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 처음사랑 >

박이레 2021. 7. 23. 22:17

강사 : 강성찬 형제님

 

< 처음사랑 >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4-5, 개역한글)

 

오늘 두차례의 말씀동안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시아의 일곱교회에 친히 편지를 보내십니다. 그 중에서 첫번째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칭찬할것이 많았습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2:2-3, 개역한글)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칭찬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임의 집회를 성실하게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성경의 이해도 있고 분별도 있어서 거짓 교사를 분별해 낼수 있었습니다. 또한 게으르지도 않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심각하게 경고하시며 책망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촛대를 옮길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지역에서 이 지역교회를 없어지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심각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다른 교회에 보낸 서신서를 볼때에 주님께서 많은 비슷한 경고를 하시지만, <네 촞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경고하신 교회는 에베소 교회 하나입니다.

이를 볼때 처음 사랑을 버린다는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처럼 정기 집회를 잘 모일수 있고, 말씀 분별을 잘 해 나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처음 사랑을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습관대로 해왔으니 그대로 하는 형식만이 남은 실행이 될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맨 처음 지역교회에 보내는 서신서에서 이것을 경고하시면서 강하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없이 이러한 일을 부지런히 한다면 그것이 좋은것일찌라도 단지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게 될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성경에서 많이 언급되는 지역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에베소 교회의 시작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중반즈음에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돌보았는지 보게 됩니다. 또한 디모데전후서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보내어 어떻게 행할지를 격려하는 서신을 씁니다. 

 

에베소서는 사랑을 많이 격려하는 서신서 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3:17, 개역한글)



여기서는 우리의 견고한 터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그 터가 견고해지고 굳어집닌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3:18, 개역한글)

 

이 사랑은 우리가 배우는 목적과 주제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가 더 알고자 하는 성경의 주제 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2, 개역한글)

 

또한 이 사랑이 모임의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4:16, 개역한글)

 

지역교회에서 우리가 은사를 행할때에 이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서 이 은사를 실행합니다. 그럴때에 사랑 가운데서 그 몸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엡6:24, 개역한글)

 

에베소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지역교회의 실행 가운데서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촞대를 옮기겠다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받게 됩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알고자하는 주제이며 교회진리의 실행의 원동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랑을 어떻게 회복할수 있을까요?

 

사랑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스스로 회복할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잘못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적인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랑은 우리의 의지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여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경고할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1. 생각하고 2. 회개하라. 그리고 3.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고 행실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처음 행위는 무엇일까요?

 

에베소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사도행전 19장에 나와있습니다.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19:1-7, 개역한글)

 

그들 가운데 있었던 처음 행위를 살펴보고자 하는것은 성령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을때 어떤 제자들을 만납니다. '제자'들이라 했을때 그들에게는 어떤 경건한 행동들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들은 침례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기를 "그들은 먹지도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밖에서 보았을때 경건해 보였을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보기에 그들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제자들과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이 주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그들이 단지 구약의 내용들만을 알고 있다는 것을 파악합니다.

그리고 바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주 예수님을 가르치고 제자들이 주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습니다. 그들 가운데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나타남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에베소 지역에 있었던 첫번째 사건입니다.

그리고 7절에 <모두 열두사람쯤 되니라> 이 부분을 볼때에 그들이 에베소 교회의 주축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과 다르게 주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받았고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행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이 분명하게 드러납니까?

 

나중에 더해진 에베소 교회의 열두명의 성도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약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시대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을것 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행위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특징 지어질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확신 시켜줍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5:5, 개역한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느끼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성경은 성령의 열매중 첫번째로 사랑을 말씀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성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일수 있습니다.

 

지역모임과 개인이 이 사랑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또한 에베소서를 보면 성령은 인치시고 보증이 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주님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시며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몸에 거하시며 우리 몸을 전으로 삼으시며 우리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지역모임을 인도하십니다.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13:2-3, 개역한글)

 

성령께서 두 사람을 세우시는것을 교회는 순종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행15:28, 개역한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 거짓 가르침이 생겼습니다.

