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9일 금요일
한봉래 형제님
< 02. 위로의 근거가 되는 소망 >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벧전1:13).
어제 베드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실일을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하실 일입니다. 고난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본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의 발자취를 좇아가도록 본을 보이실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거부 합니다. "주님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주께 미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고난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고난받을 분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고난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이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말씀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소망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시고 그리스도가 하실일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받으실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러지 마옵소서." 했습니다. 그럴때에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이것이 베드로의 실수 입니다. 베드로가 왜 그렇게 말했는가? 왜 주님이 고난 당하시는 것을 반대 했는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개역성경에는 생각했다고 되어 있고요. 흠정역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일을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너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너희가 땅에것을 생각지 말고 위에것을 찾으라."고 할때 사용된 동사들입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잘못 했느냐? 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반대했는가? 그가 하나님의 일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하실일을 마음에 두고 거기에 애정을 쏟고 그것을 소망으로 삼지 않고 사람의 일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베드로의 소망이 하나님의 일에 있지 않고 사람의 일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에 관한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저희들이 논리적으로도 십자가를 지고갈때 그 길을 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소망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고난을 이길수 있습니다. 고난을 이길수 있는 힘은 소망입니다.
우선 소망이 실제로 우리들에게 해주고 있는 여러가지 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소망은, 내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는 이런 소망은 인생의 여러 슬픈 사건 중에서 가장 슬픈 사건인 죽음을 위로할수 있습니다. 나라 형제님께서 관련된 어떤분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말씀하셨는데요. 최근 저희 모임에도 남편을 주님께 먼저 보내드린 자매님이 계시고 그 자매님의 마음이 쉽지 않은것을 보게 됩니다. 모임에 올때마다 생각이 나고 형제님이 앉아있던 자리를 보게 되고.. 그와같은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런데 데살로니가 4장에서는 이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함께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섬기다가 주님께서 공중에 오시면 함께 휴거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떤 성도가 먼저 죽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슬픔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서로 위로하라. 죽음을 당한분도 위로하고, 우리로 치자면 문상간 분도 위로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하고 위로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위로의 말이 되지 않습니다만, 뿐만 아니라 상을 당하신 쪽에서도 위로할수 있습니다. "너희가 피차 서로 위로하라."입니다. 어떻게 위로할수 있느냐면, 위로가 두가지 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을 능력으로 보존하셨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실때는 주님의 몸을 많은 사람들이 만질수 있었습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옷가를 만졌습니다. 믿음으로 만졌습니다. 우리주님의 몸을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침뱉은 사람도 있었습니다.주님 살아계실때에..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이제 주님의 몸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루십니다. 그리고 보존하셨다가 삼일만에 하나님이 살려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삼일동안 보호하셨듯이 죽은 성도들을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호하신 것처럼 죽은 성도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의 첫번째 내용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내용입니다. 주님 공중에 오시면 순간적인 차이입니다만, 누가 먼저 부활합니까? 여기 죽은자들이 있습니다. 여기 살아있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먼저 부활합니까? 여기도 쌍둥이들이 있어서 일분만에 형 동생이 갈렸다고 하는데요. 그런식입니다. 누가 먼저 부활할까요? 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는 죽은자들이, 먼저 가신분이 ㅇㅇ에 빠질까 걱정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변화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죽은것이 손해가 아니다. 죽었다고 불리하지 않다." 라고 데살로니가전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확신, 주님이 죽은 성도들을 어떻게 다뤄갈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의 가장 커다란 슬픔의 사건에 대해서 주님이 공중에 오셨을때 하실일에 대한 소망이 우리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쓴 서신이 디모데후서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보게 합니다. 보고싶어서 겨울이 가기전에 내게 오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거죠. 그런데 디모데전서 4장 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자기가 세상 떠날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있고 이제 순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죽음을,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수고하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처형될것을 앞둔 사도바울이 그 죽음의 공포와,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길입니다. 죽음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길입니다. 이 죽음의 강을 믿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여러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어떻게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배되어 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죽고나면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는 확신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붇입니다. "나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모든자에게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두가지 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참된 소망입니다. 하나는 주님 임재앞에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는것. 이보다 더큰 소원이 성도에게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의의 면류관 입니다. 성도들이 소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가 없는 곳, 그 죄가 극복된 곳, 죄에대한 승리가 보장된곳, 그곳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신분적으로 용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서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죄를 미워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죄가 더이상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는것, 이것이 그의 소망입니다. 이 두가지 소망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차가운 로마 감옥에서 자기의 처형될 날을 담대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가지 불행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기도 하고 홍수가 나기도 하고 여러가지 사고가 있습니다. 그때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어떤일이 벌어져도 나는 주님이 있는곳에, 죄가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는 곳에 간다라고 하는 확신, 그리고 내가 죽으면 주님 공중에 오실때까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호하셨듯이 나를 보호하시것이라는 소망의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담대한, 이 죽음의 재앙의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를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기꺼이 견디게 해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요한일서에 이와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소망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서의 죄의 문제를, 죄에 대한 승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공중에 오시면 내가 주님을 뵐 것이다. 