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헤미야 09. 성벽 봉헌식 > 2013년 / 정형모 형제님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네에서 모여 오고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 왔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느 12:27-30).
그동안 저희들이 느헤미야서에서 느헤미야가 예루사렘에 와서 여러가지 반대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또 그가 하는 일이 크고 거대한 일임에, 그는 그 할 일을 위해서 주님의 도움을 따라 백성들을 감동 시켰고요. 협조를 얻어서, 먼저 성곽과 성문을 완성 했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느헤미야 후반부에서 느헤미야 마음 속에 있었던 그의 사역, 즉, 성벽 뿐만 아니라 성 안에 거하는 거민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백성들로 변화 되기를 그는 원했지요. 저희들은 이미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 했느냐 하는 것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저희들은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기도로 인해서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나왔고 또 구체적으로 여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또 특별히 성전의 일이 버려지지 않도록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 앞에 언약을 통해 인친 것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또 이제 11장에 와서 느헤미야 마음 속에 일반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성 안에 어떻게 하면 합당히 거민들이 거하게 할수 있을까, 이주하는 문제는 놓고 그는 지혜롭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백성들이 그 안에 이주 할수 있도록 했음을 저희들이 봅니다. 그는 자기의 권위나 또 자기의 지위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압박을 가해서 그곳으로 이주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이 선택해 주신, 10%가 성 안으로 들어온 모습도 저희들이 보았지요. 또 성 밖에 여러 고을에 사람들이 살게 된 것도 저희들이 봅니다. 이 모든 거처, 자체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12장 27절부터 보고자 하는 부분은, 이제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에 와서 이룬 일, 이 사역의 절정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 베냐민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복이 절정에 이른다. 사실은 이미 그들은 성곽과 성문을 만들었고 이제 하나님 앞에 헌신도 했습니다. 이제 오늘 저희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성곽의, 성벽의 봉헌입니다. 이 봉헌식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이 봉헌식 안에 담겨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 영적인 모습, 그들의 예배하는 모습, 이런 것들은 저희들에게 많은 교훈이 되리라 믿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읽게 될때, 성벽은 이미 6장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듯 생각하면 성벽 봉헌이라고 하는 것은 6장에 바로 이어져서 봉헌이 되어져야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성벽 봉헌은요. 거기서 되어지지 않고 훨씬 후에 12장에 와서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벽이 다 완성되고 난 이후에 적어도 3개월 정도 이내에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이렇게 추측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느헤미야가 총독직을 마치고 페르시아에 돌아갔다가 다시 온 후에, 이런 일을 하지 않았느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 시기가 어쨋든, 중요한 것은 이 백성들이 주님 앞에 찬양과 찬송으로 이와 같은 일에 임하고 있다라고 하는 점입니다. 이 성벽 봉헌에서는요, 단순히 물리적으로 성벽만 완성되어서 봉헌이 드려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뱍성들, 심령이 변화되었다. 그들은 헌신하는 백성, 예배하는 백성이 되었다. 이거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이제 이 성벽이 완성되었을때, 봉헌하게 될때, 왜 성전 앞에서 그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렇게 하지 않고, 특별히 12장 말씀, 봉헌식에 관련된 말씀에서 보게 될때, 이 봉헌식은요. 성벽 위를 걸어감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보면 시작은 골짜기 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절반은 시계바늘 반대 방향으로 돕니다. 또 절반은 시계바늘 방향으로 돌아서 마침내, 이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전에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될때, 백성들이 이와 같은 봉헌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그들은 마음 속에 찬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희들은 4장 말씀에서 도비야가 느헤미야가 와서 일을 시작하게 될때 비웃는 모습을 보지요. 4장 3절 말씀을 보면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라고 했던 바로 그 성벽입니다. 이 성벽 위를 여우가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성벽을 행진하고 있었다. 두 떼로 나뉘어서, 두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원수가 하나님의 일을 비웃었지만 그와 같은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고, 이미 오래 전에 원수들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알았지요. 이제 이 백성들은 성벽 위를 행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어떤 것이냐,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거죠. 또한 성벽을 행진하게 될때, 이 성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또한 이 역사를 이루게 될때, 모든 백성들이 협력해서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 성벽 위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은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으로 떠나가 버린 롯을 생각하게 될때, 마음이 허탈했지요. 롯은 자기가 먼저 선탰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가장 좋은 땅으로 가고자 했지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시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롯처럼, 롯은 자기 눈을 들어서 자기가 봤습니다. 자기가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가 지정하는 곳을 눈을 들고 보라" 여기 믿음과 불신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을 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종횡, 사방으로 밟고 걸어가 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때, 그 땅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소유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 여호수아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호수아서 1장 말씀을 보면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 3절 말씀을 보면요, 이제 모세는 떠나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막중한 일을 책임맏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격려하십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이스라엘 백성이 발로 밟는 곳은 어디나 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겁니다. 이것은 이미 그 땅을 그 백성에게 오래 전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었죠. 그래서 이 백성들도요.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도요. 이 성벽을 밟고 가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마음 속으로, 이곳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다. 오래 전에 그 생각을 하고 이제 눈물을 흘리며 찾아온 곳입니다. 드디어 일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준비되었습니다. 성벽만 준비된 것이 아니라 백성도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에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성벽을 걸어갑니다. 이 성벽을 밟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신 그 곳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주신 곳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간증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원수들은 비웃었으나, 그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수치 가운데 패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루어져야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 일을 이루었고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느헤미야와 그 모든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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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이 이제 말씀을 들어가보면, 27절 말씀에서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었습니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감동된 무리가요, 낙성식에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제 모여 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레위 사람들, 성 밖에 있었습니다. 많은 레위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죠. 낙성식과 함께 초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28절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여러 촌락에서 모여 오고" 있습니다. 여기 두번이나 "모여 오고" "모여 왔으니"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첫째,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백성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함께 모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연합된 가운데 모였다. 그냥 모인 것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모였다. 연합된 마음입니다. 사실 이 백성은요. 이미 8장에서 수문 앞 광장에서 모이게 될때, 하나같이 모였지요. 한 마음으로 모였지요. 이와 같은 것은, 단번에, 한번에 그저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이제 이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선한 일은 지속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은 한번 있다가 사라지고, 흥분됨 가운데, 감정적으로 고조되었을때, 우리 마음이 기쁨 가운데 있다가 사그러지는 이런 것들은 합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은, 선한 일, 신령한 일, 우리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따라 되어지는 일들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됩니다. 첫째, 이제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가지 소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소원입니다. 그동안 많은 수고를 했지요. 그들은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느헤미야의 인도와 백성들이 한 마음로 협동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우고 능욕을 제거하고 그들은 하나로 모여서, 이 기쁜날 그들은 모여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하며 이제 행진합니다.
