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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 창세기 35장 21-29절(요약)

박이레 2026. 9. 16. 21:03

성경읽기 : 창세기 35장 21-29절(요약)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이삭의 나이 일백 팔십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창35:21-29, 개역한글)

- 장승훈 형제님 사회 : 35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벧엘로 부르시고 4-5절에서 야곱과 그 가족들의 합당한 반응이 있습니다.
그리고 35장에서는 세 사람의 죽음이 언급됩니다. 리브가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지 않지만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리브가를 언급함으로써 리브가가 과거에 범했던 과오를 성경이 기억하게 하지 않는가 교제했었고요.
그리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얍복강가에서 이름을 주신 것을 다시 재확인 하십니다.(9-10절) 그리고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이삭과 리브가를 떠날때에는 도망하듯 떠났지만 이제 야곱은 거부가 되었고 열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라헬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살펴 보았습니다. 저희 인생이 나그네 길이고 슬픔과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끝이 결국에는 죽음이고 겸손이 그 인생을 살아가야 되겠다고 생각됩니다. 또 라헬이 어떠한 아내였는가, 인간적으로 사랑했던 아내였지만, 그의 생애 가운데 야곱을 매우 위험에 빠뜨릴뻔한 적이 있습니다. 라반의 드라빔을 라헬이 취했었습니다. 라헬은 여기서 죽지만, 그 대신 베냐민을 얻습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부른 이름과 야곱이 그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꾼것을 교제했습니다.

오늘은 21절부터 할것인데요. 르우벤이 라헬의 여종 빌하와 통간합니다. 라헬이 죽었기에 르우벤이 서모빌하와 통간하지 않았나 보시는 형제님도 계십니다. 지난 시간에 조금 교제가 되었지만 먼저 21-22절에 대해서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김윤철 형제님 : 지난시간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처음으로 주어로 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22절에서도 계속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23절에서 다시 야곱으로 불리웁니다. 그렇게 계속 야곱과 이스라엘로 바뀌는 이유는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우리 또한 옛습성과 새 신분이 공존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새 신분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 넘어지고 실패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우리의 부르심은 그 신분에 걸맞는 상태에서 조금씩 성숙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21절에 라헬이 죽은 이후 야곱은 슬픔 가운데서 이스라엘로 불리웁니다. 그는 라헬이 죽었지만 계속 나아갑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같은 슬픔의 시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다시 발행하여" 이스라엘은 나아갑니다. 우리 또한 다시 주어진 삶을 나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22절은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동침한 충격적인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에 대해서 야곱이 들었지만, 어떤 말도, 어떤 조취도 취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언약의 집안 가운데서도 이러한 충격적인 죄악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르우벤의 죄악을 다룹니다. 이처럼 이 죄악은 잊쳐지지 않고 반드시 다뤄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장자의 권한이 요셉으로, 또 통치권한, 왕권이 유다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 전의석 형제님 : 형제님 말씀대로 야곱은 두가지 부분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볼수 있습니다. 아내가 죽었지만 다시 발행해서 나갑니다. 또 하나는 아들이 잘못했을때 분을 내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부분이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꼭 긍정적인 부분만 이스라엘이라고 했다면, 다음 구절을 볼 때에 이스라엘과 야곱을 구분해서 부르는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또 르우벤을 볼 때에 과거 르우벤이 레아에게 합환채를 주었었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레아에게 그 합환채를 청구합니다. 그당시 가정의 분위기가 르우벤이 죄를 범하게 되는 동기와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범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그는 장자의 탁월함을 잃어버립니다. 장자의 권한은 요셉에게, 통치권은 유다에게, 제사장으로 섬기는 것은 레위에게 넘어갑니다. 그는 장자이지만 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저희도 하나님께서 많은 특권을 주셨는데요.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르우벤은 이 일 이후로 르우벤 지파에서 단 한명의 사사나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것을 보게 됩니다.  

- 장승훈 형제님 사회 : 21-22절에서 이스라엘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요. 지난 시간에도 이 부분이 교제가 되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베냐민이 태어난 것을 연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라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존재가 라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헬을 데려가시고 그가 라헬의 묘비를 세웁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 여러가지를 생각할 때에 그의 마음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했다는 표현에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주어로 사용되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르우벤의 범죄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습니다. 매우 분노하고 다스려야 할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를 잊은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23-26절까지 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창세기 기자는 야곱의 열두 아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27절부터는 야곱과 에서가 이삭을 장사지내는 모습입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저는 23-26절의 위치를 교제하고 싶습니다. 왜 이 말씀이 이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는 르우벤의 범죄가 있고, 이후에는 이삭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앞에는 큰 범죄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큰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많은 자손과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모래와 같은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이삭은 수많은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죽기 전에 야곱의 많은 자손들을 보게 됩니다. 이삭은 많은 잘못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족장들 중에서 가장 많은 나이를 향수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통치를 보게 됩니다.

