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8년 여름 수양회

< 뉴욕 플러싱 수양회 14_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 >

박이레 2021. 7. 24. 15:42

< 뉴욕 플러싱 수양회 14_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 > 한봉래 형제님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1-7).

주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해서 예언 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여러가지 특징들을 말할 때 에 그 중에 하나가 가장 위대하신 분 입니다. 주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 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높이십니다. 어떻게 높이시냐면 하나님 입장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가 침례 요한, 그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 침례 요한을 6개월 먼저 보내시고 그를 통해서 주님을 소개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다"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십니다. 이번에는 주님에 대해서 천사를 보내서 "주님이 가장 위대한 자가 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이시면서 사람 이십니다. 우리는 그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주님의 위대함을 구약성경 아가서는 이렇게 노래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전체가 아름답고 만민 중에 뛰어나다."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저희들이 주님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주님의 어떤 측면이 위대한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주님 스스로 "내가 성전보다 크다" 주님이 자기 자신을 비교 합니다. 여기 성전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는 헤롯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위대한 건물 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 하십니다. "내가 성전보다 더 크다." 그래서 주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서 하신 말씀, 시간이 허락되는대로 다섯가지 정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첫번째가 마태복음 12장에서 주님께서 성전보다 더 크다라고 하신 말씀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스토리는 아마 성도님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셨습니다. 길을 가실때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밭에 있는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밭의 모퉁이에 있는 이삭을 먹은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면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이삭이라고 하는것이 껍질이 있죠. 그것을 벗겨야 알곡이 나와서 먹는 거죠. 그래서 그 이삭을 벗기는 일을 했을 때, 이를 파파라치라고 하나요? 유명한 연예인이 있으면 뒤쫓아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이들을 추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일 하는가, 병 고치는가를 보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처음으로 충돌한 것이 요한복음 5장입니다. 그리고나서 계속, 바리새인들이 아주 신경이 곤두서서 이제 시비를 걸기 위해서, 그들의 문제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추적 하고 있었습니다. 딱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합니다. "아니, 안식일인데 왜 일하십니까? 제자들이 왜 일합니까? 왜 그걸 놔 두십니까?" 그럴때 주님께서 대답 하십니다. "내가 성전보다 크다." 그 전에 주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잘 읽는 사람들 입니다. 성경을 암송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분들이죠.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다윗이 시장할때에 한 일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그들에게는 모독적인 표현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맨날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루종일 읽는 사람들 입니다. 성경 전문가들 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너희들이 눈으로 읽었어도 실제로는 읽은 적이 없다." 성경을 눈으로 보지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읽는 것입니다. 사울이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사람들과 함께 도망 갑니다. 그때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 성막에 아비아달 제사장이 있는데요, 그 성막에 먹을 것 이 없으니까, 진설병, 진설병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누어져 있죠. 레위인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그 다음에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있죠. 그래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었습니다. 주님은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다윗이 도망 가다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데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주십시요." 그랬을 때, 제사장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이 있다." 라고 했을때 다윗이 그것을 먹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는것이 옳지 않을까요? 굶어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는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제사장만이 먹게 되어 있는데 다윗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고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제자들도 마찮가지 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배가 고프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밀 이삭을 비벼 먹어도 됩니까? 그래서 구약성경에 다윗이 행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이것을 먹은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희들이 한번 이해 해 보겠습니다. 왜 다윗은 그렇게 했을까요? 나중에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성막에 뭐가 없었느냐면 언약궤가 없었습니다. 언약궤는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사장이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엘리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져서 뺏겨 버립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막에서 핵심은 무엇 입니까? 성막은 여러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지요. 그런데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것 이 무엇입니까? 성막은 성전과 마찮가지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지성소 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거하시는 곳입니다. 지성소입니다. 그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지성소 위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구름 기둥이 뜨면 그들이 따라가고 기둥이 멈추면 그들이 멈춥니다. 그들의 행진을 하나님이 인도 하셨습니다. 사막입니다. 낮에는 덥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름 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밤에는 춥습니다. 불기 둥이 그들에게 난방 장치를 해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가 있는 이곳이 어디냐면 지성소 입니다. 이게 성막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진설병도 있고 등대도 있고 다른것도 있지요. 그렇지만 이 성막의 가장 중요한 것, 언약궤 입니다. 그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 성막에는 언약궤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저희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인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리스도인 입니까?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이 이 안에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죄 용서 받고,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을 때, 주님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용서 되고, 우리의 모든 죄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안에 거하십니다. 죄 없는 우리속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해가기 시작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교회는 무엇 입니까? 교회의 핵심은 무엇 입니까? 무엇이 교회 입니까? 