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플러싱 수양회 15_고난이 필요한 이유 > 한봉래 형제님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0-13).
신약성경에서 특별히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라고 하는 표현을 쓴 곳이 여섯개가 나옵니다. 이중 부정이죠.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강한 긍정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분들이 반드시 알았으면 좋겠다. 이것을 모르면 안된다." 라고하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 표현들을 쓴 부분들을 시간이 되는대로 신약 성경에 쭉 찾아 보겠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여러번 로마를 방문하려고 시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려고 했지만 갈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반드시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만일 무엇을 여러번 어떤 것을 원해서 여러번 시도 했는데 계속해서 길이 막히면 제가 하듯이 하십시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길이 막혔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세가지를 했습니다. 그는 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무심코 자연스럽게 그게 주님 뜻이라고 믿어져서 시도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어? 이상한데?" 또 시도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기도하기 시작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시요. 하나님이 기쁨 가운데 평안한 길을 열어 주셔서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그는 기도를 바꾸기 시작 합니다. 계속 시도하지 않고 이제는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 합니다. 이게 저희들이 어떤 일들이 막혔을 때 해야 할 방법들 입니다. 두번째,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기를 원합니다." 기도의 내용도 그렇지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가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가지 않기도 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드러냅니다. 그는 하나님께 해 달라고 기도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순종 하겠다 하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 다음 세번째, 그는 로마에 가는것이 자신의 부르심과 일치 하는지 조사해 봅니다. 로마에 가는것이 내가 로마에 가서 은사를 사용하여 로마 교회를 세우는 것,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빚진자 인것을 확인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 세가지로 이 사태를 점검해 봅니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해서 주님이 길을 여셔야 한다. 만일 주님이 길을 열지 않으면 기꺼이 주님의 뜻에 순종 하겠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로마를 가는것이 내가 부름받은 것과 일치하는지, 그리고 그는 평안한 가운데 로마로 가는 길을 주님께 맏깁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도바울에게 죄수로 로마에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예상치 않은 방법으로 로마에 가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죄수로 간다해도, 그리고 자기가 탄 배가 유라굴라라고 하는 광풍에 쫒겨다닐때도 그는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을 점검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도했고 주님이 자기의 기도 응답으로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가 로마로 가고있다, 확신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가는것이 자신의 부르심과 연결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는 로마에 가는 길 내내 평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들이 어떤 일을 마음에 소원으로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 처럼 하십시요. 제가 하나님 앞에서 이와같이 했고 평안한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이게 첫번째 입니다. 두번째로 가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8-11).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하나가 아시아에서 아마 에베소 일것입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고린도 성도들도 알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이같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얼마나 심한 화난을 받았는지 사도바울과 같은 분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것이다. 사형선고다. 주님이 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분별 했습니다. 죽음을 각오 했습니다. 죽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판단과 달리 주님이 그 환난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생각한 것입니다. '왜 주님은 나에게 주님이 부르시는것이다라고 느낄만큼의 고난을 주셨는가?'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경험이 자기에게만 둘 수 없고 고린도 성도들도 반드시 이 경험을 공유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만일 저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에 우리 마음속에 탄식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 이것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겪었던 그 경험, 그것을 저희들이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환난을 주실까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저희들이 늘 하는 거죠. 하나님이 이 우주를 통치 하시며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 하시는 분인데,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인데, 왜 나에게는 계속해서 이 큰 어려움이 오고 있을까요? 이게 늘 우리들의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를 고난 속에 집어 넣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너를 나에게 청구했다." 사단이 구약성경에서는 욥을 청구한 적이 있습니다. 욥의 믿음을 시험 하도록 요청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적이 있습니다. "생명을 빼고 다 건드려라." 이번에 신약에 와서 사단이 베드로를 청구 했습니다. "베드로를 제가 한번 까불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쭉정이 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단의 시험에 넘겨 줍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세번 주님을 부인하는 그 시험 속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이 너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노니 내가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 하였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베드로의 케이스를 빗대어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보면 우리가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믿음으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니다. 주님의 중보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이 있고 주님의 중보 기도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우리를 붇들고 있기에 우리가 순종함으로 그 시련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과할 때는 기쁘지 않았지만 고통이 있었지만 그러나 통과한 후에 우리는 그 목적을 압니다. 다른 그와같은 시련을 겪는 형제들을 위로 하도록, 붇들어 주도록, 하나님이 우리로 미리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 후서를 보면 그렇게 사단의 시험 속에 있는 흩어진 나그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가 위로 하는 겁니다. 그들이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생긴 여러가지 핍박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고향에서 살지 못합니다. 자기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타국에서 어려움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들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후서에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믿음으로 서도록, 그는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너희에게 다가갈찌라도 너희는 사단을 대적 하라." 그가 사단에게 넘어간 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위로하고 권면하고 그 시련을 통과해내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은 왜 어려움을 주실까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또 다른 예를보면 사도바울도 마찮가지 입니다. 사도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갑니다. 당시 로마 교회에 사도바울이 체포되고 죄수가 되었다고 하는것을,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행동할까, 그는 재판을 받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것을 다른 성도들이 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합니다.