두번째요, 이와 같은 백성들의 모습,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27절 하반절에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감사하는 노래, 이 일을요.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생각 할때, 이 일은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주 철저한 계획을 따라서, 원수들은 여러가지로 우리들을 방해 했지만 우리들은 하나가 되어서 이 일을 우리 힘으로 막아냈다. 이런 자축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 일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인정하고 따라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 일을 우리가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감사할 이유가 없지요. 그때는 자축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축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가 이루었다. 머리로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때때로 우리가 이루었다. 내가 이루었다. 우리 모임이 이루었다. 라고 하는 생각에 들어가게 될때, 엄청난 손실과 수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게 될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따라서 성공하게 될때, 그때 우리는 더욱 더 주님 앞에 겸손히 옆드려야 됩니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대적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백성들은 자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감사하고 노래했습니다. 참된 예배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 중심이 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은혜, 그분의 말로 할수 없는 고통과 죽음, 헌신, 희생, 이 주제, 우리 주님의 인격과 위대한 사역, 이 주제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갑니다. 그분이 우리의 예배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의 주제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 예배지요.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보좌에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은 감사하고 노래했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요, 27절 하반절에 보면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했다. 예배하게 될때,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즐거워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는 언제나 우리에게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여기에 각처에서 모여든 레위 사람들은 이 봉헌식을 하게 될때, 슬퍼하거나 애곡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그때, 반드시 여기에는 거룩한 기쁨이 깃드는 것입니다. 순간의 열정으로 인해서요, 아니면 표면적인 흥분에 의해서 이와 같은 기쁨이 살짝 왔다가 가는거 아니고요. 주님으로부터 오게 될때, 그 기쁨은 주님으로부터 오게 될때, 이 기쁨은 지속적입니다. 이 기쁨은 잠시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충만하게 될때 우리는 감사의 노래를 하게 됩니다. 즐거워 합니다. 시편 100편 말씀을 보면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시 100:1-2).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 100:5).
시편 기자와 같이 이 때에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예배하는 마음으로 이 낙성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요. 우리는 30절 말씀에서 보면요, 이 낙성식에 어떤 모습이 보여지고 있는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느 12:30).
이 낙성식에는요, 이 백성들이 순결함으로 모였습니다. 정결케 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 영적인 인도자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먼저 자기들의 몸을 정결케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백성들과 그리고 성문과 그리고 성을 정결케 했습니다. 이 순서를 보면요. 여기도 영적인 인도자들, 성전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영적인 인도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먼저 자기를 정결케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예식적인 정결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례를 따라서 목욕을 하고 또 옷을 정결하게 입고 금식을 하고 또 속죄제를 드리고 등등, 그들은 예식적으로 먼저 자기를 정결케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백성들을 정결케 한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순서입니다. 영적인 인도자가 이와 같은 일에 솔선수범하지 아니하고 본을 보이지 않고 먼저 이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일을 하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이는 도덕적인 순서죠. 에베소 장로들을 향해서 사도바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너희 자신을 조심하라. 그리고 양들을 위해서 조심하라. 장로가 먼저 자기를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언제나 순서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먼저 이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그리고 먼저 자신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영적, 도덕적인 순서이죠. 정결케 하는 일에 있어서도 먼저 인도자들이 정결케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정결케 했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정결케 했습니까? 성문과 성을 정결케 했습니다. 이것을 예식적으로 어떻게 정결케 하는가? 민수기 19장 말씀을 보면 붉은 암송아지의 규례가 나옵니다. 이 붉은 암송아지, 참 귀한 송아지죠. 이 송아지를 불태워서 재를 만듭니다. 그 재를 물에 담가서 잿물을 만들죠. 이 잿물을 우슬초에 찍어서 그것을 뿌립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정결케 하는 그와 같은 규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백성들만 정결케 한 것이 아니라 성과 성문도 정결케 되었다. 이것은 사실은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겁니다. 그 다음에 성과 성문도 드려졌다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겁니다. 우리는 이 느헤미야서를 보게 될 때에, 느헤미야서에는 성으로 되어 있죠. 성곽이 있습니다. 성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건설을 위해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움 가운데 이것이 다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성이라고 하는 것, 성벽과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별을 말하죠. 이 성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이것, 백성도 성별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과 성문도 하나님 앞에 드려집니다. 그래서 이 느헤미야서에서 이 성은,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 전체가 드려진 것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드려지기 위해서 이제 외부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차단이 된다. 그리고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원천, 주님이 주시는 말씀, 주님이 주시는 보양, 양분, 이런 것들을 가지고 밖으로, 이방으로 영향력을 가한다라고 하는 것이 성별이죠. 성별이라고 하는 것은 고립이 아닙니다. 성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것들을 우리는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그분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는 것도 그분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양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삶의 방향을,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뭔가 빌려올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만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 원천은 세상이 아니고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한 80% 받고 20% 세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100%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거 성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것을 외부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문이 있는 것입니다. 성문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것이고,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여기서 예배하는 이 백성들, 봉헌하는 이 백성들은요, 순결함으로 모였습니다. 먼저 인도자들이 자기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리고 백성도, 성과 문도 정결케 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모이게 될때 정결해야 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음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매주 만찬을 떼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그 사람을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불가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고린도전서 5장에서 너희들이 교만하다. 너희들이 이 사람을 받아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그것은 교만한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이 교제에서 나가게 하라, 라고 말씀하셨지요. 11장 말씀에 가면 우리가 떡을 뗴기 위해서 모이게 될때,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되겠다. 우리를 판단해야 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만일 판단하지 않고 이곳에 떡과 잔을 마시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너희들 중에 병든 자도 많고, 또 세상을 떠난 자도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주님 앞에 오게 될때, 그 분이 거룩한 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켤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게 될때 우리 마음 속에 경건한 마음, 어떤 분 앞에 우리가 나오는가, 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마음 속에 깊이 두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때, 예배는 예배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또 생각으로, 행동으로 죄를 짓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이제 그 죄도, 우리가 주님 앞에 자백하게 될때, 용서하시고 아버지와 교제가 원활하게 된다고 하셨지요. 이 문제를 하고, 예배에, 떡 떼는 일에 나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들 모임 안에서의 이 예배, 우리 항상 주님 앞에 나오는 자세로, 거룩한 분 앞에 나오는 자세로, 감사함으로 그 분앞에 나오게 될때,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나와야 되겠습니다. 여기 이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 줍니다. 순결함으로 그들은 모여서 이 낙성식에 참여하고 있다. 낙성식은요, 그냥 예식이 아닙니다. 낙성식은 예배입니다. 그들이 그동안 이 일을 위해서 어떻게 수고했고 어떻게 헌신했는가? 그 모든 수고와 헌신은 도대체 어떤 분의 도움으로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이 모든 일을 생각 하게 될때, 예배의 초점은, 대상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 앞에 합당하게 나오기 위해서 이제 정결케 했다.
그 다음에 31절 말씀부터 보면요, 이제 여기에 행진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느 12:31).
