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 벧엘_하나님의 집 >

박이레 2021. 7. 23. 22:11

2018년 1월 28일 일요일 오전

강사 : 강성찬 형제님

< 벧엘_하나님의 집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히11:21, 개역한글)

히브리서 11장에는 야곱의 믿음을 한구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죽을때에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믿음으로 축복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때, 야곱은 차자인 에브라임을 그의 오른손에 두고 장자로서 축복합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야곱의 생애의 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집에서 나와 먼 외삼촌의 집에 가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기도 하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잃기도 하고 다시 찾기도 하고 애굽에 가서 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러한 인생에서 그의 인격이 달라지는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야곱만큼 그의 인격이 달라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끝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시작에서는 그는 그의 꾀로 하나님의 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야곱은 항상 자신의 힘으로, 계획으로 하나님의 복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인생의 말년에 믿음으로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축복한 것입니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이 지팡이를 생각할 때, 그가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하여 환도뼈가 어긋나 지팡이의 힘으로 절뚝거리며 걸었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는 이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때 하나님을 의지한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의 인격을 바꾼것일까요?

그의 젊었을 적의 인격을 살펴 보시겠습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0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창27:18-20, 개역한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네가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는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태어날때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습니다. 이 말의 뜻 중에는 '발꿈치를 잡아 넘어뜨린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그의 이름을 말할 때 "그의 이름이 야곱이니이다"라고 한것입니다.

야곱은 처음에 거짓말로 시작합니다.
이삭이 먹은 그 별미는 야곱이 사냥한 고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리브가가 양떼 중에서 잡아서 요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그는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거짓말을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한번 시작하면 그 거짓말이 계속 이어져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데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32:22-28, 개역한글)

야곱은 두려움 중에 있을때 얍복강가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씨름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계속해서 붇잡고 복을 내려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야곱은 솔직하게 "야곱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기가 '속이는 자'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기신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이기시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기서 벗어나서 이제 솔직하게 자기의 이름을 얘기하고 하나님이 이기시는자로 바뀌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바뀌게 되었을까요?

그 사이에는 벧엘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그 형 에서에게서 도망나와 외삼촌 라반에게 가던 길 중에 있습니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 입니다.
벧엘의 뜻은 오늘날 지역모임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입니다.

지역모임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고 변화시켜 갑니다. 우리는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이를 알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목표는 단지 죄인이 지옥에 가지않고 하늘나라에 가는것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목표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닮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맏아들로써 주님을 닮은 우리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곳에서 영광을 받으시는것이 하나님의 목표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역모임에서 주님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1:8-9,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 서신을 보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자로 끝까지 견고케하실것을 말씀합니다.
각 사람들이 아들의 형상을 닮게하실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도구로서 9절을 말씀합니다.
지역교회에 대해서 '그의 아들의 교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때, 지역교회를 다른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는것으로만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성도들만의 교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견고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그 아들에 대한 교제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아들의 교제>

우리는 교제 가운데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신성, 신성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영광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거짓된 영광이 아니고, 사람들의 육신에 속한 죄된 본성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성을 지역교회에서 보고 또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아들, 예수의 교제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땅 가운데서 사람으로 겸손히 낮아지신 주님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는 자신을 높이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교회안에서는 주님의 낮아자심과 온유함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고난후에 받는 영광을 우리가 봅니다. 지역교회의 교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교제 입니다.

주님의 권위에 순종하며 우리는 교제를 누리고 주님을 닮아가는자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것이 없는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2:41-42, 개역한글)

지역교회에서는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을떼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씁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 이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구원받고 나서 침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따로따로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더해지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지역교회에 더해지는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교회에 더해지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도 이를 볼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고 상징적인 것이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28:10-22, 개역한글)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벧엘은 중심이 됩니다.
그가 항상 어려운 순간에 벧엘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가 에서의 죽음의 위협을 떠나 길을 갈때 벧엘에서 멈추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벧엘은 쉬는 장소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집' 지역교회는 성도들이 쉬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사람들의 지혜와 경쟁 가운데서 지역교회 교제 안에 나아왔을때, 그 아들의 교제안에서 마음이 쉬고 다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가 세겜 사람들 가운데서 어려움을 겪을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회복의 장소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에서 우리는 쉼을 얻고 회복 됩니다.
지역교회에 성도님들이 나와서 냉랭해진 마음이, 실족한 마음이 쉼을 얻고 다시 힘을 얻어가는 것을 봅니다.

