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헤미야 06. 말씀으로 인한 부흥의 시작 > 2013년 / 정형모 형제님
저희들이 지난 한주 동안 느헤미야서를 살펴 보았는데 느헤미야서를 느헤미야 상, 느헤미야 하,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전반 부 내용은 느헤미야가 이제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 가운데,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기도했던 바, 그가 소원했던 대로 드디어 성을 완성하고 성문을 건립한 내용까지 저희가 보았는데, 만일 느헤미야 하가 존재한다면 두번째 부분에서 저희들이 성 안의 거민들이 어떻게 이주해야 될 것이며 또 그 안에 거하는 성민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시민들, 또 예배 드리는 예루살렘 시민들로 이루어질까, 그들의 영적인 영량이 어떻게 주님 앞에 드려질까 라는 것을 느헤미야는 이제 마음 속에 두고 그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지난번 마지막 시간에 7장을 생각하게 될 때, 후반부에 서론과 같이 저희들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8장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와 같은 예루살렘 안의 거민들이 주님 앞에 어떻게 합당한 백성들로 이루어질 것인가, 라고 하는 점을 느헤미야서는 다루고 있습니다. 8장 말씀은 제일 처음,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장을 저희들이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8장, 1절부터 6절까지 먼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느 8:1-6).
이제 성벽이 완성이 되고 구조가 이루어 졌습니다. 여기 보면 이 백성들의 영성을 느헤미야는 마음 속에 두고 있었죠. 저희들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갔다가 돌아올 때, 느헤미야 때부터는 꽤 오래 전에요, 주전 536년 고레스 황제가 귀환령을 내리게 될때, 첫 5만명이 돌아온 것을 저희들이 기억하죠. 세월이 흘렀습니다. 약 80년 후에 에스라가 돌아옵니다. 주전 458년, 그리고 약 14년 후에 세번째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대표적인 귀환의 역사를 저희들이 이제 성경에서 잘 알 수 있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벽 건축과 성문을 중수하는 일을 착수하기 이미 전에, 에스라 학사,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또 원래 제사장이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이미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돌아오게 될 때 이미 그는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8장 말씀을 읽게 될 때, 이 중요한 두 인물들이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백성들과 함께 이제 놀랍게 역사하고 있다. 동역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학사입니다. 그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술관원이었고 그는 총독으로 돌아와서 성벽을 이루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주님의 성전과 주님의 도성,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이 성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또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 에스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역사해 왔는데 느헤미야가 이곳에 와서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하고 난 이후에 이제 수문 앞 광장에 7월 1일에 모이게 되죠.
이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8장 말씀을 보면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 율법의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백성들이 다시 그 말씀을 찾고 그 말씀 가운데로 돌아와야 그들에게 변화가 있다고 하는 점을 저희들이 감동적으로 읽게 됩니다. 저희들이 이제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죠. 그 다음에 9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자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때 두가지 중요한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런 교제를 하게 될 때 반드시 우리 마음 속에 기도로 화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8장과 9장 사이에 먼저 말씀으로 이 백성이 돌아오게 될 때 그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 말씀드리는 모습으로 이제 변하게 되는 순서를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성벽, 또 성문을 중수 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의 변화를 생각하는 것이고 느헤미야는 이 일을 위해서 오랫동안 이미 생각해 온 일이었습니다. 성벽 뿐만 아니라 그 안의 거민들의 영성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희들이 8장 말씀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그 성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죠.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이 성에 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성은 상대적으로 크고요, 그 안의 거민은 희소했다 라는 말씀을 저희들은 알고 있죠. 여기에 이 백성들이 어떻게 운집하게 되는가? 그들이 이 성의 거민이 됨으로 인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헌신 할 것이냐?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저 단순히 그 완성된 성벽 안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산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그곳에 와서 사는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마음 속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제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죠.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 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느 8:1).
여기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이 백성들이 책을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의 책을 가지고 말씀과 함께 시작합니다. 첫번째 이 말씀을 우리가 보게 될 때, 여기 중요한 주제는 율법책입니다. 율법책을 이 백성들은 으뜸으로 생각하는 놀라운 변화가 있다는 것이죠. 저희들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주제인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중요하신 분이시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8장은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것을 오늘 이 시대에 도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책의 말씀, 그것이 으뜸이다. 그래서요, 어떻게 했습니까? 이 백성들은요. 일제히 모든 백성이 모였다. 여기에 '모든 백성' 이 말씀이 8번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 3절에, 5절에, 6절에, 9절에, 11절, 12절, 13절, 이렇게 거듭거듭, 모든 백성, 이것 참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됬다. '일제히'라는 말이 참 중요한 말이죠.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이것은 연합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떻게 연합을 할 수 있습니까? 연합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합은 감정에 의해서, 감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으로 이루어진 연합이 있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진정한 연합도 아닙니다. 우리가 8장 말씀에서 그들은 어떻게 일제히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을까? 왜 모든 백성이 이제 말씀 앞에 왔을까? 그들은요, 말씀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말씀을 깨닫게 되게 될 때, 여기 놀라운 연합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와 또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 나의 이해관계와 또한 나의 스스로의 계획, 나의 주장,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동의할 수 없게 되고 이와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 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이 이제 침공해 들어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첫날은 졌지요. 그 다음날에 전쟁에 나가게 될 때 인도자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번에는 졌지만 우리가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수 있다."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수 있다는 결론, 이것은 그들이 큰 소리를 내고 하나가 되어서 나갔을 때에 여지없이 격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된 인도자가 이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그들은 과거에 이스라엘 역사에 있는 감상주의 적인 생각 속에서요. 옛날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언약궤가 먼저 나갔다. 그래서 그 언약궤가 항상 그들을 보호했다. 라고 하는 생각 속에서 그들은 이제 우리가 하나될 수 있다. 그리고 블레셋을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고 망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궤라고 하는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타락해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상적인 생각, 그리고 과거의 관습, 과거의 희미한 역사, 이것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가 잠시 되었죠. 그래서 큰 마음을 가지고 또 망상 속에 자신을 가지고 전쟁에 나가서 블레셋을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블레셋이 잠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스라엘이 육적인 힘을 가지고 단합해서 나오게 될때, 블레셋은 육적인 사람들이죠. 하나님의 백성이 육적인 것을 가지고 단합해서 나오게 될 때 하나님의 원수는요. 그것을 쉽게 격파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육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싸웠을 때 원수는 이기고 말았죠. 이스라엘은 참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된 것 같았으나 그들은 순식간에 격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하지 않은 하나됨, 그것은 감상주의적인, 이기주의적인, 또는 이해관계에서 아니면 사람의 의지에서 나온 인위적인 하나 입니다. 그와 같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고, 결코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8장 말씀에서 느헤미야가 오랫동안 마음 속에 고대해 오고 또한 마음 속에 구상해 왔던 예루살렘이, 그는 예루살렘에 성벽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사람들이 거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모이기를 그는 구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비전이었습니다. 이제 이 일을 위해서 그가 놀라운 일을 하게 될 때 그의 옆에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에스라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때, 나 혼자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협력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위대한 대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역사하게 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본보기를 느헤미야서 8장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여기 첫번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으뜸으로 생각했습니다. 두번째 그들은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어서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 모였습니까?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3장에서 예루살렘 성에 관한 지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요. 열개의 문이 있습니다. 많은 문들이 있지만 그 중에 수문이 있습니다. 이 수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영적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말씀이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지요. 그 물은 우리를 정결케 하고 또한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으로 깨끗케 하는 그런 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정결케 합니다. 수문 앞 광장, 이곳에 모이는 것, 그것은 참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모이게 될때 대단히 적절한 장소라,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수문 앞 광장입니다. 네번째로요, 여기 그들은 모이게 될때 그들에게는 인도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요, 느헤미야가 인도자였습니다만, 특별히 8장에서는 에스라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죠.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가 오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에 먼저 왔던 영적인 선배입니다. 그가 영적인 선배이든, 그가 영적인 후배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대의를 사랑하게 될 때, 그들은 하나가 되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히 좋은 본보기를 여기서 볼 수 있죠.