여기 보면 이 무리를 가리켜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감사 찬송 하는 자의 큰 무리"라 말씀했습니다. 감사하고 찬송하는 그룹입니다. 이 사람들을요, 느헤미야는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에서 보게 될 때요, 예배에는 질서가 있다. 이 봉헌식에도 질서가 있죠. 예배하는, 찬양하는, 감사하는, 무리들이 그냥 무질서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게 될때, 출애굽 시에 그들이 나오는 모습을 가리켜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항오를 지어서 나왔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질서하게 나온 것이 아니예요. 줄을 맞춰서 나온 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행진하게 될때, 어떻습니까? 그들이 진 칠때, 어떻습니까? 진 칠때에, 동서남북, 사방을 통해서요. 세 지파씩, 회막을 중심으로 진 쳤습니다. 또 움직이게 될때, 유다지파를 선두로 해서 이제 그 다음 지파가, 누군지, 누군지, 하나님께서 다 지정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고요. 화평의 하나님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 말입니다. 여기에 이 무리가 그냥 자기 원하는대로, 자기 생각하는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오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요, 우리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질서 가운데 되어지는 것입니다. 모임은 질서를 보존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계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배와 관련해서 질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 하나님께서는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요, 예배가 질서 가운데 드려져야 됩니다. 그러나 만일 질서 가운데 드려지지 못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신령으로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 어떤 예배가 있습니까? 혼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감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아니면 지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마음 속에 주님 앞에 커다란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기도드린 내용은 참 놀랍게 성서적인데 우리의 마음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마음이 냉랭한데요. 대단히 지적으로 합당한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 주님에 관해서도 마땅한 이야기를 하지요. 기도하게 될때, 놀라운 주님에 관한 말씀을 합니다만, 마음이 열정적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냉랭하다면 이것 참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또 어떤 때는요, 감정적으로 고조가 되어가지고 자기 자신은 '아, 우리는 놀랍게 예배를 드렸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주관적으로 그렇게 판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요, 우리가 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지적으로, 감정적으로, 혼적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우리는 이것을 잘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나서 나오게 될때, 또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감정적으로 고조된 사람들, 사실은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혼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때는 북을 치고 장구를 칩니다. 그와 같은 감정적인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착각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배를 신령하게 드리고 있다. 신령하게 드리는 것이 아니고요. 감정적으로, 열정적으로 드립니다. 그래서 본인은 생각할때, '아, 우리는 놀라운 예배를 드렸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모임은 어떻게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는 혹시 감정적으로 예배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식적으로 예배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그것을 주님 앞에서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이 질서 있는 예배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만일 죄악을 정리하지 않고 주님 앞에 드리게 될때, 이것 참 무질서죠.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또 한가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 내 생각하는 대로 드리게 될때, 이것 무질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떤 것이 신령한 예배이고, 어떤 것이 질서가 깃들여져 있는 예배일까? 첫째,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예배를 기뻐하실까, 라고 하는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입장에서 어떡하면 예배 잘 드릴까, 라고 하는 내 방식 대로의 생각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가, 라고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요, 경외심 가운데 예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 바구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가지고 와야 됩니다. 예배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을 우리 생활 가운데 만나야 됩니다. 그분의 인격에 대해서 우리는 감탄해야 됩니다. 그분의 사역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마음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와서 아버지 앞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제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됩니다. 또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야 됩니다. 우리는 경박한 마음이나, 또는 경외함이 없는 마음으로 가볍게, 주님 앞에 나와서는 안되는 거죠. 왜냐하면 그 분께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관련해서 질서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여기 느헤미야가요, 두 떼로 나누었는데요. "감사와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라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는데요. 이건 참 중요한 묘사라, 느헤미야가 이 회고록에서, 이 봉헌식을 돌이켜 생각하게 될때, 그때 그 무리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하는 무리였다. 이거는 그냥 단순히 그 날에 있었던 일을 그냥 기술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왜냐하면요, 느헤미야는요. 자기 자신이 페르시아에 있을때, 예루살렘을 생각 할때, 얼마나 마음 속에 고통 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능욕 가운데,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를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 당시 뿐만 아니라 그 동안의 귀환 이후에 약 100년이 지나도록 예루살렘은 어떻게 어려움을 당했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떠한 능욕과 고난을 받아 왔는가, 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수는 집요하게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그 간증을 말살 시키려고 하는 노력을 조금도 주저없이, 그리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때 찬양도 없었고 감사도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낙시과 허탈과, 그리고 곤란과 그리고 마음 속에 절망 밖에는, 그의 동족의 마음 속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이 봉헌식을 보면서, 백성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와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무리였다. 이거 대단히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그것을 느헤미야는 지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기도의 응답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감사가 마음으로부터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셨다. 자신을 도우셨고 그의 백성들을 도우셨다고 하는 것을 느헤미야는 기억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첫째, 볼수 있는 질서를 보겠습니다. 이 가운데 있는 위대한 질서, 첫째요. 눈에 보이는 질서가 있습니다. 둘로 나누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큰 무리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성벽이 얼마나 넓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을 행진해 나가게 될때, 느헤미야는 많은 생각을 하고 이 두 무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질서 가운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봉헌식에 참여 할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겠지요. 그래서 그는 결정했습니다. 한 무리는 이렇게 돌고, 한 무리는 시계 방향으로 돌고, 그래서 하나님의 전에 모이는 것으로, 이게 질서입니다.
두번째요, 그들이 움직이게 될때요. 여기에 하나됨의 질서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들이 행진하게 될때 이쪽으로 행진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전으로 모입니다. 이 반대 방향으로 모여도요. 결국은 하나님의 전으로 모입니다. 출발점은 골짜기 문이었습니다. 출발점이 골짜기 문이라고 생각할때요, 오래 전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 했을때, 아직 일이 시작되기 전에요. 그는 도착하자 사흘을 쉬었고, 그리고나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그는 밤에 탐색하러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 출발점이 어디었습니까? 그때, 골짜기 문이었습니다. 그 골짜기 문, 아마 느헤미야 마음 속에는 이제 이 성곽이 완성됬고, 백성들이 준비되었다. 이 감격스런 순간에 오래 전에 이 일이 시작되게 될때, 자기가 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성곽이 무너진 것, 성문이 소화된 것을 현장에 가서 볼때, 그 일을 추진하게 될때, 그 날밤 출발 지점이 골짜기 문이었다고 하는 것을, 그는 항상 마음에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폐허 속에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거대한 일을 생각하게 될때, 그 마음 속에 많은 도전이 됬을 겁니다. 또한 어느 순간순간에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순간순간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이루어 질수 있을까, 라고 하는 마음 속의 도전이 있었을 겁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품고 일을 시작하게 될때, 그것은 골짜기 문이었습니다. 골짜기 문, 우리는 기억하지요. 이것은 겸손을 영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말하게 될때, 겸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은혜를 주신다. 그는 은혜를 구하면서 골짜기 문에서 출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거기서 시작했는데, 이제 완성 되었을때 바로 거기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위에서 승리하기 오래 전에, 고향에서, 구릉이 많은 길르앗 지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그의 민족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했고요. 그 일을 따라서 그는 하나님 앞에 인도를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분토 했습니다. 드디어 갈멜산에서 승리 했을때, 그가 승리한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군중 앞에 나가서 환호 가운데 영접받지 않고요. 그는 군중으로부터 떠나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머리를 무릎 사이에다가 박고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겸손입니다. 그는 일을 시작할때도 그렇게 시작했고, 일이 이루어 졌을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기 골짜기 문, 그는 그전에 거기서 시작했지요. 이제 봉헌도 거기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이 두 무리가, 거대한 무리가 이리 가고, 또 다른 무리가 이리 가는데, 이 무리는 에스라가 인도합니다. 이 무리는요, 느헤미야가 뒤를 따라갑니다. 느헤미야는 인도하지 않고 뒤따라 갔어요. 그런데 이 두 무리가 어디가서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전에서 만났습니다. 거기는 예배하는 곳입니다. 사실은 성곽도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전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성곽이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성곽이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와 같은 일에, 봉헌식에서의 질서, 그것은 무엇입니까? 움직이게 될때, 동적인 질서입니다. 그 동적인 질서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연합이 있습니다. 이 두 무리는 서로 반대로 가지만, 어디서 만납니까? 여호와의 전에서 만났습니다.
세번째요. 이 봉헌에서의 질서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대로요. 시계바늘 반대 방향으로 도는 그룹은 에스라가 인도합니다. 시계바늘 방향으로 움직이는 무리들은 느헤미야가 함께 했습니다. 여기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인도자가 있죠.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인도자가 있습니다. 인도자 없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도자가 있으면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도자와 따라가는 사람, 이 둘의 조화입니다. 인도하는 사람의 인도력과, 따라가는 사람의 인도에 대한 협조, 바른 반응,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인도한다 해도 아무도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인도자가 아니죠. 그는 인도력이 없는 겁니다. 모임 안에서요, 장로들의 인도력이 있습니다. 영적인 인도력입니다. 이 영적인 인도력이 인도력 답기 위해서 인도자들이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분연히 서 있고, 또 인도자들을 따라가는 장로들을 따라가는, 순종하는 사람들의 순종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이것 없이는 모임 안에 합당한 예배도, 또한 합당한 교제도, 합당한 간증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인도자들이 있습니까? 여기 31절 말씀을 보면요.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유다의 방백들이 인도자들입니다. 그들로 먼저 성 위에 오르게 했어요. 여기 보세요. 언제나 인도자들이 먼저 올라갑니다. 그건 무얼 말합니까?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죠. 그 다음에요, 또 누가 있습니까?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느 12:42).
