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의 회개 / 짐 자비스 형제님 / 26년 8월 30일 일요일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고후 7:4-12).
사실 오늘 이 시간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또한 복음 집회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이 부분에서 '회개'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요. 특별히 이번 시간에서는 모임 안에서, 이제 '성도들의 회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말씀을 보게 될 때에 그 고린도 교회에 참으로 놀라운 그 변화가 일어났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보게 될 때에 그 모임은 아주 깊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회가 그 안에 많은 육신적인 행동들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바울이 그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웠을 때 그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주님을 영접하고 시작할 때 그런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곧 죄에 빠지고 그리고 그러한 원리로부터 멀어지는 것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회개하고 다시 돌이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때에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욥기에서 그와 같은 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때때로 복음을 전할 때에 회개에 대해서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구약의 두 가지 예가 무엇인지를 물어보곤 합니다.
첫 번째 예로는 인류의 가장 나쁜, 아주 악질인 한 인간을 구원하는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하면서 여러 가지 힌트를 드리고 있는 것인데요. 거기에 므낫세 왕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루살렘을 많은 피로 채운 그러한 악한 왕이고 우상을 섬겼던 그런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마지막 인생의 순간에는 그의 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를 회개하게 만드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다른 한 가지 회개에 대한 아주 좋은 본은 욥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 왕은 인류 가운데 가장 악한 인간의 대표격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었으며,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욥은 참으로 인간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사람의 예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도 다루시고 그로 하여금 선한 회개를 이루게 하십니다.
사실 욥은 아주 큰 고난 가운데서 참 극심한 고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하나님의 목적은 그가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므낫세의 경우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욥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였습니다. 사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채우지 않으면,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의 어떠함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기가 그 장이 절정으로 향할 때에 마지막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잘못을 다루실 때에 그는 죄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입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함을 진정으로 인정하며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형제 자매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분명히 직시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여전히 그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그들의 실행 가운데서 많은 그런 실수와 실패 가운데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너희를 신령한 자들 대함과 같이 할 수 없다. 참으로 육신적인 자들을 대함과 같이 말한다."라고 합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3장 3절에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4장 18절에 보면 그들은 “스스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5장 6절에서는 심지어 그들은 “악한 일을 하는 가운데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도덕적으로 아주 악한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문제없다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6장 8절에서는 “서로 간에 송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지적이 됩니다. 서로를 법정에서 송사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우상에 참여한 것입니다. 11장에서는 또한 그들이 “머리됨”에 대해서 온전히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그들이 “은사를 합당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을 또한 지적했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방언에 대해서 자랑하고, 그것을 잘못 남용하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에서는 그들이 “헌금을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돕는 문제에 있어서 부족함을 지적해야 됐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돕는 그 일에 있어서 함께하는 것을 사도는 촉구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렇게 많은 문제들을 볼 때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임은 너무나 많이 타락해서 '그들이 돌이킬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오랜 세월 가운데 참 그러한 영적인 상태를 가지고 있는 모임들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임들이 그러한 가운데서도 회복하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그 가운데 어떤 모임들은 계속해서 그 잘못된 방향으로 가버리고 떠나게 된 모임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참으로 그들이 회복했음을 사도는 확신 가운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범사에 담대함으로 기뻐하노라."
우리는 고린도후서를 보게 될 때에 참으로 그 교회에 아주 놀랄 만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들은 언제 일어났습니까? 그 고린도전서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와 같은 회개가 일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사도가 보낸 편지가 그들을 화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하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고린도전서를 볼 때마다 이 말을 받는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반영할지,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오늘날 그와 같은 편지를 어떤 한 모임이 받는다면 아마도 그 모임의 절반은 떠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또한 남은 반은 그와 같은 편지를 보낸 전도자를 다시는 초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과장해서 말씀드리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고린도 교회는 그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의 그 당부의 말을 잘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경건한, 그 하나님께 속한 근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조차도 그들이 편지에 이와 같이 잘 반응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였다." 사도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가 바라는 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어쩌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것을 돕는 디도라는 젊은 청년이 도착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도가 기다리고 있는 그 소식을 가지고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6절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6).
