. 무엇이 참된 용기입니까? 참된 용기는요, 영웅심이 아닙니다. 참된 용기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서 도발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전시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참딘 용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상황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그는 일어나느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게 될때, 그는 우리가 겨냥하게 될때, 다윗이 지지요.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요, 대제사장을 파면시켜 버렸어요. 쫓아내 버렸어요. 그가 그와 같은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제 이 사건은 앞에 있는 가정이 파괴된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겁니다. 가정이 파괴된 문제를 놓고 지금 엘리아십이 이 문제에서 가장 본을 보여야 될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실패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제 더욱 더 악을 조장할만한 이와 같은 일을 했다. 우리는 엘리아십이 13장 초에는 도비야와 연락한 문제를 보았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엘리아십의 또 다른 범죄입니다. 이것은 가정과 관계있는 범죄입니다.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그와 같은 봄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손자가 무슨 영향을 받았겠습니까? 그의 손자도 대제사장이 되어야 될 사람이죠.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전을 지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말씀 가운데 서게 하는 일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가정은 이제 자기들은 번영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겉으로 보게 될때, 산발랏과 연혼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게 될때, 유대인에게도 상당히 성공적인 결혼입니다. 왜냐하면 산발랏은 그 주변의 가장 유력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눈에서 이 광경을 보게 될때 그것은 가장 하나님 앞에 실패한 결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악을 범한 것이고 그것은 그 문제로 끝나는 것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네가지 문제를 보았습니다. 침입자의 문제,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안식일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이 친입 당했습니다. 파괴되었어요. 이 문제를 다루고 나서요, 29절에 느헤미야는 열한번째 기도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열번째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9장에 있는 이 기도, 여덟번째 기도는 느헤미야가 한 기도가 아니고요. 이스라엘 전체가 한 기도였죠. 그래서 그 입장에서 볼때, 이것은 열번째 기도인데요. 그렇게 기도했죠.

"내 하나님이여 저희가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기었사오니 저희를 기억하옵소서"(느 13:29).

아까는 나를 기억하옵소서 그랬는데, 여기는 저희를 기업하옵소서. 어떤 저희입니까?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힌 일입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혔을뿐 아니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깼습니다. 레위 사람의 언약, 레위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레위 사람을 향한 언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 일에 대해서 그들은 배반해 버렸어요. 그들의 연혼의 문제는 그냥 단순한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직적접인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견해를 느헤미야는 보고 있는데 왜 제사장 엘리아십은 그것을 보지 못할까? 이거 우리는, 지혜있는 성도들은 여기에 있는 문제점들을 우리가 발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은혜 가운데 의탁해야 됩니다.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느 13:30-31).

여기 마지막 부분에서요.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음 속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느헤미야는요, 하나님의 일이 무너진 것을 건설했습니다. 무너진 것을 건설하고, 성만 건설한 것이 아니라 성벽만, 성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속에 사라져가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함, 자백, 그리고 헌신, 이것을 다시 원위치로 끌어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이탈했을때, 다시 그 백성들을 끌어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요, 부흥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부흥이 지속되어야 하는데, 부흥이 현실적으로 볼때, 이것이 사그러져요. 이것을 다시 끌어올려야 됩니다. 어떻게 이 부흥이 계속해서 보존될 수 있을까? 모임은 하나님 앞에서 이 책임을 감당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요, 저희들이요.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도자, 느헤미야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느헤미야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고 있는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어려운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와 같은 난관에 부딧힌 때에, 하나님께서는요. 이 문제를 극복하고 이 어려운 시대를 변화 시켜서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바꿀수 있는 그런 사람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찾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비전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 비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이 시대에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별하는 사람, 그것을 마음 속에 블루프린트로 그리는 사람, 그것이 비전입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그것이 구상입니다. 그 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보지 않고 어려움 속에 있는 잠재력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비전을 마음 속에 심어주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 속에 심어진 그 비전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 이 사람이 인도자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 그래서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쓸수 있는 사람, 인도자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 습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기도 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삶의, 하나의 일과로 삼는 사람, 습관으로 삼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능력으로 아는 사람, 이 사람을 찾고 계시다 그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희들이요, 느헤미야와 같은 인도자, 느헤미야가 저희들에게 이와 같은 인도자가 되어야 되겠다고 말해주는 몇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왜 위대한 인도자가 되었고 놀라운 일을 했을까? 그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요,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이제 모임 안에 인도하셨어요.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모임 안에 들어온 것은 그냥 우리의 적당한 선택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뿐 아니라 하나님이 지역교회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모임 생활해야 됩니다. 모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랑하신 모임을 위해서 우리는 고귀한 모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요, 인도자는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서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납니다. 느헤미야는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게 될때 때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손을 견고케 하싲시요."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해 조십시요." "하나님이여 저들이 행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그는 수도없는 기도 속에서 그의 일을 감당 했습니다. 기도를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일을 할수 없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지 않은 사람, 기도의 응답을 모르는 사람,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수 없습니다.
