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느헤미야

느헤미야 08. 십일조, 성민들의 영적인 특징

박이레 2021. 11. 12. 23:53

< 느헤미야 08. 십일조, 성민들의 영적인 특징 > 2013년 / 정형모 형제님

느헤미야 10장 37절 말씀 하반절부터 보겠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느 10:37-39).

이미 저희들은 8장 말씀서부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벽을 건축하고 성문을 중수하고 그 안에 사는 거민들에 관한 그의 기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드리며 그 성이 주변 백성들을 향해서 놀랍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모양을 그는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느헤미야가 이제 성벽, 성문 건축을 다 마치고 말씀 가운데 이제 수문 앞에 광장에 모여서 에스라의 인도 하에 말씀이 낭독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을 보았지요. 말씀은 이제 기도로, 특히 그들에게 실패와 또 범죄와 하나님 앞에 반역과, 이런 것들을 말씀에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기도로 이어지는 것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 그 다음에 9장에서는 자백의 기도, 그리고 10장에 와서 견고한 언약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자기들의 삶의 변화를 약속 드리는 모습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잡혼의 문제,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문제, 이 두가지를 생각할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그들이 어떻게 결단했는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옅볼수 있습니다. 이제 성전에서 되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지원할 것이냐, 성전에 되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을 지원하고자 그들은 일년에 삼분의 일 세겔을 주님 앞에 드리기로 그들은 결의 합니다. 여기에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또 그들은 화목을 드리고 항번제가 계속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그들은 첫번째 얻은 실과를 주님 앞에 드리는 그와 같은 헌신도 그들은 마음 속에 두고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마지막으로 십일조, 이 십일조에 관한 구약의 말씀, 이 모두가 다 말씀에 근거한 것이죠.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과 또 자기 나름대로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뭔가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말씀은 기도로 이어지도록 만들어 주죠. 저희들이 주님 안에서 기뻐할때, 말씀은 더욱 더 고조시킵니다.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잘못하게 될때 말씀은 저희들은 바로 잡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백 기도를 하고 이제 언약을 세우게 될때, 말씀을 토대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드리죠. 저희들이 이제 민수기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민 18:24-26).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때 모두 다 기업을 얻었지요. 레위인에게는 그런 기업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레위인에 관한 규례에 대해서 다른 지파들이 그들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될때 이것이 레위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이와 같은 체제는 구약의 기본적인 체제임을 우리가 잘 알고 있죠. 여기 이스라엘 역사를 보게 될때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 준수가 될 때와 그렇지 못할때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던 슬픈 역사 시대인 사사 시대에 사사기 마지막 장에 두가지 거대한 그들에게 있었던, 사사시대 초기부터 있었던, 그들에게 불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탈로 인해서 그들 가운데 비극적인 사건 두가지를 사사기는 말씀하고 있지요. 그 중에 하나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유대교는 우상숭배로 전락해 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거기에도 자기 자리에서 이탈한 레위 사람의 문제가 나옵니다. 또 그 동시대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은 레위 사람이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서 다른 곳에 가서 그는 성적인 범죄 가운데 빠지게 되고 그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커다란 분열과 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한 지파가 완전히 거의 멸망할 지경까지 가 버리는 그런 사건, 이런 모든 사건은요. 그것이 종교적인 사건이든 도덕적인 사건이든, 그것은 다 레위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서 이탈한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레위 사람이 그들의 할 일을 해야 되는데 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레위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였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오랜 후에, 느헤미야 시대에 이들은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기도를 하고 언약을 세우게 될때, 하나님의 전이 버림받지 않도록 결의했습니다. 사실 상 10장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요약의 말씀이 있다면 마지막 절 말씀이죠. 느헤미야서 10장 39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전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유대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결과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성전 예배는 중단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찬송과 또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이 모든 일들, 하나님 앞에 그들이 나와서 기뻐하는 모습, 이런 것들은 다 이제 사라지고 마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 앞에 다시 돌아가게 될때, 그들은 그와 같은 비참한 현실이 과연 그들에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에스라를 초청해서 8장에서 수문 앞 광장에서 말씀이 낭독되고 또한 그 말씀이 낭독되게 될때,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또한 그들은 조금 후에, 하루 뒤에,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더욱 더 주님 앞에 가까이 나가고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더욱 더 말씀을 찾아 보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찾아보게 될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더 분명한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참회의 기도,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이와 같은 헌신,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놀라운 변화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 그 성이 참으로 신령한 성이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어야 됐다는 거죠. 우리는 이제 이 십일조 문제와 관련해서요,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와 보면 이런 말씀을 저희들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느 10:37-38).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이 받게 될때, 제사장이 거기에 입회하는 것을 여기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일조와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 교회 시대에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에 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을 드리기 이전에, 또한 우리의 재정을 드리기 이전에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드리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를 향해서 이제 연보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에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그것은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드리게 될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청춘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도, 또한 우리의 제물도, 또 우리의 찬양도, 우리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제 주님 앞에 드리는 연보와 관련해서 몇가지 원칙을 말씀을 하셨는데요.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장,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이 연보와 관련해서 사도바울은 마음 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님을 기억하셨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께서, 부요하신 분께서 우리 가난한 자들을 부요케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부를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은혜를, 사도는 "너희가 이 은혜를 안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하지요.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찌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후 8:11).

마음에 원하는대로,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또 주님이 주신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13절 말씀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고후 8:13).

예루살렘에 가난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고통 당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이 헬라 지역의 성도들이 그들은 주님 앞에서 헌신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헌신을 통해서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자 하는 일을 합니다. 그때에 마게도냐 성도가 유용한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도를 돕게 될 때에, 그 일을 하게 될 때, 예루살렘 성도의 곤고함이 마게도냐 성도에게 얹혀져서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이제 주님 앞으로 돌려 드리게 될때, 그래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게 될때, 그들은 평균케 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연보의 원리 중에 자원하는 마음, 그리고 주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게 될때, 이 일은 우리 모두를 평균케 하신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헌신하게 될때 우리가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드리게 될때,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이제 성도들이 평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관련해서요. 우리 자신은 오늘날 십일조가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만 이와 같은 영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 헌신하게 될때 구약 시대에 있었던 십일조가 소홀하게 될 때 성전이 무너졌던 것처럼, 그리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이 어려움을 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이 부진하고 이제 무너졌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게 될때, 오늘날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주님 앞에 드리게 될때, 주님의 일이 어떻게 번영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우리 마음 속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또 연보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말씀에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먼저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게도 이 연보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1).