예스라히야라고 하는 인도자가 있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의 인도자, 여기에는 에스라라고 하는 인도자가 있었죠. 이 그룹을 인도하는 인도자 였습니다. 또 느헤미야는 또 다른 그룹과 함께 했습니다. 인도자로서, 그는 인도자로서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그는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에 왔고, 그는 많은 일을 감당 했습니다. 전투와 원수의 공격, 여기에서 그는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원수가 반대하게 될때,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견고했습니다. 이와 같은 본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고, 그 본에 대해서 느헤미야의 인도력에 신뢰 했습니다. 이녿력이 발휘가 될때, 백성들이 그 인도력을 신뢰합니다. 인도자를 신뢰하고요. 인도력에 대해서 마음 속에 확신을 갖게 되는 것, 대단히 중요하지요. 이 봉헌식에서도요. 이와 같은 것은 여전했습니다. 예배는 열정 가운데, 신령과 진정 가운데 드려질때 거기에는 반드시 이와 같은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인도자의 질서. 영적인 인도력은요. 언제나 질서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도력이 발휘되는데 질서가 세워지지 않는다, 성경 말씀에 많은 질서가 있지요. 머리가 있고 순종이 있습니다. 순복이 있습니다. 또한 모임 안에서의 장로가 있고 성도들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 가장이 있고요. 남편이 있고요.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서, 이 질서는 명백히 보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봉헌식에 있어서 인도자들의 역할,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을 보면요. 고린도전서 14장은 12장서부터 석장이 방언에 관한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무질서, 이것 때문에 사도바울은 고심 가운데 편지를 썼지요. 고린도 교회 안에 성도들은 방언 은사를 모두 다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방언 은사를 통해서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은사를 통해서 다른 성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은사라고 하는 것을 빙자해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와 같은 무질서가 있었다, 라고 하는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석장에 거쳐서 이 방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방언이 아니고 예언을 하라고 권면 했지요. 그 예언을 하라고 권면을 하게 될때, 사도바울께서 질서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
"차서를 따라 하고" 이것이 질서입니다. 방언을 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차서를 따라 하라.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통역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 안에서는 잠잠하고" 통역이 없다면 잠잠해야 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 다음에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 14:29).
둘이나 셋이 말하는 질서가 있죠. 그리고 분변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고전 14:30).
계시가 다른 쪽에 온다면 먼저 하는 사람이 잠잠해지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1).
한꺼번에 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씩 하나씩 차서를 따라 한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이와 같은 질서를 말씀하셨습니다만 우리 모임 안에는요. 이와 같은 질서가 모든 면에서 확립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아름다움 입니다. 왜 발람이 이스라엘 진영을 바라보면서, 저주하러 온 사람이, 그의 입이, 이스라엘의 진영을 향해서 오히려 감탄하고 축복하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했지요. 물론 그는 성령에 의해서 통제 되었고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한 궤계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본 것은 질서였습니다. 동서남북으로 전개 되어 있는, 진 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질서. 구약에서는 우리가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는 겁니다만, 신약에서는 영적으로 볼수 있고요. 도덕적으로 볼수 있고, 또한 가시적으로 볼수 있는 것입니다. 모임 안에 들어왔을때, 고린도 교회는 방언을 말하는 동시에, 다발적으로 할때, 자랑하기 위해서, 이럴 때에 거기에 들어왔던 관람석에 있었던 사람들, 불신자와 무식한 자입니다. 이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람들 다 미쳤다. 그것이 그들의 간증이었죠. 이것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질서가 있을때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조소하는 것입니다. 멸시하는 것입니다. 간증은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영예는 실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와 같은 점에서 주님 앞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이 일에 진실해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 경건한 질서라고 하는 것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의 어른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저희가 그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대로 반차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느 12:24).
여기 이미 저희들이 어제 본 말씀 안에요. "다위의 명한대로 반차를 따라" 행했다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느 12:36).
여기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다. 오래 전에 다윗이 성전 예배가 이루어지게 될때, 노래하는 자들의 규례를 다윗이 정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에 말씀에 기록된 것들이고요. 이와 같은 것들은 그 후대에 계속해서 지켜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여기에 봉헌식에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이 예배 가운데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 예배를 드렸는가, 라고 할때, 노래하는 사람,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려 드리게 될때, 다윗의 규례를 따라서 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확립된 것이었습니다. 이미 성전 예배에서 시작서부터 이와 같은 것이 진행이 됐던거죠. 이것을 따라서 그들은 이때, 느헤미야 시대에 봉헌 하게 될때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겁니다. 성벽 봉헌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겁니다. 이때까지는 성벽 없이 불행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왔어요. 그런데요. 이제 성이 세워지고 백성들이 준비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올립니다. 성벽 위에서 그들은 행진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이때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이 된다. 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때, 그들은 과거를 돌이켜 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의 과거, 한 민족의 과거, 하나님 없는 한 민족의 과거, 하나님 없는 한 개인의 과거, 이거 모두 의미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의 역사, 특별히 노래하는 자와, 예배와 관련해서 다윗이 처음에 이와 같은 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그 후에 항상 그것을 따라서 드려졌습니다. 그것은 원칙이었습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백성들이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그렇게 예배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게 될때, 그것이 질서입니다. 질서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말씀에서 옵니다. 우리의 생각, 말씀에다 우리의 생각을 가미하게 될때 이것은 엄청난 어려움, 무질서를 가져옵니다. 자동차에다가 지금은 다 무연 가스를 넣지요. 그러나 오래 전에 납이 들어간 가스와 납이 들어가지 않은 가스가 있었어요. 납이 들어간 가스와 납이 들어가지 않은 가스를 섞어서 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엔진이 망가지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때요. 상당히 많은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지만 어느 부분에 가서 우리의 생각대로 한다면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질서가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여기 이제 특별히 12장 45절과 46절 말씀을 보면요. 여기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두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느 12:45-46).
아삽과 여두둔, 헤만, 이런 사람들이 노래하는 사람들이었고요. 이 모든 사람들의 규례를 다윗이 정했습니다. 그것에 의해서 이제 레위 사람들은 이 일을 집행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 안에 예배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저희들이 이 예배 안에 질서가 있어야 되겠다. 이것은 봉헌식때, 우리가 명확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성전 예배는 원래 모습, 그것을 계속해서 보존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시대에 그것을 따라가는 거죠.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1-43).
