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 처음 행위_주를 사랑하는자가 받는 축복 >

박이레 2021. 7. 23. 22:18

2018년 7월 22일 일요일 오후

강사 : 강성찬 형제님

 

 

< 처음 행위_주를 사랑하는자가 받는 축복 >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19:11-20, 개역한글)



에베소에 있었던 사도행전 19장에 있었던 세번째 기록을 보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이 사도의 능력으로 여러가지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때당시 사도가 행했던 기적의 의미는 그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임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안한 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떤(마술하는) 유대인들이 그 능력을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회복은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원했습니다. 이 능력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주문처럼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그러자 악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고 말하고 그들에게 뛰어올라 그들을 이기게 됩니다.

사도행전 19장에 있었던 여러가지 사건들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영적인 가운데 있나요?



첫번째 에베소 교회에 보낸 주님의 말씀을 보며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모이고 있는가는 생각하게 됩니다.

두번째 회당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형식으로는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바울이 말씀을 전할때에 거부하는것을 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있나요?

세번째 마술하는 사람들과 제사장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귀들린 사람에게 제압당해 망신을 당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요, 아니면 단지 하나님의 능력과 형통하게 되기만을 바라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가진 존재인가요? 하나님의 이름만을 가진자들은 세상에서 망신을 당하게 될것입니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19:17, 개역한글)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필요한것에만 능력을 주시는 부리는 종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두려워 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만을 알고 하나님을 조종해서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알고 두려워 해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때에 우리에게는 엄중한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행19:18, 개역한글)



이일은 높으신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해진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지 안다면 우리는 항상 자백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위대하심을 모를때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생각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못 인식하고 잘못 대하는것 대하여 얼마나 자복하였는가?"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행19:19, 개역한글)



참된 믿음은 이 세상의 지혜와 방법과 하나님의 지혜를 동시에 추구하지 않습니다.



은오만이나 되는, 세상의 지혜와 처세술이 담긴 책을 다 불사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처음 행위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19:20, 개역한글)



그랬을때에 주의 말씀이 참으로 힘을 얻는것입니다.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하고 지역교회가 더욱 견고해져가는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네번째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길기 때문에 몇군데 나누어 읽어보겠습니다.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 뿐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행19:23-26, 개역한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행19:28, 개역한글)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행19:32, 개역한글)



34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시 동안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행19:34-35, 개역한글)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찌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행19:38-41, 개역한글)



마지막 네번째 사건은 에베소에 적지않은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에베소 지역에는 큰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의 모형을 은으로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업이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업의 우두머리격 되는 데메드리오라 하는 사람이 사람들을 조장하여 소동을 벌인 것입니다.



흥미로운것은 이 소동을 묘사하는데 '모임=모인무리'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민회> 또한 모임이라는 단어 입니다. 이것은 '어셈블리(assembly)'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모임'이라는 단어를 여기 나온 소동으로 모인 무리와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모임은 어떤 무리인가요?

여기에 나온대로 소동하는 사건의 무리입니까, 아니면 정식 집회의 모임입니까?




40,41절을 보면 그들이 모인것에 대해 불법집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흩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회개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촟대를 옮기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불법집회는 흩어지게 되고 없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나온 모인무리는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소동하여 모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모이게 하신, 부르신 분은 누구입니까?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1:9, 개역한글)



이 지역교회는 부르신 분의 성격을 나타내야 합니다.

에베소에 있었던 모인무리의 성격은 데메드리오의 성격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왜 이 소동을 불러내었습니까? 그의 큰 금전적인 이익이 손실이 날까해서입니다.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이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행19:27, 개역한글)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서 우리 모임을 불러내셨나요?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개역한글)



이 지역모임은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 입니다. 지역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전하기 위한 기둥으로 부르셨고 진리를 보전하기위한 터로 부르셨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3:16, 개역한글)



데메드리오가 부른 소동은 자기의 이익을 위한것이었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지역모임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 입니다.

나는 지역모임에 모일때에 무엇을 위해서 모이고 있는가요?