여기 연보와 관련해서 네가지 원칙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언제 연보를 드릴 것이냐? 그것은 교회에서 오늘날, 교회 시대에 지역교회 안에서 연보가 이루어지게 될때, 그것은 첫째, 매주일 첫날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될때, 매 주일 첫날은 주님 부활하신 날이죠.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그날 떡을 떼는 날입니다. 이날 연보를 하는 겁니다. 연보는 따라서 예배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여러가지 많은 것들을 드리는 것 중에 연보를 드립니다. 매 주일 첫날 드립니다.
두번째, 각 사람이 드립니다. 가족을 대표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대표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각인이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를 얻은 대로 드립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대로, 비례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작정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만큼, 주님의 은혜를 마음 속에 두고, 나를 위해서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우리가 기억할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이 작정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저축하였다 드리라" 이것은 연보를 하게 될때, 우리는 체계적으로 준비된 가운데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이제 주님 앞에 계획하고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신하게 될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어떤 헌신을 드렸습니까? 그들이 초실을 드렸지요.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연보하게 될때, 구약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렸지만 이 시대에 성도들이 주님 앞에 드리게 될때, 그것은 체계적으로 한다. 그것은 준비된 상태에서 마음의 가장 귀한 분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준비된 가운데 이와 같은 것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고귀한 것을 주님 앞에 드리게 될때, 계획적으로, 계획한 가운데서 드린다고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요. 하나님의 교회는 번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뭔가 부족하셔서 받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너무 잘 알고 계시죠. 하나님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돌려 드리고 그리고 남은 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생활한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마음 속에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 분부하신 네가지 원칙을 가지고 오늘날 이 시대에 주님께 헌신하는데 주님께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또 한가지 분문의 말씀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게 될때, 제사장들이 그 옆에 입회하고 있다. 이것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말씀에서 조금 전에 본 말씀으로 잠깐 돌아가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후 8:19).

이제 거두어진 연보를 가지고 전달하는 일, 대단히 중요합니다. 거액의 연보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라고 하는 일에 있어서요. 2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고후 8:20).

십일조가 드려져서 그것이 레위 사람들에게 오게 될때, 옆에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거액의 연보, 우리는 경제 문제에 있어서, 이 경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과, 정상적인 경제와는 우리는 구분해야 됩니다. 우리는 재정관리를 바로 하게 될때,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재정 관리를 바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해도, 영적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의 이 재정 문제를 다루는 것은 집사들이 합니다. 그 일은 대단히 막중한 일입니다. 조금도 오차없이 이것을 관리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막중한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집사들을 위해서 항상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막중한 일이고 내적으로 유혹이 있을 수 있고, 외적으로 훼방이 있을 수 있고, 비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에 있어서 이 일을 하는 성도와 또한 온 모임 안에 모든 성도, 또 모임의 간증, 이 모든 것이 보호를 받아야 됩니다. 십일조가 드려지게 될때, 그것을 거두게 될때, 옆에 제사장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그것을 관리하게 될때,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또한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훼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느 10:38).

레위 사람들은 지파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사람들은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안하셨죠. 성전이 운영이 되고 하나님의 일이 잘 진행이 될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레위 사람은 하나님을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공인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일꾼은요, 그가 십분의 일을 받았을때, 그 십분의 일의 십분의 일을 드려서 제사장에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하나님의 종도 역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에 조금도 면제되는 것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똑같이 드리는 책임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 열두지파, 레위사람 아닌, 다른 지파가 가지고 있는 책임과 똑같은 책임을 레위 사람도 가지고 있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될때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아무도 따로 구별된 사람이 없다, 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보지요.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될 때요. 39절에, "이스라엘 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립니다. 또 레위 사람도 예물을 드립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느 10:39).

여기 거제라는 말은요, 화목제에 가슴에 요제가 있고, 또 뒷다리에 거제가 있습니다. 요제는 옆으로 흔들어 드리는 것이고, 거제는 위로 들렀다 놓는 이와 같은 것으로, 이 두가지, 가슴과 뒷다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거제라고 얘기할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예물입니다. 이 거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물을 골방에 저축해 두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레위 사람들이 이 일을 하는데, 문지기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역대기에서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된 이와 같은 물품들을 골방에 잘 간수하는 것,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드리는 것을 잘 모아서 이제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쓰는 것, 그리고 합당하게 쓰는 것, 이것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요, 골방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이런 골방들이요. 원수가 여기에 들어와서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느헤미야 나중에 가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이 어떻게 남용되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요. 하나님의 전의 모든 분야는 모두가 다 철저히 관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그래서요, 10장 마지막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전을 버리는 것이 있고요. 하나님의 전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관리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책임은 하나님의 전을 버릴 것이냐, 하나님의 전을 관리할 것이냐. 이 두가지 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모임을 버릴 것이냐, 모임을 보존할 것이냐. 모임의 간증이 드러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들이 유익을 얻고 그 가운데 기쁨을 누릴 것이냐, 아니면 성도들 마음 속에 황폐하게 될 것이냐, 둘 중에 하나다 그 말입니다. 느헤미야서를 우리가 읽게 될때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위대한 역사가 우리에게 도전해주고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혜를 가지고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지식 가운데, 그리고 믿음의 양심을 가지고 우리는 이것을 받고 이 책임을 우리가 이행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복지,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의 위대한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엄숙한 책임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 속에 깊이 세겨야 됩니다.

이제 오늘 저희들은 11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1장에 들어가면요, 이것은 7장과 사실 연결이 되는데요. 6장까지 성이 다 완성이 됐습니다. 성이 다 완성이 되고 난 다음에 7장에서 느헤미야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은 이런 것이죠.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느 7:4).