에스라에 관해서 잠깐 에스라서 7장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비수아의 십 삼대손이요 비느하스의 십 사대손이요 엘르아살의 십 오대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 륙대손이라"(스 7:5).
에스라가 어떤 사람인가? 여기에 그의 족보에 관해서 나오는데 그는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아론의 후손입니다.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비느하스 유명한 대제사장이었죠. 또 그 위로 올라가면 엘르아살의 십 오대 손이요. 그 다음에 대제사장 아론의 십 육대손입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가문입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요, 그는 어떤 사람인가?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스 7:6).
그를 성령님께서 묘사하게 될 때, 그를 소개하게 될 때, 그는 여러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그는 율법에 익숙한 학사라 그랬습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의 출신입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그런 무기가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무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율법에 익숙하다. 너무나 능통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잘 노출이 되어 있다 그 말이죠. 우리는 이 말씀에 감동을 받습니다. 에스라, 에스라가 살던 시대, 느헤미야가 살던 시대, 이 시대는 어두운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되어 끌려갔고 비록 그들은 돌아 왔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외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낙심과 좌절과 절망과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졌다 해도 그들 가운데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 그들 마음을 파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수많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 마음 속에 역사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에스라, 그는 제사장의 후손으로 마음 속에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의 생애를 바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요,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기 또 다른 소개가 나오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여기 이 말씀을요, 조금 달리 우리가 각도에서 순서를 바꿔서 해석 한다면요. 우리말 순서 때문에 그런 것인데요. 이 순서를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한 그 순서를 우리가 다시 정리해 본다면 제일 끝에 "결심하였더라" 라는 말씀은 사실 그가 그의 마음을 준비했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마음을 준비했습니까?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마음을 준비했다. 이런 말입니다. 따라서 순서를 보면 제일 처음에 가르치기 전에 먼저 준비했던 것은 그가 준행하기 전에, 그러니까 연구하기 전에 먼저 시작했던 것은 그는 마음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순서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어느날 제사장의 후손으로서 그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를 보았지요. 1장에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는 어느날 소식을 들었고 그는 예루살렘에 관한 자기의 마음, 하나님을 향한 뜻,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소원, 이런 것들을 자기 마음 속에 이제 안고 있고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 대한 많은 관심, 장시간 동안 그가 가졌던 이와 같은 관심을 이제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그 일을 시작하기 시작했죠. 에스라는요, 그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으로서요. 오래 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많은 제사장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독특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한 관심에서 제일 먼저 그가 행한 것은, 에스라서 7장 10절 말씀에 의하면 그는 먼저 마음을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관련해서 우리는 마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준비하고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 했습니다. 순종 했습니다. 그 다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전에요,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연구하고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손 발을 가지고 내가 이해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순종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게 될 때, 그 다음에 나는 가르칠 수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나는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수많은 기관들이 있고 수많은 책들이 있고 수많은 연구, 실적들과 또한 연구하는 노력과 이 많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요. 그러나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해하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에스라가 느헤미야 이전에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미 성전과 관련해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또 다른 사람이 이제 자기 편에 서서 함께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서 일해줄 사람, 느헤미야를 그는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놀라운 동역의 모양이 이제 8장에서 저희들에게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한 일과 그 다음에 에스라가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던 일은 이 두가지가 주님의 거룩한 뜻 안에서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오늘날 동역,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한 마음으로 어떻게 한 마음입니까? 내 생각대로, 내 견해대로, 내가 하는 노선은 이런 것인데 누가 나와 함께 할 것이냐?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럴 권리가 없습니다. 내가 가는 노선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는 노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나의 노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 할찌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바르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연히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역입니다. 동역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임의로 동역의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을 내 임의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내가 순종하고 걸어가게 될 때, 그는 나의 동무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에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희는 에스라를 보게 될 때 에스라는 여기 또 다른 인도자로서 여기 소개 되고 있고요. 느헤미야와 함께 이제 놀라운 동역을 통해서요. 이스라엘 백성들 영적으로 도탄에 빠져 있었고, 두려움과 낙심과 절망 가운데 빠져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와서 이제 놀랍게 영적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모습을 저희들에게 보여주고 있죠.
