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8일 일요일 오후
강사 : 강성찬 형제님
< 열므나 비유_성장 >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눅19:11-27, 개역한글)
여기 열므나 비유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생각해보고자 하는것은, 주님께서 언제 어디서 열므나에 대해서 말씀하셨는지 하는것입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눅19:11, 개역한글)
<이 말씀을 듣고 있을때에> 이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하실때 입니다. 삭개오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는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구원 이후에 비유의 뜻을 들어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열므나의 비유를 하신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두번째로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면 이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그 죽음을 보고 이스라엘의 소망이 끝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비유로 주님의 죽으심이 소망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처럼, 한 귀인이, 고위한 분이 왕위를 받으려고 먼나라에 간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인이 왕위를 받아 다시 돌아올것입니다.
이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말씀하시며 항상 부활을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9:22, 개역한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오해하지 않도록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눅9:31, 개역한글)
그리고 주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때에 주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 됩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께서 별세할것을 말씀 했습니다. 별세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별세라는 단어를 여러분이 찾아보신다면, 이 단어는 '떠난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엑소더스'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기의 이름입니다. 출애굽을 상징적으로 말해 줍니다.
영광 가운데서 대화하고 있는 주제가 별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냥 죽는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이끌어 내신것과 같이, 죄에 종된 우리를 이끌어 죄에서 건지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므나의 비유는 첫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실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이제 더이상 원하는것이 없다. 좋다." 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것을 끝으로 성장하지 않고 멈추어 버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할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열므나의 비유처럼,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주님께서 맏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일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고귀한 귀인은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가는데, 왜 종들을 불러서 왜 장사하도록 하였을까요?
그당시 한 므나의 가치는 세달 열심히 일해서 버는 정도의 금액입니다. 이는 적은돈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위를 받아오는 왕의 입장에서는 '그런 돈이 필요해서 장사를 맏긴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곧 알수 있습니다.
나중에 주인은 종들에게 상급을 나누어주는데 열 므나를 모은 종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줍니다. 왕에게 필요한것은 돈이 아니라 함께 다스릴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귀인은 종들에게 장사를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이 듭니다.
귀은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있다가 왕위를 받아서 온후에 바로 종들에게 고을 다스릴 권세를 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왕위를 받으러 간 사이 장사를 시킨 이유는 그 장사를 통해서 그 종들이 성장하기를 바랐기 떄문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달란트의 비유가 있습니다. 모두가 잘 아시기에 찾지 않겠습니다만, 비슷한 이 비유가 다른점이 있습니다.
달란트에서는 <각각 그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나누어 줍니다. 그 재능은 구원받은 후 주님께서는 주시는 '은사' 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각각 받는 달란트의 개수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받은 그 은사대로 섬겨야 합니다. 은사에 관련해서는 받은 믿음의 분량대로 충성스럽게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받는 칭찬이 같습니다.
그러나 므나는 모든사람에게 동일하게 한개씩 주어집니다.곧,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은 후에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가지고 그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땅 가운데서 주님을 많이 닮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조금 덜 닮습니다.
그래서 므나의 비유에서는 이익의 배수가 달란트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5배, 10배의 이익을 남깁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는 한계가 없는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닮은만큼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상급이 주님을 닮는 것이라면 그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것인가에 대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귀인은 종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장사를 통해서 열고을을 다스릴만한 성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주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 믿음의 성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후에 무당을 찾아갑니다.
이것은 합당한 인격의 성숙함을 갖추지 못한자가 권세를 얻었을때의 비극입니다.
사람들은 권세에 올라가는것이 힘들다고 하지만 사실, 그 자리에 올라 그 권세를 누리는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합당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1:11, 개역한글)
이 말씀은 조금 특이합니다.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입니다.
넉넉히 들어갑니다. 세상에서 '넉넉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대학교에 합격이 되거나 안되거나이며 취직이 되거나 안되거나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가 주님을 닮아서 그 나라에 들어감이 넉넉히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전후서에서 성도들의 자라가는 것을 많이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구원받은 자들이 갓난아기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순전히 자라가는것을 말씀합니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15:41, 개역한글)
부활에 대해서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볼때, 그것은 점점히 박힌 빛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별을 자세히 보면 제각각 다른 밝기와 크기를 볼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다 다른것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는것은 수석과 일반 합격자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자는 주님을 닮아서 누구보다도 다른 성도를 위하고 섬길수 있는 자입니다.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5-7, 개역한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있는 보배로운 믿음에서 시작해서 덕에, 지식을, 절제를, 인내를 ,경건을,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
한므나는 작은 밑천입니다. 그리고 장사해서 작은 이익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큰 투자를 시작하고 조금더 큰 이익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장사의 원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작은 믿음을 자기고 있습니다. 그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합니다. 덕은 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장입니다.
그리고 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지식이 더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일을 믿음으로 행할 때, 그것은 행하는것에만 가치가 있는것이 아니고 참된 지식 가운데서 행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에 절제를 더해야 합니다.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지식은 옳은 것이고 참된 것이기에 사람들이 마구 사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지식일찌라도 그것은 적절한 절제와 자기 통제가운데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절제는 자신의 내적인 것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인내를 더해야 합니다. 인내는 외적인 어려움, 고난을 말합니다.
내적인 어려움, 외적인 어려움을 견디는것이 더욱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인내에 경건을 더해야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의 합당한 태도입니다.
인내는 참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분을 보이는것같이 참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할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것입니다.
또한 그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 주변 성도에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공급해야 하는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데 있어, 성장의 동기가 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벧후3:18, 개역한글)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자라가야 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자식에서 자라가라'라고 말합니다.
열므나의 비유에서 우리 주님을 '귀인'이라는 명칭을 씁니다. 참으로 합당한 말씀입니다.
귀인은 '신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고 존귀히 여기는 사람이 신사입니다.
우리 주님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는 분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왕위를 가지고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마음은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가 새몸을 입고 영광 가운데서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고 같이 다스리는 때가 올것입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열므나의 비유에서 귀인이 왕이 되는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종들을 장사를 합니다. 분명히 반대와 훼방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가 되기를 원치않는 세상의 반대를 받으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반대는 성장의 재료가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한 종은 한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사할 필요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에게 뭐라고 하시나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제일 방해가 되는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정도면 됬다. 이 정도를 유지하자.'
이것이 한므나를 가진자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주님께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생명은 항상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생명은 죽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빼앗깁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4:1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대로 유지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디모데가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귀인이 종들에게 바라는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은후에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야 합니다. 대전 중구모임의 모든 성도님들에게 이러한 믿음의 진보가 계속해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강성찬 형제님 > 성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처음사랑 > (0) | 2021.07.23 |
---|---|
< 모세를 인도 하시는 하나님 > (0) | 2021.07.23 |
< 벧엘_하나님의 집 > (0) | 2021.07.23 |
< 본이 되는 사람 > (0) | 2021.07.19 |
< 그리스도인의 성장 > (0) | 2021.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