하나님을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모이고 있나요? 그분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얻는것을 위해서 모입니다. 그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평안을 얻는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지역교회의 우선적인 목적은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지역교회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데메드리오가 불러낸 소동은 말 그대로 소동입니다. 그들은 분이 가득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육신적인 감정이 자극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소동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행19:32, 개역한글)



그들은 분란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말과 저말을 했습니다. 또한 왜 모였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역교회의 성격은 아주 다릅니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딛2:6, 개역한글)



근신이 지역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근신은 침착하고 이성적인 바른사고 방식을 말합니다. 건전한 분별을 말합니다.

지역교회의 인도자의 자격에 대해서도 '근신'을 말합니다. 지역교회의 구성자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근신'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분별하고 지역교회를 분별하고 평온한 마음 가운데서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33, 개역한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14:40, 개역한글)



지역교회에서는 질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인무리들은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모인 무리와 지역교회의 차이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것은 데메드리오가 불러모은 소동은 불법집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고 모여서는 안되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승인이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20, 개역한글)



주님께서 지역모임 가운데 임재하실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승인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네번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지역모임의 성격을 돌아보게 됩니다.

교회를 모이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지역모임은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 모입니다. 그리고 지역모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질서있게 순종합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승인하시고 임재해 계십니다.



이것이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지역모임의 주된 목적에 대해서 하나님께 이익을 드리는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추가적으로 하나의 말씀을 더 보고자 합니다.



5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신12:5-7, 개역한글)



여기 구약에서도 동일하게 아무곳에나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거하신 한곳에 나아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신12:7, 개역한글)




성경의 원리는 항상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우리가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지역모임에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처음행위가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남은시간에 이것을 살피고자 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1:8, 개역한글)



여기 사랑한다는 것은 현재형 시제로서 계속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이 탕감함을 받은자로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것이 당연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개역한글)



이렇게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에 받을 상급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지금에도 받을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가운데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부활하여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주님과 교제하는것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즐거움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계신것과 예배하신것을 살피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개역한글)



여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모든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것을 예비하신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든지 그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는 요셉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억울하게 강간하고자 했다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렇게 불행한 일을 겪는다면 그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불신과 악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로우며 품성적으로 두드러졌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요셉은 어떻게 그렇게 행할수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협력하여 의를 이루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요셉입니다.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창40:5-6, 개역한글)



옥에 갇힌중에 애굽왕의 관원 두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다른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른사람의 얼굴빛을 살피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관대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창40:8, 개역한글)



제가 만일 그런일을 겪었다면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렸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여전히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41:16, 개역한글)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요셉은 어려움 가운데서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르게 행할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자에게 협력하여 의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아는 자의 자세입니다.

또한 이것이 주 예수를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2:9, 개역한글)




두번째로 하나님이 예비하신것의 특징이 나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가치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알고 바라며 고대합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하는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나요? 이는 사람이 더듬어서 알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예비하신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알게 하십니다.



또한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시25:14, 개역한글)



<여호와의 친밀함> 이는 다른성경에서는 <여호와의 비밀>이라고 번역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더욱 그분의 말씀을 알게 하십니다.



주님의 발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알게하셨던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더욱 말씀을 알게 하십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1:12, 개역한글)




세번째로 주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예비하신것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들은 시험을 참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시험을 받는 자들의 동기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시험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힘들고 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험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예로 말씀드리자면 학교에서 완벽하게 공부한 과목이 있다면 그 과목의 시험을 쳐서 100점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험을 받고자 합니다. 시험을 통해서 분명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것이 시험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받아들입니다.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리아산으로 출발합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시험을 통해서 나타나는것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견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것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성경에는 여러가지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장로의 직분을 잘 이루어낸 사람에게 주시는것이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장이며 주의 나타나심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리고 시험을 참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많은 인정을 받기위한 그런 과정의 연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시험과 면접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100점 받아서 잘 했다고 인정을 받았을때에 생각만큼 그 마음에 만족이 없게 됩니다. 받고나면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허무하지 않은 인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죽음의 반대인 생명의 면류관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할때에 우리 마음은 허무하지 않을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차게 될것입니다.




시험을 참음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것을 나타내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2:5,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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