성의 물리적인 구조는 이루어 졌는데 성 안의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영혼입니다. 우리 영혼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게 되었느냐?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가장 중요한 최종적인 숙제입니다. 그래서요, 오늘 이 일을 위해서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까? 예루살렘 성 안의 사람들이 신령해 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될까? 여기 놀랍게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사람, 에스라입니다. 여기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말 번역에서 보면 "에스라의 곳"이라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에스라가 서 있는 곳, 그곳은 물론 물리적인 장소일 수 있지만 에스라가 서 있는 곳은 영적으로 도덕적인 장소, 그곳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고 말씀에 능통한 사람, 바로 말씀을 사랑하는 그 장소에 백성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그들도 알게 되고 순종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제 이 에스라와 함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서 모인다고 하는 것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그들은 율법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남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남자와 여자, 성별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나이의 구분이 없습니다. 알아 들을 수 있기만 하면 다 모여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낭독되는 말씀을 그들이 들었고 그 다음에 그 말씀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해석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 8:3).
우리 이제 처음에 1절과 2절에서는 말씀을 가져왔어요. 율법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다음에 3절서부터는 이 말씀을 낭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낭독,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요, 사도바울의 권고와 같습니다. 우리 잠깐 디모데전서에서 사도바울이 권고하신 말씀을 저희들이 살펴 보겠습니다. 그는 말씀과 관련해서 무엇을 권고 했는가?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여기 사도바울은요, 세가지를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첫째 읽는 것, 여기서 읽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낭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해석이고, 또한 이 말씀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낭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충격과 영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해석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는 강력한 힘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해석하기 전에 이 말씀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 되어야 된다. 두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권하라. 이 말씀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 그래서 여기 읽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죠. 사도바울은 이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디모데에게 권면 했습니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느헤미야서 3장 8절에 이제 백성들이 남녀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 앞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 말씀을 읽었다. 우리는 이 당시에 놀라운 변화, 또 이때 있었던 장관, 이것은 그냥 장관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요. 이렇게 모여서 이제 새벽부터 정오까지, 새벽부터 정오라면, 적어도 여섯시간 정도 되겠지요. 해가 뜨는 시간이 6시 이고 정오가 12시니까, 적어도 한 6시간을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게 될 때,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영적인 기갈, 그 마음 속의 배고픔, 이것을 우리가 보게 되죠.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심입니다. 오늘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엄청난 영적인 암흑이 찾아오고 말씀을 듣고 있지만 이 말씀 속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서, 희미함 가운데서 더듬고 있는 이와 같은 모습은, 어디서 온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마음 속의 배고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순수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빛을 비춰줍니다. 우리에게 세미한 것을 말씀해 줍니다. 정교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정말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채워 줍니다.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또한 그 바른 방향을 향해서 바로 갈 수 있는 힘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이 8장 말씀에서요.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배고픔, 영적인 배고픔, 말씀을 듣게 될 때요. 배고픔이 있으면 여섯시간이나 말씀이 들려지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은 하염 없이 그것을 듣고 있었다. 거기에는 산만함도, 거기에는 마음 속에 지루함도, 그것은 그들 가운데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보게 되죠. 대단히 놀라운 영적인 장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것들이 있다면요. 개인이 변화되고요. 가정이 변화되고 우리 하나님의 교회가 놀랍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두운 시대라, 오늘날은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변명과 저런 핑계를 우리가 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 하게 될 때 우리 가운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느헤미야의 시대, 이때는 대단히 밝은 시대였습니까? 아닙니다.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 마음 속에 파고 들었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일 첫번째, 귀를 보십시요. 제일 첫번째 그들이 이제 말씀이 낭독되게 될 때 여러가지 그들이 보여준 모습이 있는데 제일 첫번째, 그들의 주목하는 귀를 보십시요.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느 8:4).
에스라가 나무 강단에 섰어요. 나무 강단에 서서 낭독하지요. 그런데 그들은 어떤 자세를 취했습니까?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 8:3).
귀를 기울이는 거요. 말씀이 선포되게 될 때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여섯시간 동안이나 귀를 기울였습니다. 두번째요, 그들의 눈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까? 나무 강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어떤 분은요, 강단은 쓸데 없다. 왜냐하면요, 성도들이 앉아있는데 보다 높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올라가서 말하면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여기 보면요, 여기 모인 여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나무 강단 이었습니다. 이것은 에스라를 하나님보다 높이기 위해서 만든 그런 장소가 아니고 이것은 거기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가 다 잘 들을 수 있도록 선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강단 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요, 에스라를 보는데, 에스라를 보는 게 아니고 에스라가 읽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은 듣기 위해서 그들은 모였지요. 그래서 그들의 눈은 이 강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에스라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에스라가 읽고 있었던 말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공적인 말씀을 하게 될 때,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될 형제들의 책임이 있습니다. 모인 모든 사람들이 명확하게 들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요. 이와 같은 것을 위해서 이와 같은 것을 돕기 위해서 이와 같이 강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들려지게 될 때, 사람들은 이 배고픈 마음을, 영적으로 배고픈 마음을 부여 안고 그들은 강단으로부터 들려지는 이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4절 말씀에요. 보면 에스라가 강단에 서서 말씀을 읽게 될 때 좌우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스라의 왼쪽 편에 일곱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오른 편에 여섯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까지 합쳐서 열네명이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볼 때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여기에 양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들이 레위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이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에스라가 이제 이 말씀을 선포하게 될 때 말씀을 공적으로 낭독하게 될 때, 이 말씀이 선포되어서 백성에게 전달되는 이 중대한 일에 대해서 그들은 에스라와 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 지원하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힘을 얻고 흥황하기 위해서 역사 하게 될 때 우리는 이 말씀이 흥황 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일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한 마음이 되어서 지원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모임 안에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에스라가 서서 말씀을 증거 하게 될 때 옆에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 에스라의 마음 속에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됐겠습니까? 또한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 일에 함께 동참한다고 할 때 얼마나 마음 속에 커다란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선포되는 것을 그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인해서 이제 예루살렘이 성전이 버려지는 일들, 예루살렘 안에서 원수들에 의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일들이나, 수욕을 당하거나 능욕을 당하는 일들이 더 이상 있지 않도록 이들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이 일에 함께 하고 있었다. 이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이 안에 있는 거민들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달되어야 된다, 라는 일에 이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또 한 가지, 그 다음 말씀을 보면요.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느 8:5).