그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교회를 가르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 개역한글)

 

성령께서는 또한 지역모임에 필요한 일군을 세우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7, 개역한글)

 

성령께서는 각 지역모임에 은사를 주시고 은사를 따라 섬기게 하십니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엡5:18-20, 개역한글)

 

성령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인도하십니다.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지역모임을 또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할때에 처음 행위를 회복하는 것이고 사랑으로 지역모임 안에서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근심하게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개역한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은 그 이름에서부터 알수 있듯이 거룩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인격이 없는 단지 힘이나 능력이 아니고 거룩하신 성품을 가진 인격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을때에 이 거룩하신 인격은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우리를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엡4:31, 개역한글)

 

성령님의 성품과 맞지 않는 행위들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두번째로 데살로니가 5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5:19, 개역한글)

 

여기서 성령을 불과 같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불을 꺼트리는 것처럼 소멸치 말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단지 지적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인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서 그런 성령을 불과같이 끄게 할수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 개역한글)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24:33, 개역한글)

 

아직 이때는 성령님께서 내려오신 때가 아니지만 동일한 보혜사이신 에수 그리스도와 교제한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에게 일어난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인해서 마음이 뜨겁게 될때에 우리는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순종함으로 성령을 소명치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불꽃을 불러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불을 소멸시키나요? 마음으로는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즉시로 행하는것, 순종하는것이 성령을 소멸치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우리 지역모임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이 그 지역모임에서 사역을 인도하실때 따르고 말씀을 알게 하시며, 은사를 주실때에 은사로 섬깁니다. 또한 성령님은 예배를 인도하심을 배웠습니다. 



우리 모임 가운데서 계속해서 그러한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에베소 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살피겠습니다.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19:8-10, 개역한글)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처음 행위는 이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이 일에 전심 전력했습니다. 이것이 처음 행위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파할때 항상 그렇듯이 그것을 비방하는 무리가 생겨 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두란노 서원'은 두란노 학교 입니다. 사도바울은 신학교를 세운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학교 장소로서 두란노 서원을 사용 했습니다.

 

우리는 이 초창기에 얼마나 말씀을 배우는데 집중했는지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제자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들은 방해가 있을때도 말씀을 가르치는것이 매우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날마다 행했습니다.

어떠한 일을 날마다 행하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먹고살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날마다 했습니다. 그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의 소리, 그리스의 철학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듣는것의 중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38-42, 개역한글)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라고 말씀 합니다. '주의 발'은 성경에 여러번 나온 장소입니다. 주의 발은 주님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장소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에 중요한것은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인식하는것이 중요 합니다.

그럴때에 우리가 바르게 주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습니다. 또한 이 '주의 발'은 사랑을 나타내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한 여자가 눈물로써 주님의 발앞에서 주님의 발을 씻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은 말씀을 압니다.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탕감을 받은자의 자세 입니다.

 

또한 주의 발은 말씀을 순종하는 장소입니다. 거라사의 광인이, 주님께서 그의 귀신을 쫓아내셨을때에 그가 옷을 입고 주의발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따라가기를 구하였으나,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그의 동네에서 전하라고 했을때 그는 그렇게 행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발은 행위(순종)의 장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며 우리를 사랑하신 이의 말씀으로 들으며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41-42, 개역한글)

 

마르다는 많은일로 마음이 분주하고 근심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꼐서는 한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택할것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편을 택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좋은편'은 나쁜것과 좋은것이 있는데 좋은편을 택한것이 아니라, 좋은것과 더 좋은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더 좋은것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접대하는것도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것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것이 더 좋은것이라고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이것을 놓치게 됩니다.

이러한 우선순위가 분명하게 되어 있지 않으면 일반적인 좋은것을 하다가 시간을 빼앗기고 더 좋은것을 놓치게 됩니다. 세상에서 이러한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좋은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그것을 분명하게 '택하였다'라고 말씀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택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듣겠다. 보겠다'라는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바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듣겠다는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반드시 듣겠다는 선택을 하고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날마나 말씀을 배웠습니다.

이 일을 가장 우선순위로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씀을 주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처음 교회를 세웠을때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마음에 뜨거움을 주셨을때 그것을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권위 아래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러한것이 대전중구모임에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에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