성은 광대합니다. 아니 예루살렘 성은요, 사실 상 다른나라, 무슨 거대한 제국의 성과 같이 큰 성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성과 인구와 비교하게 될때 인구는 상대적으로 희소하고 성은 상대적으로 광활하다, 이 말입니다. 성은 사실은 훼파되어 있고 비어 있었죠. 이 외관적인 문제에 대해서 느헤미야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부담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나갔습니다. 왕에게 나가기 전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일을 해야 되겠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외형적인, 물리적인 성벽과 성문을 건축 했습니다. 완성 했어요. 그러나 느헤미야 마음 속에는, 그것은 그의 역사 중에 일부입니다. 그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은 이 성을 어떻게 채우는가, 어떻게 사람들로 채우는가? 성은 광대한대 사람들은 너무 희소하다. 성벽이 쌓여진다 해도 거기에 사람들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성벽이 아무리 잘 건축이 되었다 해도, 그 안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들이 아니라면, 신령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커다란 실망이라고 하는 거죠. 느헤미야는 바로 이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11장 말씀을 보면요, 7장에서는 서론이었고요. 이제 11장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어떻게 그가 구체적으로 이제 진행해 나갈 것이냐, 라고 하는 점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그 본성 본 기업에 거하였고 예루살렘에 거한 그 도의 두목들은 이러하니 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명이라..."(느 11:1-4).