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당대 최고의 전도자가 갇혀 버렸으니 복음이 정체 될 것이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복음이 진보 되었음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복음을 가장 잘 전하고 헌신된 사람이 죄수로 체포 되었지만 복음은 메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강력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면, 사도바울이 만약 로마에 자유인으로 갔었다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시위대라고 하는, 로마 황제를 보호하는 그 직속 부대가, 지금 반역 죄로 왔기 때문입니다. 그를 24시간 감시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증거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계속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가 문제 입니다. 복음은 방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위대에 있는 이 군인들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사도바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힘을 얻어, 용기를 얻어,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확산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어려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고난은 주님의 일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일이 약화되는것은 고난 때문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대했는가, 그 고난이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무너뜨릴 때 약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감당할수 없는 이 고난 속에서 건지신 주님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갔을때에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이 있었습니다. 함께 아마 고린도 회당에 갔을 것입니다. 갔더니 서로 동업자 였습니다. 장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알고 같이 인사하고,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언제 구원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전에 구원 받았을수도 있고 사도바울과 만남을 통해 구원 받았을수도 있습니다. 어째거나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이 사도바울을 함께 오게 하고 그 집에서 고린도 교회가 시작 됩니다. 그런데 이 기이한 일은, 어떻게 두 사람이 거기서 만났을까요? 이 일이 어떻게 시작 됬느냐? 한 사람의 담대한 복음 전도로 이루어 집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원래 로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어떤 사람이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로마 사회에 그 복음의 내용과 영향력이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그 사회를 흔들기 시작 했습니다. 그때 로마의 황제가 글라우디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라. 이제 핍박이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와서 로마인들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흔들어 댄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냥 그리스도인만 빼면 되는데, 구분할 수 없으니 유대인은 다 로마를 떠나라. 그래서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로마를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도바울을 2차 전도여행을 통해, 빌립보부터 쭉 해서 아데네를 지나 드디어 고린도로 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두 사람이 만났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고난의 허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나중에 보면 다시 로마로 돌아가 있습니다. 에베소에 갔다가 로마로 가는데요. 이제 자기들이 어느 지역에서 살고 싶을 찌라도 이것이 자기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로마에서 잘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떠나가야 합니다. 갑자기 재산을 팔고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왜 그와같은 고난을 주셨을까요? "하나님 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사도바울을 만나고 사도바울과 함께 고린도 지역 모임을 세우도록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 다른 성도가 영적인 유익을 얻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고난이 큰 의미가 있다면 내가 고난 받음으로 다른 성도들이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영혼들이 구원 받을수 있다면 고난은 받을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기 생애의 목표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는 것, "내 생애의 목표는 이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골로새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 다음 두번째,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굉장히 놀라운 발언 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를 주님을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나를 괴롭히지 말라, 그러면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사도바울은 고난을 받아 채찍질 받고 맞고 또 도망가야 하고 파선을 겪고 이러한 여러가지 고난 속에서 그 육체에 여러가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육체의 상처를 놓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담대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물론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은 모든 사람을 대속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 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주어진 영광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지는 못할찌라도 다른 사람의 영적인 유익과 지역 모임이 세워지기 위해서 그의 수고와 희생이 필요 했다면 그는 그 자신의 상처를, 육체의 상처를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고난은 우리로 주님을 닮게 만듭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고난을 통해서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 고난을 진지하게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의 발자취를 걷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그 본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신 이유는 첫번째가 우리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두번째 이유,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 받으신 주님의 발자취를 뒤따라 가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때 쓰인 본이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냐면, 애들을 글씨 가르칠때 미리 써 놓습니다. A하면 미리A를 점선으로 그려 놓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실선으로 그것을 이어 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외웁니다. 그 단어를 사용 했습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가 보고 따라가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보겠습니다. 이렇게 고난 받을 때 우리는 이와같은 말씀이 지역모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지역모임의 여러가지 일들 중의 하나가 뭐냐면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함께 고통을 받고, 몸이 그렇지요. 지역모임을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각각 몸의 지체들 입니다. 그런데 몸의 한쪽이 고통을 받으면 온 몸이 느낍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즐거워 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는 원리를 몸이 실행할 수 있도록 고통이 주어진 것입니다. 어느 한 지체가 고통 속에 들어갑니다. 고난을 받습니다. 병에 들어가고 가난하고 헤어지는 슬픔을 느끼고 합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 지역교회가 함께, 고통을 느끼고 감당 하고 위로하고 몸으로서 기능 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또 하나,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를 향해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고난 받을 때,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와같이 고난받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질 것이라고 그가 확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원래 그들이 구원받기 전에도 문제가 많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가 이제 지역모임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교정하는 서신입니다. 그런 것을 교정해 가면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이 교회가 제대로 교정이 될까, 하나님의 교회답게 설까, 이게 그의 가장 중요한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답게 서리라." 왜냐하면 거기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받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고난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것은 그 지역모임이 주님 앞에서 세워질 것을 약속하는 보증 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고린도 성도들이 반드시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1-6).