그는 그 디도의 옴으로 단지 위로만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 그 '회개에 담겨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선 첫 번째로 그 '회개의 뿌리'라는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후 7:8).
그 근심에 그 회개의 뿌리는 그들이 보여준 그 '근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어떤 잘못을 범해서 우리가 누리고 있던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런 것들에 대해서 슬퍼하고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잘못했을 때, 그로 인해서 그 관계가 훼손되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 슬퍼하고 근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 이상의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했을 때,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 슬픔과 근심을 얻게 된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우리 슬픔의 그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씨는 돌밭에 뿌려집니다. 그래서 그 싹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21절에서 "그 안에 뿌리가 없으므로 곧 말라버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 역시 회개를 가리키고 있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잠깐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그들 자신의 죄의 본 모습에 대해서 직시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입술로 자기들이 한 잘못에 대해서 그냥 많은 말을 하긴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그 뿌리가 없기 때문에 그 뒤를 계속적으로 길게 나오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의 예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몇 주 전에 토론토 인근에 있는 런던이라는 도시로 제가 운전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그 가운데 런던 그 시의 경찰차 옆에 제가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찰차에는 그 창에 이러한 작은 문구가 써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을 많이 하라.' 저는 '왜 경찰차 옆에 저런 말을 써놨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사위가 사실은 경찰이고 그에게 물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어떤 범죄자를 잡는데 한 사람을 여러 번 잡게 됩니다. 그는 마약 경찰이고 그런 범죄자들을 많이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경찰관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경찰로서의 임무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잡을 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에 집중하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범죄자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이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 정당화하는 그런 많은 말들을 그들은 합니다. 그들이 행동한 것에 대해서 가리기 위해서 그들은 많은 거짓말로 짜 맞춥니다. 심지어 심각한 범죄를 하고 있는 와중에 잡힌 사람들도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옳은 것이었는지 감각조차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도망칠 수 있을까라는 것뿐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회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모습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속에 이 회개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이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이후에도 회개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걸쳐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어떤 전도자는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의 모든 교만을 다 내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구원받고 난 이후에 우리가 내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다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마음도 그와 같은 교만으로 다시 채우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래서 '진정한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근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뿌리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한 행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슬픔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슬픔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2. 우리는 다윗이 시편 51편에 이렇게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러한 회개 전에 그 앞에 아주 큰 ‘슬픔’을 그는 토로합니다. 그는 그의 죄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낳은 아기의 죽음으로 인해서 큰 슬픔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그의 죄를 지적했을 때 그는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 큰 슬픔 후에 그는 시편 51편에서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고백하기를 "오직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바로 그 자신이 행한 죄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범죄한 그 실체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 나라의 국가 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마음 깊이 큰 슬픔을 안겨다 준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한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제 다윗의 생애 가운데 완전히 그를 돌이키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그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정한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슬픔으로부터 시작했고, 그의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범죄한 것임을 깨닫게 하였고, 그리고 이제 그는 그의 삶을 180도로 바꾸는 결과를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의 방향’, 그의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다윗을 돌이켜서 다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대로 이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3. 우리는 구원받을 때 그 ‘용서함’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후의 삶을 살면서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다시 한 번 그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또한 자원해서 그것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저의 주위를 둘러볼 때에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참 궁금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용서가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회개하게 만드는 그 슬픔을, 근심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마도 지난 시간에 방문했을 때 이 이야기를 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10대 청소년 때 아마도 14세, 15세 때의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아주 작은 농장에서 자랐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그 농장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들을 판매하는 그런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지역에 많은 농기구들을 공급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옆에 한 헛간에서 돼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형제들과 함께 거기에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을 하곤 했습니다. 다섯 남자 형제들이 있었고 그런 동물들을 마치 애완동물처럼 우리는 다루었습니다. 많은 일이었지만 그들을 잘 돌봐주었습니다.