놀랍습니다. 그들 목전에 책을 폈습니다. 이 책보다 더 중요한 책이 있습니까? 이 이스라엘 백성, 그들을 살리는 책, 그 책이 이제 펴집니다. 이 책이 펴졌을 때,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이제 그들의 발을 보세요. 그들은요, 이 책이 펴지게 될 때, 그들은 이 책을 공경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책을 공경하면 우상 숭배죠. 그들은 책이 펴지게 될 때, 책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 그분 앞에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일어났습니다.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기립했습니다. 기립해서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고 하는 표를 그들은 모두가 다 보였습니다. 여기서도 한 마음이죠. 우리는 이들이 이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두려워 떨어야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박한 것으로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 속에 어떤 것은 우리가 제해도 될 수 있다. 이 정도는 우리가 무시해도 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그 하나님 앞에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의 복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백성들은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펴졌을 때 모두가 다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을 보게 될때, 네시간 다 앉아 있습니다. 셀폰 다 끄라고 하면 다 끕니다. 거기에서 잡담을 하거나 그러면 정말로 거기서 퇴장 당합니다. 스포츠, 어떤 때는요, 연장전을 하면요. 몇시간씩 거기 앉아서요. 땀을 뻘뻘 흘리고도 그들은 그것을 관람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게 될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안절부절 못하고 시계를 보고 우리는 들락날락하고 이런 마음, 우리에게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의 엔터테이먼트나 스포츠나 이와 같은 관심 만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이것은 공적인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와 같은 경외심,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오늘 느헤미야서 8장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을 다시 점검하고 가다듬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주님 앞에서 변화가 있기 위해서 만일 우리 가정 안에 변화가 있기 원한다면 만일 하나님의 교회 안에 진정한 변화가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자세부터 주님 앞에서 가다듬어야 되리라 믿습니다. 이제 그들은 일어났지요.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느 8:6).
이제 이 백성들의 입을 보세요. 입술을 보세요.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멘, 아멘 했습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을 송축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이 위대한 하나님, 광활한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주권 가운데, 섭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송축 했을 때, 이 백성들은요. 아멘 아멘 화답했습니다. 이 입술, 우리의 입술, 하나님의 말씀에 화답해야 됩니다. 형제들이 기도하게 될때 우리는 정말로 마음으로 아멘 합니까? 정말로 큰 소리로 아멘 합니까? 소리만 큰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진정 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정말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의 표시를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교제입니다. 이것은 화답입니다. 에스라가 이제 이 말씀을 읽었을 때, 거기에 다 잠잠하고 거기에 무 반응 했다면 에스라의 마음은 얼마나 낙심이 됬겠어요? 물론 에스라는 낙심이 되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될 책임이 있는 사람이예요. 그러나 여기 놀라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송축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했을 때, 백성들은 아멘 아멘 외쳤습니다. 입술이 거룩합니다. 그들의 귀가 거룩하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게 될 때, 그들의 눈이 거룩해 집니다. 그들이 에스라 옆에 서 있는 사람들,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지원하는 사람들, 그들의 입술이 거룩해 졌습니다. 또 그들의 손을 보세요. 그들의 손은 하늘을 향해 들고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 마음 속에 영적인 현실이 없다면, 그러면서 손을 들었다면, 그러면서 아멘 했다면 이것은 모두가 다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요,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경외심을 보이고요. 이제 그들은 변화된 마음을 준비 가운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요, 손을 들었습니다. 손을 들고요, 머리는 숙였습니다. 손을 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전적으로 의존하는 표입니다. 그 다음에 머리를 숙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 하겠다고 하는 표입니다. 의존, 그리고 순복, 순종, 이것이 그들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 이것처럼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 질 겁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순복 하겠다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이들의 제스쳐, 이들의 몸짓, 바디 랭귀지, 이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영적인 것들을 그대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번째요. 7절 말씀부터는,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왔어요. 두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 되었습니다. 세번째는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게 될 때 말씀은 그 자체로 놀랍게 우리 마음 속에 역사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될 때 또 필요한 것은요, 낭독되게 될 때 필요한 것은, 그것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이해입니다. 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에스라 옆에서 역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세명의 사람들과 그리고 레위인들이 그를 도왔습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7-9).
말씀이 낭독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낭독되었을 때, 에스라와 그와 함께 했던, 또 다른 동역하는 여러 사람들이요. 이 백성들이 이 말씀을 좀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낭독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낭독과 함께 이 말씀이 사람들 마음 속에 의미가 있게 전달되도록 이해를 도와줘야 됩니다. 우리는 불신자,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는 재종자로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그는 두루마리 책을 가지고 왔지요. 참 놀라운 책을 그는 병거에서 펴서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었고 그는 거듭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 속에 물론, 이 성경을 읽어도, 두루마리를 읽는다 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이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그는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사마리아에서부터 그에게까지 파견했습니다. 빌립이 드디어 그 곁에 찾아가서 묻지요. "당신이 읽고 있는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물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 말씀을 이해 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전도였습니다. 그것은 물론 복음 전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될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만 더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하는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와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열 세사람, 그리고 레위 사람들, 이 일에 대해서 이해력을 돕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대단히 민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 가운데 이 말씀이 낭독되게 될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모임 안에서요.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깊이 알고자 하는 성도들이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말씀을 좀더 깊이 알 수 있도록 실제로 도와주고 있습니까? 여기 8장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것을 도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느 8:8).