거기 주님이 계셔야,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한국에 세계 최고의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는데 여러가지를 따지지 말고 교회라고 불리우는 것 중에서 가장 성도 수가 많은 교회가 한국 서울 여의도에 있습니다. 50만명이 모입니다. 그 성도 수를 자랑하는 교회 입니다. 그것이 교회 입니까? 그렇다면 교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모이면 교회 입니까? 많은 활동들을 하면, 선교를 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 교회 입니까? 교회의 핵심은 무엇 입니까?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마태복음 18장 20절이죠. "내가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이 계시는 곳, 예수님이 계시면 그곳이 교회 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예수님 빼고 많은 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핵심이 무엇인가? 교회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주님은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막에 대해서, 성막의 핵이 무엇이냐, 이게 있으면 성막이 성막 다워지고 다른것이 좀 부족해도 이것만 있으면 성막 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으면 다른것들이 아무리 좋아도 성막의 본질이 아닌 것, 이것이 언약궤 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진설병을 먹을 당시 그 성막에는 언약궤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두번째, 그때 제사장이 누구냐 하면 엘리 제사장이고 그 아들들, 아비멜렉이죠. 원래 제사장은 어떻게 되어있느냐면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아론의 후손들입니다. 아론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비느하스쪽으로 쭉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론은 아들이 넷이 있는데 첫째, 둘째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어버리죠. 두 아들이 남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 계열 중에서 그들은 비느하스 계열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이다말 쪽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대체 됩니다. 결국은 다윗 시대에 사독에 의해서 제대로 제사장이 섭니다. 그래서 이 성막은,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던 그 성막은 뭐가 문제냐면 핵심이 없습니다. 첫번째, 언약궤가 없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이 세운 제사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사람이 제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교회를 볼때, 어디가 교회 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계십니까? "두세사람이"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이름으로" 혹은 주님에게, 주님이 누구며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감사와, 그것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을 때 주님이 그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 중심으로 모일 때 사람들은 다 엎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다 너울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는 주님 말씀 만이 존중을 받으며 주님의 위대함 만이 우리를 충만케 하며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모이는 이유가 주님 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목적이 주님이며 우리를 모이게 한 것이 주님이며 이때 주님이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제사장 기능을 합니다. 떡과 잔을 놓고 형제들은 일어나서 입술을 열어 감사를 드리고, 구약에서는 제사장들이 짐승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제 성도들이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아름다움, 주님의 위대함을, 주님의 탁월함을, 주님의 비교할 수 없는 영광, 마음으로 아니고 입술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제사가 드려 집니다. 자매님들은 잠잠하게 아멘으로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게 성막이고 이것이 지역모임 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 주님께서 구약의 다윗의 사건을 이해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우리 모임만 교회인가? 너무 그렇게 독단적으로, 다른데도 교회 아닌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데, 자기만 옳다고 하는가?" 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 합니다. 우리만 옳다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하는 모든 분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구원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그곳이 교회 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 합니다.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 입니다. "너희는 성막의 가장 본질적 특징이 무엇인지 아느냐?" 또 하나님의 임재는 없고,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에게 언약궤를 만들 때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고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리라" 하나님이 거기서 만나 주시고 거기서 말씀하시는 곳이 언약궤 입니다. 그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형식을 가지고 종교적인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어떤 의식을 실행하고 있는곳이 성막, 그것이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던 상태 입니다. 그 상태가 지금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고 계신 것,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주님을 주로 받아들인 사람들과 함께 있는것이 비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번째를 보시면, 안식일에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없다. 안식일에 일을하면 안되지요. 그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안식일에 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누가 일하느냐고 하면 제사장이 일합니다. 율법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죠.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8일을 계산했더니 안식일과 겹칩니다. 그러면 뭐가 우선적으로 적용 되어야 하죠? 안식일 인가요, 할례를 해야 한다는 법인가요? 이런 것들을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했던 겁니다. 사람의 규례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매일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가서 진설병을 갈고, 등대 심을 갈고 이런것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식일 날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안식일에 진설병을 갈까요? 성전 안에서 제사장이 일을해도 무방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원칙을, 이미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는 구약의 그 원칙을 이렇게 적용합니다. "내가 성전보다 크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 갑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면, 이제 예수님이 주인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예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성도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건 모임 안에서건 성전보다 크신 주님 안에서 제사장들이 평상시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일을 해내듯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적용해 보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주님이 하라고 한 일을 하고 있는가? 이 말씀이 우리에게 대한 적용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닌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것은 이렇게 해석 됩니다. 안식일에 뭘 하고 뭘 하지 말지는 너희들이 정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만든 내가 정한다. 안식일에 뭐는 하면 안되고, 할례는 해도 되고 다른 것은 안된다. 그들에게 무슨 권한이 있습니까? 그들이 무슨 권위로 그렇게 정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원칙입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내가 정한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안식일을 만들었고 안식일에 무엇이 가능한지를 내가 안다. 내가 제자들에게 안식일에 밀을 비벼 먹는것을 허락했다." 이게 주님 말씀 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우리의 생애 가운데, 혹은 우리로 인해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성전보다 크다." 두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38-42).

