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플러싱 수양회 16_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 한봉래 형제님
사도바울이 생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쓴 서신서 몇 군데를 찾아 보려고 합니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딤후 4:22).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를 씁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겨울이 오기전에 너는 내게로 오라"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쓴 서신 입니다. 그 서신의 맨 마지막에 "주님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라는 말로 맺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살아갈 시대, 이제 자기 자신은 주님 앞에 가지만 디모데가 뒤를 이어서 사역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이뤄내야 합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살아갈 시대는 사도바울의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생각 하면서 주님의 은혜가 디모데의 심령 속에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잠깐 저희들에게 적용해 보면요, 저희들이 교리적으로 올바를 수 있습니다. 저희들의 실행이 올바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정신이 우리의 마음의 태도가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런 면을 생각 하겠습니다. 디모데가 살아가는 시대를 사도바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4).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주님 일을 할때, 사람들은 귀를 막습니다. 디모데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어떠냐?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귀를 막습니다. 돌이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즐겁게 하는, 결국은 자기들을 파멸로 이끌, 그런 이야기만 들을 것입니다. 그와같은 시대에, 그와같은 분위기 속에서 디모데가 일해야 합니다. 그때 디모데가 하는 말이 옳습니다. 디모데가 행하는 행동이 옳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디모데의 정신이 옳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보겠습니다. 디모데가 살게 될 시대에 어떤 일들이 벌어 지냐면, 사도바울의 경우도 그런데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딤후 1:15).
사도바울은 지금 현재, 디모데전후서도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을 때 쓴 편지 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고 디모데는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아시아의 수도가 에베소 입니다.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은 가장 오래 머무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삼년간 일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수고를 통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세워 집니다. 밀레도에서 그 장로들을 불러다가 마지막으로 고별 인사를 할때, 여러가지 어그러진 사람들이 안밖으로 일어날 것을 성경은 예고 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두란노 사원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그래서 에베소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 졌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에베소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는데, 그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서 세계 각국에서 여행객들이 그것을 기념품으로 사갔습니다. 혹은, 부적으로 사갔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전에 계시지 않는다." 이 말씀이, 이 복음이 자기들의 사업을 위협하게 되자 두 시간동안이나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반대하고, "위대하다 아데미여" 합니다. 이 복음이 그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에베소 뿐만 아니라 에바브라 디도는, 에바브라는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 갑니다. 골로새 입니다. 아마 근처에 히에라볼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서 모임이 세워 졌습니다. 이 곳이 아시아의 중심이 되는 지역 입니다. 이 에베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고 또 일꾼들이 일어 났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달라 집니다. 기독교는 사도행전에 보면 어떨 때는 세상에 의해서 인정 받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처음에, 사도행전 5장에 의하면 "감히 상종하지 못하더라 그러나 칭송하더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믿지 않았을찌라도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함부로 "나도 믿는다."고 말을 못했습니다. 감히 상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칭찬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있다가 또 영적인 분위기가 달라 집니다. 핍박 하기 시작합니다. 에베소에서 그와 같이 복음이 흥황하고 일꾼들이 일어나고 듣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서 또 분위기가 바뀝니다. 이제 믿는 사람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핍박하는 식으로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때에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을 통해 구원받고 사도바울을 통해 일꾼이 된, 일꾼들이 한명도 남김없이 사도바울을 버렸습니다. 이때 사도바울과 가까이 하면, 내가 사도바울을 잘 안다고, 내가 그분을 통해 복음을 듣고 그분을 통해 교회를 배웠고 그분을 통해 성도의 삶을 알았고, 이렇게 말하면 자기도 잡혀 체포 되고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분위기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는 바울 모른다. 이래서 사도바울을 에베소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모든 성도는 아닙니다. 모든 일꾼들이 자기의 영적인 아비인 사도바울을 버렸습니다. 하나 더 보겠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9-11).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죽기 전에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보고 싶었습니다. 데마도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이 있어서, 주님 일을 위해서 갔습니다. 현재 사도바울의 곁에는 누가만 있습니다. 이때, 이와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듣지 않고 진리를 따르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첫번째 위험 입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그렇게 말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포기해 버릴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그리스도인이 고립할 수 있습니다. "좋아, 딴 사람들 다 그러면 나 혼자서 한다." 아마 물론, 다른 이유 겠습니다만, 히브리서 10장에 있는 대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이제 안 모이려고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다 실망 했습니다. 구원 받았다 할찌라도 진리를 말하면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 말이 옳고 그 실행이 옳을 찌라도 그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가 틀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도 홀로 고립하는 쪽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조금 다른 경우 입니다만, 예를들면 베드로가 세번 주님을 부인 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랬더니 "나도 갈게." 