여기 보세요. "다" 라고 하는 이 부사 보세요. 깨닫는데요, 다 깨닫게 했다. 그들의 최선을 다한 노력을 저희들이 이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이들이요, 이 말씀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울었습니다. 저는 이 8장이 장관이라고 하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요, 하나님 말씀이 전달 되었을 때, 우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 그 사람들 마음 속에 가장 전율을 느끼는 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변화를 받고 또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와 같은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가장 놀라운 전율은 복음전도 자신이 주님을 발견하게 될 때, 주님을 발견했다는 발견은 구원 받을 때의 발견이 아니고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매일매일 상황에서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좀 더 그분을 또렷하게 발견하게 될 때, 마음 속에 찾아오는 전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될 때, 좀 더 또렷하게, 그리고 명쾌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는 순간 느끼는 전율 말입니다. 이 전율이 있게 될 때, 이 말씀을 증거 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이 이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그의 위대함과 놀라운 사역과 그의 사랑과 그의 장엄함과 그의 겸손과 온유와 이 모든 것을 보며 그 마음 속에 전율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그 광경을 보게 될 때, 그 마음 속에 찾아오는 위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이것은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이 세상에 살게 하는, 이 슬픈 세상에 살게 하는 놀라운 추친력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전율로 다가오는가? 아니면 이와 같은 말씀은 그냥 지식적으로 다가오는가? 이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하나님의 교회, 우리 모임 안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전율 가운데 파고들며 감격 속에 파고드는, 이와 같은 현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전파되게 될 때, 바이블 리딩을 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 속에 제시되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을 우리는 순간순간 발견해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 모임의 현저한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 8장서부터 이제 이들 가운데 일어난 변화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울었습니다. 이것은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찾아오는 전율 속의 한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이와 같은 점에 대해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와 같은 것을 깨닫는 마음입니다. 눈물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을 때보다 지금은 좀 더 세상적이다. 나는 주님을 믿을 때보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알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에 있어서는 좀 더 냉랭해졌다. 우리는 머리는 커지는데 우리 마음은 좀 더 위축되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이와 같은 자세에 대해서 주님 앞에 자백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이제 이와 같은 일로 눈물을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오게 될 때, 예배 드리게 될때, 우리 마음이 전 같이 주님 앞에 감격 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죄송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복음 전도하는 일에 열의가 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죄송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열의와 관심이 떨어진 것, 우리의 열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사라져 가는 것,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변화를 받아야 될 일 아니겠어요? 이 사람들은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울었습니다. 8장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것은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이해했을 때, 몰랐을 때는 몰랐지만, 그 말씀의 빛을 받지 못했을 때는 몰랐지만, 그들의 마음이 둔했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운 것이 아니라 집합적으로 울었습니다. 이것은 감상적인 울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식에서 나오는 울음입니다. 이것은 결단에서 나오는 울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어떠한 수준을 가지고 말씀하셨는지, 하나님께서는 모세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기준을 통해서 그것을 소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너희들이 내 말을 지키면 이 세상에서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머리가 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게 될 때, 이 백성은요, 영적인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모범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간증을 환히 드러내는 백성들이 될 겁니다. 왜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이 이렇게 함으로 주변에 이방 민족들, 우상을 섬기며 어둠 가운데 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세상에서의 쾌락 밖에는 알지 못하고 그리고 저 먼 영혼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드러났는가 하는 것을 이 어두운, 흑암 속에 사는 백성들이 더듬어 알 수 있도록 도구가 되는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고 하는 것이죠. 그 수준에 유대인들은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똑같이 되었죠. 아니 이방인들의 수준으로 추락되었지요. 이제 그 수준에서 하나님께서 원래 말씀하시던 원래 수준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사용했습니다. 에스라 주변에 있는 그의 동역자들을 사용했습니다. 레위 사람들과 열 세사람들의 사람들과 그외 여러 사람들의 합심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이제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빛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원,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저희는 교회 시대에 교회를 섬깁니다. 교회 시대에 저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교회를 통해서 또 지역 교회들을 통해서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우리는 밝히 이해해야 되죠. 그래서 우리는 그 소원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제 이루어 드려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컬컬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답답합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릴 용의가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결의가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부름에 응할 자세가 없느냐 그 말입니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울었어요.
이제 울게 될때, 어떻게 인도자들이 반응했습니까? 여기 보십시요.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9-10).
이들이 모인 날은요, 7월 1일입니다. 7월 1일이라고 하는 것은 나팔절입니다. 거룩한 날입니다. 나팔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팔절, 일곱절기 중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절은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권위의 음성 속에서 불려지는 나팔소리, 이것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 회개와 또한 하나님의 회복을 통해서 그들이 돌아올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당시 느헤미야 시대에 흩어져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AD70년 디도 장군의 공격과 예루살렘의 파멸과, 성전의 불탐으로 이천년이 지난 오늘도, 이스라엘은 물론 48년 이후에 고토에 국가를 세웠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아니 육체적으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많은 나라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시게 될때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게 될 것이고 놀라운 회복이 있게 될 겁니다. 이 놀라운 것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율법 말씀에서 일곱 절기를 통해서 말씀하시게 될 때, 이스라엘의 시간표, 그들을 향한 계획, 그 중에 하나가 나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요, 이것이 그들에게 소망입니다. 흩어져 있는 백성들이 이제 다시 고토로 돌아오고 이제 그의 메시아께서 그들을 오셔서 그들을 통치할 날, 그날을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죠. 이들은 무언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지만 느헤미야 당시에 현실은 너무나 각박했죠. 그런데요.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제 눈물을 흘렸어요. 하나님의 말씀의 수준을 그들이 들었을때 주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울며 나왔습니다. 그때 인도자들이,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의 사람들이 "오늘은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라. 이제 음식을 먹고 기뻐하라. 그리고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라." 말씀했습니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
그들이 울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울지 않았다면 기뻐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울었을 때요, 인도자들이 이제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이제 성일이고, 이날은 주의 성일이니 근심도 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다. 여호와를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여호와의 희락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조금 정확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 말은 여호와의 기쁨입니다. 왜 여호와께서 기뻐하실까요? 이 유다 사람들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와서 에스라가 낭독하는 말씀을 듣고 여섯시간이나 그들은 경청했고 그리고 말씀을 설명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울었지요. 그들이 울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와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여기 유다 사람들이, "아, 오늘은 성일이니까 기뻐하라." 그들의 주관적인 기쁨이 그들의 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진정한 힘은 그들이요, 여호와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기뻐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은요, 그들이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 말씀 앞에서 그들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변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그들로 변화 시켰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정 안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기대하고 계실까?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을 향해서 무엇을 기다리고 계실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의 삶 속에서요,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언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 될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주님 앞에 나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갔지만 하나님의 뜻에서 언젠가부터 멀리 떨어졌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내 마음 속에 안고 그것을 내가 알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내가 하나가 될 때, 그것이 힘이라 그 말입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요. 이 인도자들이 말씀한 것은 그것이 너희들의 힘이라고 말씀했어요. 우리들이요, 주님 앞에 회개와 또한 눈물과 참된 변화와 하나님 말씀때문에요. 그렇게 주님 앞에 나가게 될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래서요. 그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하고 우리가 주님 말씀을 순종 하고자 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역사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래서 여기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이렇게 말씀하고요.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느 8:11-12).