이러면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까지 먼저 봉독해 드렸습니다. 11장 말씀을 보면요. 완성된 성벽과 성문을 놓고 이제는 느헤미야 마음 속에 다음 단계의 일, 인구를 그 안에 이동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요. 바벨론에서 포로된 백성들이 1차 귀환, 536년 벨사살이 죽고 바벨론은 무너집니다. 고레스가 들어와서 귀환하라고 귀환령을 내리죠. 5만명이 돌아왔습니다. 5만명이 돌아오게 될때 아마 그들 마음 속에는 과거, 약 70년 전에 예루살렘 성이 이제 무너지고 바벨론 군대가 들어왔던 그 모든 역사를 그는 생생히 기억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눈으로 목격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부모들로 직접 들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오게 될때, 주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서 촌에 가서 거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도성에 산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곳에는 이제 적군이 쳐들어오게 될때 시골로 가서 공격하지 않습니다. 도성을 공격하는 것이죠. 도성이 무너지면 그들의 전쟁의 원정에서는 승리를 이루는 것이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이 돌아왔을때, 주로 원래 살던 그런 곳으로 가서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요, 여기 인구가 희박하다고 하는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이 성을 물론 건축했습니다. 우리가 3장 말씀에서 볼때 다른데서, 드고아니, 여리고니, 다른 성에서 원정 와서 이 성을 건축한 모습을 보았지요.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갔어요. 그러나 이 성에 첫째, 인구가 늘어야 된다. 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을 위해서요. 인구가 늘고요. 단순히 인구가 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구가 느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 많은 거민들이 들어온다 해도, 그들이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예배에 관해서 무관심하고 소홀히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의 간증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느헤미야가 기억하고 기대하고 마음에 가진 비전을 그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첫째, 인구가 늘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거민들은 신령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 성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민이어야 된다. 성과 문이 세워졌으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민이 되어야 된다. 이 사람들은 영적인 백성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예배에 있어서 그들은 깊은 관심을 갖고 성별된 사람이어야 되고 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되고 하나님의 것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라고 하는 점이죠. 또한 이 사람들은요,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 알아서 풍요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된다. 영적인 풍요 말입니다. 또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간증을 증거하는 사람이어야 된다. 또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신령함 가운데 품위있는 사람이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방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된다. 또 이사람들은요, 잘 외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사람이어야 된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도성을 잘 방어해서 이 안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예배와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즐기고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된다. 또 이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 느헤미야는요, 마음 속에 이제 준비하고 온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저희들은 11장 1절 말씀을 보면요. 예루살렘 거민의 영적인 특징이 뭘까? 왜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요. 저희들이 몇가지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백성의 두목들을 예루살렘에 머물렀고"(11: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백성의 두목들, 두목들이라는 말은 인도자들이라는 말이죠. 이와 같이 이 거민이 신령해지기 위해서요. 인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인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인도력 뿐만 아니라 이 안에 여러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이 인도자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그 백성들을 인도할 것인가? 여기 우리 말씀을 보면요, 이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제비 뽑아서 십분의 일은 남고, 십분의 구, 그들은 밖에 촌에 가서 살도록 한 겁니다. 이 두 차이를 보지요. 인도자들과 나머지 백성들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도자들은, 그들 가운데 제비 뽑아서 십분의 일은 성에 남고 그리고 나머지는 밖에 나가고 이런 것이 아니었어요. 인도자들은 다 성에 들어와 사는 겁니다. 나머지 백성들은요, 이제 제비를 뽑아서 10%가 이 안에 들어온다. 우리는 조금 전에 십일조를 보았지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에 있어서 십일조.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가 뭘 봅니까? 조금 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될때, 우리는 뭘 드린다고 했습니까? 우리 자신을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그들은 먼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은요, 인구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위험 부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그들은 하나님 앞에 믿음 가운데 이제 받아 들이고 그 안에 들어가는 이와 같은 책임, 부르심, 여기는 제비 뽑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첫번째, 영적인 백성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인도자의 본입니다. 위험한 장소에 그들은 먼저 들어와서 그곳에 사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10%가 이제 제비에 뽑혔다 할지라도 그곳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인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도력입니다. 인도력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의 본입니다.
여기 이제 두번째, 제비 뽑았다. 이 백성이 영적인 백성이 되기 위해서 또 한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복입니다. 제비를 뽑았을때요. 자기 자신이 자기는 위험한 곳에 들어가서 살고 싶지 않은데, 저 밖에 원래 기업이 있던 본 고장에 가서 살고 싶은데, 그런데 뽑혔어요.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야 된다, 라고 할때 나는 들어가기 싫다. 불순종이죠. 불복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예루살렘에 관한 모든 비전,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책임, 이 모든 것은 다 무너지고 마는 것이죠. 느헤미야는요, 그는 인도력이 있었습니다. 또 두목들은 다 그곳에 가서 먼저 본을 보였지요. 그러나 그들이 백성들에게 가서 설득하지 않았습니까? 느헤미야는 자기의 가지고 있는 권위, 이것을 가지고요. 자기의 헌신으로부터 나오는 이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당신은 이 성안으로 들어가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권위입니다. 인간적인 카리스마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결코 우리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제비가 뽑혀졌다고 하는 겁니다. 이 제비,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때, 열두지파가요. 크기와 또 그들의 사이즈에 따라서 땅이 결정이 됩니다. 땅 분배에서 그 지파의 크기가 중요한 요소였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어떤 땅에 어떤 지파가 들어갈 것이냐에 관한 문제를 놓고 우리는 민수기에서도 여호수아에서도 발견하는 것은 제비를 뽑아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제비는 뭘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잠언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오늘날 우리는 제비를 뽑아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완성된 말씀이 있고요. 내주하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서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는 분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에 이 시대에 제비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중요한 발견이었어요. 왜냐하면 제사장에게 있어서요. 두가지 가능성이 있을 때에, 이 에봇 안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림이라는 돌이 있이죠. 이 돌을 뽑음으로 인해서 그들은 이 일을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라고 하는 것이 구약 시대에 흔히 실행 되었던 일입니다. 제비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들 마음 속에 빈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 나오게 될때,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또한 주장이나 또한 결정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때, 그들은 절대로 제비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물론 오늘날 제비를 뽑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 앞길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때 우리는 빈 마음으로 나갑니까, 아니면 우리 마음 속에 이미 결정하는 것이 있습니까? 때때로 모임 안에서 장로들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하든지, 안하든지 여러가지 일이 있어요. 때때로 형제 자매님들이 벌써 마음 속에 결정이 다 되있어요. 어떤 때는 질문의 형식을 장로 앞에 취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결정된 마음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장로가, 제안해 줄 만한, 조언해 줄 만한 상황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물론 장로님들 앞에 나가기 전에 나가기 전에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분별을 따라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 때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빈 마음으로 나갑니까? "주님, 이 일을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알려 주십시요." 라고 하고 나갑니까, 아니면 나는 작정된 마음으로 나갑니까? 이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요, 이제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을 선택한다고 하는 이 중대한 문제에서 그들은 순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신령한 백성, 이 신령한 백성을 만들어주는 요건, 우리는 첫번째 인도력을 보았습니다. 두번째, 제비 뽑는다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순복을 보았어요. 순복하는 백성들, 영적인 백성들입니다. 순복하지 않는 백성들, 이것은 고집 센 백성들이죠. 육적인 백성들이죠.
세번째요, 또 무엇이 있습니까? "거룩한 성 예루살렘" 이 성에 관한 말씀이요. 여기 느헤미야 11장 말씀에서 이 성은 거룩한 성이라고 하는 말씀이 이 장에 두번 나옵니다. 저희들이 읽은 1절 말씀과 18절 말씀에 "거룩한 성"이라 나옵니다. 원수들은요, 이 성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그곳은 패역하고 악한 성이라, 그래서 그 성이 다시는 건립되지 못하도록, 중건되지 못하도록, 그들은 항상 방해 했지요. 방해 공작을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왕들에게 로비함으로 인해서 했습니다. 원수들은 예루살렘 성, 하나님의 이름이 두어진 그 성, 절대로 제기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일반 백성들,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유다 사람들은 그건 파괴된 성인데, 매우 재건하기 어려운 성이다, 거의 불가능한 성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을 건축하기 이전에 그런 생각을 했고 느헤미야가 와서 백성들의 마음을 세웠고 세우고 난 이후에, 성이 건립된 이후에도 보통 유대인들은 '아 거기는 위험한 성이다.'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 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느헤미야는 예나 지금이나 그 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성이다. 그 성은 반드시 건축 되어야 하고, 그 성 안에 사람들이 가득해야 하고, 거기에는 신령한 백성이 가득차야 한다, 라고 하는 비전에 대해서, 결정에 대해서 조금도 변함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인도자입니다. 인도자는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비전, 인도자는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넣어줘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함께 그 일에 동참 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도자입니다. 느헤미야는요, 바로 이런 일에 있어서 조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 안에 많은 방해물과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어려운 문제와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스텐다드가 있습니다. 그 표준이 있습니다. 그 표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표준에 대해서 인도자들이 보는 시각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 시작에 대해서 다른 모든 성도들이 함께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뜻은 이 시대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을 볼때,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패억하고 악한 성, 불가능한 성, 어려운 성,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성이라 말씀했습니다. 이 성은 거룩한 성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성의 거민들이 거룩해야 된다. 이 거룩한 것, 거룩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주변의 민족들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삶에 있어서, 언어에 있어서, 행실에 있어서, 그 다음에 믿음에 있어서, 그들은 주변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 모임은 거룩한 모임이 되어야 됩니다. 구별된 사람입니다.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간증이 드러날 수 있는 그와 같은 모임,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목마르게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헌신함으로 이것을 이루어야 되는 그와 같은 숙제를 안고 있는 주제입니다. 거룩한 것, 하나님의 성품이 이 성안에 있는 성민들에게 가장 잘 반영되고 드러날 수 있는 그와 같은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이 성이 거룩한 성이다, 라고 하게 될때, 이 성은 이 일을 위해서 모였습니다. 10% 이제 그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골 생활이 안전하고 평안하다, 이런 생각을 해도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시편 87편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눈동자 같이 지키는 곳입니다.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시 87:1-2).