하나님의 전에 모인 사람들이요, 이제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큰 희생을 드렸습니다. 이 봉헌식에서요. 그들은 예배하는 마음으로 참가 했는데, 이 예배에 큰 희생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많은 제사를 드렸지요. 예배는요, 우리에게 값을 요구합니다. 희생을 요구합니다. 희생 없는 예배는 없습니다.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 앞에 희생을 드리게 될때, 그들은 값싼 것, 총독에게 갖다 줘도 총독도 받지 않을 것, 이런 것을 드려서 책망을 받았지요. 우리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드립니다. 왜냐하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게 될때 가장 값진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이제 나아가게 될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 희생을 생각할때 봉헌식에서는요. 그틀은 크게 제사를 드렸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데요.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수도 없는 양과 또한 소와 이런 것들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잡아 드렸겠지요. 이 당시에 우리는 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지요. 그들은 풍요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요. 이 사람들은 봉헌을 하게 될때, 그들은 값진 것으로 희생을 드려서 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 극한 가난 가운데서요.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굉장한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핍박도 당하고, 물론 재정적으로도 어렵고, 거기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핍박을 당하던 그런 상황 속에 있었는데 그들을 돕기 위해서, 이방 사람들, 특히 헬라에 있는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이제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할때,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그것을 드리게 될때, 마게도냐 성도들은 힘에 지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희생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향기였습니다. 여기에 이제 예배는 향기입니다. 희생입니다. 이 희생은 의미있는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배를 드리게 될때,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43절 그 다음 말씀에요,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 하였으니" 심히 즐거워 했습니다. 참된 예배는요, 언제나 즐거움, 거룩한 희락을 가져옵니다. 저희들이 만찬 예배가 끝나고 날때, 저희들의 마음 속에 이와 같은 것을 경험합니다. 만찬 예배에서 때로 우리는 유혹을 받습니다. 여러가지 마음 속에 안고 있는 근심, 또 세상의 여러가지 비지니스, 또 세상 살게 될때 여러가지 마음 속에 얹혀있는 잊을 수 없는 것, 지울 수 없는 것, 오해로 인한 상한 마음, 뭐 이런 것들, 또는 경쟁심, 또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가지 마음을 유혹하는 시험거리들, 다양한 것들이 우리가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께 예배드려야 하는 이와 같은 순간에, 우리의 심령 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때는 한동안 내 마음이 세상에 나가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만찬 바로 앞에 앉아서 내 마음은 다른데 방황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주님 앞에 대단히 부끄럽지요. 그러나 우리가요, 이와 같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요.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게 될때, 우리 마음을 검토해야 됩니다. 판단해야 됩니다. 여러가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나 자신이 영적으로 방황하지 않을까? 나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초점을 맞춰야 되는데,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나 자신이 그런 예배를 드릴뿐만 아니라 다른 제사장이 일어나서 그 예배를 드리게 될때, 그 예배를 내 마음이, 심령이 추적하면서 함께 가서 아멘 해야 되는데, 내가 그러지 못하고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제자리에 오고 한참 기도하는 도중에 내 영혼이 다시 제자리에 찾아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예배가 끝난 다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이와 같은 것을 받으실까? 때로는요, 나의 시선은 다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나, 아니면 저 먼곳에 있는 비지니스에 관한 문제점에 내 마음이 방황하고 있다. 참 주님 앞에 부끄럽습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을 드려야 됩니다. 희생을 드리게 될 때요, 내가 주님 앞에 예배를 위해서 값을 치루게 될때, 내 마음은 거기에 고정이 됩니다. 내 마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내가 희생을 치루지 않고 이제 예배에 참석한다, 어떤 희생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마음 속에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아무리 시련이 있고, 시험이 있어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게 될때,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그분의 인격의 아름다움과 사역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하고 나오게 될때 큰 값을 치루는 겁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값을 치루는 겁니까? 값을 치루는 겁니다. 한주 동안요, 나의 시간과, 나의 정력과, 나의 관심과 이 모든것을 거기에 의도적으로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될때, 나는 다른데에 관심을 가지고 내 마음이 예배시간에 방황하는 이와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전도지를 돌리게 될때, 전도지가 공짜이기 때문에요, 사람들은 그것을 읽지 않습니다. 거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어떤 일에 대해서 굉장히 투자를 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많은 값을 치뤘다. 여러분, 한 오천불짜리 비행기 표를 내가 샀는데, 그 시간, 그 공항에 내가 나가는 일에 대해서 나는 소홀히 하겠습니까? 값을 치루게 될때, 나는 절대로 그것에 대해서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요, 이와 같은 희생을 받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희생을 드리게 될때, 우리는요. 기쁘게 됩니다. 왜 기뻐할까? 예배가 끝나고 났을때, 왜 기뻐할까? 아니, 예배 도중에 왜 내 마음이 고조될까? 왜냐하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과 교감하기 때문입니다. 이 교감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기뻐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나는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실종된 예배자입니다. 표류하고 있는 예배자입니다. 그래서요, 내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크게 제사를 드렸어요. 희생을 했습니다. 그래서요, 그들은 즐거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요. "즐거워하게 하셨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피동입니다. 그들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요. 즐거워 하게 하셨다. 우리가 주님 앞에 바른 자세로 주님을 예배하게 될 때요. 주님께서 나를 즐거워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즐거워 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 하게 하셨다. 크게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크게 우리가 즐거워 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이 봉헌식에서요, 또 한가지 발견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요, 여기 놀라운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기쁨이 아니라요. 대단히 거대한 기쁨이었다. 에스라서 3장 말씀을 보면요, 선전지대가 놓여지게 될때, 그때 기쁨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 기쁨은 혼합된 기쁨이었어요. 솔로몬의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그 지대가 너무 조그매서 그래서 실망 가운데 있었어요. 그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새 세대들은요? 솔로몬의 성전을 본 적이 없는 새 세대들은 이제 이 작은 성전 지대를 놓고도 그들은 기뻐했지요. 당시의 기쁨은 혼합된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의 기쁨은 어떻습니까? 느헤미야 시대의 봉헌의 기쁨, 그것은 어떻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찾아온 기쁨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기쁨이었어요. 그들은 주님 앞에 엄청난 헌신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앞에 그들의 모든 관심이 주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커다란 희생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주님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 예배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주일마다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때, 이것은 하나의 기계적이요, 하나의 루팅이요, 이와 같은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게 될때, 자칫 예배라고 하는 것을 소홀히 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의 집중이 주님이 아니고요. 다른데 섞여 있을수 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지 않습니다. 여기 이 백성들은요, 심히 즐거워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즐거워 했습니까? 그 말씀을 43절에서 보십시요.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 하게 하셨음이라" 얼만큼 즐거워 했습니까? 부녀도 즐거워 했고요. 어린아이도 즐거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녀노소, 여기 참가한 모든 사람이 즐거워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즐거워 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이거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즐거워하는 소리가요, 이 성벽을 이제 두 무리가 행진하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즐거워하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그들이 누리게 될때, 그들은 그 마음 속에 있는 느낌을 입으로 표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사방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가요, 멀리까지 들렸다. 이거 참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느헤미야서 1장 말씀을 보면 페르시아에 있었던 느헤미야, 술관원인 느헤이먀는 마음 속에서 언제나 쓸쓸했지요. 예루살렘을 한번도 가 본적이 없었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현실을 보게 될때, 그의 마음 속에 결코 기쁜 마음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마음 속에, 부담 속에서, 이제 예루살렘에 돌아가고 있는 모든 정보에 대해서 아마 그는 굉장히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정보를 입수 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이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룰수 있을까, 라고 하는 생각을 그는 오랫동안 했을 겁니다. 그 세월이 지나서요. 왕의 앞에 나가기 전에 사개월동안 기도하고, 왕 앞에 나갔을때, 생명을 잃어버릴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 왕의 질문에 답하게 될때, 그는 찰나의 기도를 드렸지요. 왕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또 수많은 원수들이 그를 방해 했습니다. 또한 그의 동족들이 탐심 가운데 이제 그의 일을 발목을 잡았습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 그가 52일만에 이 일을 끝내고 성벽이 완성이 되었지요. 그 이후에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변화된 마음, 이것을 위해서 그는 분투 했습니다. 