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8개의 휴거들 / 짐 자비스 형제님 / 26년 9월 5일 토요일
우리는 계속해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휴거'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오늘 이 마지막 시간에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휴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성경에는 단 한 개의 휴거가 있지 않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는 '성경에 기록된 8개의 휴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이 휴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14번에 걸쳐서 신약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은 '하파조'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단어가 이 요한복음 10장에 나와 사용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내 손에서 저희를 빼앗을 자가 없다"에서 그 '빼앗다'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폭력적으로 가로채 가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이 단어를 사용해서 주님의 백성들에게 확신을 주는 그런 구절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손에서 구원받은 자를 빼앗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이 ‘빼앗기는 것’, ‘그 빼앗는 것’을 예를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 첫 번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1. 우리는 여기서 '에녹'의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그는 단지 365세를 살았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그가 아주 젊은 나이라고 생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그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그것이 오리라'라는 뜻입니다. 에녹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음으로써 사실상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900년 후에 그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므두셀라가 죽는 바로 그때에, 그의 손자 노아가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노아가 그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라와 함께 지낸 그 시간들이 어떠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로부터 그의 아버지인 에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심판이 이 땅에 내리기 전에 그 아버지가 어떻게 하늘로 들려올림을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휴거'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휴거될 것을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구약에서는 휴거에 대해서 그 단어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부분은 없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휴거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를 우리는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신약에서도 언급이 됩니다. 우리는 유다서에서 에녹이 예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에서도 그가 언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옮기움을 받았고 죽음을 보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의 가장 첫 번째 책에서부터 '휴거에 대한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또 다른 휴거에 대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에 대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기원 전 9세기경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열왕기상 17장부터 열왕기하 2장까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엘리야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이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린아이였을 때 들은 아주 아름다운 그 성경 이야기였습니다. 그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올림을 받는' 컬러로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참으로 제 상상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 병거와 또 불과 바람 가운데서 들려올림을 받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 병거에서 들려올림을 받고 있으며, 엘리사에게 그의 겉옷을 내려주는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로 들려올림을 받는 그 휴거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이 아니겠습니까? 그 충성된 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그가 처한 환경은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내한 그에게 특별한 명예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구약의 또 다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가 먼저 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한 것은 볼 수가 없지만, 우리는 복음서에서 그가 모세와 함께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휴거를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그 율법을 전한 모세와 함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학자들은 그 모세의 죽음에 대해서 이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사단과 천사장이 서로 분쟁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의 경우에서는 죽었고 나중에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고, 엘리아는 살아서 하늘로 들려올림을 받은 그림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휴거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리고 살아남아 있는 자들은 변화되어 하늘로 들려올림을 받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보여주고 있는 휴거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 12:5, 개역한글)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올려가더라" 들려 올림을 받은 그 단어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하파세'라는 단어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하파조'의 바른 변형 형태입니다. 그것은 '잡아채어서 올려가더라'라는 단어입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우리 주님께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시고 다시 승천하시는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서 이렇게 5절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여기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그 승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다른 한 가지 예를 사도행전 8장에서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전도자 빌립’에 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그를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는 아주 놀라운 그런 환경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놀라운 장면에서 또 다른 더 놀라운 장면으로 그는 옮겨가고 있습니다. 유니게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후에 그는 빌립으로부터 침례를 받게 됩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 8:39-40).
여기 다시 한 번 '끌어간지라'. 하파조라는 그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끌어 간지라', 여기서는 아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이동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휴거를 보여주고 있는 두 가지 장면에서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있습니다. 1). 첫 번째로는 그가 '순식간에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 두 번째로는 '그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휴거에서도 실제로 일어나는 두 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옮겨갈 것입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우리를 다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5. 우리는 다른 휴거의 장면을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3-4).
여기 2절에 사용된 것과 같이 두 번에 걸쳐서 이 부분에 '하파조'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이건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가졌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가 돌에 맞아 죽게 된 이후에 경험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는 거의 죽은 줄 알았었는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 말하고 있는 이러한 경험들이 그때 당시에 경험했을 것으로 우리들은 추측합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실제로 경험한 것들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는 그의 영이 붙잡혀서 들려올림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2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휴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이것을 기록할 때에는 이미 성도들의 휴거에 대해서 서신서에 기록한 후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가 이미 그의 붓에 의해서 기록된 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가 경험한 특별한 경험을 다시 한 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래서 이것을 4절에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들을 때에 '바울이 들은 말이 무얼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말’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늘나라에서는 과연 우리가 어떤 언어로 대화할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확실한 것은 한국어는 아마 아닐 거라는 것입니다. 또한 동일하게 영어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언어고 우리는 그 언어로 서로 대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여기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휴거라는 사건에 준비되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참 놀라운 방식으로 그의 영이 붙들려 들려 올림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몸과 영혼 모두가 그와 같이 들려올림을 받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6. 이제 요한계시록 4장에서 또 다른 휴거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계 4:1-2).