이 백성들은요, 자기 촌에 기업이 있고 포도원이 있고 무화과가 있고 거기가 원래 자기 고향이었고 그래서 바벨론에서 돌아올때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었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 했어요. 그러나 그런 사람도, 제비 뽑아서 10%에 해당이 되서 들어가게 될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순복했지요. 그 안에 들어갈 때에, 그들은 포도원을 포기 합니다. 무화과 나무를 포기합니다. 자기 집에 있었던 모든 유산, 이런 것보다 시온을 더욱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그것 없이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라는 말이죠. 그래서요. 우리는 시편 87편에 야곱의 거처 어디보다도, 시온의 문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셨다. 이 말씀을 그들은 기억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요. 이 영적인 백성과 관련된 또 한가지 모습 보십시요. 느헤미야 11장 2절 말씀을 보면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들은" 영적이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자원해야 됩니다. 기꺼이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마음, 솔로몬 성전이 완성이 되었을때요.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뻐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다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했지요. 광야에서 회막이 건립되기 이전에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 앞에 드렸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모세가 이제 너무 많다. 도로 가져가라고 할 정도죠. 하나님의 일 은요,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니고요.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고 자원하는 마음, 이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입니다. 이기심이 없는 희생, 내 마음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원하는 마음이 나오겠습니까? 아까 연보와 관련해서 고린도전서 8장 말씀에서 사도바울은요, 연보에 관한 여러가지 말씀을 하기 전에,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연보에 관한 생각을 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를 위해서 드리셨는가, 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 자기를 가난하게 되심은" 자기를 드린 겁니다. 얼만큼 드린 겁니까? 죽는데까지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안다면 우리 마음 속에,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자원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을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확실한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신으로 인해서, 주님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드리는 것, 우리가 주님 앞에 자원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껄끄러운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아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자원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 땅에서의 뜻이 모임이 번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가운데 어떻게 복을 내리시는 유일한 길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자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요. 3절 말씀을 보십시요. 여기 보면 이와 같이 영적인 백성들, 그 백성들이 영적인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이와 같은 길은, 그것은 이 가운데 연합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 연합에서 느헤미야는 인도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그 본성 본 기업에 거하였고 예루살렘에 거한 그 도의 두목들은 이러하니"(느 11:3).

여기 기록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요, 성 밖에 자기 기업에 살았다는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죠. 그런데 그 다음 그룹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에 거한 그 도의 두목들은 이러하니" 다시 말해서요. 11장 말씀에서는요. 예루살렘 성 안에 사람들이 있고요. 예루살렘 성 밖에 사는 두가지 부류의 사람이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10%는 성 내, 90%는 예루살렘 성 밖, 우리가 그것을 보았지요. 이 두 부류의 사람, 성안의 사람들은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요, 제비 뽑아서 90% 속한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2등 시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요, 성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헌신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가 생각 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결정하게 될때, 우리는 우리의 뜻이나 어떤 사람의 짓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으로 인해서 10% 성 안, 그리고 90% 성 밖, 이렇게 결정이 됬어요. 이 결정은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 본인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다른 인도자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어떤 그룹이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두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 인도자는, 또 모든 백성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 안에 있는 사람보다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 우리는 2등 시민이다. 우리는 헌신에서 2차적인 사람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요. 인도자들이나 모든 유대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만, 이 두부류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 안에 있는 사람이나, 성 밖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느헤미야는 인도력을 발휘했어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어땠습니까? 백성들은요, 2절 하반절에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을 위해서요, 성 밖에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시기하고 비난하고 아니면 차별을 두고 이러지 않았습니다. 성 밖에 나가게 된 사람들은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빌었습니다. 여기에 온전한 연합이 있습니다. 하나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일을 하게 될때, 어떤 때는 앞에 나가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은사는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은사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요, 좀더 공적인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일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요, 이제 사적인 일에 있어서 일하게 됩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책임, 다양한 역할, 이와 같은 장소에서 서로, 모임 안에서 일하게 될때 우리가 어떻습니까? 우리는 시기나 경쟁이나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웁니다. 모임이 하나님 앞에 전체로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어떠한 영향력을, 인도력을 발휘했는가? 연합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성민들이, 예루살렘의 성민들이, 만약에 다른 모든 것은 다 갖추었는데 거룩합니다. 또 그들은 인도력 하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합니다만, 그들이 분열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커다란 수치지요.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한가지 우리가 보게 될때, 그것은 연합이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뒤에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요. 여기에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잠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요. 첫째, 4절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니..."(느 11:4).

"또 마아세야니..."(느 11:5).

유다 자손의 두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유다 자손이 성 안에 있고요. 주로 베냐민 자손이, 두 지파가 주로 이 성안에 주류 구성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터 그 지역 자체가 유다 지파, 그리고 베냐민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포로 이후에, 돌아왔을때도 이 두지파가 그곳으로 돌아왔지요. 그래서 이들이 그곳에 들어와 있는데, 여기 인도자 중에 '아다야' 라고 하는 사람은, 4절에 베레스 자손이라고 말씀했어요. 베레스가 누구인지 잘 기억 나시죠. 베레스는 참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역사를 안고 슬픔 속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유다지요. 그 다음에 어머니는 누굽니까? 다말입니다. 이 두 부부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관계입니다. 참 이야기 하기도 참 수치스러운 관계를 성경은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쌍둥이죠.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 이 베레스, 이런 오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기가 잘못하지도 않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게 될 때에, 때때로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시요. 여기 베레스가 세월이 오래 지나서 이제 느헤미야 시대에요. 그는 인도자, 베레스의 후손이 인도자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요.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사는 일, 대단히 신령한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는 인도자가 되었다. 또 하나, 6절 말씀을 보면요.

"예루살렘에 거한 베레스 자손의 도합이 사백 육십 팔명이니 다 용사이었느니라"(느 11:6).