그래서 일곱명의 제자가 같이 고기 잡으러 갑니다. 베드로는 왜 고기 잡으러 갔지요? 주님이 고기 잡는데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는데, 왜 다시 고기 잡는데로 돌아 갔지요? 물론 자신의 실패 때문 입니다. 주님을 세번 부인했기 때문 입니다. 이제 내가 무슨 주님 일을 하느냐? 나는 옛날처럼 고기나 잡겠다. 그런데 혼자 고기 잡으러 가는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물론, 다 도망은 갔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다 "나도 고기 잡으러 갈래." 혼자 낙심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낙심 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밖에서, 또 내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시대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님께서 너의 심령에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 그가 주의 말씀을 말하고 주님의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극단으로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듣지 않고, 따르지도 않고 할 때에 첫번째 우리는 낙심할 수 있고, 두번째 우리는 마음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이 대표적인 사람이 엘리야 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사백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까지 머뭇 거리겠느냐, 오늘날 어떤 신이 진정한 하나님인지 보자.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이 참 하나님인 것으로 하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구약 성경의 하나님, 이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신 것을 입증해 내고 바알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굉장한 일을 한거죠. 그런데 그를 낙심 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기대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전체가 변화될 것이다. 그런데 아합왕의 아내인 이세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엘리야 당신을, 당신이 죽인 선지자처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믿는 신이 벌을 내려도 좋다." 이렇게 엘리야를 협박 했습니다. 이상하지요, 그가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 마음에 실망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게 기도 합니다. 비가 내릴 때에 엘리야가 아합 왕이 왕궁으로 돌아 가도록 하고 그 앞에 그 마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합왕의 마차 앞을 뛰어 갑니다. 하나님은 이 엘리야의 이 내기를 통해서 아합왕과 이세벨 왕가가 변화되고 이 왕가를 무너뜨리고, 이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합왕의 마차 앞에 달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가 도망합니다. 그가 낙심 합니다. 자기 생각처럼 일이 처리되지 않을 때 그가 실망 합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 이것 입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 거죠.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너 왜 여기 있느냐?"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열심이 특심 합니다." 특심 하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외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고, 우리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 하고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우리 밖에 없다.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칠천명을 내가 숨겨 두었다." 그의 자부심 입니다. 그의 교만함 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 시대에 자기 사람들을 숨겨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찌라도 어딘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두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밖에 없다는 안됩니다. 우리는 두가지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실망스럽기 때문에 우리가 낙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데, 말씀을 좇는 사람들은 우리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옳고 우리가 하는 말이 맞다 할찌라도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기를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너의 심령에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빌 4:23).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불일치 입니다. 자매들의 불일치 입니다. 자매님들이 조금 의견이 다른것이 문제가 될까요? 그런 일들은 항상 모임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자매들의 기질적인, 혹은 성격적인, 관점의 차이로 견해가 다를 수 있는거죠. 그런데 그것이 모임을 분열 시키는 문제로 커져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빌립보 교회에게 모임이 하나님의 교회답게 서도록, 그와 같은 불일치에서 건짐 받도록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두렵고 떨림 입니다. 항상 두려움은 우리 속에 육신이 남아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몸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단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또 떨리는 이유는, 사단은 세상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을 넘어 뜨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지는 것을 넘어 뜨리려고 합니다. 그것을 알기에 두렵고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사도바울이 없을 때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있다면 문제가 쉬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없을 때,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기억ㅁ 하면서 사도바울의 본을 생각 하면서 해내야 합니다. 이제 빌립보 교회가 성장하고 그 동안 들었던, 그 동안 배웠던, 그리고 스스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 갔던 이와같은 경험을 근거로 이제 해내야 합니다. 모임을 그와같은 불일치에서 건져 내야 합니다. 이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다툼이나 허영 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다툼은 뭐냐면,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다툼 입니다. 내가 분별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모임에 실행 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툼 입니다. 허영은 뭐냐,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인정 받는다고 하는 것이 허영 입니다. 이게 극복해야 할 적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마음을 품고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뭐냐면 겸손과,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희생 하셨습니다. 겸손과 자기 희생,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야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심령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이 그들의 마음을 주장 하셔야만 이게 가능하기 때문에 그와같이 마지막으로 편지를 끝내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던 사람을 조금만 찾아 보겠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4).