앞으로 이것과 또 다른 하나의 예는 그 안에서는 '하파조'라는 단어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리로 올라오라"라는 그 말씀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이것이 그를 붙잡고 글을 올린 그 힘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러한 말과 함께 그는 하늘로 붙잡혀서 들려올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휴거 때 일어날 것을 참으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과 같이 그는 영이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경험한 영적인 경험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그런 심판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그에게 모두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보게 된 첫 번째 것은 보좌였고 그 주위를 둘러싼 열두 장로들입니다. 우리는 이 열두 장로에 대해서 여러분이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날의 주제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7. 이제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서 '두 증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였고, 그들이 어떻게 죽음을 당하고, 그리고 거리 가운데 그들의 시체가 놓여지게 됐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 시체를 거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흘 반 동안 그것을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도록 막게 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기뻐하면서 예물을 서로 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두 증인의 죽임을 좋아하면서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선물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환난의 중반부에 있는 일입니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계 11:11).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시체에 생기를 넣으시고 그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일어난 12절의 말씀은 휴거의 또 다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2).
우리는 우리가 읽은 4장에서 사도 요한이 들은 그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는 음성이 다시 한 번 여기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시로 그 두 증인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그 불경건한,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그 남은 진노가 내려지는 심판을 시작하는 신호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온 이 두 증인의 사건을 통해서 세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주님께서 오라고 하신 그 말씀을 듣고 올라가게 됩니다. 2). 그들의 몸 자체가 올라가게 됩니다. 3). 그들의 대적은 다시 이 땅에 남아 있게 됩니다. 곧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휴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8.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몸이 공중으로 들려올림을 받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뒤에 남겨져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기록된 그 심판이 남아 있는 자들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휴거가 언급된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데살로니가 4장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교회의 휴거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의아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8가지 휴거의 예를 말씀을 드린 것처럼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그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것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신론자,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 아니고서는 휴거라는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일어나느냐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러한 것들이 모두 과거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이 휴거라는 것이 실제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니다라고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주장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제 '환난 전에 이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그런 그룹이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 가운데 휴거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환난 기간에 중간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환난 후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환난이 다 끝난 후에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부분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직 선택된 적은 수의 사람들만 주님이 데려가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휴거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채 살아갑니다. 구원받았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도 휴거에 대해서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휴거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논쟁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것에 달려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 시간에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을 따라야 되는지, 그 해석 방법을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들이 취하고 있는 그 성경의 해석론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이상한 상상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한 좋은 예로서 한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수십 년 전에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두 그룹이 헌법을 놓고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전통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한 그룹은 일단 '조직 우선'이라고 그룹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두 가지가 어떤 주안점이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그 헌법을 만드는 전통주의적인 방법은 '그 문맥을 문자적으로 염두에 두고 만들어야 된다'였습니다. 그 헌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통주의적인 헌법학자들은 헌법의 단어와 문법과 그 문맥을 이용해서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직적인 학자들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 대해서 살아있는, '생활하는 해석 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현재 상황에 맞게 그 헌법을 해석해야 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해가 가면 갈수록 여러 가지 것들이 더해지고 또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 헌법이 만들어져 있는 17세기와는 지금 현재의 상황이 아주 달라져 있기 때문에 많은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도록 열려져 있는 것이고 그 상황에 맞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서 전통주의적 학자들은 맨 처음에 헌법을 기록한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썼는지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이 전통주의적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그 상황에 맞게, 그때에 맞게 변화돼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맞게 그 단어의 의미를 변경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맨 처음에 원 저자가 어떤 의도로 그 단어를 쓰고 사용했는지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약간 다른 각도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원 저자들’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원 저자' 한 명의 하나님 자신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을 연구할 때에 우리의 지금 상황을 살펴보고 우리의 필요에 맞게 의미를 꿰맞추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을 전할 때 스스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이러한 것들을 좀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나요?"라고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만, "이 시대의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복음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더 다가가기 위해서 이렇게 바꿔봐야 된다고 사람들이 많이 말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취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참으로 사도는 이 땅 가운데 있었던 위대한 전도자 중에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 사도들이 그 복음을 결코 바꾸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가 청중들을 보고 그들의 상황에 맞게, 그들을 위해 다른 관점에서 그 말씀을 전하기는 하였습니다. 그가 회당에서 전할 때에, 또는 성전에서 전할 때에, 그는 말씀들을 그대로, 하지만 청중들에 맞게 바른 각도에서 전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행했습니다. 