그는 에스라를 초청했고,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했고, 백성들은 눈물 흘리며 자백하고 기도하며 헌신하고 언약하고 언약에 인을 치고 이 모든 변화 가운데 이제 나타난 것은 기쁨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이 예배는요, 그들 마음 속에 깃드는 겁니다. 이 오랜 기간동안 느헤미야가 꿈꿔왔던,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이 비전이 이제 현실화 되는 것을 그가 보고, 그도 커다란 소리로 외쳤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인도자가 이와 같이 기뻐하게 될때, 함께 동역하고, 함께 일을 위해서 수고했고, 함께 노력하고, 함께 동참했고, 협력했고, 이 모든 백성들도 이제 마음 속에 감격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소리가 주변에 많은 이민족들에게, 그리고 또한 원수들의 귀에도 들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느헤미야서에서요. 위대한 간증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원수를 향해서 발설했던 위대한 간증, 이 간증이요. 환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있다. 오늘날 저희들의 모임은 저희들의 지역 사회 가운데 있습니다. 지역 사회는 우리가 모이고 있는 이 모임의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드려지고 있는, 진실이,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고 있는 예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지역사회는 알고 있는가, 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예배에 관한 간증입니다. 복음에 대한 간증은 어떻습니까? 이 지역사회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기가 죽어가는 지를 모르지요. 그러나 모임은 지역사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끊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부활과 그리고 그 보혈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위대한 용서의 능력과 또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이 모든 것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있는, 알리다 말다, 그리고 도중에 포기하다, 이런거 아니고요.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곳이 여기라고 하는 것을 지역사회는 알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지역사회는요, 이 모임은 이 작은 그룹은, 항상 이곳에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간증입니다. 지역교회의 간증입니다. 모임이 사방을 향해서 큰 소리로 외칠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으로, 이제 매 예배가 새롭고 신선합니다. 매 기도회가 우리 앞에 엄청난 도전이요, 또한 복음을 증거하게 될 때마다, 형제들은, 자매들은 엎드려 기도하고, 영혼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앞에 드리는 이와 같은 준비된, 복음 전도 집회, 그것이 매주,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지역교회, 이것을 주님께서 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봉헌식에서 볼수 있는 것은, 이들의 외치는 함성, 그것은 그냥 커다란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이스라엘 백성이 전에 큰 소리로 외친 적이 있었어요. 언제였습니까? 사무엘 시대에요, 블레셋과 싸울때에 한번 패배하고 난 다음에, 안되겠다. 저 블레셋을 이겨야 되겠다, 그래서 그들은 육적으로 모였어요. 영적인 현실은 사라지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다 없는데, 그들은 육의 힘을 가지고, 우리 한번 뭉쳐서 저들을 격파해 보자. 그래서 언약궤 끌고 나오지요. 언약궤가 나올때 그들은 엄청난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것, 언약궤라고 하는 이 형식이 나오지만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실, 순종과 하나님 앞에 겸손함과 하나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과 이런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져 온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친다 한들, 블레셋은 잠깐 주춤했지만, 순식간에 그들을 격파했습니다. 전에 있었던 거대한 함성,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 있었던 이 함성은요, 그들은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서의 준비서부터 시작해서 이 일을 집행하고 수행하고 완성하고 할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에 이들은 증인들었습니다. 그들은 협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역자 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주어진 위대한 완성의 역사, 그것을 보면서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 감사하고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죠. 여기에 큰 소리가 있었다. 저희들은 저희들의 모임을 생각하게 될때, 모임의 간증이 주변에 힘 있게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고요. 죽어가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요. 주님 말씀 앞에서 말씀을 따라서 성장하고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그래서 증거를 드러낼수 있도록, 우리는 그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제 43절까지요. 성벽 봉헌이 이루어집니다. 거기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일을 볼때, 느헤미야는 일을 추진하고 일을 완성했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의 마음 속에 큰 인상을 줍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아무리 연기해도 늦지 않다.' 우리는 어떤때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반대가 심하고 너무나 어려워서요. 더이상 이것을 지탱해 나갈수가 없다고 생각해서요. 포기하려고 하는 것, 돌아서려고 하는 것, 성경은 얼마나 많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면 합니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도 합당치 않다. 우리가 주님 일을 하게 될때요. 선한 일을 하게 될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고 포기할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심지어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더이상 하고싶지 않다, 할수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그와 같은 순간이 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느헤미야에게도요. 우리는 지금까지 느헤미야 12장까지, 추적해 왔습니다. 그의 생애 속에 특별히 예루살렘 성벽 일과 관련해서 많은 순간에 그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붇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함께 하시는 은혜를 계속해서 그의 마음 속에 역사해 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그는 드디어 일을 이루어 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도중에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성벽 봉헌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요, 한가지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두 무리가, 이 쪽으로 에스라를 선두로 해서요. 떠났습니다. 또 다른 무리는 반대편으로 돌아서 성전에 갔지요.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거기 그들이 행진하게 될때 그 과정을 여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요, 31절 하반절에 보십시요.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느 12:31).
골짜기 문에서요, 분문을 향해서 갑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향해 갑니까?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샘문으로 말미암아 전진하여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느 12:36-37).
그래서 샘문, 그리고 수문, 이런 방향으로 가지요. 그래서 여기 몇가지 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진 과정을 느헤미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 또 다른 그룹은 어떻습니까?
"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 위로 행하여 풀무 망대 윗 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느 12:38).
여기 느헤미야는요, 이 다른 그룹의 뒤를 좇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앞서가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으로 그룹들을 인도했고요.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그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에 있어서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풀무 망대 윗 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풀무 망대 지났습니다.
"에브라임 문 위로 말미암아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그치매"(느 12:39).
보세요. 여기 풀무 망대를 지나서 여기에는 느헤미야서에는 소개되지 않는데요. '에브라임문'라고 하는 문이 소개 되고 있죠. 에브라임 문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나서 옛문을 지나서 어문, 그리고 하나넬 망대, 그리고 함메아 망대, 그리고 양문, 그리고 어디입니까? 그 다음에 '감옥문'에 이르렀다 말씀합니다. 양문 다음에 감옥문이 있습니다. 이것도 여기에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당시에 문이 열두개였습니다. 여기 3장에 기록된 열개의 문 뿐만 아니라 에브라임문과 감옥문이 있었습니다. 열두개의 문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요,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두개의 문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는 열두개의 문인데, 이때는 열개의 문을 기록하고 있다. 열개라고 하는 것은, 항상 성경에서 인간의 책임을 말합니다. 십계명,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책임,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한 책임, 책임입니다. 그런데 열둘이라고 하는 수는 행정의 수 입니다. 우리가 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새 예루살렘에 성문이 열두개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명확하게 열두개의 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고 그분께서 통치하시는 때입니다. 그분께서 통치하실때, 그때는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겁니다. 완전한 행정이 있을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 행정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의 행정에는 오차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고 그 왕국을 이루어 나가시게 될때, 그 성은 아름다운 성입니다. 그분께서 다스림은 완전한 다스림입니다. 그래서 그 성은 문이 열둘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시대에 성은 열개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을 말한다면, 우리의 책임이 주님 앞에서 어떠한 것인가? 성을 건립하는 일에 있어서, 성벽을 건립하고, 성문을 다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느헤미야서에서요. 물리적으로 성벽과 성문의 건축뿐만 아니라 또 성민들의, 헌신적인 모습, 예배하는 모습, 신령한 모습, 이것으로 그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헌신하는, 이와 같은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될 책임, 우리는 이것을 보아오죠.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읽게 될때, 앞으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통치하실 완전하신 그분, 완전한 통치가 도래할 것을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고" 그분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합니까? 그때 통치는 완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열개의 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강림을 앞두고 우리 이 땅에 살면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갖춰야 될 책임이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책임을 우리는 느헤미야서에서 계속해서 지금까지 보아 왔습니다.