저는 한 여름날에 저희 아버지의 가게에 가가지고 그분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동생들은 집에 남아서 그들이 해야 되는 가사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아주 더운 날이었고 아마도 제 동생들이 그 가운데서 지루했나 봅니다. 저의 어린 동생이 작은 성냥감 하나를 발견해서, 그 탈곡기 위에 마치 밧줄처럼 걸려 있는 여러 가지 그런 지푸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냥불을 붙여서 그런 것들을 하나씩 이렇게 배워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매달려 있는 그런 지푸라기 실 같은 것은 금세 타 올라가서 천장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허브'라는 동생이 그것을 해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가 성냥불을 붙이고 거기에 지푸라기에 불을 붙였을 때, 거기에 옆에 또 붙어 있는 다른 지푸라기에 옮겨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푸라기는 아주 건초 더미가 잔뜩 쌓여 있는 그곳과 연결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초 안에 그 건초 더미 전체에 불이 붙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다른 나이 든 형제 '테리'는, 제가 지난 시간에 테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죠. 그는 급히 그 위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벌써 불꽃이 그를 향하여 달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전체 더미가 다 불에 붙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른 형제들은 빨리 거기서 나오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오직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헛간에 문을 열어서 그 안에 있는 동물들 몇 마리가 탈출하도록 돕는 일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가게에서 그들의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집에서 저의 아버지의 동업자인 릴리 라는 분이 큰 소리로 지금 집에 불이 났다고 크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저와 아버지는 트럭에 올라타서 7마일을 가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집에 다다랐을 때 그 길에서 이미 그 위에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저희 아버지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표정은 지금 너무나 다 늦었다는 낙심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참으로 아버지 마음 속에 그 아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그 헛간에서 있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었습니다. 집 앞에 있는 도로에 다다랐을 때 그 헛간는 완전히 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헛간에 불이 붙었고, 그 옆에 있는 기구들을 두는 공간도 타버리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펌프 시설 공간도 다 타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헛간 안에 갇혀 있던 그 동물들이 지르는 소리를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 중에 몇 마리는 탈출했지만 대부분은 그 불꽃 가운데 죽게 되었습니다.
저희 형제들은 다행히 다 살아남았습니다. 그 소방관들이 도착했지만 너무나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다른 수백의 다른 이웃들이 그 주위에 둘러와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분들은 저희 아버지께 와서 참으로 이 일이 일어나서 안 됐다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고 그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그 일이 생겨났는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작은 동생 허브가 성냥에 불을 붙인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허브 어디 있니?" 저는 그 순간에 아버지가 '허브한테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잘못을 했고 그 벌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한 허브는 정말 어떤 벌을 받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수년에 걸쳐서 만든 그러한 것들인데 그것을 다 날려버렸다니, 사실 허브는 도망쳐서 숨어 있어서 우리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서 "아버지가 너를 부른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허브가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 부엌 한 켠에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나무로 만든 그 흔들 의자에 앉아서 동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허브는 이제 아버지 앞으로 다가와서 말없이 아버지의 어깨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제 마음속에 아버지께서 그를 아주 심하게 혼내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단지 허브를 품에 안고 그렇게만 계셨습니다. 그리고 흔들 의자를 흔들거리면서 그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제 동생의 귀에 너를 어떻게 혼낼 것인지 말씀하고 있는 줄을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바로 아버지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랑과 용서의 말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너무나 큰 잘못을 한 어린 소년이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가 수년간 수고로 쌓아 올린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아이입니다. 그냥 부주의한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기뻐하는 아버지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지?’ 그것에 대한 질문의 답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제 동생 허브는 그날 아주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그날 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했으며, 그 용서의 큼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저희 아버지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아주 큰 사건을 경험했고 그것을 다 알고 있는데, 이후로는 이것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지 않길 바란다." 그날 이후로 제 동생 허브는 아버지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모든 게 다 엉망이 되었고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서 많은 일이 필요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형제들을 불러서 여러 가지 작업을 시키셨고, 많은 일들이 그 가운데서 행해졌습니다. 사실 저와 제 형은 그러한 가운데서 "아, 좀 너무한데.", "하기 싫은데." 하고 어떻게 하면 좀 피할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허브는 그 아버지 옆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참으로 수년 동안 그 복구 작업이 지속되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49세에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허브는 아버지의 오른팔로서 일을 도와드렸습니다. 