그는 또한 아테네에서 그 언덕에서 복음을 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다른 각도에서, 다른 시선에서, 그것을 전하긴 하였지만, 하지만 그 메세지의 본질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젊은이도, 또 나이 든 사람도, 동일한 말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 위해서 다른 복음을 사용한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다른 방법들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사용하거나, 여기 한국 분들이 여러 기술들을 잘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손 안에 핸드폰과 또 컴퓨터와 인터넷을 자유로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오용될 수 있는 함정이 되기도 하지만, 이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또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집회를 광고하기 위해서 이런 인터넷을 사용해서 광고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 메세지를 녹음해서 또 유튜브에 제시하기도 합니다. 또한 페이스북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이용해서 광고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편함에 전도지를 넣거나 또 각 집을 방문해서 문을 두드려보고 찾아 뵙고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페이스북에서 그와 같은 복음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도 발견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 이와 같은 전도지를 어떤 지역에 전하게 될 때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서 또 긍정적인 많은 반응들을 얻곤 합니다. 참 여러분께서 한국에서 이러한 기술들을 잘 사용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한 가지 생각해 보셔야 될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앞에서부터 끝까지 순차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많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께서 매주 이 복음 말씀을 증거할 때에 염두에 두고 또 하셔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날에 걸쳐서 복음 말씀을 전하는 그 연속 복음 집회를 또한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주에서 또 6주까지 연속적으로 행하곤 합니다. 우리가 토요일 밤만 빼고는 그와 같은 연속 복음집회를 계속해서 하곤 합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당장 그렇게 길게 어떻게 할지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일주, 일단 연속 집회를 매일 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시작을 하게 된다면, 여러분께서 또 한국에서 예전에는 그렇게 행했다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 말씀을 듣게 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부터 준비 과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들로 하여금 그 준비하는 가운데 기도하고 그들의 마음을 북돋아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초청하고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집회가 일단 시작되면 많은 믿지 않은 자들이 들어와서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단지 여러분에게 제안으로서 여러분이 한번 기도해 보도록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와 같은 복음 전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그 기회가 지금 단축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와 같은 집회를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와 또 좋은 집회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말씀드리고 있는 주제로 되돌아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해석하는 사람의 그 상상력에 맡겨진 해석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식은 '역사적'으로, 또한 '문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그 의미를 해석하는 데 강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돼서 미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예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헌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 오가니스트들은 그들의 상황에 맞게 해석하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전통주의자들은 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그 방식대로 헌법을 해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의 여러 가지 원칙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 또한 스스로 한번 찾아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그러한 방식을 따라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계획의 전체적인 모습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경륜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전체적인 그 틀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종교계에서 이 성경을 이해하는 틀에 대해서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언약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시간에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언약 신학에 많은 해석이 그런 비유적인 해석과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후에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휴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그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휴거들 가운데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는지를 질문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 가운데서 휴거를 믿고 있는 우리들을 조롱하는 그런 조롱 가운데서 많은 격려가 되는 말씀들입니다. 때때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 휴거에 대해서 조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이 성경 말씀을 들어서 이것이 성경에서 독특하게,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들려올림을 받아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난 그 예와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전에 그림으로 나와 있는 것은 한 개인의 휴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거나 또는 두 증인처럼 두 사람에 대해서 휴거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을 그와 같이 들려 올려가실 수 있는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분께서 수많은 개인들을 한순간에 그와 같이 들려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가 온전히 휴거되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휴거가 일어나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뜻이면 월요일 집회 시간에 이 휴거가 왜 환난 전에 일어나는지 분명한 성경적인 증거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제에 있어서 때때로 다른 옆길로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유튜브에서 휴거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한번 하신다면 아주 이상하게 말하고 있는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하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의 휴거가 무엇인지, 그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 이 진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스러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 증거할 때도 이와 같은 휴거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하고 간구하도록 그들을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제가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예로 이것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캐나다에서 수년 전에 저는 텐트 복음집회에서 말씀을 증거하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중에 주일 오전 만찬이 끝난 후에 짧게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복음 집회에서 또한 앞으로 어떤 일들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많이 증거한 후였습니다. 특별히 그런 예언적인 말씀 가운데서 휴거에 대해서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집회가 끝난 후에 밖에 나가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가 잘 알고 있는 장로 형제님 한 분이 저에게 다가와서 말씀을 걸었습니다. 바로 그 모임에 제가 초청받아서 간 모임의 장로 형제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짐 형제님, 사실 우리는 예언에 대한 말씀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복음 말씀을 증거하는 데 집중하시고 예언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에 대해서 별로 반론하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라고 끄덕인 후에 돌아왔지만 사실 저는 약간 혼란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한 세 걸음 정도 걸었을 때 다른 젊은 청년이 저에게 다가와서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 청년 형제님은 "짐 형제님, 당신이 복음 집회에서 그 예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 잘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제가 복음 듣고 구원받기 전에 저의 마음을 정말 구원받아야 되겠다고 강하게 만들었던 그러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걸음을 내딛었을 때 다른 청년이 다가와서 저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 모임에 필요했던 그 복음 전도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모임에서 그와 같이 복음 말씀을 전하는 형제님을 저희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걸으면서 머리를 긁으면서 '아,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주제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저에게 처음 그와 같이 말했던 장로 형제님은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저에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계속 좋은 친구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말씀에 대해서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오늘 집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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