또 하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인도자는 인격자여야 합니다. 그가 많은 일을 한다해도 만일 그가 인격자가 아니라면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은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닮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엄청난 사역을 했다 자랑할지라도, 그에게 하나님의 인격이 없다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없다면 그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열납될수 없습니다. 인도자, 인격자여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령님께서 어떠한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주님에 관해서 이야기 할때,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말합니다. 사역 이전에 먼저 인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격자여야 됩니다. 그들은 정직합니다. 정직해요. 사역이라고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주님의 위대한 대의를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요, 주님의 대의 마음에 없습니다. 내 사역이 얼마나 큰 것이냐, 이 사역이 얼마나 부풀어진 것이냐? 라고 하는 것에 줄달음치고 있는 것, 그것을 보게 될때 슬픈 것입니다. 사역자는요, 인도자는 인격자여야 된다.
인도자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어야 됩니다. 이 비전을 가져야 된다는 말은 그가 자기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요,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때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자기가 뭘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마음 속에 구상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예루살렘 거기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다. 거기에서 내가 할 일이 이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그는 확실히 구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아야 됩니다. 어늘날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첫째, 복음입니다. 복음의 일군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교회의 일군입니다. 우리는 일꾼으로서 인도자로서 첫째, 구원에 관해서 복음의 말씀을 증거할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개인적인 생활에서 거룩해 지느냐 하는 것을 가르칠줄 알아야 됩니다. 또한 그가 어떻게 가정 생활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룰수 있느냐 하는 것을 가르쳐야 됩니다. 또한 모임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것이냐라고 하는데 대한 부름이 있어야 됩니다. 그 일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교회 진리에 대해서 교회 실행에 대해서 알고 주님의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슬픈 것은요. 복음을 전하지만 교회 진리를 모르는 경우, 교회 진리를 소홀히 하는 경우, 교회 진리를 무시하는 경우,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건함과 또한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할것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복음 전도자, 그는 주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그는 절름발이 일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것을 다 가르치라고 말씀했습니다. 복음 전도자는요, 하나님의 교회의 진수와 그 진리를 확실히 알고 복음을 증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복음이 나의  모든 것의 전부요, 나머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또한 그렇게 실행한다면요.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일꾼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복음의 일꾼이요, 또한 교회의 일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정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전을 가져야 됩니다. 느헤미야의 일을 보세요. 그는요, 벽만 만드는 것이 일이 아니었어요. 그는 백성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를 한마디로 말하면 성문, 성민입니다. 느헤미야의 사역,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느헤미야는요, 권위에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될때, 인도하게 될때, 나는 먼저 인도하는 자가 되기 전에요. 인도를 받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먼저 권위에 순복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순복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윗의 여러가지 실수를 압니다. 또 그의 범죄도 우리가 압니다. 사무엘하에 가면 엄청난 그의 슬픔, 그의 나라가 쪼개지고 압살롬이, 심지어는 아들이 반역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국가는 무너지지 안항ㅆ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저는 다윗은요,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폐위시킨 왕 앞에서 그는 순종했습니다. 사울을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는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두 사건 사이에 나발을 죽일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나발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권위에 순복할 줄 아는 사람만 하나님의 밀을 할수 있습니다. 인도자가 될수 있습니다. 야망을 가지고요. 장로를 멸시하거나, 야망을 가지고 장로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이 과정 가운데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먼저 권위에 순종하는 법, 이거 배워야 됩니다.