야곱은 나중에 그가 죽을때에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언급할때, <벧엘에서 나타난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지역교회는 쉬며, 회복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얻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그 사닥다리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이처럼 이 지역교회는 하늘과 연결된 곳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가르쳐지는 것입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창28:14, 개역한글)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다시 야곱에게 가르치십니다.
이 지역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28:16, 개역한글)

이 지역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역교회에서 얻을수 있는 모든 복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창28:17, 개역한글)

그리고 17절에서는 우리가 지역교회에서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이요> '전'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두렵도다> 이와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모임에 나올때마다 주님을 경외하는 합당한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28:20-22, 개역한글)

이 지역교회에 모이게 될때, 우리는 더욱 기쁜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야곱의 생애 중 지역교회의 교제 가운데 있는 특징들 몇가지를 보겠습니다.

1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웠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물을 양떼에게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구를 덮었다가
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전히 우물 아구 그 자리에 돌을 덮더라
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형제여 어디로서뇨 그들이 가로되 하란에서로라
(창29:1-4, 개역한글)

7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8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창29:7-8, 개역한글)

야곱은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 동방 하란으로 갑니다.
가서보니 그곳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이 양을 치는 방식이 자기가 하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참견합니다.
그러나 그 땅의 사람들은 그렇게 할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이 하는 방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상징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개역한글)

여기 지역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행해야 할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집을 생각할때, 집은 그냥 편하고 내 마음대로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집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집은 질서가 있습니다.
가장의 권위가 있고 질서에 따라서 그 권속들이, 아내와 자식이 질서에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에도 권위가 있는것처럼 가정에서도 권위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집에서도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행동해야 할 행동규범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규칙과 다릅니다.

야곱은 각 사람들의 필요를 중요시 했습니다. 그냥 오는대로 다 물을 먹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란의 규칙은 '모든 양떼가 모였을때' 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돌을 옮겼을때' 먹을수 있습니다. 책임이 있는 사람이 우물아구를 열고 덮는 것입니다.

우물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우물을 통해 하나님의 집에서 가르쳐지는 말씀을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있어서 중요한것이 아내 입니다.
그의 아내 레아와 라헬이 그의 인생에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16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창29:16-18, 개역한글)

우리는 교제가 무엇인지 이 아내들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지역교회는 세상의 교제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교제는 눈에 좋아 보이는대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야곱도 처음에는 그렇게 외모를 따라서 곱고 아리따운 라헬을 교제하게 됩니다.

그러나 놀라운것은 창세기 마지막에 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창49:31, 개역한글)

이것이 야곱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는 이제 진정한 교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레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우리의 구속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십니다.
그는 이제 눈에 보이는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이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시119:63, 개역한글)

누가 우리의 동무인지, 교제하는 사람인지 말합니다. 이것이 지역교회의 교제 입니다.

세번째로, '떡을 떼며'라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의식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기념해야 합니다. 떡을 떼는것은 주님을 기념하고 주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생애에서 그의 아들들이 중요합니다.

32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창29:32-35, 개역한글)

성경에서 그 이름의 뜻이 중요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 나와있는 이 아들의 이름의 뜻을 성경은 직접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교회 가운데로 나오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교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르우벤> '보라 아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을 보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시므온> '들으셨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그대로 순종하시는 분입니다.

<레위> '연합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참된 연합을 가져오셨습니다.

<유다> '찬송하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어 찬송을 드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지역교회에서 하는것은 '기도'입니다.
얍복강가에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만나서 밤새도록 씨름한 것은 기도를 상징입니다.
지역교회의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홀로 기도한 것은 지역교회의 기도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벧엘, 이 상징적인 지역교회가 야곱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시대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받게 하시고 지역교회에 더하셔서 말씀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떡을떼고,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합당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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