여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의로운 사람 세명을 댔습니다. 노아, 다니엘, 욥 입니다. 에스겔 입장에서 노아는 앞 세대의 인물 입니다. 그의 행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를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문제 없습니다. 받을 수 있습니다. 욥도 마찮가지 입니다. 욥도 그 시대가 아브라함 시대 입니다. 족장 시대 입니다. 그리고 욥의 의가 어떠한 것인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노아와 욥이 의인 이라는데 적극 받아 들이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저희들도 그렇지요. 바울, 디모데, 베드로, 다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입니다. 다니엘은 에스겔과 동 시대 인물 입니다. 함께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바벨론 포로 시키고 그 다음에 다니엘을 뽑아서 왕국에 집어 넣습니다. 이 이스라엘을 식민지 삼은 느부갓네살의 옆에 있는, 바벨론 왕국의 통치자가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버린것이 아니다." 칠십년만에 돌아갈 것이다. 그 증거로 다니엘이 통치자 입니다. 총리가 됬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그들이 살고있는 데가 텔아비브 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의 수도죠, 텔아비브라고 하는 바벨론의 도시, 이스라엘 민족들이 정착 촌을 이뤄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에스겔을 집어 넣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왕궁에서 에스겔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다니엘은 자기가 아는 사람 입니다. 동 시대의 인물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를 어디에 두냐면, 노아, 욥, 배열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을 존경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우리 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그 결정을 내가 보고 알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은 존경하기 어렵습니다. 사도바울은 존경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바울 없이 빌립보 교회에는 모임의 장로들이 세워져 있습닌다. 집사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그들에게 순종 해서 모임에 하나 됨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또 한 사람 찾아 보겠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는데요, 미디안과 싸워서 미디안을 격파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냈습니다. 그랬을 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나옵니다. 누구냐하면 에브라임 사람입니다. 보통, 이스라엘이 둘로 나뉠 때, 사사기 시대는 아직 나뉘지 않았습니다만, 남쪽에서 가장 큰 지파는 유다 지파가 큽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의 가장 큰 지파가 뭐냐면 에브라임 지파 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수가 가장 많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미디안을 격파 했을 때 에브라임 지파가 자기들이 빠지고 무엇인가 이스라엘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시비를 겁니다. "왜 우리에게 연락을 안했느냐?" 그때 기드온이 이것을 겸손하게 처리 합니다."내가 한것과 에브라임 당신이 한것을 비교하면 내가 한 것이 뭐겠느냐?" 에브라임 지파가 뭘 했느냐면 미디안 방백 세명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왕을 잡았지 않느냐? 나는 그냥 전쟁에서 이긴 거고 그 전쟁을 일으키는 우두머리를 잡은것은 당신들 아니냐? 에브라임 당신들이 나보다 더 큰일을 했다." 그래서 문제가 무마 됩니다. 자기를 낮춘 것입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다뤄져야 합니다. 기드온 시대가 끝나고 이제 입다 시대에 다뤄 집니다. 입다 시대에는 미디안이 아니고 모압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때 또 그냥 있다가 전쟁에 승리 했을 때 에브라임 지파가 또 말합니다. "아니 왜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느냐?" 입다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다와 에브라임 지파가 싸웁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가 패배 합니다. 그들의 교만을 하나님이 또 다룹니다. 그들의 겸손치 못함을, 그런데 이 에브라임 지파의 문제점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삿 12:15).
여기보면 한가지 힌트가 나옵니다. "에브라임 땅" 에브라임 지파가 살고 있는 땅입니다. 거기 아말렉 사람의 산지, 에브라임 지역에 아말렉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말렉은 육신을 상징하는 사람들 입니다. 에브라임이 마땅히 아말렉을 진멸해야 했지만 놔뒀습니다. 다시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요..."(삿 5:14).
그래서 에브라임이 왜 기드온 시대에도 그렇게 자기 주장을 하고, 기드온이 하나님이 세운 사람 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용해서 미디안을 한 사람처럼 치게 한 것입니다. 그가 횟불을 가지고, 항아리를 가지고 미디안을 이겼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에서 승복하지 아니하고 "왜 우리 빼고 했느냐? 나는 뭐냐?"라고 했던 것이 교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의 뿌리를 추적해 볼때 거기 아말렉과 연관 되어 있습니다. 아말렉은 육신입니다. 그게 처리 되지 않을 때 교만하고 이스라엘을 분열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사도바울 없이 사소한 문제가 모임의 큰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일치를 이루어 내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도록 겸손과 자기 희생의 길을 가도록, 그래서 항상 성도들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가도록 빌립보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말렉 정복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정복하고 내 뜻이 이루어져야 평안해 하는 이 육신을 정복하고 그리고 내가 나타야만 만족스러워 하는 인간적인 성품들이 정복 되기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속 저희들 가운데 사도바울이 서신서 마지막에 이렇게 쓴 은혜를 구하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참으로 저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행함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되기를, 이 은혜를 구하는 이런 일이 저희들에게도 주어지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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