그때내가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 있을 것이다. 이 약속의 소망을 가진 사람이 죄로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이 주는 두번째 기능입니다. 소망은 첫번째로 고난을 능히 견디게 합니다. 어떤 불행한 일이 있어도 그는 능히 견뎌 냅니다. 두번째, 소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읽을때마다 어떻게 이럴수 있었을까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22장에서 요구하십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때에 참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며 그 구절을 읽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좇아 어떻게 순종했는가를 읽으면 이제 마음에 파장이 커져갑니다. 그가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산에 이르렀을때 이제 하인들을 그곳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둘이 나무와 불과 칼을 가지고 산을 올라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들어보면 놀라운 발언을 하는데요.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아이와 함께 저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고" 우리식으로 표현 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지금 이삭을 죽이러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합니다.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수 있었던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소망입니다. 돌아올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은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삭을 죽이면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려내리라. 왜냐하면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낳을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준 아이 입니다. 그래서 이를 죽이면 하나님이 다시 살려낼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리라 하는 이 소망을 가지고 그는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다른 의심과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는 이 소망의 모습을 또 이렇게 표현 합니다. 산을 올라가고 있는데 이삭이 아무리 봐도 이상한 거예요. 나무도 있고 불도 있고 칼도 있습니다. 번제를 드릴수 있는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 제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묻습니다. "제물을 드린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어떻게 대답하지요? 그가 소망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것은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실 것이다." 이 소망입니다. 이삭의 그 질문앞에 아버지로서 반응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반응할수 있는것, 소망 때문입니다. 소망이 그를 정결하게 지켜준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소망은 우리를 정결케 하는 힘을 줍니다.
세번째 입니다. 소망은 우리를 참된 믿음으로, 참된 진리로 이끌어 갑니다. 참된 하나님의 의도를 보게 합니다.
이 예를 다시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가 병든 대목인데요. 스토리를 아시지만 잠깐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 하십니다. 명절에만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명절때만 오십니다.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십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십니다. 명절에 오셨던, 예루살렘 근처의 사역을 요한복음이 많이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오시면 주님이 머물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머물기를 좋아하셨던 집이 있습니다. 이것이 베다니 마리아의 집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약간 떨어져 있으면서,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소음에서 떨어져서 하나님과 교제할수 있는 복된 장소,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가정을 열었던 그 복된 가정에 머물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가정에 머물지 못하시고 움직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하인을 보내 소식을 전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셨는지. 이 소식을 전하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이렇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곳에 죽음의 위험이 있을찌라도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오실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지 않고 말씀만 전해 오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이 병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 이 병을 통해서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심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은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병을 통해서 예수님이 영광을 취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라고 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상과 달리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간지 사흘이 되었기 때문에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이제 절망입니다. 이제 더이상 소망이 없는 지경까지 간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십니다. 다시말하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음은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왜 주님께서 오지 않으셨을까?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가? 그래서 주님께서 오셨을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혹은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먼데서도 고칠수 있습니다. 주님에게는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에 왕의 신하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고치십니다. 로마의 백부장도 그 종을 주님께서 가지않고 고치셨습니다. 주님께서 꼭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못오시더라도 그곳에서 나사로를 고치실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그 기록을 보면 압니다. 주님이 일부러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이때 이런일이 벌어졌을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이 이해할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오히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을까요? 이들의 마음을 역전시키는 일이 뭘까요? 소망입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미 다 늦어버린 시점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나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이 말을 믿느냐?" 주님이 생명이요, 부활이신 것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믿습니다. 주님이 살리실수 있다는것을 믿지 왜 안믿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이 모든 믿는자를 살려내시는 그 마지막날에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거죠. 그런데 베드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까 1절에서 읽은대로 산 소망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고난에 들어갔습니다. 주님을 세번 부인하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나서 돌이킨 후에 그는 이제 고난받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고난이 오히려 그 믿음을 강화하도록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런데 그 고난을 견딜수 있도록 하는것이 소망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 소망이다." 산 소망은 무슨뜻이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헛된 소망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지상에 속한 소망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하늘에 속한 소망인데 이건 어떤 특징을 갖냐면 그 소망이, 소망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의 소망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고난속에, 우리의 어려움속에 우리 마음의 의심속에 역사하는 소망입니다.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바꾸어내고 죄를 짓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산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요 부활이신것, 믿는자는 죽어도 사는것, 그것이 마지막날에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이루어진다는 그 소망 때문에 오늘 나사로의 죽음에 적용될수 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주님이 왜 안오셨는지, 주님이 어떻게 이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실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할수 있는 키가 소망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아있을때 소망이 있다. 숨이 귾어지지 않아야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때 오셨습니다. 