사도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스라엘의 본 입니다. 구약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가 어떤 측면에서 같은 원리로 가고 있기 때문 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같은 사단의 공격을 받으며 같이 넘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 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고 교회가 경고 받아서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실패 했습니다. 왜 실패했죠? 고린도전서 10장 1절부터는 이스라엘이 가진 놀라운 특권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어떤 특권을 가졌느냐? 구름 아래 있었습니다. 구름이 뭡니까? 구름 기둥, 불 기둥, 언약궤 위에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 입니다. 지역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지만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임재 하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약 백성입니다. 바다 가운데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침례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식물을 먹었습니다.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들이 하늘 양식을 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이 목마르지 않는 생수, 그 배에서 흘러나가는 강 같은 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축복, 맨 끝에 반석, 그리스도,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스라엘이 가진 놀라운 특권이며 신약교회의 뒤지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스라엘을 설명합니다. 그들이 우상숭배하고 또 간음 하다가 삼천명이 죽고 그 다음에 시험 하다가 뱀에게 멸망 당하고 원망 하다가, 이런일이 생긴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특권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이 왜 그랬을까요? 그래서 저희들이 항상 하는 말이죠. 성경을 보면서 '내가 이스라엘 이라면 안 그랬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죠. 정말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면, 그리고 통과 했다면 '나같으면 하나님을 그 다음부터 잘 믿을텐데, 인생 사막길에 구름기둥, 불 기둥이 실제로 그들을 돌봐주고 있는것을 몸으로 체험 했는데, 어떻게 금 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절할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이해할수 없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거꾸로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경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성경은 하나를 이야기 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6).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스라엘이 그렇게 실패 합니다. 그 특권을 가지고도 실패한 이유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그들은 선 줄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특권이, 하나님이 자기들을 백성 삼으시고 그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것이 자기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보장을 한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구원받고 성령이 계시고, 지역모임에서 주님을 잘 섬기고, 아침에 일어나서 말씀을 보고, 저녁에 기도하고, 경건한 가정에서 살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 였습니다. 특권과 책임은 다른 문제 입니다. 항상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두렵고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은 뭐냐면 내 안에 육신이 여전히 있다고 하는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떨림은, 사단이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떨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와 특권을 주셨을찌라도 변함없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한 이유, 놔 버린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입니다. 그들이 악을 즐겨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점이죠. 속이 변화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중심이, 내면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가, 여전히 좋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 하시는데 하지 말아야지, 안합니다. 그런데 자기 중심에서 죄는 여전히 좋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것을 억지로 안하고 있는것은 안됩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죄가 여전히 좋습니다. 세상과 구분 되어 있지만 세상이 여전히 좋아 보입니까? 세상에서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고 꿈을 성취한 사람들이 좋아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속이 변화 되지 않고, 우리의 행동이 변화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 그래서 첫번째 기도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죄의 더러움을 보여 주십시요.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저를 죄 짓지 말게 하옵소서." 가 아닙니다. 물론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죄를 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뭐가 좋지요? 하나님이 좋고 거룩이 좋고,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닌데로 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것을 몰라서는 안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합당한 것들을 알려 주시고 그 지식이 저희들의 삶을 변화 시키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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