이들이 이와 같이 주님 앞에 나오게 될 때요. 그들이 행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심에 대해서 그들은 마음 속에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그 기쁨 속에서 나누어 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우리는 즉각 우리의 마음 속에 찾아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입니다. 사도바울의 삶의 목표는, 삶의 영원한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었죠. 언제나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순서는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음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서 그들이 변화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유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수천만불을 원조한다 한들 그들이 만일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가장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유익을 베풀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 안에서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분연히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는것, 말씀 앞에서 담대해 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 그들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생애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을 강건케 해주는, 결단케 해주는 이와 같은 도움.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이 백성들이요. 자기만 기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은헤가 우리를 통해서 넘쳐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시죠. 우리는 부흥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고 우리 가정이 좀 더 주님 앞에서 가까워지고 우리 모임이 하나님 앞에서 좀더 신선하고 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뜻 가운데서, 능력 가운데 주님 앞에 생생하게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흥을 원합니다. 오늘 저희들은 8장 말씀에서 위대한 부흥,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위대한 힘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나누어주고 먹고 마시고 크게 즐거워 하였는데 "이는 그 읽어들린 밝히 앎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요. 머리로 이해가 아니고요. 우리는 지식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마음이 그 말씀에 동화 되게 될 때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요, 먹고 마시고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즐거움입니다. 쾌락과 유혹, 그리고 세상이 사단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올무로 인한 즐거움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즐거움, 위대한 희락,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이 즐거움을 그들은 누렸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이 당시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바벨론이 느부갓네살부터 시작해서 벨사살이 죽는 날까지 이스라엘은 포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유명한 그들의 역사와 또한 하나님의 유명한 이름과 또한 성전의 아름다움, 또한 그들이 어떤 민족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예배와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을 소유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간증을 드러낼 만한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숭배로 인해서 타락과 타락에 이어서 그들은 예레미야의 눈물도 거부하고 하나님의 모든 음성을 거부했을 때, 성벽은 불타고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왕은 장님이 되었고 또한 왕자들은 왕 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 나라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식민지요, 아니 식민지 이상으로 그들은 속국이요, 그들은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 마음 속에 옛날을 그리워하고 또한 전에 있었던 성전 안에 있었던 위대한 영광을 마음 속에 고대하고 있었고 그것을 언제나 마음 속에 향수같이 그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바벨론이 득세하고 이제 벨사살이 죽임을 당할 때까지도 아니 고레스가 일어나서 페르시아 제국을 이룰 때도 이스라엘에게는, 유다에게는 그들에게는 아직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어둠 가운데, 영적인 암흑 가운데 그 소망 없는 백성들, 그 세월이 지금까지 흘러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까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마음의 기쁨이 없었어요. 왜 그랬습니까? 그들에게는 느부갓네살을 당할 수 있는 군대가 없어서 였습니까? 그들에게는 말이 없어서 였습니까? 그들에게는 은금이 없어서 였습니까?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참된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상실되었을때 그들은 여지없이 이방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습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제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동역, 그것을 통해서 수문 앞 광장에서 전에 없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왔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뻐하시는가를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마음 속에 역사하게 될때 그들은 처음으로 기뻐했어요. 이 기뻐하는 일로 인해서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이 기쁘다고 하는 것은요, 그들은 전에도 기뻤지만 잠깐 또 다시 기쁨이 있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기쁨의 기근, 그것은 세기를 거쳐서 그들에게 찾아왔던 기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 속에 인위적인 기쁨 말고요. 돈으로 만드는 기쁨 말고 우리가 감정이나 감상으로 만드는 기쁨 말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정말로 정착할 수 있는 위대한 기쁨, 위대한 희락,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임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성도들이 기뻐하는 것, 필요합니다. 모였을때 하나님의 말씀이 영예를 받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이곳에서 존귀함을 누리게 될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모임 안에 진정한 기쁨이 정착하게 됩니다. 우리 모임 안에 기쁨이 상실되어 있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멀어져 있고 복음이 연약하고 성도들 마음 속에 힘이 없고 언제나 변명 속에 살고 세상의 여러가지 어려움들이나 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내 눈 앞에 크게 다가와 있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이 시대에서는 할 수 없다. 이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언제나 말세다. 이제는 우리가 아무리 해도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낙심, 이것은 우리 원수가 우리에게 심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은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 되게 될 때에 그것을 들었고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 기쁨을 그들은 마음 속에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쁜 겁니다. 이제 7월 1일이 끝났어요. 이제 7월 2일이 됩니다.
"그 이튿날 뭇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율법책을 본즉..."(느 8:13-14).
여기 보세요.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7월 1일날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 되어졌고요. 한 말씀을 들었어요. 얼마나 들었습니까? 10분이나 15분이요? 아니면 50분? 여섯시간 그들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말씀을 해석해 주는 13인과 또한 레위인들이 찾아다니면서 그들에게 다 깨닫게 했습니다. 그래서 눈물 흘렸죠. 상당한 것을 그들은 배웠습니다. 그런데요. 7월 2일이 되었을 때 그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에서 많은 감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배웠는데 이 말씀에 대한 알고자 하는 열기가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다. 오늘 저희들이 여기에 모여서, 모임에 모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전율을 느끼고 또한 그 말씀을 사모하고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말씀에 대한 배고픔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요, 7월 1일날 많은 말씀을 알고 눈물도 흘리고 기뻐도 했습니다만, 그 다음날은요,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더 많은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찬송가 506장에요. '예수 더 알기 원함은' 더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요, 그와 같은 열의를 가지고 어디로 왔습니까? 에스라의 곳으로 왔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그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생애를 거기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그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율법과 규례, 법도, 이런 말씀들을요, 그는 마음 속에 두고 있습니다. 말씀을 우리는 분변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그랬지요. "진리의 말씀을 분변하여" 말씀을 쪼개고 나눕니다. 그것을 분석합니다. 그것을 잘 이해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해하는 말씀을 마음 속에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순종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했어요. 너희는 각처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성삼위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그 다음 말씀 기억 하십시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르치는 것,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친 말씀이 들은 성도들 마음 속에서 역사해서 그것이 지켜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확인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지고 그저 이해되고 그 다음에 그것이 순종 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가르침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7월 2일, 그들은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였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에스라의 곳'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참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에스라가 있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곳입니다. 에스라가 있는 곳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곳입니다. 에스라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이제 빛을 얻습니다. 