참 그날 경험한 그 용서가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50년 후에 저희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후 그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저와 제 형제들은 허브의 뒷마당에서 모닥불을 펴놓고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형제 중에 한 명이 그날 그 헛간이 탄 그날의 일을 얘기하게 됐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닥불에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허브는 "이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한 것으로 아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한 측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참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날 제 동생 허브가 한 것보다 더 많은 잘못을 우리가 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우리의 그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나무에, 그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못 박아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나의 죄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게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때문에' 우리 주님이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제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참으로 나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저의 구원을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품에 안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나의 죄는 모두 깊은 바닷속에 던져 넣으셨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다시 꺼내서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참으로 값없이, 참으로 기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우리는 오늘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회개의 진정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회개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시작했으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따라가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4. 바로 이 슬픔으로 말미암아, 이 죄를 깨달은 그 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간절하게 하고 그것을 변명하게 하고, 그리고 또한 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결과로 인해서, 그 회개의 결과로 인해서, 그들은 마지막에 ‘큰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구원받았을 때, 참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서 제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집 앞에 현관에 나가서 그 앞에 의자에 앉아서 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앞에 그 정원의 앞마당에 심겨져 있는 그 많은 나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그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보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구원받고 나서 본 그 하늘과 그 모습은 참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다.’라고 속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변화됐기 때문입니다. 구원으로 인해서 기쁨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이킬 때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큰 기쁨을 4절부터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7절에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도 "내가 지금 기뻐함은" 계속해서 기쁨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 "내가 지금 기뻐하면 너희를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그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으로 기뻐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도가 돌아오므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도가 돌아왔을 때 왜 그는 더욱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디도 그 자신이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은 다른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16절에 그는 이렇게 말을 맺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고후 7:16,)
그리스도인이라면 참으로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있을 때 그는 진정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들을, 교회의 원리들을 지키고 행하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더욱 가까이 있도록 우리는 주의 깊게 행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행하는 가운데서, 그 말씀을 따라 행하고 있는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할 때에 그 주위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영향을 받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도 참 인상을 찌푸리고 또한 무거운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러면, 그 주위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영향을 받고 또 그들도 무거운 표정으로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모임의 장로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그 다른 성도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장로들이 그 모임에서 여러 가지 져야 되는 그 짐들 가운데서 그들의 마음이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나 그들을 눌러서 그들이 기뻐하지 않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는 그런 어려움들,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도 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기쁨을 붙잡고 있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 어두운 데 비치는 빛과 같아서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들에게 기쁨을 끼치는 영향을 줄 것입니다.
제가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짧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수년 전에 아주 큰 수양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요일 밤에 복음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회가 마치고 성도님들이 돌아가는 가운데 한 젊은 청년이 그 집회에서 말씀을 듣고 구원받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참 긍정적으로 기뻐하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다 떠났지만 이제 몇몇의 장로 형제님들이 남아서 그 가운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저보다도 훨씬 더 나이가 드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지역에서 수십 년간 봉사하신 분들입니다. 저는 그 장로 형제님들에게 그 젊은 청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금방 그가 구원받았다고 이렇게 고백하였다."라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한 장로 형제님이 다른 장로 형제님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기쁜 날이라는 찬송을 부르기에 참으로 좋은 날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 청년이 고백한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아닌 게 드러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뻐하고 있습시다." 그분들은 그 청년이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가정하는 잘못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참 이분들은 기쁨을 놓쳐버린 그 나이 드신 분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참 우리 모두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 같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성도들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기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쁨이 넘치는 삶이라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오전에 우리는 만찬 예배에서도 젊은 성도님들이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 가운데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말하는 그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그들의 그 마음의 열망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셨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와 같은 회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 전체가 이와 같은 회개를 해야 되는 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회자 형제님께 시간을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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