이 사람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 놀라운 것은요, 일부가 용감한 것이 아니라 다 용감했다. 참 독특한 것이죠. 위대한 간증입니다. 베냐민 자손에 대해서 그 다음에 나옵니다. 이들은 928명,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인도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다음에 이와 같은 사람들, 이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성안에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저희들은요, 11장에 다섯번째 리스트가 나옵니다. 명단이 나오죠.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느헤미야서는 명단의 책이다. 우리는 참 명단을 읽을 때마다, 항상 발견하는 겁니다만 마태복음 1장, 참 수면제다 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죠. 하도 지루해서요. 그런데 사실은요, 그 안에 기록된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굉장히 화가 날 겁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중요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까?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이름 밖에는 기록할 수 없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또 수많은 일들을 결정하고 그 일을 이루고 그렇게해서 하나님의 책에 기록됬다면 참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읽게 될때, 참 지루하지요. 그러나 명단의 책이라고 할때 이 명단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한번 밖에 없는 생애를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살 것이냐,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에 우리는 어떻게 기록될 것이냐, 이 명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저는 그래서 명단의 책에서 이 명단을 읽게 될때 참 지루합니다만 지루할수가 없습니다. 지루한 것 같이 느낍니다만 지루할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갈 일에 대해서 마음 속에 다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제사장들이 있죠. 제사장들이 여럿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0-14절 말씀은 제사장들이 소개 됩니다. 여기 822명, 242명, 128명 해서 1192명의 사람들이 여기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사장 중에는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이며 또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니..."(느 11:10-11).

이 사람은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하나님의 전을 우리가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했지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사람, 참 중요한 사람입니다. 제사장으로서요. 하나님의 전을 맡고, 그 전을 생명과 같이 생각하는 이 사람, 이 사람을 소개했는데요. 그 다음에 12절 말씀을 보면요. 전에서 일하는 그 형제, 여기서 전에서 일한다고 할때는요. 그 전에서 일한다고 하는 그 위치, 그 자리, 이런 것만을 말하는게 아니라요. 그 자리, 그 공적인 위치를 그가 맡았으면 그가 철저히 일하는 것, 이것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떤 일을 하게 될때, 어떤 책임을 우리가 이행하게 될때 우리는 철저히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필요한 철저한 일입니다. 성실한 일입니다. 충성된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 제사장, 특별히 많은 분들을 소개하지만 이런 분을, 이런 모양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15-18절 말씀까지 보면요. 여기 이제 레위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 레위 사람들 중에는요, 몇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요.

"또 레위 사람의 족장 삽브대와 요사밧이니 저희는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았고"(느 11:16).

하나님의 전의 바깥 일을 맡았다고 하는 것은요, 기구와 그 다음에 건물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노래하는 자 아삽 자손 곧 미가의 현손 맛다냐의 증손 하사뱌의 손자 바니의 아들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렸으니"(느 11:22).

이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노래하는 사람은요,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고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구성되어 있고 그 역할과 책임과 또한 그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고 이스라엘로 이스라엘 답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성을 거룩한 성 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제사장, 레위 사람, 노래하는 사람, 문지기, 느디님 사람, 종들, 이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 모임도요, 다양한 사람들로, 다양한 성도들로, 다양한 역할과 책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임이 모임답게 이루어져 가고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그저 다른 성도들이 다 일을 하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임은 무너집니다. 우리 모임을 생각하게 될때,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있고 거기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의 위대한 일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고 할때 우리는 안의 일이나 밖의 일이나 또한 여러가지 다양한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 철저한 책임감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이 일을 충성스럽게 이루어야 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 모임은 신령한 모임이 됩니다.
이제 저희들이 레위 사람 뿐만 아니라요. 여기 특별히 18절 말씀에 "거룩한 성"이라는 말씀이 또 다시 나오죠. 성령님의 마음 속에 이 성은 거룩한 성이다, 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볼수 있어요.

"성 문지기는 악굽과 달몬과 그 형제니 도합이 일백 칠십 이명이며"(느 11:19).