이제 43절까지 봉헌식에 관한 모습을 끝내고요. 44절서부터 마지막절까지 이 봉헌식이 가지고 오는 결과가 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성벽 봉헌의 결과는요. 영적인 지도자, 레위 사람들과 또 제사장들을 위해서 그들을 돌보는 일, 그들을 지원하는 일, 이런 일들이 있었다. 라고 하는 점을 이 말씀은 저희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그날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그날'이 있고요, 그 다음 13장 1절 말씀에도 '그날'이 있습니다. 이 그 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날인가? 이것은 하루가 아니고요. 한 동안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그 날에 있었던 일은 첫번째, 영적인 인도자들을 지원하는 일이 있었다. 이미 10장에서 성전세를 낸다고 언약했죠. 또 화목을 내고 또 첫 열매를 가져오고 그리고 십일조를 주님 앞에 드리겠다. 그래서 성전의 일이 중단 되지 않도록 하겠다, 라고 하는 다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을 체결하는 일에 그들은 인쳤죠. 그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봉헌식이 끝나고 난 후에 이들은 어떻습니까? 이 일을 지금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성전의 일이, 그것이 중단되지 않도록, 버려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그들은 마음을 쓰고 있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 마음은 지속되어야 됩니다. 특별히 이 봉헌 가운데 있었던 예배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될때, 우리는 합당한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고 우리가 헌신하고 또, 복음을 증거하고, 또 다른 모든 일들을 하기 전에 우리는 예배합니다. 예배는 우리 마음 속에 온갖 일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요,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느 12:44).
여기 보세요. 촌락에서부터 그들은 여러가지 주님께 드릴만한 거제물, 처음 익은 것, 십일조, 밭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곳간에 쌓았습니다. 그 이유가 왜 그랬는가, 라는 말씀을 하게 될때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여기 보면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 때문에 즐거워 했다. 이것은 뭘 말할까요? 이들은 영적인 인도자입니다. 특별히 예배와 관련해서, 성전 일과 관련해서 인도자입니다. 백성들이 이들을 생각할때 기뻐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백성들이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생각하게 될때, 그들을 신뢰 할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믿을 수가 있다. 그래서 성전 일은 계속해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한다, 라고 하는 말이죠. 인도자는요, 신뢰를 얻어야 됩니다. 인도자는 이와 같은 일에 본을 보이고, 또한 헌신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항상 마음에 품고 있고, 그것을 백성들이 알게 될때, 신뢰합니다. 그 백성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안보감을 느낍니다. 백성들은 그것을 인해서 기뻐합니다. 이 당시에 백성들은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방에서, 마을에서, 얻은 것들을 가져 오는데, 곳간에 채우는 일에 그들은 기뻐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것이 없다면요.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지겨운 일입니다. 이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은 종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은 위선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것은 신뢰가 없는 그런 관계에서 반드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회복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을 회복의 절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12장은요, 느헤미야의 사역에 있어서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했던 일들, 그것이 성벽, 성문의 문제이든, 그것이 백성의 변화에 관한 문제이든, 이 회복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 그 변화는요. 그것은 사방에 큰 소리로 외쳐질 정도로 그 회복은 절정에 이루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은요. 제사장들을 생각할 때, 그들을 귀히 생각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을 생각할때, 그들을 귀히 생각 했습니다. 모임을 인도하는 인도자들은, 장로들은 모임의 성도들에게 신뢰를 받을 만한 분들입니다. 신뢰를 받으셔야 됩니다. 서옫들은 장로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들이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는지, 성도들은 마음 속에 헤아릴 줄 알아야 됩니다. 물론 장로들은 희생하고,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영적인 일을 위해서, 온 생애를 바치고, 또한 모든 시간을 드리고, 그 일에 있어서 소명감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될때, 성도들이 장로들을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밤을 어떤때는 샙니다.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생각하게 될때, 때때로 괴로움 가운데 기도합니다.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 성도들이 협조해야 됩니다. 기억해야 됩니다. 격려하는 말을 해야 됩니다. 전화를 통해서 격려하는 말을 하고 인사를 해야 됩니다. 이것은 특권입니다. 모임 안에 이와 같은 관계, 인도자가 헌신하는 것, 본을 보이는 것, 그리고 성도들이 그 일에 있어서 신뢰하고 존경하고 따라가는 것,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보게 될때요. 그것을 지금까지 보아 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인도력을 발휘했고요. 그와 같은 신뢰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다른 영적인 인도자들, 성전 안에서 일하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도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곳간을 채우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즐거움으로 했다, 라고 하는 거죠.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느 12:45).
예배하는 일, 정결케 하는 일, 여기에 힘썼습니다. 예배와요,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과, 정결한 것, 거룩한 것은 뗄레애 뗄수 없어요.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역을 했다해도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으면,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정결케 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정결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결하게, 순수하게 믿고 따라가고, 자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 일을 그들은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습니다. "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여기 보세요. 노래하는 사람, 그 외에도 문지기가 있습니다. 그들도 이와 같은 일에 동참했습니다. "모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다윗과 솔로몬의 명, 이것은 성전 예배와 관련해서, 다윗은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성전 예배가 어떻게 될 것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은요, 성전을 이룬 사람입니다. 이때부터 이제 성전 예배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처음에 오리지날이었습니다. 그 오리지날을 그 후에 모든 사람들은 항상 따라왔다. 하나님의 말씀, 예배에 있어서, 봉사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각종 영역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된다, 라고 하는 점이죠.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두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느 12:46-47).
이 일은, 백성들은 레위 사람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죠. 십일조를 받은 레위 사람들은 자기들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드리죠. 이 원칙은,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언제 지켜졌습니까? 스룹바벨의 시대, 느헤미야때부터 백년 전입니다. 스룹바벨이 이때 돌아왔지요. 그때 지켜졌습니다. 고레스 황제가 이스라엘 보고 돌아가라고, 유다에게 돌아가라고 귀환령을 내렸을때 5만명이 돌아옵니다. 그들은 그때 성전을 짓고자 분투하지만 곧 반대에 부딧쳐서 중단됩니다. 성전 지으려고 노력 했어요. 중단 되었어요. 한동안 지속되었어요. 학개와 스가랴가 일어나서요, 이 두사람이 동역하면서 백성들에게, "일어나라, 성전을 지어야 된다." 이제 판벽한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잘못이다. 이제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와서 전을 지어라." 이와 같은 영감을 불어 넣었을때요. 인도자는요, 영감을 불어 넣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에 잠잠해 지고요. 무력해 졌을때, 두 사람이 일어나서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에너지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분연히 일어나서요. 성전을 드디어 지었습니다. 이때가 스룹바벨 시대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전에 있었던 일들이 지켜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스룹바벨과, 그 다음에 시대가 흘렀어요. 약 백년이 흘렀습니다. 느헤미야 시대, 이 말은 스룹바벨 시대서부터요, 느헤미야 시대는, 이 두사람의 시대는 아닙니다. 그 두 사이의 간극이 있습니다. 이때, 그런 일들이 시들해졌다고 하는 것을 말하겠죠. 느헤미야의 시대에요. 다시 일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놀라운 부흥입니다. 저희들은요, 이 위대한 부흥, 예루살렘 성벽에서 외쳐진 소리가 이방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로 위대한 간증이 있었다. 참 놀라운 시대였습니다.