또 하나, 인도자는요. 원수의 궤계를 알아야 됩니다.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삼손처럼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인도자 될수 없습니다.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야 되고 원수의 전략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원수를 어떻게 하면 격파시킬수 있느냐, 라고 하는 인내력, 주님을 의지하는 힘,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지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전략, 이것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느헤미야서를 통해서요. 우리는 석장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원수와 싸웠는지, 적어도 석장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지요.
인도자는요, 일을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는 게으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게으른 사람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찍 일어나고요. 일찍 이렁나서 시간을 드려야 됩니다. 말씀 앞에 나와서 매일과 같이 절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안에 빠져야 됩니다. 주님과 교제해야 됩니다. 다른 이론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열심, 말씀에서 열심, 헌신과 봉사에서 열심, 성도들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 이 모든 일에 열심해야 됩니다.
또 한가지, 인도자는요. 본을 보여야 됩니다. 흠이 업성야 됩니다.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문제가 있을때 이것을 정리해서요. 사람들에게, 비난으롭터 벗어나야 합니다. 만일 인도자가 비난거리가 있다면 인도자를 따라가는 모든 사람들이 같이 그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도자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겁니다. 이 말은요,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 말이 없이는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그 말은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의에 대해서 언제나 혼연 일체가 되어 있었어요. 하나님의 말슴이 없으면, 엘리야의 말은 하나님의 말입니다. 따라서요, 하나님의 말슴이 없이는 우로가 없다. 그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 말이 없이는 우로가 없다, 라고 하는 말이죠. 따라서요. 인도자가 비난거리의 대상이 된다면 하나님도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명예도 실추됩니다. 백성들도 이제 일할 수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보여준 본을 보십시요. 느헤미야가 다른 총독과 달랐어요. 느헤미야는 다른 민장들과 달랐어요. 느헤미야는요, 대제사장과도 달랐어요. 느헤미야는 유다 어떤 사람과도 달랐습니다. 그는 본을 보였어요. 오늘날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나아가는 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종하는 본 말입니다. 이것이 어느때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왜 우리 가운데 연약한 것들이 찾아올까요? 본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본을 보고 힘을 얻습니다. 백성들이 본을 보고 비전을 얻습니다. 백성들이 본을 보게 될때 용기를 얻습니다. 이와 같은 것, 우리는 심어줘야 됩니다.
인도자는요, 하나님의 영광만 추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요, 나의 영광을 부스러기를 가로쳐려고 하는 그런 마음,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더러운 이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더러운 이라고 히는 것은 단순히 돈만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러운 이라고 하는 것은 야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살짝 나에게 돌리려고 하는 그런 마음, 여기서 우리는 자유해야 됩니다. 오로지 주님만 드러나야 되겠다. 주님만 영광을 받아야 되겠다. 요한과 같이 나는 쇠하여야 될 거싱요, 주님만 흥해야 될 것이다. 이것이 인도자의 마음 속에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죠.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또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용기입니다. 세일반테스는 이렇게 말했어요. '부를 잃는것은 조금 잃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은 엄청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게 될때, 다윗이 골리앗을 만났을때, 그는 소년으로서 감히 골리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믿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용기가 있는 것은요, 믿음이 있을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읽게 될때, 그 믿음의 용장들, 그 회랑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믿음의 용장들, 그 모두가 다 한결같이 공통점은 용기를 가졌습니다. 모두가 위태로운 때에, 어려운 때에, 또한 반대에 직면했을 때에, 도저히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할때, 심지어는 요게벳과 아므람, 바로를 어떻게 대항합니까? 그런데 그것을 이겨냈어요. 모두가 다 용기가 있었어요. 왜? 그들은 다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오늘날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얇팍한 인간적인 영웅심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담대함입니다. 느헤미야가 왜 이렇게 담대했습니까? 왜냐하면 느헤미야는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외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무너진다면 그는 정면 돌파했습니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절대로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책망 했습니다. 어떠한 사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는 언제나 그 일에 대해서 직언 했습니다. 바른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용기입니다.