이 문지기는 원래 성전을 도맡았습니다. 성전의 출입을 도맡았어요. 그러나 이 시대에 성전만이 아니라 성 전체의 문을 도맡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문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성문 관리 대단히 중요하지요. 성문을 너무 근거 없이 무을 닫기만 한다면 이 성은 고립됩니다.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문을 함부로 열고 닫으면, 이제 성은 위험해지는 거죠. 모임의 인도자들, 성문의 관리를 했던 문지기의 역할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임은 어떻게 문 관리를 할 것인가? 우리 모임에서는 어떻게 영접의 문제가 관리될 것인가? 어떻게 영접할 것이며, 어떻게 출교할 것이며, 어떻게 징계할 것이며, 어떻게 징계된 성도가 교제 안에 다시 들어올 것이며, 징계된 성도가 다시 들어오게 될 때에, 적당히 하는 것, 대단히 위험합니다. 또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이 회개로 인정 하셨는데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할 겁니다. 이 문 관리에 대해서 우리는 신령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임해야 됩니다.
이제 문지기, 그리고 21절에 보면 느디님 사람들이 있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말씀드린 대로 물깃고 나무패는 사람들이었죠. 이 사람들은 레위 사람들의 노동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을 돕는 사람들이 레위 사람이라면 레위 사람을 또 돕는 사람들이 느디님 사람들입니다. 또 솔로몬의 심복들의 후예입니다. 이 사람들의 역할, 그들은 어디에 살았는가? 그들은 오벨에 살았어요. 오벨이라고 하는 곳, 여기 성전이 있어요. 오벨이라고 하는 곳 은요, 이쪽 성벽과 이쪽 성벽 사이에 이 땅은 경사진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보다 이쪽이 더 넓습니다. 그래서 경사져서 올라가고 오벨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성전 문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 오벨은 누가 살고 있었는가? 느디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느디님 사람들은 이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비탈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 예배가 잘 이뤄지기 위해서, 제사장이 필요하지요. 제사장을 레위인이 돕지요. 레위인이 돕는 일도, 레위인은 많은 수작업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느디님 사람이 그 일을 도울 때에, 성전 안의 예배가, 또는 하나님의 일들이 잘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처를 보세요. 오벨에 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하나님의 일에 굉장히 가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기 대단히 어렵지요. 가까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만, 육체적으로만 가까운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까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느디님 사람, 이것은 천한 일들, 대단히 어려운 힘든 일들, 담당하는 일, 천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느디님 사람 없으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사장도 필요하고 레위 사람도 필요하고 느디님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요. 노래하는 사람, 다윗 시대에요. 이 노래하는 사람들을 세웠지요. 아삽이나 헤만이나 여두둔, 이런 사람들의 후예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전에서 노래하는 사람들로서 하나님께 정말로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찬양대가 따로 없어요.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노래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 레위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노래하게 될때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 앞에 화답해 드려야 됩니다. 신령한 노래, 다윗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사람, 우리가 삼손의 시를 사사기에서 한번 찾아 보십시요. 그 시는 대단히 졸렬합니다. 다윗의 시는 엄선되고 선택된 것입니다. 그의 시는요, 심오한 경험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또한 신령함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사람, 우리는 시편 150편 가운데 대다수가 다윗이 쓴 시입니다. 거기에 다윗의 위대한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그 노래 안에는 많은 고난과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또한 그 안에 눈물과 또한 즐거움과 또한 고통 가운데 그가 해방받은 즐거움, 그리고 속박 가운데 살다가, 죽음 앞에서, 공포 가운데 있다가도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그가 체험함으로 기쁨을 누린 모든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이 노래하는 사람들, 주님 앞에 신령한 것으로 노래하게 될때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연습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좀더 아름다운 노래로 주님 앞에 드릴까? 형식적인 노래가 아니고요. 심령으로부터 나오는, 우리의 삶속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노래, 이런 노래 우리에게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겁니다. 모임이 신령하기 위해서 예배시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예배를 합당하게 드리느냐, 예배의 수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기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즐기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드님의 인격과 사역의 아름다움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노래하는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러 사람들, 이 많은 사람들이요. 이 거민의 영적인 특징을 보게 될때, 여러가지로 우리가 보았지요. 그 중에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요, 다 각기 제자리에서 자기 일들을 해 왔습니다. 우리는요, 이제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신령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데, 이 신령함을 위해서요. 우리는 첫째, 인도력과 두번째는, 어떻게 하나님 앞의 뜻에 순복했는가, 또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나왔는가, 거룩한 예배를 드렸는가, 그들의 성품이 어떻게 거룩했는가? 또한 그들은 어떻게 간증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에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또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죠. 그들은 연합 가운데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 했습니다. 복을 빌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배하는 사람들로서 이 성은 아름다운 찬양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그러한 성이 되었다.
우리는 전에 적막했고, 능욕과 수치가 가득했던 이 성을 기억하죠. 이 성이 이제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성벽은 견고하고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은 신령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끊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는다고 하는 것에 느헤미야는 오래 전에 그와 같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성이 이렇게 형성이 되고 이 안에 노랫소리가 나오기 훨씬 전에 거기에는 성벽도 없었고, 거기에는 사람도 없었을때, 느헤미야의 마음과 심령 속에는 이와 같은 블루프린트가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모임의 현실이 어떤 때는 답답하고, 어떤 때는 어렵고, 또한 낙심이 될 때도 있지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신약 교회의 진리와 또한 이것을 실천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임을 구성할 것이며 그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받을 것이냐, 라고 하는 모임에 대한 마음 속의 구상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때에 주님 앞에 기도하고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겁니다.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 주님께서 이와 같은 이 위대한 소망을 이루시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를 읽게 될때,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 예루살렘의 폐허된 그 속에,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는 이와 같은 성이 있었습니다. 성벽 뿐만 아니라 성민들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요, 오늘 저희들은 이 성에 이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이 되었는데요.

1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요. 25-36절까지요. 여기에는 성 밖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 안의 문제였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성 안, 중요하지만 성 밖을 무시할 수 없다. 성 밖을 도외시 할 수 없다. 성 안과 성 밖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협동해야 될 일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일은 성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성 안과 밖을 하나님이 다 보시고 그들은 다 하나의 백성들이다, 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느헤미야는요, 성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이제 말씀하지고 있지요.

"향리와 들로 말하면 유다 자손의 더러는 기럇 아바와 그 촌과 디본과 그 촌과 여갑스엘과 그 동네에 거하며"(느 11:25).

유다 자손의 촌들이 죽 소개가 되고 있고요.

"또 베냐민 자손은 게바에서부터 믹마스와 아야와 벧엘과 그 촌에 거하며 "(느 11:31).

31절 부터는 베냐민 자손들의 여러 성읍들이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두 지파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여러 마을들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페르시아 시대 이전에, 여기 예루살렘이죠. 예루살렘 이 주변, 유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요. 그 다음에 유다 사람들이 사는 북편에 베냐민 사람들이 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파마다 이것을 구분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제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 페르시아 시대 이전에, 이 지역,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예후두도(?)라고 말했습니다. 예후두도의 북편은 사마리아와 경계가 됩니다. 예후두도의 남편은 에돔 사람들의 지경과 접촉합니다. 그래서 예후두도 안에 이 사람들이 여러 타운에, 성읍들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마을들입니다. 그 마을들에 살게 될때 흩어져 살고 있는데요. 이 사람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서요.

"로드와 오노와 공장 골짜기에 거하였으며"(느 11:35).

이 공장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요, 이 예루살렘 성 밖에 사는 사람들 중에 베냐민 사람들이 거기 거하였는데, 욥바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거기는 많은 재목들이 그곳에 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공장들이, 장인들이 이 나무를 가지고 일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옅볼수 있습니다. 이들은 여러가지 자기들의 사업이 있죠. 농업이나 아니면 이와 같은 공장과 같은 기술직이나, 그 외의 많은 다양한 직종을 가지고 여러 마을에 이들은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 대해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성전 예배에 대해서 그들은 지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밖에 있는 사람들은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이다.

"유다에 있던 레위 사람의 어떤 반열은 베냐민과 합하였느니라"(느 11:36).

여기 유다에 살고 있는 레위 사람들, 제사장들은요. 예루살렘 성 안에 살 필요가 없었어요. 그들은 원래 밖에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들을 생각 할때, 이 당시에 느헤미야의 생각, 예루살렘 성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예배가 이루어져야 될 것이냐, 라고 하는 점에서요. 많은 레위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와서 일했습니다. 성벽 건축에도 일 했고요. 또 그 안에서 들어와서 성전에서 예배하는 일에, 하나님의 일에, 그들은 많은 헌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유다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어느날 베내민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만 기구를 수직하고 제사장들을 돕고 그런 직접적인 일을 했습니다만 레위 사람들은 이미 8장 말씀에서 본 것처럼,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게 될때 말씀을 소개해 주고 이해하게 해 줬지요. 가르쳤습니다. 유다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가르치고 나서, 그들은 베냐민 지역에 아직 말씀이 덜 가르쳐진 지역으로 그들은 옮겨 갔다는 이 말입니다. 말씀의 확장입니다. 성도 중요하고 촌도 중요하다. 인도자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지요.