절망일때 이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이제는 나사로를 살려낼수 없다. 이미 무덤에 들어갔을뿐 아니라 썩어버렸다. 그때 소망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알레고리컬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 가운데, 저희들의 마음속에 있는 많은 문제 가운데 사실상의 문제는 우리가 절망이며 죽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았기에 아직도 살아있기에 아직도 절망속에 들어가 있지 않기에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다리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제 아무런 소망이 없을때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생명이요, 부활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이 어떤분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주님께서 하나님이신것이 입증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나님이신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사로를 살린후에 사람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하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볼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자기가 절망적인 죄인인것을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인것을 아는데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을 통해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저희들이 배울수 있는것은 주님께서 일부러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을 막게 하시고 그 자리에 오셔서 주님이 누군가, 믿을수 없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다. 살아서 믿는자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공중에 오실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주님 공중에 오실때 살아서 믿는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이십니다. 믿고 죽은 자들은 그날 부활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오실때에 입증될 그 주님, 그 주님에 관한 소망이 주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 지금 죽은 나사로를, 지금 죽어버린 나의 오빠를 그리고 왜 주님은 오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마음속에 드는 여러가지 갈등을 능히 해결할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것을 산 소망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소망에 대해서 잠시 보시겠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행26:1-3).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하고"(행26:6-9).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는 과정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체포되고 가이샤라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인데요. 베스도라는 유대 총독이 새로 부임 했습니다. 전임총독 벨릭스가 남기고 간 문제를 자기가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사도바울이 재판을 받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이야기 해봤더니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 문제가 종교적인 문제라고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는가, 아닌가, 이분이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이것이 종교적인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별로 개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끌고와서 자꾸 자기들의 법대로 재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 어디서 재판 받을래?" 그랬더니 로마인이고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로마 황제에게 보내야 합니다. 로마 황제에게 보낼때는 죄목을 써야 합니다. 만약 사도바울이 반역죄라면 로마제국에 해를 끼치는 일을 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조서를 써서 보내면 됩니다. 그러면 로마황제가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도바울이 그와같은 반역죄가 아니고 종교적인 문제라면 로마황제더러 어떤 교리가 맞는지 재판해 달라고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하면 로마황제가 화를 내겠지요. "이런문제를 나에게 가져오느냐?" 할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이런문제를 잘 아는 아그립바왕이 그의 유대총독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서 왔기에 사도바울의 문제를 꺼내고 의논하고 다시 재판을 연것입니다. 이 연것은 무엇이냐면, 어차피 로마황제에게 갈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에게 이 사람의 죄목을 어떻게 쓸 것지, 이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재판을 연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잘 압니다. 사도바울은 로마황제앞에 가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 재판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것은 이미 로마황제를 겨냥해서 한 말입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말하는 것이기에 세상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세상을 향한 복음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인지 말해야 합니다. 이 복음은 정치적이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야기하지 반역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복음은 무엇이 그 기본핵심 내용일까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해주신 소망이 있는데 그 소망때문에, 그 소망을 간직하고 그 소망을 전파하고 그 소망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세상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분명하게 소망을 말씀하셨는데, 이방 민족들은 이 소망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체적으로 계시된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의 소망입니다. 나는 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소망을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셨다고 믿고 있다라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소망이 무엇이냐면, 저희들이 전부 바라는 것이죠. 공평한 세상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대접받고 권선징악입니다. 악한 사람이 처벌받고 옳게 행동한 사람이 상을 받는 세상을 우리가 그립니다. 그러나 그런일은 안일어납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이 옳은일을 했지만 손해 보기도 하고 나쁜짓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공평한 세상은 언제 올까요?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메시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분이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다. 그때 공평과 의가 충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 죽은 사람도 들어갈수 있다. 메시아를 믿고 소망한 사람들이 부활하여 그 나라에 들어간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부활하셨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이며 세상을 향한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왜 하나님이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을 믿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그리고 그는 간증합니다. 부활의 증거가 있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세가지 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첫번째 증거는 비어있는 무덤입니다. 이 땅이 증거 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무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는 그분들의 시신이 있습니다. 물론 흙으로 돌아갔겠지만 시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무덤만은 비어있습니다.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하늘의 증거입니다. 천사들이 주님의 무덤앞에 서서 증거했던 것입니다. "왜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래서 두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하늘의 증거 천사, 이땅의 증거 빈 무덤, 그리고 세번째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일어날수도 없는 변화가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소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평가받을것을 생각하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전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4장에 보시면 모임에서는 말씀을 통해서 덕과 권면과 위로를 나타냅니다. 덕은 무엇이냐면 소망에 관한 것들을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면은 이와같은 소망을 근거로, 이 소망이 죽은 소망이 아니고 이 소망이 산 소망이므로 우리들의 오늘의 삶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것이 권면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소망을 따라 살때 세상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위로 입니다. 그래서 모임에서 세가지, 말씀을 통해서 세가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덕과 권면과 위로 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저희들에게 이같은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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