또 한가지, 13장 말씀에 가면요. 첫 석절에서, 이 봉헌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의 다른 역사가 있었다, 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것은요. 여기도 '그 날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그 날'에, 라고 하는 것. 이것은 하루가 아니고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기간을 말하는데요.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느 13:1).
여기 보세요. 또 다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치 13장 1절을 읽게 될때, 8장에서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에스라가 책을 펴고, 그러면 사람들이 다 일어나고 그리고 말씀을 듣고, 여섯시간이 계속해서 말씀을 듣던 그때를 생각나게 하죠. 그들은 그때 그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그 다음날은 더 알고 싶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찾아 나갔던 역사. 이것이 여기 또 일어납니다.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이르기를" 여기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항상 있지만 새롭습니다. 이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이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영생을 살아가게 될 때요, 영원한 기간을 살아가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샘 솟듯, 새로운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겁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소망이 있어요. 만약에 이 말씀이, 옛 책으로서요. 우리가 읽고 또 읽고, 이제는 더 읽은 것이 없다, 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얼마나 무의미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요, 참 기이한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지고 더욱 더 깊이 알아야 되고 또한 거기서 새로운 것들을 우리가 신선하게 느끼게 되고 이 말씀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저희가 복음을 이야기 하게 될 때도, 이것은 옛부터 있었지만 언제나 새롭다. 언제나 새로운 메세지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은요, 우리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이 백성들은요, 말씀을 전에 읽었지만 또 읽습니다. 그들은 또 발견했어요. 뭘 발견했습니까? 그들이 발견한 것은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에 관한 규례에 관해서 그들은 눈이 떠 졌어요. 여기 신명기 23장 3-4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그들은 영원히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 이 엄연한 말씀이었거든요. 이 말씀을요, 이들은 왜 몰랐을까? 이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우리는 때때로 이런 것들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이요. 다윗, 기억하지요. 언약궤는 고핫 자손이 어깨에 매고 간다. 이거 말씀에 있는데 왜 다윗 시대에 그것을 수레에 실고 갔을까? 그래서 왜 웃사는 쳐서 죽임을 당했을까? 참 기이하죠? 다니엘 시대에, 보세요. 다니엘이 어느날 예레미야서를 읽었는데, 그 말씀 속에서 70년이면 포로 기간이 끝난다. 이거 발견했어요. 놀라운 걸 발견한 겁니다. 어쩌면요, 아니, 그때까지 그가 몰랐을까?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요. 하나님 말씀에서 어떤때는 까무러치게 놀랍니다. 아니, 이 말씀이 여기 있었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 베뢰아 사람처럼잘 살펴봐야 됩니다. 자세히 살펴봐야 됩니다. 그 말씀 안에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발견해야 됩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요, 이날 처음으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에 관한 규례에 대해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요, 이렇게 하죠.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느 13:1-2).
이것은 모압과 관련해서 발람의 이야기, 발람이 저주하려 했지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반전시키셨는가, 이 모든 역사를 그들은 이 모세오경 안에 있는 그 역사를 통해서 발견 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느 13:3).
여기서 이 말씀을 들었을때,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십시요. 몰수히 분리했다. 이 몰수히 분리했다는 말은, 모든 섞인 무리를 모두 다 제거해 냈다는 말입니다. 성별입니다. 민수기 11장 말씀을 보면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올때, 이제 불평이 나옵니다. 그 불평 중에요. 섞인 무리가 불평합니다. 섞인 무리가 만나, 이제 너무나 지겹다. 도저히 이것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다. 그들 마음 속에는 애굽의 먹거리가 생각 났습니다. 그래서요. 생선 외, 수박, 부추, 파, 마늘, 이런 것이 생각났죠. 그래서 만나를 그들은 정말로 역겨운 음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 불평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전염이 됬습니다. 섞인 무리는요, 언제나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겁니다. 섞인 무리는요. 이스라엘 안에 존재했습니다. 그들은요, 혼혈입니다. 그들은요, 애굽에서 살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은 애굽에서 속박 생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의 양, 어린양의 보혈이 흘려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의 보혈의 가치를 그들은 별로 느낌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단의 속박 가운데 사는 것이 그냥 당연하고, 그것은 너무나 우리에게 일상적인 생활이라고 받아들인다면요. 우리는 구원이 필요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요, 속박 가운데 사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그는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섞인 무리는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느날 속박이라는 것은 견딜수가 없다. 이것은 결코 받아들일수 없다. 변화는 언제나 이런 것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느헤미야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이렇게 폐허 된 것, 할수 없다. 이제는 도저히 우리는 할 수 없다.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된다, 라고 생각하고 갔지요. 여기에서 그들은 구원 받아야 됩니다. 이 일에 대해서 느헤미야는 다른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이와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의 이름을 두신 이 성은 이렇게 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서만 역사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비전이라고 말하죠. 섞인 무리는요. 애굽에 있으면서 속박, 익숙했어요. 그래서 어린양의 피,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 재난이 떨어지고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은 나와될 이유를 알지를 못했어요. 따라서 광야에서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의 먹거리가 더욱 더 마음 속에 끌렸습니다. 만나라고 하는 것은 귀찮은 존재입니다. 이제 우리는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런 모든 영향력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평하도록 이렇게 전염이 되었다고 하는 거죠. 우리 가운데, 참된 모임 안에서요. 이와 같은 일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경고했습니다. "내가 떠나가면 흉악한 이리가 우리 가운데 들어와서 이 양들을 해칠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보면요. 거짓 형제가 들어와서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옅보고 우리로 하여금 속박, 다시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그와 같은 상태로 도로 끌고 갈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섞인 무리, 그들을 분리해야 됩니다. 여기에 봉헌의 위대한 역사가 있고 나서요.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도자들을 지원하는 그들의 뜨거운 마음, 즐거운 마음, 또 하나는 어떻습니까? 또 하나는 그들 가운데 섞인 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요. 암몬과 모압은 육이죠. 육을 통한 역사,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것, 이러한 섞인 것들, 이거 제거해야 됩니다. 모임 안의 육적인 활동이요.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활동을 모든 면에서 방해합니다.
그래서요. 저희들은 오늘 이 봉헌에 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봉헌과는요, 기쁨, 찬양, 즐거워함, 그리고 예배, 그런 영, 이것이 여기에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봉헌과 관련해서 그들이 어떠한 회복, 그리고 그 회복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것을 저희가 보았지요. 저희들이 내일 마지막으로요. 13장에 들어가면 느헤미야서가 여기서 딱 끝났으면 참 좋을거 같은데, 느헤미야서는요. 12장에서 끝나지 않고 13장까지 끝납니다. 우리는 13장에 가면요. 다시 슬픈 일들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까? 성경은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오셔서 이 땅을 정화하실 것이고 그분께서 통치하시고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요, 메시아로 오신 사람은 아니었어요. 현실은요, 우리 가운데 영적인 부흥이 놀랍게 일어나게 될때, 또 다시 어려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사사기 역사도 그랬고 열왕기 시대도 그랬고, 이스라엘 역사는 연제나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슬픔 마음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될때, 이것이 현실이라면 우리는 이와 같은 느헤미야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이와 같은 현실을 대처해야 할까, 라고 하는 것을 숙제로 우리에게 남기고 하나님의 말씀은 끝납니다. 그래서 내일 저희들은 13장에서요. 이 위대한 회복, 그 회복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는 마음 속에 두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매진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결론을 얻습니다. 주님께서요. 내일도 계속해서 저희들 가운데 말씀해 주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에게 주신 교훈이 저희들이 주님을 섬기고 모임 안에서 저희들이 성장하고 또 간증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주님께서 저희들 모두를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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