이제 남은 시간에는 12장 말씀에서 1-26절 말씀은요. 느헤미야 시대 때부터 시작해서 느헤미야 때에 세번째 귀환이 있고요. 백년 전, 첫 번째 귀환이 있었지요. 이 첫번째 귀환 때에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계보가 여기 있습니다. 여기 또 다시 명단이 나옵니다. 12장에 들어가서 이제 마지막 명단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백년 동안, 거의 백년입니다. 약 94년의 기간인데요. 이 기간 동에 있었던 일, 이 때부터 시작해서요. 여기에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입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돌아왔지요. 스룹바벨은 왕족이었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었죠. 그때부터 시작해서요. 우리가 12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요.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았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았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았고 요야다는 요나단을 낳았고 요나단은 얏두아를 낳았느니라"(느 12:10-11).

"예수아" 이것은 여호수아의 다른 발음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여섯명의 대제사장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94년의 기간 동안에 여섯명의 대제사장들이 대를 이어 왔습니다. 이 계보가 기록되어 있지요. 그래서 느헤미야 당시에는 '얏두아'라는 대제사장이 있었어요. 왜 이와 같은 기록이 있을까? 물론 여기에는 대제사장만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 외의 제사장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또 그 그 해 레위 사람들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기 소개되고 있는데 왜 느헤미야는 여기에서 백년간의 그와 같은 계보에 관한 명단이 소개되고 있을까? 왜 그것을 그의 회고록 속에 남겨놓고  있었을까, 라고 하는 겁니다.
첫째,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는요. 그는 총독입니다. 그는 원래 술관원이었죠. 그는 어느 면에서는 정치인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성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이것에 대해서 대단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는 이제 이와 같은 성이 성민으로 가득해야 하고 여기 예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특별히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보게 될 때에, 오는날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교회 시대에 우리가 속해 있는 모임 안에서요. 우리는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움을 따라서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 가운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형제 자매님 살고 있는 줄을 압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삶을 살면서 우리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어떠한 직종을 가지고 어떻게 내가 세상에 산다 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는 주님이 이름을 두신 모임, 그 안에 이루어지는 예배,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복음 전파,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기도, 그곳에서 성도들이 갖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입게 되는 교제, 그리고 성도들의 활동,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이 계보에 대해서 기록된 것은,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 그는 거룩한 성 안에 위대한 예배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는 단순히 성을 건축하는 그런 건축자 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원수와 싸우는데 있어서 전쟁에 관한 그런 문제만 그가 마음 속에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최종적인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습니다. 레위 사람과 제사장들.
두번째요. 여기 또 100년간의 이 당시의 사람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100년간의 이 사람들의 계보를 기록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희들의 마음 속에요. 우리 앞서간 영적인 선배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잘 알수 있도록 연구하고 또한 그 연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지혜를 남겨준, 우리의 선배들, 우리의 본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그의 생애를 바쳤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본을 보인, 우리 앞서 갔던 여러 사역자들과 또한 장로들과 또한 집사들과 또한 주일학교 교사들과 또한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우리가 생각하게 될때, 우리 마음 속에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과, 그들의 본을 우리가 따라가고자 하는 그와 같은 마음, 그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요. 이 회고록에서 이제 백년간의 명단을 여기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중요하고 하나님의 일이 중요하고 그 일을 행한 사람들이 남긴 본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백년 동안 세월이 흘러 가면서요. 그때의 제사장들이 있고 또 레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만, 최근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요, 이 성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제사장도 레위 사람들도, 모두 다른 평민도, 모두가 다 함께 일했지요. 이 일도 그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오늘 이 시대를 살게 될 때에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게 될때 하나님을 제외하고 과거를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해롭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를 우리가 만일 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우리의 실수를 반복하는 저주를 받게 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은 역사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역사, 이 역사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역사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는 현재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과, 미래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에 대해서 기대하고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느헤미야는 이곳에서 백년의 보계를 우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명단 안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 청사에 빛나는 이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 속에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그의 이름이 여기에 기록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될때 절대로 실망하지 말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또 선한 일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주님 일을 위해서 행하게 될때 주님의 부르심과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나 자신이 분별하고 주님 앞에 나가게 될때,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것을 기억하십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우러나오도록 만드는 동기이고 주님을 위해서 저희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이끌어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희들은 12장 1-26절 사이에요. 여기 여러 사람들, 심지어는 문지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 또 그들은 옛부터 지금까지 대제사장의 목록,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의 계보가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당시에 느헤미야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어떻게 이 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냐, 라고 하는 일에 있어서 잠깐 백년의 과거를 생각하면서요. 그는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위대한 역사를 통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어떻게 이 일을, 이 거룩한 성에 성민들이, 어떻게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릴까, 라고 하는 점을 계속해서 구상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는 비전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곳에 찾아와서 일을 했어요. 일을 하면서 계속해서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임에 들어와서 주님을 섬깁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주님을 섬겨 왔습니다. 지금 주님을 섬기지만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과거부터 어떻게 주님을 섬긴 사람들의 본을 우리는 마음 속에 두고요. 그 본은 이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보면,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믿음의 용장들이, 믿음의 영웅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들을 상경하게 될때, 마음 속에 커다란 위로를 받습니다. 여러가지 역경과 여러가지 반대와 또한 여러가지 조소와 또한 세상의 반대, 원수의 대적,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거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그 내용들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현재의 기회를 십분 이용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위대한 미래를 향해서 주님 앞에 헌신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모임을 사랑하는 일, 주님께서 모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저도 모임을 사랑합니다. 그 일은 저희들에게 가장 중대한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계속해서 마음 속에 주시는 감동과 또한 부르심과 또한 주님의 도우심,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