능력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거기에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될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될 때, 거기에 사람들은 모입니다. 배고픈 영혼 들은 모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에스라의 곳입니다. 에스라의 곳으로 사람들은 모입니다.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 험한 시대, 슬픈 시대, 또한 원수가 역사하는 시대, 사람들이 암흑 가운데 헤매는 시대, 이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스라의 곳이다. 우리의 모임은 에스라의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성도들은 거기에 와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고 이 말씀으로 인해서 언제나 마음 속에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모이게 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전해지고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그 위대한 역사로 인해서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을 주게 되고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많은 반대가 있어도 많은 슬픔이 있어도 말씀이 있는 그곳에 와서 성도들은 힘을 얻고요. 모든 슬픔을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위대한 소망을 우리가 바라보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위대한 소망, 이것을 가지고 이제 이 시대에 저희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신실 하게 충성 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에스라의 곳', 우리 모임은 에스라의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에스라의 곳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말씀을 들었는데 더 깨닫고 싶어서 모였을 때 그들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말씀을 살펴보니, 참 놀랍습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요.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예레미야서를 읽었을 때 포로 기간이 70년이면 끝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의 말년에 가서 이제 포로 기간이 70년이 다 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에서 깨달았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좀 더 알게 될 때, 우리의 생애에 위대한 일이 일어납니다. 겉으로 보게 될 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순간이지만 사람들이 보게 될 때 그것은 아무 역사도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세상은 알지 못하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또한 옆에 있는 사람들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서 좀 더 알게 될 때 위대한 순간이다 그 말입니다. 그 순간은 전환점입니다. 왜냐하면 잘 모르던 것을 내가 하나님 안에서 알고 이제 놀라운 것을 내가 실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쭉 들었는데 이제 놀라운 것을 깨달았어요. 이제 초막절이 되면 초막을 만들어서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요, 초막절 잘 알고 계시잖아요? 초막절은 당연히 나뭇가지를 꺾어와서 초막을 만들어서 즐거워 해야 된다는 것을 레위기서 말씀을 읽으면은 다 알죠. 그런데요, 이분들은 몰랐습니다. 놀라운 것은요. 이때까지 초막절이 지켜졌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초막절이 안지켜진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초막절이 전혀 지켜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어요. 에스라서 3장 4절 말씀을 보면요. 이미 에스라 때도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초막절이 이때와 같이 지켜진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요, 이전까지 지켜진 초막절은 그들은 나뭇가지를 잘라와서 초막을 만들고 그 안에서 기뻐하지 않고 초막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요. 하나님의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초막절, 하나님의 말씀, 초막절 그 어느 부분을 이해하고요.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에스라의 말씀을 듣고 에스라에게 찾아와서 좀 더 깨닫고 나서 그들이 초막절을 지켰을 때 초막절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요, 깨닫고 일부를 순종하는 것과 그래서 우리 자신은 나는 말씀을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쩌면 착각 속에서 우리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두려운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다. 정말로 순종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와서 우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그리고 또 기도해야 됩니다. 이들이요, 초막절에 관해서 알고 있었지만 말씀을 좀 더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초막절을 철저하게 지켰다.
느헤미야서 8장 말씀에서 그들이 이제 순종 하게 됩니다. 처음에 말씀을 가져왔어요. 두번째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세번째는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에 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 다음날 좀 더 말씀을 깨닫고 나서 그들은 순종 합니다. 어떻게 순종 합니까? 좀 더 철저히 순종 합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 순종은요.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이행하는 겁니다. 둘째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내가 알고 있어서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실제적으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이 되어야 합니다. 네번째로요.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들었을 때 즉시 이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듣고 알고 언젠가 내가 하겠다. 삼개월 후에 하겠다. 일년 후에 하겠다. 이것은 순종 아닙니다. 지켜질 때까지 순종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 순종이라고 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그 다음에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순종, 나를 사랑하는 내 아내가 말씀을 순종 하기 때문에 나는 말씀을 순종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내 자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기 때문에 내가 순종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서 개인적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순종은 개인적이어야 합니다. 또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게 될 때 그 말씀은 일년간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속적으로 순종 해야 됩니다. 이들은요, 순종 했습니다. 보십시요. 8장의 위대한 것은 말씀을 첫째, 으뜸으로 생각하고 말씀으로 돌아가는 이와 같은 자세. 여기서부터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어요. 말씀을 가져왔어요. 말씀을 낭독했어요. 말씀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그들은 울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더 알기를 원했어요. 더 알았을 때 그들은 더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을 지켰는데 이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 예루살렘에 놀라운 장관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요, 여기 도처에 초막을 만들었습니다. 초막절, 7월 15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 그들은 지킵니다. 그리고 22일날 성회로 모입니다.
이 초막절, 이것은 천년왕국의 통치를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초막절, 그런데요. 이 초막절은 초막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서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왜 초막을 짓는가? 이 초막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미래에는 위대한 메시아께서 오셔서 통치하지만 과거에는 애굽에서 그들은 노예 생활을 하다가 나와 그들은 광야를 통과했다. 광야를 통과할 때 그들은 이 땅에서 아무것도 유익한 것을 얻을 수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을 선포하는 겁니다. 광야를 지나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으로 부터만 위대한 것들을 공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초막, 말씀 그대로 초막절이라고 하는 것은 초막을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서 즐거워 하는데 그들이 그렇게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과거에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언제나 상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에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 과거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 만일 우리의 미래에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면 우리의 미래라고 하는 것은 어두움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 거기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과거, 거기에는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주님이 주신 나의 기회, 이때에 주님께 헌신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들은 초막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신 것에 대해서 그들은 기억했습니다. 이 땅에서는 영구한 기업이 없습니다. 영구한 도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초막이라고 하는 것은 왜 중요했을까요? 왜 그 전에는 초막절을 지켰지만 그들은 일부만 지켰는가? 왜 느헤미야서 8장에서 초막절을 지켰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것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절기와 관련해서 그들은 철저히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서 8장이 우리에게 명확히 말씀해주고 있는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 하죠. 주님을 사모하죠. 가정에서나 모임에서나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저희들은 원하죠.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느헤미야 8장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정말로 철저히 순종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살펴봐야 됩니다. 우리 모임은 살펴 봐야 합니다. 우리 모임의 인도자들은 이것을 살펴봐야 됩니다. 점검해야 됩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따라가고 있지만 어느 것들은 우리가 불순종하고 있는가, 이 불순종이 우리는 몰라서 불순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우리는 거부하고 있는가? 이 정확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느헤미야서 8장 말씀에서 얻게 되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첫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어요. 놀라운 변화가 있었어요. 둘째날, 에스라의 곳에 와서 더욱 더 자세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초막절이 지켜졌습니다. 여기 17절 말씀을 보십시요.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 팔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느 8:17-18).