우리에게 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비전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구상, 만일 나의 구상이 내 생각이라면 주님 앞에 합당하지 않스빈다. 그러나 나의 구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것이라면 그 구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 이루어져야 되는 그 구상, 내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헌신을 통해서, 본을 통해서, 용기를 통해서, 다른 백성들에게 이 안에 있는 비전을 심어줘야 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도록 인도해야 됩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런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참 놀라운 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결단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그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이 결단, 그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이 초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이 위대한 마음, 그것은 시간과 관계없이 그것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그는 결단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떠한 반대가 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결단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죠.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요, 주님께서 이 당에 오셔서 이제 마지막으로 가야 될 목적지는 십자가 입니다. 그곳을 가게 될때, 구약의 선지자도 이야기 한 것처럼, 주님은 얼굴을 부싯돌같이 하고 갔습니다. 주님은 그 마음 속에 고민과 고통이 가득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말씀했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께서요, 십자가의 고통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 십자가의 괴로움이 무엇인지 압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아시면서 얼굴을 부싯돌같이 하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절대로 그 뜻을, 영원 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맺었던 그 언약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 아래까지 낮아지셨고, 주님께서 순종하시되 십자가의 죽으심가지 순종하셨다 말씀했습니다. 그 모든 일을 우리게 될때,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셨다. 어떻게 참았습니까? 결단된 마음 쏚예써 참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싯돌같은 얼굴로 그 고난의 십자가, 그 고통의 십자가를 향해서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고 나갔습니다. 느헤미야는요, 예루살렘에 오게 될때,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고 나갔습니다. 많은 난관, 많은 반대, 많은 마음 속에서, 자기 속에서 생기는 불신, 이 모든 것을 잠재우고 그는 나갔습니다. 그는 결단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까지 저희는 13장에 걸친 느헤미야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그 마음을 감동하셨고 그는 어떻게 기도했고, 어떻게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예루살렘에 왔고, 그는 애초부터 시작할때 어떻게 시작했으며 골짜기 문에서 시작했지요. 기억하십시요. 그리고 성문을 완성했습니다. 성벽을 샇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요, 백성들의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다시 타락했을때, 다시 찾아와서 그 마음을 원위치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13장 마지막에 가서 그는 이 일이 앞으로 지속될 것을 마음 속에 기대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이 장을, 이 책을 마칩니다. 형제 자매님들, 오늘 우리는 비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에 대단히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임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소홀히 여김을 당해서 또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세상이 우리 가운데 파고들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여러가지 안락한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 찾아오면, 또한 타협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냥 적당히 가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 찾아오게 될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말씀 따라서 곧이 곧대로, 하나님의 말씀 따라서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 세미한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순종하고 갈수 있을까? 느헤미야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아니, 느헤미야를 인도하신 주님의 완전하심을 저희들이 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 속에 위로를 주시기 바랍니다.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단해 주시도록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용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전,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게서 저희를 도우시는 위대한 은혜, 이것을 저희들이 느헤미야처럼, 기도의 사람처럼, 기도로 이루어 나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열번의 시간을 통해서 서울에 계신 여러 형제 자매님들, 보여주신 기도와 또 참여와 격려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