주님은 자신을 계속 비교 하셨습니다. 요나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솔로몬보다 크신분입니다. 요나보다 크다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당신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증거를 보여주십시요. 그리스도만이 하실수 있는 기적을 우리에게 해 주십시요." 그런데 이게 참 문제 입니다. 주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병든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자를 살리고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아까 본 대로 말씀 한마디로 "아들이 살았다." 이 말씀 한마디로 저 동쪽에 있는 왕의 신하의 거의 죽게된 병든 아들을 살렸습니다. 이것을 사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마술사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신 생명을 창조하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기적을 더 추가하라. 예수님을 기적 행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어떤 기적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 또 다른 기적을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죄인이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계속 기적을 구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요나의 표적은 무엇일까요? 주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게 최고의 표적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있다가 다시 나와서 니느웨에서 전도 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요나는 싫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특이한 선지자 입니다. 하나님의 임무를 거부하고 도망간 선지자 입니다. 그래도 그는 이제 니느웨 성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다녀야 하니까 하룻길만 말합니다. "사십일 후에 성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니느웨가 회개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징계를 연기 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자기 사역의 성공을 싫어한 이상한 선지자 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주님도 음부에 계시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 표적, 이것이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제시하는 표적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들의 마음을 변화 시키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을 변화 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은 어떤 것으로도 변화될 수 없는 사람들 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나를 위한 죽음을 거부 한다면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부활 하신 주님을 거부 한다면 그들은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개 해야 합니다. 표적을 구할 일이 아니고 회개 해야 합니다. 누구보다 더 회개 해야 하느냐? 니느웨 사람보다 더 회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복음을 듣고도 회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 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표현 입니다. 계속 예수님에게서 기적을 원하고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나를 위해 사용하라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위한 존재여야 하고 그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 서지 않습니다. 자기가 중심에 서 있고 하나님이 나를 섬기는 자가 되게 만드는 것,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앞에 왔을 때에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릎을 꿇고 거룩한 분 앞에서 신을 벗고 자신을 살피고 이 분 앞에 "나의 하나님" 하고 고백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보다 낮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십시요, 그러면 내가 당신을 하나님이라고 인정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입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저희들은 이렇게 적용 해 보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회개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구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여호와께 있다는 것을 자백 합니다. "그리고 내가 비록 물고기 뱃속에 있을찌라도 다시 하나님을 찬양 하겠나이다." 이게 요나의 기도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 해야 합니다.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멸시 하리라" 우리는 예수님을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은 믿는데, 예수님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회개한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요나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그 분의 위대함을 기뻐하고 영광스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솔로몬입니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 먼 곳에서부터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하십니다. "솔로몬보다 더 크다." 솔로몬은 참 지혜로운 사람 입니다. 잠언의 대부분을 썼고, 또 아가서를 썼고 전도서를 썼습니다. 그 당시의 솔로몬의 영광이 참으로 놀라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나가서,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솔로몬이 지혜를 구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구하는 그 장소가 어디냐면, 기브아, 다시 말하면 언약궤가 있는곳이 아닙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굉장한 상징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그가 행동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산당에서 그 마음이 하나님의 임재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느냐면, 그가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서 우상을 짓게 합니다. 심지어는 성전 안 에까지 그 이방여인의 우상이 세워 집니다. 거기에 비해서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버지의 품 속에서 독생하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품속에 항상 하나님과 교제했던 분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분입니다. 자기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했던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위대하신 분입니다. 솔로몬은 출발을 잘 했으나 끝이 멸망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과 끝이, 처음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교훈 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 때에 사람의 인정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만 바라보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하라는 일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성 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그 결과가 십자가의 죽음이라 할찌라도 우리는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게 솔로몬보다 크신 주님 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크다 하셨습니다. 요나보다 크다 하셨습니다. 솔로몬보다 크다 하셨습니다. 주님 스스로 자신의 위대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위대한 분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높이는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 합니다. 그분이 명령하시는 것을 순종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요나보다 위대 하다는 것을 압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찬양 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솔로몬보다 크신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우리의 생애를 주님께 드리고 헌신하고 결과 관계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이렇게 위대한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보시고 기뻐 우리의 섬김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 같은 섬김이 저희들에게 계속 이어지기를 주님 앞에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