이들은 초막절과 관련해서 철저히 순종 했습니다.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초막절은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왜냐하면 천년왕국의 통치를 그들이 바라보고 그 위대한 소망을 그들은 마음 속에 두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들이 과거를 생각한다 해도 그들은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과거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그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마침내 애굽에서 인도하사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즐거워 했습니다. 어떻게 즐거워 했습니까? 여기 보면 17절 하반절에 '크게 즐거워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즐거워한 것이 아니고 크게 즐거워 했습니다. 저희들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게 될 때 크게 즐거워 합니다. 저희들의 모임이 정말로 희락을 언제나 느끼고 정말로 큰 즐거움 가운데 저희들이 그것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감상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즐거움 아니고요.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함에서 오는 근본적인 즐거움, 지속적인 즐거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즐거움, 내 마음 속에 만족을 주는 즐거움, 이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기 또 한가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요. 에스라는요, 이제 나팔절, 7월 1일부터 말씀을 읽기 시작했죠. 이 말씀을 보면 초막절 끝에까지 말씀을 읽었습니다. 3주를요, 계속해서 말씀을 읽었습니다. 백성들이 어떤 한번의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모인 한번의 에피소드, 우리는 때때로 어떤 열기 가운데 하나님 말씀으로 모입니다. 이제 특별한 수양회, 특별집회,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그 다음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나서 수양회가 올때까지 뭐라고 말합니까? 저는요, 수양회 올 때마다 우리가 묵은 땅을 기경하자. 그러면서 다시 이제 잠깐 동안 땅을 기경하다가 다시 돌아가서는 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와 같은 것 아니었다. 여기에서의 8장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7월 1일날 말씀의 열기가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저희들은요, 주님 오실 때까지 저희 생애 전체를 통해서 우리 마음 속에 에스라의 곳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이게 될때 거기가 에스라의 곳이어야 됩니다. 말씀의 열기가 우리 심령 속에 지속되어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참된 즐거움을 백성들이 누릴 수 있다. 그래서요. 저희들은요, 이제 9장으로 들어가면 여기 놀라운 자백의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 시간이 없어 9장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만 잠깐 동안 소개의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8장에서는요.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타난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기뻐하셨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말씀했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초막절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놀랍지요. 말씀으로 인한 위대한 역사, 그런데요. 말씀이 있으면요. 말씀이 유효하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한다. 무엇을 우리로부터 자아내는 것입니까? 우리 마음 속에 영적으로 자극함으로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함으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말씀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읽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하게 될 때 다시 말씀을 읽습니다. 그 말씀을 읽게 될 때 다시 주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에 놀라운 변화는 무엇입니까? 8장에서는요, 그들은 말씀을 듣고 구약의 율법의 모세의 율법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하나님을 불쾌케 해 드린 것, 이런 모든 것을 깨닫고 울었어요.
그러나 이제 9장에 와 보세요. 그들은 어떻게 모입니까? 그들은 말씀이 끝나고 난 이후에 그들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9장 끝에 가서는 그들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언약을 드리는 것입니다. 9장 마지막에 가서요, 견고한 언약을 맺습니다. 이 견고한 언약은 먼저 여호와께서는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가 풍성하시고 충성 되시고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한 사람들이다. 이것을 그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조상이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자기들도 그렇게 했다고 그들은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느헤미야서 9장 말씀은 다니엘서 9장, 에스라서 9장, 느헤미야서 9장, 이 석장은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자백하는 거룩한 성도가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위대한 기도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위대한 자백의 기도, 말씀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자백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옳게 섬긴다고 생각하고 아무리 열심히 섬기고 내 모든 것을 다해서 주님께 헌신한다 해도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가게 될 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그리고 주님의 위대한 수준을 우리가 보게 될때, 그리고 그분의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우리가 기억하게 될때, 우리가 언제나 주님 앞에 나가서 주님, 내가 주님을 섬길 만큼 섬기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백하는 것입니다. 9장은요, 이와 같은 자백을 통해서 견고한 언약을 그들이 맺습니다. 그리고 이 견고한 언약에 그들이 인을 칩니다. 그리고 이 견고한 언약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계산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선포합니다. 따라서요. 말씀, 8장입니다. 9장 자백의 기도입니다. 위대한 부흥, 자백의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자백의 기도는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부터 나와서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그들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8장에서는 울었어요. 그러나 이 운 것,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구체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흥이라고 할 때 우리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 우리는 부정합니다. 좀 더 개선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일반적이고 두리뭉실한 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원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라는 거죠.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을 마음 속에 기대하고 소원하고 구상하고 비전을 가지고 왔어요. 동시에 그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은 그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거룩한 백성,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 하나님께 헌신하는 백성, 하나님의 위대한 간증을 주변에 드러내는 백성으로 그래서 그들 가운데 있었던 능욕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간증이 환히 드러나도록 그는 마음 속에 오래 전부터 고대하고 있었다. 형제 자매님들, 제 마음 속에 소원하고 구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함께 소원하는 것은 우리 모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과 신약교회의 원칙과 또한 패턴과 또한 실행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합당하게 이루어 드리는 것, 그래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교회를 통해서, 모임을 통해서 위대한 간증이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환히 드러나서 위대한 부흥이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도록 이것을 저희들은 마음 속에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요. 8장에서 저희들에게 주신 교훈을 생각할때,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희들은 이제 8장에서 마칩니다만, 9장에 들어가서 그들은 자백과 함께 어떻게 하나님 앞에 위치나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그들의 변화를 고백했는가, 그리고 실천했는가, 이것을 계속해서 저희들이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형제 자매님들 오늘도 이와 같이 참석해 주시고 또한 집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저희들이 함께 교제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를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형모 형제님 > 느헤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헤미야 08. 십일조, 성민들의 영적인 특징 (0) | 2021.11.12 |
---|---|
느헤미야 07. 자백과 기도, 그리고 언약 (0) | 2021.11.06 |
느헤미야 05. 성안의 신령한 성민 (0) | 2021.09.18 |
느헤미야 04. 내부의 문제, 외부의 반대 (0) | 2021.09.04 |
느헤미야 03. 역사와 원수의 훼방, 느헤미야의 인도 (0) | 2021.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