- 김보영 형제님 : 22절에 르우벤이 통간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사실 야곱에게 있어서 이보다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 자기 아내와 통간한 것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율법이 주어졌을때 통간한 두사람은 돌로쳐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범죄입니다. 다윗같은 경우에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후에 다윗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다윗의 첩들을 다른 백성들이 다보는 앞에서 통간합니다. 이런 사건을 좋게 하나님께 모든것을 맡기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도 징계하시고, 또 하나님이 징계하시기 때문에 성도들도 당연히 징계해야 함을 히브리서 12장 말씀을 통해서 봅니다.
그런데 야곱은 침묵하다가 결국 죽을때가 되어서야 아들을 징계합니다. 이를 볼 때에 야곱이 아주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 큰 죄악에서 평안하게 하나님께 그 징계를 맡기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큰 죄악 앞에서는 하나님께서도 징계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3-26절은 야곱의 열두 아들이 나옵니다. 12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한 수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열두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속사역을 완전하게 성취하시겠다는 표현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완전히 구속시켰다는 측면도 있고요. 또 열둘이라는 수는 주님께서 이땅에 초림하셨을 때에 열두 사도를 세우십니다. 또 하나는 교회가 12라는 완전수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취가 된다는 측면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열두 아들들의 이름이 쭉 나옵니다. 이것은 야곱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열두 아들의 세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삭이 죽습니다. 세대가 변해가면서 하나님께서 이어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실 것을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주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 장승훈 형제님 사회 : 남은 시간동안은 29절까지 교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 최재홍 형제님 : 11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요. 21-26절까지 이스라엘의 열두 족장이 완성되는 토대가 됩니다. 르우벤의 범죄가 있었지만, 여전히 장자이기에 첫번째로 불리웁니다. 그러나 그 장자의 탁월성은 그가 잃어버렸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수치스러움이 있었고, 시므온과 레위는 34장에서 잔인한 살육이 있었고, 또 여종의 아들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미들 사이에서도 시기와 질투, 경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야곱의 열두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그 계획하신 바를 그들을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그들의 어떠함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 열두명이 태어난 것을 말하면서, 이 열두명은 복수입니다. 26절에 끝에 "낳은"라고 되어 있습니다. '낳다'는 것이 단수입니다. 사람은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집단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단수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단수로 표현된 것은 야곱의 아들들이라는 집단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열두 아들이지만, 49장에서는 열두지파, 출애굽 이후에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불리웁니다.

- 김보영 형제님 : 35장에서는 세 사람의 죽음이 나옵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 갑자기 죽은 라헬, 또 180세까지 장수한 이삭이 죽습니다. 결론적으로 장수하든 단수하든 사람은 반드시 죽을수밖에 없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죽습니다. 드보라와 이삭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소망 가운데, 평안 가운데, 자기 수명을 다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급작스럽게 죽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속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죽었을 때 그는 가나안 땅에 뭍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시기로 약속하셨지만 아직 성취하지 못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약속의 땅에 장사됨으로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성도가 죽음 이후에 갈 영적인 가나안을 보여줍니다. 그 가는 과정이 성도의 죽음입니다. 또 성도의 죽음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과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 전의석 형제님 : 29절에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뜻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단순히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간데로 돌아갔다는 것인지, 그 위의 데라나 간 사람이 간 곳으로 갔다거나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축복의 말로 생각되어 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의 죽음에는 이러한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은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고 죽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축복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 이삭이 죽은 이후에 에서와 야곱이 장사합니다. 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을때 둘이 장사한 것을 보면 그들 사이에 찬된 화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김보영 형제님 : 27-28절에 이삭이 180세에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실제적으로 헤브론에서 이삭을 만났을 때에는 이삭이 180세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야곱의 나이가 이 당시 108세로 나와 있습니다. 야곱이 이삭을 만난 후 12년을 같이 지내고 이삭을 떠난 것입니다. 야곱이 130세에 애굽의 바로를 만납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9세입니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으로 팔려 갑니다. 39에서 17을 빼면 22가 됩니다. 130에서 22를 빼면 108세입니다. 야곱이 108세에 야곱이 아버지를 만났다, 12년을 모시다가 이삭을 떠났다, 이를 생략한 이유가 뭔가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이는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성경 기자들의 템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108세에 아버지를 만나서 130세까지 아버지를 모셨지만 이를 생략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 최재홍 형제님 : 27절에 마므레가 또 나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마므레가 처음 나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뒤 하나님께서 온 땅을 보여주시며 약속을 재확인했던 장소입니다. 마므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 약속 받은 장소입니다. 이삭은 또 브엘세바를 떠나 헤브론으로 옳겨옵니다. 야곱도 동일하게 헤브론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27절은 이삭의 나이가 180세라고 나옵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 약속을 다음 세대에 넘겨준 것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야곱은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더 삽니다. 사람은 자기의 죽을 날을 알지 못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후 36장은 에서의 계보를 마무리하고 37장부터는 전면적으로 요셉의 내용과 그의 계보에 대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 장승훈 형제님 : 이삭을 생각할 때에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리브가를 아내로 취하는 장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두고 야곱을 축복한 것입니다. 사실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는데 야곱을 축복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이삭을 평가할 때에 '믿음으로' 야곱을 축복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자기의 육신의 원함대로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뜻대로 야곱에게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심을 그가 믿었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특출남이나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드러낸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믿었음을 히브리서가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에서 우리의 모습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특출남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비교될수 없습니다. 그러한 부분에서 우리가 이삭과 비교되고 또 연약함 부분에서는 야곱과 비교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